▒ 가정선생글 ▒

경주는 땅은 넓고 민가는 조밀하여, 물산은 풍부하고 (경상도 경주)-李穀-

천하한량 2007. 3. 3. 19:24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조령(鳥嶺)의 남쪽은 본래부터 이름난 곳과 경치 좋은 땅이 많다고 일컫는다. 거정은 젊을 때에 사마자장(司馬子長)의 뜻이 있어 영(嶺)을 넘어 상주(尙州)에 들르고, 상주를 거쳐 선산(善山)에 갔으며, 화산(花山)을 경유하여 성주(星州)에 이르고, 김해(金海)ㆍ진주(晉州)를 지나서 함안(咸安)과 밀양(密陽)을 찾은 뒤에 경주에 도착하였다.

 

경주는 곧 예전의 계림(鷄林)으로서 신라의 수도였던 곳이다. 산수는 빼어나고 풍경은 기절(奇絶)한데, 옛 어진 이들의 유적이 많아서 멀리 노니는 사람의 질탕(跌宕)한 기운을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객관이 누추하고 좁은 것이다. 비록 의풍루가 있으나 사면의 처마가 낮게 처져 시루[甑] 속에 앉은 것 같아서 사람을 숨막히게 하였다. 임오년 겨울에 봉명사신이 되어 다시 오니 부윤 김담(金淡)공이 나를 맞아 누에 올라 조용히 술 마시며 시를 읊었다. 내가 말하기를, ‘등왕각(?王閣)은 천하에 이름난 명승으로서 사해(四海)의 호걸(豪傑), 문인(聞人), 재사(才士)들이 등림(登臨)하여 조망하는 자가 매우 많았지만, 왕중승(王中丞)을 만나 비로소 중수되고 한퇴지(韓退之)를 만나 기(記)가 지어졌던 것이다. 이 누를 중수하고 기를 쓰는 일은 과연 누가 하게 될 것일까.’ 하니, 김부윤이 빙그레 웃었다. 두어 해를 지난 뒤에 객관의 집이 중수되고 통판(通判) 신중린(辛仲?)이 나에게 기를 지으라고 하므로 대략 전말을 써서 돌려 보냈었다. 얼마 안 되어 들으니 의풍루가 또 불에 탔다 한다. 불탄 뒤에 새로 짓지 못한 지가 2년이 되었다. 정해년 봄에 이후(李侯) 염의(念義)가 부윤으로 와서 정사는 잘 닦아지고 폐해는 제거되었다. 이에 누를 새로 지을 것을 계획하고 곧 누의 옛터에다가 그 규모를 더욱 확대해서 경영하여 세우니, 우뚝 솟아 한 도(道)의 장관(壯觀)이 되었다. 이를 이어 부윤 전동생(田?生)과 통판 유자빈(柳子濱)이 더욱 아름답게 꾸며서 공사가 비로소 완성되자, 거정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사물이 흥하고 폐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이다. 그러나 한번 성하고 한번 쇠하게 되는 것은 또한 시운(時運)에 관계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신라의 시초에는 하늘이 이인(異人)을 내려 보내어, 원시(原始)의 생활을 개화시키고 나라를 세워 임금과 신하가 서로 도와 어질고 후하게 정치하고, 삼성(三姓)이 서로 전하여 거의 천년 만에 마침내 능히 고구려를 평정하고 백제를 병합하여 동방의 땅을 넓게 차지하였다. 이것이 바로 《당사(唐史)》에서 인인(仁人)과 군자(君子)와 시서(詩書)의 나라라고 칭찬한 바로서, 인물의 번화함이 성하였음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경순왕(敬順王)이 국토를 바치고 고려에 항복하기를 오월(吳越)의 전왕(錢王)과 같이 하였으니, 이때부터 이후로는 혹은 주(州)로 되고, 혹은 부(府)로 되며, 혹은 현(縣)으로 되어 연혁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고려가 쇠하자 섬 오랑캐가 침범하여 누관(樓觀)들은 불타버리고, 풍경이 시들고 손상되었던 것이니,

 

 

가정(稼亭) 이 선생의 기를 읽어보면 당시에 변고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성조(聖朝 조선(朝鮮)을 가리킴)에서 천지의 만물이 생육되고 변방이 안정한지 이제 백년이 되었다. 경주는 땅은 넓고 민가는 조밀하여, 물산은 풍부하고 재화(財貨)는 넉넉하여 동남(東南) 부고(府庫)의 제일이 되고, 관원도 또한 인재를 얻어서 일이 폐하거나 실추된 것이 없어서 관각(館閣)과 누대(樓臺) 같은 것조차도 다 일신(一新)하게 되었다. 하늘이 전일(前日)에 아끼던 것은 바로 오늘을 기다린 것이 아닐까. 이제 이 누에는 첨유계극(??棨戟)이 순림(巡臨)하고, 시인묵객이 유람할 때, 난간에 기대서서 옛날과 지금을 생각하며 고도(古都)의 흥폐(興廢)를 느끼고, 시대와 사물의 변천을 살펴서 편안하고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성정(性情)을 쏟아내어 누에 올라 글짓던 옛 사람의 기상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태평시대의 성한 일이며, 물리(物理)의 흥하고 폐하는 기틀이 아니겠는가. 아, 평양(平壤)은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서 산하와 인물의 훌륭함이 경주와 더불어 서로 비슷한데, 목은(牧隱) 선생이 일찍이 평양의 풍월루(風月樓)의 기를 썼더니, 거정이 그 중수기(重修記)를 썼고, 가정(稼亭) 선생이 의풍루의 기를 썼는데, 거정이 또 그 중수기를 쓰게 되었다. 거정처럼 재주 없는 몸으로서 동경(東京)과 서경(西京)의 두 곳에서 이름을 가정ㆍ목은 부자(父子)의 이름을 잇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글이 졸렬하다고 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힘껏 기를 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