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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成均館) 생원 이색(李穡)이 상서하여 일을 말하였다.-안정복-

천하한량 2007. 2. 28. 21:06

(원 순제 지정 12, 1352)

 

○ 성균관(成均館) 생원 이색(李穡)이 상서하여 일을 말하였다.

색은 이곡(李?)의 아들이다.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이미 명성이 있었다. 곡이 원에 벼슬하니 색이 조관(朝官)의 자제(子弟)로 국자감(國子監) 생원(生員)에 보충되어 재학한 지 3년에 학문이 크게 진보하고 성리학(性理學) 서적을 더욱 깊이 연구하였다. 곡이 본국에서 졸하니, 색이 원으로부터 분상(奔喪 타향에 있다가 부모의 임종을 듣고 급히 돌아와 거상(居喪)하는 것)하여 당시 복중(服中)에 있으면서 상서하기를,
“신은 들으니 ‘무사할 때에는 공경(公卿)의 말도 홍모(鴻毛)보다 가볍고 사변이 있은 뒤에는 필부(匹夫)의 말이라도 태산보다 중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필부의 천한 신분으로 위엄을 무릅쓰고 감히 나와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 조종(祖宗)께서 창제하신 제도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전제(田制)가 더욱 심합니다. 호강(豪强)한 자들이 겸병(兼倂)하였으니 ‘까치가 지은 둥우리에 비둘기가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유사(有司)가 비록 공문(公文)에다 주필(朱筆)로 전후(前後)의 주객(主客)을 정하여 놓아도 갑(甲)이 세력이 있는 자이면 을(乙)은 곧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는데, 하물며 공문 주필 또한 물고기 눈이 진주(珍珠)에 섞인 것이 많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전지를 받은 집은 모두 임금의 신하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대신 경작시키기 때문에, 비록 저 사람이 토지를 잃는다고 해도 이 사람은 오히려 얻는 것이니, 초(楚)나라 사람이 잃은 활을 초나라 사람이 얻은 것과 같아서 그래도 가합니다. 그러나 백성이 하늘로 삼는 식량은 오직 전지(田地)에 달려있는데, 한 해가 다하도록 부지런히 움직여도 부모 처자를 봉양하기에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조세(租稅)를 거두는 것이 이미 한 농가에 대해 3~4가에 이르기도 하고 혹 7~8가에 이르기도 하므로 그 조세를 바치기에도 부족하여 또 빚을 내어 바쳐야 하니 어떻게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의 곤궁은 주로 이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그 법을 고치지 않고는 그 폐해를 제거하기 어렵습니다. 쟁탈한 것은 그 원인을 따져서 바로잡고 새로 개간하는 것은 거기에 따라 측량하여, 새로 개간한 땅에는 세를 거두고 지나치게 사여(賜與)하는 토지를 줄인다면 나라 수입이 증가할 것이며, 빼앗은 토지를 바로잡고 경작하는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면 인심이 기뻐할 것인데,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으십니까?
둘째 왜구(倭寇)를 막는 것입니다. 근년에 왜구가 변강(邊疆)을 침략하는데, 신이 아비의 상(喪)을 입느라고 해변 지방에 살면서 초야(草野)의 백성들에게서 들은 것이 많습니다. 지금 계책은 두 가지에 지나지 않으니, 바로 육지에서 지키는 것과 바다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수레는 내를 건널 수 없으며 배는 육지로 갈 수 없으니, 사람의 습성도 이와 같습니다. 지금 평지에 사는 백성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배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정신이 이미 어지러워져서 한번 풍파라도 만나면 좌우로 자빠지고 엎어져서 몸을 움직여 적군과 용맹을 겨루려 해도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육지에서 지키는 것은 평소에 살고 있는 백성을 징발하여 기계를 날카롭게 하고, 요해처(要害處)에 진을 치고 군대의 위용(威容)을 성대하게 하며 봉화(烽火)를 신중히 하여 왜인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안렴사(按廉使)나 군수면 충분히 맡길 수 있는 것이니,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수령을 욕보이고 지공(支供)하는 비용만 허비할 뿐입니다. 해전(海戰)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가 삼면에 바다를 끼고 있어 도서(島嶼) 지방에 사는 백성이 무려 1백만이나 되는데, 배 타고 헤엄치는 것이 그들의 장기(長技)입니다. 그 사람들은 농사나 누에치기를 일삼지 않고 고기를 잡거나 소금을 구워서 이(利)를 얻고 있는데, 근래에는 왜적 때문에 거주지를 떠나 사느라고 이를 잃어버려서 그 원망하는 마음이 육지에 사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어찌 10배에만 그치겠습니까? 그러하니 연해나 강변에서 그들을 불러모으되, 오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준다면 수천의 무리를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기로 그들의 원한에 사무쳤던 적들과 상대해 싸운다면 이기지 못할 자가 있겠습니까? 또 추포사(追捕使)로 거느리게 하여 항상 배 위에 있게 한다면 주군(州郡)과 도성(都城)이 편안해질 것이며, 도적을 패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육지에서 지키는 것은 우리를 견고하게 하고 해전은 저들에게 위엄을 보일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왜구를 막는 가장 중요한 방도입니다.
셋째, 문과 무를 논한다면, 문과 무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나라가 백 년 동안 태평해서 백성이 전쟁을 모르고 만호부(萬戶府)는 황조(皇朝 원을 말한다)에서 세운 것이나 이미 헛숫자만 있고, 여러 위(衛)의 직(職)은 고량 진미(膏粱珍味)를 먹는 부귀한 자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군대도 없습니다. 비록 무를 중히 한다 하나 무를 쓸 실력이 없습니다. 지금 왜구 때문에 중앙과 지방이 소연(騷然)하고 또 중원(中原 중국)에도 도적이 번진다는 소문이 들리니,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한즉 비록 가득 차더라도 넘치지 않으며, 환란을 생각하고 미리 방비하면 무엇이 도모하기가 어렵겠습니까? 구차하게 그대로 폐습을 되풀이하다가 하루아침에 위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대비하시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동쪽에는 일본(日本)이 있고 북쪽에는 여진(女眞)이 있고, 남쪽으로는 강절(江浙 중국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과 통하고, 위로는 천조(天朝)로 가는 길이 있어 서쪽으로 연산(燕山)에 뻗었으니, 강절 지방의 도적이 만일 범선(帆船)을 타고 오거나, 여진인이 남쪽으로 그들의 기병(騎兵)을 몰아온다면 밭 갈던 백성이 그 어느 겨를에 간성(干城)의 병졸이 되겠습니까? 만약 변이 갑자기 발생한다면 사직(社稷)과 군왕(君王)을 부호(扶護)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무과(武科)를 설치해서 숙위(宿衛)하는 군사를 충원하고, 무용(武勇)을 시험하고 기예(技藝)를 익히고 벼슬을 주어 그들의 기백(氣魄)을 진작시킨다면 나라에는 정예(精銳)한 병사가 넉넉할 것이고, 사람들은 등용되는 것을 즐거워할 것입니다.
넷째, 학교를 숭상하는 것입니다. 국학(國學)은 풍속과 교화(敎化)의 근원이며 인재는 곧 정교(政敎)의 근본입니다. 나무를 북돋아 기르지 않으면 근본이 반드시 견고하지 못할 것이며, 물을 준설(濬渫)하지 않으면 그 근원이 반드시 맑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중앙에 성균관과 십이도(十二徒)와 동서 학당(東西學堂)을 세웠고, 지방 주군(州郡)에까지도 각기 학교를 두었으니, 조종(祖宗)께서 유학을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긴 소이(所以)가 깊고 간절합니다. 그러나 지금 글 배우는 무리가 흩어지고 재사(齋舍)가 퇴락한 채 그대로 있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성인(聖人)이 되려고 배웠는데, 요즈음의 배우는 자들은 작록(爵祿)을 구하려 배우므로, 시서(詩書)를 읽고 외는데 도리도 깊이 깨닫지 못하면서 출세하려는 다툼만 치열하여 문장이나 교묘하게 꾸미고 자구(字句) 수식에만 마음을 씀이 지나치니 성정(誠正)의 공(功)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혹 길을 달리하여 문필을 그만두고 무예에 종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혹 늙어도 성취함이 없으면 자기 몸 그르친 것을 탄식하니, 그 중에서 영매(英邁)하고 걸출(傑出)하여 선비의 종장(宗匠)이나 나라의 주석(柱石)이 될 자가 그 몇이나 되겠습니까? 벼슬길에 오르는 자가 반드시 급제하지 않아도 되고, 급제한 사람은 반드시 국학(國學)을 거칠 필요도 없으니, 누가 즐겨 지름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따라가리까? 바라옵건대 명확한 조례(條例)를 내려서 지방에서는 향교(鄕校)로부터 중앙에서는 학당으로부터 그 재능을 상고하여 십이도에 올리면, 십이도에서는 또 모두 상고하여 성균관에 올려서 일정한 기한을 정해 놓고 그 덕(德)과 기예(技藝)를 닦는 과정을 마친 다음 예부(禮部)에 나아가게 해서, 합격자는 예(例)에 따라 관직을 주고, 합격하지 못한 자도 출신(出身)할 계제(階梯)를 주되, 현직에 있으면서 과거를 보려는 자는 제외하고, 그 나머지 국학의 학생이 아니면 시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면 옛날에는 불러도 오지 않던 자들이 이번에는 가라고 해도 가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인재가 배출되어 아무리 써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섯째, 이단(異端)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새로 세우시매 불사(佛寺)와 민가(民家)가 서로 뒤섞여 살더니 중세 이후부터는 그 무리가 더욱 번성하여, 이제는 오교 양종(五敎兩宗)이 이(利)의 소굴이 되어 냇가나 산골짜기에 절이 없는 곳이 없어 백성 중에는 놀고 먹는 자가 많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가슴아프게 여깁니다. 부처는 대성(大聖)이니, 어찌 죽은 부처의 영혼인들 자기 신도(信徒)가 이와 같이 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건대 금지하는 조목을 내리시어 이미 중이 된 자에게는 도첩(度牒)을 주되 도첩이 없는 자는 즉시 군대에 충당하고, 새로 창건된 절을 모조리 철거하되 철거하지 않는 절이 있으면 즉시 수령을 죄주소서. 신은 들으니 전하께서는 불교를 받들어 섬기시는 정성이 더욱 돈독(敦篤)하시다 하니, 그윽이 생각하건대 그 경전(經典) 중에 ‘공덕(功德)을 보시(布施)하는 것이 지경(持經 경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송독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분명히 설(說)하였으며,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귀신을 공경하면서 멀리하라.’ 하였으니 신은 부처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렇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난(亂)이 극하면 다스리기를 생각하는 때를 당하여, 마땅히 현사(賢士)를 기용하는 데에 급급해야 할 것인데 폐백(幣帛) 쓰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마땅히 청정(聽政)하시는 데 부지런해야 할 것인데 정료(庭燎) 를 피우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현능(賢能)한 사람이 어찌 다 등용될 수 있으며 간사한 자가 어찌 다 물러가겠습니까? 한 가지도 정사가 되는 것은 듣지 못하고 공연히 백성의 바라는 마음만 서운하게 하니, 이렇게 하고서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뒷걸음질을 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도모하고 수레의 멍에를 북으로 하고 월(越)로 가려는 것과 같으니, 신은 이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깁니다. 〈주역(周易)〉에 ‘천체(天體)의 운행이 건실하니 군자는 이와 같이 스스로 힘써 쉬지 말 것이다.’ 하였으니, 마음을 수양하는 요점과 정사를 행하는 방법은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하니, 왕은 가납(嘉納)하였으나 시행하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