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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나라에서 자주 본국에 동녀(童女)를 요구해 왔었는데, 이곡이 글을 올려 이를 혁파하게 하였다-동국여지승람-

천하한량 2007. 3. 1. 19:44
이곡(李穀) 충숙왕(忠肅王)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 검열(藝文檢閱)을 지내고, 충숙왕 후원년(後元年)에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드디어 제과(制科)에 올랐다. 앞서 본국 사람은 비록 제과(制科)에 합격하여도 거의가 하열(下列)에 참여했는데, 이곡의 대책(對策)이 크게 독권관(讀券官)의 칭찬을 받아 제이갑(第二甲)에 발탁되고,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되어 중국의 문사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학교를 일으키라는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본국으로 돌아왔다가 얼마 후에 다시 원 나라로 가서 중서성 좌우사 원외랑(中書省左右司員外郞)에 제수되었다. 원 나라에서 자주 본국에 동녀(童女)를 요구해 왔었는데, 이곡이 글을 올려 이를 혁파하게 하였다. 충혜왕(忠惠王) 후 2년에 표문[表]을 받들고 원 나라로 가서 이내 머물러 있다가, 충목왕(忠穆王) 때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누차 벼슬을 옮겨 정당문학 한산군 도첨의찬성사(政堂文學韓山君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자, 이곡이 일찍이 공민왕(恭愍王)을 세울 것을 청한 적이 있었던 관계를 스스로 불안을 느껴 나가서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였는데, 원 나라에서 또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임명하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저술로는 《가정집(稼亭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