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비누를 떼어먹은 월남 이상재 선생

천하한량 2007. 2. 17. 00:22
나라의 어지러움과 백성의 피곤함이 극에 달했던 구한말과
쓰라린 일제 암흑기를 눈물겨운 웃음과 폐부를 찌르는 해학으로
우리의 정신 세계를 이끌어 주던 등불이셨던 선생은
나라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게 되자
뜻 있는 분들이 모두 국외로 망명 길을 떠날 때,
"이 불쌍하고 죄 없는 백성을 버리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하며 스스로 식민지 치하에서 민초와 함께
그 모진 수난을 몸소 겪으셨다.
그렇게 끈질기게 버티시다가
끝내 광복되는 조국도 못 보시고 눈을 감으셨다.

바로 이 월남 선생이 참찬(參贊) 벼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날 당대 제일가는 세도 대신 집에서
지금으로 말하면 조찬회(朝餐會) 같은 것을 한다고
모이라는 전갈이 왔다.
선생을 비롯한 고급 관료 십여명이 아침 일찍 그 집 사랑에 모여들었다.
주인 대감은 그제서야 사랑 마루에 세숫대야를 놓고
막 세수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주인 대감이 당시로서는 희귀한 수입품인
서양비누로 얼굴을 씻는데,
그 주인 얼굴에서 허옇게 일어나는 거품을
모두들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이 주인을 향해 물었다.

"대감님, 사향 냄새가 나는 이 물건이 대체 무엇입니까?"
"응... '석감'이라고도 하고 '사분'이라고도 하는 물건인데,
이것을 물에 풀어서 이렇게 문지르면 얼굴의 때가 말끔히 씻긴다네."

그러자 선생은 대뜸 그 비누를 집어 들고는 좌중을 향해
"이것 참 신기한 물건 이외다. 우리 모두들 이리 와서
이것을 한입씩만 떼어 먹읍시다."
주인 대감이 기겁을 하며
"이 사람아! 그것은 얼굴이나 몸의 때를 씻는 것이지
먹는 것이 아니야!" 했다.
마치 촌놈을 타이르듯이.

그래도 선생은 태연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그 비누를
한 입 뚝 떼어 먹으면서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생은 지금 우리 고관들이
얼굴의 때보다 뱃속, 마음 속에 하도 많은 때가 끼어서
이 시커먼 속 때부터 씻어 내야만 나라가 바로 될 것 같아
그러는 겁니다."
그 촌철살인의 기개있는 한 마디에
그날 주인 대감을 비롯한 여러 좌중은 차마 아무도 웃지 못하였다한다.

고인 물은 언제나 썩기 쉬운 것,
각종 병폐에 찌든 세상이라 더럽다 욕을 하다가도
이따금 찌는듯한 여름날
한 줄기 소낙비 같은 풍자와 해학이 있어
민중은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이다.

나는 썩고 병든 정경을 탓하는 중에도
차라리 월남 이상재 선생같은 인물, 이런 기인,
세상의 소금이 되는 그런 사람이 나오지 않는
오늘날 한국 지성의 풍토가 못내 아쉽고 부끄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