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서재에 불이나 단한권에 책만 들고나가야 한다면 《월남 이상재 : 月南 李商在》를 택하겠다 , (김동길)

천하한량 2007. 2. 13. 05:56
<월남 이상재>한 권의 책-김동길



한 권의 책

김동길

세상에 가장 흔한게 책인 것같고,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자기 집에 책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인 것같다.

서양의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큰 불이 나서 세상의 모든 책이 다 타는데, 그 가운데서 단 한 권의 책만을 가지고 피할 수가 있다면 어느 책을 택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대답하기를《성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도, 타는 불길 속에서 성서 한 권을 가슴에 품고 도망해나오기는 하지만, 일단 안전한 곳에 이르면 그 책을 읽지는 않을 것이고 그냥 모셔 두기만 할 것이다. 이 성서는 좋은 책이라고 하지만 좋은 책이란 으레 시간이 없어서 못 읽는 법이다. 주간지를 읽을 시간은 있어도 좋은 책 읽을 시간은 없는 것이 인간이다.

내가 나의 빈약한 서재에서 단 한 권의 책만을 들고 나가야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월남 이상재 : 月南 李商在》를 택하겠다. 선생께서 돌아가신지 2년 후인 1929년에 출판된 이 책은 윤치호(尹致昊), 홍명희(洪命憙), 정인보(鄭寅普),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신흥우(申興雨) 같은 당대의 명사들이 편집위원이 되어 엮은 것인데, 파란이 중첩했던 한 애국자의 삶의 뜨거운 맥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훌륭한 책이다. 그중에 이런 일화가 있다.

한일합병이 강행되고 나서, 일본의 어떤 정계요인이 월남 선생을 찾아와 한일합병에 대한 의견을 들었더니, 선생께서는「덮어 놓고 좋다」는 한마디 대답밖에 하지 않았다. 그 일본 사람이 으아스럽게 생각하고 좀더 설명을 하라고 간청을 하니 선생께서는 마지 못해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좋지 않다 한들 당신네들이 한일합병을 취소할 리가 없겠으니 내 속에 있는 말을 할 여지가 없더. 덮어놓고 좋다는 것이 당신들이 듣고자 하는 말이겠지.」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 줄 만한 아량이 월남에게는 있었지만, 월남에게 비길 수도 없이 그릇이 작은 나는 계속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못하고 듣기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 하는 주착없는 위인인 것 같다.

월남 이상재를 본받아「덮어놓고 좋다」는 한마디만을 할 수 있는 여유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김동길<내가 부르다 죽을 노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