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墓誌)
유원 봉의대부 태상예의원 판관 요기위 대흥현자 고려 순성보익 찬화공신 삼중대광 우문관 대제학 영예문관사 순천군 채공 묘지명(有元奉議大夫太常禮儀院判官驍騎尉大興縣子高麗純誠輔翊贊化功臣三重大匡右文館大提學領藝文館事順天君蔡公墓誌銘)
이곡(李穀)
지원(至元) 6년 경진(충례왕 복위 원년) 정월 10일 계해에 대흥현자 순천군(大興縣子順天君) 채공(蔡公)이 나이 79세에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장차 예로써 장사지내려는데 그 아들과 사위들이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문을 청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공의 행실과 의리는 한 세상에 높았고, 공덕은 온 나라에 알려졌는데 명문을 짓는 데 무엇이 어려우리오,” 하였다.
공의 휘는 홍철(洪哲)이요, 자는 무민(無悶)이니 교주도 평강현(交州道平康縣)이 본향이다. 나이 18세에 문학에 능하여 성균시에 합격하고, 22세에 진사로 급제하여 처음으로 응선부 녹사(膺善府錄事)에 임명되었다. 다섯 차례 전직하여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가 되었다가,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나가서는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는데, 얼마 후에는 부사의 관직을 버리고 곧 집에서 한가로이 있으니 무릇 14년이었으며, 스스로 중암 거사(中菴居士)라 호하고, 항상 불교의 교리와 거문고ㆍ책ㆍ약제 등으로 일상사를 삼았다. 천성이 또 사사로이 높은 사람에게 찾아보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일에는 욕심도 없이 깨끗하게 종신(終身)할 것같았다.
덕릉(德陵 충선왕)이 본래 그 명망을 알았는지라, 지대(至大) 무신년(충렬왕 34년ㆍ충선왕 즉위)에 새 정사를 하면서 어진이를 쓰기에 급하여 장차 공을 크게 임용하려 하는데, 공은 더욱 고집을 부리다가 강청(强請)에 못 이겨 세상에 나오니, 곧 사의 부정(司醫副正)을 제수하고 황경(皇慶) 임자년(충선왕 4년)에 밀직 부사에 임명되었다. 전직 지후(祗候)로서 한 번 기용된 것을 계기로 여덟 번 전직하여 5년을 정승 자리에 있으니, 사림(士林)에서 영광으로 여겼다.
연우(延祐) 갑인년(충숙왕 원년)에 토지의 지적을 바로하도록 하였는데, 공이 그 임무를 전담하여 사방 토양의 성질을 살피며 옛 제도를 참작하여 정한 개간지에 조세를 거두되 현실에 알맞도록 힘쓰니, 공사(公私)간에 모두 편리하였다. 덕릉이 더욱 큰 일물로 여겨 누차 승진하여 밀직사를 더하고 이듬해 겨울에는 일이 알려져 첨의평리에 올랐다가 삼사사(三司使)로 전직하였으며, 얼마 후에 마침내 찬성사로 옮기고 경신년에는 평강군(平康君)에 봉하였다.
또 공의 아들이 원 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직위가 5품인 자가 있었는데, 은혜로써 태상예의원 판관(太常禮儀院判官)에 봉하니 계급은 훈작(勳爵)이다. 지순(至順) 임신(충숙왕 복위 원년)에 의릉(毅陵 충숙왕)이 복위하여 옛 사람을 임용하게 되어 다시 정승으로 기용하고, 또 다시 순천군(順天君)에 봉하니, 올라간 계품은 삼중대광(三重大匡)이요, 공신(功臣)의 호를 더하였다. 이어서 대우문 영예문관(大右文領藝文館)으로서 병자년 공거(貢擧)를 맡아하니 그때 선비들을 많이 얻었다고 세상에서 일컬었다.
공은 문장과 기예에 모두 극히 정교하였으며 불교에 더욱 조예가 깊어 그 도를 논할 때에는 비록 소문난 선비라도 공이 한 마디 말로 굴복시키니, 참으로 본 것이 없으면 어찌 이같을 수 있을 것인가. 일찍이 집 북쪽에 전단원(?檀園)을 창설하여 항상 중들을 양성하니, 그중에는 자못 도를 깨우친 자가 있었다. 또 원(園) 가운데에 약방을 시설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 활인당(活人堂)이라 불렀다. 후에 집 남쪽에 당(堂)을 지어 이름을 중화(中和)라 하고, 때로 영가군 권공(永嘉君權公) 이하 국상(國相) 8명을 초청하여 기영회(耆英會)를 만드니, 대개 옛 어진이를 생각한 것으로 풍류가 줄어지지 않았다. 공은 감식안이 뛰어나고 품격은 당대에 드물었는데, 사람을 취하는 데에 모두 구비함이 없이 하고 허물을 보면 어짐도 알았으며, 집에 있으면서 남을 대할 때면 한 덩어리의 화기였으니, 훌륭하고 위대한 군자라고 이를 만하다.
증조의 휘는 모(某)이니 증 상서령(贈尙書令)이요, 조부의 휘는 모이니 소부감 증 평장사(小府監贈平章事)이며, 부친의 휘는 모이니 좌우위 보승낭장 증첨의정승(左右衛保勝郞將贈僉議政丞)이며, 모친은 박(朴)씨이니 승평군부인 증 한국 대부인(昇平郡夫人贈韓國大夫人)인데 증 지밀직사(贈知密直事) 휘 모의 딸이다. 부인 김씨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인데 역시 아들이 귀하게 되었으므로 대흥현군(大興縣君)에 봉하였으며, 부친의 휘는 모인데 지위는 첨의중찬 상락공(僉議中贊上洛公)에 이르렀고, 원 나라 세조 황제의 조정에 공이 있어 중봉대부 도원수(中奉大夫都元帥)를 주었다. 부인은 유순하고 착하여 규문의 법도를 잘 지켰으며, 자녀 다섯을 낳았다.
맏아들 하중(河中)은 원 나라 궁중에 숙위하여 태부부 자의참군(太傅府恣議參軍)에 선임되었고, 간간 본국에 벼슬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 현재는 평강군(平康君)이 되었다. 둘째 아들 하로(河老)는 판종부사사(判宗簿司事)이며, 셋째 아들은 선지(先智)인데 불교를 배워 계조연진 대선사(繼祖演眞大禪師)가 되었다. 맏딸은 현재 계림부윤 검교 첨의평리(鷄林府尹檢校僉議評理) 설현고(薛玄固)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작고한 좌우위 보승별장(左右衛保勝別將) 정광조(鄭光祖)에게 출가하였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모범을 잃었고, 나라에서는 길장이를 잃었으니, 모두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4월 초8일 경인에 성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명문에 이르기를,
사람이 덕이 있으면 / 人之有德
반드시 벼슬하고 천수를 누린다 / 必位必壽
더러는 그렇지 못하기도 하는데 / 亦或不然
오직 공만은 능히 있었네 / 惟公克有
공만이 있었으니 / 惟其有之
이 때문에 길이 전하리라 / 是以不朽
하였다.
[주D-001]지원(至元) 6년 : 지원(至元)은 원 나라 세조(世祖)의 기년으로 서기 1264~1294년간이었으며, 뒤에 순제(順帝)가 임금으로 있는 중에도 다시 지원이라는 기년을 사용하였는데, 서기 1335~1340년간이었으며, 이것을 후지원(後至元)이라고 한다. 여기에 보이는 지원 6년 경진은 곧 고려조의 충혜왕 복위 원년인 후지원 6년 서기 1340년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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