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碑銘)
대숭은 복원사 고려제일대사 원공비(大崇恩福元寺高麗第一代師圓公碑)
이곡(李穀)
무종황제(武宗皇帝)가 불법을 숭상하여 일찍이 불사를 도성의 남쪽에 기공하였더니, 인종황제(仁宗皇帝)가 뒤를 이어 이루어서 황경(皇慶) 원년에 준공하였다. 곧 여러 곳의 훌륭한 중들에게 명령하여 그 해의 겨울부터 강당(講堂)을 열고 설법을 시작하였다. 고려의 유가교사(瑜伽敎師) 원공(圓公)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들어와 살고 있었다. 그곳에 머무른 것이 모두 29년이나 되었다. 지원(至元) 경진년 2월 18일에 그곳 무휴지당(無虧之堂)에서 입적하였다. 5년을 지난 뒤인 갑신년 가을에 그의 법통을 이은 고제(高弟)ㆍ현인(玄印) 등 30여 명이 그의 유골(遺骨)을 안치할 탑을 만들고, 또 그의 도행(道行)을 비석에 싣기를 꾀하여 나에게 글을 청하여 말하기를,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 것은 사람의 떳떳한 이치이며, 그의 삶을 기르고, 그의 죽음을 보내는 데 예(禮)를 다하고자 하는 것은 남의 아들된 자의 간절한 심정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대하는 것과 제자가 스승에 대하는 것은 그 길이 동일한 것입니다. 공자가 몰하였을 때 제자들은 3년을 마음으로 상을 입고도 오히려 묘에 여막을 짓고 지내면서 차마 떠나가지 못하였습니다.
공자는 그 후사가 있었건만 그 제자들이 그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승려들의 인륜을 끊고 법을 전하는 것으로써 후사를 삼는 자들에게 그 마지막을 신중히 하는 뜻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옛날 석가모니가 입적할 때, 오른쪽 갈빗대를 땅에 붙인 것은 마지막이 있음을 보임이며, 금관(金棺)에 거두어 넣은 것은 예(禮)가 박(薄)하지 않은 것을 보인 것입니다. 불교는 비록 죽고 사는 것을 도외시하나 그 자애하고 효도하라는 가르침이 일찍이 그 사이에 우의(寓意)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우리의 스승이 돌아가신 때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입실(入室)하기까지 우리 무리로 하여금 흩어져 없어지게 만들었으므로, 지금까지 5년을 지내고 비로소 그 유골을 감추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슬픔이 골수에 사무치게 하는 바로써 감히 하루도 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대는 우리 스승의 비명을 써 주셔서. 우리 스승이 비록 몰하였으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게 하십시오.” 하였다. 내가 전일에 그들 사제(師弟) 사이에서 노닐었드니, 승낙하여 비명 쓰는 일을 감히 안 할 수 있겠는가.
공(公)의 휘는 해원(海圓)이요, 속성은 조씨(趙氏)이니, 함열군(咸悅郡) 사람이다. 아버지는 검교감 문위대호군(檢校監門衛大護軍) 혁(?)이며, 어머니는 완산군부인(完山郡夫人) 이씨(李氏)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단정하고 장중하며 타고난 자질이 자상하고, 행동거지가 보통 아이들과 다르니, 부모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애가 만약 큰 벼슬을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대복전(大福田 부처ㆍ고승)이 될 것이다.” 하였다. 나이가 겨우 열두 살이 되어서 금산사(金山寺)의 대사(大師) 석굉(釋宏)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가 법을 배우는 것은 같은 무리들은 감히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날마다 진보하였다. 갑오년 봄에 선불과(選佛科)에 급제하여 불주사(佛住寺)에 머물었다. 대덕(大德) 을사년에 안서왕(安西王)이 고려의 중은 계행(戒行)이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 성종(成宗)에게 청탁하여 사자를 보내어 초빙하였다. 공(公)이 그 명령에 응하여 들어가 뵙고 이어 안서왕을 좇아 삭방에 갔다. 북방의 풍속은 농사짓는 일은 하지 않고 목축으로써 생업을 삼기 때문에, 가축의 고기를 먹고 고깃국물을 마시며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다. 공이 거기에 있은지 두 해를 지났으나 굶주림은 참을지언정 절대로 마늘 냄새 나는 것을 먹지 않고, 계율을 지킴이 더욱 굳으니, 안서왕이 더욱 존중히 여겼었다. 정미년 겨울에 무종(武宗)의 뜻을 받들어 도제(徒弟)들을 거느리고 국고의 양곡(糧穀)을 먹었으며, 봄ㆍ가을의 시순(時巡)에는 거가(車駕 임금의 수레)에 호종할 것을 명하였다. 인종(仁宗)이 왕위를 이은 뒤에는 공에게 이 절에 거처할 것을 명령하였다. 은총과 지우는 더욱 풍부하여지고, 도의 명성이 더욱 드러났다. 천력(天曆) 연간 초에 이르러서는 저폐(楮幣) 2만 5천을 하사하였으니, 이는 남달리 총애하기 때문이다.
본국의 임금께서는 더욱 높이는 예를 더하시니 사(師)가 소(疏)를 올려 멀리 백제의 금산사에 머물기를 청하였다. 호를 내리기를, 혜감원명 편조무애 국일대사(慧鑑圓明遍照無?國一大師)라 하고, 중대광 우세군(重大匡祐世軍)을 봉하였다. 종문(宗門)을 영화스럽고 빛나게 함이 온 세상에 으뜸이었다.
공은 마음가짐이 관대하고 화순하며, 몸을 닦아 실행함이 위엄이 있고 무게가 있어서, 사람들이 보고는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가 말하는 유식지론(唯識之論)이란 것에 대하여는 이미 대의(大意)에 통달하였으므로 사람들과 더불어 수다스럽게 논쟁하는 일이 없었으며, 사람들도 또한 감히 논난하려 하지 못하였다. 성질이 또 손[客]을 좋아하여 존귀하거나 비천하거나 사특하거나 정대(正大)하거나 간에 차별하지 아니하고 하나 같이 대접하니, 손을 맞이하는 마루는 항상 만원이었다. 공(空)을 말하고 유(有)를 설명하기를 부지런히 하여 게으르지 아니 하였다. 수입이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여 간혹 주방(?房)의 공궤(供饋)가 계속하지 못하였으며, 주머니와 바릿대가 쓸쓸하였다. 돌아가시던 날에 남아 있는 자산이라곤 없었다. 향년이 79세였다. 아, 진정 이른바 복전(福田 부처ㆍ보살ㆍ고승)이었던가.
나는 원통(元統) 계유년에 계획을 같이하고 와서 공(公)의 별원(別院)인 보은승방(報恩僧房)에 우거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공을 잘 알고 있었으니, 이제 와 보니 공은 몰한 지가 이미 해를 넘었으며 그의 무리들은 흩어져서 사방으로 헤어졌다. 나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그 부처를 배우는 자들이 오히려 사원을 빼앗는 것을 일삼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일찍이 속세의 사람들만도 못한 것을 민망하게 여기었다. 이제 우리 사(師)의 무리가 이미 능히 절을 회복하여 가지고, 사(師)의 상사(喪事)에 대한 일이 늦어진 것을 통탄하여 유골을 모실 탑을 잘 이루었으니, 다만 능히 그의 뜻을 계승하고 그의 은혜를 갚았을 뿐 아니라, 또 그의 덕행을 높이 받들어 영원무궁하게 전하는 것이니, 이것은 마땅히 비명에 써야 할 것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크도다 착한 원나라여 / 皇矣聖元
한 나라나 당 나라보다도 우월하네 / ?漢跨唐
헌장은 옛 제왕을 본 받고 / 憲章古帝
신앙은 부처님을 존숭하네 / 崇信空王
밝게 빛나는 불교의 사찰이 / 煌煌寶刹
무종황제 때에 창건되어 / 創自武皇
인종조에 이르는 동안 / ?于仁廟
온갖 공구는 모두 가 갖추어졌네 / 供具畢張
그 때에 원공이 / 時維圓公
왕명을 받고 강당 문을 열었으니 / 受命開堂
주미(옛날 담론하는 이가 청중에게 지시 교수하느라고 휘두르던 사슴의 고리로 만든 먼지털이)는 꽃비를 뿌려 주고 / ?揮花雨
옷에는 하늘의 향기가 덮쳤네 / 衣襲天香
공이 그 무리들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 公謂其徒
혹시라도 게으르고 거칠지 말라 / 無或怠荒
백성의 힘을 다해 / 竭民之力
이 도량 지었구나 / 爲此道場
우리의 창고에 좁쌀이 계속되면 / 我?繼粟
저들은 술재강과 겨밥에 싫증이 난다 / 彼厭糟糠
너희들이 만약 먹기만 하는 무리라면 / 汝如徒?
그것은 치 아니면 광이로다 / 非癡則狂
무리들이 옷깃을 여미고 / 其徒??
감히 힘쓰지 못하였는데 / 罔敢不?
숭은 복원에서의 / 崇恩福元
30년 동안 / 幾三十霜
홀연히 세상을 싫다하고 / 忽焉厭世
인생의 무상함을 보여 주었네 / 示之無常
많고 많은 제자들이여 / 詵詵高弟
그 중에도 백씨가 가장 착하여 / 自眉最良
사원은 의탁할 데가 있고 / 山門有託
종파들은 서로가 마땅하더니 / 宗派相當
저 어두운 자 알지 못하고 / 彼昏不知
감히 억지로 사찰과 모든 것을 빼앗아 갔네 / 乃敢?攘
천도가 좋게 돌아와서 / 天道好還
그들이 죄과에 재앙을 내리었네 / 降之咎殃
청전은 전과 같이 돌아오고 / 靑氈復舊
비단 도포는 더욱 광채가 난다 / 錦袍增光
높다란 저 탑이요 / 屹爾浮圖
그의 유골 깊이 감췄네 / 有密其藏
지세가 매우 견고한 / 面勢孔堅
신주의 양지편이네 / 神州之陽
사람들이 말하길 불교는 / 人言釋敎
삼강 밖에 벗어나 있다 하지만 / 超出三綱
누가 알았는가, 그 무리들이 / 孰謂其徒
능히 죽은 이를 기리어 / 克存其亡
그의 은덕에 보답하고 / 旣報其德
또 그의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전하려 하네 / 又流其芳
모든 장래의 후사들은 / 凡百後嗣
이 새긴 글을 나타낼지어다 / 現此銘章
하였다.
[주D-001]청전(靑?) : 대대로 내려오는 푸른 담요, 즉 여러 대로 내려오는 공부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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