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현대 한국의 청소년들이 존경하는 인물 10명 중 하나로 월남 이상재 선생이 꼽혔을까?
딱딱하지 않게 월남에 관련된 일화를 몇가지 살펴보자
1.이상재 선생이 이완용을 보고 말했다 "대감은 도쿄로 이사가는게 어떻겠소?" 이완용 "왜그렇습니까?"
이상재 선생 "대감은 나라 망하게 하는덴 천재니 도쿄로 이사가면 곧 일본도 망하지않겠소?" |
어느날 선생께서 강연 하는데 일본 순사랑 형사들이 뒤에 들어와 감시하니까 뒷산을 보면서 '개나리가 만발하였군!'하셨다죠. 참고로 당시 순사의 별칭은 '개' 형사는 '나리'였습니다.. |
3. 선생이 일본 병기창을 구경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으스대면서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선생왈 "대단하오. 다만 걱정인 것은 성경에 총칼로 일어선 자 총칼로 망한다 하였소"
이상재(李商在) 1850. 10. 26~1927. 3. 29 호:월남(月南)
충청남도 서천(舒川)군 한산(韓山)면 종지(種芝)리에서 태어났다.
1881년에 정부가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할 때에 박정양(朴定陽)의 추천으로 그의 수원이 되어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이 여행 도중에 홍영식(洪英植)과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되었으며, 귀국 후에는 조선도 선진제국에 낙후되지 않도록 과감한 혁신을 꾀할 것을 역설하였다.
1884년에 개화파들이 우정국을 개설하여 근대적 우편제도를 수립하고 홍영식이 그 총판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우정국 수사가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그 해 12월 4일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홍영식이 참살당하자, 정변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1887년 6월에 박정양이 초대 주미(駐美)공사로 부임하게 되자 그의 추천으로 2등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도미(渡美)하였다.
청국이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자주 외교를 인정치 아니하고 주미청국공사가 고종의 국서를 자기가 대리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하면서 주미조선공사의 독립적 활동을 저지하려 하자, 크게 분개하여 청국공사관원과 담판하고 박정양 조선공사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케하여 자주독립외교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이에 분개한 청국이 조선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1888년에 정부로부터 소환령을 받고 귀국하였다. 정부는 다른 관직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1894년 7월에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고 개혁정책을 실시하게 되자 학부대신 박정양의 추천으로 학부 학무국장이 되어 사범학교, 관립중학교, 관립소학교, 외국어 학교의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으며,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직하고 일본의 내정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부심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관직을 다시 사임하였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뒤이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건설을 서재필과 함께 추진하여 완성했으며, 「토론회」를 조직하여 국민을 계몽하였다. 1898년 2월에는 러시아의 절영도(絶影島) 조차(租借)를 치로수구파 정부가 허락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구국선언상소를 올리고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요구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뒤이어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열강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어 더 이상의 이권양여를 저지하였다. 계속하여 의회(議會)를 설립해서 전제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개혁하려는 운동을 벌이다가 친로수구파에 의하여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 이상재를 내부대신으로 한 공화제(共和制)를 수립하려 한다는 모략에 걸리어 17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서울시민들의 자발적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어 이상재 등 17명의 지도자 석방을 강경히 요구했으므로 1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1898년 12월 말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당한 후에는 초야에 묻혀 일체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1902년에는 옛 독립협회 동지들과 국정의 개혁을 논의하다가 개혁당(改革黨)으로 몰리어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었다. 이 때 감옥 안에서 기독교 성서들을 읽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기독교도들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07년 4월에는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06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취임하여, 당시 일제가 일본에서 파견한 동아기독교협회(東亞基督敎協會)를 중심으로 한국 기독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공작을 분쇄하고 기독교계를 국권회복운동 편에 서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지도하에 이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어 일제 통감부는 기독교세력을 반일독립세력으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주로 기독교청년운동에 종사하여 국권을 회복할 실력을 배양하려고 하였다. 1911년 4월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장에 취임하여, 한국기독교청년회를 일본기독교 청년회에 예속시키려는 일제의 정책을 남궁억(南宮檍)등 동지들과 함께 분쇄하는데 진력하였다. 또한 전국 각 지방 순회강연을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불교청년회 및 천도교청년회와 종교단체 친목회를 조직해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기에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계열의 독립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4개월 만에야 석방되었다.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내한하자, 일제의 모략과 방해를 무릅쓰고 미국의원단들을 만나 한국의 탄압받는 실정을 설명하고 한국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를 창립하여 그 회장에 선출되었다.
1922년 4월에는 북경에서 개최되는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일제에게 탄압받는 한국기독교운동을 폭로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와 일본 기독교청년회의 분리를 결의케 한 다음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려서 이 결의를 통고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의 독립을 실현하여다.
1924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 사장에 추대되어 당시 새로 대두되는 자치론을 저지하고 완전독립을 민족운동노선으로 정립하는데 노력하였다.
1927년 2월 완전독립, 절대독립노선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연합하여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자, 이상재는 그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달에 노환으로 서거하여, 10만 군중의 애도속에 사회장으로 장의를 엄수하였다.
정부는 그의 일생을 통한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190~193.
註ㆍ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90・236面
ㆍ明治百年史叢書 第2卷 996面
ㆍ高等警察要史 49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0卷 601面
ㆍ獨立運動史 資料集(國家報勳處) 14卷 741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