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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品’의 서예대가 여초 김응현 별세

천하한량 2007. 2. 4. 20:49

‘神品’의 서예대가 여초 김응현 별세


한국 근현대 서예사의 4대가로 꼽히는 서예계의 원로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씨가 숙환으로 1일 저녁 7시 별세했다. 향년 80세.

전서와 예서·행서·해서·초서 등 오서에 두루 능통하고 특히 육조해서가 뛰어났던 고인은 창문여고 설립자인 김윤동씨의 3남으로 지난해 11월 타계한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을 형으로,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씨를 동생으로 두었다.

고인은 1927년생으로 휘문고와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해 신학문에도 밝은 지식인이었지만 한학자 집안에서 자란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붓을 놓지 않았으며 서예와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50년부터 10년 가까이 국회보 주간을 맡고 국회도서관에서 일했다.

그 사이 숙명여대와 홍익대, 성균관대 등에서 문학과 서예, 한학을 가르쳤다. 56년에는 이론과 실기를 겸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예연구교육기관인 동방연서회를 설립해 수천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지금은 폐간됐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서법 연구잡지인 ‘서통(書通)’을 창간해 삼국시대 이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옛 글씨를 조명하는 시리즈 등을 기획, 한국서예사의 체계를 세우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밖에 국제서법예술연합을 만들어 일본, 중국, 홍콩 등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과 국제교류전을 활성화시켜 한국서예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도 기여했다.

여초는 지난해 광화문 현판 교체론이 대두될 당시 현역 서예가 중 1순위로 오를 정도로 신품(神品)의 경지에 오른 서예가였다. 예술의전당 서예관의 이동국 큐레이터는 “여초는 소전 손재형(1903~81), 검여 유희강(1911~76), 일중 김충현 (1921~2006) 선생과 함께 근현대 서예사의 4대가로 꼽히는 인물”이라며 “소전은 전서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서법을 열었고 일중은 정통서법에 강했다. 여초의 경우는 이 두 분이 하지 못했던 금석기가 두드러지는 육조해서를 토대로 독자적인 서법을 만들어냈다. 한글과 한문을 두루 잘 썼고 전각에도 뛰어난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평가했다. 이씨는 또 “서예 하면 늘 중국의 것이 최고인 것으로 아는 상황에서 한국적 서예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천착하고 실천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경북 김천시 황악로에 설치된 ‘영남제일문’ 현판과 김천 직지사의 현판, 공초 오상순 시비 등이 그의 작품이다. 고인은 주요 서책과 비문에 근거해 각종 글씨체를 재현한 ‘동방서범’이라는 30권짜리 서예교본을 10여년에 걸쳐 냈고 ‘동방서예강좌’ ‘서연기인’ 등의 책을 통해 서법을 연구해왔다.

96년부터 설악산 백담사 부근에 ‘구룡동천(九龍洞天)’이라는 집을 짓고 자연과 벗삼아 지내며 글씨를 수련했다. 그러나 10여년전 당뇨병을 시작으로 중풍과 파킨슨병 등 합병증이 겹쳐 투병해왔으며 99년에는 교통사고로 오른 손목에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당시 몇달간 수련 끝에 왼손으로도 글씨를 쓸 수 있게 돼 왼손으로 쓴 글씨들을 모아 2000년과 2001년 한국 및 중국에서 ‘좌수전(左手展)’을 열기도 했다. 회복 후에는 다시 오른손으로 글씨를 써 쌍수(雙手) 서예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2003년에는 가로 6m, 세로 5.3m에 이르는 필생의 역작 광개토대왕비문을 완성했지만 이후 건강이 악화돼 붓을 들지 못했다.

한 달 전 당뇨 합병증이 악화해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형년(동방연서회 상임이사), 차남 항년(개인사업), 남희(부산외대 교수), 주희(주부), 삼희(니베아 서울 차장)씨 등 2남3녀가 있다. 발인은 3일 오전 9시. 장례식은 동방연서회장으로 치러진다. 빈소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층 10호실. 장지는 경기 용인의 선영. (02)2072-2016

〈윤민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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