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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보다 더 추운 군이 또 있으랴(1896년 유기남 군수의 청안당서)

천하한량 2007. 1. 10. 04:41
이 郡보다 더 추운郡이 또 있으랴!
-1896년 유기남 군수의 청안당서-
청안당서는 1896년 서천군수 유기남이 동학혁명으로 불타버린 읍성과 주변을 돌아보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실토한 글이다. 유기남은 동학혁명이 평정된 후 정부로부터 7천 전을 지원 받아 3천 전은 백성들에게 베풀고 4천 전으로 군청을 복원하고 그 편액을 청안당이라 하였다. 청안당은 강물같이 맑고 바다같이 편안함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땅에 부임하는 서천군수에게 이 말을 당부하고 있다. 다가오는 민선 3기 서천군수 나소열 당선자는 이 글을 교훈 삼아 후회 없는 군정을 펴나가길 기대하며 유기남 군수의 청안당서를 소개한다.    

청안당서(淸晏堂序)
 청안당의 명칭이 청안(淸晏)인 것은 '경계하여 삼가 하게' 하려함에 그 뜻이 있다. 하청해안(河淸海晏:강물이 맑고 바다가 편안하다)은 태평을 기원하는 뜻으로 비유하여 많이 사용되었고 이렇게 말한 선학들의 저술 또한 즐비하거니와 내가 이 '경계의 뜻'을 말하는 바는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태평에 깊은 뜻을 두고 있는 것이다.
  갑오(1894)년 10월초 3일에 나는 외람 되게도 고을 태수에 부임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 때는 동학의 무리들이 창궐하여 민심을 소요시키는 때인지라 지체 없이 준비를 갖추어 다음 날로부터 걸어서 임지에 도착하였다.(중략)
  서천 읍성을 지킨 지 10여일이 지나도록 정부군의 지원은 이르지 아니하고 남아 있던 병사들이 홀연히 전봉준의 무리를 따르게 되어 기율을 어지럽히고 큰소리로 적들을 끌어 들여놓고 싸우지 않고 도망가자 병사들은 해체되고 고립된 성은 함락되어 불길이 치솟아 공청과 민호는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때마침 경군이 도착해 비록 적들을 토멸했지만 성안 가득했던 기와지붕이 다 없어지고 오직 형리청 사오간 뿐이다. 일은 잠시 동안 이었지만 마을은 초토로 변해버려 깃들어 살 가망조차 없으니, 오호!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란 말인가? 문(文)은 먼 곳까지 감복시키지 못했으며 무(武)는 적의 무리를 당해 내지 못해 조정의 신임을  배반한 바가 되고 백성들을 의지할 곳 없이 물가에 버려지게 하였으니 그들을 대할 면목이 없구나! 두렵고 슬픈 심정으로 뉘우치며 스스로를 어루만져 보지만 장차 어찌하랴! 낮에는 밥을 먹지 못하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겨울의 심한 추위로 저녁에는 찬 눈과 찬바람이 불어닥치니 걱정과 근심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새벽에는 어느덧 나도 몰래 이불 속에서 눈을 뜨곤 한다. 매일 한 두 명의 관원을 거느리고 성안을 두루 돌아본 즉 돗자리나 거적을 내려 문을 가린 토굴들이 즐비하고 모두들 춥다고 부르짖고 젊은이들은 이것이 애닯아  어찌 할 줄 모르고 있었다. 쇠약한 이와 어린것들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듯 하니 이 군보다 더 추운 군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진을 갖추어 영을 두루 돌아 사천전 을 얻고 재물을 모아 공사를 시작한지 반년만에 마을에 백여 호를 지었으나 재물은 다 떨어지고 노역은 지친지라 조금씩 쉬어가며 점점 읍의 모양을 이루어 내니 다스리는 일은 시작 할 수 있게 되었으나 정당은 늦출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때는 국가의 국고도 고갈되었으니 어찌 감히 재물의 지원을 바랄 수 있었겠는가? 하물며 이 난리의 여파가 아직도 깔려 있는 시국이었다.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 것 또한 어찌 거론할 수 있었으랴! 번뇌하며 고민하기가 꼬박 을미년 여름까지 이르렀을 때, 조정에서 재난을 조사해 보고 칠천여전을 본 군에 배당해 주셨다. 이에 향리와 상의해 탁지부에 보고하여 겨우 허락을 받아내 우선 조촐하나마 삼천전을 백성들에게 베풀고 나머지 사천전으로 이 당(淸晏堂)을 짓고 경영하게 되었으니, 1896년 3월 그믐날로부터 일을 시작하여 5월 29일에 준공을 맞게 되었다.
   원근의 문사들과 더불어 그곳에서 강회를 행하며 잔치를 베풀어 술을 나누는데 한 선비가 나에게 읍을 하며 말하길 "이 당의 이름이 청안(淸晏)이라고 칭한 이유를 듣기 원합니다" 하니 나는 자못 끌다가 "말로는 그 뜻을 다 설명할 수 없으니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오? 나는 없어도 그 말은 이곳에 남을 것이니 부임을 받은 행복을 오늘에 와서야  가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소. 淸하고 晏한것은 그 스스로 때문에 우러러 칭찬을 받는 것인바, 국가의 治平之道를 강물의 淸함과 바다의 晏함에 기약한다면 그것이 곧 선(善)을 기리는 뜻에 가깝지 않겠소?  만약 이 '경계의 말'을 뒷날 이 땅에 부임할 사람에게 보여 그 뜻을 깊이 알게 한다면 편안한 세월이 위급함에 처한 때에 이르게 되더라도 이 땅에 부임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어찌 오늘의 나와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있겠소? 이 사람말고 내가 또 누구를 위해 이 표시를 남겨 두겠오?" 하니 모든 文士들이 일제히 "그것이 바로 군수께서 당을 명한 까닭이군요!"하였다. (1896년 서천군수 유기남서)

유기남 군수는 강물처럼 맑고 투명하게 군정을 살피면 바다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이것을 지킨다면 나와 같은 말을 다시 할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흘러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동학혁명이후 이 군보다 더 추운 군이 또 있으랴하는 유기남 군수의 한탄이 얼마나 해결되었는지 자못 의심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민선 3기 서천 군수 나소열 당선자에게 거는 기대가 큰 것이다. 청안당에 들어가려고 했던 초발심을 잊지 말고 서천 군민을 두루 살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