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의 친일 세력과 광복절
또 광복절이 돌아왔다. 암울했던 일본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대한 독립 만세를 목놓아 부르던 민족 해방의 날이 다시 찾아왔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 서천 신송리 곰솔 두 그루 중 한 그루가 바람에 쓰러져 죽어버렸다고 전한다. 금강물도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해방의 그 날 마냥 우리에게는 기쁨과 환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방과 더불어 가장 먼저 친일 세력들을 척결하고 정부를 수립해야하는 과업을 앞에 두고 있었다. 물론 서천에서도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서천군농민조합대표로 전완석과 지창순이 선출되어 참여하였으며 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1945년9월6일 전국인민 대표자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을 때 서천군 대표로 구병정, 송재옥, 장영근이 참여하여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려고 하였던 사실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물론 이들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은 아직도 조사되지 않고 있지만 그들의 역할은 자못 해방 전후 중요한 인물들이다. 이때 서천에서는 친일파를 숙청하기 위하여 마을 청년들이 친일 행위를 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으며 그들의 업적을 찬양했던 비석들을 깨부수는 일들이 종천 석촌리, 마서 계동에서 전개되기도 했다. 당시 어떤 인물들이 해방을 전후하여 친일파로서 그들에게 쫓김을 당하거나,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하였을까? 물론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거나 명단이 있으면 서천의 친일 세력들을 쉽게 구분하여 발표할 수 있겠으나 그런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의 행적과 일부 남아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서천의 친일 세력을 살펴보자.
먼저 정치적으로 서천 출신으로 총독부 요직에 있던 사람은 조중국이다.
조중국은 양주 조씨로 서천읍 구암리에서 거주하다 한말 상경하여 아버지 조영희의 음덕으로 시종대감에 오른 사람이다. 서천 지역에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어 중간 매개체 역할을 서천 유지들에게 시키고 그들의 뒤를 봐주는 일을 하여 왔다.
한말 서천의 핵심 인맥들은 조중국을 통하여 총독부 권력과 연계하여 서천의 유지 행세를 해 올 수 있었다.
1970년대 서천 사람들이 중앙에 있던 중앙정보부장이며 법무부 장관이었던 신직수에게 줄을 대려고 하였던 것처럼 일제 강점기에는 그런 인물이 조중국 이었다.
양주 조씨의 위세는 지금 서천에서 사라졌지만 일제 강점기를 전후한 시기, 서천에서 중앙 권력의 핵심층이었다. 지금도 구암리에는 조중국의 선조인 노론의 거두 조태채 묘소가 있으며 그 후손들의 묘가 판교에 있다.
서천에서의 조중국과 서천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가 서천 유지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하여 소작료 독촉과 유지들의 동향 묻는 내용이 있어 주목되고 있다.
다음으로는 일제 강점기를 풍미했던 인물로는 풍양 조씨 조남천이다. 조남천은 일찍이 1920년대 서천수리조합설치 반대운동을 전개하여 반대급부로 수리조합 평의원에 당선되면서 서천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1937년도에는 새로운 장항에 대하여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고문역을 맡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도평의원을 지냈으며, 1950년 6·25전쟁 중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인물이다. 지석리 굄돌 마을에 있는 묘 앞의 비석에는 일제 강점기의 찬란한 사회적 지위는 사라지고 대농협동조합장 조남천으로 남아 있다.
본래 이 비석은 해방전 석촌리와 지석리 마을 도로변에 있었는데 해방을 전후하여 논 속에 묻혔다가 경지정리할 때 발견되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어찌하여 땅속에 오랜 시간을 묻혔다가 다시금을 빛을 보았는지 의문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친일 세력을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에 친일 행각을 보인 지주들 있다. 김영두, 추교영, 박우석, 최만영, 김정규, 나석주, 추병용 등이 서천의 지주들이 있다.
이 중 박우석은 명확한 친일 사실을 그의 효자비에 잘 새겨 놓았다. 서천읍 구암리에 있는 그의 효자비에 「만재를 내어 군 사람들이 사는 곳에 신사(神社)를 세워 남녀노소로 하여금 아이들을 데리고 조석으로 보고 절하며 일심으로 믿고 우러르며 한결 같은 백성의 뜻으로 나라의 운을 빌어 융창하게 하는 것은 국가이다.」라고 새겨 놓았다.
서천에 신사를 세우는데 박우석이 비용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군민들이 신사에 절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행적을 남긴 사람이 바로 박우석이다. 우리는 박우석을 효자라고 하여 서천의 충효열비각으로 주목하고 있다.
이외에도 서천 경찰서에 근무하면서 독립 의지를 표출했던 사람들을 잡아들여 고문을 하는 데 앞장섰던 N모씨, 동양척식주식회사 서천지부 서기로 근무하면서 소작료를 착취하고 억압했던 J 모씨 등 일제 강점기에 해방의 꿈을 저버리고 항상 일본의 지배만 받을 것으로 착각하여 총독부에 충성했던 서천의 친일 세력들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서천 출신으로 고향에서, 또는 서천을 떠나 국내에서, 아니 저 멀리 중국 땅에서 독립의 그 날을 기다리며 만세운동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던 사람들이 있다.
고시상, 김갑수, 김상을, 김인두, 김인전, 나상준, 문석환, 박재엽, 송기면, 송여직, 신현창, 유희준, 이근호, 이남률, 이사성, 이상재, 이승달, 임종연, 임학규, 정해두, 조남명, 최낙권, 최덕휴, 함수만 등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25분이다.
친일 세력의 이름이 더 잘 남아 있는 것에 비하여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 더 많다. 우리는 광복 아니 민족해방 48주년을 맞이하여 매년 돌아오는 국경일이라고 생각하지말고 가까운 독립 유공자를 찾아 그 설움의 역사를 들어보자. 오늘 나는 독립유공자 임학규의 후손 임종석님을 만나러 화양면 와초리에 간다. 그는 오늘도 임학규의 스승 김인전의 공적비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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