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22 (목) 15:06 주간조선
[도전하는여성] 재미동포 모시 사업가 민영경씨 |
전통 모시 '한국 명품'으로 세계화 명주와 결합시켜 구겨짐 보완…인니 대통령, 브루나이 왕족 등 동남아 VIP들이 단골 여름에 노인들이나 입는 성글고 거친 옷으로 여겨져왔던 ‘모시’를 세계 1%만을 위한 명품 브랜드로 재탄생시킨 여성이 있다. 주인공은 바로 재미동포 2세 사업가인 민영경(32)씨. 그녀의 옷은 인도네시아 메가와티 대통령, 브루나이ㆍ말레이시아의 왕족 등 동남아시아 VIP들이 즐겨입기로 유명하다. 말레이시아 공주는 결혼식에 입을 흰색 모시 웨딩드레스를 특별주문하기도 했다. 숄 하나가 120만∼150만원에 팔린다. 숄 하나에 120만∼150만원 민영경씨가 모시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7년. 캘리포니아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후 친구가 있는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당시 아시아 전체가 IMF 상태였고 화폐 가치가 10분의 1 넘게 떨어졌다. 다들 인도네시아 화폐인 루피아를 팔기에 바빴지만, 민씨는 아버지에게서 빌린 30만달러를 모두 털어 루피아를 샀다. 그녀는 “이를 몽땅 주식에 투자했는데 몇 개월 후 1000만달러를 벌어들여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백만장자가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도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풍부한 자연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사업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책자에서 한국의 모시를 발견했다. “우리의 재래종 모시는 가늘면서도 면보다 3∼4배 더 질기고 가벼우면서도 우아합니다. 땀 흡수도 잘되고 박테리아가 안 끼는 천연섬유예요. 일본 모시는 강하지 못하고, 중국 모시는 무겁고, 동남아 모시는 조직이 너무 엉클어져서 밧줄이나 그물로밖에 쓸 수 없거든요.” 민씨는 그 길로 충남 서천군 한산으로 달려갔다. 평생 모시를 짜온 할머니들을 쫓아다니며 반년 동안 모시 농사법, 실뽑기, 천짜기 과정 등을 배웠다. 처음에는 ‘저러다 제풀에 지쳐 떠나겠지’란 반응이었지만 나중에는 민씨의 열정에 할머니들도 감동을 받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한산 모시관에서 전통모시 뿌리를 인도네시아로 가져와서 심었어요. 하지만 생산에 번번이 실패하고 꼬박 3년이 걸려 성공했어요. 모시 재배가 무척 까다롭거든요. 영양분이 풍부하고 강수량이 많으면 잘 자라지만, 땅에 물이 고이면 모시뿌리가 금방 썩어버려요.” 마침내 자카르타 인근의 ‘살락’(60만평)이란 지역에서 1년에 무려 6번씩 모시를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현지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그녀는 인도네시아어를 마스터하고 직조과정에 함께 참여했다. 원하는 실을 만들기 위해 ‘오랑우탄’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일에 파묻혔다. 그 결과 민씨는 20승짜리 모시 원사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머리카락보다 더 가는 섬유로 한국에서도 생산이 중단돼 더 이상 명맥을 이을 수 없는 섬유다. 민씨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시와 ‘명주’의 결합을 시도했다. 모시가 갖고 있는 단점, 즉 훤히 비치고 잘 구겨지고 뻣뻣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전혀 모시 같은 않은, 부드러운 모시가 탄생했다. 때문에 이곳의 모시옷은 땀 흡수가 잘되고 가벼워서 겉에 스웨터를 걸치면 4계절 내내 입을 수 있다. 물론 물빨래도 가능하다. 민씨는 천연 염색기법도 직접 개발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살리기 위해 고대 문양을 연구해 천 속에 짜넣었다. “처음에는 머플러와 숄로 시작했는데 원단이 좋아서 블라우스, 와이셔츠, 속옷도 제작했어요. 속옷은 아토피성 피부에 좋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요. 그 외에 손수건, 이불, 웨딩드레스까지 품목을 다양화했죠. 모두 수작업이기 때문에 소량만 주문 제작되는데 대개 한 달이면 완성되지만 5∼6개월까지 기다릴 때도 있어요.” 2001년 프랑스 파리컬렉션에서 디자이너 겐조가 그녀의 옷을 즉석에서 네 벌이나 구매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민씨의 회사는 직원 300명을 둔, 평균 매출액 180만달러(약 20억원)의 중견기업이 되었다.
“미국·일본·중국에도 갤러리 숍 열 것” 직원들이 이 회사에 입사하려면 ‘남한테 기술전수를 해주지 않겠다’는 각서도 써야 한다. 민씨는 한산모시 뿌리에 경호원까지 두고 보관할 정도로 특별히 모신다. 그녀는 “제 사업 덕분에 살락 지역의 많은 가족들이 생계수단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민영경씨는 지난해 12월 또 한 번의 도전을 시작했다. 서울 성북동에 본사 겸 갤러리 ‘모시(moshee)’를 오픈했다. 민씨는 “인도네시아에서 모시 붐이 불자 다른 외국 디자이너들이 우리 농장에서 정보를 빼가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을 보고 이전을 결심했다”며 이전 이유를 밝혔다. 생산기지는 인도네시아에 그대로 둔 채, 본사에서는 해외 마케팅에 주력할 계획이다. 이미 국내에도 소문이 나서 지난해 6월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천황 영애(令愛)와 가와구치 요리코 외상을 위한 선물로 민씨의 모시를 준비해갔다. 민씨는 “우리나라의 자존심인 모시가 당대에 명맥이 끊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향후 일본과 중국, 미국에도 갤러리 숍을 열어 세계적인 ‘모시 전도사’로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란희 주간조선 기자(rhpark@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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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 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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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모시박사 민영경씨
가제: 인도네시아의 모시박사
방영일시: 2002년 11월 25일 월요일 밤 12:00~12:50
주요내용:
인도네시아 거리에서 만나는 여인들이 머리에 두르고 있는 숄은 색도,
문양도 가지가지이다. 엄격한 이슬람 규율 사이로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자의 마음이 엿보인다. 미모의 젊은 한국인 사업가 민영경씨의 모시
제품은 인도네시아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최고급 숄로 꼽힌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천연색은 이곳 여성들의 까무잡잡한 피부색과 잘
어울린다. 실용성을 따지는 남성들 사이에서도 통풍과 땀 흡수가
잘되면서도 질긴 모시는 단연 인기 최고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는
‘모시’라는 한국말이 이제 친숙하다.
재미교포2세로 미국에서 태어나 경영학을 공부한 민영경씨는 한국을
알기 전, 먼저 모시를 알게됐다. 알면 알수록 모시의 매력에 빠지면서
민영경씨의 고생도 시작됐다. 파리 명품 패션쇼에서 찬사를 받기까지
얻은 별명은 ‘오랑우탄’. 모시 만들기에 열중하느라 인도네시아
산중에서 베틀을 옆에 끼고 묻혀 지내는 동안 가족들이 붙여 준
별명이다. 한산에서 캐온 모시를 한뿌리 한뿌리 직접 심고, 한산모시
장인들에게 전수 받은 기술을 원주민들에게 가르쳤다. 천연 염색법을
응용해 모시에 색을 입히기까지. 민씨의 거친 손이 그간의 여정을
말해준다.
민씨를 힘들게 하는 건 주변의 편견이다. 젊고 싱글인 여자가
사업전선에 뛰어든 걸 보면 분명히 누가 도와줘서 할 것이라고 할 때는
너무 속상해 혼자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문다고 한다. 미국에서 학교
졸업한 후 막내딸이 고생하는 모습에 마음 아파하던 부모님 생각에 많이
속상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보다 유난히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부모 속도 많이 썩여 극성스럽다는 소리를 들었던 민영경씨는
그래도 모시와 함께 사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한국의 모시를 세계의 명품으로 만들 겁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는 젊은 여사장 민씨의 다짐이다.
출연자:민영경(31)
담당PD: 임혜선 프로듀서
기타1:촬영: 오봉희, 글.구성: 이영옥, 연출: 황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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