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자료실 ▒

찬비, 찬 안개에 온 산이 어둑한데

천하한량 2017. 11. 11. 16:07

9월 29일 계당에서의 즉흥시[九月二十九日 溪堂卽事]

 찬비, 찬 안개에 온 산이 어둑한데 

쓸쓸한 동산에는 국화가 아롱졌네
질 때까지 그 향기를 간직하려 할 뿐
밤마다 몰아치는 바람서리쯤이야

 

冷雨寒烟暝一山 냉우한연명일산
園林蕭索菊花斑 원림소삭국화반
但知抵死芳香在 단지저사방향재
不管風霜夜夜寒 불관풍상야야한

- 이황(李滉, 1501~1570), 『퇴계선생문집별집(退溪先生文集別集)』 권1 「시(詩)」

해설

   계당은 퇴계 선생이 강학하던 계상서당(溪上書堂)을 가리킨다. 이 시를 지은 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서당의 건립 및 철폐 연도를 보면 대강 짐작할 수는 있다. 이 서당은 선생이 51세이던 1551년에 건립하여 1557년 이전에 허물어졌다. 따라서 이 시는 그사이에 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1555년이나 1556년이 근사할 듯하다.

 

   퇴계 선생은 평생 매화를 몹시 사랑하였다. 매화를 읊은 시집 『매화시첩(梅花詩帖)』이 따로 전할 정도다. 그에 비해 전적으로 국화를 읊은 시는 위의 시와 「종국(種菊)」이라는 시뿐이다. 퇴계 선생이 하필 이 시기에 위의 국화 시를 읊은 배경은 분명치 않다. 다만, 음력 9월 29일이면 거의 지금과 비슷한 시기다. 이즈음 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끼면 왠지 다른 계절보다 더 쓸쓸하고 어둡게 느껴진다. 그 속에서 피어 있는 국화는 보는 이들에게 더 밝고 강렬한 인상을 주게 마련이다.

 

   더구나 국화는 대나무, 소나무와 함께 굴하지 않는 지조의 상징이다. 늦가을 서리를 이겨내고 홀로 피는 모습을 군자가 절의를 지키는 것에 비겨 선인들은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고 표현하곤 하였다. 연약한 몸이지만 매서운 서리를 견뎌내며 꽃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사철 변치 않는 푸른 기백을 자랑하는 소나무, 대나무의 굳셈과는 다른 기품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런 유의 시는 현대의 독자들이 식상하게 받아들이기 쉽다. 사물에 빗대어 지조를 강조하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생 자신의 이상과 학문을 삶에 투영하고자 노력했던 노학자의 진정성을 염두에 두고 음미한다면 다른 시에서 느낄 수 없는 감동이 있다.

 

   송(宋)나라의 주희(朱熹)가 황제에게 간언할 기회를 얻었을 때였다. 중신 중에 어떤 이가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로잡으시라.[誠意正心]’는 말은 임금께서 질리도록 들었을 터이니 이런 말은 진언하지 말라고 권한 적이 있다. 이때 주희는 거절하며 말했다. “평생토록 배운 것이 오직 이 네 글자뿐이니, 어찌 침묵하여 우리 임금을 속일 수 있겠는가?[吾平生所學, 惟此四字, 豈可隱默以欺吾君乎?]”

 

   진실함이 전제된 언론은 남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그 사람됨 때문에 그 말까지 폄하하지 말라는 공자(孔子)의 ‘불이인폐언(不以人廢言)’이라는 말씀이 있지만, 남의 글을 읽거나 말을 들을 때는 아무래도 그 사람의 삶과 연관해서 보지 않을 수 없다. 경험적으로 보면 그 사람의 삶과 말에 큰 괴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단지(但知)’는 제3구의 행위에 담긴 가치를 제4구의 행위에 담긴 가치보다 더 높이 쳐서 ‘그저 이렇게 할 줄만 알지, 다른 것은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하는 용법이다. 절구 제3구의 앞 두 자리에 ‘단지’를 쓰고, 제4구에서는 위치에 상관없이 ‘불(不)’, ‘막(莫)’ 등 부정적인 어기의 용어를 쓰는 것이 이 장법의 특징이다. 부정하는 말을 앞에 내고 ‘단지’를 뒤로 보내지 않는 것은 어순의 도치를 통한 강조 효과를 의도한 것이다.

권경열
글쓴이권경열(權敬烈)
한국고전번역원 성과평가실장

 

주요 역서
  • 『국역 국조상례보편』공역,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 『국역 매천집 3』, 한국고전번역원, 2010
  • 『국역 가례향의』, 국립중앙도서관, 2011
  • 『임장세고』, 한국국학진흥원, 2013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