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이의 혼례일에 선친을 그리며 |
| ||
1750년 설날 아침은 경주에서 동도팔사(東都八士)의 하나로 꼽히는 이위현(李渭賢, 1699~1752)의 집에도 찾아왔다. 없는 살림이라도 여느 집처럼 명절을 치르느라 분주한 가운데 이위현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이미 쉰을 넘긴 그에게는 마흔을 넘어 겨우 얻은 하나뿐인 아들이 있는데, 또 한 살을 먹은 자신은 점점 노쇠해져만 가고 겨우 한 살을 먹은 아들은 초례(醮禮)를 치르기에는 아직 어리기 때문이었다. 5, 6년은 지나야 제법 사내다운 티가 나고 그래야 장가를 보낼 수 있을 텐데 자신의 건강이 버텨줄지 의문이었다. 그 자신이 며느리를 보고 손주를 안고 싶기도 했지만, 행여 저 금쪽같은 아이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욕을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웠을까. 이러한 심정이 담긴 시를 짓는다.
1793년쯤으로 생각되는 어느 날, 이위현의 아들 수인은 초례를 치르러 신부 댁에 가는 아들 효영(孝永)과 동행하게 된다. 이미 쉰을 넘긴 그에게 마흔에야 겨우 얻은 하나뿐인 아들의 혼례식은 그야말로 인생에 몇 번 없는 경사였으리라. 백발이 성성한 나이로 온종일 말을 탔는데도 피로조차 모를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그는 참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열넷에는 부친을, 열다섯에는 조부를, 열여덟에는 모친을, 스물넷에는 처음 맞이한 부인을 잃었다. 게다가 선친 때까지는 그래도 형제가 적지는 않았는데, 선친에게 자식이라고는 자신과 일찍 죽은 누이뿐이었고, 자신에게는 그나마도 지금 장가를 가는 아들 고작 하나뿐이었다.
그 수많은 일을 겪는 동안 때로는 일찍 돌아가신 선친이 원망스럽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같은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 보니, 자신이 혼례를 치를 수 있는 나이가 되는 그 ‘오륙 년’을 기다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버텼을 아버지의 운명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마음이 울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또 한편으로는 아들의 혼례만은 자신의 생전에 치러낸 데서 온 감격이었을까.
가는 해를 보내고 오는 해를 맞으며 인류가 있어온 이래로 면면히 이어져 온 부자(父子)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
|
'▒ 한시자료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치를 깨닫고 자연을 닮은 삶을 살다’ (0) | 2018.05.13 |
---|---|
고전의 향연 - 옛 선비들의 블로그 ③권근 '양촌집' (0) | 2018.03.18 |
행복의 비결, 자족(自足) (0) | 2018.01.14 |
찬비, 찬 안개에 온 산이 어둑한데 (0) | 2017.11.11 |
부디 더디 늙으시길 (0) | 2017.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