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법으로 읽는 한시(3) 최시(最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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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윤은 조선 선조ㆍ인조 대의 문신이다.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공조 정랑(工曹正郎)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과 이괄(李适)의 난 때 의병활동을 하였고,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공신에 녹훈되기도 하였다. 특히 시에 뛰어나 중국에 사신을 가거나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 적임자로 우선하여 선발되었다.
이 시는 이광윤이 벼슬을 내려놓고 향촌에서 우거(寓居)하고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일단 시끄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한가로이 자연생활을 즐기는 여유가 시에 그림처럼 담겨 있어서 좋다. 그러나 좀 더 음미해보면 시에 담긴 뜻이 단순하지만은 않다. 도덕군자 같은 상투적인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염량세태(炎凉世態)에 대한 호오(好惡)를 느낄 수 있다.
도랑은 폭이 좁고 수량이 적어 평소에는 조용히 흐르다가 비가 내리면 갑자기 불어나 세차게 흐른다. 마치 국량이 좁은 사람이 권세가 없을 때는 숨죽여 지내다가 권세를 얻으면 요란을 떠는 세태와 비슷하다. 그에 비해 남산은 그 듬직한 자태만큼이나 변함이 없다. 이런 대비적인 소재를 단순하게 차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시(最是)’는 시인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대상을 드러낼 때 주로 사용하는 시어로서, ‘가장 ~한 것은 ○○이다.’라는 의미이다. 단순한 시어 같지만, 여기에도 호응하는 구법이 있다.
칠언 절구에서 제3구의 제3자와 제4자에 ‘최시’를 쓰고, 제4구 첫머리에 ‘의구(依舊)’를 놓아 받는 방식이다. ‘최시’는 때로 ‘오직 ~이 있다.’는 의미의 ‘지유(只有)’, ‘유유(惟有)’를 쓰기도 하고, ‘의구’는 ‘여전히’, ‘도리어’라는 의미의 ‘유(猶)’, ‘환(還)’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최시' 다음에 나오는 명사는 제4구의 주체가 된다. 제1ㆍ제2구에는 제3ㆍ제4구와 대비되는 대상을 설정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래야 뒤 구의 대상이 또렷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번화했던 옛 도회의 유허지에 그대로 남아 있는 버들을 의인화하여 망국의 아픔을 더욱 잘 부각시키고 있다. 이 시는 선인들의 한시 학습서였던 『당음(唐音)』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조의 시인들이 이 방식을 즐겨 사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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