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곳곳을 수놓은 천재 건축가의 유산…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
시원하게 뻗은 해변과 매력적인 골목들, 그리고 그 위에 아낌없이 빛과 열을 쏟아붓는 태양. 천혜의 자연환경과 지리적 조건이 캔버스가 되어 건축의 천재들은 그 위에서 마음껏 역량을 펼쳤다. 우리는 그저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이 펼쳐지는 이 도시를 발걸음 가는 대로 누비며 경탄하면 된다.
가우디 전에 세르다가 있었다
<세르다의 도시계획안 / 구엘 공원을 장식한 모자이크의 세부 모습>
여행자들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이름, 일데폰스 세르다(Ildefons Cerdà, 1815~1876)는 바르셀로나 사람 모두가 햇빛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해준 위인이다. 19세기 초 인구 밀도가 높아 전염병이 돌고 열악한 인프라로 몸살을 앓던 바르셀로나는 세르다의 도시계획안으로 새로 태어났다. 최초의 현대적인 도시계획이라 불리는 그의 계획안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그 혁신성과 효율성에 버금가는 도시를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세르다는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 개발을 막고 모든 건물과 거리가 동일한 일조량을 받을 수 있도록 똑같은 크기(113.3m×113.3m)의 모서리가 둥근 팔각형 블록 520개로 이루어진 격자 형태의 도시를 기획했다. 또 블록 끝을 열어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크기의 공원과 정원을 조성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는 새로운 건물들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 대부분의 블록이 닫힌 형태가 되었지만 그 누구도 따사로운 태양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유토피아를 닮은 세르다의 유산은 다행히 상당 부분 남아 있다.
도시 곳곳을 수놓은 천재 건축가의 유산
<가우디의 대표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 구엘 공원 입구>
현지인들에게 친절하고 또 평등한 세르다의 바르셀로나는 길눈 어두운 여행자에게는 곤혹스럽다. 그러나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 1852~1926)의 작품들이 있어 똑같아 보이는 골목과 광장들 사이에서 이들을 이정표 삼아 낯선 도시를 헤매지 않고 탐험할 수 있다. 바르셀로나가 낳은 건축가라고 하기에는 이 도시가 그에게 빚진 것이 너무나 많다. 가우디가 없는 바르셀로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그는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 주에서 태어나 평생 바르셀로나를 주 무대로 수많은 걸작을 이곳에 남겼다. 숙소를 어디로 잡든 대부분의 바르셀로나 여행자들은 스페인 최고의 관광지이자 가우디의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 성가족 성당)를 제일 먼저 찾는다.
곡선을 이토록 위엄 있게 사용한 건축가가 있었던가! 수려함과 우아함으로 그 앞에 서는 모두를 압도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가우디가 40년 동안 매진한 프로젝트로, 아직도 공사가 한창인 미완성 작품이다. 완공 목표 일정은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이지만 입장료 수익금과 기부금만으로 공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얼마나 더 걸릴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살아생전에 완공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빼앗긴 여행지와 다음을,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은 여행자에게 크나큰 위안이 된다.
천재는 시대가 그의 능력과 한계를 예상하지 못하기에 비로소 천재이다. 또 천재는 그 분야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까지 매료시킨다. 가우디의 힘은 건축 분야의 문외한까지도 그가 빚어낸 작품들의 고귀함 앞에 겸손해지게 한다는 점에 있다. 매혹적인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이치는 햇빛은 윤이 나는 성당 바닥에 물감을 풀어놓은 듯 그림을 그린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고운 빛깔의 향연 속에서 고개를 들어 기하학적 무늬로 가득한 천장을 감상하는 사람들 모두 시간을 완전히 잊고 성당의 일부가 되어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모른다.
<카사 밀라>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함께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이라는 이름 아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건축물로는 구엘 공원(Park Güell), 구엘 궁전(Palau Güell), 카사 밀라(Casa Milà), 카사 비센스(Casa Vicens), 카사 바트요(Casa Batlló), 콜로니아 구엘 성당(Colònia Güell)의 지하 예배실이 있다. 어떤 건축 양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영감과 상상력으로 만들었기에 가우디를 모르는 채로 바르셀로나를 여행해도 단박에 그의 손길이 닿은 곳을 알아볼 수 있다. 가우디의 작품들은 경쾌하게 하늘거리는 플라멩코 무용수의 치맛자락을 연상케 하는 곡선으로 이루어진 외관과 강렬한 색채의 마법에 걸린 내부로 이루어져 있다. 또 구엘 공원의 상징인 도마뱀상과 카사 밀라의 물결치는 파도와 같은 외벽에서 가우디가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햇살 한 줄기가 닿으면 깨어나 움직일 것만 같은 생동감 넘치는 조각들 사이를 거니는 재미에 구엘 공원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다음으로 사랑받는 인기 명소가 되었다.
<카사 바트요 / 카사 바트요의 내부>
과거의 영광은 지치지 않고 뻗어나간다
<람블라스 거리>
가우디의 작품은 대부분 세르다가 확장한 에이샴플라(Eixample)에 집결되어 있으나 세르다 이전 바르셀로나의 전부였던 구시가지를 소홀히 지나칠 수는 없다. ‘라발(El Raval)’, ‘바르셀로네타(La Barceloneta)’, ‘바리오 고티코(Barrio Gótico)’, ‘산 페레, 산타 카테리나와 리베라(Sant Pere, Santa Caterina y la Ribera)’ 등 네 구역으로 이루어진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과 느닷없이 나타나는 작은 광장들이 선사하는 즐거움도 크기 때문이다. 라발과 바리오 고티코를 나누는 1km 길이의 대로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붐비는 거리, 람블라스(La Rambla)다. 호안 미로와 피카소가 수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는 이 길은 여전히 그들이 보았던 꽃과 새와 먹거리를 파는 상점들로 수놓아져 있다.
람블라스에서 양옆으로 뻗어나가는 길을 따라 구시가지 깊숙이 파고들면 대성당과 여러 박물관, 전시관, 공연장, 도시 축제의 장으로 종종 쓰이는 교통 집약지 카탈루냐 광장, 그리고 가우디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건축가 도메네크 이 몬타네르(Domènech i Montaner, 1850~1923)의 걸작 카탈라냐 음악당(Palau de la Música Catalana)을 만날 수 있다. 현대 카탈루냐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이 음악당은 람블라스 거리를 거닐다 쉽게 찾을 수 있어 구시가지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마음이 동해 ‘오늘 밤엔 클래식 음악을 들으러 가볼까’ 하고 찾기에 좋다.
<카탈리나 음악당>
수천 개의 채색 유리 조각으로 꾸민 벽과 천장, 묵직하게 매달려 빛나는 샹들리에는 관객들을 더욱 들뜨게 한다. 조명은 꽤 어둡지만 은은하게 감도는 붉은빛은 엉덩이가 가벼운 꼬마 관람객도 조용히 앉아 2시간 정도 연주되는 관현악곡을 감상하게 만든다. 두꺼운 붉은 막이 천천히 걷힌 뒤 하루 종일 도시의 소음에 시달린 귀를 고운 선율로 씻어낸다. 여행 중에는 오감의 모든 돌기가 섬세하고 날카롭게 돋아나는데, 모처럼 다른 감각은 잠시 쉬도록 하고 오로지 듣기에만 집중한다.
공연을 보고 나오면 밤이 온전히 내린 도시는 가로등과 음악당의 조명으로 황금색으로 빛난다. 훌륭한 공연은 시에스타 못지않게 피로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해준다. 더없이 상쾌한 기분으로 바르셀로나의 밤거리로 힘차게 걸어 들어간다.
마음에 오래 남는 빼어난 건축미
바르셀로나는 서울 면적의 1/6밖에 되지 않지만 여행지의 크기와 그곳에서 느끼는 감동의 크기는 비례하지 않는다. 일주일 혹은 한 달을 발이 퉁퉁 붓도록 바삐 돌아다녀도 다 보지 못할 새로운 모습을 연달아 꺼내 보여주는 이 알찬 도시의 첫인상과 마지막 인상은 그 건축미다.
좋은 건물을 짓는 것은 어렵다. 건물은 그 안에 무엇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보다 드나드는 사람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무척 실용적이지만 전혀 아름답지 않은 건물을 세우기란 얼마나 쉬운지, 또 보기에는 좋은데 발걸음은 그리로 향하지 않는 곳은 얼마나 많은지. 누구라도 독점해서는 안 될 태양을 고르게 분배한 세르다의 도시계획 위에 세워진 가우디의 보석들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각각의 목적에 부합하는 뛰어난 실용성까지 갖췄다. 낮에도 밤에도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환하게 반짝이는 천재적인 건축물들의 영롱함은 쉬이 가시지 않아, 여행을 마치고도 한참 동안 눈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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