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사이사이상 시상식 1962년 8월
photographer Unidentified
1962년 8월 막사이사이상 시상식을 마치고 수상자들과 함께 한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1962년 8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재단이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학 부문의 수상자로 장준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었다.
막사이사이상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일제 침략자들에 맞서 게릴라전을 지휘하고 1953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필리핀의 발전에 이바지한 라몬 막사이사이(1907~1957)를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에 제정되었다.
그 상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장준하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내가 그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차치해 놓고서라도 국내에서는 ‘부패언론인’이라고 낙인을 찍어 정정법으로 묶어 놓은 사람을 갖다가 외국에서는 “지식인들이 국가 재건에 정력적 참여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불편부당한 잡지를 발간함에 있어서 성실성을 나타냈고 금전상의 이익이나 정치적 권력을 잡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한국의 새로운 세대를 계몽하여 그들로 하여금 더욱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길을 찾게 하였다”라는 내용의 수상 결정서를 발표하고 상까지 주며 격려하여 주었으니 참 아이로니컬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준하문집 3>, 41~42쪽)
장준하가 막사이사이상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국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박정희 군사정권이 그에게 안겼던 ‘부패언론인’이라는 오명은 말끔히 씻겼다. 그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던 <사상계> 독자들의 태도가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시중에는 이런 소문이 나돌았다. “막사이사이상은 이승만과 박정희가 장준하에게 준 것이나 다름 없다.”
당시로서는 한국의 국위라는 게 썩 보잘 것 없던 때였다. 국위라기보다는 오히려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세계에 오명을 퍼뜨리기 일쑤였다. 외국과의 축구나 권투시합 하나만 이겨도 온 국민이 들썩하게 반기던 때인데 장준하가 이런 상을 탄다니 여간한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군사정부 당국도 속으로야 땡감을 씹은 맛이지만 겉으로 이 같은 국민적 쾌거이자 국위 선양의 오브제를 잘못 건드려, 소련에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게 노벨 문학상을 못 받으러 가게 하는 식의 바보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314쪽)
장준하가 막사이사이상을 받으려고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로 떠나기 전에 <사상계> 동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를 만나고 가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하면 군사정부와 화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상 타러 간다고 그 사람을 찾아 갔다 하면 후세에 누가 나를 장준하로 보겠는가.”
장준하가 막사이사이상을 받고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962년 11월 어느 날 중앙정보부의 고문인가 하는 직책을 가진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근자에 미국의 시시주간지 <뉴스위크>가 한국 군사정부의 4대 의혹(증권 파동, 새나라자동차, 빠찡꼬, 워커힐) 등 부정과 비리를 파헤친 기사를 1쪽 반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그에 대한 반박 기사를 한국의 권위지인 <사상계>에 실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는 견해가 바로 그 <뉴스위크>지의 견해와 같은 것인데 아니 그보다도 몇 배나 더 심각한 것인데 무엇을 어떻게 반박하라는 말이냐?” (···) 그들은 나의 말에 ‘이 사람이?’ 하는 듯싶은 묘한 안색을 지었지만 나 역시 그들 못지않게 ‘당신네들이 <사상계>를 어떻게 보고 온 건지 알 수가 없다’ 하는 얼굴색을 지어 보였다.
자유당 때에 ‘국부 이승만 박사의 계시’ 운운한 그 해괴한 글을 실으라고 한 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사상계>가 <사상계>인 이상 그 따위 글을 실어가며 구차히 살기를 원치 않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준하문집 3>, 43 쪽)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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