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반대투쟁 Korea. 1964. 6.3
photographer Unidentified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조차 받지 못한 채 저자세로 진행된 한일회담은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1964년 6월 3일 시위가 절정에 이르자 계엄령이 선포된다.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을 맡은 ‘청년 이명박’은 6-3 시위를 대규모로 준비하고 추진하는데 앞장섰다. 3월24일 서울시내 대학생 5천여명이 시위를 벌였고 이 날 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지면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대일 굴욕 외교 반대’에서 ‘군사 정권 타도’로 이슈가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81명이 부상하고 288명이 연행되었다.
계엄 당국은 서울대학교의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그리고 고려대학교의 이명박 이 경우 박정훈 등을 이날 소요의 주동자로 지목해 수배령을 내렸다. 이날 이후 ‘청년 이명박’은 길고 어두운 도피의 나날을 보냈다.
결국 서울시경에 찾아가 자수를 했지만 ‘국가내란 선동죄’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구속되었다. 이후 ‘청년 이명박’은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1964년 3월 한일국교정상회담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으로서의 청구권 문제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1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으로 변질된 소위 김종필 오히라 메모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온 국민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거리로 나왔다.
한일회담반대투쟁은 64년 6월 3일 절정에 달했다. 전국에서 대학생을 비롯한 1만2천여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정권퇴진을 요구하였고, 이 시위는 4.19 이후 최대의 시위가 되었다. 이에 박정권은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른바 6.3사태였다.
1965년 1월 18일, 6.3항쟁으로 중단되었던 한일회담이 속개되었고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면서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이 시작되었다. 3월 26일 동국대의 시위를 시발로, 4월 2일에는 원주 대성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고, 대학과 고교에서 성토대회와 시위가 잇달았다.
그리고 4월 16일에는 동국대 학생 김중배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대학가의 시위는 더 격렬해졌다. 시위가 날로 격화되자 정부는 전국 34개 대학, 119개 고등학교에 4월 24일까지 휴교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시위는 전국의 대학으로 계속 확산되었다.
5월이 되면서 학생들은 한일회담에 깊이 관여하는 미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5월 10일 서울대 법대 학생들은 미국에 대해 한일회담에 개입하지 말 것을 촉구했고, 6월 27일 이화여대 학생들은 「워싱턴 데일리뉴스」에 한일회담을 간섭하는 미국을 규탄하는 서한을 보냈으며, 6월 29일 고려대 시위에서는 ‘양키여 침묵하라(Yankee Keep Silent)’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5월 중순부터 학생들은 연일 시위, 동맹휴학, 단식 등으로 저항했다. 6월 14일 서울대 법대생 200여 명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각 대학으로 파급되었다. 6월 22일, 전국에 갑호비상령이 내려진 가운데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이날 서울대 법대생 18...
1964년 3월 한일국교정상회담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으로서의 청구권 문제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1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으로 변질된 소위 김종필 오히라 메모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온 국민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거리로 나왔다.
한일회담반대투쟁은 64년 6월 3일 절정에 달했다. 전국에서 대학생을 비롯한 1만2천여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정권퇴진을 요구하였고, 이 시위는 4.19 이후 최대의 시위가 되었다. 이에 박정권은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른바 6.3사태였다.
1965년 1월 18일, 6.3항쟁으로 중단되었던 한일회담이 속개되었고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면서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이 시작되었다. 3월 26일 동국대의 시위를 시발로, 4월 2일에는 원주 대성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고, 대학과 고교에서 성토대회와 시위가 잇달았다.
그리고 4월 16일에는 동국대 학생 김중배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대학가의 시위는 더 격렬해졌다. 시위가 날로 격화되자 정부는 전국 34개 대학, 119개 고등학교에 4월 24일까지 휴교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시위는 전국의 대학으로 계속 확산되었다.
5월이 되면서 학생들은 한일회담에 깊이 관여하는 미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5월 10일 서울대 법대 학생들은 미국에 대해 한일회담에 개입하지 말 것을 촉구했고, 6월 27일 이화여대 학생들은 「워싱턴 데일리뉴스」에 한일회담을 간섭하는 미국을 규탄하는 서한을 보냈으며, 6월 29일 고려대 시위에서는 ‘양키여 침묵하라(Yankee Keep Silent)’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5월 중순부터 학생들은 연일 시위, 동맹휴학, 단식 등으로 저항했다. 6월 14일 서울대 법대생 200여 명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각 대학으로 파급되었다.
6월 22일, 전국에 갑호비상령이 내려진 가운데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이날 서울대 법대생 185명이 단식으로 졸도했고 전국에서 성토대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한일협정이 1965년 6월 22일 정식으로 조인되자 6월 23일 전국 각 대학과 고교에서 한일협정 조인 무효화와 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성토대회와 시위, 단식이 계속되었다. 7월 7일 이화여대생들은 국회청원을 위한 한일협정비준반대 가두서명에 나서 약 3만 명의 서명을 받기도 했다.
학생들의 끈질긴 한일회담 반대투쟁과 박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교수, 변호사, 문인, 개신교 목사 등 지식인들도 대거 참여하기 시작했다. 7월 초에는 개신교 목사 100여 명이, 7월 중순에는 재경 대학교수단 354명이 회담 반대의 강력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공화당은 7월 14일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기습적으로 발의하였다. 이에 예비역 장성 11명이 회담에 반대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기독교계와 불교 및 유교 등 종교계에서도 성명서, 연합기도회, 비준 반대 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7월 말에는 대학교수단・예비역 장성・종교인・법조인・문인・여성계 등 각계 인사 300여 명이 조국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했다. 윤보선 등 야당 의원들은 탈당계를 제출하고 야당의 해체를 주장했다.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안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되면서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투쟁이 격화되었다. 8월 17일 서울대 법대 학생회의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선언식을 시작으로 하여 학생들은 연일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8월 23일에 이어 전국 대학 및 고교생 1만여 명의 시위에 이어 8월 24일에는 서울지역 대학생 1만여 명이 기말시험을 거부하고 학교별로 성토대회를 가진 뒤, 거리로 나와 경찰과 충돌했다.
박정희는 군인을 투입하여 시위를 막았다. 8월 25일 오후 500여 명의 무장 군인들이 고려대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군화로 짓밟고 곡괭이 자루로 패며 수십 명을 연행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8월 26일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주요 대학에 군인이 상주하였다. 이로써 약 7개월간의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도 또 다시 군인에 의해 실패로 막을 내렸다.
1964년과 1965년 2년간에 걸쳐 계속된 한일협정 반대투쟁은 무장군인의 진압과 군대의 학원 강점으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학생들은 이 투쟁을 통해 박정권의 폭압성과 미국의 실체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고, 이후 1979년까지 지속된 박정희 독재와의 긴 투쟁의 실마리를 열었다.
한일협정으로 한일관계는 정상화되었지만 이 협정은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였고, 오늘날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개인청구권 문제, 독도분쟁 등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정부는 2004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였고, 2005년 1월 한일협정 일부문서를 공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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