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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구제가 불가능한 나라”

천하한량 2016. 8. 24. 01:52

- [추적] 110년 전 조선의 국가 지도부

“고종은 열강의 분열 이용해 독립 유지하려는 나약한 거간꾼, 양반 계층은 음모를 통해 사적(私的) 이익  추구하는 집단”

일본 군대는 청일전쟁이 시작된 1894년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할 때까지 50년간 만주, 중국대륙, 시베리아, 동남아, 태평양군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를 누비며 정복전쟁을 치렀다.

러일전쟁은 그 시작을 알리는 전쟁이었고,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차지하면서 열강 대열에 오르게 된다. 일본 군대가 50년 간 아시아를 누비며 정복전쟁을 벌일 때 이 땅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 

청일전쟁에서 일방적 승리를 거두고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의해 ‘피의 대가’로 차지한 요동반도를 반납했던 일본은 절치부심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에 나섰다.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으로 전함 건조, 육군 사단을 7개 사단에서 13개 사단으로 확대하는 등 급격한 군비 확장에 나섰다. 일본은 청일전쟁 배상금의 46%를 영국에 군함 건조비로 지불했다. 결과적으로 청일전쟁의 달콤한 열매를 수확한 것은 영국이었다.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이 체결된 1895년부터 러일전쟁이 개전된 1904년까지의 10년은 한국 입장에서 보면 국가 개혁을 통해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조선의 국가 지도부는 그 기회를 허송세월로 탕진하고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외세를 끌어들여 국가 자존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는 힘 센 자가 약한 자를 찍어누르고 모든 이권을 차지하는 것이 정의인 제국주의 시대였다. 외세는 산타클로스가 아니었다. 그들이 뭐가 아쉬워 농민 반란조차 스스로의 힘으로 제압할 수 없는 허깨비 조선의 독립을 허락해주겠는가. 

게다가 당시의 패권국은 영국이었고,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세력은 러시아였다. 영국은 자신들의 패권에 도전하는 러시아를 전 지구적 차원에서 봉쇄하는 과정에서 동북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일본에게 맡겼다. 

▲ 제물포항 인근 바다에서 일본 군함의 기습 공격을 받고 자침한 러시아 해군의 바랴그 호. 일본의 승리로 끝난 1904년 2월 9일의 제물포 해전에서 조선은 우리 앞 바다에서 진행된 이 전투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정식 교수는 한국 근대사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시기를 조선의 국가 지도부가 양심적이고 유익하게 사용했다면 한국의 미래는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극동과 세계의 역사도 상당히 변했을지 모른다고 아쉬워했다.   

그 무렵 한국에 온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불결과 악취의 고통을 호소했다.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 지도자들의 갑신정변 쿠데타가 실패했을 때 해외로 망명하지 못하고 체포된 개화당 인사들과 그 가족들이 도륙을 당했다.

조선에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은 당시 처형된 자들의 시신이 거리에 내걸린 장면을 목격하고 자신의 일기<알렌의 일기-구한말 격동기 비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불결, 악취, 시체를 뜯어먹는 개… 

‘오늘 나는 민영익의 집으로 가던 길에 거리를 지날 때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길거리,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에 머리, 손발이 절단된 시체 4구를 보았다.

서울 시내 여러 곳에서 이와 같은 시체더미를 어디서나 볼 수가 있다. 그것은 똑같은 목적에서 시체를 공개 전시하고 있다. 나는 이들 시체가 바로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미처 도망하지 못하여 체포되어 처형된 반역자의 시체임을 알았다. 

이곳에 전시된 4구의 시체는 이 지역에 할당된 시체다. 이들 시체는 3일간 효시(梟示)되고 있는 것이다. 개의 사육제인양 개들이 시체더미 위로 올라가서 살점을 뜯어먹고 있었다.”(1895년 1월 30일). 

구한말 조선은 미신과 질병의 나라였다. 1897년 조선을 여행하고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란 저서를 출간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한국이 귀신을 위해 매년 250만 달러를 허비한다고 기록했다. 1896년 한국의 수출액이 473만 달러, 수입액은 654만 달러 때의 일이다. 당시 고관대작들은 물론 민중들도 전염병이 돌면 귀신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민비도 미신을 대단히 좋아하여, 그녀가 임신했을 때 48일간 황소머리와 기타 동물을 희생양으로 제단에 바쳐 제사를 지냈다. 윤치호는 민비에 대해 “그 영리하고 이기적인 여인이 미신 섬기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백성을 열심히 섬겼더라면 그녀의 왕실은 안전했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청일전쟁 당시 원산에 상륙하여 평양 전투를 벌였던 일본군 보병 22연대의 하마모토(濱本利三) 소위는 자신이 쓴 ‘일청전쟁 종군비록(秘錄)’에서 원산 상륙 당시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더욱 놀란 것은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불결하다는 것이다. 도로는 쓰레기와 인분으로 넘쳐나고, 불결함의 극치인 돼지는 기세가 올라 곁눈질로 사람들을 노려보면서 도로를 활보한다. 악취가 코를 찔러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러일전쟁 종군기자가 본 한국 

그로부터 10년 후인 1904년, 러일전쟁을 위해 인천-평양을 거쳐 압록강 지역으로 행군하는 일본군을 종군 취재했던 미국 작가 잭 런던은 <조선사람 엿보기-1904년 러일전쟁 종군기>라는 저서에서 당시의 한국 사정과 한국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서양인이 볼 때는 도로라고 하기에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웅덩이의 연속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정말 왕도(王道)라고 한다. 비가 조금만 와도 이 길은 진흙으로 가득 찬 강으로 변한다. 다리를 건널 때는 매우 조심해야 되는데, 믿겨지지 않겠지만 발목을 한두 개 부러뜨리는 게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양반들은 모두가 도둑이다. 백성들은 그들이 자기들 것을 으레 빼앗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백성들은 지배계급이 도둑놈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도둑질에도 단계가 있는데, 그들이 말하는 바로 강탈의 단계인 것이다.

절제 있고 합법적인 강탈이었다. 그렇게 합리적인 방법으로 도둑질한 군수는 자기 부하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그가 떠날 때 부하들이 마을의 문 근처에 그가 절제 있게 훔친 기념으로 기념비를 세울 장소가 선택되었다.”

‘악취가 코를 찔러 구토가 나올 지경’이고 ‘양반들이 절제 있고 합법적인 강탈’을 마구 자행하던 그 무렵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환궁하여 1897년 2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완전한 독립을 선포한다. 

A 말로제모프의 <리시아의 동아시아정책>(지식산업사)에 의하면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자신의 목숨을 의탁할 정도로 우호적인 친러 정책을 수행한 대가로 고종은 러시아 황제로부터 “대한제국 공포와 고종의 황제 칭제를 인정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는 이런 이유 때문에 대한제국의 출범은 적극적인 친러 정책의 결산이라고 주장한다. 

허동현 교수는 ‘대한제국의 모델로서의 러시아’라는 논문에서 1897년 10월 11일 공포된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정책이 만주 진출로 바뀌기 전, 비테의 조선 적극 진출정책을 배경으로 한 것이지 자력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분석했다.

러시아가 여순과 대련 항구를 조차하고 동청철도 건설을 통해 만주에 집중하면서 한반도에서 러시아 세력이 퇴조하고 일본의 압력이 강해지자 고종은 1902년 평양에 ‘북쪽 지방의 수도’인 서경(西京) 건설 사업에 착수했다. 그 이유는 황제국가로서의 면모 과시보다는 러시아를 다시 끌어들여 왕조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허동현 교수는 분석한다.

황제 고종은 국력이 고갈되어 빈사상태에 놓여 있던 그 무렵, 왜 뜬금없이 평양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 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이윤상의 논문 ‘대한제국기 국가와 국왕의 위상 제고사업’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식은 러시아는 1900년 7월 일본에게 “조선에서 러일 양국의 세력범위를 확정하자”고 제안했다. 앞서 1896년 북위 39도선(혹은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 분할을 제기했던 일본 정부가 이를 수용하려 하자 일본의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 등은 “우리가 조선 전체를 독자적으로 차지해야 한다”면서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만약 일본이 이 안을 수용했다면 한국은 1945년이 아니라1900년에 남북이 분단되어 러시아와 일본의 보호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고종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일·러의 조선 분할에 대비하기 위해 북부지방에도 궁궐이 필요해 서경 건설에 나섰다는 것이 이윤상의 연구 결과다. 

국가능력 향상보다 황실 위엄이 더 중요 

고종은 실질적인 독립을 위해 국가 능력을 향상시키는 노력보다는 재정상의 심각한 곤란에도 불구하고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열강의 군주들과 대등한 지위를 상징하는 명예나 훈장을 얻는 데 더 관심을 기울였다.

1902년에는 자신의 등극 40주년 기념행사에 각국의 특별사절단을 초청하기 위해 덕수궁 내에 서양식 건물을 짓는 등 성대한 준비를 했지만, 재정 고갈로 행사는 취소됐다. 

당시 일본과 러시아는 임의로 한반도 분할을 논의하는 등 한국은 열강들의 흥정의 대상이었다. 1894년 11월,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는 “한국 정부는 부패가 너무 만연했기 때문에 모든 공공기관을 일본이나 그 외 다른 외국의 엄격한 감독 아래 두지 않는 한 개선의 희망이 없으며, 이것이 한국 문제의 유일한 해결 방안”이라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을사보호조약 이전까지 서울 주재 미국 공사로 활동하던 알렌도 “조용한 아침(morning calm)이란 이제 옛말이다. 조선은 이제 아침이 지나 춥고 음울한 고요의 땅이 되었다. 국민들은 자치 능력이 없으며 과거와 같이 지배자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당시의 암담한 조선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일본 수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895년 영국 공사 어네스트 샤토와의 대담에서 “한국의 독립은 현실성이 없으며, 한국은 주변의 가장 강력한 국가에 병합하든가 보호 아래 두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외교사절들이 한국을 불신하는 근원은 다름 아닌 고종의 한심한 통치능력이었다. 

구대열 이화여대 교수는 ‘다모클레스의 칼-러일전쟁에 대한 한국의 인식과 대응’이란 논문에서 서양 외교관들은 고종을 통치자로서의 자격이 완전히 결여된 인물로 판단했다고 한다.

한 나라의 황제가 이 지경이었으니 그 아래 국가 주요 대신들은 끝없는 정변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국가가 어떻게 되든 말든 자신의 안전만을 추구했다. 이들 주요 관리들은 친분 있는 외국인들에게 정변이 발생하면 은신처를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러일전쟁 당시 우리의 민낯

구대열 교수는 구한말의 대신들은 대부분 일본, 러시아 등 외세와 연결되어 있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외세의 이권 쟁탈과 대립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조던 영국 총영사는 “조선 조정은 내각 위기가 끊이지 않아 외국 공관들은 정부 각료가 1주일에 한 번 씩 갈렸다는 통고를 접수할 틈도 없을 정도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조지 케넌은 ‘아웃룩(Outlook)’이라는 잡지(1905년 10월 7일자)에 한국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현존하는 한국 정부의 활동 실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그들이 간신히 생계를 위하여 벌어들이는 모든 것을 간접 또는 직접으로 수탈하며, 실제로 되돌려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생명 재산에 대한 아무런 적절한 보호책도 제공하지 않는다. 

눈에 뜨일 만한 아무런 교육시설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도로 건설도, 항만 개량도 하지 않는다. 해안에 등대도 없다. 도로의 청소와 위생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전염병의 예방이나 단속 방안도 취하고 있지 않다. 무역과 산업을 장려하는 노력도 없다. 가장 저속한 미신을 장려하고 있다. 

현대에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인권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거짓과 부정과 배신과 잔인성과 세상을 비웃는 만행을 일삼는 본보기를 국민에게 보임으로써 그들을 타락시키고 풍속을 문란 시키고 있다.’ 

이것이 러일전쟁 당시 우리의 민낯이었다. 

구한말 서양 외교관들의 눈에 비친 고종 

▲“고종은 병적으로 미신에 빠져 있으며, 1895년 갑오개혁 기간 중 궁중에서 쫓겨났던 무당들이 궁중의 모든 일에 영향력을 미치고 국고(國庫)로 들어가야 할 세금까지 가로챘다.”(알렌 주한 미국 공사) 

▲“고종은 전투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던 1904년 11월에도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무당들의 말들 듣고 안심했다.”(알렌 주한 미국 공사)

▲“고종은 돈에 관한 한 완전히 무모하며, 자신의 사치 방종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관직을 함부로 팔고 있다.”(힐리에 주한 영국 총영사)

▲“고종은 가장 어리석은 인물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유일한 기술이란 적대적인 세력을 대립시켜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보호하려는 것뿐이다. 그 결과 고종은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망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조던 주한 영국 총영사) 

▲“고종은 금광이나 전차 등 열강에게 이권을 줄 때에도 자기에게 돌아올 배상금을 중시했다. 일본이 이를 충분히 이용, 1차 한일의정서 조인 후 고종이 과거에 향유했던 모든 특전을 거의 허용함으로써 그를 안심시켰으며, 나아가 일본 천황의 선물로 50만 원, 경부선 이익금 일부와 경의선 이익금까지 보장하는 등 그의 환심을 사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조던 주한 영국 총영사) 

▲“궁중은 여러 파벌들이 권력을 쟁탈하기 위하여 싸우는 무대이며, 너무나 많은 파벌들이 황제에게 각기 다른 진언을 하기 때문에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하루는 용암포가 개장될 것이라고 했다가 다음날에는 의주를 열 것이라고 했다가, 또 그 다음날에는 모두 열지 않겠다고 한다.”(조던 주한 영국 총영사)

▲“아시아에서도 한국은 구제가 불가능한 국가다. 고종은 열강 사이의 분열을 이용해 독립을 유지하려는 나약한 거간꾼이고, 양반 계층은 음모를 통해 사적(私的)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익(私益) 집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치권을 포기하고 대신 일본의 지배를 수용해야 한다.”(윌라드 스트레이트, 러일전쟁 당시 AP통신 전쟁특파원, 서울·심양 주재 미국 부영사 및 총영사)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dragon003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