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이
49세 때인 1699년(숙종25) 6월 경기도 광주의 요소(窯所)에서 선고(先考) 묘지명의 지석(誌石)을 굽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도공(陶工)에게 틈틈이 몇 종의 기명(器皿)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고 그것에 대한 명문(銘文)을 지었는데, 윗글은 그중 하나인 세숫대야에 대한
명문이다. 그는 이 외에 밥그릇, 술 단지, 등잔, 필통, 연적에 대한 명문도 지어 옛사람들이 기물을 통해 경계했던 뜻을
붙였다.
얼굴을 하루라도 씻지 않는 사람은 없다. 더럽지 않아도 자고 일어나면 씻고, 외출했다 돌아오면 씻는다. 그런데 마음에
더러움이 낀 것에 대해 사람들은 무심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닦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것도 하루 동안 쌓인 더러움이 아니라
종신토록 쌓인 더러움인데도 말이다. 마음에서 남을 미워하는 악이 자라도 도려낼 줄 모르고, 남을 미워하느라 만신창이가 되어도 치료할 줄을
모른다. 또한, 마음을 가꿀 수 있는 좋은 글을 읽는 것도 인색하다. 이는 얼굴이라는 외면은 중시하면서 마음의 내면은 경시하는 것이니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어느 주말 아침 빗소리에 눈을 떴다. 간만에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다가 서둘러 베란다로 나갔다.
아파트에 살면 비가 오는 날에야 시원스레 유리창을 닦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호스의 세찬 물줄기로 창을 닦고 나니 깨끗해진 창으로 세상이
맑고 투명하게 비쳤다. 문득 마음도 대청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에 자신만의 집을 지어놓고 온갖 쓰레기들을 내버려둔 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반백 년 넘는 세월을 지냈으니, 마음을 대청소하는 일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닐 듯하다. 마음속에 쌓인 온갖 탐욕과 증오 그리고 불신과 오만을
쓸어내면 비워진 자리에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들어찰 것 같아서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왔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난 여전히 마음의 대청소를 시작하지 못했다. 하여 오늘을 시점으로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져본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무엇을 이루어야겠다는 욕심도 내려놓아야겠다고. 또한, 세면대나 거울 등에 옛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명을 써 붙여 스스로를 경계하는
문화가 되살아났으면 좋겠다. 나 같이 머리 나쁜 사람도 그 명을 볼 때마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