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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아빠의 절규, "세월호 2년, 모두가 원망스럽다"

천하한량 2016. 2. 15. 18:28

인터뷰] 활동중단 선언한 유민아빠 김영오씨 “말로만 힘내세요, 같이 싸워주는 사람 하나 없다”

[미디어오늘이하늬 기자]

김영오씨를 처음 만난 건 2014년 4월말 진도에서였다. 그는 아직 아이를 찾지 못한 가족들을 떠날 수 없다며 진도체육관에서 지내고 있었다. 큰딸 유민이는 4월23일에 바다에서 나왔다. 164번. 이후 김씨는 곡기를 끊고 머리를 깎고, 걷고,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행사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지칠만도 한데 김씨는 사적인 자리에서도 “열심히 해야지”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그가 지난달 만남에서 처음으로 험한 말을 쏟아냈다. “다 원망스럽다. 가족도 원망스럽고 싸움에 앞장서라고 한 사람들도 원망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들 아버님 힘내세요, 하지만 주변을 보면 관심도 없고 같이 싸워주는 사람 하나 없다”고도 말했다. 생활고도 그를 괴롭히는 원인이라고 했다. 그는 32만원짜리 원룸에서 혼자 지낸다.

며칠 뒤 ‘유민아빠 김영오’ 페이스북 페이지에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활동은 잠정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투쟁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싸우고 싶어도 돈이 없어 싸울 수 없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합니다.” 건조하게 쓴 글임이 보였다. 11일 전화로 최근의 몸과 마음 상태를 구체적으로 물었다. 통화는 2시간 가량 진행됐다.

▲ 지난달 29일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유민아빠를 만났다. 사진=이하늬 기자

“치킨집 하는 형에게 미안하다”

-돈이 없어서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사정이 어느정도길래?

“당장 월세랑 공과금, 보험료, 세금 낼 돈이 없다. 월세가 비싸다. 방 한 칸인데 32만원이다. 아직 월세가 밀리지는 않았는데. 그냥 그런 것들 때문에 그렇다. 먹고 사는 문제다.”

-그럼 그동안은 어떻게 생활했나? 모아둔 돈이 있었나?

“알겠지만 내가 돈이 어디있나. 나는 원래 가난뱅이다. 원래 1500만원 정도 빚이 있었는데 세월호 이후에 6500만원으로 빚이 늘었다. 형한테 빌린 돈만 2500만원, 은행에서 2000만원, 아는 사람한테 1000만원, 보험에서 빌린 돈이 1000만원 가까이 된다. 이제 은행권에서는 더 이상 대출이 안된다.”

그래도 형이 여력이 조금 있는 것 같다고 말하자 “형도 은행에서 꾸어서 내게 빌려준 거다. 형 형편도 뻔히 아는데 이제는 손 내미는 것도 너무 미안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씨 형은 안산시 월피동에서 치킨가게를 한다.

-언론에서 가족들이 7억, 8억 받았다고 보도됐다. 그 돈이 있지 않나?

“그런 질문 좀 그만해라. 여행자 보험 1억원, 국가위로금 1억원, 국가배상금 3억원, 국민성금 2억원.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8억이다. 국가위로금과 국가배상금은 받지 않고 소송을 제기했다. 여행자 보험은 나오자마자 애들 엄마에게 주었다. 국민성금도 나는 이혼가정이기 때문에 80%가 아이들 엄마에게 간다.”

-원래 돈도 없었다면서 왜 돈을 하나도 받지 않았나. 싸우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일찍 끝날 줄 알았다. 이렇게까지 오래 갈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 회사에도 사표가 아니라 휴직계를 냈던 거다. 그때는 내가 단식을 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을 때니까. 진상규명이 어느 정도 되고 나면 회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나는 정규직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김영오씨에게 쏟아지는 막말 메시지들. 사진=이하늬 기자

“솔직히 이제는 그 사람들 원망스럽다”

‘정규직’ 이야기가 나오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어떻게 해서 얻은 정규직인데… 이 나이에 정규직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12년 충남 아산의 차체(車體)부품 생산업체에 2012년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특근과 야근을 도맡아 할 정도로 일만 했다. 그리고 이듬해 정규직이 됐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정규직인데, 나중에 회사에 사표를 냈다. 왜 그런건가?

“휴직계를 내고 상황을 보다보니 어? 이거 길어지겠다 싶었다. 일단 은행에서 2000만원 대출을 받고 그 돈으로 지내다 회사에는 2015년 1월에 사표를 냈다. 더 이상 휴직도 할 수 없고 남아있는 휴가도 없었다. 그리고 그 때는 이 생각 저 생각이 안 들고, 일단 대출받은 돈이 있으니 싸우자. 그렇게 생각했다.”

-주변에서 직장을 알아봐준다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이건 정말 말하기 어렵다. (잠시 침묵) 당시 세월호 진상규명을 도와주시던 분들이 ‘아버님 싸우셔야죠. 한달에 120만원씩 정도면 괜찮으세요?’라며 직장을 알아봐주겠다고 했다. 구체적인 것까지 이야기가 됐다. 사실 그래서 당당하게 휴직계를 냈던 것도 있다. 노력을 많이 해줬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그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나는 정규직이었는데…(침묵)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지금도 관심을 갖고 싸워주시는 분들이다.”

그는 복합적인 감정이 드는 듯했다. 지난 달 말 만남에서도 그는 그 사람들을 향해 “무책임하다”며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다가도 “그래도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이 이야기를 기사화 한다니 “그 사람들 등에 칼을 꽂는 것 같다”며 미안해했다.

“나라고 왜 돈 욕심이 없겠나”

-돈 받지 않은 걸 후회하지는 않나?

“모르겠다. 정부가 아이들을 구하지 않은 걸 몰랐으면 모를까. 그걸 아는데 그 돈으로 편하게 살 수 있겠나. 나는 죽을 때 옷 한 벌만 가지고 가면 된다. 내가 집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죽을 때 현금 싸서 가져갈 것도 아니고. 입고 갈 옷 한 벌만 있으면 된다.”

김씨와 알게 된 후 두 번째 맞는 겨울이다. 그는 항상 그는 같은 겉옷을 입고 있었다. 짙은 파랑색의 M사 패딩이다. 그가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떠올라서 물었다.

-원래 돈 욕심이 좀 없으신 것 같다.

“나도 그런 욕심이 왜 없겠나. 방 한 칸짜리 월세 살면 애들 오라고 하고 싶어도 못 한다. 여자애들이니까. 나도 집도 마련하고 여유있게 살아서 애들 옷도 사주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이고 싶지. 나라고 왜 그런 욕심이 없겠나.”

▲ 지난 2014년 8월 단식 중이던 김영오씨. 사진=이치열 기자

“인간관계? 친구도 가족도 다 깨졌다”

-지난 2년 동안 몸과 마음이 많이 피폐해진 것 같다. 밥은 잘 드시고 잠은 잘 주무시나“

“밥은 거의 안 먹는다. 계속 버티고 버티다가 오후 4시나 5시쯤 되면 사먹고 끝난다. 한창 간담회가 잦을 때는 거기 뒤풀이에서 첫끼를 먹었다. 밤 9시쯤?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든다. 먹는 것도 귀찮다. 유가족이 술을 마신다면 사람들이 욕할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요즘도 날 샐 때가 많다. 그래서 자기 전에 술을 마셔야 한다. 진도체육관에서 올라와서는 계속 잠을 잘 수가 없다. 밤에 뭐하냐면 그냥 멍하니 있다. 졸리면 자고. (큰일이다) 큰일은 뭐가 큰일이야. 다른 가족들도 많이 이렇다.”

-그렇게 지내면 안될 것 같다. 주변에 사람들이라도 만나면서 지내면 조금 낫지 않을까.

“친척이나 친구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게 돈이다. 돈 많이 받았냐고. 그게 궁금하니까. 친한 친구가 ‘야 아직까지 싸우냐, 돈 받고 다 끝난 거 아니냐’고 한다. 보상은 보상이고 세월호 진상이 밝혀졌냐고 되물어보면 그건 모른다고 한다. 그런 게 답답하다. 가까운 사람들조차 청문회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에는 친구들도 안 만난다. 점점 고립되어 간다.”

-가족들이랑은 어떻게 지내나? 단식할 때 아이들 엄마가 농성장에 찾아왔던 걸 본 기억이 있다.

“사람들이 이혼한 줄 모를 정도였다. 유민이 삼우제 직후에는 아이들 엄마하고 유나하고 장모하고 바닷가에 가서 밥도 먹고 했다. 이혼은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지냈다. 그런데 언론 보도 때문에 사이가 많이 틀어졌다. 처남이 나를 아주 몰염치한 사람으로 만들어 대대적으로 보도가 됐다. 아이들 엄마는 몰랐다고 하더라. 내가 당신한테 돈 십원이라도 달라고 한 적 있나. 왜 사람 신상을 다 털고 나쁜 아빠로 만드냐고 따져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누구보다 미운거다. 만나지도 않는다.”

▲ 지난해 12월 열린 세월호 특조위 청문회에서 유가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다른 가족들? 시간 지나면 나처럼 된다”

김씨는 이런 이야기를 아주 담담하게 했다. 그러면서 “이게 바로 정부가 원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에게는 그 결과가 조금 일찍 찾아왔을 뿐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다른 가족들도 그의 전철을 밟게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다른 유가족들 사정도 비슷한가? 그렇다면 심각한 문제다.

“길거리에서 피켓 들고 있는 가족들, 원래 직장 없었을 것 같나. 다들 직장 사표 내고서 싸우는 거다. 맞벌이 하던 집들은 한 명만 벌고 한 명은 나와서 싸운다. 그러면 남은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 그냥 방치되는거다. 간담회 다니고 시위하면서 아이들에게 전화로 ‘밥 먹었니? 학교 갔다왔니?’라고 묻는 게 전부다.”

-빨리 해결이 되지 않으면 가족들이 더 힘들어지겠다.

“이런 식으로 질질 끌다보면 다 떨어져 나간다는 걸 정부는 이미 알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싸우다보면 직장 잃어버리지. 받은 돈은 다 써버리지. 5년, 10년 뒤에 진상규명 된다고 해도 그때 나이가 몇인가. 오십이 훌쩍 넘었다. 직장도 못 구한다. 엄마아빠 인생은 종점에 가 있다는 거다. 나는 워낙에 가난뱅이여서 그 ‘종점’이 조금 빨리 온 것뿐이고 지금 싸우는 부모들은 그 돈을 까먹으면서 몇 년 더 버티는 것뿐이다.”

-결국 빨리 진상규명이 돼서 가족들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가능할까? 참사가 터지면 정부는 가족들의 삶이 피폐해지지 않도록 보호를 해줘야 하는데 지금은 그 반대다. 사람들은 8억 그것만 기억한다. 하지만 실제 싸우는 사람들은 거지가 돼서 싸우지.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나? 자식이 죽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거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싸울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 것들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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