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볼 때마다 내가 미국인인 게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몰라요.”
미국인 제인(가명)은 프랑스 파리 한 카페에서 가진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끝내 고개를 떨궜다. 제인은 현재 미국 국적 포기 절차를 밟고 있다. 그녀는 “수십년 간 지녀온 미국 여권을 포기한다는 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참으로 힘들었다”며 “FACTA(미국의 해외금융계좌신고법)만 아니었다면 결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국적을 포기하는 미국인이 최근 몇 년 새 크게 늘었다. 미국 재무부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시민권과 영주권 등 미국 국적을 포기한 사람은 4279명이다. 전년(3415명)보다 20% 증가했고 2010년(1006명)에 비해서는 4배 이상 는 것이다. 미국 국적 포기자는 2012년 933명 이후 3년 내리 증가세다.
자타공인 세계 최강대국 미국 시민권자들은 왜 국적을 포기할까. 주된 이유는 2014년 이후 해외 거주 미국인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크게 올라서다. 미국은 아프리카 에리트레아와 함께 징세에 있어 속인주의(거주지와 상관없이 국적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미국은 최근 해외에 장기 거주하고 있는 자국민에 대한 징세 기준을 대폭 강화했다. 2014년 7월부터 시행된 FACTA에 따르면 연 소득이 5만달러(약 6000만원)가 넘는 해외 거주 미국인은 반드시 소득신고서를 미국 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이전에는 징세 기준이 연소득 10만6000달러(약 1억2700만원)였다. 연소득만이 아니라 연금과 저축 등 모든 금융자산이 5만달러를 넘으면 이 또한 신고 대상이다.
위반시 처벌 기준도 강화됐다. 미국에서 영업활동을 하는 은행들은 자사에 계좌를 튼 미국계 고객·법인의 금융자산 정보를 미국 당국에 제공해야 한다. 고객의 금융정보 보호를 앞세워 신고를 하지 않았다가는 미국에서 얻는 금융수익의 최대 30%까지를 벌금으로 내야 할 각오를 해야 한다.
이중과세라는 반발 여론은 미 당국이 내세운 명분과 현실적 힘 앞에 무기력했다. FACTA는 애초 역외탈세를 원천 방지하고 ‘검은 돈’ 추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2012년 발의됐다. 또 주요 국가, 은행들은 세계 금융시장은 물론 글로벌 경제에서 미국이 거의 독점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영향력을 감안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의 피해는 세금 탈루 호랑이보다는 일반 시민들이 보고 있다. 지난 30년간 미국 밖에서 살아온 제인이 대표적이다. 그녀의 연소득은 징세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전체 금융자산은 5만달러가 넘는다. 국적을 계속 유지할 경우 회계사와 변호사 등 전문가들에게 고액의 수수료를 내고 미 세무당국에 신고를 한 뒤 그에 해당하는 세금까지 내야하는 상황이다.
그나마 제인은 다른 해외 거주 미국인에 비해선 사정이 낫다. 프랑스인 부모를 둔 파비앙은 생후 18개월 때 미국에서 조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까닭(속지주의)에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았고 FACTA에 따라 소득세를 내야 한다.
파비앙은 “주거래 은행에서 미국 국적을 포기하려면 시민권이나 사회보장번호와 같은 증명서를 내라는 데 난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국적을 포기하기 위해 지난 5년간의 소득신고서를 내야 하고, 제반 서류를 모두 제출한다 하더라도 2년 이상이 걸린다 한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미국 국적 포기 과정은 지난하다. 일단 미국 국적포기 수수료가 2350달러다. 다른 나라의 국적 포기 수수료보다 20배 이상 비싼 편이다. FACTA 이전 450달러에서 400% 인상됐다. 파비앙의 경우처럼 국적포기 직전 5년 간 미국 세법을 충실히 준수했음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거액의 국적포기세를 또 다시 내야 한다.
BBC는 난데 없이 ‘세금 폭탄’을 맞게 돼 어쩔 수 없이 국적을 포기하게 된 미국인들의 분노는 상상 이상이라고 전했다. 첫 번째 조국에 대한 배신감은 FACTA 입법 과정에서 나왔다. ‘대표 없이 조세 없다’(조세는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의 동의 없이 부과될 수 없다)는 원칙이 깨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외 거주 미국인들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연방의회 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국적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따가운 시선과 굴욕감은 일말의 자긍심마저 날려버렸다. 제인은 BBC에 “그들은 내 여권을 빼앗을 수 있다. 하지만 난 앞으로도 독립기념일에 소풍을 갈 것이고 추수감사절을 경축할 것이다. 그들이 내가 미국인이라는 자긍심을 빼앗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죽이는 것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민섭 기자sts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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