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도 반짝이는 만년설의 산봉우리들이 신기한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 산맥. 스페인 남부에 동서로 길게 자리 잡은 이 산맥은 그라나다 지역으로 내려오다가 천일야화 속에 나올 법한 알람브라 궁전과 스페인 마지막 이슬람 제국의 많은 전설들을 간직한 채 오늘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기하게도 미국 서부의 레이크 타호, 요세미티, 세콰이어, 킹즈캐년 등 다수의 국립공원을 품고 있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 이름이 같다. 미국 서부에 첫발을 내디딘 스페인 군대가 만년설로 뒤덮인 거대한 산맥을 탐사하면서 본국의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 너무나 비슷해서 그 이름 그대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유래다.
세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등장하는 주인공 장군 오셀로가 바로 무어인이다. 지혜롭고 용맹스런 장군이었지만 얼굴색이 검은 관계로 심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는데 부하의 계략으로 그만 부인을 교살한다. 이런 무어인들이 지금의 풍요로운 스페인 땅에서 천 년 전부터 화려한 이슬람 문화를 꽃 피우며 부를 모았고 강력한 술탄의 지휘 아래 왕조는 날로 번성했다. 그러나 부는 오르막이 있으면 언제고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부를 축적하던 이슬람 왕조는 1085년 삼면이 강으로 둘러 쌓인 천하의 요새 톨레도가 결국 크리스찬들의 침공에 함락되면서 내리막으로 접어들었다. 다시 백여 년 후, 스페인 최고로 번창하던 항구 도시이며 스페인 문화의 총본산이나 다름없던 세비야마저 기독교인들의 손에 넘겨주게 된다.
지금부터 770년 전, 쫓고 쫓기던 무어인들과 술탄이 마지막 거점으로 정하고 궁전을 짓기 시작한 곳은 여기, 그라나다였다. 알바이신 언덕이 내려다 뵈는 아찔한 절벽 위에 그리고 뒤로는 병풍 같은 산이 있어 지리학적으로 외세 침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천하제일의 요새 같은 궁전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의 마지막 무어인들이 건축한 알람브라 궁전이 태어났다.
알람브라는 아랍어로 붉은색이다. 즉 붉은 궁전이라는 의미다. 당시 궁전의 외벽을 모두 붉은색으로 칠해 놓았다. 백년 이상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며 최종 완성한 우아한 알람브라 궁전은 이슬람 문화의 아이콘이자 무어인들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궁전 안 요소요소마다 품격 있는 우아한 분수와 작은 연못들이 많다. 공중목욕탕도 탕 안에서 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게끔 지었고 거기다 수세식 화장실 등을 보면 그 옛날 전기도 없던 시절에 이런 시설이 가능할까 의문이 든다. 최초에 이 궁전을 설계한 나스르 왕조는 풍요와 생명의 상징은 물이라 믿었다.
이런 호사로움의 극치를 이룬 무어인들이 세운 알람브라 궁전도 어느날 결국 비극의 날이 온다. 지금부터 1300년 전, 무어인들이 지금의 알람브라 궁전 지역을 정복한 후 거의 700여 년이 지난 1491년부터 스페인 군대는 이 요새 같은 궁전을 완전 포위하여 성 안의 술탄이나 무어인들 굶어 죽이는 고사작전을 전개한다. 결국 8개월의 압박 끝에 스페인 군대는 무혈입성하여 마지막 이슬람 왕조를 접수했다. 무어인들이 항복하며 내걸었던 요구조건은 들어주기로 했으나 묵살되었고 술탄과 무어인들은 궁전에서 쫓겨난다.
알람브라 궁전은 지금까지 거의 손상되지 않고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다행스런 일은 이사벨 여왕이 알람브라 궁전의 매력에 푹 빠져 돌부리 하나, 나무 뿌리 하나 그대로 두었다는 점. 덕분에 궁궐 내 호사스러운 인테리어나 기하학적 건축배치 그리고 정원과 분수들의 우아한 조화 등은 지금도 거의 손상 없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궁전을 싸우지도 않고 스페인 군대에 내어준 마지막 왕조의 술탄과 신하들과 백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지금도 저 멀리 보이는 정상 부근의 만년설에서 당시 술탄과 무어인들이 느꼈을 배신감과 분노, 그들이 흘렸을 좌절의 눈물이 차가운 침묵으로 다가온다.”
글 사진 앤드류 김 / webmaster@outdo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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