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김일성인가 박정희인가 전두환인가
3년간의 내전은 잘 알려진대로 한국전쟁처럼 세계 각국이 참가한 국제전쟁이었고 100만명 이상의 스페인인이 학살되었다. 우익 반군은 국내적으로 카톨릭, 대토지 소유자, 기업가들의 지원을 받았고 국외적으로는 파시스트 이탈리아,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았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직접 무장 병력을 몇 개 사단씩 프랑코에게 지원했다. 반면 공화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 노동자, 시민과 유럽 각국과 미국에서 온 대규모 지원병 부대인 국제여단과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앙드레 말로를 비롯한 유럽의 지식인들이 국제여단에 배속돼 일개 병사로서 전투를 치르고, 피카소가 반군의 공습으로 초토화된 게르니카 시의 참상에 당혹해 불후의 명작 게르니카를 그린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1936년 초겨울 우익 반군은 마드리드 외곽까지 진격해 마드리드를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폈지만 유니버시티 시티 지역을 넘어갈 수 없었다. 이들은 1937년 여름 바스크 북부지방, 그 다음에는 아스투리아스 지방을 점령해 10월경에는 북부 해안 전지역을 장악했다. 이제 내란은 지구전이 되었다.
반군은 테루엘을 통해 동쪽 지중해까지 진출했다. 우익 반군이 스페인 횡단에 성공함으로써 공화파는 남과 북의 양쪽으로 병력이 분산되었다. 결국 1939년 2월 25만 명의 공화파 군인들은 비슷한 수의 민간인과 함께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도망쳤고 3월 5일 공화파 정부도 프랑스로 망명했다. 3월 28일 모든 공화파 부대는 해산하거나 투항하기 시작했고 바로 그날 우익 반군은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그후 프랑코는 총통으로서 36년간 스페인을 통치한다.
이 프랑코에 대해 나는 스페인 여행 기간중 일반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여러차례 말을 시켜봤다. 그러나 사후 26년이 지났지만 그의 존재는 여전히 모든 질문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이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며 피해버렸다. 그렇다면 프랑코는 여전히 현실 정치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숱한 유혈 끝에 집권한 프랑코는 더 이상의 유혈을 피하기 위한 두 가지의 중요한 노력을 기울였다. 첫째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도움으로 쿠데타에 성공했음에도 2차 대전에서 중립을 지킨 점이다. 이 싸움을 선발 제국주의 국가와 후발 제국주의 국가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이해했기 때문일까.
또 하나는 자신의 사후 카를로스 국왕이 권좌에 오르고 왕정이 복귀될 수 있도록 길을 튼 점이다. 스페인 카탈란 국립 자치대학의 유석만 교수는 뒷부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프랑코는 엄청난 피를 흘려 집권하자 역사에 대한 속죄감이 일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노년에는 어린 카롤로스 국왕을 불러 교육시키고 후견인처럼 양성했습니다. 이 나라도 우리처럼 정치 비사가 많은데 이 부분에 대해 이제는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일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후 프랑코는 카리브 해안에서 현 국왕의 아버지인 볼본 공과 비밀협상을 했습니다. 이, 볼본 공이 참 뛰어난 사람입니다. 프랑코에게 왕위를 빼앗겼음에도 회담에서 이렇게 제의합니다. '나는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해외에서 반정부 활동이나 당신을 권좌에서 축출하기 위한 어떤 음모에도 가담하지 않겠다, 그 대신 내 아들인 카를로스가 당신 사후에 집권할 수 있도록 해달라, 지금부터 왕궁으로 데려가 교육도 시켜달라'.
볼본 공은 카를로스가 자기처럼 해외를 떠돌아서는 국민과 일체감을 가질 수 없고, 좋든 싫든 국내에 있어야 왕정 복고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죠. 두 사람간의 약속은 지켜집니다. 볼본 공은 어떠한 정치 활동에도 개입하지 않았고 프랑코도 카를로스를 데려다가 자신이 책임지고 양육합니다.
그리고 프랑코는 임종에 이르러 카를로스에게 자신의 체제처럼 군부가 득세하는 집권형태를 권하나 볼본 공은 아들에게 민주화를 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생부와 의부 사이에서 카를로스 국왕은 생부의 뜻을 쫓아 국민과 함께 하고 이는 스페인의 성공적 민주화로 이어집니다. 스페인 민주화 과정에서 국왕의 역할은 막중합니다. 바로 82년에도 군사 쿠데타에 대해 강한 거부의 뜻을 밝혀 무산시켰습니다."
콜럼부스의 선원도 갈리시아 사람이더라
프랑코의 2차 대전 불참에 대한 에피소드 한 토막. 히틀러는 프랑스를 함락시킨 후 대 러시아 전을 준비하면서 프랑코를 프랑스-스페인 국경의 뽈트뚜보로 초치한다. 안건은 뻔한 것. 신세를 졌으니 갚으라는 요구다. 이 회동에 프랑코는 무려 1시간 반을 뒤늦게 나타난다. 성질급한 히틀러는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먼저 돌아가버린다. 마음 같아서야 스페인까지 침공하고 싶지만 실익도 빈약하고 러시아 전선에 투입할 군대가 축나기 때문에 몇차례 공갈만 친 다음 포기했다고 한다.
프랑코 얘기를 읽고 들으면서 나는 스페인 현대사의 주요 코드인 프랑코를 낳은 갈리시아가 궁금해졌다. 갈리시아는 나폴레옹의 고향 코르시카 섬이 경제적으로는 보잘 것 없으면서도 아름다운 해안 지역인 것과 유사하다. 주민의 性情(성정) 또한 꾸밈이 없고 우직해 여러 모로 흡사하다고 한다.
갈리시아는 스페인의 17개 자치 지역중 가장 비가 많고 따라서 숲과 수력발전소로 유명하다. 그러나 갈리시아는 프랑코 이전이나 이후에나 여전히 가난하다. 프랑코는 적어도 자기 고향에 개발계획을 퍼붓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인사 정책도 각지 사람을 골고루 기용했다는 게 중론이다.
갈리시아의 110만 노동자중 17%는 실업자이다. 스페인 전체의 실업율 14%보다 약간 높다. 별다른 산업이 없으면서도 실업율이 아주 높지 않은 것은 농업과 어업 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갈리시아는 특히 어업이 강하다. 이들의 고깃배는 멀리 뉴펀들랜드에서 나미비아, 그러니까 대서양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다니며 원양어업에 종사한다. 갈리이사는 그래서 스페인 역사상 가장 많은 이민을 낳았다. 남미에서 스페인 출신 이민을 부를 때 가예고라고 부를 정도다. 가예고는 갈리시아 사람이란 뜻이다. 멕시코의 대 재벌 2명이 최근 갈리시아에 상당한 투자를 해 화제다.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 또한 갈리시아 사람의 후손이다.
이런 뱃사람 기질을 타고난 갈리시아 사람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선 적이 있다. 바로 콜럼부스와 함께 산타 마리아 호등 3척의 배를 타고 신 대륙 발견에 나선 선원들이 대부분 갈리시아 사람으로 알려진다. 3면이 바다인 스페인이지만 바다에 능한 지역으로는 카딸란 (바르셀로나)과 갈리시아의 두 지역이 꼽힌다. 그러나 까딸란 사람들이 지중해에 인접해 고대부터 다소 상업적으로 되바라진 대신 갈리시아 사람들은 우직하고 거짓이 없다는게 정평이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이사벨라 여왕이 이탈리아 출신의 벤처기업가 컬럼부스에게 호기롭게 투자를 하면서도 선원들만큼은 신대륙에서 보물을 많이 발견해도 떼어먹지 않을 충직한 사람들로 뽑았을 것으로 해석한다. 갈리시아가 아니라 마드리드에서 들은 이야기이기에 더욱 설득력 있게 들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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