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에 갔다. 연꽃 봉오리가 기다란 고개를 빼는 자태에 감탄하고, 여적 오롯한 사비의 속살에 볼을 비비다 그만 마음을 놓았다.
↑ 백제관
부여의 한옥을 체험할 수 있는 백제관(부여민칠식가옥). 팽나무, 은행나무, 모과나무,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발등에 척 감기는 샌들을 신고 짚으로 만든 모자를 눌러쓴다. 어깨에 걸친 가방에는 물 한 병과 지갑, 고서 가게에서 산 신동엽의 옛 시집을 넣었다. 부여에 가기 위해서다. "보드랍고 훗훗하고 정답고 알뜰한 맛은 부여 아닌 다른 옛 도읍에서 도무지 얻어 맛볼 수 없는 것이다." 육당 최남선이 <삼국고적순례>에 썼다는 이 한 줄에 마음이 동해, 언제고 틈이 나면 부여로 달아날 작정을 하고 있었다. 해마다 7월이면 궁남지 주위로 수천 송이 연꽃이 고개를 내민다니, 지금이 적기다. 연과 연 사이를 거닐며 개구리 울음소리 들으며 연 냄새 한번 듬뿍 맡고 와야겠다.내비게이션에 곧장 '궁남지'를 입력하고 차에 시동을 건다.
구름처럼 훗훗한 석탑 아래서
↑ 정림사지 5층 석탑
정림사지 5층 석탑의 단정하고 우아한 자태.
↑ 고려 때의 석불 좌상
정림사지 강당 자리에 앉아 있는 고려때의 석불 좌상. 비바람에 닳아 온통 둥그렇다.
↑ 정림사지 강당의 기와 양식
정림사지 강당의 기와 양식.
부여는 백제가 공주에서 천도한 해로부터 멸망하던 해까지 백제의 왕도였다. 백제 때의 이름은 사비. 백제가 일군 600년 넘는 역사 중 가장 찬란했던 123년이 사비의 품에서 흘렀다. 부드럽고 풍요로우며,원만하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번영기의 사비에는 13만 호의 가구가 살았다.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하던 시기의 도성 모습이 중국 사서인 <주서> 중 백제전에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그 많던 절과 탑은 거진 사라지고 없다. 왕도였던 사비의 찬란함은 1500년 전에 타고, 휩쓸리고, 스러졌다. 이곳에 남아 사비를 증명하는 것은 오직 시내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남은 정림사지 5층 석탑뿐. 기념비 같은 이 석탑만이 백제 말 123년의 도읍기를 통틀어 남아 있는 유일한 백제 유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외로이 선 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부여에 와 가장 먼저 목도하고 싶었던 것이 이 석탑이다. 가까워질수록, 눈 안에 들어찰수록 어쩐지 더욱 쓸쓸해 보인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사비가 도성이 되던 때 세워져 왕실의 흥망성쇠와 함께했다. 석탑의 아래쪽 기단부부터 1층 탑신의 탑신석, 옥개석을 순서대로 천천히 살핀다. 크고 작은 석재들을 정갈하게 조각한 뒤 조립하였고, 사리가 모셔진 집을 상징하는 세부 장식이 돋보인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석탑은 백제 장인들의 선도적인 미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 땅에서 가장 처음 만들어진 석탑이기 때문이다. 목조탑이 가진 소재적 한계에 어려움을 겪던 장인들은 석재를 택했다. 좁고 낮은 단층 기단과 각 층에 공들여 흘린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기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얼핏 목탑의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한 것이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어찌나 탑에 가까이 섰던지 탑의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다. 뒤로 한참을 물러서, 석탑의 모습을 오롯이 눈에 담으며 멈춰 있는데 탑 뒤편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곱지유?" 탑의 반대편에 서 있던 여자가 양산을 뒤로 젖히고 빠끔한 눈을 맞추며 웃는다. 곱다. 돌로 만든 탑의 가락이 이렇게 보드랍다. 흡사 엷은 구름 다섯이 층층이 뜬 것 같다. 그 미모에 샘이 날 정도다. 정림사지 5층 석탑에는 완숙미가 스며 있다. 우아한 기품이 우러난다. 손을 대어 쓰다듬고 싶은 마음이 솟는 걸 가까스로 누른다.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며 정림사지 5층 석탑의 1층 탑신 표면에 전승을 기념하는 내용을 새겼다. 이는 그 당시에도 정림사지가 백제 왕실과 국가의 명운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음을 방증한다. 정림사지에서는 여러 시대에 걸친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나 특히 창건기인 백제시대와 중건기인 고려시대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정림사지 강당에 모셔둔 석불은 보물 제108호인 정림사지 석불 좌상이다. 이것 역시 고려 때의 것이다. 흡사 피카소가 그린 듯 과감하고 추상적인 선이 돋보인다. 고려시대의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전위적이다. 비바람에 닳아 둥글둥글한데, 그가 짓고 있는 온화한 미소와 조화롭게 어울린다.
부소산에 올라 부여 8경을 모두 보다
↑ 부소산 속 고란사
부소산 속 고란사. 백마강을 면한다.
↑ 백화정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백화정에 서면 백마강이 한눈에 보인다.
↑ 백마강
늦은 오후, 백마강에 노란빛이 일렁인다. 날씨 좋은 날이면 아래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탈 수 있다.
관광안내소에서 얻은 부여 시내 지도를 펼쳐본다. 사비도성을 둥글게 감싸 안은 백마강의 모양이 정답다. 백마강은 부여군의 중심부를 품으며 휘돌아나가는 양으로 흐른다. 백마강은 부여 땅을 지나는 금강을 부르는 이름이다. 부여군 규암면 호암리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킬로미터에 이르는 금강 물길을 따로 떼어 백마강이라 한다. 부여군 한가운데 위치한 정림사지, 정림사지에서 북쪽으로 일직선 상에 있는 부소산, 부소산이 품고 있는 영일루, 낙화암, 고란사까지 부여의 중심이 백마강 품에 있다. 부소산은 평소 왕과 태자들이 즐겨 찾는 후원이었고, 산 정상과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은 유사시에 피신처이자 왕성을 지키는 보루였다. 부여로 도읍을 옮긴 뒤로 강성해진 백제는 이전보다 더 화려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샌들 끈 고쳐 매고 가방도 다시 둘러메고 백제 왕실의 이야기가 곳곳에 스민 부소산을 오른다. 잠시 비장했던 마음이 이내 민망하다. 오르는 길이 완만하기 그지없다. 부여 사람들은 산책하듯 거닌다. 부소산은 부여 북쪽에 있는 해발 100미터 정도의 낮은 구릉이다. '부소'라는 말은 소나무의 옛 이름. 걸음을 옮기는 내내 낮은 언덕에 연꽃 줄기처럼 잘게 솟은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햇빛에 하얗게 부서지는 백마강이 보인다.백제탑의 노을,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봄날 백마강가의 아지랑이, 고란사의 고아한 풍경 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내리는 보슬비, 낙화암 곁에 앉아 우는 소쩍새, 백마강에 잠긴 달빛,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 구드래 나루에 들어오는 돛단배. 부여의 8경이라 회자되는 8가지 비경이다. 수북정, 고란사, 낙화암이 부소산에 있고 다른 4가지도 부소산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풍경이니, 부소산은 부여 8경을 다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부소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은 사자루이고. 그 바로 아래쪽으로는 백마강이 훤히 보이는 백화정이 있다. 백화정은 단단하고 너른 바위 위에 놓였는데, 그곳이 바로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이 시작되는 자리다. 기실 삼천 궁녀가 이곳에서 운명을 달리했는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백제의 궁녀가 3000명이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타사암(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는, 훨씬 사실적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40미터 높이의 절벽 아래를 본다. 고소공포증이라도 있었다면 바로 사지가 맥없이 풀려버릴 높이다. 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남자 셋은 동시에 절벽 아래로 고개를 뺐다가 이내 탄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릴 지른다. 백마강 물결 위로 오후의 햇살이 어른댄다. 눈이 부시어 맞은편 강가는 하얗게만 빛났다. 봄날의 아지랑이나 노을 진 산비탈에 내리는 보슬비, 달빛을 머금은 백마강은 보지 못했지만, 그에 비견할 광경을 그곳에서 보았다.
오래된 못의 연꽃 내음에 취하고
↑ 궁남지
둥근 연못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고 연못가에는 버드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궁남지.
↑ 연꽃
7월이면 궁남지 너른 연못에 뜬 연꽃들이 한껏 우아하게 고개를 뻗는다.
왕이 이궁을 짓고 즐겼다는 궁남지에는 지금도 버드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고있다. 궁남지는 이 땅에 현존하는 인공 정원 중 가장 오래된 것. 백제 무왕 35년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정원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술되어있다.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 리(8킬로미터)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주위로는 버드나무를 심은 후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아름답게 꾸몄다."백제는 당대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의 선진화된 조경관을 지니고 있었다.자연경관을 축소해 인공적으로 또 하나의 세계, 소우주를 연출하는 방식이었다. 혹은 거주 공간의 구획 및 배치와 일치되도록 디자인하기도 했다. 궁남지에는 백제인의 조경관과 기술이 집약되어 있다. 백제인은 물을 끌어들여 새로운 광경을 연출할 수 있는 독특하고 독보적인 기술 역량을 유감없이 궁남지에 발휘했다. 연못을 둘러싼 12만 평에는 각종 연을 심어 여름이면 홍련이며 백련을 비롯해 수십 가지 연꽃이 피어 진한 연꽃 향내로 가득 찬다.
동남리와 반교리, 부여의 작은 마을
↑ 반교리
↑ 반교리
반교리는 땅 밑이 모두 돌이다. 이 동네가 돌담 마을이 된 이유다. 나무 기둥을 쓰지 않고 돌담으로 뼈대를 올린 집이 많다. 돌담 아래에는 종종 붉은 양귀비꽃이 보인다.
↑ 자전거 나들이
자전거 타고 이웃 마을로 나들이 간다.
↑ 신동엽 생가
신동엽 생가의 모습.
↑ 연잎밥 집
궁남지 주변은 물론이고 부여 읍내 곳곳에 연잎밥 집이 있다.
부여읍 중심부에는 동남리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을 조금 벗어나면 초록으로 눈부신 금강의 물줄기가 넉넉하게 흐르고 야트막한 산등성이가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안은 것처럼 포근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농촌 마을이다. 이 살뜰한 동네에서 시인 신동엽이 나고 자랐다.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동남리의 집에서 1남 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나 소년기부터 청년기까지를 보냈다. 결혼 이후까지 살았다. 동남리의 생가는 그대로 보존되어 곁에 신동엽문학관과 함께 나란히 있다. 그는 부소산과 백마강가로 자주 마실을 나섰다. 백마강가에는 그의 시비가 있다. 시인의 짧지만 무거웠던 삶을 보여준다.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은 부여로부터 시작된다. <금강>뿐 아니라 그의 시 곳곳에서 부여를 볼 수 있다. 신동엽은 글벗이었던 구상회와 종종 부여의 골목골목을 거닐었다. 부소산 장군바위에도 올랐다. 1959년에 발표한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면서 문단에 섰다. 이시는 신동엽이 부소산에 올라 백마강의 건너편, 구룡평야를 바라다보며 쓴 시다. 어느 날은 부소산을 걷다가 미처 거두어지지 못한 시신을 발견했다. 그러고는 <진달래 산천>을 썼다. 봄날 진달래가 예사롭지 않은 것은 그 붉은빛에 역사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이들의 아픔이 서려 있기 때문이라는, 애달픈 이야기. 신동엽이 눌러쓴 저항시 기저에는 아래에 태평하고 평화롭던 사비, 훗훗한 부여가 서려 있다. 그의 생가 대청마루에 걸터 앉아 가방 속에 챙겨온 시집<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꺼냈다. 동남리의 대청마루는 나지막하고 신동엽의 시구는 여적 검붉다. 대청마루 끝에 한 부부가 함께 앉는다.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도 거기에 살아요." 서쪽으로 가면 예쁜 돌담 마을 하나가 있다며 서울에 그냥 올라가지 말고 꼭 가보라 한다. 지명은 반교리. 일러준 대로 30분 남짓, 서쪽을 향해 차를 몬다. 할아버지 수염 같은 밤꽃이 잔뜩 핀 동산, 가슴팍에 못 미치는 높이로 오종종 쌓인 돌담길이 보인다. 부여 군민도 모두 알지 못하는, 그래서 어쩐지 비밀스러운 마을, 반교리다. 이곳에 '반교 돌담 마을'이라는 명패를 달아준 이는 전 문화재청장, 이제는 부여군민이 된 유홍준이다. 그도 반교리에 집을 지었다. 나무 기둥을 쓰지 않고 돌담으로 뼈대를 올렸다. 그러고는 '휴휴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쉬고 쉬어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반교리는 땅 밑이 모두 돌이다. 그래서 이 동네 집집이 다 돌담인 것이다. 마을 안쪽으로 계속 걷는다. 물이 넉넉지 않은 개울 곁에 평상 하나가 보인다. 그 위에 두 다리를 주욱 뻗고 누워버렸다. 눈앞에 보리수 열매가 잔뜩이다. 생전 이렇게 알이 굵고 붉은 보리수는 처음이다. 한 주먹 따서 입안 가득 넣고 먹었다. 이 사이사이에 빨간 물이 잔뜩 들었다.
부여 여행 기본 정보
철도를 이용할 경우 논산역과 대전역에서 시외버스로 갈아탈 것. 버스 이용 시,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40분 간격으로 부여행 버스가 배정되어 있다. 대전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20분 간격으로 부여행 버스를 탈 수 있다. 내비게이션 검색 주소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성왕로 247-9'이다.
부여군청 문화관광과 041-830-2010
↑ 백제관(부여민칠식가옥
백제관(부여민칠식가옥)
중요민속문화재 제192호로 지정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약 2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지금은 부여한옥생활체험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부여의 중심가로부터 조금 벗어난 작은 마을에 위치한 곳으로, 한옥 뒤편은 팽나무와 은행나무, 대나무, 모과나무 등이 둘러싸고 있다.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지만, 문을 열어두면 맞바람이 불어 선풍기도 필요 없을 정도다. 정림사지박물관과 궁남지에서 차로 5분, 도보로 15분 거리다. 숙박이 가능하다. 이미 7월 20일까지는 예약이 마감되었으므로 혹 이곳에서 여름 휴가를 보낼 마음이 있다면 서두르자.
충남 부여군 부여읍 왕중로 87
041-832-2722
↑ 부여군문화재사업소(구 국립부여박물관)
부여군문화재사업소(구 국립부여박물관)
부소산성 앞자락에 있는 부여군문화재사업소는 1967년,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에는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쓰였다. 건물 전체에서 일본의 신사와 같은 모습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한바탕 논란이 일기도 했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15
↑ 정림사지박물관
정림사지박물관
백제 사비 시기 불교와 그 중심에 있었던 정림사를 주제로 백제 불교 문화를 재조명하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고취시키고자 건립된 곳이다. 중앙 홀을 중심으로 진입로, 전시실, 관리실 등이 사방으로 뻗은 날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제시대 중 가장 화려했던 사비 시기의 불교 유적 등 백제의 꿈과 땀이 담겨 있으며, 전시물로 정림사지 5층 석탑과 정림사지 출토 유물, 정림사지 석불 좌상 등을 볼 수 있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정림로 83
041-832-2721
↑ 신동엽 생가 & 문학관
신동엽 생가 & 문학관
시인 신동엽이 태어나 아내와 결혼한 이후까지 살았던 그의 생가 곁에는 신동엽문학관이 있다. 유가족의 생가 및 모든 유품을 기증받아 건립되었다. 문학관에서는 신동엽의 작품 세계, 어린 시절 사진, 성장기, 가족들의 모습뿐 아니라 신동엽이 입었던 옷, 사용했던 노트 등 그가 살아생전 사용했던 물건들도 볼 수 있다. 신동엽이 앉았을 대청마루에도 자유롭게 앉아 쉬어볼 수 있다는 것이 최대의 매력.
충남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길 12
041-830-2723
↑ 구드래돌쌈밥
구드래돌쌈밥
부여의 먹을거리는 대체로 부소산성 앞과 궁남지 주변, 중앙시장에 모여 있다. 식당 구드래돌쌈밥 역시 부소산성 앞 식당 밀집 지역에 있다. 연잎밥이 아닌 색다른 식사를 하고 싶다면 돌쌈밥에 도전해보자. 부여 군민들도 즐겨 찾는 맛집이다. 고소한 영양돌솥밥을 쌈에 싸서 먹는데 양이 푸짐하고 맛도 깔끔하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아리 96-3
041-836-0463
부여돌식당
중앙시장 내, 30년 넘게 곱돌백반을 팔고 있는 가게다. 3대에 걸쳐 가족이 운영하고 있다. 곱돌을 써서 백반을 내고, 삼겹살을 구워낸다. 충북 제천에서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곱돌은 돌이 많은 부여에서도 조리 기구 소재로 즐겨 사용해왔다. 보온성이 뛰어나 음식이 타거나 잘 눌어붙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밥맛을 좋게 해준다. 곱돌백반을 다 비울 때쯤 주인장이 추천하는 볶음밥도 반드시 맛볼 것.
충남 부여군 부여읍 중앙로5번길 14-5
041-835-3389
<2015년 7월 호>
에디터
이경진
포토그래퍼
전재호
취재 협조
부여시설관리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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