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챔피언 [ 上 ]
갈색 폭격기를 격침시키다
비록 지금은 그저 그렇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복싱(Boxing)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습니다.
TV에서
복싱 경기를 황금시간대에
고정 편성하였을 정도였는데
케이블이나 유선 방송이 없던
시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선수들의 인기도 높았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권투 선수들의 인기 또한 대단 하였습니다.
[ 프로 복싱은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종목입니다 ]
특히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는
전설적인 사각의 철권들인
슈거 레이 레너드, 토머스 헌즈, 마빈 헤글러,
윌프레도 베니테스, 로베르토 듀란 등의
슈퍼스타들이 라이벌 관계를 이루며 경합하던
중량급(中量級)의 전성기였습니다.
이들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슈거 레이 레너드 같은 경우는
오늘날
골프의 타이거 우즈 정도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 1981년에 벌어진 레너드와 헌즈의 경기는
복싱 역사상 최고의 전설입니다(上)
최근의 모습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
이 당시는
무하마드 알리 이후
헤비급에서
특출 난 슈퍼스타가 나오지 않았던 관계로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강자들이 몰려있던
웰터급 ~ 미들급에 이르는 중량급이
최고의 흥행 시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것이고
원래 전통적으로 가장 인기가 있고
진정한
세계 최강자들의 경연장으로 인정받는 체급은
가장 무거운 헤비급입니다.
당연히
헤비급은 현대 권투가 시작된 이래
세계 최강자들의 각축장이었습니다.
[ 전통적으로 헤비급은 권투 최강자들의 각축장입니다 ]
바로 앞에 언급한
무하마드 알리와 더불어 3두 체제를 형성하였던
조지 포먼,
조 프레이저 등의 경쟁시대에
세계의 수많은 복싱 팬들은 열광하였습니다.
그 이전에도 전설적인 슈퍼스타들이
헤비급에는 즐비하여 소니 리스튼, 프로이드 패터슨 등이
활약을 하였고 무패의 제왕으로 은퇴하였으나
비행기 사고로 요절한 백인들의 영웅
록키 마르시아노도
위대한 챔피언들의 명단에 올라 있습니다.
[ 백인의 영웅이었던 무패의 챔피언 록키 마르시아노 ]
그중에서도 25차례나 방어전에서 승리하여
현재까지 전 체급에 걸쳐
최장수 타이틀 방어 챔피언으로 기록되고 있는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는 미국인의 자부심으로 남아있습니다.
조 루이스는 더 이상의 도전자를 구하지 못해
스스로 타이틀을 반납하고 챔피언에서 내려왔을 정도로
철권중의 철권이었습니다.
비록 은퇴 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왕좌 회복에는 실패하였지만
그는 최고의 파이터였습니다.
[ 갈색 폭격기로 불린 전설적인 챔피언 조 루이스 ]
하지만 이러한 조 루이스도
대결하기 전에 너무 겁이 나서 잠도 못자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선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수많은 복싱 영웅 중
august가 진정으로 챔피언이라고 생각하는
막스 슈멜링(Max Schmeling, 1906~2005)입니다.
그는 유럽 출신 최초의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었고
현재도 전 종목을 통틀어
독일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모범적인 선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 실력뿐만 아니라 인품으로도 존경할 만한 챔피언 막스 슈멜링 ]
그는 1924년 프로권투 선수생활을 시작하여
곧바로 유럽 권투 계를 평정하면서
제1차 대전 패전의 굴욕에 빠져있던
독일의 영웅으로 서서히 떠올랐습니다.
유럽에서 마땅한 상대를 찾을 수 없던 그는 1
928년 헤비급 강자들이 득실대는 미국으로 옮겨가
현지에서 활약하였고
1930년 당시 공석이던 세계 챔피언자리를 놓고
잭 샤키와 겨루게 되었습니다.
그는 원정 경기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챔피언에 등극합니다.
[ 잭 샤키를 누르고 독일 최초의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됩니다 ]
비록 2년 뒤 잭 샤키와의 리턴 매치에서
편파 판정에 희생당하며 1점 차로 패하여 타이틀을 내놓았으나
그의 명성을 더욱 드높인 대결은 따로 있었습니다.
1936년 뉴욕의 양키 스타디움 특설 링에서 벌어진
철권 조 루이스와의 한판 대결이었습니다.
이 경기는 비록 논타이틀전이기는 하였지만
조 루이스가 워낙 강해 당시 챔피언들이었던
맥스 베어나 제임스 브래독 등이 대결을 기피하여 왔던
무패의 강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논 타이틀전이지만 무관의 제왕인 조 루이스를 KO시킨
막스 슈멜링(上)
이 승리로 그는 나찌의 선전 수단이 되었습니다 ]
무려 4만 2천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슈멜링은 미국의 영웅으로 24전 전승 21KO를 거두고 있던
조 루이스를 12라운드에 KO시켜
미국 관중들을 조용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비록 챔피언 타이틀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이 경기로 슈멜링은
자타가 공인하는 진정한 세계 최강자로 등극하였습니다.
그러자
민족우월주의 선전에 혈안이 된 나찌에게
그는 좋은 선전 수단이 되었습니다
-august 의 軍史世界-
진정한 챔피언 [ 下 ]
용기와 신념
나찌는
세계 복싱의 최강자로 등극한 슈멜링을
선전 도구로 적극 이용하였습니다.
그는 링위에서는 챔피언이었지만
국가 권력 밑에서는
작은 소시민에 불과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전 도구로 이용되는데 몹시 불쾌해 하였습니다.
그는 독일의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히틀러 집권 전에
민주 국가인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한 까닭에
나찌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슈멜링은 나찌 정권에 의해 선전 도구로 이용되었습니다 ]
나찌는
그에게 입당을 강요하였지만
그때마다 이를 완곡히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게르만 순혈주의를 주장한 나찌는
당시에 저열한 민족으로 선전하던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아내와 이혼할 것을
음으로 양으로 압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거기에다가 반유태주의가 독일 사회를 휩쓸던 와중에
유태인 출신의 매니저도 몸소 나서서 보호하였습니다.
[ 나찌는
슈멜링에게 체코인 부인과 이혼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사랑하는 아내와 생을 함께 하였습니다 ]
1930년대 중반은
권력에 의해 유태인들에 대한 백주 테러가
공식적으로 벌어지던 무서운 시기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슈멜링은 친분이 있던
여러 명의 유태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으로의 탈출을 알선하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자칫 매국 행위로 몰려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었던
위험한 행동들이었습니다.
[ 그의 동료이자 매니저로 활동한
막스 마크혼은 유태인이었습니다 ]
1938년 루이스와 다시 맞붙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벌인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를 앞두고
루이스는 잠도 못자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그에게 생애 최초의 패배를 안긴
슈멜링에 대한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대결에서는
루이스가 1회 KO로 이겨 복수에 성공하였는데
이때부터 슈멜링에 대한
나찌의 관심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 슈멜링은 루이스와의 재대결에서 패하고
나찌의 관심 밖으로 서서히 밀려났습니다 ]
이후 슈멜링은
독일 국내에서 재기전을 펼쳐 승리하였으나
권투 글로브를 잠시 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계 타이틀전에서의 패하여 나찌의 선전도구로써
가치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가 증오하는
나찌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 때문이었습니다.
조국이 전쟁을 일으키자
비록 반나찌 성향을 가지고 있다하여도
국민으로써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그는 팔슈름야거에 자원 입대합니다.
[ 독일 관제 잡지에 소개 된 슈멜링의 훈련 모습 ]
그러자
그의 입대는
또 다시 나찌의 좋은 선전 도구가 되었습니다.
슈멜링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아
적극적으로 선전 활동에 협조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제3공수연대 소속으로 훈련받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그의 군대 사진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비록
이질에 걸려 많은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크레타 공수작전에도 참여 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인 임에도
그는 최전선에서 활동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 은퇴 후 음료수 사업으로 거부가 되었습니다
(판촉 활동을 하는 1957년 모습) ]
그는 종전 후 8년 만에
다시 글로브를 끼기는 하였지만
1948년에
70전 56승 4무 10패의 파란만장한 전적을 남기고
은퇴하였습니다.
성실하게 살아 온 그는
이후 스포츠 음료사업에 뛰어들어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숙명의 라이벌로 주먹을 섞었던 루이스가
은퇴 후 방탕한 생활 끝에
말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를 도왔고 나중에 장례까지 치러주었습니다.
[ 호적수 루이스의 마지막을 돌봐 준(上)
슈멜링은 독일에서 가장 존경 받는 스포츠인입니다 ]
말년에 슈멜링은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여 자선 활동을 벌였고
2005년 독일 국민의 애도 속에 눈을 감았습니다.
1987년 그가 독일 스포츠 담당 기자단의 투표에 의해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독일의 스포츠인"으로
선정되었던 이유는
선수로의 업적뿐만 아니라
독재에 저항한 앞서갔던 시민 의식,
국민으로 의무를 다한 솔선수범과
모범적인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august가
슈멜링을 진정한 챔피언으로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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