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문 제2면
광개토대왕비문 탁본2면
광개토대왕비문(쌍구가묵본)2면.
광개토대왕비2면1981
<사진출처:장영주역사원문자료>
< 2면에는 10행이 있으며 각 행마다 41자가 새겨져있습니다.
제 9행과 10행의 윗부분은 당초부터 자연풍화로 인한 손상이 있어서
당초 이 부분에는 글자를 새기지 않았고
이 결과 제 9행에는 34자,
제 10행에는 25자의 글자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총 글자수는 387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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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면 1행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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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면 2행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 □□□ □利城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림성 □□□ □□□ □리성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蔘穰城,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림성□□□ □□□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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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면 3행
曾□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증□성 □□노성 구천성 □□□□ □기국성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잔불복의 감출백전 왕위혁노 도아리수 견자박성,
증□성 □□노성 구천성 □□□□ □를 공취하고 나라의 국성을 □하였다.
(영락 6년 병진년에)백제가 의로써 복종을 하지 않고, 감히 나와서 전투를 할려고 하니,
왕이 위엄을 갖추고 노여움으로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보내 성으로 진격했다
[阿利水는 한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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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면 4행
而□□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이□□귀혈□ 편위성 이잔주곤핍 헌출남녀생구일천인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 以後 永爲奴客
세포천필 왕자서 종금 이후 영위노객
(백제의 군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곧 그들의 성을 포위하니
백제의 왕이 곤경에 빠져 남녀 일천명과,
가는베 천필을 바치며, 무릅을 꿇고 스스로 맹세하길
이제부터 따르겠습니다 하니 영원히 노객으로 간주하였다.
[재일 사학자 이진희는 而殘主을 百殘王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奴客는 귀족 신분으로 신하가 왕에게 자신을 일컬을 때 쓴 말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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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면 5행
太王恩赦 始迷之愆 錄其後順之誠
태왕은사 시미지건 록기후순지성
(이에) 대왕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미혹하여 저지른 허물을 용서하고
후에 그가 공손한 성의를 다 할것인지를 지켜보겠다고 하셨다.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어시득오십팔성촌칠백 장잔주제정대신십인 선사환도
(그리하여) 58개성과 700촌을 얻고,
백제왕의 아우와 대신 열 명과 함께 서울로 돌아 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이런 행동에 백제의 아신왕은 위기감을 크게 느껴
해상으로 연결되어있던 왜국의 힘을 빌려 고구려의 남침을 견재할 생각을 하고
영락7년(397년) 5월에 태자 전지(典支)를 왜로 보내 군사를 빌려오게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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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면 6행
八年戊戌 敎遣偏師 觀帛愼土谷 因便抄得莫□羅城加太羅谷
팔년무술 교견편사 관백신토곡 인편초득막□라성가태라곡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남녀삼백여인 자차이래 조공론사
영락8년 무술년에 일부 군대를 토곡에 보내 관찰 순시하도록 하였다.
그 기회에 막□라성과 가태라성에서 남녀 3백여명을 잡아왔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조공하고 국사를 의논하였다
[무술년은 398년 偏師는 전체 군대 중의 일부분을 말하며
일본학자 武田辛男은 帛자를 肅자로 보았고
이후 나오는 일을 숙신(말갈)과의 관계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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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면 7행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구년을해 백잔위서여왜화통 왕순하평양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이신라견사백왕운 왜인만기국경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궤파성지 이노객위민 귀왕청명 태왕은자 긍기충성
□遣使還告以□計.
□견사환고이□계
기해년 9년에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와 통한후 한 무리가 되자,
왕은 남으로 평양을 순시하였다.
이에 신라가 사신 백왕을 보내어 왕에게 말하길,
"왜인이 나라 도처에 널려 성과 못이 못쓰게되니,
노객(신라왕=내물왕)은 (왕의) 백성으로써 왕의 명을 듣기를 원합니다
부디 왕께서 돌아와 목숨을 구해주십시오."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와 그 충성스런 정성을 불쌍히 여기어,
사신을 파견하여 □□로써 돌아올 것을 알렸다
[己亥년은 399년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복수하려고 전국에서 군사와 말을 크게 징발하니
백성들이 이 고역에 못이겨 신라로 많이 달았났다고 합니다.
이에 백제는 호구가 크게 감소할 지경에 이르자
왜로 하여금 신라를 먼저 침공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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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면 8행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십년경자 교견보기오만 왕구신라 종남거성 지신라성 왜만기중.
官軍方至 倭賊退.
관군방지 왜적퇴.
영락10년 경자년에 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하게 하였다.
남거성에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그 가운데 가득하였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은 물러갔다
[경자년 10년은 4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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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면 9행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배급추지임나가라종발성 성즉귀복.
(이에 )왜의 배후를 추격하여 금관가야의 종발성까지 이르자
성이 곧 복속하였고 이에 돌아왔다
[이때 요서지방에서는 모용氏의 후연정권이 급격히 약화되어 있어서
광개토대왕은 남벌을 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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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2면 10행
城□□□□□□□□□□□□□□□□
성□□□□□□□□□□□□□□□□
十九盡拒隨倭 安羅人戍兵新□□□□其□□□□□□□□
십구진거수왜 안라인술병신□□□□기□□□□□□□□
왜구가 크게 괘멸되자 성안사람 열에 아홉은 왜를 모두 따라가기를 거절하여
신라인으로 성을 지키게 하였다
[일본학자들은 安羅를 아라가라의 다른 명칭으로 임나일본부의 용병이라고 해석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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