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년 묵객 정도준 藝를 거닐다 ① -촉석루에서 숭례문 까지
'국보 1호' 숭례문 상량문(上樑文)을 쓴 서예가 소헌 정도준 선생(64)의 회고록을 연재한다. 지난 3월 상량문을 쓸 때의 안타깝고도 막중했던 심경을 시작으로 진주 촉석루 현판과 합천 해인사의 현판(해인총림)을 쓴 선친 유당 정현복 선생과 스승 일중 김충현 선생과의 일화, 한국 서예 세계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인 '50년 묵객'으로서의 삶을 담는다.
"아빠, 숭례문에 불이 났어요!" 비극의 2008년 2월 10일, 당시 나는 미국 텐리갤러리 초대전 때문에 뉴욕에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짤막하게 전해진 한국 뉴스를 듣고 큰딸아이가 기겁을 하며 외쳤다.
TV 앞으로 간 나는 숭례문이 불 타는 모습을 보고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음날 아침 전시장에 나갔더니 갤러리 관장과 큐레이터가 위로의 말을 건네왔다. 그러나 난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허탈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문화재청으로부터 복원될 숭례문 상량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동안 나는 경복궁의 흥례문과 창덕궁의 진선문 현판과 근정전 상량문, 곳곳에 주련 등을 휘호해 다수의 문화재 복원작업에 참여해 왔다.
하지만 숭례문은 달랐다. '국보 제1호'라는 상징성이 천근만근 무게로 어깨를 짓눌렸다.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가 상량문 문장을 짓고, 소설가 김훈 선생이 감수를 맡았다. 상량문과 공사내력이 대략 2500자였다. 2500여 자의 자간을 따지며 초고를 쓰는 틈틈이 문화재청 담당자와 전통한지를 찾았다.
'국보 제1호'의 상량지로 쓰이는 만큼 더욱 전통을 지킨 질 좋은 한지에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전통 한지라야만 오래 보전되기 때문에 심사숙고를 거쳐 한지 명인 장용훈 씨가 만든 한지로 선정하여 작업에 들어갔다.
숭례문 상량을 사흘 앞둔 2012년 3월 5일 숭례문 복구 현장에서 상량묵서 휘호식이 열렸다. 3월이지만 아직 추운 날 아침, 현장에는 일찌감치 많은 언론인이 모여 있었다. 나는 휘호하기 위해 뜬창방 위에 걸터앉았다. 뜬창방은 종도리의 받침 부재인데 강원도에서 가져온 소나무였다. 호분(조갯가루, 목재의 습기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음)이 칠해진 목재 위에 앉아 한 자 한 자 써내려갔다. 조선시대 대궐 현판에 많이 쓰인 장중한 해서체로 '西紀 二千十二年 三月八日 復舊上樑'(서기 2012년 3월 8일 복구상량) 15자를 쓰는 동안 사방에서 많은 플래시가 터졌다. 정신을 집중하며 마지막 획을 쓰자 박수와 환호가 들렸다.
그 환호 사이로 말수가 적고 눈에 잘 띄지 않았던 어린시절의 내가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여러모로 나와 대조적인 천재 서예가였던 선친(정현복)이 지금의 나를 보신다면 뿌듯해 하실까.
내 고향은 경남 합천이다. 면 소재지에서 4㎞ 정도를 올라가야 다다를 수 있는 외진 쌍백면 묵동. 그곳은 한학자이자 서예가셨던 내 선친의 고향이다. 선친은 일찍이 '신동'으로 소문이 나셨다. 세 살 때 마루에 둔 참기름을 붓에 찍어 마루에 글씨를 써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네 살 때는 가을 기제사 때 비문을 보고 집에 돌아오더니 종이에 먹으로 비문 전면의 글을 줄줄 써내려갔는데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해에 쓴 외조부님의 호 '이천'(夷川)도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
이후 고향을 떠나 산청의 송산 권재규 선생과 율계 정기 선생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시고 서예를 닦으셨다. 천석꾼 집안에 태어난 신동의 미래는 아무 걱정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파란 많은 근대기에 많은 토지를 잃고 가세가 기울었다. 그 와중에 6ㆍ25전쟁이 터지면서 폭격까지 당하자 선친께서는 가족을 이끌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전쟁의 끝이라 생활은 말이 아니었고, 밥 짓는 냄새보다 집안을 더 많이 채우고 있었던 건 은은한 묵향이었다. 당시 우리가 살던 고향마을의 산봉우리 이름은 '붓'을 닮았다 하여 '필봉'(筆峰)이었다. 게다가 마을 이름은 '먹'을 의미하는 '묵동'(墨洞)이었다. 그래서 얘기하는 이들은 바로 이런 기운을 받은 명필이 내 선친이라고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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