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자료 ▒

빚으로 쌓은 ‘부동산 거품’…세계가 10년간 취했다

천하한량 2012. 6. 11. 22:56

[한겨레]부채경제의 저주


①세계 경제위기의 주범

빚내 소비하는 패러다임

부채의존 성장 임계점


"보통사람들도 부자가 된 것처럼 착각에 빠졌다"

지 난 9일(현지시각) 구제금융을 신청한 유럽 5대 경제대국 스페인은 앞서 2010년 11월 구제금융을 신청한 아일랜드와 똑 닮은꼴이다. 두 나라의 살림은 금융위기 직전까지 튼튼했지만, 부동산 거품에서 비롯된 과도한 은행부채로 결국 나락으로 떨어졌다. 거품 경기에 편승하려는 가계가 너도나도 은행에서 돈을 꾸어 집을 샀으나, 빚 상환 능력이 떨어지면서 은행의 부실을 눈덩이처럼 키웠다.

이들 나라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꾸준한 성장을 구가했다. 아일랜드는 '켈틱의 호랑이'로 칭송됐고, 스페인은 곧 이탈리아 등을 추월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부채에 의존해 성장하던 경제는 금융위기로 돈줄이 막히자, '부채의 저주'에 빠졌다. 민간부채는 순식간에 나라살림마저 거덜냈다.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위기가 '재정위기'가 아닌, '부채위기'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재정 파탄이 위기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급한 대로 위기의 불씨를 끄는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란 얘기다.

위기의 진앙지인 미국에서도 궤적은 비슷하다. 부동산 거품은 가계부채를 키웠고,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이란 '괴물'을 잉태했다. 소득이 뒷받침되지 않던 부채는 결국 폭발했다. 전창환 한신대 교수(경제학)는 "미국을 비롯해 스페인이나 아일랜드 같은 나라들은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 이후 불황이 닥쳤을 때 저금리 기조 아래 차입을 많이 했던 나라들"이라며 "저축률이 낮은 이들 나라는 부채로 소비와 부동산 거품을 키워 성장하다가 결국 비슷한 운명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부 채경제의 씨앗은 2000년 전후에 뿌려졌다. 상당수 선진국들은 제조업 기반의 성장 패러다임에서 서비스, 특히 금융 중심의 성장전략을 채택했다. '안정적 일자리 → 높은 임금 → 실질 구매력 증대 → 제조업의 안정적 이윤 보장'이란 선순환 구조는 빚을 내 소비하는 불안정한 패러다임으로 변화했다. 제조업은 임금이 싼 신흥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겼다. 높은 임금과 안정적인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대신 파생상품 등 첨단 기법을 동원한 금융산업의 덩치가 점점 커졌다. 가계의 부진한 소득 증가를 부채가 일시적으로 보완해줬다. 그러면서 금융과 실물 경제의 괴리도 커졌다. 2000년대 초반 지속된 미국의 저금리 정책은 전세계적인 과잉유동성을 낳으며 이를 확산시켰다. 결국 부채경제의 '방종'은 빚을 갚지 못하는 임계점에 이르러 금융위기를 낳았다.

부 채경제는 자산시장, 특히 부동산시장을 키웠다. 스페인과 아일랜드의 집값은 1990년대 이후 무려 4배 가까이 올랐다. 부동산 거품에 힘입은 건설경기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지만, 결국 은행에서 돈을 대출받아 집을 산 가계들이 빚을 감당하지 못하자 거품이 터지고 말았다. 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원은 "가계는 돈을 빌려 부동산과 주식을 샀고, 그걸 활용해서 소비를 늘려왔다"며 "보통 사람들도 부동산을 통해서 부자가 된 것처럼 착각에 빠졌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전환, 세계경제 패러다임의 변화가 논의되는 것은 이런 부채경제의 모델이 시효를 다했다는 진단 때문이다. 강만수 산은금융그룹 회장은 최근 빚에 의존한 "'부채주의'(debtism)가 끝났다"고 말했다. 부채에 의존한 성장전략은 실패했다는 얘기다. 유럽 위기를 "대공황 이후 가장 큰 경제적 충격"으로 진단한 김석동 금융위원회 위원장의 인식도 비슷하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실물과 금융 간의 괴리를 키우면서 거듭 경제위기를 초래했다"며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새로운 경제·금융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지칭하는 신자유주의는 부채경제와 맞닿아 있다.

지 난 10년 이상을 지배해온 부채경제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은데다 긴 고통을 수반할 것으로 보인다. 최공필 금융연구원 상임자문위원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돈으로 키운 자산(가치)을 줄여야 한다"며 "그 과정이 너무 어렵고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재정 쪽 여력이 있으면 그나마 조정이 쉽겠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그렇지 못한 형편이다. 무턱대고 부채를 줄이는 긴축정책은 자칫 위기를 악화시킬 수 있다. 전창환 교수는 "과도한 긴축은 역효과를 낼 수 있다"며 "내수 기반을 확대하고, 북유럽 국가들처럼 부채에 의존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위기에도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는 독일처럼 제조업 기반을 강화하는 것도 한 방편일 수 있다.

류이근 이재명 최현준 기자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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