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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정부, 무상교육·무상의료에 펑펑… 그 빚에 발목잡힌 스페인

천하한량 2011. 11. 12. 06:01

 

[스페인] [1] 17개 자치주 빚, GDP의 13%… 중앙정부 부채가 문제인 그리스·이탈리아와 달라
공항·도로 등 개발정책 남발… 경제위기로 50여개 사업중단, 돈 댄 지방은행들도 위기에
지방 재정 60%가 복지예산, 우리나라의 두배 넘는 규모

짓다 만 병원 건물은 전선과 배관이 뒤엉킨 속을 드러낸 채 방치되어 있었다. 구석엔 붉은 녹물이 흘러내렸고, 뻥 뚫린 건물 속으로 크레인이 깊게 드리운 채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병원 직원 M씨는 "공사 멈춘 지는 반년쯤 됐고, 7월엔 프로젝트가 아예 중단됐다"면서 "주 정부가 파산 직전이라 환자들 약값도 못 대주니 별수 없다"고 말했다.

마드리드에서 전철로 50분, 한국으로 치면 수원시쯤 에 있는 인구 83만 도시 과달라하라의 주립 대학병원 확장 공사는 카스티야라만차 자치주의 전(前) 주지사 호세 폰테스의 야심 찬 복지 프로젝트였다. 2007년 지방선거를 앞둔 그는 '어떻게 전임자를 뛰어넘는 복지 공약으로 주민들 마음을 사로잡을까'를 고민했고, 그 해답 중 하나가 '스페인 최고의 무상 의료'였다.

압도적 지지로 재선(再選)에 성공한 그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공약을 밀어붙였다. 재정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지만, 주 정부는 2009년 1억2400만유로(약 2000억원)를 대학병원 확장 공사에 투자했다.

그 결과는 거대한 '빚의 늪'이었다. 20여년간 수백 가지 선심성 개발·복지 정책을 펼쳐온 카스티야라만차 주 정부의 부채는 현재 63억유로(약 10조원)나 된다. 중앙정부가 매년 보내주는 지원금 수억유로는 의료·교육 분야 적자를 메우기에도 벅찼다. 올해 상반기에만 15억유로(약 2조4000억원) 적자가 났다.

시 외곽 주택가에서 만난 주민 로렌조씨는 "복지 예산이 줄면서 평일엔 응급실 문이 닫히고, 내가 먹던 약은 공급이 끊겼다"면서 "거의 공짜였던 의료·교육비가 내년부터 대폭 오른다는 괴담이 돌고 있다"고 했다.

재정난에 중단된 대학병원 확장공사… 반년 넘게 내버려져 있는 마드리드 근교 과달라하라시(市)의 주립 대학병원 확장 공사 현장. 스페인엔 이런 식으로 무리하게 추진됐다가 중단된 각종 선심성 개발·복지 사업이 17개 자치주에 걸쳐 총 50여개에 달한다. /정철환 기자

스페인의 17개 자치주 정부 대부분이 카스티야라만차와 비슷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7월 말 기준 17개 자치주 정부의 빚은 1331억유로(약 213조원)로 국내총생산(GDP)의 13%에 이른다. 우리나라 1년 예산과 맞먹는 규모다.

하 지만 재정 전문가들은 회계 분식(粉飾)을 걷어내면 그 규모가 GDP의 20%를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 인해 현재 스페인 지방정부의 토목 사업 30여개와 유령 공항·철도역 10여개가 올스톱하고, 여기에 돈을 댄 스페인 지방 저축은행들은 부실 대출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스페인 경제학자 모임인 이코노미스트연합회(fedea) 바스케스 국장은 "스페인의 재정 위기는 부동산 거품 붕괴와 더불어 지방정부의 빚이 중요한 원인"이라면서 "(중앙정부의 빚이 문제인) 그리스·이탈리아와 뚜렷이 차이 나는 점"이라고 말했다.

스페인의 복지 제도는 사회당(PSOE) 집권 이후 국민 세금에 의존하는 북유럽식 보편 복지의 면모가 강해졌는데, 현재 지방 재정의 60% 이상이 복지 예산이다. 우리나라(29.7%)의 두 배가 넘는다.

지 난달 19일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는 지방정부의 교육 예산 삭감에 항의하는 교사 노조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드리드 푸에르타 엘 솔 광장에서 만난 영어 교사 에우헤니오씨는 "임시 교사 3000명을 감축하면서 정규직 교사들의 주당 수업 시간이 기존 18시간에서 20시간으로 늘어난다"고 했다.

그레고리오 로드리게스 알칼라대 교수는 "500만명이 넘는 실업자 상당수가 '후한 복지'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재정 위기에 따른) 경기 악화로 복지 수요는 계속 늘고 있는 반면 복지 재원인 세금은 덜 걷혀 지방정부 재정이 계속 나빠질 수밖에 없는 만큼 공짜 복지를 줄이고 세금을 더 늘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페인 지방정부는 중앙정부가 긴축에 뛰어든 올 상반기에도 130억유로(약 20조8000억원) 재정 적자를 기록했다. 세수 부족에 따른 복지 부문의 적자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달 20일 총선에서 집권 사회당을 누르고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는 야당 국민당(PP) 관계자는 "의료비 본인 부담률(현재는 사실상 무상 의료)을 올리고, 교육 부문에서도 급식비와 수업료 일부(현재는 공짜)를 학부모가 부담토록 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고 말했다.

 

 

코미야스 카톨릭대학 알프레도 가르시아 학장 "한 해 수백억 유로 낭비"

알프레도 가르시아 학장

"자치주 정부가 공중파 TV 방송국, 라디오를 서너 개씩 갖고, 외국에 별도 대표부와 무역사무소, 외교관까지 파견하고 있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마드리드 코미야스 카톨릭 대학의 알프레도 가르시아 학장(경제학부)은 "이런 식으로 자치주 정부들이 낭비한 돈이 연간 수백억 유로"라면서 "경제적 관점에서 스페인의 지방 자치는 모순과 비효율 덩어리"라고 규정했다.

지 금까지 스페인 지자체에는 '균형재정'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는 "지방정부들은 지역 경제의 경쟁력 강화는 뒷전이고, 전시 행정과 선심성 복지 사업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면서 "이를 통해 양산된 지방 공기업과 각종 사업들은 정치인들의 자리 나눠먹기, 예산 빼먹기 등 각종 부패에 악용됐다"고 말했다.

대표적 사례가 1990년부터 20년간 안달루시아 자치주의 주지사를 역임한 마뉴엘 차베스 사회당(PSOE) 제3부수상의 친인척 비리다.

그 는 1억7100만 유로어치의 공공사업을 일으켜 자신의 딸 파울라가 일하는 '아벤호아'라는 지방기업에 몰아줬다. 이 기업은 3700만 유로의 지방 재정지원금도 타먹었다. 심지어 그의 아들은 안달루시아 지역 은행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과 친한 기업주들에게 거액의 불법 대출을 하게 해준 다음, 그 돈의 50%를 수수료 명목으로 가져갔다. 지방정부는 이로 인해 누적된 적자를 '나중에 갚으면 된다' '중앙정부가 막아줄 것'이라며 계속 외채로 돌려막아왔다.

현 사회당 정권은 이런 지방정부의 행태를 계속 묵인해 왔다. 가르시아 학장은 "최근 지방정부가 기존 예산 이상의 돈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스페인 국회가 제정했는데, 이런 문제점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지사나 시장이 매달 월급을 챙겨가는 '정책 자문단'을 1000명씩이나 거느리고, 각 자치주마다 중복된 지방공기업이 수백 개에 이르는 상황"이라며 "스페인이 경제·재정위기를 극복하려면 돈 먹는 기계로 전락한 지방정부의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프랑코 독재체제 붕괴시킨 후 사회당, 지방정부에 권한 넘겨

스페인의 17개 자치주는 사법, 행정, 복지 분야에서 폭넓은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복지 분야의 경우 연금만 제외하고 의료, 교육, 노인 복지 등 대부분의 복지 정책을 자체적으로 수립하고 집행하며 재원 조달까지 한다.

이 런 식의 지방 분권형 복지가 자리 잡은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사회당(PSOE)과 지방 분리주의 정당들은 1940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진 프랑코 독재 시절 반(反)독재·민주화 투쟁을 함께 벌였다. 민주화 이후 사회당은 지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분리주의 정당과 연정(聯政)을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지방정부에 '통 큰 양보'를 했다. 오비에도 대학 아나 구일렌 교수(사회학)는 "민주화 과정에서 주요 복지 행정의 권한을 지방 정부로 이전해야 한다는 요구가 줄기차게 이어졌고, 사회당 정권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현재와 같은 복지 시스템이 정착했다"고 했다.

1990년대 이후 지방정부가 복지 정책의 실권을 쥐자 선거 때마다 선심성 복지정책이 등장했고, 자치주 간에 '복지 경쟁'이 붙었다. 그 결과 스페인은 북유럽 못지않은 무상 의료, 무상 교육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현재 스페인 지방 정부는 주요 병원을 모두 소유하고 진료비와 약값을 거의 받지 않는다. 스페인의 대학등록금은 연 100만~150만원 수준인데, 정부가 등록금 대부분을 지원해 주기 때문에 사실상 공짜나 다름없다.

하지만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조사한 스페인의 조세부담률은 20.9%로, 덴마크(47.2%) 같은 북유럽 복지국가는 물론 우리나라(21.7%)보다도 낮다. 전형적인 저(低)부담 고(高)복지인 셈이다. 이코노미스트연합회(fedea)의 바스케즈 국장은 "금융위기 이후 스페인 경제를 이끌어온 부동산·건설 경기가 주저앉자, 토지와 건물에 부과하는 재산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지방 정부의 재정 수입이 급감했고, 이는 대규모의 복지 적자로 이어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