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일반 경비 삭감 등 비상경영 돌입을 검토하고 있다. 미국발 재정위기와 정보기술(IT) 시황 악화, 구글ㆍHP 등 IT 공룡들의 '빅뱅' 움직임으로 경영 환경이 격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 주력기업인 삼성전자는 올해 이익 패턴을 '상저하고(上低下高)'로 예상했으나 하반기에도 반등이 어려울 것으로 보여 실적 개선에 비상이 걸렸다. 삼성이 비상경영 체제를 가동하면 지난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년 만이다.
21일 삼성 고위 관계자는 "비상경영 시기와 시행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인건비와 재료비 절감 방안은 당장 적용하지 않지만 경비 삭감 카드가 유력하다"고 밝혔다.
LG는 LG전자를 중심으로 접대비 등 경영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비용 항목을 중심으로 경비 절감에 나섰고, 하이닉스도 대대적인 경비 삭감에 착수했다.
삼성은 내달 중 3분기 실적 가결산을 살펴본 뒤 비상경영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여름휴가 없이 매주 정기 출근을 강행하는 것만 봐도 긴장감의 강도를 엿볼 수 있다.
박영주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삼성전자가 3분기 D램 출하량 증가율을 전분기 대비 두 자릿수에서 한 자릿수로 하향 조정했다"며 "이 같은 공급량 조절을 통해 D램 수요 위축에 대응하고 가격 반등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2분기 3조7500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지만 3분기 실적은 이보다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박강호 대신증권 연구위원은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은 3조2000억원 정도로 당초 전망치보다 5000억원가량 떨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회사 측이 '상저하고' 이익 패턴을 기대했지만 '상저하저'로 돌아서는 셈이다.
또한 2분기 반등을 기대했던 D램과 LCD 시황이 여전히 바닥을 맴돌고 있고 애플ㆍ구글ㆍHP 등 글로벌 IT기업들의 변신 몸부림이 예사롭지 않은 점, 글로벌 재정위기 등을 감안할 때 이 회장이 비상경영 돌입을 지시할 가능성이 높다.
전자,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등 전자 계열사들을 주력으로 거느린 LG그룹도 비상경영 모드에 돌입하긴 마찬가지다. LG 관계자는 "최근 LG디스플레이가 중국 광저우에 건설하려던 8세대 액정표시장치(LCD) 생산공장 착공을 연기해 투자 규모를 1조원 줄이는 조정을 단행했다"고 말했다. LG그룹은 올해 21조원의 투자 목표를 세웠지만 이를 20조원 이하로 줄인 셈이다.
LG전자는 물류 효율화, 재고 관리 등 원가절감 노력을 병행하면서 금리 변동에 따른 금융비용 상승을 차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LG이노텍도 최근 임원회의를 통해 불요불급한 경비를 줄이고 낭비 요인을 최소화하라고 임직원들에게 주문했다.
현대차그룹은 정몽구 회장이 직접 세부 사안을 챙기며 글로벌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으며 세계 경제 흐름과 현대ㆍ기아차 글로벌 생산라인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글로벌 종합상황실 보고 체계를 강화했다. 계열사 CEO를 포함한 주요 임직원들은 주말에도 출근하며 24시간 비상대기 태세를 갖췄다.
정 회장은 글로벌 경기가 이상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8월부터 매주 주말에도 출근하며 경기 동향 보고를 받고 있다.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이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하고 전 생산직 직원이 휴가를 떠나는 8월 첫째주에도 사무실을 지켰으며 지난 주말에도 출근해 미국 유럽 등의 경제 동향을 분석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과거 일일보고 체계가 최근에는 시간ㆍ분 단위 보고로 바뀔 정도로 그룹 내부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차그룹은 주력 시장인 미국 유럽 등이 재정위기의 진원지인 것이 부담이다. 현대ㆍ기아차는 올해 들어 미국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9%를 달성하며 연간 100만대 판매가 예상돼왔다. 현대차 관계자는 "미국 유럽의 위기로 안전자산 선호도가 높아질 경우 신흥시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며 "사실상 주력 수출시장 대부분이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해외발 위기가 가속될 경우 현대차그룹이 꺼내들 수 있는 카드는 감산이다. 당장 수익성이 악화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경비 절감이나 임직원 구조조정 같은 재무적 처방보다는 장기적인 체질 변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감산의 경우 일정 근로시간을 보장해줘야 하는 노조 측과의 문제도 있고 협력업체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크다"며 "현재 적정 재고일수가 부족할 정도로 생산이 빠듯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당장 꺼내들 카드는 아니다"고 말했다.
SK는 최근 상시 비상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연간 단위 경영계획은 의미가 없다고 보고 1개월 단위로 자금운용과 투자계획을 다시 짜고 있다.
특히 최태원 회장은 최근 HP가 주력사업인 PC 사업에서 손을 뗄 정도로 글로벌 경영 환경이 급변하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내ㆍ외부에서 정유와 통신사업 의존도가 높은 SK가 하루속히 또 다른 신수종 사업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SK그룹은 SK경영경제연구소를 통해 현 경영상황과 글로벌 환경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 모든 임원들에게 배포했다. 이달 말 최 회장과 계열사 사장단이 모두 참석하는 '수펙스추구협의회'를 통해 경영환경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도 예정돼 있다.
SK 관계자는 "비상경영 중 대규모 투자는 어렵지만 하이닉스 인수는 사업 다각화를 위해 변함없이 추진할 것"이라며 "하지만 기존 사업이나 부진한 사업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애물단지 신세를 벗어난 인천정유의 경우 국외에서 투자를 끌어들여 대대적인 설비 투자로 사업 다각화에 나설 계획이다. 인천정유는 지난 2005년 SK이노베이션이 3조원을 들여 사들인 정유 공장으로 그동안 설비 노후화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포스코도 최근 비상경영 체제로 전환해 철강 생산량 조절에 나섰다. 포항ㆍ광양제철소에서 예정된 설비 개ㆍ보수 작업을 앞당겨 향후 수요 증가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작업장별로 공정 개선을 통한 원가 절감도 대대적으로 펼친다. 포스코 관계자는 "본사는 보고 문화 개선, 공장은 프로세스 개선 등으로 올해 사상 최대 원가절감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은 이번 위기를 오히려 사업 다각화의 기회로 여기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에 건설 중인 변압기 공장의 완공 시기를 앞당기는 등 비(非)조선 사업 역량 강화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오는 12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 짓고 있는 이 공장이 완공되면 현대중공업은 울산 공장, 유럽 불가리아 공장 등과 함께 글로벌 변압기 생산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추진 중인 비조선 사업에 대한 설비 투자를 하루속히 마무리해 조선사업에 편중된 사업 구조를 다변화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황인혁 기자 / 이승훈 기자 / 문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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