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르셀로나의 명물 아그바 타워(Agba Tower, Barcelona)
유럽의 공통분모인 ‘로마’와 ‘기독교’ 외에도 스페인은 다른 요소가 많은 나라다. 역사적으로 카르타고(Carthage), 로마, 이슬람, 고트(Goths)족의 지배를 받아 인종과 문화가 다양하다. “스페인에 아프리카 무어(Moor) 족의 피가 안 섞인 사람이 없다”는 말처럼 회교왕국도 800년이나 안달루시아(Andalucia)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스페인 사람은 다른 유럽인과 다르다. 그들과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나라, 인종, 문화가 달라도 아주 쉽게 친해진다. 우리 집 사람이 “유럽에선 스페인에 있을 때가 마음이 제일 편해요”한다.
스페인(Spain)은 유럽의 서쪽 아래 편에 있는 이베리아(Iberia) 반도의 85%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15%는 포르투갈(Portugal). 인구는 4천 6백만으로 남한 보다 약간 적지만 면적은 남한의 5배가 넘는 50만 4천 평방 미터다. 지정학적으로 아프리카와 유럽의 교차점이며,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관문이다. 북쪽의 푸른 초원은 아일랜드를 연상케 하고 남쪽은 아프리카의 모로코와 비슷하다. 1인당 소득 약 3만 불로 경제규모 세계 8~9위다.
▲ 스페인 알타미라(Altamira) 동굴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3만 2천년 전 벽화.
▲ 두 왕가의 결혼식
1469년 카스티야(마드리드) 공주 이사벨라와 아라곤(바르셀로나) 왕자 페르디난드의 결혼으로 두 왕국이 통합되어 이 두 명은 스페인의 공동 왕이 된다. 이 들은 안달루시아를 정복하여 스페인 전체를 기독교 왕국으로 만든다. 스페인에는 선사시대 동굴벽화부터 이슬람 궁전, 폐허가 된 성(城), 로마 유적, 산티아고 순례지, 고틱/르네상스 양식의 교회까지 유적이 풍부하다.
▲ 스페인 황금기 펠레페 2세 시절 지어진 성(聖) 로렌조 수도원(마드리드 근교)
스페인은 남미로 진출하여 1521년에 현재 멕시코 지역에 있던 아즈텍(Aztec)을 정복하고 10년 후엔 안데스 산맥 고원지대에 문명의 꽃을 피운 잉카(Inca)도 멸망시킨다. 이들이 찬란했던 남의 문명을 철저히 파괴시키는 과정은 지금 읽어도 그 잔혹함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남미를 손에 넣은 스페인은 최고의 부자나라가 되어 16~17세기에는 세계최강국으로 대제국을 건설한다. 금과 은 말고도 남미에서 감자가 들어와서 흉년에 유럽을 기아로부터 구제한다. 이 외에도 커피, 설탕, 담배, 도마도 등이 유럽에 소개되어 음식문화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 마추피추(Machu Picchu) ‘잉카의 잃어버린 공중도시’ 1911년에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람빙엄(Hiram Bingham)에 의해서다.
1898 미-서 전쟁은 쿠바 독립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이 벌인 전쟁이다. 전쟁터는 쿠바와 필리핀이었다. 여기서 패전한 스페인은 필리핀, 쿠바, 괌, 푸에토리코 등의 식민지를 미국에게 빼앗긴다.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팽창주의로 돌아선다.
<스페인 내전>
1936년 좌파연합 공화정부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이를 반대하는 우파 군인들이 정부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킨다. 이 4년 간 내전(1936~39년)으로 스페인 전국이 황폐해 진다. 20세기는 ‘전쟁과 열정’의 시대였다. 세기의 양심 조지 오웰, 앙드레 말로,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참전하여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웠으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 군에게 패한다. 여기에서 승리한 프랑코는 그가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정권을 유지한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스페인은 국제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된다. 40년 가까이 철권통치를 한 프랑코는 경제발전에 힘썼고 황태자를 도와서 자기가 죽은 후 스페인이 왕정으로 돌아가도록 해주었다. 그는 축구 광으로 ‘레알 마드리드 팀’의 ‘후원자(Supporter)’였다.
▲ 히틀러와 프랑코 장군 후안 카를로스 국왕과 반 UN사무총장
스페인 내전을 경험으로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오웰은 ‘카탈루니아 찬가’를 쓴다. 피카소는 1937년 독일 비행기가 게르니카 지역을 폭격하여 수 많은 시민을 죽인데 분노하여 그의 거작 ‘게르니카(Guernica)’를 그린다. 이 그림은 곧 전 세계에 자유를 상징하는 작품이 된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프랑코 독재가 끝나면 조국으로 보내달라고 한다. 1981년 이 그림은 스페인으로 갔다. 20세기 스페인의 예술은 가우디(Gaudi)의 건축물, 피카소(Piccaso), 미로(Miro), 달리(Dalí)의 미술, 첼로 거장 카잘스(Casals)로 대표된다. 현재도 ‘3 테너’ 중 도밍고(Domingo)와 카레라스(Careras)가 스페인 사람이다.
▲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
▲ 피카소(Pablo Picasso)의 큐비즘(Cubism)
▲ 달리(Salvador Dali)의 초현실주의(Surrealism)
▲ 미로(Juan Miro)의 모자이크
▲ 달리 박물관
<가우디 건축물>
▲ 오은근사범과 방문한 가우디 작품으로 이뤄진 구엘 공원
▲ 천재 건축가 가우디(Gaudi) 작품 ‘밀라의 집(Casa Milà)’
바르셀로나는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 1852–1926)란 건축가의 작품이 100군데쯤 있는 도시다. 2009년 파리를 제치고 관광객 세계 1위를 차지한 것은 가우디 덕분이다. 가우디 작품을 보러 오는 인구만 1년에 천만 명 이상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바르셀로나를 ‘가우디 도시’라고 부른다. 가우디가 건축설계도를 대학생 시절 숙제로 제출했을 때 이를 본 학장이 “이 친구는 정신병자 아니면 천재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직선이 아닌 곡선이다.
가우디는 자연을 관찰하여 거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래서 지루하지가 않다. 그의 작품은 발상이 엉뚱하고 ‘동화의 세계’ 같기도 하다. 먹고 난 옥수수를 보고 ‘가족 성당’을 설계했는데 1882년에 시작하여 아직도 짓고 있다. 인간의 해골을 보고 기둥을 똑 같이 만들었고 도마뱀을 보고 지붕을 그렇게 만들기도 했다. 가우디, 피카소, 미로의 작품에는 어딘지 꿈이 있고 둥글 뭉뚝한 공통점이 있다. 내 생각인데 이들은 동시대에 같은 나라에 살면서 같은 꿈을 꾼 건 아닐까? 가우디는 그의 작품으로 이뤄진 구엘 공원에서 방한 칸만 차지하고 검소하게 살다가 1926년 전차에 치어 74세로 사망했다 (관련기사) http://www.tygem.com/column/cboard/viewpage.asp?pagec=8&seq=9734&gubun=C033
▲ 밀라 하우스와 도마뱀 지붕
▲ 해골 기둥 Casa Batllo 바티오 (Casa Batllo)의 밤
▲ 구엘(Guel) 공원 – 구엘 백작은 자기의 전 재산을 들여 가우디 작품을 짓도록 한 사람이다
▲ 가족성당 필자가 아들과 함께 방문
▲ 가우디의 가족성당 입구 - 1882년부터 130년이 지난 지금도 짓고 있다
▲ ‘유로 2008’ 우승
<스페인 축구>
현재 FIFA 랭킹 1위. ‘무적함대’ 스페인은2008년 7월 처음 1위에 오르면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FIFA 랭킹 1위를 기록한 여섯 번째 나라가 되었다. 스페인의 국가대표팀은 보통 ‘La Selección’이라고 불린다. 이 팀은 ‘2008 유럽대회’에서 우승했다. 과거엔 국가대표를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차출하면 서로 앙숙이라 협조를 않아 실력발휘를 못 했다. 그러나 서로 협력을 시작하면서 세계 1위가 되었다. 국내 팀으로는 레알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 세비야 FC, 발렌시아 FC 등이 강하다.
내가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 경기가 있는 날 어느 식당에 있었는데 TV를 보는 손님들의 고함, 박수 소리에 식사하기가 힘들 정도다. 특히 앙숙인 카스티야(마드리드)와 카탈루니아(바르셀로나)의 자존심 대결이라 관객의 감정 소모가 우리나라와 일본의 대결 이상이다. 이 사람들과 축구 얘기를 한번 시작하면 끝이 잘 안 난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도시관광에 FC바르셀로나 구장을 방문하는 순서가 끼어 있다.
오늘은 ‘스페인 VS 네덜란드 월드컵 결승전 날’이다. 스페인 바둑인 3 명이 전화를 했다. 자기네 숙소는 TV가 작고 응원도 크게 할 수 없다고 한다. 나는 밤 11시에 찾아 온 그들과 아침 6시까지 밤을 꼬박 새웠다.
아침에 누렇게 뜬 얼굴로 우리 집을 떠나는 그들에겐 웃음이 만발했다. 스페인이 이겨서 그렇다. 애국심은 자기 나라에 대한 애착심에서 나온다. 그런 감정을 자기의 운명으로 보고 전쟁도 정당화 한다. 이런 감정이 전쟁이 아닌 축구로 분출 되어서 다행이다.
▲ 스페인이 승리한 후 소주로 축배/ 훌리오, 주안, 앙엘,
▲ 몽세라트 수도원(Montserrat monastery) 1200미터 이상 높이 바위산 속에 있다
<몽세라트 수도원>
오사범이 “몽세라트 수도원에 한번 가 보시죠”해서 바르셀로나에서 50km쯤 떨어진 곳을 기차로 갔다. 누가 그 근처 동굴에서 성모 마리아를 봤다고 하여 이 곳이 성지(聖地)가 되었다. 11세기에 세워졌다니 천년 전 얘기다. 이 높은 산에 사람과 당나귀로 건축자재를 날랐다는데 신앙심의 위력에 새삼 놀라게 한다. 수도원의 규모가 엄청나다. 오사범이 이 곳 성가대가 유명하다고 해서 1시간 이상 기다려서 들었는데 별로다. 내가 “저 걸 들으라고 한 시간 넘어 기다리게 했느냐?”며 오사범을 구박하니까 “제 귀에는 아름답게 들렸어요” 하면서 웃는다. 오사범은 음악보다는 성당 분위기에 반한 것 같다. 우리는 케이블카로 산 정상에도 다녀왔다. 주변에 하이킹 코스가 발달되어 있어 많은 젊은이들이 애용하고 있다.
▲ 몽세라트 베네딕트 수도원
<스페인 바둑 약사(Brief Baduk history)>
1) 바둑 대부 스페인에 처음 바둑을 소개한 사람은 중국인 왕안포다. 그는 1949년 바둑세트를 갖고 스페인에 와서 자기가 아는 사람들부터 가르쳤다. 몇 년 후 왕안포는 스페인어로 된 바둑 책 ‘굳힘(Cercado 영어는 Enclosure)’을 출판한다. 그는 처음으로 바둑용어 책도 스페인어로 냈다. 첫 스페인 바둑대회는 1980년에 열렸다. 파코 가르시아(Paco Garcia)가 첫 챔피언이 되어 81년도 도쿄 세계대회 스페인 대표로 참가한다. 그 때 내가 그와 바둑을 두었는데 실력이 나보다 여섯 점쯤 약했다.
이 무렵에 일본인 미카미 마사루(Mikami Masaru) 6단이 마드리드에 온다. 그는 여행사를 경영하며 30년 동안 무료로 바둑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오래 동안 스페인 최강자로 군림하면서 일본 프로기사들의 방문을 도왔다. 그는 일본에서 바둑세트도 많이 들여왔다. 초기에 그는 일본 도장(道場)처럼 엄격하게 가르쳤으나 요즘엔 태도가 부드러워 지고 여자와 어린이를 가르치는데 주력을 하고 있다. 바둑 얘기에는 미카미가 빠지는 일이 드물다. 스페인 ‘바둑의 대부’라고 한다면 왕안포 보다는 나는 미카미를 꼽고 싶다.
▲ 미카미 6단(우측)이 나를 저녁에 초대했다. 건너편에서 얘기하고 있는 나는 코와 손만 보인다 ^^
2) 오은근 사범
2007년 드디어 한국에서 바둑사범이 스페인에 간다. 한국과 스페인 바둑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내가 한국사범을 보내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가서 그 곳 회장 마크(Marc Gonzales)를 만났다. 그가 “앞으로 바르셀로나 대학과 공대가 교양과목으로 바둑을 가르칠 가능성이 많다”고 하길래 곧 내 머리에 떠오른 사람이 오은근 사범이었다. 나이는 40대 초반에 연구생 출신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오사범을 추천한 이유는 그의 성실성. 영어, 바둑실력이 나에게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1년 이상 내 교실을 빠짐없이 나온 그는 타이젬 8단으로 초등학교에서 바둑을 가르치고 기우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영어는 고려대 영문과 출신으로 기초가 탄탄하고 카투사에서 실전 경험도 많다. 오사범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마크의 주선으로 바르셀로나 바둑 임원들과 밤 10시에 식사를 했다. 우리는 숙식, 스페인어 공부지원, 바둑레슨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의논했다. 계약기간 1년에 서로 만족하면 연장 할 수 있다는 게 내가 제시한 조건이다. 내가 이 모임에서 오사범이 영어를 잘 하는 점을 강조했다. 20대 연구생 출신보다 이 쪽이 스페인에 더 나을 거라고 했다.
▲ 바둑협회재무 제마(Gemma)양 바르셀로나 챔피언 후안과 특별 대국
해외에 사범을 내 보낼 때 가장 큰 문제는 숙소다. 유럽은 물가가 비싸서 자비숙소는 부담이 크다. 마크가 “나에게 중심가 람블라 옆에 아파트 방이 하나 있는데 한국사범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6개월 동안 그걸 내 주겠다”고 한다. 큰 일 하나가 해결된 셈이다. 이 날 나와 의논한 바둑협회 임원은: Marc Gonzalez(전 유럽연맹 부회장), Gemma Bochaca (재무), Dimas Cabre (이사), Joan Pons (챔피언)이었다 며칠 후 마크에게서 자기네가 회의를 통해 내가 추천한대로 오사범을 정식 사범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연락이 왔다.
내가 한국에 와서 오사범에게 그 얘기를 하자 그는 다음 날부터 스페인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그는 아직도 고급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다. 이런 면이 그의 장점이다. 오사범은 타이젬 8단이다. 바르셀로나 챔피언을 타이젬 7단인 내가 3점 접고 이겼으니까 오사범이 사범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봤다. 사범이 되려면 그 곳 최강자 보다 두 점은 확실히 세야 한다. 오사범은 2010년부터 ‘아시아 센터(Casa Asia)에서 바둑강의를 시작했다. 경제사정이 어려운데도 오사범 부부는 자족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관련기사) http://www.tygem.com/column/cboard/viewpage.asp?pagec=6&seq=10642&gubun=C033
그런데 내가 1년 후쯤 바르셀로나에 가니까 오사범과 마크가 사이가 별로 안 좋다. 둘이 체질이 달라 코드가 안 맞는 거 같다. 오사범이 “마크는 양말을 1주일쯤 신어서 고랑내가 나요” 한다. 마크는 “바르셀로나에 여자 바둑인이 20명쯤 되는데 오사범에게 여자제자가 한 명도 없는데 이상하지 않나요?” 서로 일러 바친다. 마크는 40이 넘었는데 아직 미혼이다. 3급인 그는 오사범에게 바둑을 배우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갈 때마다 오사범은 마크를 식당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곤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이가 좋다. 마크가 오사범을 초청해 준 일과 방을 내 준 건 잊지 않고 있지만 생리가 안 맞는 건 할 수 없다는 건가? ㅎㅎ
▲ 바르셀로나 바둑클럽 회원(노란셔츠 선글래스가 마크 곤잘레스)
▲ 오사범이 사는 골목(2009년 11월) ▲ 오사범이 나와 마크를 일식 집에 초대했다
▲ 오사범, 필자, 마크가 바르셀로나 거리를 걷고 있다
▲ 오사범 집 근처의 레이알(Reial) 공원(이 곳 램프가 가우디 작품)
3) 술과 바둑
2009년 스페인 바둑캠프에서 누가 ‘바둑과 술(Alcohol and Baduk)’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는 두 사람을 놓고 바둑을 두게 한 다음 한 사람에게만 맥주 한 병을 마시게 한 후 두게 했다. 그 판이 끝나면 또 한 병. 이런 식으로 계속했다. 나중에 그는 ‘맥주 한 병이 덤 8집을 잃는 효과가 있다’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4) 바둑인구
클럽회원 등록인이 120 명 정도. 그러면 바둑인구는 열 배인 1200 명으로 본다. 2009년 스페인대회 참가자가 156 명이고 스페인 사람으로 유럽대회 참가자가 700명으로 통계(1996년~2009년)에 나와 있다. 스페인 회장 마리오는 자기네 바둑인구가 2천명이라고 나에게 말한다.
▲ 2009 바르셀로나 오픈
▲ 우승 오치민 7단 준우승 오은근 6단 4위 리유에 6단 세자르 4단 후안 3단
5) 회장단(2009년 12월 임명)
회장: 마리오 노야(Mario Nolla) 총무: 페르난도 올가도(Fernando Holgado) 재무: 마누엘 구티에레즈(Manuel Gutierrez)
위원: 산체스(César Sánchez – 4단, 섭외담당) 위원: 리게로(Juan Jesús Ligero – 5급, 안달루시아 대표) 위원: 산체스(Albert Sánchez – 1단, 카탈루니아 대표) 위원: 곤잘레스(Marc Gonzalez – 4급, 단/급 사정담당)
6) 바둑강자
80년 대에는 당시 40대 중반인 가르시아 3단이 제일 강했다. 미카미는 일본 사람이라 스페인 대표가 될 수 없어서 가르시아가 국제대회에 단골 대표였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미카미의 제자였는데 나중엔 카나리(Canary Islands) 섬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 어린이에게 바둑을 가르치고 있다. 90년대에 와서는 세자르(César Sánchez) 4단이 스페인 1인자가 된다. 다른 사람도 4단까지는 올라가지만 다시 3단으로 내려오기가 일쑤인데 세자르 만 4단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 바르셀로나 클럽에서 바둑을 배운 후 20세에 마드리드로 가서 미카미의 제자가 된다. 그는 스페인의 1인자가 된 후 바르셀로나로 돌아 온다. 현재 최강자는 20세의 오스카 안귈라(Oscar Anguila) 4단인데 인터넷으로 바둑을 배운 후 한국에 가서 한 여름 동안 바둑 공부를 하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내 학생들에게서 바둑을 배우던 오스카는 내 바둑영어 교실에도 자주 왔다. 그는 현재 오은근 사범 제자다. 오스카는 컴퓨터 시대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청년이다.
▲ 왕궁(마드리드)
▲ 알칼라 가(街) 마드리드
▲ 마드리드 시청
<2010년 10대 강자>
- 세자르 산체스(César Sánchez) 4단 Barcelona - 오스카 안귈라(Oscar Anguila) 3단 Barcelona(현 챔피언) - 이그나시오 세르누다(Ignacio Cernuda) 3단 Madrid - 디마스 카브레(Dimas Cabré) 3단 Barcelona - 파우 카를레스(Pau Carles) 3단 Barcelona - 안토니오 에게아(Antonio Egea) 3단 Madrid - 하비에르 페르난데스(Javier Fernandez) 3단 Cádiz - 후안 알레마니(Joan Alemany) 3단 Barcelona - 후안 폰즈(Joan Pons) 3단 Barcelona - 파코 가르시아(Paco García de la Banda) 3단 Canary Islands - 사이트 (http://aego.biz/?m=7)
<한국에 유학 온 스페인 강자들>
▲ 오스카, 세자르, 조르디, 훌리오, 파우
<이유에(李月) 6단>
한 편 마드리드에는 중국 여자 강자 리 유에(李月) 6단이 작년에 왔다. 미카미 보다 바둑이 센데다가 미녀라 학생이 많다고 한다. 프로기사인 그녀의 오빠 이앙(李仰)과 유럽 순회강연, 인터넷 지도를 많이 해서 벌써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 녀가 처음에는 바르셀로나로 와서 자리를 잡으려다가 오사범이 있는 걸 알고 마드리드로 갔다. 그녀는 영어를 못하는 스페인 바둑회장 마리오와 나의 대담 통역을 맡았고 “유이스(Lluis–오사범의 스페인 이름)의 선생”이라며 시종 깍듯이 나를 돌보아 준다. 리유에는 이세돌 바둑을 좋아한다. “재미있잖아요” 하며 웃는다.
▲ 마드리드 클럽
▲ 리유에(李月- Li Yue) 6단
▲ 밤 11시에 회원들과 중국식당에 갔다. ▲ 바둑세트 보관하는 곳
▲ 마드리드
스페인 2에 계속……
한상대(전 시드니대학 교수 sdhahn@gmail.com 017)276-5878)
출처 http://www.tygem.com/news/new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