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86년 미국 하와이 한 도로에서 포즈를 취한 이장희. /윤형주 제공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2] 보헤미안 이장희
집에 잘 가지 않던 이장희, 친구 15명 이름 적은 쪽지 늘 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며 "이것만 있으면 안 굶어죽어" 그 명단엔 나도 있었다
1966년 이장희를 처음 만났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노래 대결을 펼쳤고, 나는 그에게 졌다.당시 지금은 사라진 서울 미도파 백화점 5층에 미도파 살롱이란 공연장이 있었다. 낮엔 이봉조 악단, 이동기 악단, 봄비를 부른 박인수 등의 공연이 열렸고 밤엔 카바레로 운영됐다. 거기서 관객을 대상으로 노래 경연 대회가 열렸다.
연세대 의예과 1년 재학 시절 친구들의 권유로 그 대회에 참가했다. 해리 벨라폰테의 '자메이카 안녕(Jamaica Farewell)'을 불러 2등 했다. 당시 1등이 이장희다. 그는 '이곳은 적막하고 오래된 마을(It's a lonesome old town)'이란 노래를 불렀다. 상품이 뜬금없었다. 그는 베스타제란 소화제를, 나는 스타킹을 상품으로 받았다.
이장희의 첫인상은 특이했다. 미국 영화배우 어니스트 보그나인을 닮은 외모로, 노래를 부른다기보다 읊조렸다. 매끄럽거나 세련된 맛이 없었다. 노래를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는 간혹 끊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노래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매력적이었다.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이 있었다. 그래도 그에게 진 게 속상했다.
몇 달 뒤 지인의 소개로 그를 다시 만났다. 알고 보니 학교와 나이가 같았다. 그는 생물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아무래도 생물학과와는 맞지 않는 이미지였다. 후에 알았다. 서울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는 공부에 소홀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우연히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보게 됐다.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아들의 학교 성적을 전해 들은 것이다.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그는 몇 달간 공부에 전념했다. 만류하는 선생님에게 간청해 연세대에 입학원서를 냈고 합격했다. 생물학과는 전해에 커트라인이 가장 낮았던 과다. 그러나 정작 이장희가 원서를 낸 해의 경쟁률은 예상 밖으로 높았다. 그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몇 달만의 공부로 합격했다.
두 번의 만남 이후로 그와 친해졌다. 그리고 경영학과에 다니던 유종국을 만나 통기타 트리오'라이너스'를 결성했다. 라이너스는 후에 송창식, 이익균과 결성한 트리오 세시봉과 달랐다. 트리오 세시봉에서 셋이 화음을 맞췄다면, 라이너스에선 이장희 목소리의 단점을 가리고 장점이 돋보이도록 나와 유종국이 뒷받침했다. 학교 바로 앞에 살던 유종국의 집에서 함께 연습했고, 대학 축제를 돌며 공연했다. 당시 불렀던 곡이 '킹스턴 트리오(Kingston Trio)'의 '탐 둘리(Tom Dooley)', '피터 폴 앤 매리(Peter, Paul & Mary)'의 '500 마일(500 miles)', '시커즈(The Seekers)'의 '별이 지기 시작할 때(When The Stars Begin To Fall)' 등이다.
- ▲ 1971년 주한 외교관 초청 행사에서 노래하고 있는 송창식, 이장희, 윤형주, 김세환(맨 오른쪽부터). 맨 왼쪽은‘조약돌’을 부른 가수 겸 MC 박상규. /윤형주 제공
자고 난 다음 날 아침 그는 내 옷을 입고 외출했다. 간혹 다른 친구 집에 가면 그 옷이 걸려 있었다. 이장희로 인해 15명의 옷이 제 거처를 잃고 여기저기 흩어졌다.
그를 비롯, 내 집에 찾아오는 친구들을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았다. 학자였던 아버지에게 내 친구들은 정체불명의 자식들이었다. 더군다나 친구들이 오면 나는 늘 술대접을 해야 했다. 교회 장로였던 아버지는 술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도수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아버지는 양주 한 병보다 맥주 세 병 마시는 것을 더 싫어했다. 그래서 우리는 맥주 대신 서재 캐비닛에 있던 양주를 아버지 몰래 꺼내 마셨다. 아버지가 술 안 마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제자들이 선물해온 것들이었다. 두셋이서 하룻밤에 양주 한 병을 비웠다. 막 술을 배워 술맛을 알아가던 때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내가 수업 들으러 가면 이장희는 학교를 가지 않아도 괜찮다며 계속 잤다. 그러곤 느지막이 일어나 내 옷을 꺼내 입고 다른 친구 집으로 향했다. 고등학교 때처럼 그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