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4세 박지만의 신청곡
아버지 허락 맡고 라디오 DJ로 - '공부에 지장 땐 돌려보낸다' 라디오 국장이 아버지와 약속
고위층 자녀 생일파티 단골 - 방송국 앞 까만 차들 줄줄이, 청평댐 수상스키 타고 놀아
박지만의 신청곡 '리틀 우먼' - 고민 끝에 엽서 내용 읽어
청와대車 속 소년 "고마워요"… 이후 같이 영화 보러 다녀
연재를 시작하며 ―윤형주
1968년 서울 무교동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송창식과 함께 트윈폴리오를 결성했다. 통기타 문화의 서막이었다. 그때 이후로 43년이 지났다. 그 기간 많은 사람이 당시를 이야기했다. 어떤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았고 또 다른 이야기는 사실이 틀렸다.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시 통기타 문화를 이끌었던 대다수 사람의 '시작'을 그 자리에서 목격했다. 김세환과 양희은의 데뷔 무대를 지켜봤다. 조영남은 어려서부터 알았고, 이장희는 대학생 때 트리오로 함께 활동했다. 김민기와는 고등학교 선후배지간이다. 가수는 아니지만 통기타 문화를 같이 누렸던 전유성의 데뷔도 나를 통해 이뤄졌다. 게다가 1970년부터는 라디오 DJ로 활동하면서 통기타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니 당시의 통기타 문화에 대한 사실 관계가 얽히기 전에 그 시대를 진술해야 한다면, 그 몫은 내 역할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다만 차일피일 미뤄졌다. 나름 바쁜 인생을 살아와서다. 그러다 작년부터 '세시봉 열풍'이 불었다. 어느덧 내 나이도 예순네 살이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선일보 독자들을 우리들의 이야기 여행의 동반자로 모시게 돼 무엇보다 기쁘다.
- ▲ 1967년 연세대 의예과 2학년이던 가수 윤형주가 동식물학 실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당시 윤형주는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활동하며 대학생 가수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윤형주 제공
"웃음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긴 머리에 말없는 웃음이…밤하늘에 별만큼이나 수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 바람같이 간다고 해도 언제라도 난 안 잊을테요."
1972년 외국곡에 내가 가사를 붙여 발표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내가 풀어갈 이야기는 '세시봉'에서 만나고 어울리고 헤어졌던 나의 포크음악 친구·선배·후배 가수들,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나의 통기타음악 인생은 1966년 연세대 의대에 입학하면서 아버지를 졸라 산 기타와 함께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세시봉 무대에 서게 됐고, 거기에서 만난 송창식과 1968년 '트윈폴리오'를 결성해 가수로서 본격 활동하게 됐다.
가수 못지않게 내가 열성을 쏟았던 일은 라디오 DJ였다. 1971년 3월 30일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0시의 다이얼' DJ를 맡았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가수가 DJ를 맡은 것은 내가 최초였다.
처음엔 거절했다. 학업(연세대 의대)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승낙할 리도 만무했다. 그러나 동아방송은 끈질겼다. 당시 조동화 라디오 국장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공부에 지장이 생긴다면 바로 돌려보내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서야 DJ 활동을 허락했다.
같은 시간대 경쟁이 치열한 시기였다. MBC '별이 빛나는 밤에'를 맡은 이종환 DJ, TBC '밤을 잊은 그대에게' 최동욱 DJ와 경쟁해야 했다. 가장 치열한 분야는 게스트 초청이었다. 예컨대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김세환을 게스트로 초청한다는 예고가 나오면 우리는 더 많은 통기타 가수를 섭외해 다음날 출연시켰다. 송창식이 출연한다고 예고가 나오면, 아직 음반으로 출시되지 않은 트윈 폴리오 고별 공연 실황 테이프를 방송했다. 그 결과 3개월 만에 '0시의 다이얼'은 청취율 1위로 올라섰고, 내가 그만둔 1972년 12월 31일까지 그 자리를 지켜냈다.
- ▲ ‘세시봉 친구들’ 윤형주·송창식·김세환(오른쪽부터)이 지난 3월 대구 엑스코에서 콘서트를 갖고 있다. /남강호 기자
DJ로 활동하는 동안 고위층 자녀들의 생일 파티에 초청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초청이 들어온 날엔 동아방송국 앞에서 까만 차들이 나를 기다리곤 했다. 많이 찾아간 곳은 경기 가평군 청평댐 인근이다. 고(故) 이후락 중앙정보부 부장 등 내로라하는 이들이 거기 살았다. 송창식이나 김세환과 주로 같이 갔다. 개그맨 고영수와 함께 간 적도 제법 있다. 당시에 귀했던 수상스키와 모터보트를 즐기기도 했다. 가장 많이 초청을 받은 날은 크리스마스다. 그날엔 통행금지가 없어 서너 곳을 하루에 돌았다.
때론 고위층의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1971년 여름엔 고(故) 엄민영 주일대사의 세 자녀와 함께 부산 해운대를 다녀왔다. 지금 파라다이스 호텔 앞 잔디밭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데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반말투로 "조용히 해"라고 했다. 순간 기분이 나빴다. 따지자 그가 말했다. "총리가 호텔에 와 휴식 중이시니 조용히 해 달라"고. 그는 총리의 경호원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가장 북적북적할 피서철에 와서 조용한 걸 원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지자 그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의 과잉 충성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을 처음 만난 것도 이 즈음이다. 같은 해 어느 날 오후, '0시의 다이얼' 피디가 학교로 찾아왔다. 피디는 내게 "박지만과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당연히 모른다고 대답했다. 피디는 나를 동아방송국으로 데려갔다.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장 큰 테이블엔 엽서 한 장뿐이었다. 엽서엔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버님 당선을 축하 드립니다.' 보낸 이는 '세종로 1번지 박지만'이었다. 그 무렵 치러진 선거는 대통령 선거뿐이었다. 신청곡은 바비 셔먼의 '리틀 우먼(little woman)'이었다.
난감했다. 신청곡을 틀었는데 누군가 장난친 거라면 문제가 된다. 틀지 않았는데 진짜라면 역시 문제였다. 결국 동아방송 측은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진위 여부 파악을 부탁했다. 사실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최대한 단순하게 가기로 했다. 보통 신청곡 엽서가 들어오면 말을 덧붙이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 엽서만큼은 내용만을 그대로 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남자들이 방송국을 찾아왔다. 청와대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들을 따라 방송국 앞에 주차된 차로 다가갔다. 차 창문이 열렸다. 한 소년이 웃으며 "신청곡 틀어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박지만이었다.
그와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14세였던 그는 영화를 좋아했다. 어쩔 수 없는 취미였을 수도 있다. 한창 친구들과 놀 시절에 그는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사생활 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극장은 그가 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였다.
우리가 자주 찾은 곳은 광화문에 있던 국제극장과 충무로의 명보극장이다. 박지만은 주로 일요일 오후 서너 시에 연락해왔다. 일요일만큼은 쉬고 싶어 나는 종종 핑계를 댔다. "지금 가면 표 없어. 암표는 비싸고."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괜찮아요. 일단 나오세요."
극장 앞 빵집에서 주로 만났다. 그를 만나 상영관으로 들어가는 복도엔 극장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서서 인사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우리 주변 자리는 비어 있었다. 다만 나는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함께 따라온 경호원들이 우리 앞에 앉아 영화 대신 우리만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윤형주는
▲1947년 서울 출생 ▲1966년 경기고 졸업, 연세대 의대 입학
▲1968~69년 송창식과 '트윈폴리오' 활동 ▲1971년 '조개 껍질 묶어' 등 솔로 앨범 2장 발표 ▲1974년 경희대 의대 본과 2년 수료 ▲1982~83년 MBC라디오 '한밤의 데이트' DJ ▲1988~95년 KBS TV '연예가 중계' '열린 음악회' 등 MC ▲대표곡: '우리들의 이야기' '바보' '조개 껍질 묶어' 등. '오란씨' '롯데껌' 등 CF 음악 1400여곡 작곡 ▲(현) 법무부 홍보대사·백혈병소아암협회 홍보이사, ㈜빌드드림·㈜한빛기획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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