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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3> 마시자, 한 잔의 추억

천하한량 2011. 7. 18. 19:17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3> 마시자, 한 잔의 추억
유종국 15대·난 7대 맞겠다 했는데 정작 본인은 "5대만 때려주세요"… 방송 DJ 때도 '히어 위 고' 추임새, 특유의 유머·경쾌함으로 인기

지난 2월 이장희는 우리 세시봉 친구들과 함께 방송에 출연했다. 그로서는 수십년 만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와 송창식, 김세환, 조영남에게 쓴 편지를 낭독했다. 나를 위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면 언제든 제일 인기 있는 사람은 윤형주였지요. 윤형주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늘 스타일리스트입니다. 당시에 목도리를 두른 화사한 모습의 형주는 모든 여대생의 인기를 늘 독차지했습니다. 또한 그는 아주 유머 감각도 많아서 동아방송 DJ로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이 말을 그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그가 언급한 동아방송 DJ란 '0시의 다이얼'DJ다. 내가 2년간 맡았던 그 심야프로그램을 1973년 그에게 물려줬다. 이장희만큼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예감은 적중했다. 그는 특유의 경쾌함과 유머 감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히어 위 고(Here we go)!" "히어 아이 엠(Here I am)!" 등의 추임새를 잘 넣었다. 역동적인 진행으로 '0시의 다이얼'은 동 시간대 라디오 프로그램 1위 자리를 지켜갔다. 이듬해 영화 '별들의 고향'OST 주제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며 그의 인기는 수직 상승했다.

그뿐인가. 그는 여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로맨티스트다. 빚을 내서라도 여자에게 장미 100송이를 선물할 수 있는 친구가 이장희다. 한 번은 그가 명동성당 앞으로 송창식과 나를 불러냈다. 기타를 가져오라는 말과 함께. 12월 24일, 추운 겨울이었다. 마리아 동상 주위를 촛불이 밝히고 있었고, 그 앞엔 이장희와 여자친구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랑 고백을 위해 이장희가 마련한 이벤트였다. 나와 송창식이 기타 치며 노래를 불렀다. 손이 얼어 코드가 잘 잡히지 않았다. 고생했으되 인상 깊은 추억이다.

1986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와이키키 해변에서 포즈를 취한 이장희(왼쪽)와 송창식. 이장희는 이곳에 공연하러 온 윤형주·송창식 등을 만나기 위해 LA에서 날아왔다. /윤형주 제공
그러나 때로 그 기질 때문에 이장희와 종종 충돌했다. (통기타 트리오) 라이너스 활동 시절 재경 강릉 학우회의 초청으로 강릉 경포대에 갔다. 낮에 (라이너스 멤버였던) 이장희, 유종국과 해변에서 노래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엔 서울의 A대학 학생 20여명도 있었다. 다른 멤버들은 그들과 함께 놀고 나는 내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가자 이장희, 유종국이 그 대학 여학생 네 명과 놀고 있었다. 이장희가 '꼬신'친구들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새벽 A대학 남학생 10여명이 각목을 들고 쳐들어왔다. 여학생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덩치가 우람한 한 학생이 물었다. "잘못한 만큼만 맞자. 너 몇 대 맞을래?"가장 착한 유종국이 15대를 불렀다. 나는 7대를 불렀다. 정작 이 모든 것을 주동한 이장희는 5대를 불러 가장 적게 맞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바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허벅지가 너무 쓰려서였다.

1967년 라이너스를 해체하며 잠시 이장희와 멀어졌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송창식을 만나며 나는 다시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장희 역시 강근식을 만나 함께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이후로 직접 노래를 썼다. 그의 노래에는 장조와 단조가 조화를 잘 이루는 묘한 장점이 있었다. 거의 트로트에 가까운 '불 꺼진 창',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그건 너', 권주가(勸酒歌)라 해 방송에서 기피했던 '한잔의 술' 등이 그렇다. 동요처럼 느껴지는 '겨울 이야기' 같은 노래를 쓰는가 하면, 사랑의 아픔 그 밑바닥을 휘젓고 다니다 온 것 같은 '안녕'이란 노래를 쓰기도 했다. 때론 읊조리는 시인의 낮은 톤으로, 때론 감미로운 목소리로, 때론 고뇌 섞인 절규의 목소리로 인기를 끌던 그는 노래 활동을 접고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그 방랑벽 덕에 1996년 잊을 수 없는 여행을 했다. 단둘이 떠난 여행이었다. 우리가 만난 지 30주년이어서 가능했다. 그 긴 세월을 기념하기 위해 나는 그가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달려갔고 그의 차로 라스베이거스를 향했다. 1박 2일의 여정이었다.

여행 중 나와 이장희는 사막 한복판에서 벌거벗었다. 우리 나이 오십이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옛날 인디언이 애용했다는 온천이 거기 있었다. 믿기지 않았다. 신기루 같았다. 보헤미안 이장희가 죽음의 계곡 데스 밸리를 200번 가까이 다녀오며 발견했다는 곳이었다. 물 온도는 적당했다. 어린아이처럼 물장난 치며 놀았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 여행 말고도 이장희가 미국에 터를 잡은 이후로 나는 미국에 갈 때마다 그를 만났다. 그가 한국에 올 때도 당연히 그를 만났다. 그랬으되, 다른 친구들과 함께였다. 사람을 끄는 흡인력, 이장희에겐 바로 그 힘이 있다.

"우리가 한국의 비틀스였지" 그 시절 낭만을 이야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