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노년'에 햇볕을
어느 독거 노인의 하루
"아내 잃고 홀로된 지 15년 가난보다 외로움이 무섭다
오래 사는 건 축복아닌 罰"
새벽 6시. 눈을 뜨면 가로·세로 두 뼘의 창문으로 들어온 희미한 햇빛에 빈곤한 살림살이 윤곽이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곰팡이 핀 천정, 앉은뱅이 밥상, 세상을 뜬 아내의 흑백 사진…. 나는 서울 양평동의 회색 다세대 주택 2층에 산다. 3평(9.75㎡)짜리 단칸방에서 오늘도 기나긴 하루를 시작한다.내 이름은 황석호. 75세. 전국에 혼자 사는 이른바 '독거(獨居)노인' 102만명 중 하나다. 아침은 대개 라면으로 때운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고, 홀로 산지 15년째. 외톨이 생활은 시간이 참으로 더디게 간다. 설거지를 끝내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어도 시곗바늘은 8시 언저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노인 복지관이 문을 여는 9시에 맞춰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선다.
월·수·금요일은 그래도 집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오전에 3시간씩 독거노인 지원사업으로 소개받은 일(가정 소독)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월 20만원이지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감사하다.
몇 년 전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하려고 관공서에 갔다. 직원은 "(같이 안 살아도) 아들도 있고, 전세방도 있어서 자격이 안 된다"고 했다. 정부로부터 노령연금 9만원, 독거노인 지원비 6만원, 합쳐서 월 15만원을 받는다. 공과금(5만원)에다 보험 처리가 안 되는 관절염 약값(7만원)을 빼면 먹고 살기가 빠듯하다.
나는 강원도 군부대에서 15년간 복무하다 상사로 제대했다. 30대에 서울 C식품업체에 취직해 약 20년간 일했다. 하루 종일 20㎏짜리 밀기울 포대를 트럭에 실어 날랐지만, 아들 둘, 딸 둘 공부시키고 여섯 식구 먹고살기가 힘겨웠다. 노후 준비는 왜 안 했느냐고? 그딴 걸 묻지 마라. 노후 준비할 경제적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은 나뿐 아니었을 것이다.
30년 전, 아내가 중풍으로 쓰러져 몸 왼쪽이 마비됐다. 자식들이 출가하거나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때여서 내가 휴직하고 아내를 돌봤다. 용하다는 약을 쓰고, 침술사도 부르며 3년을 간호하고 나니 통장 잔고가 바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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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석호(가명)씨가 단칸방에서 먼저 세상을 뜬 아내의 사진을 쓰다듬고 있다.‘ 가족’이라는 사회 안전망이 무너진 현실, 황씨는“오래 사는 건‘축복’이 아니라‘벌’2이라고 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아내가 15년 전 세상을 뜨고 나서도 애들한테 "혼자 살겠다"고 선언했다. 회사 퇴직금 2100만원으로 이 단칸방 보증금(2000만원)을 내고 나니 남는 게 없었다, 방 주인이 보증금을 올려 달라고할까 봐 항상 불안하다.
퇴직 후에도 용역 회사에 등록해 청소랑 운전을 하며 돈을 벌었다. 10년 전 허리 디스크가 왔다. 회사가 산재 처리를 해 줘서 척추 수술을 받았지만, 더 이상 육체노동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남은 세월을 이렇게 산다고 생각하니 진저리가 처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더니 우울증까지 생겼다.
2년 전 수면제를 사 모아 한꺼번에 삼킨 적이 있다. 눈을 뜨니 종합병원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간호사는 이웃이 신고했다고 알려 주었다. 정신은 몽롱한데 "왜 그런 일을 하셨어요"라는 간호사의 퉁명스런 말이 귓전을 때렸다.
102만명 독거노인의 제일 큰 적은 가난이 아니다. 외로움이다. 애들한테는 못난 아비 꼴을 되도록 안 보이려고 가급적 안 찾아간다. 애들도 먹고사느라 바빠 찾아오는 것은 한두 달에 한 번 꼴이다.
TV 에서 '동물의 왕국'이 끝나는 5시 30분에 복지관이 문을 닫으면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온다. 라면 끓여 저녁 먹고 나면 밤 11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10촉 전구를 켜 놓고 교회에서 빌려 온 책을 본다. 텔레비전은 전기료가 많이 나가니까 가급적 안 켠다.
복지관이 쉬는 날은 집에서 점심 때워 먹고 전철을 탄다. 65세 이상 노인은 무료이니, 나라가 노인들을 위해 이거 하나는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지하철 1호선 타고 천안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그럭저럭 하루해가 떨어진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시간을 보내야 할까. 그래도 나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려 애쓴다. 걱정해 봤자 소용도 없고, 그저 우울해지기만 할 뿐인걸.
긴 하루가 끝나고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간다. 잠을 청하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내일이면 또다시 찾아오겠지. 버텨내야 할 힘겨운 하루가.
※황석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기자가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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