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 없어도, 돈 없어도
우리를 진짜 살고 싶게 만드는 것을 찾자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85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새벽에 자꾸 잠을 깬다. 내일 일을 제대로 하려면 좀 더 자야 하는데…. 그러나 이렇게 한번 깨면 다시 잠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특별히 걱정할 일도 없는 것 같은데, 가슴이 자꾸 답답해온다. 피곤한 아내가 잠을 깰까 싶어 슬그머니 침대에서 나온다.
거실 창문 밖은 아직 캄캄하다. 동틀려면 아직 멀었다.
아이들 방에 들어가 곤히 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손과 얼굴을 가만히 만져보면 허전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아이들은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생각하면 쓸쓸함이 조금 가신다. 그러나 아이들은 여전히 꿈에 젖어 뒤척일 뿐이다. 아이들이 잠을 깰까 다시 방문을 닫고 나온다.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본다. 신문 올 시간은 아직 멀었다.
이런 불면의 새벽이 유난히 소심한 내게만 있는 일일까? 아니다. 과정을 생략하고 목표만 보고 달려온 이들이라면 한결같이 겪는 ‘느닷없이 쓸쓸한 새벽’이다. 앞으로 내가 더 이상 이룰 수 있는 일도 없어 보인다. ‘이게 전부인가….’ 젊은 날,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이룰 수 있는 일은 빤히 보인다. 겨우 올라온 지금의 이 지위를 유지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은 잘못된 존재 확인 방식 때문이다. 아이덴티티(identity)가 잘못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다. 한국 사내들의 삶의 목표는 분명하다. 정치든, 경제든, 그 권력관계의 정점에 서는 일은 한국의 사내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삶의 목표다. 모여 앉으면 정치인 욕하기에 열중하는 것은 이러한 욕망의 투사에 불과하다. 정치는 모든 권력관계가 아주 분명하고도 철저하게 확인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 삶의 목표가 이뤄졌는가는 일상에서 아주 간단한 의례(ritual)로 확인된다. ‘명함 주고받기’다. 한국 사내들에게 명함이 사라지는 것처럼 두려운 일은 없다. 존재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체성(identity)’은 ‘나’를 또 다른 대상과 ‘동일시(identify)’한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사내들은 사회적 지위와 나를 동일시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명함은 아주 간단하고도 확실한 존재확인 수단이다.
누구를 만나든 명함을 주고받은 후에 대화를 시작하게 되어 있다. 내가 어느 회사의 부장이고, 이사란 것이 먼저 확인이 되어야 모든 인간관계가 가능하다. 명함이 사라지는 것은 그 존재의 기반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인간관계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 인간관계란 철저하게 힘의 서열에 기초한 권력관계일 뿐이다.
서로 명함을 주고받는 행위는 동물의 왕국에서 누구의 뿔이 더 큰가, 누구의 이빨이 더 강한가를 대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명함 교환 장면을 잘 살펴보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는 바로 고개가 올라가고, 지위가 낮은 이는 바로 웃으며 허리를 조아린다. 아무도 인정하기 싫겠지만 사실 아닌가? 그래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명함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러한 권력관계로부터의 이탈은 견딜 수 없는 박탈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박탈감은 바로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성공한 사람들’의 우울증은 사회 조사로도 확인된다. 미국에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25년간 추적 조사했다. 그 결과,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일수록 은퇴한 이후에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 7배나 높았다.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성공한 사람들’의 느닷없는 자살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 ▲ 일러스트 한규하
과정이 상실되고 목표만 있기 때문이다. 목표를 상실한 삶도 견디기 힘들지만, 과정을 생략한 삶은 더 힘들다. 목표가 달성되어도 허전하고, 목표를 상실하면, 그 또한 참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역사상 가장 성공한 사람이 많은 미국사회에는 1960년 이후 이혼이 2배 이상 늘었고, 청소년 자살이 3배 늘었다. 폭력범죄가 4배 늘었고, 감옥에 있는 사람은 5배 늘었다. 2차 대전 이후로 우울증은 10배가 늘었다. 한국사회라고 예외는 아니다.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하다. 현재를 살아야 한다. 미래는 내 삶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지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현재가 되어야만 내 삶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내 삶의 과정을 느끼며 살아야 미래의 목표가 제대로 된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오늘의 느낌이 아주 구체적으로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
(내일모레 오십이 되는 나는 성공을 위해 오늘을 인내하라는 그 수많은 성공 처세서의 저자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도대체 몇 살까지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내 사회적 지위는 내 아이덴티티가 아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변하기 때문이다. 내가 매일 반복할 수 있는 즐겁고 가슴 벅찬 재미가 내 존재 확인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내 삶을 끝까지 지탱해준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도대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죽는 사람이 태반이다. 막연한 우주질서, 세계평화, 종족번식, 그런 종류 말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아주 쉽게 일상에서 반복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 그런 것들로 내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왠지 모를 우울함에 너무 일찍 눈뜬, 참 많이 쓸쓸한 새벽. 텅 빈 거실 소파에 앉아 우린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봐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뭘 좋아하느냔 이야기다.
(아,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 떠오르는 단어라고는 ‘젊은 여자!’뿐이다. 젠장, 나는 머리카락을 뽑으며 또 다시 좌절한다.)
'▒ 은퇴와귀농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살 시도 40대 남성의 고백 (0) | 2009.12.16 |
---|---|
죽으면 삶도 고통도 끝난다’는 생각은 착각 (0) | 2009.12.16 |
40~60대 남성 자살자, 여성의 3배 작년 4546명, 자살시도도 4만여명 (0) | 2009.12.16 |
한국, 가장 늙은 나라 된다 (0) | 2009.07.10 |
바람 피운 사실을 아내에게 고백하면 안되는 이유 10가지 (0) | 2008.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