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에서 눈 뜬 순간‘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다시 일할 수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85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중년남성들은 왜 자살하려고 하는 것일까. 지난 3월 아내와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한 40대 남성을 만나 ‘왜 자살을 하려
했는지’ 들어봤다. 잇따른 경제적 어려움으로 마음고생을 한 이 중년남성은 오랜 기간 외로움에 시달렸다고 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비양심’이라고 생각했어요. 그전에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몇 번 했지만 그날은 정말 ‘다들 내게 왜 이러는 걸까, 다
끝났구나…’ 싶었죠.”
지난 12월 4일 서울에서 만난 고의창(가명·45)씨는 담담하게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지난 3월 31일, 저녁 7시쯤이었다. 고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강원도 원주시의 식당 뒷방에서 방문을 굳게 닫고 홀로 앉아 있었다. 저녁시간이었지만 식당은 손님을 받지 않아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연탄가스를 피워 자살을 시도했다. 깊어질대로 깊어진 아내와의 갈등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탄을 피우기 직전 그는 왼쪽 팔목에도 면도칼을 두어 번 그어 상처를 냈다. 연탄가스가 방 안에 차오르자 고씨는 뒤로 몸을 뉘었다. 머리는 몽롱하고 어지러웠지만 ‘됐다. 나만 죽으면 된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고씨는 그저 ‘행복하고 평범한 가장’이었다. 특별히 잘나가진 않았지만 쌍둥이 남매의 재롱을 보며 하루의 고단함을 씻었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그는 ‘악몽’과 같은 시간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의욕을 가지고 시작했던 사업은 계속 난관에 부딪혔고 주변 사람들은 그의 사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내성적이고 고지식한 고씨에게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아내와의 소원해진 관계였다.
“전 도덕책처럼 살려고 했고 또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담배 꽁초 하나 거리에 버린 적이 없고 남 속이면서 잔머리 굴린 적도 없었어요. 살면서 나름대로 ‘그 어떤 남자들보다 가족에게 충실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내는 이런 절 ‘답답하다’고 하더군요….”
1980년대 초반 고등학교를 졸업한 고씨는 고향인 충남 공주의 농협 직원으로 입사했다. 하지만 직장생활 8년차인 1991년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당시 일본에서 유행 중이던 도시락 사업에 뛰어들었다. ‘내 사업을 꾸려보고 싶다’는 월급쟁이의 평범한 꿈 때문이었다.
한때 직원을 15명까지 뒀을 정도로 사업이 잘됐다. 6살 아래인 아내도 그즈음 만나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기쁨은 잠깐이었다. 정부의 ‘기업·관공서 행사 축소’ 방침에 따라 거래처들의 주문이 뚝 끊겼고 고씨의 사업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결국 고씨는 억대 빚만 진 채 사업을 접어야 했다. 도망치듯 고향을 떠난 그는 처가인 강원도 원주에 자리를 잡았다.
고씨는 ‘다시 시작하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노동판 막일도 해보고 영세 의류업체에서 영업도 했다. 하지만 일은 고되고 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아파트 리모델링 공사 사업을 하는 친척은 고씨에게 동업을 제의한 뒤 ‘사정상 안 되겠다’고 했고, 지방에 내려가 별장 짓는 일을 하자던 친지도 ‘안 되겠다’며 일방적으로 말을 번복했다. 고향 부모님께는 도움을 구할 수가 없었다. 사업 실패로 야반도주한 불효자가 무슨 낯으로 손을 내밀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자 아내의 짜증이 눈에 띄게 늘었다. 아내는 자신의 바깥활동을 탐탁지 않아하는 남편 고씨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보수적이고 원리원칙주의자인 남편을 답답하게 여겼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고씨도 아내의 말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부부싸움이 잦아지면서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다행히 고씨의 사정은 조금씩 나아졌다. 아껴뒀던 전세금을 빼서 개 농장 운영에 나서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처가 뒤편에 야산이 있는 데다 주변에 변변한 보신탕 가게가 없다는 걸 포착한 덕이었다. 고씨는 도로에 트럭을 세워놓고 간이 보신탕집을 시작했다. 발품을 팔아 시내 곳곳에 전단지를 뿌렸고 맛이 좋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단골손님을 많이 끌었다. 4000원짜리 보신탕을 하루 50~60그릇씩 팔며 그는 ‘일하는 기쁨’을 한껏 누렸다. 2003년 그는 원주 시내에 작은 보신탕 가게를 냈다.
하지만 아내와의 갈등은 점점 심각해졌다. 처음엔 아내와 식당에서 함께 일했지만 남자 손님을 응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억지로 일을 그만두게 했다. 그후 아내는 자주 ‘가슴이 답답하다’며 집을 휙 나갔고 한번 나가면 연락이 끊겼다. 아내는 “스트레스 받는다”며 담배에도 손을 댔다. 처가에 도움을 요청해도 소용이 없었다. 장인 장모는 “자네 능력이 부족해 이렇게 됐다. 고지식한 데다 하지 말라는 것만 많으니 내 딸이 어떻게 견디겠나”라며 딸 역성을 들었다.
고씨는 “그때만 해도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너만 날 알아주지 않는다”며 아내와 하루가 멀다하고 심하게 싸웠다. 신경쇠약과 불면증 때문에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평균 2~3시간밖에 자지 못하니 체력이 떨어지고 무기력해졌다. 수면부족으로 인한 예민함은 아내의 방황을 더욱 자극했다. 그런 상태가 6년 넘게 이어졌다. 그는 “사는 게 지옥 같았다”며 “‘죽고 싶다’는 생각이 수십 차례 들었다”고 했다. 실제 죽을 생각에 몇 번 손목을 긋기도 했다.
결국 지난 3월 중순 아내는 “이혼하자”는 말을 꺼냈다. 고씨는 장모에게 달려가 “○○엄마 좀 말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장모의 태도는 냉랭했다. “우리는 모르네. 자네가 알아서 하게.” 얼마 후 처남이 아내를 데리러 왔고 아내는 집을 떠났다. 아무리 휴대전화로 연락을 해도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고씨는 보름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결국 식당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3월 31일 저녁, 가게 방 한구석에서 연탄을 피웠다.
그가 희미하게 눈을 뜬 건 그 다음날 오전 8시쯤이었다. 그는 대학병원 응급실에 혼자 누워 있었다. 맨 처음 담당의사의 얼굴을 봤고 자신의 팔뚝에 꽂힌 링거를 봤다. 간호사는 장인 장모가 그를 발견해 이곳에 옮겼다고 전했다. 일산화탄소 제거 응급 치료를 받고 그는 정오쯤 퇴원했다. 한참 동안 응급실 앞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말 내가 이 정도 존재밖에 안 됐구나’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오히려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4월 중순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정신과를 찾아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사정을 의사에게 자세히 털어놓았다. 그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그의 이야기였다. 그는 “의사 선생님이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고 마음이 편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주변에 이런 사람이 한 명만 있었어도 자살하려 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는 말도 했다. 그는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 약을 받으러 서울의 정신과 의료원을 찾는다.
“저도 참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어요. 내 기준에 맞으면 받아들이고, 안 맞으면 잘라버리고 그랬거든요. 편협된 생각에 사로잡혀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고생시켰으면서도 아내가 힘들어할 때 위로는커녕 ‘넌 행실이 왜 그러냐’고 비난만 했던 거죠.” 그는 “오죽하면 요즘은 가끔 일부러 길바닥에 담배꽁초 버리는 연습을 할 정도”라고 웃었다. 고지식한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고씨는 지난 봄 자신의 ‘극단적인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한마디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편협한 자신도 문제였지만 그걸 죽음으로 끝내는 건 더 큰 잘못이었다고 했다. 그는 “다시 생각하면 그 순간(자살의 순간)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 없었다”며 오히려 “죽을 욕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되물었다. 부모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줄 뻔했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도 했다.
고씨는 지난 여름부터 일을 다시 하고 있다. 집에서 절인김치를 만들어 파는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트럭을 몰고 서울 가락시장에서 배추를 뗀 뒤 공주로 내려간다. 최근엔 일하는 아줌마 4명을 새로 고용할 만큼 그의 김치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했다. 내년엔 고향 집 옆에 작은 공장을 세워 본격적인 절인김치 사업에 나설 것이라고도 했다.
고씨는 “‘모든 건 마음에 달렸다’는 진리를 이제서야 깨달아 안타깝다”고 했다. “앞으로 내 자신을 위해, 또 나 때문에 가슴 아팠던
사람들을 위해 도리를 하며 살아갈 거예요. 지금은 무엇보다 이렇게 다시 일하게 된 것이 정말로 행복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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