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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시고(牧隱詩藁) 목차 제1권 - 제35권

천하한량 2010. 1. 7. 19:13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차 제1 -  35

 

목은시고(牧隱詩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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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사(山中辭)

민지사(閔志辭)

영개사(永慨辭)

유수사(流水辭)

동방사(東方辭). 사명을 받들고 일본국(日本國)에 가는 대사성(大司成) 정달가(鄭達可)를 보내다.

자송사(自訟辭)

설매헌 소부(雪梅軒小賦). 일본(日本)의 중 윤중암(允中菴)을 위하여 짓다.

관어대 소부(觀魚臺小賦)

소보조(巢父操)

백익조(伯益操)

이윤조(伊尹操)

태공조(太公操)

주공조(周公操)

선니조(宣尼操)

숭고조(崧高操). 한산자(韓山子)가 송산(松山)을 바라보고 짓다.

요즘 창화(唱和)하는 일 때문에 가동(家僮)이 자주 원재(圓齋)의 집에 갔는데, 돌아오면 반드시 공()이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적이 생각건대, 공이 나가면 다른 데를 가려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에 대한 혼정신성(昏定晨省)을 급하게 여긴 것일 뿐이다. 공의 나이가 50세 가까이 되었는데 고당(高堂)께서도 무양(無恙)하시니, 즐거워라, 이 사람이여. 하늘이 무슨 까닭으로 나만 유독 양친(兩親) 다 여읜 비감(悲感)을 갖게 했단 말인가. 이에 정모(鄭母)에 대한 시()를 지어서 스스로 슬퍼하는 바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양헌시(陽軒詩). 구성군(龜城君) 김공(金公)을 위하여 짓다.

목은시고(牧隱詩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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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절일(天壽節日)에 신() ()이 본국(本國)에서 표문(表文)을 올리러 온 배신(陪臣)과 함께 대명전(大明殿)에 입근(入覲)하다.

동문(東門)에서 가군(家君)을 송별하다.

새로 숭덕사(崇德寺)에 우거하다.

상서(尙書) 태겸선(泰兼善)에게 전해 올리다.

백부(伯父)께 받들어 부치다.

중추(中秋)에 박중강(朴仲剛)에게 부치다.

중강(仲剛)의 운에 차()하다.

귀근(歸覲)하는 기 집현(奇集賢)에게 받들어 보내다.

눈 온 뒤에 다시 중강의 운을 사용하다.

제야(除夜)

동사생(同舍生)과 함께 짓다.

스스로 읊다.

어버이를 뵈러 서천(西川)에 가는 동사생(同舍生)을 보내다.

섭공소(葉孔昭)와 함께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를 두고 짓다.

가을날에 회포를 쓰다.

차운(次韻)하여 회당(檜堂)에게 주다.

시랑(侍郞) 성의숙(成誼叔)을 알현하다.

박사(博士) 홍중의(洪仲誼)를 알현하다.

성 시랑(成侍郞) 댁에서 여정심(余廷心) 선생을 뵙고 물러 나와서 기록하다.

섭공소(葉孔昭)의 강남(江南) 시 사절(四絶)에 차운하다.

한풍(寒風) 세 수()를 섭공소와 함께 짓다.

초석(楚石)이 거문고를 타다.

봉성(鳳城)을 나가다.

연산가(燕山歌)

도중(途中)에서

통주(通州)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다.

관도(官道)의 버들을 읊다.

한낮이 서늘하다.

아침 일찍 출발하다.

도중(途中)

어양현(漁陽縣)

천보가(天寶歌). 계문(薊門)을 지나다가 느낌이 있어 짓다.

옥전(玉田)의 도중에서

술을 대하여 노래하다.

마상(馬上)에서 고향 사람 진사(進士) 왕계(王桂)를 만나다.

도자산(道者山)을 바라보다.

저녁에 유림관(楡林關)에서 묵다.

정관(貞觀) 연간을 읊다. 유림관에서 짓다.

염장(鹽場)을 지나다.

남신점(南新店)에서

한낮이 맑게 개다.

서주(瑞州)에서

우박행(雨雹行)

새벽에 바닷가를 출발하다.

함께 온 중이 시내를 건너다가 말에서 떨어져 신 한 짝을 잃었으므로, 장난삼아 짓다.

새벽에 길을 가면서 바다를 바라보다.

마상(馬上)에서

판교(板橋)에서

해주(海州)에서

산길

석벽(石壁) 채리(寨里)를 지나다.

촌가(村家)

서강(西江)

한데서 자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다.

양책역(良冊驛)

소 먹이는 것[牧牛]을 읊다.

푸른 벌레[靑蟲]를 읊다.

신안역(新安驛)에서 묵다.

장림역(長林驛)

숙주(肅州)

부벽루(浮碧樓)

도중에

영해부(寧海府)로 돌아가는 신석보(申碩甫)를 송별하다.

수원부(水原府)에서 유 선생(兪先生)의 운에 차하다.

유 선생의 운을 사용하여 부윤(府尹) 오 간의(吳諫議)에게 바치다.

12 20일에 도성을 출발하여 명년 정월에 학궁(學宮)으로 돌아왔다.

당사(唐史)를 읽고

학궁(學宮)에 돌아간 다음 해 정월 그믐에 선고(先考)의 부음(訃音)을 받고 분상(奔喪)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자당(慈堂)을 모시고 상제(喪制)를 마치니, 때는 계사년 늦은 봄이다. 동년(同年) 주인성(朱印成)이 시를 지었으므로 그 운에 차하다.

진변(鎭邊) 이 상국(李相國)에게 올리다.

청명(淸明)에 눈이 오므로 백부(伯父)의 운을 차하다.

밤에 앉아서 느낌이 있어

4월에 과거에 응시하려고 서울로 가던 도중 수원(水原)에 들렀다가, 뒤에 백부(伯父)의 증행시(贈行詩) 운을 받들어 차해서 부쳐 올리다.

수원(水原) 팔탄촌(八呑村)에서 동당시(東堂試)의 기일을 기다리면서 여러 가지 흥이 일어

초장(初場)

중장(中場)

종장(終場)

민 동자(閔童子)의 시운에 차하여 흥왕사(興王寺)에 제()하다.

한산(韓山)으로 돌아가던 도중 덕수원(德水院)에서 비에 길이 막혀 회포를 쓰다.

사평도가(沙平渡歌)

완산(完山) 남루(南樓)의 조촐한 술자리에서 안부(按部) 최중연(崔仲淵)에게 바치다.

어사(御史) 전녹생(田祿生)의 시운에 차하다.

곡산가(鵠山歌)

회포를 서술하다.

간소하게 술을 마시며

흐르는 물을 보며 느낌이 있어

향거(鄕擧)에 응시하려고 서울로 가는 도중에 짓다.

춘추(春秋)를 읽다.

향시(鄕試)에 느낌이 있어

내가 경사(京師)에 회시(會試)를 보러 가려고 하는데, 마침 나라에서 판서(判書) 김희조(金希祖)를 경사에 보내어 동궁(東宮) 책립을 하례하게 하므로, 내가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함께 가는 도중에 짓다.

서경(西京)

안주(安州)의 강가에서

의주참(義州站) 동쪽 상방(上房)에서 자는데, 한밤중에 불이 구들 틈새를 따라 도벽지(塗壁紙)에 타오르는 통에 바람이 일고 방 안이 환해지므로, 깜짝 놀라 깨어 불이 난 것으로 여기고 옷을 벗은 채 알몸으로 표문(表文)을 안고 달려 나갔더니, 도벽지가 다 타자 불이 절로 꺼졌다. 그래서 잠깐 사이에 관리(官吏)의 직무 수행은 의당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증험하였는데, 다만 후일에 어떠할지는 알 수가 없다. 시 한 편을 읊조려서 그 사실을 기록하는 바이다.

지난 무자년에는 이 정승(李政丞) , 이 밀직(李密直) 을 모시고 천수성절(天壽聖節)의 진하(進賀)차 갔었는데, 지금은 회시(會試)를 보기 위해 서장관이 되어 사은표(謝恩表)를 받들고 역마를 타고 급히 경사에 가게 되었으므로, 동팔참(東八站)의 노상(路上)에서 이 정승, 이 밀직 두 분을 생각하며 읊어 단장(短章)을 이루다.

요양(遼陽) 길에서

창의참(彰義站)에서 느낌이 있어 한 편을 읊다.

밤에 길을 가다.

대령(大寧)에 들러 최 염사(崔廉使)에게 올리다.

북경(北京)에서

산길

통주(通州)에서

옛날에 우거(寓居)했던 숭덕사(崇德寺)의 승방(僧房)에서 여러 가지 사물을 읊다.

박중강(朴仲剛)을 생각하다.

취하여 노래하다.

즉사(卽事)

느낌이 있어

목은시고(牧隱詩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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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면려하다.

고의(古意)

전시(殿試)를 본 뒤에 스스로 읊다.

과거에 급제하여 느낌이 있어

경사(京師)에서 동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짓다.

산역(山驛)에서 읊다.

북경(北京)

도중(途中)

요양성(遼陽省)

도중에

애두 역사(崖頭驛舍)에 예천(醴泉) 권 정승(權政丞)의 시가 있는데, 그 한 연구(聯句), 들이 넓으니 백성은 나무에서 살고, 하늘이 나직하니 말은 구름 속에 들어가네.[野闊民居樹 天低馬入雲]라고 하였으니, 그 요동(遼東) 벌판을 형용한 것이 더 이상 여한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는 바로 요동 벌판을 형용한 열 자()의 전신(傳神)이다. 이것이 마치 두 공부(杜工部)땅이 편평하니 강물은 촉을 움직이고, 하늘이 넓으니 나무는 진에 떴도다.[地偏江動蜀 天闊樹浮秦]라는 시와 아주 서로 같으니, 동궁 찬선(東宮贊善)의 임명을 받기에 마땅하도다. 고려 사람이 이 선발(選拔)에 참여한 일은 예로부터 들어 보지 못했다. 나는 공의 손서(孫壻)인데,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곧바로 한림 공봉(翰林供奉)에 임명되었으니, 이것이 비록 나의 가풍(家風)이기는 하나, 권씨(權氏)의 가문에도 어찌 영광됨이 없겠는가. 작고한 공이 다시 살아난다면 반드시 나의 시를 걸작(傑作)이라고 경하(慶賀)할 것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침내 공이 지은 시 열 자를 운()으로 사용하여 10()를 지어서, 한편으로는 요동 벌판을 읊고, 한편으로는 예천을 찬양하는 바이다.

요양로(遼陽路)

개주참(開州站)

파사부(婆娑府)

박주강(博州江)

재차 부벽루(浮碧樓)에 들르다.

흥의참(興義站)의 저탄(猪灘)에서

왕경(王京)에 이르다.

동문(東門)을 나서서 한산(韓山)으로 향하다.

삼각산(三角山)을 바라보며

도중(途中)에 읊다.

홍경원(弘慶院)

도중(途中)

한산(韓山)에 이르다.

백의(白衣)에게 술을 보내왔으므로, 광주 사록(廣州司錄) 이 동년 열(李同年悅)에게 사례하다.

보광사(普光寺)의 두 상인(上人)이 방문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차운(次韻)하여 완산(完山)의 기실(記室) 화 동년(華同年)의 시권(詩卷)에 세 수를 쓰다. 내가 화군(華君)을 찾아 완산에 갔다가 마침 서울에 가는 윤 전첨(尹典籤)과 우연히 서로 만나서 수일 동안 함께 머물렀다. 완산은 백제 왕(百濟王) 견훤(甄萱)의 고도(故都)이다.

내가 요행히 등과(登科)하여 한림 공봉(翰林供奉)이 되어 집에 와서 보임(補任)을 기다리고 있는 터인데, 본국(本國)의 동년(同年) 제공(諸公)들은 바야흐로 각주(各州)의 사록(司錄)이 되었다. 그중 병과(丙科) 수석으로 급제한 임하(臨河) 화지원(華之元)은 전주(全州)에 있어 우리 집과 매우 가까우므로 가서 방문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화군이 금주(錦州)를 다스리게 되었고, 금주에는 글자를 새길 만한 나무가 많았으므로, 선인(先人) 가정(稼亭)의 문집(文集)을 간행하기 위해 금주로 화군을 방문했다가 술자리에서 장가(長歌)를 읊다.

역사를 읊다.

공주(公州)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다.

청주(淸州)에 이르러 승방(僧房)에서 묵었는데, 다음 날 한 동년(韓同年) 이 조찬(朝餐)을 베풀어 주다.

이생(李生)과 함께 옥금촌(玉琴村)에서 자고 새벽에 한강(漢江)에 이르러 짓다.

삼각산(三角山) 아래에서

고의(古意)

돌아가련다.

도중에 눈이 내리다.

도성(都城)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지난달에 전리정랑 예문응교(典理正郞藝文應敎)에 제수되었음을 알다.

단좌(端坐)하여

앞의 운을 사용하여 함께 놀던 이에게 주다.

눈을 밟으며 노래하다.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하다.

스스로 읊다.

우리 집이 있는 한산(韓山)은 비록 작은 고을이지만, 우리 부자(父子)가 중국의 제과(制科)에 급제한 까닭으로 천하가 모두 동국(東國)에 한산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훌륭한 경치를 가장(歌章)으로 전파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팔영(八詠)을 짓는 바이다.

스스로 읊다.

용문가(龍門歌)

지나간 일을 읊다.

이른 봄

어버이를 뵈러 가기 위해 휴가를 청했더니, 이날 밤에 비답(批答)을 내려 중서 사인(中書舍人)을 제수하므로, 새벽에 일어나서 관디[冠帶]를 갖추고 대내(大內)에 들어가 숙배(肅拜)하다.

동문(東門)을 나서다.

배를 타고 남강(南江)을 지나다.

도중에 홀로 읊다.

집에 이르다.

내일이면 멀리 떠나야 하기에 개연(慨然)한 마음으로 짓다.

송경(松京)으로 가는 도중에

삼각산을 지나다.

성중(省中)에 입직(入直)하여 빗소리를 듣고 차운하다.

강릉(江陵)을 존무(存撫)하러 가는 황 상시(黃常侍)를 송별하다.

성중(省中)에서

스스로 읊다.

이해 봄에 밀직 재상(密直宰相) 윤지표(尹之彪)가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나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서 함께 경도(京都)로 가는 길에 금교(金郊)의 도중에서 읊다.

절령(岊嶺)

서경(西京)

도중에

안주(安州)의 강()에서

의주(義州)

파사부(婆娑府)

산역(山驛)

학야음(鶴野吟)

요야(遼野)

산북(山北)

백산(柏山)

사하(沙河)

계문(薊門)

통주(通州)

동악묘(東嶽廟)

도중(途中)

경사(京師)에 이르다.

고향을 생각하다.

촉규가(蜀葵歌)

단오(端午)

비를 대하여 회포를 쓰다.

우연히 쓰다.

폭우행(暴雨行)

부질없이 쓰다.

새벽에 일어나다.

우연히 쓰다.

여름날

호마음(胡馬吟). 길들이지 않은 말을 새로 사고 나서 짓다.

조산 선사(曹山禪師)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새벽에 앉아

교문(橋門)에 노닐면서 제공(諸公)을 방문하다.

낮잠을 자다.

호로도(葫蘆島)에서 차운하다.

스님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다.

황도(皇都)의 여름날에

새벽에 비가 오다.

해자(海子)의 곁을 걸어가다.

강하(江河)

즉사(卽事)

여름날에 성남(城南)의 영녕사(永寧寺)에서 노닐다.

수안 방장(壽安方丈)에 연무설(演無說), 섭백경(聶伯敬)이 한자리에 있었다.

흥취를 풀다.

예장(豫章)의 덕 상인(德上人)이 오대산(五臺山)에 유람하면서 얻은 시권(詩卷)에 제하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동평(東平)에 가서 객호(客戶)들을 구제하고 인하여 봉황산(鳳凰山)에 들른 응봉(應奉) 부자통(傅子通)을 송별하다.

봉산 십이영(鳳山十二詠). 자통(子通)이 떠나려면서 짓기를 요구했다.

6 15일에 향리(鄕里)에서 주연(酒宴)을 베풀고 즐기던 일을 생각하다.

일을 기록하다.

입추(立秋)

소년(少年)

일을 기록하다.

새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회포를 서술하다.

고의(古意) 두 수를 정 편수(程編修)와 함께 짓다.

산수도가(山水圖歌)

천하가(天河歌)

차운하여 영녕사(永寧寺)에 제하다.

차운하여 보은사(報恩寺)에 제하다.

사명을 받들고 왔다가 돌아가는 서대어사(西臺御史) 개사증(蓋師曾)을 받들어 보내다.

빈 상인(上人)이 소장한 신룡도(神龍圖)에 제하다. 동년(同年) 증 조교(曾助敎)와 함께 짓다.

동년(同年) 왕경초(王景初)의 시운(詩韻)에 차()하고 겸하여 증자백(曾子白), 조치안(趙致安) 두 동년에게 부치다.

제공(諸公)이 호() 자 운으로 화답하므로, 다시 몇 수를 지어 답하다.

다시 두 수를 지어서 흥취를 풀다.

선화전 봉연도(宣和殿蜂燕圖)에 제하다. 자백(子白)과 함께 짓다.

차운하여 담봉(曇峯)에게 주다.

법원사(法源寺)에서 노닐다.

월식(月蝕)

밤에 앉아서

느낌이 있어

흥취를 풀다.

상도(上都)에서 오는 정제(丁祭)의 어향(御香)을 맞이하다.

추정(秋丁)에 문묘(文廟)의 제사에 참여하다.

군자(君子)

원주(袁州) 의춘군(宜春郡) 반룡사(蟠龍寺)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한송(寒松)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스스로 읊다.

중서성(中書省)의 명을 받들어 도중(途中)에서 어가(御駕)를 영접하다.

어가 앞에 과일 쟁반을 받들어 올리다.

돌아오다 전사(田舍)에 이르러 밤에 묵다.

도성(都城)에 들어오다.

절구(絶句)

섬서성 참정(陝西省參政) 술률공(述律公)의 시권(詩卷)에 받들어 제하다. 공의 이름은 걸()이고 자는 존도(存道)인데, 앞서 운남 원수(雲南元帥)가 되었을 때에 반역자(叛逆者)인 차리(車里)가 스스로 항복했었다. 금년에 나이 70세로 동관(潼關)을 지키고 있으며, 공의 조()는 국초(國初)에 공()이 있었다.

어버이를 뵈러 여릉(廬陵)으로 가는 이문회(李文會)를 송별하다.

석별가(惜別歌)

동국으로 돌아가는 서 상서(徐尙書)를 송별하다.

원중(院中)의 수령관(首領官)은 모두 공차(公差)이고, 나는 경력(經歷) 사무를 권행(權行)하고 있는데, 부름을 받고 성()에 들어가니, 이때 황제는 서내(西內)에 계시고 성관(省官)들은 서랑(西廊)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군(先君)의 동년(同年)인 성 참정(成參政)이 나를 바라보고 왜 왔느냐고 물으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지금 권 한림 수령관(權翰林首領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이는 반드시 고려 왕(高麗王)의 공신호(功臣號)에 관한 일일 것이다. 하고, 또 우리 국왕(國王)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그가 지금의 왕이냐고 물으므로,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공이 이르기를, 살아서 이것을 얻기는 매우 드문 일이다. 하였다. 나는 물러 나와 구양 승지(歐陽承旨)에게 품()하여 친인보의 선충봉국 창혜정원(親仁輔義宣忠奉國彰惠靖遠)이란 열두 자를 찬정(撰定)해서 올리는 바이다.

목은시고(牧隱詩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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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 정월에 제화문(齊化門)을 나와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그다음 날에 여행 중의 일을 기록하다.

계문(薊門)의 도중에서

도중에 스스로 읊다.

고죽음(孤竹吟). 노룡현(盧龍縣)에서 짓다.

유관(楡關)에서 잠깐 쉬는데, 한송 선사(寒松禪師)가 술을 사 왔다.

천민진(遷民鎭)에서

행점(杏店)의 도중에 눈보라가 치다.

큰 바람 속에 횡천채(橫川寨)에 들러 단가(丹家)에서 묵었는데, 여기에는 본국(本國)의 횡천현(橫川縣) 사람이 살고 있었다.

십삼산(十三山)

해주(海州)

구거음(驅車吟)

정자하(亭子河)에 들러 백리(白里)에서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 스님의 힐책을 받았다.

용주산(龍州山)을 바라보다.

왕경(王京)

집에 돌아오다.

흥취를 풀다.

선산에 성묘(省墓)하다.

송경(松京)에 돌아오다.

흥취를 풀다.

조서(詔書)를 읽고

병가(病暇) 중에 스스로 읊다.

이부(吏部)에 숙직하면서 짓다.

적후행(赤猴行)

동년(同年) 사공실(司空實)의 운에 차하여, 사명을 받들고 가야산(伽耶山)으로 가는 권 사관(權史官)을 보내다.

진주(晉州) 이 판관(李判官)을 보내고 겸하여 동년(同年) 전 기실(全記室)에게 부치다.

남 대번 사윤(南大藩司尹)의 국시권(菊詩卷) 끝에 제하다.

차운하여, 휴가를 내서 어버이를 뵈러 가는 원외랑 정우(鄭寓)를 보내다.

선부(選部)에 출사하여 스스로 읊다.

해조음(解嘲吟)

스스로 탄식하다.

연도(燕都)를 회상하며

전선(銓選)의 자리에서 홀로 읊다.

강촌(江村)을 회상하며

이부(吏部)에서 우연히 짓다.

새로 좨주(祭酒)에 임명되어 문묘(文廟)를 참알하다.

집을 빌리다.

휴가를 내어 한산(韓山)으로 어버이를 뵈러 가는 도중에 느낌이 있어 읊다.

낙제(落第)한 강호문(康好文)과 함께 가다.

집에 당도하다.

교외(郊外)에 나가다.

도중에

여름날에 제공(諸公)과 함께 금종사(金鍾寺)에서 노닐다.

찬목암(鑽木菴)의 시운(詩韻)에 차하다.

전중(殿中)에 입배(入拜)한 철원 부사(鐵原府使) 정공(鄭公)을 하례한 교주(交州) 김 안부(金按部)의 시운(詩韻)에 차하다.

실직(失職)하여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러 돌아가는 정 원외랑(鄭員外郞)을 보내다.

처음으로 간의(諫議)에 제수되어 입직(入直)하다.

대간(大諫) 손정(巽亭)에게 바치다.

달을 마주하여 흥취를 풀다.

손정(巽亭)의 시운(詩韻)에 차하다.

앞의 운을 차하여 흥취를 풀다.

정혜사(定慧寺)의 호대 선사(瑚大禪師)를 보내면서 암() 자를 얻다.

안렴사(按廉使)로 성()에 들어가는 안 소감(安少監)을 보내면서 전 기거(田起居)의 운에 차하다.

중추운(中秋韻)을 사용하여 구일(九日)의 모임에 제공(諸公)을 초청하다.

9 16일에 입직(入直)하여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하다. 이날 밤에 왜적(倭賊)이 흥천사(興天寺)에 침범하였다.

동년(同年) 이 주서(李注書)와 더불어 밤에 술을 마시면서 차운하다.

윤월(閏月)에 윤중구(閏重九)의 모임을 만나다.

비 온 뒤에 붉게 물든 단풍 숲이 사랑스러워 차운하여 시를 짓다.

임 중서(林中書)의 청계배성시(淸溪拜星詩)를 읽고 그 운에 차하다.

삭방 병마사(朔方兵馬使)의 막부(幕府)로 가는 양 판관(梁判官)을 보내면서 차운하다.

그믐날에 빗소리를 듣다.

휴가를 받은 지 한 달 만에 입직(入直)하여 손정(巽亭)이 은퇴하기를 청했다는 말을 듣고 차운하여 짓다.

자신을 책망하다.

진주(晉州) 지방 행락(行樂)의 아름다움을 얘기한 정 정언(鄭正言)의 말을 듣고 인하여 환유(宦游)하고픈 흥취를 일으키다.

다시 안() 자 운에 차하다.

다시 안() 자 운을 차하여 율시(律詩) 한 편을 짓다.

(), () 두 선생의 시를 읽고 그 운에 차하다.

우연히 읊다.

즉사(卽事)

느낌이 있어 읊다.

즉사(卽事)

[]을 읊다.

연말의 선사[餽歲]에 대하여 읊다.

스스로 읊다.

즉사(卽事)

취하여 짓다.

새봄에 흥취를 풀다.

왜적(倭賊)이 한주(韓州)를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휴가를 청하여 어머니를 뵈러 가는 도중에 세 수를 짓다.

삼각산(三角山)을 바라보며

도중에 읊다.

밤에는 평택(平澤)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하다.

도중에

유구(幽丘)의 북령(北嶺)에 당도하여 태부인(太夫人)을 만나서 되돌아오다가 온수현(溫水縣)에 이르러 묵다.

송산(松山)을 바라보며

도성에 들어가다.

부상음(扶桑吟)

육언(六言)으로 스스로 읊다.

즉사(卽事)

달을 읊다.

직려(直廬)의 즉사(卽事)

혹독한 더위를 만나서 부채에 쓰다.

여름날의 즉사(卽事)

가의전(賈誼傳)을 읽고

박 중서(朴中書)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삭방(朔方)의 만호부(萬戶府)에 부임하는 정 지사(鄭知事)를 보내며

동북면(東北面)으로 가는 한 만호(韓萬戶)를 보내면서 월() 자를 얻다.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로 나가는 남손정(南巽亭)을 보내면서 차운하다.

달을 대하여 느낀 것을 읊어서 청풍(淸風) 정 사간(鄭司諫) 에게 부치다.

남원(南原) 이 사간(李司諫) 에게 부치다.

면주(沔州) 곽 원외랑(郭員外郞) 에게 부치다.

꿈에 동경(東京)의 전 판관(田判官)을 보았는데, 새벽에 귀성(歸省)을 하겠다는 부리(府吏)가 있으므로, 인하여 이 시를 부치다.

남전 선사(南田禪師) 를 보내며

밀성(密城) 이 정언(李正言) 에게 부치다.

복주 판관(福州判官) 정 정언(鄭正言) 에게 부치다.

순흥 부사(順興府使) 최 시어(崔侍御) 에게 부치다.

안 상시(安常侍) 에게 부치다.

동경(東京) 전 판관(田判官) 에게 부치다.

양주요(梁州謠). 양주(梁州) 임 사군(任使君)에게 부치다.

백부(伯父)께 부쳐 올리다.

엄광사(嚴光寺)의 원 선사(圓禪師)에게 부치다.

마니산 기행(摩尼山紀行)

청량산(淸涼山)으로 돌아가는 관 선사(觀禪師)를 보내다.

연화 선사(蓮花禪師) 에게 부치다.

수 상인(脩上人)에게 부치다.

청풍(淸風)의 정 사간(鄭司諫)에게 부치다.

목은시고(牧隱詩藁) 5

()

이른 봄에 백부(伯父)께 부쳐 올리다.

여름날의 즉사(卽事)

우중(雨中)

비를 바라다.

익재(益齋) 선생의 시운(詩韻) 아홉 수를 받들어 화답하다.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 판추(判樞) 이존비(李尊庇)가 함께 정동(征東)의 일로 경상도(慶尙道)에 나갔다가, 의춘(宜春)의 전사(田舍)로 동년(同年)인 박 수재(朴秀才)를 함께 방문하여 각각 시 한 편씩을 남겼다.

남양(南陽) 홍규(洪奎)가 묘련사(妙蓮寺)의 무외국사(無畏國師)가 젓대를 잘 분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젓대를 들고 방장(方丈)에 들어가 청하니, 국사가 그를 위해 두어 곡조를 불었다.

추상(樞相) 송화(宋和)가 흥왕사(興王寺)에 들러 화엄(華嚴)의 구 승통(具僧統)을 만났는데, 구 승통이 송 추상의 지팡이 놀리는 것을 보고 싶어 하자, 송 추상이 그를 위해 복건(幅巾) 차림으로 말을 달리면서 한참 동안 지팡이 놀이를 하였다.

보개산(寶蓋山) 지장사(地藏寺)에서

김 이상(金二相)의 청암장(靑巖莊)에 들러

눈이 온 뒤에 임연(林椽)에게 부치다.

후유선가(後儒仙歌). 차운하여 졸옹(拙翁)을 노래하다.

좌주(座主) 양파(陽坡) 선생이 북산(北山)으로 가는 도중(途中)에 지은 시를 받들어 화답하다.

주 진사(朱進士) 를 생각하며

임연(林椽)이 준 시운에 차하여 짓다.

김 동년(金同年)이 전후로 부친 시운에 차하다.

계림(鷄林) 전 판관(田判官)에게 부치다.

엄광사(嚴光寺)의 원대 선사(圓大禪師)에게 부치다.

달을 기다리다.

가랑비

애재행(哀哉行). 전야은(田野隱)의 아버지 사인(舍人)을 위하여 짓다.

도원흥(都元興)을 천거하다.

직려(直廬)에서 이 장군(李將軍) 집에서 빈객에게 연회를 베푼다는 말을 듣다.

대나무가 말라 죽은 데 대하여 탄식하다.

추흥(秋興)

활 쏘는 것을 구경하다.

국서(菊墅)에게 받들어 올리다.

서원백(西原伯) 정공(鄭公)에 대한 만사(挽詞)

팔관(八關)

환궁악(還宮樂)

()이 파사부(婆娑府)에 있다는 소식을 듣다.

적이 송산(松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다.

김 추부(金樞副)가 해()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다.

우제() 장군이 와서 철주(鐵州)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청강(淸江)

홀로 읊다.

소리 높여 노래하다.

즉사(卽事)

방가(放歌)

()이 서경(西京)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다.

적이 서경에 주둔했다는 소식을 듣다.

몹시 슬퍼하다.

근심을 풀다.

몹시 걱정이 되어 또 짓다.

방 가승(方家丞)이 관군(官軍)이 서경(西京)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치보(馳報)해 왔으므로, 기뻐서 이렇게 기록하다.

걱정을 풀다.

관군(官軍)이 장차 함종(咸從)으로 달려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다.

함종의 싸움이 불리하다는 소식을 듣다.

정신계(丁臣桂)의 군대만 퇴각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다.

()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느낌이 있어 읊다.

장가(長歌)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로 나가는 안 시랑(安侍郞)을 보내며

상사(上巳)

또 짓다.

엄광사(嚴光寺)의 원공(圓公)에게 부치다.

밀성(密城)의 이 동년(李同年)에게 부치다.

산수도(山水圖)에 제()하다.

우연히 쓰다.

동년(同年) 사공백단(司空伯亶)이 이영철(李永哲)을 보내면서 지은 시를 읽고 따라서 차운하여 이생(李生)을 면려하다.

이생(李生)이 백단(伯亶)의 시를 외는 것을 듣고 흔연히 차운하여 짓다.

백단이 이생을 면려한 시운을 사용하여 스스로 책망하다.

국화를 심다.

나의 친구 이자용(李子庸)이 자기가 쓴 화엄신략(華嚴神略)을 나에게 보내 주고 또 송지(誦持)하기를 권했으므로, 시를 지어 희롱하다.

단오일(端午日)에 옛 편지를 펼쳐 보다가 최 원외랑(崔員外郞)의 조그마한 간찰(柬札)을 보고 느낌이 있어 짓다.

유거(幽居)

송림(松林)에 노닐면서

전장(田莊)

도중(途中)

원중(園中)의 소나무를 읊은 권 낭중(權郞中) 의 시에 차운하다.

염 낭중(廉郞中) 의 시권(詩卷)에 차운하다.

정 청풍(鄭淸風)과 함께 짓다.

개구리가 밤에 울다. 정 청풍의 운에 차하다.

흥취를 풀다.

옛일을 회상하다.

절구(絶句)

하야음(夏夜吟). 정 청풍(鄭淸風)의 운에 차하다.

하우행(夏雨行). 청풍(淸風)과 함께 짓다.

우중(雨中)에 정 청풍과 함께 회포를 서술하다.

정 청풍과 함께 짓다.

김월당(金月塘)이 부친 시운에 차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자은사(慈恩寺)에서 옥룡서(玉龍書)를 읽고 느낌이 있어 읊다.

김월당이 입추(立秋)에 부친 시운에 차하다.

백악산(白嶽山)에 호종(扈從)하여 짓다.

점을 쳐서 낙읍(洛邑)에 도읍을 정하다.

옛일을 회상하다.

창화(昌華)로 이어(移御)할 때에 호종하여 짓다.

살생(殺生)을 금하라는 내지(內旨)를 읽고

도중에 천마산(天磨山) 등 여러 산을 바라보다.

터 잡아 집 지은 것을 읊어서 이 낭중(李郞中) 에게 바치다.

무제(無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신거(新居)

절구(絶句)

산을 따라서

잡초를 헤치다.

고요함을 좋아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신궁(新宮)

신거(新居)

동당시(東堂試)의 방방(放榜)에 대하여 읊다.

직려(直廬)

직려에서 장가(長歌)를 읊다.

자매()

백악(白嶽)

타위(打圍)를 기록하다.

일을 기록하다.

목은시고(牧隱詩藁) 6

()

새벽에 일어나서 읊다.

전다 즉사(煎茶卽事)

스님을 곡하다.

달밤에 찾아온 한 정당(韓政堂), 정 첨서(鄭簽書), 한 첨서(韓簽書)에게 받들어 사례하다.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하여 스스로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가련재(可憐哉)

스스로 읊다.

거문고 소리를 듣고 느낌이 있어 읊다.

뱃노래를 돕다.

잡영(雜詠)

느낌이 있어 읊다.

미혹됨을 분변하다.

영주(榮州)에 부임하는 신중현(申中顯)을 보내다.

나이 오십에 스스로 읊다.

집을 자주 옮기는 데 대하여 스스로 읊다.

즉사(卽事)

시로써 매화(梅花)를 빌리다.

하일(夏日)에 부질없이 쓰다.

추일(秋日)의 즉사(卽事)

예전에 놀았던 일을 추억하다.

소년장(少年場)

가정(稼亭)이 소장한 당시(唐詩) 가운데 《위소주집(韋蘇州集)》이 있어 내가 아이 적에 이것을 애독(愛讀)했었는데, 뒤에 어떤 사람이 이 책을 빌려 가서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연경(燕京)에 있을 때 현윤(縣尹) 오종도(吳宗道)에게서 또 《위소주집》 한 본()을 얻어서 우리나라에 돌아왔는데, 또 이 책을 남이 빌려 가서 지금은 누구한테 있는지 모르겠다. 한 수를 읊다.

우연히 쓰다.

내원당 감주(內願堂監主) 판조계종사(判曹溪宗事) 영공(英公)의 호는 고저(古樗)이고, 거처하는 곳은 송월헌(松月軒)인데, 나에게는 동갑내기 친구이다. 써주기를 청하므로 이 시를 짓다.

() 양가 선사(兩街禪師) 총공(聰公)은 호가 무문(無聞)이고, 사는 곳은 남악(南嶽)인데, 현릉(玄陵)께서 그에게 남악무문(南嶽無聞)을 친히 써서 내렸다. 나에게 그 찬()을 써달라고 요구하기에 삼가 절구(絶句) 3(三首)를 쓰다.

대화산(大華山)으로 돌아가는 죽곡 승통(竹谷僧統)을 보내다.

중추(中秋)

추일(秋日)의 즉사(卽事)

중구(重九)

새벽에 읊다.

산중(山中)의 절을 생각하며 읊다.

우인(友人)을 대신하여, 사명을 받들고 일본(日本)에 가는 사신을 보내다.

만봉(萬峯). 유일 상인(惟一上人)을 위하여 쓰다. 유일 상인은 일본인(日本人)인데, 이때 그 나라의 사명을 받들고 왔다.

이암(羸菴). 승 상인(勝上人)을 위하여 쓰다.

주 상인(珠上人)을 위하여 경철권(冏徹卷)에 쓰다.

섬 상인(暹上人)을 위하여 등등권(騰騰卷)에 쓰다.

우사(玗師)를 위하여 경암권(璥菴卷)에 쓰다.

찬부가(爨婦歌)

역암가(易菴歌)

박 밀직(朴密直)의 부인에 대한 만사(挽詞)

판서 전경선(全敬先)에 대한 만사

안 정당(安政堂)의 운을 차하여 산으로 돌아가는 안 밀직(安密直)을 받들어 보내다.

느낌이 있어 읊다.

서해(西海) 안렴(按廉) 최자(崔資)를 보내다.

상천암(霜泉菴)에 제하다.

김사정(金思亭)의 부인 이씨(李氏)에 대한 만사

암혈에 은거하다.

사방을 유람하다.

팔선궁(八仙宮)을 참배하다.

옛일을 기억하여 짓다.

즉사(卽事)

정사년 10 20일 석양에 강자야(康子野)가 찾아왔는데, 그를 만류하여 함께 자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날 밤에 비바람이 크게 몰아치므로 등불을 켜 놓고 이것을 쓰는 바이니, 의당 그의 동년(同年) 박자허(朴子虛)ㆍ이자안(李子安)과 함께 지으리라.

보제(普濟)의 영정(影幀)을 마주하여 읊다.

()을 나와서 서로 교지(敎旨)에 응하여 찬진(撰進)하다.

()나라의 교제(郊祭)를 생각하다.

학문이 도저(到底)하지 못함을 상심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서 반성하여 시 두 수를 읊어 스스로 힘쓰다.

연도(燕都)를 생각하다.

즉사(卽事)

하표(賀表)를 올리러 가는 부친을 수행하는 왕강(王康)을 보내다.

기심(機心)을 없애다.

동년가(同年歌)

시원(試院)에서의 일을 추억하여 기록하다.

한림원(翰林院)에 취임한 일을 추억하여 기록하다.

신년(新年) 하례차 표문(表文)을 올리러 가는 이몽달(李蒙達)을 보내다.

일이 있어 은영연(恩榮宴)에 나가지 못한 일을 추억하여 기록하다.

즉사(卽事)

즉사(卽事)

역사를 읊다.

정사년 겨울에 읊다.

옛일을 기억하여 짓다.

제 환공(齊桓公)

관중(管仲)

스스로 읊다.

잡시(雜詩)

금주(衿州)의 산 아래를 지나며

즉사(卽事)

즉사(卽事)

잡영(雜詠)

예전의 놀이를 노래하다.

단가행(短歌行)

주 동년(朱同年)을 생각하여 읊다.

남창(南窓)

매화(梅花)

우연히 쓰다.

청산백운가(靑山白雲歌)

앞의 운을 사용하여 읊다.

차를 마시고 나서 작게 읊다.

스스로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교동(喬桐)

모란산(牧丹山)

모란산으로부터 송도(松都)로 돌아가는 도중에 짓다.

광가행(狂歌行)

홀로 읊다.

견주(見州) 도중에 읊다.

청룡산(靑龍山)

취중의 노래

홀로 읊다.

한거(閑居)

새벽에 일어나서 읊다.

우연히 써서 자조하다.

최 대간(崔大諫)이 술을 가지고 찾아오다.

최 대간이 가고 난 뒤에 취흥이 도도하여 또 읊다.

흥취를 풀다.

연경(燕京) 도중(途中)의 일을 기록하다.

유거(幽居)

손을 보내고 나서 일을 기록하다.

들은 일을 기록하다.

봉익(奉翊) 이동수(李東秀)를 생각하다.

고풍(古風)

즉사(卽事)

매화(梅花)를 읊다.

12 16일 경신일에 여아(女兒)가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느낌이 있어 한 수를 읊다.

인희(仁熙) 등 여러 상국(相國)을 받들어 생각하다.

목은시고(牧隱詩藁) 7

()

무오년 정단(正旦) 이틀 뒤에 짓다.

우연히 쓰다.

[]를 읊다.

이 좌사(李左使)를 곡()하다.

한사(漢史)를 읽고 읊다.

우연히 쓰다.

이호연(李浩然)에게 주다.

흥취를 풀다.

잊은 것을 기록하다.

흥취를 풀다.

금경사(金經寺)의 일을 추억하다가 느낌이 있어 읊다.

한적한 삶을 스스로 읊다.

익재(益齋) 선생의 송도 팔영(松都八詠)을 읽다.

새벽에 일어나서 읊다.

새봄

느낌이 있어 읊다.

밤에 읊다.

고의(古意)

글을 읽다.

회포를 풀다.

인일(人日)

스스로 짓다.

아침에 읊다.

흥취를 풀다.

술을 가지고 찾아 준 한평재(韓平齋)에게 사례하다.

즉사(卽事)

느낌이 있어 읊다.

스스로 짓다.

정찬성전(鄭贊成傳) 후미에 쓰다.

정월 12일에 비가 내리자, 갑자기 외를 심고픈 그윽한 흥취 동해라. 작은 남새밭이 강성에 있다오.[種瓜幽興動 小圃在江城]라는 시구가 기억난다. 이 시는 내가 성중(省中)에 입직(入直)했을 때 지은 것인데, 그 후로 지금 24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껏 그 소회(素懷)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감탄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시 한 편을 읊조려서 애오라지 스스로 위로하는 바이다.

()를 읽으면서 흥취를 풀다.

흥취를 풀다.

자안(子安)을 생각하다.

정 첨서(鄭簽書)가 술을 가지고 찾아오다.

새벽에 일어나서 읊다.

즉사(卽事)

고향을 생각하다.

묘련사(妙蓮寺)의 조순암(趙順菴) 법사(法師)가 발견한 석지조(石池竈)에 대하여, 익재(益齋) 선생이 쓴 기문(記文)의 후미에 제()하다.

정당기(政堂記)의 후미에 쓰다.

은문(恩門) 익재(益齋) 선생을 받들어 생각하다.

앞의 운을 사용하여 스스로 읊다.

반궁(泮宮)에서 춘정(春丁)의 번육(膰肉)을 보내오다.

유거(幽居)의 즉사(卽事)

즉사(卽事)

옛날 승사(僧舍)에서 놀던 일을 기억하다.

스스로 읊다.

즉사(卽事)

느낌이 있어 읊다.

춘일(春日)의 즉사(卽事)

봄날에 산승(山僧)을 생각하다.

홀로 서다.

즉사(卽事)

느낌이 있어 읊다.

취중(醉中)에 스스로 읊다.

단가행(短歌行)

즉사(卽事)

병중(病中)

춘일(春日)

경로시(敬老詩)

스스로 읊다.

감로사(甘露寺)를 생각하다.

스스로 읊다.

《서경(書經)》을 읽다.

《시경(詩經)》을 읽다.

《주역(周易)》을 읽다.

《춘추(春秋)》를 읽다.

《예기(禮記)》를 읽다.

독야(獨夜)

병중(病中)에 읊다.

노마행(老馬行)

잡영(雜詠)

동산(東山)에서 길 가는 사람을 바라보다.

고향 산천을 생각하다.

즉사(卽事)

금중(禁中)에 입직(入直)했던 일을 추억하여 기록하다.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을 스스로 읊다.

설고()를 읊다.

옛일을 기술하다.

일에 느낌이 있어 읊다.

즉사(卽事)

정월 23일에 강릉 염사(江陵廉使) 홍 소윤(洪少尹)이 인삼을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동산(東山)에 오르다.

교동(喬桐)에서의 놀이를 기록하다.

즉사(卽事)

즉사(卽事)

우서(虞書)를 읽다.

흥취를 풀다.

절구(絶句)

스스로 읊다.

영사(詠史). 느낌이 있어 읊다.

스스로 읊다.

요동(遼東) 들을 지나던 일을 생각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즉사(卽事)

술을 대하여 거문고 소리를 듣다.

신축년 겨울 단산(丹山) 가는 길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다.

스스로 난도(亂道)를 읽고 느낌이 있어 읊다.

밤에 읊다.

남을 대신하여 써서 나주(羅州) 오 판관(吳判官)에게 부치다.

정월 하순에 남쪽에서 온 서신을 얻어 보고 인하여 제공(諸公)을 생각하다.

남을 대신하여 써서 이 동년(李同年) 에게 사례하다.

즉사(卽事)

병중(病中)에 읊다.

우연히 쓰다.

최 사공(崔司空)에게 받들어 사례하다.

들은 일을 기록하다.

달을 읊다.

지공(指空)의 제자(弟子)가 찾아오다.

햅쌀을 보내 준 희안(希顔)에게 사례하다.

스스로 짓다.

즉사(卽事)

즉사(卽事)

인일음(引逸吟)

병든 치아를 읊다.

군자(君子)가 본래의 뜻을 지키다.

스스로 읊다.

고풍(古風)

즉사(卽事)

이소(離騷)를 읽고 스스로 읊다.

매화를 읊다.

목은시고(牧隱詩藁) 8

()

이 정당(李政堂)에게 부치다.

나 판사(羅判事)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매화(梅花)

느낌이 있어 읊다.

흥취를 풀다.

즉사(卽事)

자하동(紫霞洞)을 생각하다.

옛일에 느낌이 있어 읊다.

취중(醉中)에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매화(梅花)를 생각하다.

명선(明善) 선생을 받들어 생각하다.

스스로 읊다.

장난삼아 정 첨서(鄭簽書) 연형(年兄)에게 주면서 지난번의 운을 사용하다.

스스로 읊다.

잡흥(雜興)

이른 봄에 예전의 놀이를 생각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일을 기록하다.

이른 봄

궁중(宮中)에서 사식(賜食)한 일을 기억하다.

2월 초하루에 읊다.

두 안 첨록(安簽錄)이 이름을 청하다.

김 사공(金司空)에게 부쳐서 띠를 빌려 지붕을 이다.

박 총랑(朴摠郞)을 생각하다.

우연히 최근의 일을 기억하다.

스스로 희롱하다.

연도(燕都)를 생각하다.

스스로 읊다.

옛일을 서술하다.

회포를 서술하다.

송산(松山)

즉사(卽事)

즉사(卽事)

산중(山中)을 생각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2 8일에 읊다.

궁인(宮人)

《번천집(樊川集)》을 읽고 그 후미에 제하다.

경상도(慶尙道)를 안찰(按察)하러 나가는 부령(副令) 강득화(康得和)를 보내다.

스스로 읊다.

낭랑하게 읊다.

즉사(卽事)

스스로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성거산(聖居山)

판서 신덕린(申德麟)을 생각하다.

즉사(卽事)

거문고 소리 들은 일이 갑자기 기억나서 여기에 쓰다.

유거(幽居)에 대하여 절구(絶句)를 읊다.

즉사(卽事)

()에 대하여 읊다.

고의(古意)

우연히 쓰다.

그네

격구(擊毬)를 구경하다.

왕연수(王延壽)의 말 그림에 대하여 읊다.

동산(東山)

산수도(山水圖)에 제하다.

청행전(靑行纏)에 대하여 노래하다.

7 20일에 해산(解産)하기가 어려워 고생하는 여비(女婢)가 있어 기록하다.

즉사(卽事)

한 첨서(韓簽書)가 광암사(光巖寺)의 비문(碑文)을 썼는데, 나는 가서 구경하지 못하고, 애오라지 생각한 바를 서술하는 바이다.

즉사(卽事)

죽계권(竹溪卷)에 제하다.

7 8일에 조칙(詔勅)을 들으러 정동성(征東省)에 갔을 때 명선 학사(明善學士)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21일에 왕 태의(王太醫)가 와서 얘기하던 가운데 명선이 죽은 지가 이미 10여 일이 되었다고 하므로, 깜짝 놀라 외치고 나서 노래를 지어 곡()하는 바이다.

잃을 것이 없다. 지 상인(持上人)을 위하여 제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21일에 박사(朴舍)가 들르다.

우중(雨中)

백이(伯夷)의 낙()

즉사(卽事)

무마행(無馬行)

금강산(金剛山)

김 좌윤(金左尹)에게 받들어 부치다.

이 동년(李同年) 에게 부치다.

27일에 읊다.

28일에 읊다.

청태가(靑苔歌)

7 29일은 바로 익재(益齋) 선생의 명기(明忌)인데, 나는 병으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옛일에 감격하여 회포를 서술하다.

성친(省親)하러 가는 김백옥(金伯玉)을 보내다.

느낌이 있어 읊다.

일본(日本)의 중[] 유천우(有天祐)를 보내다.

8 1일에 비가 오다.

느낌이 있어 읊다.

비가 지나간 후에

예전에 지은 시를 읽고 읊다.

이 대경(李大卿)이 승선(承宣)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붓을 달려서 받들어 하례하다.

즉사(卽事)

이 밀직(李密直)을 받들어 하례하다.

역사(歷史)를 읽고 읊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읽다.

우연히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새벽에 일어나서 읊다.

강남(江南)의 사신(使臣)이 국경(國境)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다.

산고가(山高歌)

보국가(保國歌)

즉사(卽事)

8일에 정제(丁祭)의 번육(膰肉)이 왔으므로, 시를 지어서 일을 기록하다.

청천백운가(靑天白雲歌)

한 첨서(韓簽書)의 네 아들에 대한 명()과 자()의 설()을 짓고 읊다.

중추(仲秋) 9일에 장손(長孫) 맹유()를 성남(城南)으로 보내어 글을 읽게 하다.

명일(明日)에 생각하는 바가 있어 읊다.

작은 복숭아를 읊다.

광암사(光巖寺)

두시(杜詩)를 읽다.

우연히 읊다.

권 정당(權政堂)이 광암사비(光巖寺碑)를 전서(篆書)하여, 한 첨서(韓簽書)가 함께 가서 구경하자고 나에게 요청하였으나, 나는 마침 병이 나서 가지 못하고 홀로 앉아서 다시 지난번의 운을 사용하여 짓다.

고헌과(高軒過)를 읽다.

느낌이 있어 읊다.

두시(杜詩)를 읽다.

옥설권(玉屑卷)의 말미를 읽고 읊다.

대서(代書)하여 송광(松廣)의 화상(和尙)에게 받들어 올리다.

추우탄(秋雨歎)

추우탄편(秋雨歎篇)을 짓고 나니 하늘이 말끔하게 개어서 정신이 매우 상쾌하므로, 또 추양가(秋陽歌)를 짓다.

15일 이른 아침에 읊다.

밤에 한 첨서(韓簽書) 댁에 가서 간단한 주연(酒宴)을 베푼 자리에서 읊다.

목은시고(牧隱詩藁) 9

()

즉사(卽事)

윤절간(倫絶磵)의 운()에 차()하다.

즉사(卽事)

직강(直講) 집에서 소녀(小女)를 시켜 파[]를 보내오다.

염동정(廉東亭)이 고기[]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희우(喜雨)

산중(山中)을 생각하다.

즉사(卽事)

흥취를 풀다.

혹심한 더위 속에 윤절간(倫絶磵)이 찾아오다.

고향을 생각하다.

나비를 읊다.

벌을 읊다.

꾀꼬리를 읊다.

제비를 읊다.

고향 산천을 생각하다.

내가 하루는 우연히 유예(游藝)의 훈계가 생각나서, 내가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 매우 얕은 까닭은, 대체로 사물을 지나치게 완상하다가 본심을 잃게 될까 하는 점을 두려워함으로써 이렇게 된 것이라고 스스로 책망하였다. 대체로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대한 법칙이 있는 것이니, 어찌 어느 한 가지 사물인들 내 성() 안의 쓰임이 되지 않을 것이 있겠는가. 사물 중에 미세하기로는 자벌레보다 더 미세한 것이 없기에 자벌레를 소재로 삼아 단가(短歌)를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는 바이다.

내가 이미 척확음()을 짓고 또 생각해 보니, 귀뚜라미[促織]란 것 또한 매우 미세한 벌레지만, 베 짜는 부인이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베 짜는 일을 힘쓰게 됨으로써 그것이 세상에 유익함이 많았다. 그래서 노래를 지어 슬퍼하는 바이다.

거문고ㆍ바둑ㆍ글씨ㆍ그림을 우리 세속에서 네 가지 기예(技藝)라 이르므로, 여기에 대하여 절구(絶句) 4수를 짓다.

일을 기록하다.

얼음을 반사(頒賜)하는 데에 회포가 있어 짓다.

흥취를 풀다.

이 판사(李判事) 를 생각하다.

즉사(卽事)

어부(漁父) 김경지(金敬之)가 생각나서 여강(驪江)에 대한 절구(絶句) 4수를 짓다.

절간(絶磵) 윤공(倫公)이 찾아왔기에 짓다.

동산(東山)에 오르다.

스스로 읊다.

칠석(七夕)

염동정(廉東亭)이 밀보리[牟來]와 현미[糙米]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조서(詔書)를 듣다.

한유항(韓柳巷)의 누상(樓上)에서 염 정당(廉政堂)과 함께 간단한 주연(酒宴)을 즐기던 차에 마침 판서(判書) 윤호(尹虎)가 왔고, 석양에 이르러서는 길창군(吉昌君)이 나와 앉아서 남주(南州)에서 노닐 때의 즐거웠던 일을 언급하였으므로, 물러 나와서 그 사실들을 기록하다.

가을비

정당공(政堂公) 권용부(權庸夫)가 부인을 위해 화장사(華藏寺)에서 재()를 올리는데, 나는 그 일을 인하여 구룡산(九龍山)에 가서 놀려고 했다가 병 때문에 가지 못하고 이것을 써서 소회를 기록하는 바이다.

염동정(廉東亭)이 햅쌀을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즉사(卽事)

정해년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한 제공(諸公)을 생각하다.

즉사(卽事)

부질없이 이루다.

7 15일에 짓다.

새벽에 일어나서 읊다.

아이종을 시켜 잡초를 매게 하다.

즉사(卽事). 이날에 조사(詔使)를 전송하다.

부상사음(扶桑絲吟)

단오일(端午日)의 일을 추후에 기록하다.

근세에 졸옹(拙翁)의 글을 고친 자가 있었는데, 그의 성씨(姓氏)는 잃어버렸다. 그것을 인하여 단묵경(段墨卿)의 회서비(淮西碑)에 관한 일을 기록하다.

계사년의 동년(同年) 제공(諸公)이 술을 갖고 찾아왔는데, 이날 저녁 무렵에 비가 내렸다.

즉사(卽事)

산수 소도(山水小圖)를 두고 짓다.

속현교행(續絃膠行)

중암(中菴) 윤 상인(允上人)이 내 집에 들르다.

스스로 읊다.

소년락(少年樂)

증지인(甑池引)

일을 기록하다.

구재(九齋)의 전() 도장교(都將校) 이정(李丁)이 송이버섯을 보내 주므로, 인하여 절구(絶句) 3수를 짓다.

앞의 운을 사용하여 스스로 읊다.

일본(日本)을 유람하고 인하여 불법(佛法)을 구하러 강남(江南)으로 가는 조계(曹溪)의 대선(大選) 자휴(自休)를 보내다.

명비곡(明妃曲)

안기행(晏起行)

일을 기록하다.

22일 밤중에 비바람이 크게 몰아치므로, 시 한 편을 읊어 이루어 놓았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이를 기록하다.

새벽에 구름이 북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이 시를 짓다.

스스로 읊다.

밤에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즉사(卽事)

중추일(中秋日)에 유항(柳巷)의 누() 아래에서 달구경했던 일을 기록하다.

즉사(卽事)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 박가흥(朴可興)을 보내다.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과 곡성(曲城) 시중(侍中)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부름을 받고 한자리에 참여하였다. 인하여 좋은 일을 기록하다.

스스로 읊다.

감회(感懷)를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안국사(安國寺)의 송정(松亭)에서 비 오는 것을 구경했던 일을 기록하다.

배를 타고 조공(朝貢)하러 금릉(金陵)에 들어갔다가 풍랑을 만나서 돌아오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이 이를 슬피 여기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는 바이다.

서쪽 이웃집의 글 읽는 소리를 듣다.

연궁사(鉛宮詞)

느낌이 있어 읊다.

유 판서(柳判書)가 이천(利川)에 있는 전사(田舍)의 아름다운 풍경을 말하면서 다만 게[]가 없을 뿐이라고 하였다.

고향 산천을 생각하다.

연아(演雅)

양정(涼亭) 밑을 지나다가 느낌이 있어 짓다.

홀로 앉아서 읊다.

술을 대하여 읊다.

송이버섯을 보내 준 이가 있어, 시를 지어서 기록하다.

사초(莎草)를 제거하다.

연아(演雅)

즉사(卽事)

삼각산(三角山)을 생각하다가 가행(歌行)을 서술하다.

즉사(卽事)

산수도(山水圖). 동파(東坡)의 연강첩장도(烟江疊嶂圖)의 시구를 뽑아서 짓다.

옛일을 기억하여 짓다.

즉사(卽事)

느낌이 있어 짓다.

28. 이날은 바로 예천군(醴泉君)의 부인 채씨(蔡氏)의 명기(明忌)이다.

즉사(卽事)

강릉(江陵) 최상(崔相)이 미역을 보내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다.

최 안동(崔安東)에게 받들어 부치다.

덧없는 인생

우연히 읊다.

()나라 어진 이의 영월장(詠月章)을 읽고 짓다.

스스로 짓다.

한가히 읊다.

기러기 소리를 듣다.

달을 마주하다.

강상(江上)

작은 비가 오다.

우연히 제하다.

광암사(光巖寺)를 바라보다.

국화를 읊다.

원중잡영(園中雜詠)

목은시고(牧隱詩藁) 10

()

소감(少監) 김경숙(金敬叔)에게 부쳐 주다.

초겨울

또 여덟 구를 지어서 비서(祕書)에게 주다.

기린을 읊다.

신륵사(神勒寺)에 놀러 가려 했다가 가지 못하고 인하여 단운(短韻)의 시를 짓다.

동오 팔영(東吳八詠)은 심휴문(沈休文)이 지은 것이다. 그리고 송복고(宋復古)가 팔경(八景)을 그림으로 그린 사실은 《동파집(東坡集)》에 실려 있다. 나는 젊어서 그 시를 읽었으나 잊고 있었는데, 지금 병을 앓은 나머지 몹시 답답증이 나서 우연히 《동파시주(東坡詩註)》를 펼쳐 보다가 인하여 동오의 흥취를 일으켜서 팔영 절구(絶句)를 짓는 바이다.

즉사(卽事)

병중에 스스로 읊다.

우 사재(禹四宰)에게 받들어 올리다.

영해(寧海)의 김 좌윤(金左尹)에게 부치다.

스스로 읊다.

목면포(木綿布)를 읊다.

느낌이 있어 스스로 읊다.

최재(崔宰) 선생의 죽음을 곡()하다.

책을 열람하는 석상(席上)에서 짓다.

새벽에 일어나서 즉사(卽事)를 읊다.

새벽에 읊다.

새벽에 읊다.

광암사(光巖寺)를 삼가 생각하다.

느낌이 있어

느낌이 있어

우연히 쓰다.

판사(判事) 부부(夫婦)가 식사를 마련하다.

일찍 일어나서 읊다.

느낌이 있어 스스로 읊다.

즉사(卽事)

밤에 이튿날 다시 모일 것을 생각하면서 1수를 읊어 이루다.

고풍(古風)

진관사(眞觀寺)로부터 맹동(孟童)이 돌아와서 밤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느낌이 있어 짓다.

치재(致齋)를 하고 홀로 앉아서 느낌이 있어 짓다.

21일에 사천감(司天監)의 관원이 와서 조 육재(曺六宰)의 말을 전하여 비서(祕書)를 속히 올리도록 재촉하였다.

스스로 읊다.

고풍(古風)

휴가(休暇)를 얻어 스스로 읊다.

첫눈이 사시(巳時) 초에 내리다.

눈이 개다.

권 상주(權尙州)가 와서 이미 1수를 짓고, 인하여 그 운을 사용하여 짓다.

사전(賜田)을 받고 느낌이 있어 짓다.

성 정당(成政堂) 을 축하하다.

스스로 읊다.

16일에 장 밀직(張密直)이 와서 명함(名銜)을 두고 갔다.

17일에 짓다.

한 상당(韓上黨)과 함께 광암사(光巖寺)에 놀러 가려고 새벽에 일어나서 짓다.

광암사의 동역관(董役官)이 유고(有故)하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후일에 가기로 언약하고 인하여 절구 2수를 이루다.

일찍 일어나다.

고의(古意)

중손(仲孫)이 좌창동(左倉洞)에 있다가 온 것을 인하여 옛 놀이를 기억하다.

장차 광암사(光巖寺)에 가려고 새벽에 일어나서 느낌이 있어 짓다.

광암사로 가는 도중에 짓다.

환암 방장(幻菴方丈)의 석등(石燈)을 읊다. 이날 밤에 이 석등 밑에서 자는데, 석등이 심장(心臟) 위에 똑바로 있었다.

두 박 영공(朴令公)이 간단한 주연(酒宴)을 베풀다.

이날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가 행군(行軍)을 떠나다.

남의 말[]을 빌려 타면서 장난삼아 짓다.

비 오는 밤에 스스로 읊다.

고의(古意)

절구(絶句)

비가 개다.

친구를 마주하여 스스로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홀로 앉아서 읊다.

전라 영공(全羅令公)이 귤()을 보내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다.

스스로 읊다.

밤에 처마 밑의 낙숫물 소리를 듣고 새벽에 일어나서 그것을 기록하다.

병중에 우연히 예전의 놀이가 생각났는데, 이제는 늙었으니 어떻게 다시 체험할 수 있겠는가. 애오라지 3편의 시를 짓노니, 대체로 세월의 무상함을 몹시 가슴 아프게 여긴 것이다.

대서(代書)하여 한 동년(韓同年)에게 받들어 부치다.

토랑()이 산 너머 별장에서 유학을 하다.

회포를 서술하다.

즉사(卽事)

어제 석양에 자안(子安)에게서 밀직(密直) 이인민(李仁敏)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 시를 짓다.

느낌이 있어 읊다.

이 밀직(李密直)이 경산부(京山府)로 돌아가다.

스스로 탄식하다.

병학음(病鶴吟)

즉사(卽事)

감회(感懷)를 읊다.

가행(歌行)

즉사(卽事)

동지(冬至)

염동정(廉東亭)이 눈 속에 술을 가지고 찾아오다.

잡제(雜題)

회포를 풀다.

아침밥을 먹다.

강상(江上)

문생(門生) 정사현(鄭士賢)이 고향에 돌아갈 것을 고하다.

우 성랑(禹省郞)이 와서 표문(表文)의 제두(提頭)에 해당한 곳에 권점(圈點) 찍어 주기를 청하다.

박 판서(朴判書)의 연석(宴席)에 참여했다가 가마에 실려 밤중에 돌아오다.

스스로 읊다.

이른 아침의 추위에

수묵산수화(水墨山水畫) 팔첩 병풍(八疊屛風)을 보내 준 우 사재(禹四宰)에게 사례하다.

천녕(川寧)을 바라보며

옛 놀이를 생각하다.

목은시고(牧隱詩藁) 12

()

둔촌(遯村) 이호연(李浩然)이 천녕현(川寧縣)에서 나에게 절구(絶句) 1수를 부쳐 주고 자기가 지은 시 10수를 겸해서 보여 주므로, 그 운에 차()하고, 또 그 운을 사용하여 스스로 읊었으니, 이는 모두 붓을 달려 신속히 쓴 것이다. 모두 22수이다.

영해(寧海) 족중(族中)의 서신을 얻다.

즉사(卽事)

즉사(卽事)

구전가(求田歌)

즉사(卽事)

예천군(醴泉君)의 명기(明忌)에 수정사(水精寺)에서 재()를 올리다.

인하여 반궁(泮宮)에 들러 알성(謁聖)하다.

금강산가(金剛山歌)

즉사(卽事)

전라 염사(全羅廉使) 송문중(宋文中)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동국(東國)의 예속(禮俗)은 춘추 전국 시대의 풍속과 가까운데, 그것을 기록하는 뜻은 더 끌어올리기 위해서이다.

느낌이 있어 읊다.

판사(判事) 유백(兪伯)이 내방(來訪)하다.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의 승통(僧統)이 오성합(五星合)을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는 뜻으로 붓을 달려 쓰다.

전라 도순문사(全羅都巡問使) 지 밀직(池密直)이 홍대하(紅大蝦)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는 뜻으로 붓을 달려 쓰다.

천둥 치며 비가 오다.

국화를 대하다.

우중(雨中)

즉사(卽事)

스스로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홍대하(紅大蝦)를 읊다.

우연히 쓰다.

식죽음(食粥吟)

스스로 읊다.

9월 그믐날에

일본(日本)의 중 홍혜(弘慧)가 시()를 요구하다.

일본의 중을 보내고 인하여 느낀 바가 있어 읊다.

즉사(卽事)

10월 초하루에

회포를 서술하다.

두문불출하다.

만세()

세화(歲畫) 십장생(十長生)을 읊다.

이미 십장생의 시를 짓고 또 스스로 1수를 읊다.

즉사(卽事)

새벽에 일어나다.

즉사(卽事)

박 총랑(朴摠郞)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즉사(卽事)

구씨(舅氏) 김 밀직 치사존시(金密直致仕尊侍)께 받들어 올리다.

일을 기록하다.

한유항(韓柳巷)을 방문하다.

우연히 쓰다.

비록(祕錄)을 어전에서 진독(進讀)하자, 사천감(司天監) 신하에게 역말을 달려가서 땅을 살펴보도록 분부를 내림으로써 명일에 출발하기로 하다.

한 첨서(韓簽書) 댁에서 간단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나와 동갑인 양천(陽川) 허완(許完)이 자리를 함께하다.

8일에

토전(土田)을 하사한 데 관하여 여럿이 기록한 공함(公緘)을 요색(料色)이 갖다 주다.

장차 가노(家奴)를 보내서 새 토전(土田)을 직접 가서 조사하게 하면서 읊다.

회포를 서술하다.

9일에

진관사(眞觀寺)의 스님이 와서 맹유()가 칠언 연구(七言聯句)를 능란히 지어 낸다고 하므로, 기뻐서 이 시를 짓다.

흥취를 풀다.

10일에

고향 산천을 생각하다.

11일에

후소(後蘇)를 살펴보느라 제공(諸公)들이 눈 속에 반드시 고생했을 것이므로, 시 한 편을 읊어 이루어서 유능함 때문에 수고가 많았던 제공들을 위로하는 바이다.

이달 보름에 월식(月蝕)이 있을 예정이므로, 11일에 구정(毬庭)에서 습례(習禮)를 하고 이 시를 짓다.

추후로 기록하여 자상(子翔)의 말을 요구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스스로 읊다.

복례음(復禮吟)

민 총랑(閔摠郞)이 후소(後蘇)의 지도를 가지고 와서 또 말하기를, 전우(殿宇)의 유지(遺址)가 완연하고 산수(山水)의 형세도 글에 기재된 내용과 서로 합치한다.고 하므로, 기뻐서 이를 기록하는 바이다.

즉사(卽事)

봉요가(逢堯歌)

역사를 읽다.

느낌이 있어 읊다.

옛 놀이를 추억하다.

천녕(川寧)을 읊다. 이는 돌아가기를 생각한 것이다.

어제저녁에 마을의 불량배가 우리 집에서 기르는 개를 활로 쏘았으므로, 그 화살을 뽑아 버렸으나, 밤중에 죽고 말았다. 개의 죽음을 슬피 여겨 이렇게 기록하는 바이다.

팔관회(八關會)에 순마(巡馬)가 매우 성대했다는 말을 듣고 이 시를 짓다.

전려(田廬)

느낌이 있어 읊다.

구씨(舅氏)를 위하여 연정기(蓮亭記)를 짓고, 인하여 이 시를 짓다.

즉사(卽事)

스스로 읊다.

영호행(英豪行)

한 동년(韓同年)에게 부치다.

시주가(詩酒歌)

즉사(卽事)

영해(寧海)를 생각하다.

고의(古意)

앞의 운을 사용하다.

새벽에 일어나서 어제의 일을 기록하다.

또 앞의 운을 사용하다.

산수도(山水圖)

아이들의 장난을 구경하다.

팔이 아파서

스스로 상심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예공(猊公)이 방문해 준 데에 대하여 사례하다.

병을 기록하다.

새벽에 일어나다.

곡성 시중(曲城侍中)이 서택(西宅)을 방문했는데, 나는 부름을 받고도 병 때문에 가지 못하여 서운한 마음에 이 시를 짓다.

관동(關東)으로 가는 진관사(眞觀寺)의 승통(僧統)을 보내다.

스스로 읊다.

고향을 생각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밤에 짓다.

영해(寧海) 김 좌윤(金左尹)의 서신을 받다.

즉사(卽事)

염주(念珠)

선방(禪棒)

즉사(卽事)

안 첨서(安簽書)가 세 아들의 등과(登科)에 대한 경연(慶宴)을 열고 특별히 와서 나를 초청했으나, 나는 병 때문에 가지 못했다가, 그다음 날 병이 조금 우선하므로, 1수를 읊어서 기록하여 바치는 바이다.

즉사(卽事)

홀로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장난삼아 제()하다.

목은시고(牧隱詩藁) 13

()

12 22일 경신에 묘각동(妙覺洞) 권 판합(權判閤)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다.

유 개성(柳開城) 이 우엉과 파와 무를 섞어서 담근 침채(沈菜)와 장()을 보내오다.

한 정당(韓政堂)에게 종이를 내오라 하고, 인하여 내가 아프기 전에 매양 술을 내오게 해서 마셨던 일을 기억하여 이 시를 짓다.

권 판합(權判閤)의 남루(南樓)에 제()하다.

산거(山居)에 대하여 그리움이 있어 읊다.

뜨락을 청소하다.

이랑(二郞) 집에서 아침에 만두를 보내오다.

군자의 지킴[君子守]

군자의 섬김[君子事]

즉사(卽事)

일을 기록하다.

12 25일 을사에 문생(門生)이 주연(酒宴)을 베풀다.

화엄종(華嚴宗)의 대선(大選) 경여(敬如)가 묘각사(妙覺寺)에 있으면서 동파(東坡)의 시()를 가지고 천태(天台)의 원공(圓公)에게 가서 가르침을 듣고, 나를 찾아온 김에 또 이렇게 물으므로, 그가 사문(斯文)을 사모할 줄 아는 것을 기쁘게 여겨 시를 지어 주다.

저녁밥을 먹으며

우연히 쓰다.

즉사(卽事)

[]을 보내 준 철원(鐵原)의 김 동년(金同年)에게 받들어 사례하다.

새로운 일

내시(內侍) 박창령(朴昌齡)이 영해(寧海)에서 돌아오다.

이 시중(李侍中)이 편지와 함께 보낸 야생동물 한 마리를 받고 즉각 받들어 사례하다.

조균(趙鈞) 백화(伯和)를 읊다.

즉사(卽事)

정 첨서(鄭簽書)와 광암사(光巖寺)에 함께 가서 놀기로 약속하다.

정 첨서가 방문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새벽에 읊다.

일을 기록하다. 이날에 사위를 들이는 대가(大家)들이 많았다.

경복(敬僕)이 남리(南里)에 가 있는데 불러도 오지 않다.

절구(絶句)

산수화 병풍

금릉(金陵)을 받들어 생각하다.

법첩(法帖)을 구경하다.

자고 일어나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우연히 《소학(小學)》에서 인용한 《예기(禮記)》 내칙(內則)닭이 울면 낯을 씻고 머리를 빗는다.[初鳴盥櫛] 한 말을 기억하고, 인하여 주 문공(朱文公)의 《소학》에 대한 규모(規模)와 절목(節目)의 구비(具備)됨을 생각한 나머지, 여덟 구를 읊어 이루어서 자손들을 경계하는 바이다.

즉사(卽事)

유거(幽居)

이태백(李太白)을 읊다.

엄자릉(嚴子陵)

스스로 읊다.

즉사(卽事)

유동(柳洞)

섣달 그믐날에

서경(西京)의 임 영공(林令公)이 새끼 노루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섣달 그믐날 밤샘을 하면서 당시(唐詩)의 운을 사용하여 짓다.

기미년 정월 초이튿날 대궐에 들어가서 숙배(肅拜)하고, 그다음 날에 짓다.

회포를 서술하다.

즉사(卽事)

말린 작은 물고기를 보내 준 김 삼사(金三司)에게 사례하다.

전일(前日)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유항(柳巷)에게 기록해 바치다.

막내아들 참군(參軍)과 큰손자 맹유()에게 경계하다.

정월(正月)

회포를 서술하다.

안주(安州)의 박 원수(朴元帥)에게 답하다.

새벽에 일어나다.

정월 초이튿날에 곡성백(曲城伯)의 부중(府中)에 가서 매화와 철쭉이 일시에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고는 물러나서 그것을 잊지 못하여 3수를 이루었다.

즉사(卽事)

귀래편(歸來篇)

즉사(卽事)

절구(絶句)

7일에 봉록(俸祿)을 반사(頒賜)하다.

대설(大雪). 동년(同年)인 원수(元帥) 정원재(鄭圓齋)가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는 또 잘 지은 시를 외웠는데, 그 시에, 만년에 이름은 더욱 중해지고, 신년이라 예는 다시 번거롭구려. 세속 행태 따르긴 부끄러우나, 애써 일어나 후문을 배알하였네. 계곡의 눈은 흥을 일으킬 만하고, 산정은 시끄러움을 피할 만하니, 원컨대 공을 따라 도를 배우면서, 인사를 거문고와 술에 부치고 싶네.[歲名逾重 新年禮更煩 尙慚隨俗態 起謁侯門 溪雪聊乘興 山亭可避喧 願從公學道 人事付琴尊] 하였으니, 끝 구절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입장을 피력함에 있어서는 모두가 사실적인 기록으로서 야박한 풍속을 일깨우고 후생(後生)을 개도(開導)할 만한 말이었다. 그래서 나의 비졸(鄙拙)함을 헤아리지 않고 문득 5수를 짓고, 또 그에게 재차 짓기를 요구하는 바이다.

수록가(受祿歌)

원재(圓齋)에게 부치다.

당시(唐詩) 중에서 늙는 걸 두려워하나 몸은 완전히 늙었다.[畏老身全老]는 시구를 읽었는데, 나는 그것을 다행 중의 다행으로 여기므로 이를 부연하여 3수를 짓다.

스스로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이른 봄의 즉사(卽事)

공권(公權)이 화답을 하여 자기 하인에게 주어 보내면서 주의시키기를, 반드시 답서(答書)를 받아오라.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받들어 바치는 바이다.

염 정당(廉政堂), 한 첨서(韓簽書)와 광암사(光巖寺)의 현릉(玄陵)에 함께 가서 행례(行禮)하기로 약속하고, 밤새도록 앉았다가 날이 밝은 뒤에 짓다.

다시 원재의 시운(詩韻)을 사용하여 애오라지 회포를 서술하는 바이다.

앞의 운을 사용하다.

스스로 읊다.

장차 광암사에 가려면서 느낌이 있어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원재의 운에 차하다.

밤에 앉아서 읊다.

염동정(廉東亭)과 함께 현릉(玄陵)을 참배하고 밤에 돌아오면서 짓다.

국청사(國淸寺)의 비문(碑文)을 읽다.

목암(牧菴)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자식들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왔는데, 나는 저녁밥 먹은 것이 한창 배가 불러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술과 음식을 가지고 이 밀직(李密直) 댁으로 갔더니, 마침 공() 또한 홀로 앉아 있었으므로, 흔연히 서로 권하여 마시고 달밤에 돌아오다.

이튿날에 또 짓다.

거울을 읊다.

일을 기록하다.

찰밥

한유항(韓柳巷)이 장차 광암사에 가려고 나에게 와서 박 첨서(朴簽書)와 함께 가겠다고 고하였다. 그런데 나는 염 장원(廉壯元)과 함께 이미 가서 행례(行禮)하였으므로, 이 시를 지어 그를 희롱하는 바이다.

잡영(雜詠)

두 사람은 나의 정해년 동방(同榜)이기 때문에 인하여 이 시를 짓다.

옛일을 감상하다.

이 이산(李伊山)이 우무[牛毛]를 보내오고 또 내 시운에 화답해 준 데에 받들어 사례하는 뜻에서 억지로 저속한 말을 엮으면서, 장차 서로 왕래하는 즐거움이 있게 된 것은 스스로 기쁘지만, 그 안정(安靜)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또한 감히 기필할 수 없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16일에

즉사(卽事)

새벽에 일어나서 즉사(卽事)를 읊다.

유항(柳巷)과 함께 광암사(光巖寺)에 가서 노닐기로 거듭 약속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연산가(燕山歌)

산으로 돌아가는 총공(聰公)을 보내다.

느낌이 있어 읊다.

보제(普濟)의 부도(浮屠)를 건립할 일로 화주(化主)들에게 공양(供養)을 권하는 글에 제()하다.

유항 댁에 들러 술을 마시고 취해 돌아와서 짓다.

최인호(崔仁浩)가 회산(檜山)에서 소요를 당하고 와서 급함을 알리므로, 우연히 절구(絶句) 4수를 쓰다.

즉사(卽事)

조미(糶米)

목은시고(牧隱詩藁) 14

()

군자(君子)는 추향(趨向)하는 바를 삼가야 한다.

조미행(糶米行)

서대행(犀帶行)

즉사(卽事)

유항(柳巷)이 화답해 온 시에 험난한 곳을 질주한다[走險]는 말이 있으므로, 그 운을 사용하여 사슴[鹿]에 관한 시를 짓다.

유 개성(柳開城)이 이천(利川)의 별서(別墅)로 돌아갔는데, 나는 그 소식을 늦게야 들은 까닭에 미처 방문하지 못하고, 단편(短篇)의 시를 읊어 이루다.

다시 절구(絶句)를 짓다.

고향을 생각하다.

연주가(連州歌)

환암(幻菴)이 도성(都城)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다.

느낌이 있어 읊다.

남촌(南村)

한 정당(韓政堂)과 박 첨서(朴簽書)가 내방(來訪)해 준 데에 받들어 사례하고, 겸하여 나의 회포를 서술하다.

서경(西京)의 이동수(李東秀)를 생각하다.

박 밀직(朴密直)으로부터 정 선생(鄭先生)이 문생(門生)들의 축수재(祝壽齋)를 받게 되어 장차 그 모임에 가리라는 소식을 듣고, 선배(先輩)의 유풍(遺風)이 있음을 기쁘게 여겨 삼가 졸시(拙詩)를 지어서 좌하(座下)에 기정(寄呈)하여 한 번의 웃음거리로 삼기를 바라는 바이다.

즉사(卽事)

소년행(少年行)

회포를 서술하다.

즉사(卽事)

해와 달이 비추는 곳과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에 사는 모든 혈기를 지닌 사람치고 존경하고 친애하지 않는 자가 없다[日月所照 霜露所墜 凡有血氣 莫不尊親]는 말이 우연히 기억나서 사영(四詠)을 짓다.

즉사(卽事)

유포 둔영(柳浦屯營)의 두목(頭目)이 벼슬자리를 요구하다.

즉사(卽事)

동갑(同甲)인 개천사(開天寺)의 담선사(曇禪師)가 보낸 서찰(書札)과 차()를 얻다.

인하여 무설(無說)을 생각하다.

스스로 읊다.

동년(同年) 이몽유(李夢遊) 62세의 나이로 벼슬자리를 요구하므로, 인하여 이 시를 짓다.

즉사(卽事)

밤에 읊다.

새벽에 일어나다.

분 파는 사람[賣粉者]을 두고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우연히 쓰다.

면마행(眠魔行)

초은(樵隱)의 묘지명(墓誌銘) 후미에 쓰다.

청어(靑魚)를 두고 짓다.

생률(生栗)을 두고 짓다.

밤에 읊다.

()

영가군(永嘉君) 권고(權皐)에게 올리다.

중손(仲孫) 맹균(孟畇)이 좌창동(左倉洞)으로 돌아오면서 인하여 그 외조댁(外祖宅)을 들르다.

당대(唐代) 현사(賢士)의 화시(花詩)를 읽고 읊다.

즉사(卽事)

정도전(鄭道傳)을 생각하며 읊다.

묵헌문집(默軒文集)의 후미에 쓰다.

고풍(古風)

2월 초하룻날 둘째 아들 집에서 찰밥을 보내오다.

앞의 시운을 사용하다.

즉사(卽事)

느낌이 있어 읊다.

즉사(卽事)

외구(外舅) 화원군(花原君)의 기일(忌日) 아침에 유 영광(柳靈光) 부인이 재()를 올리는데, 마침 큰 바람이 불고 또 일기가 매우 추워서 가지 못했다.

동풍(東風)

즉사(卽事)

바람 소리를 듣다.

장차 집의(執義) 박정(朴挺)을 방문하려면서 짓다.

즉사(卽事)

요동위(遼東衛)의 사자(使者)가 돌아가다.

이 개성(李開城)에게 받들어 부치다.

해안사(海安寺)의 채 수좌(蔡首座)가 들르다.

스스로 읊다.

행재가(幸哉歌)

즉사(卽事)

조춘(早春)의 즉사(卽事)

스스로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사람을 찾다가 만나지 못하다.

스스로 읊다.

여강(驪江)

미쳐서 읊다.[狂吟]

진관사(眞觀寺) 도수원기(道樹院記)의 후미에 제()하다.

즉사(卽事)

우연히 신사년의 동년(同年)들을 생각하다가 느낌이 있어 읊다.

회포를 서술하다.

산중(山中)을 생각하다.

소심행(小心行)

크게 탄식하다.[浩歎]

외로이 가다.

즉사(卽事)

종백(宗伯) 개성 윤(開城尹)이 찾아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다.

즉사(卽事)

일을 기록하다.

깊숙한 골목

한낮

조양(朝陽)

병든 몸

군자(君子)

느낌이 있어 읊다.

족자(族子)가 찾아왔기에 이 시를 짓다.

고의(古意)

상서(尙書) 강용리(姜用鯉)가 찾아오다.

절구(絶句)

청산음(靑山吟)

병중음(病中吟)

일을 기록하다.

군자(君子)

호불귀행(胡不歸行)

유 학관(柳學官)이 춘정 석전(春丁釋奠)의 번육(膰肉)을 친히 보내오다.

즉사(卽事)

느낌이 있어 읊다.

최 안동(崔安東)에게 부치다.

최 대사성(崔大司成)이 나에게 태학(太學)에 들어가기를 청하므로, 인하여 회포를 서술하다.

여강(驪江)

목은시고(牧隱詩藁) 15

()

스스로 읊다.

포박자(抱朴子)

스스로 읊다.

기러기 소리를 듣다.

즉사(卽事)

오피상행(烏皮牀行)

큰 바람 소리를 듣고 짧은 노래를 짓다.

연아(演雅)

암방사(巖房寺)에서 청재(淸齋)하던 일이 한바탕 꿈만 같아서 개연히 세 절구(絶句)를 읊어 이루다.

이자안(李子安)이 병을 앓은 지 이미 달포가 되었는데, 한 상당(韓上黨)이 나에게 함께 가서 문병을 하자고 요청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침 나 또한 병이 발작하여 말에 오르지 못했는데, 그의 아들이 와서 곽향(藿香)을 구하므로, 인하여 느낀 바가 있어 노래를 지어서 스스로 위로하는 바이다.

새벽에 일어나다.

즉사(卽事)

측측편(惻惻篇)

유유편(悠悠篇)

정 산기(鄭散騎)를 생각하다.

즉사(卽事)

고풍(古風)

즉사(卽事)

느낌이 있어 읊다.

일을 기록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연도(燕都)를 생각하다.

흥교원(興敎院)의 옛 놀이를 생각하다.

걸어서 올라가다.

술을 가지고 박 집의(朴執義)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용부(庸夫) 정당공(政堂公)이 마침 조정에서 퇴청하여 집에 있으므로, 흔연히 가서 함께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짓다.

명일(明日)에 앞의 운을 사용하여 스스로 읊다.

즉사(卽事)

군자유소사(君子有所思)

() 아이가 호도(胡桃)를 찾다.

회포를 서술하다.

유항(柳巷)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회포를 읊으면서 돌아오다.

이슬비

술을 갖고 방문해 준 홍 좌사(洪左使), 권 정당(權政堂)에게 받들어 사례하다.

한밤중에 노래하다.[半夜歌]

유동심행(柳洞深行)

군자(君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고주 선로(孤舟禪老)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스스로 읊다.

이천가(伊川歌)

비가 오다.

동년(同年) 이몽유(李夢游)가 내방하여 제공(諸公)들이 생각나서 짓다.

풍우행(風雨行)

즉사(卽事)

희허편(欷歔篇)

즉사(卽事)

영가(永嘉) 권 시중(權侍中)이 자기 손자인 젊은 태상(大常)을 시켜 주식(酒食)을 보내왔으므로, 이를 절하고 받아 취하고 배부르게 먹고 나서 단율(短律)을 읊어 이루다.

전라도(全羅道) 정 염사(鄭廉使)를 보내다.

또 앞의 운을 사용하다.

우연히 제하다.

스스로 탄식하다.

충주(忠州) 곽 판사 충룡(郭判事)군 천호(軍千戶)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짓다.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는 고주 선로(孤舟禪老)를 보내다.

주선(珠禪)이란 자가 석종(石鐘)의 명()을 요구하다.

한유항(韓柳巷)이 내게 들러서 썰렁하게 앉아 서로 담소(談笑)하던 중, 박 장원 자허(朴狀元子虛)가 마침 오자, 유항이 흔연히 술과 안주를 가져와서 함께 술을 마셨는데, 술자리를 마치고 나서 비로소 반쯤 취함을 깨닫고 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지난해 2 24일 숙배(肅拜)한 지가 지금 벌써 일주년이 되었다. 절구(絶句)를 읊어 이룬 것은 아주 기쁘고 다행하게 여긴 때문이다.

염동정(廉東亭)이 오자, 유항(柳巷)이 또 술과 안주를 베풀었다.

이생(李生)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오 소윤(吳少尹)이 찾아왔기에 내가 향약(鄕藥) 한 상자를 그에게 맡겨 민간(民間)의 병자(病者)들에게 나눠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것은 내 평생에 동정심을 발휘해 온 일의 일부분으로서 족히 스스로 슬퍼할 만하기에 노래를 불러 스스로 위로하는 바이다.

강주 원수(江州元帥) 하 장원(河狀元)이 편지와 함께 선물을 보내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는 시를 대서(代書)하면서 붓을 달려 쓰다.

스스로 읊다.

포은기(圃隱記)의 후미에 제하다.

나막신을 신고 걷다.

즉사(卽事)

가랑비가 오다.

군자(君子)

문생(門生) 홍준(洪濬)이 찾아와서 지금 춘주(春州)에 있다고 말했다.

차타행(蹉跎行)

즉사(卽事)

진관사(眞觀寺)의 대선(大選)이 와서 당시(唐詩)의 어의(語義)를 묻다.

즉사(卽事)

상사일(上巳日)

동년(同年) 김세진(金世珍)이 익화(益和)에 물러가 산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어떤 일로 도성에 왔다가 내게 왕림하였으므로, 내가 장차 여흥(驪興)으로 돌아갈 계획을 고하고 또 나에게 벼 종자를 대줄 것을 청하고서 인하여 절구(絶句)를 짓노니, 아무쪼록 내 부탁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즉사(卽事)

차운하여 임 대참(林大參)에게 받들어 하례하다.

돌아가련다.

일을 기록하다.

총 무문(聰無聞)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시권 첫머리에는 나옹(懶翁)의 산수화(山水畫)가 있다.

삼월 삼짇날에

다음 날에 제사 지낸 음식이 이르긴 했으나, 봉함(封緘)이 없어서 감히 받지 못하였다.

합포(合浦) 영공(令公)이 포()를 보내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즉사(卽事)

성렴행(省斂行). 선왕(先王)을 생각한 것이다.

작영행(雀影行)

당성인(唐城引)

즉사(卽事)

정원재(鄭圓齋), 이 봉익(李奉翊) , 박 승지(朴承旨) 가 함께 술을 가지고 찾아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고, 겸하여 익재(益齋)의 진당(眞堂)에 참배하자는 약속을 다졌다.

스스로 앞의 운에 화답하다.

즉사(卽事)

구룡산가(九龍山歌)

적자음(赤子吟)

스스로 짓다.

춘면(春眠)

여러 장수들이 해적(海賊)을 토벌하려고 일시에 출전했다는 소식을 듣다.

스스로 읊다.

사전(賜田)에 대한 신성장(申省狀)이 이르렀으니, 지난해 12월에 신성(申省)한 것을 금년 3월에야 비로소 얻은 것이다. 미처 펴보기도 전에 대궐을 향하여 사은(謝恩)하고 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저녁때 비가 오다.

이른 아침에 읊다.

이 삼재(李三宰)가 《법화경(法華經)》의 발문(跋文)을 요청하므로, 인하여 느낀 바가 있어 짓다.

이 개성(李開城)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홀로 소나무 사이에 앉아서 느낌이 있어 짓다.

목은시고(牧隱詩藁) 16

()

느낌이 있어 읊다.

천녕음(川寧吟). 천녕현(川寧縣)으로부터 내방(來訪)한 이가 있으므로, 인하여 생각한 바를 서술하다.

이 개성(李開城)이 술을 가지고 방문해 준 데에 사례하다.

이미 전후(前後)로 두 편을 써서 개성(開城)에게 부쳐 올리고, 붓을 잡은 김에 세 수를 더 읊어 이루다.

즉사(卽事)

우중(雨中)에 회포를 읊다.

저녁때 비가 개자, 대이부(大姨夫) 민 판사(閔判事)에게 주어 그의 뜻을 위로하다.

청명절(淸明節)

느낌이 있어 읊다.

치통(齒痛)을 앓다.

회포를 서술하다.

어제 병을 무릅쓰고 광평(廣平) 이 시중(李侍中)의 아우의 상()에 조문을 나갔으나 시중을 만나지 못하였고, 다음으로는 강남(江南)에 출사(出使)했다 돌아온 심 재신(沈宰臣)을 찾아뵙고 나의 불민(不敏)함을 사죄했으며, 또 다음으로는 광제사(廣濟寺)에 들어갔더니 나잔자(懶殘子)가 술을 받아 대접해 주었고, 또 다음으로는 나를 방문해 준 데에 감사를 드리려고 이 개성(李開城) 댁에 갔으나 만나지 못했으며, 마침 양 이상(楊二相)은 집에 있었으므로, 또 그와 함께 마시고 돌아와서는 취해 쓰러져서 아침에 이르렀다.

제공(諸公)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임 대참(林大參)이 내 집에 명함을 내놓고 간 것을 보고는 명일에 시를 지어가지고 가서 사례하다.

어제 임 참정(林參政)을 뵈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인하여 동정(東亭)에게 들러서 간단히 한 잔을 마시고, 왕 참정(王參政) 댁에 이르자 주식(酒食)을 성대히 차려 내왔는데, 마침 한유항(韓柳巷)이 또 오므로 함께 마시고 취하여 나왔다. 그러고는 또 시중공(侍中公)을 찾아뵙고 실컷 마시어 취한 몸 부축하고 저물녘에야 돌아왔다가 명일 아침에 그 사실을 기록하는 바이다.

종서(宗壻) 박 판서(朴判書)와 종손(宗孫) 이 정당(李政堂)이 술을 가지고 찾아오다.

한유항(韓柳巷)이 급제(及第)한 문생(門生)들에게 연회(宴會)를 베풀다.

술을 보내오다.

스스로 읊다.

백의(白衣)를 찬송하다.

염동정(廉東亭)의 연회석상에서 취하여 노래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박 척산(朴陟山)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다.

내가 부름을 받고 회의차 도당(都堂)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정당(韓政堂) 댁으로 가다.

주금(酒禁)

일을 기록하다.

한유항(韓柳巷)의 초청으로 그와 함께 윤 판서(尹判書)의 원림(園林)에 가다.

윤 판서(尹判書)의 석상(席上)에서

일찍 일어나다.

종백(宗伯) 개성(開城)의 운에 차()하다.

3 21일에 지신사(知申事) () 김도(金濤)가 선온(宣醞)과 내선(內膳)을 받들어 와서 전해 주므로, () ()은 감격스러움을 감당치 못하여 삼가 단가(短歌)를 지어서 사관(史官) 편에 올려 보내는 바이다.

금사 팔영(金沙八詠)

자문(紫門)에 나아가 주과(酒果)를 하사한 데 대하여 사례하다.

정 정당(鄭政堂)을 배알하여 문병(問病)을 했더니, 정공(鄭公)이 차를 내왔다.

새벽에 일어나 비 오는 소리를 듣고 앞의 운을 사용하여 스스로 읊다.

즉사(卽事)

즉사(卽事)

봄놀이[春遊]

새벽에 일어나다.

백공(伯恭)의 자설(字說) 끝에 제하다.

산수화(山水畫)의 병풍(屛風)을 두고 짓다.

홍수겸(洪守謙) 상서(尙書)가 방문하다.

빌린 말이 병이 나다.

흥취를 풀다.

산새 우는 소리를 듣다.

나팔 부는 소리를 듣다.

느낌이 있어 읊다.

홀로 노닐다.

주 동년(朱同年)에게 적어 올리다.

한유항(韓柳巷)이 창화(昌和)의 안 첨서(安簽書) 댁을 함께 가자고 초청해 왔으나, 나는 술 때문에 피곤하여 사양하였다. 오후에는 몸이 조금 거뜬해졌는데, 마침 이 삼재(李三宰)가 특별히 초청해서 가보니, 염동정(廉東亭)이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술잔을 서로 주고받고 하다가 잔뜩 취해서 집에 돌아와 그 사실을 기록하는 바이다. 대체로 음식(飮食) 같은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마치 은미한 사이에 주고 뺏는 신의 작위가 있는 듯하니, 어찌 느껍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편(短篇)을 읊어 이루어서 기록하는 바이다.

새벽에 일어나다.

조사겸(趙思謙)에 대한 만사(挽詞)

애재(哀哉)

영매(嶺梅)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철동(鐵洞)에서의 놀이를 기록하다.

염동정(廉東亭)과 함께 이상(李相)의 초대를 받고 갔다 와서 술병이 난 지 이틀 만에 조금 우선해지자, 시가(詩歌)를 읊어 이루다.

느낌이 있어 읊다.

묘봉(妙峰)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즉사(卽事)

유거(幽居)

4월 초파일 저물녘에 약간의 비가 내리더니, 밤에 들어서는 비바람이 크게 몰아쳤다.

즉사(卽事)

택주(宅主)가 큰언니[大姨]를 방문하러 가자, 홀로 앉아서 읊다.

병중(病中)에 짓다.

대 그림[畫竹]에 제하다.

궁문(宮門)에 시립(侍立)하여 예식(禮式)을 관람하고 물러와서 기록하다.

회포를 읊다.

어제 양부(兩府)에서 지인(知印)을 차견하여 부름을 받고 대궐에 이르러 내정(內庭)으로 들어가서 주연(酒宴)에 참여했는데, 이윽고 중관(中官)이 왕지(王旨)를 전하여 자리를 정해 주어 나는 당상(堂上)의 서편에 앉고 이상(二相) 이하는 모두 뜨락에 늘어앉아서 차례대로 상수(上壽)를 하였다. 그리고 물러 나와서 스스로 반성해 보니, 이 일이 참으로 꿈만 같았다. 선왕(先王)께서 이 신()을 총애해 주신 은택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라, 감격스러움을 감당치 못하여 장구(長句) 4()을 읊어 이루어서 후일의 영예로운 볼거리로 삼는 바이다.

하일(夏日)의 즉사(卽事)

앞의 운을 사용하다.

고의(古意)

사물을 관찰하다.

회포를 읊다.

한 상당(韓上黨)이 신륵사(神勒寺)의 비문(碑文)을 쓴 데 대하여 읊다.

즉사(卽事)

희우행(喜雨行)

즉사(卽事)

스스로 읊다.

벽운(碧雲)이 와서 기우제(祈雨祭)가 즉시 응험이 있었다고 말했다.

박총(朴叢) 상서(尙書)가 삼교(三敎)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떠난 다음에 세 편()을 읊어 이루다.

들은 일을 기록하다.

즉사(卽事)

양 이상(楊二相)이 회군(回軍)하여 광주(廣州)에 이르렀다가 적()이 진포(鎭浦)에 있다는 말을 듣고 즉각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말을 듣다.

새벽에 일어나서 느낌이 있어 짓다.

어제 유항(柳巷)의 초청을 받고 가서 술을 반정도나 거나하게 마셨는데 몸이 피곤해서 정신없이 아침까지 자고 손이 오자 석양까지 손을 응접(應接)하고 나서 홀로 한 수를 읊다.

황 광주 경덕(黃廣州敬德)을 보내다.

명일 서연(書筵)에 진강(進講)을 하게 되었는지라, 옛날 선왕(先王)께서 총애해 주신 은혜를 추념(追念)하니, 감격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어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전라 안부(全羅按部)가 세린(洗鱗)을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5 26일 상()이 서연(書筵)에 계시어, () ()이 《논어(論語)》의 윗사람이 친한 이에게 후하면 백성들이 인에 흥기하고,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인심이 각박해지지 않는다.[君子篤於親 則民興於仁故舊不遺 則民不偸]는 글에 대하여 진강(進講)을 마친 다음 시학 내관(侍學內官)이 높은 목소리로 이 글을 두어 번 읽고 나자, 상께서 친히 술을 내리시므로, 절하고 마신 다음 곧장 총총걸음으로 나와서 집에 돌아와 피곤한 나머지 그대로 누웠다가 한참 만에야 일어났다.

상당군(上黨君) 한공 맹운(韓公孟雲)이 최 판삼사(崔判三司)의 화상(畫像)을 가지고 내 집에 와서 그 화상을 마룻대에 걸어 놓고 보니, 신채(神彩)가 매우 위엄이 있어 보이므로, 시를 지어 찬미(讚美)하는 바이다.

권 상주(權尙州)의 편지를 받았는데, 서늘한 대자리까지 부쳐 주었다.

()을 중단하다.

민중립(閔中立) 시랑(侍郞)이 두 어버이에게 헌수(獻壽)하면서 자기 아우 총랑(摠郞)을 시켜 나를 초청하였는데, 나는 앓고 난 나머지 더위가 무서워서 나가지 못하고 붓을 달려 써서 절하고 바치는 바이다.

느낌이 있어 읊다.

가지산(迦智山)의 영공(英公)이 차()를 선사하였으므로, 붓을 달려 받들어 사례하다.

소재 법석(消災法席)으로 인하여 강()을 중단하다.

흥취를 풀다.

이 월성(李月城) 을 곡()하다.

양 이상(楊二相)이 원수(元帥)들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는데, 나는 앓고 난 나머지 기력이 쇠약해져서 교외(郊外)에 나가 맞이하지 못하고 단율(短律)을 읊어 이루다.

즉사(卽事)

홀로 앉아서 읊다.

윤월(閏月) 초하루에 읊다.

염동정(廉東亭)의 초청을 받고 가서 취하여 돌아오다.

민제(閔霽) 사성(司成)이 내방(來訪)하다.

조용히 앉아서 읊다.

즉사(卽事)

잠부사(蠶婦詞) 전편(前篇)

잠부사(蠶婦詞) 후편(後篇)

송첨(松簷)에 시렁을 대서 포도 넝쿨을 옮겨오다.

서연(書筵)에서 군자가 귀히 여기는 도가 세 가지가 있다.[君子所貴乎道者三]로부터 유사가 있다.[有司存]까지를 진강(進講)하고 물러와서 소감을 기록하다.

곡성 시중(曲城侍中), 칠원군(漆原君)이 함께 서쪽 이웃의 길창공(吉昌公)을 방문하니, 정 계림(鄭雞林)은 이미 와 있었다. 성찬(盛饌)을 베풀어 술잔이 반쯤 돌았을 때 왕 우승(王右丞), 영녕군(永寧君)이 또 와서 즐겁게 서로 수작을 하였는데 장차 헤어지려 할 때에 비가 내리자, 제공(諸公)이 모두 매우 기뻐하며 갔다. 나도 다행히 그 말석(末席)에 참여하여 율시(律詩) 여덟 구()를 읊어 이루었으니, 기쁜 뜻을 기록한 것이다.

서연(書筵)에서 증자가 이르기를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이에게 물었다.[曾子曰以能問於不能]고 했다.는 한 장()을 진강(進講)하였다.

비를 읊다.

장차 서연(書筵)에 가려고 천현(穿峴)을 올라가다가 한 홀지(忽只)를 만났는데, 그가 알자(謁者)의 말을 전하여, 비가 와서 출입(出入)하기가 어려우니 신()을 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집에 돌아와 편히 앉아서 은혜에 감격한 나머지 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남촌(南村)의 부인(夫人)이 상당(上黨) 한공(韓公)에게 청하여 묘명(墓銘)을 썼는데, 한공이 그 묘지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고 관직(官職) 천제(遷除)의 연월(年月)을 고쳐 바로잡았으므로, 인하여 느낌이 있어 짓다.

철원군(鐵原君) 최맹손(崔孟孫)을 곡()하다.

새벽에 일어나 읊다.

낮닭이 울다.

즉사(卽事)

송악산(松岳山)에 오르다.

중지(仲至)의 자설(字說) 후미에 제하다.

흥취를 풀다.

5 9일에 홀로 앉았는데, 석양에 이르러 가랑비가 내리니, 햇빛과 빗방울이 서로 섞이었다. 인하여 최졸옹(崔拙翁)이 곽 밀직(郭密直)의 상련(賞蓮) 시에 화운한 구름 새나온 석양 아래 비가 실실 내리네.[漏雲殘照雨絲絲]라는 시구가 기억나서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송시(宋詩)오월이라 임평의 산 아래 길가에는, 수많은 연꽃이 모래섬에 가득하구나.[五月臨平山下路 藕花無數滿汀洲]라는 시구도 있거니와, 5월은 정히 연꽃이 피는 때인데, 가랑비 또한 이렇게 내리니, 졸옹의 정취를 상상할 만하다. 나는 반백(斑白)의 머리로 잠시 사필(史筆)을 관령(管領)하고 있노라니, 곽공(郭公)의 옥당 늙은이[玉堂老]라는 말이 진정 나의 풍취와 흰 귀밑털[風情鬢絲]을 먼저 얻은 것이었다. 하였다. 그래서 시 한 편을 읊어 이루어 후일 지회(池會)의 장본(張本)으로 삼는 바이다.

10일에 《논어(論語)》 태백(泰伯)인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거니, 또한 무겁지 않겠는가.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또한 멀지 않겠는가.[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라는 글을 진강(進講)하면서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천지의 큰 덕을 생이라 하는 것이요, 성인의 큰 보배를 자리라 하는 것이니, 어떻게 그 자리를 지킬꼬? 인이라는 것이다.[天地之大德曰生 聖人之大寶曰位 何以守位 曰仁]라는 글로써 중() 자와 원() 자의 뜻을 증험하고, 물러 나와서 그것을 기억해 보니, 대체로 임금에게 고하는 말은 의당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뒤에 명주베[紬布]를 하사받고 시 두 수를 읊어 이루는 바이다.

강릉(江陵) 최 상국(崔相國)에게 받들어 사례하다. ()이 말하기를 내가 향도(香徒)로서 염 시중(廉侍中)의 윗자리에 앉아서 담암(淡庵)과 바둑을 두었다. 하였고, 또 나에게 시를 창화(唱和)한 것이 있으므로, 이 시에 그것을 언급하였다.

상당(上黨) 한공(韓公)이 증각사(證覺寺)에서 남촌(南村)의 묘명(墓銘)을 쓰는데, 나는 아픈 뒤라서 따라가 모실 수가 없으므로, 멍하니 앉아서 짓다.

《논어》 태백의 시로 흥기하며, 예로 서며, 음악으로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는 한 장()을 진강(進講)하였다.

유 개성(柳開成)과 안 좌랑(安佐郞)이 음식을 장만해 왔는데, 마침 용부 정당(庸夫政堂)이 문안차 들렀으므로, 서로 헌수(獻酬)를 마치고 나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절구(絶句)

《논어》 태백의 백성은 옳은 도리를 따라 행하게 할 수 있을 뿐이요, 그 도리의 소이연을 알게 할 수는 없다.[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는 한 장을 진강(進講)하였다.

유 만호(柳萬戶)가 세 아들의 이름을 청하다.

인하여 두 시중(侍中)을 읊다.

비가 개다.

영가(永嘉) 권 시중(權侍中)을 곡()하다.

즉사(卽事)

유거(幽居)

국화를 미처 다 심기 전에 비가 또 오므로 단가(短歌)를 짓다.

느낌이 있어 읊다.

스스로 읊다.

고풍(古風)

일찍 일어나다.

절구(絶句)

16일에 주공의 재능의 훌륭함[周公之才之美]이라는 한 장을 진강(進講)하였다.

산보(散步)를 하다.

여러 손자들을 보며 읊다.

현 소윤(玄少尹)이 이름 지어 주기를 청하므로, 인하여 세 글자를 알려 주면서 본인에게 스스로 가리도록 하였다.

《논어》 태백(泰伯)삼 년을 배우고도 관록에 뜻 두지 않을 사람은 쉽게 얻을 수 없다.[三年學 不志於穀 不易得也]라는 한 장을 진강하였다.

희안(希顔)이 자기 선군(先君)의 묘명(墓銘)을 베껴 가므로, 나는 노쇠하여 아직까지 한산(韓山)의 선영(先塋)에 묘명도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를 스스로 탄식하면서 인하여 세 수를 짓다.

살구[]를 읊다.

이날에 대장(臺狀)이 있어 양부(兩府)의 회의(會議)를 소집하므로, 이 때문에 강()을 중지하였다.

《논어》 태백(泰伯)독실히 믿으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죽기로써 지키면서 도를 선하게 해야 한다.[篤信好學 守死善道]는 여덟 자를 진강하였다.

유항루(柳巷樓) 밑을 지나면서도 몸이 피곤하여 올라가지 못하고, 집에 와서는 옷을 벗고 두 다리를 죽 뻗고 앉아서 세 수를 읊어 이루다.

즉사(卽事)

서연(書筵)에 나갔더니, 중관(中官)이 상()의 분부를 전하는데, 어제 읽은 글을 아직 잘 익히지 못했으니, 우선 강의를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 ()이 말하기를 이 장()은 참으로 읽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고 물러 나와서 그 일을 기록하다.

즉사(卽事)

21일에 중관(中官)이 나와서 말하기를 상체(上體)가 더위로 인하여 설사를 하시다가 그 증세는 이미 회복되었으나, 우선은 강의를 중지해 달라. 하므로, 신 색이 물러 나와서 그 일을 기록하다.

즉사(卽事)

앵도(櫻桃)를 읊다.

묘당(廟堂)에서 바야흐로 선목(選目)을 주의(注擬)하려 하는데, 나를 찾아와서 청탁을 하는 자가 꽤 많았으므로, 스스로 비웃고 나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스스로 읊다.

최인호(崔仁浩)를 희롱하다.

스스로 책망하다.

음우(霪雨)

스스로 책망하다.

절구(絶句)

동년(同年) 임희좌(任希座)가 박[]을 주다.

목은시고(牧隱詩藁) 17

()

종손(宗孫)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흥취를 풀다.

고풍(古風)

이의호가(已矣乎歌)

하일(夏日)의 즉사(卽事)

흥취를 풀다.

화원(花園) 양화원(養花員)의 천거 요구를 받고 인하여 지인 승제(知印承制)에게 천장(薦狀)을 올리다.

흥취를 풀다.

신륵사(神勒寺)의 주사(珠師)가 둥근 부채를 주었다.

한거(閑居)

스스로 읊다.

오생(吾生)

글 읽던 곳을 노래하다.

유항(柳巷)의 문생(門生)이 주연(酒宴)을 베풀었는데, 이는 공()이 왕명을 받들고 신륵사(神勒寺)를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공이 친히 내 집까지 왕림하여 자리를 함께해 달라고 나를 초청했으나, 내가 마침 몸이 약간 좋지 않아서 초청을 따르지 못하고 홀로 앉아 느낌이 있어 짓다.

새벽에 일어나서 즉사를 읊다.

권 만호(權萬戶)의 아내 이 부인(李夫人)을 곡()하다.

최옹(崔翁)이 나를 초치해서 위하여 정방(政房)에 청탁을 하므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이 시를 최옹에게 보였더니, 최옹이 말하기를 말이 옳기는 옳으나, 다시 한 번 청탁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므로, 이에 또 앞의 운을 사용하다.

스스로 읊다.

국신리(國贐里)의 할멈이 새 기름을 짜는데, 이것을 장차 금강산(金剛山)의 보제 영당(普濟影堂)으로 보낼 것이라고 한다.

유인(幽人)

고양이가 새끼를 낳다.

느낌이 있어 읊다.

직포음(織布吟)

수박을 먹다. 승제(承制)가 얻어 온 것이다.

성균관(成均館)이 생각나서 짓다.

경복(敬僕)이 필묵(筆墨)으로 장난을 하다.

조균(趙鈞)이 이름을 온()으로 고치고 벼슬을 요구하다.

우중(雨中)에 갑자기 연꽃을 감상하고픈 흥취가 동했으나 말을 타기가 어려워서 이루지 못하고 세 수를 읊어 얻다.

즉사(卽事)

유거(幽居)

환암(幻菴)을 생각하다.

김 삼사(金三司) ()의 여러 족중(族中)에 받들어 부치다.

새벽에 읊다.

스스로 희롱하다.

스스로 화답하다.

퇴지(退之)의 군마(軍馬) 사이에서 조용했던 그 풍도가 사안석(謝安石)에 못지않았으므로, 한 절구(絶句)를 지어 읊조리는 바이다.

스스로 읊다.

새벽에 일어나다.

주 상인(珠上人)이 달순(達順)과 같은 암자에 있으면서 견암(見菴)의 기문(記文)을 청하다.

즉사(卽事)

연꽃을 감상하려고 용화지(龍化池)에 가보니, 꽃이 핀 게 없었다.

나가고는 싶으나 나가지 못하고 운금루(雲錦樓)를 생각하며 짓다.

석양이 서늘하다.

판사(判事) 권주(權鑄)가 이중탕(理中湯)을 보내 주었으니, 나에게 설리(泄痢)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기뻐서 짓다.

즉사(卽事)

우연히 반빙(頒氷)을 생각하다.

비가 개다.

최옹(崔翁)의 말을 기억하여 내 의견으로 되풀이하다.

즉사(卽事)

나연(那演)이 용호단(龍虎丹)을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정랑(正郞) 이정보(李廷輔)가 자기 세 아들의 이름에 대한 설()을 청하다.

단가행(短歌行)

스스로 읊다.

비가 오다.

송광사(松廣寺)의 부목 화상(夫目和尙)이 왜()를 피해 영대사(靈臺寺)에 있으면서 차()를 부쳐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다.

우중(雨中)에 느낌이 있어 짓다.

고풍(古風)

즉사(卽事)

즉사(卽事)

지후(祗候) 민안인(閔安仁)이 제가(諸家)의 시고(詩藁)를 모아서 장차 졸옹(拙翁)의 《동인지문(東人之文)》을 이으려고 하므로, 내가 그것을 매우 기뻐하여 단가(短歌)를 지어서 그 일을 성취하기를 권면하는 바이다.

즉사(卽事)

산딸기가 익어서 나무꾼이 이것을 따왔으므로, 인하여 등암사(燈巖寺)의 길을 가던 일을 생각하다.

인하여 등암사로부터 감로사(甘露寺)에 와서 묵은 일을 기억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서쪽 이웃에서 나를 초청했으나, 더위에 지쳐 가지 못하고 한 상당(韓上黨)에게 바치다.

가랑비

팥죽을 먹다.

일찍 일어나다.

즉사(卽事)

스스로 읊다.

즉사(卽事)

운룡음(雲龍吟)

동갑(同甲) 허 정당(許政堂)을 하례하다.

천장방(天場房)의 자은 수좌(慈恩首座)가 참외를 보내오다.

두 간의(諫議)가 함께 승선(承宣)에 제수된 것을 하례하다.

군자(君子)

스스로 책망하다.

보광사(普光寺)의 형()에게 받들어 부치다.

이 남곡(李南谷)이 판사(判事), 지부(知部)에 제수된 것을 하례하다.

잡흥(雜興)

[]를 읊다.

벼룩[]을 읊다.

[]을 읊다.

[]를 읊다.

이미 벼룩, , , 개를 읊고 나서 스스로 천지(天地)가 만물(萬物)을 생성(生成)함으로써 각각 품부(稟賦)받은 것이 이러하거니, 어떻게 하면 봉황(鳳凰)의 울음소리를 듣고 기린(麒麟)의 인후한 모습을 보아서 내 가슴속을 유쾌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탄식하면서 이에 봉명(鳳鳴), 인지(麟趾) 두 편을 읊어 얻다.

하 안부(河按部)가 차()와 절인 어물[]을 부쳐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다.

우연히 읊다.

여름날이 서늘하다.

군자(君子)

최 안동(崔安東)에게 받들어 답하다.

스스로 읊다.

벌에 쏘이다.

잡록(雜錄)

흥취를 풀다.

절구(絶句)

홀로 읊다.

금강산(金剛山)의 유나(維那)에게 부치다.

염동정(廉東亭)이 강 대언(姜代言)을 하례한 시운(詩韻)에 차()하다.

재추소(宰樞所)의 공함(公緘)을 잘못 뜯어보았으니, 이는 공함을 가져다 준 자가 완산군(完山君)을 한산군(韓山君)이라고 잘못 말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비록 맹랑하다 치더라도 나 또한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세 수를 읊어 이루다.

즉사(卽事)

화마(畫馬)에 제()하다.

일을 기록하다.

점심을 먹다.

꿈을 기록하다.

목은시고(牧隱詩藁) 18

()

6 15일에 장난삼아 제()하다.

이날 자하동(紫霞洞)에서 양부(兩府)에 주연(酒宴)을 내렸으므로, 병중에 그 소식을 듣고 기뻐서 짓다.

또 공연(公讌)을 없애고 각각 사사로 주석(酒席)을 열었다는 말을 듣고 인하여 한 수를 이루다.

선인(先人)을 모시고 연로하던 길창군(吉昌君)을 임정(林亭)으로 찾아뵈었을 때, 차린 음식 중에 햅쌀죽[新米粥]이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6월 보름께였다. 그 후에 어떤 이에게 물어보니, 대체로 쌀을 잘 저장하는 법칙이 있어서이지 참으로 햅쌀은 아니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옳은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지금 그 집과 가까운 이웃에 있으면서 마침 이때를 만났으므로, 인하여 이 시를 짓는 바이다.

즉사(卽事)

유두일(流頭日)에 세 수를 읊다.

구씨(舅氏)의 지정(池亭)에 부쳐 제()하다. 못에 연()이 있다.

또 읊다.

극총 수좌(克聰首座)가 새로 남계원(南溪院)으로 들어가다.

중하(仲夏) 이후로 몹시 연꽃을 감상하고 싶어서 하루는 하인을 시켜 가보게 했더니, 운금루(雲錦樓) 연못의 꽃은 없어진 지 오래이고, 광제사(廣濟寺) 연못의 것만 성하게 피었더라고 하였다. 그래서 행차를 명하여 그곳으로 가서 둑을 따라 말 가는 대로 가다가 우연히 임 중랑(任中郞)이 자기 임정(林亭)으로 천태(天台)의 나잔자(懶殘子)를 맞이해 꽃을 감상하고 있는 자리를 만났다. 임공(任公)이 음식을 차려 내와서 함께 벽통음(碧筒飮)을 즐기고 저물녘에야 서로 작별하고 인하여 남계원(南溪院)에 들렀다가 다시 집에 돌아오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두 수를 읊어 이루다.

매미 우는 소리를 듣다.

청도(淸道)의 새 태수(太守) 문익점(文益漸)이 떠날 것을 고하다.

연꽃을 감상하던 남은 흥취를 스스로 그치지 못하여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이날 하인을 시켜 연못에 들어가서 부평초를 걷어 내게 하고 보니, 꽃 그림자가 거꾸로 비쳐서 위아래가 한 빛이 되어 매우 사랑스러웠다. 인하여 이태백(李太白)해는 붉은 단장 비추어 물속에 밝다.는 시구를 생각하면서 즉시 한 수를 채워 이루려고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그만두었는데, 그 후로 수일 동안 삭신이 아파서 혹 읊조리는 때가 있기는 해도 깊이 생각을 하지 못하는지라, 대략 한때의 정경(情景)만을 써서 후일에 추술(追述)할 장본(張本)으로 삼는 바이다. 쇠하고 병든 꼴이 이와 같으니,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서(代書)하여 전라도의 정 안부(鄭按部)에게 답하다.

주필(走筆)로 대서(代書)하여 개천(開天)의 행재 선사(行齋禪師)가 차()를 부쳐 준 데 대하여 답하다.

남계(南溪)의 총 수좌(聰首座)를 희롱하다.

영월군(寧越郡)에 부임하는 외사촌 아우 김유돈(金有暾)을 전송하고 천수봉(天水峯) 꼭대기에서 짓다.

봉우리 밑의 연못에 연꽃이 성하게 피다.

연꽃을 감상하느라 오래 앉아 있었더니, 아이들이 성중(城中)에서 쌀을 가져다가 밥을 준비하였다. 오후에는 동서쪽 산에서 비가 묻어오는데, 우리가 앉았는 곳에는 비가 오지 않으므로 매우 즐거웠다. 그러나 하인들이 혹시라도 비가 올까 두려워하여 나를 절집 안으로 맞아들이기에, 거기서 먹고 마시다가 밤에야 돌아왔다. 연꽃의 말을 대신하여 짓다.

아침에 읊다.

억정사(億政寺)의 선진 대선사(禪軫大禪師)를 보내다.

충주 목사(忠州牧使) 김존성(金存誠), 판관(判官) 김조(金肇)에게 부쳐 올리다.

용두사(龍頭寺)의 주지(住持) 생공(生公)을 보내다.

천수사(天水寺)에서 거듭 노니는데, 상당군(上黨君) 한공(韓公)이 술을 가지고 찾아 주었다.

천수사의 서쪽 봉우리에 올라서 사방으로 명산(名山)들을 바라보다.

천수사의 대선(大選)이 수박을 대접하다.

천수사 못의 연꽃을 읊다.

이날 밤에 이날의 행적을 기록하다.

용두사(龍頭寺)로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혜구 대선(惠具大選)이 방문해 주다.

설곡(雪谷)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구씨(舅氏)에게 받들어 올리다.

고풍(古風)

아이가, 천태 판사(天台判事)가 나를 맞이하여 재차 연꽃을 감상하고자 한다고 말하므로, 기뻐서 기록하다.

계림 윤(雞林尹) 하 장원(河壯元)에게 받들어 부치다.

수일 전에 천수사(天水寺)의 서쪽 봉우리에 올라 그 뛰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시를 지은 것이 있는데, 그 후 천태(天台)의 스님이 집에 왔기에 그 봉우리의 이름을 물어보니 취적봉(吹笛峯)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인하여 사정(思亭)의 제영(題詠)에 취적봉을 사용한 것이 있는 게 기억났는데, 그 당시에 한번 물어보기는 했으나 잊어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 일이 크게 깨달아져서 마음속으로 혼자 말하기를 그 이름은 전에 들었고, 그 땅은 뒤에 직접 밟아봤으나, 천태의 스님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천수사의 서쪽 봉우리와 취적봉을 하나로 인식하지 못했겠구나. 하고는, 이에 느낌이 있어 취적봉 한 편을 짓는 바이다.

몹시 더워서 스스로 위로하다.

광제사(廣濟寺)의 연못을 재차 읊다.

박연폭포가(朴淵瀑布歌). 더위가 혹심하기 때문에 이를 노래하여 물소리를 이목(耳目)에 접하려는 것이다.

동갑(同甲)인 허 정당(許政堂)이 부임하여 당시의 재신(宰臣)들을 두루 알현하고 인하여 내 집에도 들렀는데, 마침 몹시 더워서 내가 곤히 누워 있던 터라 문밖에 나가서 배읍(拜揖)만 했을 뿐, 감히 만류하지 못했다.

서경(西京)의 대동강(大同江)에는 물고기가 있어 사시(四時)로 손님 접대를 할 수 있거니와, 겨울에는 동어(凍魚)가 있고 여름에는 건어(乾魚)가 있는데, 건어는 일찍이 이시민(李時敏)의 집에서 그 맛을 보아 알고서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병중에 건어를 구해봐도 얻지 못했는데, 지금 승제(承制)의 집에 건어가 있어 어디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요리하게 하여 먹어보니 완연히 예전의 맛이 있기는 하나, 예전의 것보다는 맛이 훨씬 떨어진다. 인하여 단편(短篇)을 짓다.

즉사(卽事)

유동(柳洞) 남대문(南大門) 거리에 음료수와 참외와 과일을 차려 놓고 음악을 연주하여 행인들을 접대하고 있다고 가동(家童)이 달려와서 아뢰므로, 이 사실을 노래로써 기록하다.

새벽에 비가 오다.

이산(伊山) 이 상사(李上舍) 가 우중(雨中)에 찾아와서 장차 서해도(西海道)로 가려 한다고 말하다.

채 수좌(蔡首座)를 보내다.

구재(九齋)에서의 예전 일을 추억하다.

어제 구재에 갔다가 소나무 밑에 앉았다 보니 소나무 그늘이 엷어서 한낮이 되자 열기가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제생(諸生)에게 고하기를 자하동(紫霞洞)에 들어가 서늘한 곳에서 부영(賦詠)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했더니, 제생이 매우 기뻐하면서 길을 인도하였다. 마침내 안심사(安心寺) 앞의 어지러이 흐르는 물가에 이르러 남쪽 언덕에 앉아서 각촉(刻燭)하고 시제(詩題)를 냈는데, 촛불 눈금이 절반도 타기 전에 소낙비가 내리므로 제생들을 거느리고 안심사로 달려 들어가니, 의관(衣冠)은 다 젖었으나 자못 아름다운 풍취가 있었다. 세 제목의 시를 지었는데, 송풍(松風)이란 시제는 내가 명한 것이고, 재상행(宰相行)이란 시제는 광양군(光陽君) 이 선생(李先生)이 명한 것이고, 취우(驟雨)란 시제는 상당(上黨) 한 선생(韓先生)이 명한 것이다. 맨 처음 말을 끌고 와서 나에게 아뢴 이는 지후(祗候) 민안인(閔安仁)이고, 나를 따른 이는 민령 중리(閔令中理)와 내 자식 종학(種學)이었다. 그리고 상당을 따른 이는 그의 아들 상경(尙敬)과 사위 안경검(安景儉)이고, 우연히 서로 만난 이는 전교 영(典校令) 김가구(金可久), 전법 총랑(典法摠郞) 임헌(任獻), 전교 부령(典校副令) 염정수(廉廷秀)였다. 돌아와서는 그대로 쓰러져서 곤하여 누워버렸는데, 깨어나 보니 어제의 일이 참으로 꿈만 같았다. 이에 노래로써 그 사실을 기록하고 나니, 해가 이미 중천에 올랐다.

더위에 지치다.

요즘에 현달한 벼슬아치로서 일 때문에 패한 이들이 많으므로, 앓는 나머지 홀로 앉아서 애오라지 과두음(蝌蚪吟)을 서술하는 바이다.

군자(君子)

기유년 생원시(生員試)의 동년(同年)들이 모여서 새로 승선(承宣)에 임명된 종덕(種德)을 하례하는데, 나는 옆방에 홀로 우뚝 앉아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상주(尙州)의 서신을 얻다.

즉사(卽事)

햅쌀을 보내 준 우 대부(禹大夫)에게 사례하다.

초나흘 새벽에 읊다.

한 상당(韓上黨)과 내가 장차 천태(天台)의 나잔자(懶殘子)를 방문하려면서 짓다.

하인을 시켜 낙타교 밑의 물을 보고 오게 했더니, 건너는 사람의 허리 위에 차더라고 하므로, 이에 쭈그리고 앉아서 또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비가 온 나머지에 쭈그리고 앉아서 짓다.

큰비가 오다.

느낌이 있어 짓다.

익랑(翌廊)

즉사(卽事)

삼가 성탄일(聖誕日)을 만나서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공(廉公),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공(尹公), 길창군(吉昌君) 권공(權公)이 자문(紫門)에 나아가서 하례(賀禮)를 드리려고 하자, 중관(中官)이 나와서 말하기를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도로 사근(私覲)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세 대인(大人)을 수행했다가 중관의 얼굴을 보게 되었으므로, 물러와서 스스로 다행하게 여겨 한 수를 읊어 이루는 바이다.

스스로 읊다.

칠석(七夕)

즉사(卽事)

느낌이 있어 읊다.

권흥조(權興祖) 판사(判事)를 곡()하다.

흥우(興雨)

느낌이 있어 짓다.

즉사(卽事)

붓을 달려 써서 법천사(法泉寺)의 승통(僧統)에게 받들어 부치다.

수정 포도(水精葡萄)를 읊다.

군자(君子)

가을비

7 15일에 짓다.

16일은 순정왕태후(順正王太后) 한씨(韓氏)의 기단(忌旦)이라 왕륜사(王輪寺)에서 재()를 올리게 되었으므로, 도평의사(都評議使)의 공함(公緘)을 받들어 공양(供養)의 비용을 도와서 보태 주고 한 수를 읊어 이루다.

홀로 앉아서 읊다.

나잔자(懶殘子)를 방문하다.

느낌이 있어 읊다.

차운하여 이 둔촌(李遁村)에게 받들어 부치다.

어제 이자안(李子安)과 권가원(權可遠)이 북방(北方)에 보낼 표장(表章)을 지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윤색(潤色)해 주기를 청했는데, 내가 앓은 나머지 문사(文思)가 꽉 막혀버렸는지라, 한 수를 읊어 이루어서 답답한 심정을 풀고자 하는 바이다.

대재(大哉)

영월(寧越)의 아우가 향()과 포()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즉사(卽事)

조용히 앉아서 듣자니, 고양이와 개가 막 서로 싸우려 하는 차에 하녀가 마침 그것을 보고 구해 주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개나 고양이가 모두 사람이 기르는 동물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서로 친하지 않단 말인가. 하고는 묘구투(猫狗鬪) 한 편을 읊어 얻다.

즉사(卽事)

즉사(卽事)

민중옥(閔仲玉)이 연도(燕都)의 태학(太學)으로 돌아갈 때 얻은 시권(詩卷)에 발문(跋文)을 쓰고, 인하여 세 수를 짓다.

새벽에 읊다.

감악 선사(紺岳禪師)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승부탄(乘桴嘆)

햅쌀[新米]

까치가 울다.

말을 돌려주다.

옛일을 생각하다.

참선(參禪)하던 이가 돌아가겠다고 고하므로, 인하여 송광 화상(松廣和尙)에게 부치다.

새벽에 읊다.

장군행(將軍行)

잡영(雜詠)

노 승제(盧承制)에게 하례하다.

스스로 읊다.

환암(幻菴)을 받들어 생각하다.

서송(西松)이 용두사(龍頭寺)로부터 돌아오다.

고의(古意)

유항(柳巷) 댁에서 죽()을 먹다.

아침에 읊다.

한낮에 읊다.

우연히 제하다.

도연명(陶淵明)

스스로 읊다.

광암사(光巖寺)에 곧 이르게 되어 짓다.

환암(幻菴)의 방장(方丈)에 받들어 제하다.

백정 선사(柏庭禪師)의 행권(行卷)에 제하다.

8월 초하룻날 광암사(光巖寺)에서 놀고 밤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어 그대로 쓰러져서 아침까지 잤다.

매미 우는 소리를 듣다.

북정(北庭)

느낌이 있어 읊다.

고풍(古風)

스스로 읊다.

송이버섯을 보내 준 민 지후(閔祗候)에게 붓을 달려 사례하다.

추흥(秋興)

철원(鐵原)의 김 동년(金同年)이 햅쌀을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고 인하여 밤 줍던 흥취를 상기하다.

목은시고(牧隱詩藁) 19

()

작성편(雀聲篇)

느낌이 있어 읊다.

봉선(鋒禪)이란 중을 위하여 인암(刃菴)에 제()하다.

밤에 읊다.

추일(秋日)

홀로 읊다.

즉사(卽事)

광가(狂歌)

일을 기록하다.

육언(六言)

성균관(成均館)을 생각하며 읊다.

스스로 기술하다.

남쪽 교외(郊外)의 옛 놀이를 기억하다.

양벽운(楊碧雲) 노선생(老先生)의 시운(詩韻)에 차하다.

금강산(金剛山)의 중이 와서 말하기를 금년 가을에 산중(山中)에서는 모두 선생(先生)이 반드시 오시리라고 말한다.고 하므로, 한번 웃고 나서 세 수를 읊어 이루다.

가을밤에 짓다.

벙어리 아이를 두고 읊다.

일을 기록하다.

추풍가(秋風歌)

크게 탄식하다.

새벽에 읊다.

즉사(卽事)

한 상당(韓上黨)의 초청으로 함께 집정 대신(執政大臣)을 뵙고 광암사비(光巖寺碑)에 관한 일을 말하고 나서 인하여 두 수를 짓다.

스스로 탄식하다.

8 10일에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가을날을 두고 읊다.

밤에 읊어서 새벽에 기록하다.

어제 상당군(上黨君)과 함께 광평 시중(廣平侍中)을 찾아뵙고 나서 청성시중부(淸城侍中府)로 갔는데, 상당군이 들어가 보고 나와서는 ()이 방금 취하여 쉬고 있는 중이더라. 하므로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화원(花園)으로 가니, 박 척산(朴陟山)이 음식을 대접하고 포도를 따 와서 술을 권하였다. 돌아오다가 권희안(權希顔)을 찾아서 그와 함께 다시 청성부(淸城府)에 갔더니, 공이 술을 내오려고 하기에 내가 취했다고 사양하고 곧장 나와 버렸다. 집에 와서는 잠자리에 들어 그대로 쓰러져서 아침까지 자고 나니, 어제의 일이 어슴푸레 마치 꿈속만 같다. 시 한 편을 읊어 이루다.

밤에 읊다.

연도(燕都)를 생각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잡영(雜詠)

즉사(卽事)

중추(中秋)가 벌써 가까워졌으므로, 회포를 일으켜 읊다.

스스로 읊다.

밤에 읊다.

금주(衿州)

느낌이 있어 짓다.

밤을 읊다.

중추절(中秋節)에 상당군(上黨君)의 누각 위에서 달을 구경하다.

지난밤 일이 생각나서 짓다.

삼각산(三角山) 위의 구름을 바라보다.

할멈을 두고 읊다.

일찍 일어나다.

영해(寧海) 족중(族中)의 서찰(書札)을 얻다.

느낌이 있어 짓다.

새벽에 읊다.

즉사(卽事)

강촌(江村)에 대한 시(). 정무()를 위하여 짓다.

느낌이 있어 짓다.

강동가(江東歌)

()

우연히 강가의 가을이 생각나서 짓다.

들은 일을 기록하다.

8 11일에 서연(書筵)을 열어 신() ()과 신 중화(仲和)가 《논어(論語)》 태백(泰伯)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가서 도를 행하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하느니라.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요,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부하고 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富且貴焉 恥也]라는 대목을 진강(進講)하고 물러 나와서 그 소감을 기록하다.

스스로 읊다.

동계(東界) 황 영공(黃令公)이 연어를 보내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다. 붓을 달려 쓰다.

일을 기록하다. 서연(書筵)의 윤대(輪對)할 일로 사방(辭房)에 있으면서 젓대 소리를 들으니, 인가(人家)가 가까운 때문이다.

장난삼아 제()하다.

23일에 《논어(論語)》 태백(泰伯)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꾀하지 않는 것이다.[不在其位 不謀其政]라는 여덟 글자를 강()하였다.

청풍 태수(淸風太守) 오사충(吳思忠)의 도계 서목(到界書目) 후미에 쓰다.

유항(柳巷)의 누각(樓閣) 위에서 염동정(廉東亭)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동정은 꿩과 동해(東海)의 생선을 가져왔고, 유항의 술은 맛이 아주 좋아서 근래에 없는 것이었다. 취중(醉中)에 또 안 첨서(安簽書)를 함께 방문하자고 약속하였다. 이튿날 한 수를 읊어 이루다.

회포를 서술하다.

흥국사(興國寺) 앞 큰 길거리에 재추(宰樞) 제군(諸君)들이 모여 앉아서 명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판삼사공(判三司公)이 나에게 그 까닭을 말해 주었으니, 대체로 상()께 유모(乳母)를 물리치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즉사(卽事)

새벽에 읊다.

염 시중(廉侍中)이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의 부인 채씨(蔡氏)의 기재(忌齋)를 수정사(水精寺)에서 설행하였다. 이날 나는 염상(廉相) 형제 등 여러 처남들과 함께 직접 남쪽 봉우리에 올라가 산세를 두루 보았는데, 다만 안개 때문에 성중(城中)의 수많은 가옥들을 분변할 수 없더니 안개가 조금 걷히자 참으로 절경이었다. 산을 따라서 신효사(神孝寺)로 내려갔는데, 여기에 영전(影殿)이 있으므로 말에서 내려 수십 보를 걸어가다가 홍문(紅門)을 지나서는 다시 말을 타고 다리 가에 이르러 제공(諸公)과 작별하였다. 그러고는 동정(東亭)과 특별히 성균관(成均館)에 들러 알성(謁聖)을 하고 명륜당(明倫堂) 동쪽 협실(夾室)에 앉아 있노라니, 학관(學官) 3()과 제생(諸生) 2원이 와서 알현하였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 나와서 박 첨원(朴簽院)의 문밖에 이르러 서로 헤어져 각기 돌아갔다.

보광사주(普光社主) 문형(文兄)이 푸른 모시를 보내오다.

용두사(龍頭寺)의 대선(大選)이 서신을 가지고 오다.

승제(承制)의 외구(外舅)가 와서 승제 부부가 주연(酒宴)을 마련하다.

향사(鄕寺)로 글을 읽으러 가는 박생(朴甥)을 보내다.

즉사(卽事)

안동(安東)의 영호루(映湖樓)에서 밤에 술 마시던 일을 추후하여 기록하다.

개천사(開天寺)의 동갑내기 담 선사(曇禪師)에게 써서 올리다.

회포를 서술하다.

하과당(夏課堂)의 옛 놀이를 추후하여 기록하다.

법천(法泉) 스님이 햅쌀을 보내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다.

곡주(谷州)에 부임해 가는 문생(門生) 윤상발(尹商發)을 보내다.

홍엽시(紅葉詩)

염동정(廉東亭)의 좌상(坐上)에서 조문창(趙文昌)이 선왕(先王)께서 권련(眷憐)해 주신 일을 상세히 얘기하므로, 느낌이 있어 기록하다. 이날이 바로 중구일(重九日)이다.

다음 날 들으니, 한유항(韓柳巷)이 자주 사람을 보내서 내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했다고 하는데, 그 까닭은 서로 손잡고 등고회(登高會)를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평상시에는 복건(幅巾) 차림으로 서로 왕래하면서 잠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구일(九日)의 모임은 어찌하여 이렇게 어긋났단 말인가. 한 수를 읊어 이루어 좌하(座下)에 기록해 올려서 한번의 웃음거리로 삼는 바이다.

유항(柳巷)이 주식(酒食)을 가지고 와서 이 늙은이를 먹여 주면서, 오늘은 적전(籍田)의 별장으로 놀러 나가자고 하다.

익화현(益和縣)으로 어버이를 뵈러 가는 극일 상인(克一上人)을 보내다.

즉사(卽事)

김씨(金氏)인 어부(漁父) 친구가 자기 할아버지의 묘()에 명()을 지어달라고 요구하므로, 인하여 네 수를 읊다.

밤에 읊다.

유항(柳巷)을 생각하여 짓다.

이 삼재(李三宰)에게 곡첩지(曲貼紙)를 요구하다.

새벽에 일어나다.

《장경(藏經)》의 법석(法席)을 파하던 날에 짓다.

우연히 쓰다.

새벽에 읊다.

우연히 쓰다.

금사(金沙)의 중을 시켜 오사란(烏絲欄)을 찍게 하다.

풍 선사(禪師)를 기다리다.

조용히 앉아서 우연히 기억해 보니, 구재 도회(九齋都會)에서 촛불에 눈금을 긋고 시()를 짓게 하여 작품의 높낮이를 매겨서 제생(諸生)을 격려하던 것이 또한 한 가지 권학(勸學)의 방편이었다. 내가 16, 7세 때에 해마다 그곳에 있었는데, 첫해에는 4, 5차례 장원(壯元)을 했고, 다음 해에는 20여 차례나 장원을 했다. 그러나 전편(全篇)이 다 잘된 것은 하나도 없었고 다만 한두 연구(聯句)가 다른 이의 작품보다 나았을 뿐이었다. 그 율격(律格)에 어긋난 과외시(科外詩) 또한 1등을 차지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가소롭기만 하다. 격옹도(擊甕圖) 시에 깊은 항아리 물속 하늘을 쳐서 깨뜨리니, 아동의 목숨 온전해진 걸 문득 보겠네. 늠름한 영자를 구하려고 할진댄, 구구한 미물을 어찌 아낄 수 있으랴. 금초관에 웅재 펼 날을 기대할 만했어라, 죽마 탄 것은 송아지처럼 달리던 때였네.[擊分深甕水中天 便見兒童性命全 凜凜英姿如欲救 區區微物豈堪憐 金貂可竢鷹揚日 竹馬相隨犢走年] 하였는데, 그 말구(末句)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 송풍(松風) 시 일련(一聯)에는 범의 포효 소리가 가만히 달을 따라 일어난 듯, 용의 울음소리가 높이 백운 위에 전한 듯하네.[虎嘯暗從明月起 龍吟高入白雲傳]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과외시란 것이다. 또 연병(硯屛) 시 일련에는 새벽 상탑을 에워싼 천 층 산봉우리에서, 한 움큼 물을 갠 창 아래 거꾸로 쏟누나.[曲圍曉榻千層嶺 倒瀉晴窓一掬泉] 하였고, 소지(小池) 시 일련에는 날이 개니 새 그림자가 지나가고, 비가 오니 개구리 소리가 떠들썩하네.[天晴過鳥影 雨暗沸蛙聲] 하였으며, 왕소군(王昭君) 시 일련에는 소매 가득한 향기는 대궐 비단의 나머지요, 경성 미색은 붓끝의 황금에서 변하였네.[滿袖香餘宮裏錦傾城色變筆端金] 하였고, 강창(江漲) 절구(絶句)는 장원(壯元) 이자을(李資乙)이 나를 대신하여 썼는바, 벌창한 강물이 아스라이 공중에 넘실대니, 별을 쳐다보아 겨우 동서를 구분하겠네. 남쪽 마을서 낚시터 잠겼다고 알려오자, 급히 하인 불러 낚시통 걷어오라 하누나.[江漲茫茫遠拍空 仰看星斗覺西東南村走報苔磯沒 急喚家僮卷釣筒] 하였는데, 이 시는 참으로 한적(閑適)한 운치가 있었고, 이공(李公)의 필력(筆力)은 지금도 상상할 만하다. 그 나머지는 다 잊어버렸다. 또 호중연(胡仲淵) 선생에게서 절구를 배울 적에는 한거(閑居)를 읊은 시에 희미한 울타리가 끊어진 산 곁에 있는데, 계곡 꽃은 반쯤 지고 새소리는 한가로워라. 그윽한 사람 흥미는 꼭 타고나는 거지만, 밝은 달 맑은 바람은 암만 써도 안 준다네.[籬落依依傍斷山 溪花半落鳥聲閑幽人興味須天賦 明月淸風不可刪] 하였다. 갑신년(1344, 충목왕 즉위년)에는 박치암(朴恥菴)과 이 월성(李月城)이 동당시(東堂試)를 함께 관장하면서 요청하여 시부(詩賦)를 파하고 고부(古賦)와 대책(對策)을 사용하였다. 그때 나 역시 생각하기를 ()는 곧 사시(四時)의 경치인 풍화 설월(風花雪月)을 읊는 것일 뿐이니, 문장이 어찌 여기에 그칠 수 있겠는가. 하고, 이때부터는 시를 중지하고 짓지 않았으며, 혹 읊는 일이 있더라도 아주 적었다. 요행히 등제(登第)한 이후로는 직사(職事)에 분주하여 또 여기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병을 앓는 나머지에 때로 가시(歌詩)를 읊조리게 되었고, 혹 요구하는 이가 있으면 굳이 사양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마침내 동배(同輩)들로부터 시를 즐긴다는 비웃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시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애오라지 나의 회포를 푸는 것일 뿐이다. 소년 시절의 작품 두어 연구(聯句)를 추록(追錄)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면서, 인하여 한 수를 쓰다.

잠에서 깨어 보니, 밝은 달빛이 창에 가득하므로 인하여 한 수를 읊다.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 뒤편에 핀 국화가 사랑스러우므로 서서 한 수를 짓다.

연일 가랑눈이 내리다.

분재(盆栽)한 소나무를 읊다.

분재한 국화를 읊다.

느낌이 있어 짓다.

처형(妻兄) 권 만호(權萬戶)의 아내 이씨 부인(李氏夫人)의 백일재(百日齋)인데, 어제 눈이 온 관계로 오늘은 일기가 매우 차서 문밖도 나가지 못할 지경이니, 더구나 산길을 어찌하겠는가. 움츠리고 앉아 스스로 슬퍼하면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느낌이 있어 짓다.

즉사(卽事)

산을 유람하다.

기별을 전하여 흥국사(興國寺)의 회의(會議)에 참여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나는 말이 없어 갈 수가 없다.

즉사(卽事)

우연히 속어(俗語)가 기억나서 짓다.

환암(幻菴)이 생각나서 짓다.

유항(柳巷)이 잠시 도성에 들어왔다가 누추한 내 집에 들러주고 또 오늘은 별장으로 나가서 놀자고 말하였으나, 병든 나는 함께 나가서 답답한 속을 후련히 풀어볼 계제가 되지 못하므로, 애오라지 전운(前韻)을 사용하여 스스로 해명하는 바이다.

생각하는 바가 있어 짓다.

용두(龍頭)의 대선(大選)이 황주(黃州)에 가서 새로 절을 얻었다고 말하다.

원명사(圓明寺)에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의 기재(忌齋)가 이르렀으므로 이 시를 짓다.

어제 천태(天台) 나잔자(懶殘子)를 알현하고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새 붓과 헌 붓 5, 6자루 중에서 내가 좋은 것 2자루를 골라 가져왔으므로, 한 수를 읊어서 기록하여 바치는 바이다.

이정(里正)이 성()을 수축(修築)할 정부(丁夫)를 독촉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새벽에 일어나다.

홀로 술을 마시다.

국화를 마주하여 느낌이 있어 짓다.

9 23일 오늘이 바로 현릉(玄陵)의 기단(忌旦)인데, 재연(齋筵)에 참예할 길이 없으므로 홀로 앉아 느낌이 있어 짓다.

즉사(卽事)

강유가(剛柔歌)

고풍(古風)

밤에 읊다.

기일(忌日)에는 시를 읊지 않아서 지금 벌써 입에 가시가 돋친 듯 뻣뻣해졌는지라, 붓을 가져다가 즉시 이루다.

즉사(卽事)

중동(中童)이 이른 새벽에 오다.

밝은 창 앞에서 읊다.

서 개성 영(徐開城穎)은 나와 신사년의 동년 진사(同年進士)인데, 오늘 그가 찾아 주었으므로, 매우 기뻐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안 좌랑(安佐郞)이 아들을 낳다.

민안인(閔安仁)의 관반(官班)을 바꿔 주도록 천거하다.

미치광이 중을 읊다.

흥취를 만나서 읊다.

윤절간(倫絶磵)이 내 집에 들르다.

목은시고(牧隱詩藁) 20

()

단가행(短歌行)

9월 그믐날에 팔구시(八句詩)를 가지고 적전(籍田)에 있는 한 상당(韓上黨)의 별장을 방문하다.

도중(途中)에 읊다.

상당군(上黨君)의 별장에 제()하다.

증지봉(甑池峯) 머리에 잠깐 서서 읊다.

돌아오는 길에 천마산(天磨山) 등 여러 산을 바라보다.

다음 날에 한 수를 제하다.

초겨울

연화지(蓮花池). 손씨(孫氏)가 살았던 곳이다.

느낌이 있어 짓다.

오래 앉다.[久坐]

새벽에 일어나다.

조균(趙鈞)이 선관(膳官)을 시켜달라고 요구했다가 또 해면해 주기를 요구하다.

일을 기록하다.

스스로 읊다.

스스로 읊다.

초겨울이 약간 추워서 인하여 산사(山寺)를 생각하다.

새벽에 안개가 끼다.

조사 종파도(祖師宗派圖)

해가 나오다.

연라자도(煙蘿子圖)에 제하다.

홀로 읊다.

택주(宅主)가 보개(寶蓋)에 예배(禮拜)하고 돌아오다.

밤에 큰비가 내리므로 등불을 켜고 이 시를 짓다.

절구(絶句)

새벽에 일어나다.

새벽에 읊다.

강남 진헌사(江南進獻使) 이 재상(李宰相)은 가관(加官)됨으로 인하여 재비(宰批)가 있었고, 나와 한 첨서(韓簽書)는 현릉비(玄陵碑) 때문에 모두 구직(舊職)에 복관되었으므로, 명일에는 의당 사은(謝恩)을 해야 하기에 느낌이 있어 읊다.

스스로 읊다.

숙배(肅拜)하다.

광암사(光巖寺) 도중(途中)에서 짓다.

밤에 돌아와서 피곤하여 그대로 누워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두 수를 짓다.

관디[冠帶]를 갖추어 예를 거행하고 합좌(合坐)하다.

이날 영안궁(永安宮)으로 이어(移御)하는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다. () 재신(宰臣) 유방계(柳方啓)의 구택(舊宅)이다.

저물녘에 이르러 태후(太后)와 근비(謹妃)가 이어(移御)하다.

보원고(寶源庫)에 합좌(合坐)하였는데, 보원고는 고() 정승(政丞) 한공(韓公) 휘 악()의 고택(故宅)이다. 선왕(先王)께서 일찍이 임어(臨御)했던 곳이요, 내가 처음 밀직(密直)을 제수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 다시 여기에 와서 합좌하니, 감회가 있어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우 정당(禹政堂)에게 나아가 하례하자, 우 정당이 막 나에게 술을 대접하던 차에 오 밀직(吳密直)이 또 와서 인하여 함께 두어 잔을 마시고 이미 취하였으므로, 들어가 우 사재(禹四宰)를 알현한 자리에서는 술을 사양하고 차()만 달라 하여 마시고 석양에 돌아왔다.

광암가(光巖歌)

재추소(宰樞所)에서 진헌(進獻)할 말[]을 고열(考閱)하다.

스스로 읊다.

10 13일에 판밀직(判密直) 배공(裵公) 이 한밤중에 사행(使行) 길을 출발하자 재추(宰樞)들이 그를 전송하려 했는데, 좌시중(左侍中)은 송별 장소를 뒤따라가다가 미처 못 가고 홀로 돌아오므로, 내가 십천로(十川路)에서 시중을 만나 함께 합좌소(合坐所)로 돌아와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재추(宰樞)가 연회(宴會)를 베풀어 축수를 올려서 신궁(新宮)을 하례하다.

밤에 돌아오다.

합좌(合坐)했다가 헤어지려 하는 차에 비가 오다.

저물녘에 배공(裵公)을 대신하여 짓다.

새벽에 읊다.

15일 오후에 햇빛이 구름을 뚫고 나와서 남쪽 창이 매우 밝다.

분발(分發)이 없어 홀로 앉아서 회포를 읊다.

상색(上色)의 답서(答書)가 오다.

어제 술을 가지고 가서 어 판서(魚判書)에게 사례하고 난방(煖房)을 겸하였는데, 그 이웃에 사는 우 정당(禹政堂)이 또 법주(法酒)와 자해(紫蟹)를 가지고 왔기에 함께 약실(藥室)에서 마시고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다.

그 명일에는 나갔다가 늦게야 돌아왔는데, 어공(魚公)이 술을 가지고 와서 대접하므로, 곤드레가 되게 취하여 미친 듯이 읊다.

영빈관(迎賓館)의 누상(樓上)에서 진헌사(進獻使) 이 평리(李評理)가 시를 지어 남기고 작별하여 떠나자, 재추(宰樞)들이 그 시에 차운하여 절하고 보내다.

판삼사(判三司)가 제장(諸將)과 더불어 짐승을 잡아 와서 전별연(餞別宴)을 도와주다.

목 이상(睦二相)이 여러 원수(元帥)들과 함께 길을 출발하는데, 나는 다리에 힘이 없어 말을 탈 수 없으므로 배송(拜送)하지 못하고 홀로 두 수를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즉사(卽事)

새벽에 읊다.

동정(東亭)에게서 배[]를 구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송산(松山)

동문(東門)에서 합좌(合坐)하여 회암(檜巖)의 산수(山水)를 시찰하러 가는 조 오재(曺五宰), 권 좌사(權左使)를 전별하다.

대서(代書)하여 법래(法來)에게 받들어 답하다.

회암(檜巖)

새벽에 읊다.

염 시중(廉侍中)을 배알하고 인하여 동정(東亭)의 집에 들르다.

분발(分發)이 없다.

흥취를 풀다.

새벽에 읊다.

여진 천호차관(女眞千戶差官)이 곧 합좌소(合坐所)를 알현하려 하는 차에 나는 몸이 피곤해서 먼저 나와 도중(途中)에 한 수를 짓다.

한 첨서(韓簽書)가 장차 현릉(玄陵)의 삭제(朔祭)를 거행하려면서 누추한 내 집을 들르다.

전토(田土)를 사급(賜給)하여 현릉(玄陵)의 원당(願堂)인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에 들이다.

새벽에 읊다.

느낌이 있어 짓다.

이 판사(李判事) 가 공사(公事)를 자문해 오다.

여진 천호차래관(女眞千戶差來官)이 토산물(土産物)을 진헌(進獻)할 제, ()이 화원(花園)의 팔각전(八角殿)에 나가서 그 예()를 받다.

어제 명을 받들어, 회암(檜巖)의 산수(山水)를 둘러보고 온 권 좌사(權左使)를 위하여 주연(酒宴)을 베풀어 주려고 하던 차에 마침 사평순위부(司平巡衛府)에서 조 오재(曺五宰) 및 권공(權公)을 초청하여 대대적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연회를 베풀면서 또 사자(使者)를 달려 보내어 나를 초청하였으므로, 깊은 밤까지 매우 즐겁게 마시고 놀다가 술이 너무 과할까 염려되어 도망쳐 나왔더니, 새벽까지도 취기(醉氣)가 아직 있다. 한 수를 읊어 이루다.

합좌(合坐)했다가 과음으로 피곤해서 먼저 나오다.

합좌(合坐)하여 들어가서 동지(冬至)의 하례(賀禮)를 정지하기를 주청(奏請)하다.

조정에서 퇴청하다.

홀로 앉았다.

팥죽[豆粥]

제공(諸公)과 함께 술을 가지고 판삼사(判三司)를 방문하여 난방(煖房)을 베풀어 주다.

이날 비가 오다.

7일에 상()이 신경(新京)에 행행(行幸)하는데, () ()은 도성(都城)에 남아서 병 때문에 행차의 모습도 바라보지 못하고 엎드려 읊조리다가 인하여 한 수를 이루다.

이날 정오(正午)에 햇빛이 구름을 뚫고 새어 나와서 서남쪽이 비로소 개니, 행행하는 즈음에 응견(鷹犬)이 재주를 발휘한다면 천안(天顔)이 기뻐할 것을 상상할 만하다. 신 색은 병 때문에 도성에 그대로 남았는데, 또 문밖에도 나갈 수가 없으므로, 홀로 앉아서 느낌이 있어 짓다.

서곡음(瑞谷吟)

() ()은 삭신이 아파서 말을 타기가 어려운지라, 아마도 행행했던 어가(御駕)가 곧 돌아올 터인데도 길가에 나가 어가를 맞이하여 배알할 길이 없으므로, 서글픈 나머지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정오(正午)에 이르러 눈이 내리다.

허리가 아파서 쭈그리고 앉다.

날이 흐릴 제 홀로 읊다.

성원(省院), 대각(臺閣), 고원(誥院)이 일찍이 구정(毬庭)에서 열악(閱樂)을 베풀 적에 승선(承宣)이 명을 받들고 뒤에 이르자, 시신(侍臣)이 북면(北面)하여 그를 맞이하므로, 승선이 시신으로 하여금 막외(幕外)로 나가서 맞이하게 하고자 하니, 시신이 말하기를 우리들도 명을 받들었으니, 사리상 나가서 맞이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승선 중에는 심지어 복명(復命)만 하고 들어가지 않은 자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김 좌사(金左使)가 승선이 되었던 때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었다. 그 후로는 현릉(玄陵)이 분부를 내려 재상(宰相)도 승선을 맞이하도록 하였으니, 더구나 시신이겠는가. 지금은 우리 아이 종덕(種德)이 명을 받들고 갔는데, 오늘은 또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다.

함양(咸陽) 대이부(大姨夫) 민 판사(閔判事)의 집이 왜노(倭奴)에게 겁략(劫掠)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다.

종학(種學)이 시신(侍臣)으로서 관디[冠帶]를 갖추고 반항(班行)을 따라 음악을 구경하다.

12 12일에 부임(赴任)하자, 낭사(郞舍)에서 주식(酒食)을 베풀어 주므로 약간 거나하게 마신 다음, 차자방(箚子房)에 들어가 주장(奏狀)을 써서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는 물러 나와 두 시중(侍中)을 배알하고 또 마시어 크게 취해서 돌아오다.

이백유(李伯由)의 아버지를 천거하다.

부계(浮階)에서 의식(儀式)의 예행 연습이 있는데, 몸이 피곤해서 참예할 수가 없다.

종학(種學)이 소회일(小會日)에 고원(誥院)에 주식(酒食)을 베풀다.

스스로 읊다.

부계(浮堦)에서 하례(賀禮)를 올리다.

법천대사(法泉大師)의 시를 얻었는데, 거기에 이미 지난 일은 다 무익한 것이지만, 장차 오는 일 또한 알 만하고말고.[已去皆無益 將來亦可知]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이 비록 자신의 일을 말한 것이지만, 실로 내 마음과 꼭 일치했다. 내가 조정에 이름을 올린 뒤로부터 요행히 별 일 없이 늘그막에 이르렀지만, 해온 일들을 되돌아보건대 털끝만큼도 위로 국은(國恩)에 보답한 것이 없으니, 어느 날 갑자기 이 몸이 아침 이슬처럼 죽고 나면 그 나쁜 이름을 남긴 것이 장차 어떠하겠는가. 문득 그 운을 사용하여 생각한 바를 기술하노라.

대회일(大會日)에 밤에 돌아오다.

새벽에 읊다.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두 시중(侍中)이 서쪽 이웃의 길창공(吉昌公)을 방문하자, 길창공이 자기 외손(外孫)인 한 상서(韓尙書)를 시켜서 나를 초청하였으나, 내가 한창 피곤하여 나가지 못하다.

태조(太祖)가 팔관 양회(八關兩會)를 설치한 뜻이 어디에 근본했는지 모르겠으나, 혹자는 말하기를《주림전》의 팔사를 금한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載於珠琳傳關八邪也]고 한다. 그다음 날에 눈이 오므로 기뻐서 짓다.

영월(寧越)의 서신을 얻다.

새벽에 읊다.

법래(法來)가 돌아와서 나를 방문하다.

송엽(松葉)

좌시중(左侍中)을 배알하여 술을 마시고, 다음에는 삼재(三宰)를 배알하여 종학(種學)에게 팔관회(八關會)의 육()을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고서 또 술을 마시고, 사재(四宰)를 배알해서도 앞에서와 같이 사례하고 또 술을 마셨는데, 모두 한 첨서(韓簽書)와 동행했었다. 그런데 돌아올 적에 첨서는 어버이께 저녁 문안차 신택(新宅)으로 가기 위해 작별하고 가므로, 홀로 돌아오는 도중에 읊다.

분발(分發)이 없다.

우연히 쓰다.

()

어제 판서(判書) 정달가(鄭達可), 정윤(正尹) 이광보(李光輔), 판사(判事) 권희안(權希顔), 간의(諫議) 이자안(李子安), 삼사(三司) 이호연(李浩然)이 각기 육식(肉食)을 가지고 와서 나를 대접하고 화기애애하게 한껏 즐기고 떠났는데, 잠이 깨어 보니 밝은 달이 창에 가득하므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광보(光輔)에게 주다.

안 첨서(安簽書)가 동년회(同年會)를 만들었으므로, 내가 장원(狀元) 성역암공(成易菴公), 임 우윤(任右尹)과 함께 연석(宴席)에 나갔는데, 이 지부(李知部)는 오지 않았다. 취해 돌아와서 두 수를 읊어 이루다.

이 지부(李知部)를 희롱하다.

분발(分發)이 없다.

과정마(過庭馬)가 이르다.

문 밀직(文密直)이 방문하여 충정왕조(忠定王朝)의 일을 말하다.

최 사공(崔司公)이 와서 나의 복직(復職)을 하례하다.

종백(宗伯) 홍 상서(洪尙書)가 방문하다.

판서(判書) 윤호(尹虎), 이문(理問) 김구주(金久住)가 술을 가지고 방문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합좌(合坐)하여 간단한 주연(酒宴)을 열었는데, 나는 병 때문에 감히 마시지 못하다.

한 정당(韓政堂)이 좋은 음식으로 종학(種學)의 고원 주석(誥院酒席)을 도와주었는데, 내가 그 일에 대해 즉시 사례하지 못한 것을 사과했더니, 한 정당이 또 술까지 마시도록 권하므로 굳이 사양하고 회향탕(茴香湯)을 마시다.

일성군(日城君) 에 대한 만사(挽詞)

즉사(卽事)

좌시중(左侍中)이 수륙재(水陸齋)의 소어(疏語)를 지어 주기를 청하다.

어젯밤이 바로 경신일 밤인데, 아침까지 실컷 자다.

한홍(韓弘) 동년(同年)에게 받들어 부치다. 장난삼아 짓다.

영해(寧海)의 김 삼사(金三司) 형이 말린 배[乾梨]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임 동년(任同年)이 술을 가지고 방문한 데 대하여 사례하다.

유항(柳巷)의 문생(門生)이 주석(酒席)을 마련하였으니, ()이 첨서(簽書)에 거듭 제배(除拜)된 것을 하례하기 위한 것이다. 나와 염동정(廉東亭)이 부름을 받고 자리에 나갔는데, 천태 판사(天台判事) 나잔자(懶殘子) 또한 초청을 받고 와서 함께 앉아 묘련사(妙蓮寺)의 삼장법사(三藏法師) 당시의 일을 진진하게 담론하여 마지않았다. 취중(醉中)에 그런 얘기들을 듣고 아직도 구속 유풍(舊俗遺風)이 남아 있음을 즐겁게 여겨, 깨고 난 뒤에 그 사실을 기록하는 바이다.

분발(分發)이 없다.

느낌이 있어 짓다.

군자(君子)

강릉(江陵) 최 상국(崔相國)을 받들어 생각하다.

즉사(卽事)

합좌(合坐)

내 친구 정가종(鄭可宗)이 내부 부령(內府副令)으로 부름을 받고 와서 삼사(三司)의 녹패(祿牌)를 얻고 보니, 이미 관고(官庫)를 봉쇄한 뒤라서 녹봉을 받지 못하고는, 녹패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한마디 말을 요구하므로, 인하여 소시(小詩)를 써서 주는 바이다.

()

스스로 읊다.

섣달 5일은 충목왕(忠穆王)의 기신(忌辰)이라, 구산사(龜山寺)에서 재()를 설행(設行)하는데, 재추(宰樞)들이 진전(眞殿)의 뜰아래로 들어가서 숙배(肅拜)하고 물러가므로, () ()이 인하여 느끼는 바가 있어 짓다.

분발(分發)이 없다.

스스로 읊다.

한유항(韓柳巷)이 납향()의 청재(淸齋)에 들어갔는데, 나는 말을 자주 타기 때문에 부정한 것을 부득이 보게 되므로, 감히 직접 가지 못하고 애오라지 졸작(拙作)을 바치는 바이다.

목은시고(牧隱詩藁) 21

()

여흥(驪興)의 전토(田土)를 두고 읊다.

일을 기록하다.

들은 일을 기록하다.

스스로 책망하다.

12 8일은 내 장모(丈母)의 친정 어머니인, 판서(判書) 윤공(尹公) 휘 언손(言孫)의 아내이자 김 학사(金學士) 휘 주정(周鼎)의 따님의 기단(忌旦)이다. 내가 처음 화원군(花原君)의 집에 장가들었을 때만 해도 김씨(金氏)가 아직 건강했었는데, 그로부터 1년 뒤에 작고하여 그의 장례(葬禮)를 치를 때에 나 또한 여러 자제(子弟)들의 뒤를 따라 일을 돌보았으니, 그때가 바로 지정(至正) 병술년이었다. 이날을 당하여 걸식승(乞食僧)들을 초치해서 간략하게 천복재(薦福齋)를 설행하고, 시 한 수를 기록하여 자손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는 바이다.

시중(侍中)이 출사(出仕)하지 않아서 합좌소(合坐所)로 나가지 않고, 이 밀직(李密直) 과 이 상의(李商議) 를 알현하러 갔으나 모두 만나지 못하고, 다시 왕 개성(王開城)을 만나러 갔으나 또 손이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고는 동정(東亭)을 찾아가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광평 시중(廣平侍中)을 알현하여 또 마시고 약간 취하여 돌아왔다.

졸시(拙詩) 중에 전권(全卷)을 정서(淨書)하지 않은 것이 이미 옛 초고(草藁) 속에 들어 있지만 이것을 재차 열람할 길이 없었는데, 어느 날 상자 속에서 이미 정서된 것 두어 장을 얻어서 그 차례를 상고해 보니, 그 유실된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어 과연 그것을 찾아내었다. 이에 느낌이 있어 짓다.

술을 가지고 유 상서(庾尙書), 권 상서(權尙書)가 김 판서(金判書) 댁으로 방문했더니, 유 상서가 시를 지으므로 그 운에 차()하다.

돌아오는 도중에 짓다.

합좌(合坐)하여 선사주(宣賜酒)를 절하고 마시다.

새벽에 일어나서 느낌이 있어 읊다.

12일은 근비(謹妃)의 생신이라, 재추(宰樞)들이 예물(禮物)을 올리고 난 다음 권 좌사(權左使)와 함께 교지(敎旨)를 받들어 부명(府名)을 찬정(撰定)하다가 날이 저물도록 올리지 못하다.

스스로 마음 아파하다.

을사년의 문생(門生)들이 와서 술대접을 하는데, 나 홀로 마실 수가 없어 동년(同年) 순흥군(順興君) 안공(安公)과 이웃 어른 한 첨서(韓簽書)를 초청하여 자리를 함께했더니, 장원(壯元) 윤소종(尹紹宗)이 취하여 짤막한 시를 지어 바치자, 제공(諸公)이 모두 그 시에 화답하였다. 명일에 그 시들을 읽어 보니 마치 꿈속만 같다. 한 수를 화답하여 이루다.

즉사(卽事)

분발(分發)이 없다.

벼슬을 구하는 자가 있어 장난삼아 제()하다.

즉사(卽事)

염정수(廉廷秀)의 동상연(東牀讌)엘 가다.

처남 판합(判閤)이 내 집에 와서 우거(寓居)하고 있는 관계로 한 첨서공(韓簽書公)이 주식(酒食)을 가지고 와서 위로해 주므로, 나도 자리를 함께하여 약간 거나해져서 짓다.

용두사(龍頭寺)에서 편지가 와서 종선(種善)이 쓴 큰 글자 한 장을 보다.

박상진(朴尙眞)이 와서 병으로 석 달을 누워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나왔다고 말하다.

절간(折簡)을 광평 시중(廣平侍中)에게 바쳐서 처남 판합(判閤)을 위하여 벼슬을 요구하다.

두 아들이 주식(酒食)을 차리다.

영해(寧海) 김 부사 형(金副使兄)의 아들 계원(系元)이 온 편에 삼사 형(三司兄)의 서신 및 부사(副使)가 보낸 면포(綿布)를 얻고 인하여 한 수를 이루다.

분발이 없다.

군자(君子)

즉사(卽事)

당제(堂弟) 이우량(李友諒)의 서신 및 찻잔 한 쌍을 얻다.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홍씨(洪氏)의 궐원 보충(闕員補充) 청탁에 관한 단목(單目)을 나에게 가져온 자가 있는데, 이는 분명 잘못된 일이라 감히 받을 수가 없다.

김렴(金廉)의 서신을 얻다.

어제 유 판서(柳判書)의 주연(酒宴)엘 갔는데, 그 자리는 곧 그의 자서(子壻)들이 그가 유배되었다 돌아온 것을 추후하여 위로하는 자리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한 수를 읊어 얻다.

곡성부(曲城府)에 매화(梅花)가 반드시 피었을 터인데도 가서 배알하지 못하여 스스로 책망하다.

왕륜가(王輪歌)

스스로 읊다.

일을 기록하다.

회포를 서술하다.

구나행(驅儺行)

종야(終夜) 한 편. 봄이 가까워지는 것을 기뻐하여 지은 것이다.

느낌이 있어 짓다.

이 육재(李六宰) 를 대신하여 짓다.

고락상의곡(苦樂相倚曲)을 읽다.

2 9일에 중국 사신(使臣)이 와서 태후(太后)를 책봉한 조서(詔書)를 개독(開讀)하고, 주상(主上)에게 태위(太尉)를 제수한 선명(宣命)을 반강(頒降)하고, 인하여 매[]와 말[]을 하사하였는데, () ()은 병 때문에 송축드리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엎드려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광암사(光巖寺)에 느낌이 있어 뜻을 말한 것일 뿐이요, 시가(詩歌)를 읊은 것이 아니다.

앞의 운을 사용하다.

3월 초하루가 양파(陽坡) 선생의 기단(忌旦)인데, 깜빡 잊고 제사 돕는 일을 궐행(闕行)하였기에 인하여 그 허물을 기록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3월 삼짇날에 짓다.

절구(絶句)

밤에 비가 오다.

비가 그치지 않으므로, 똑바로 앉아서 회포를 쓰다.

비가 오는 가운데 정원재(鄭圓齋) 를 생각하다.

일을 기록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미쳐서 읊다.

동정(東亭)을 생각하다.

스스로 읊다.

느낌이 있어 짓다.

곡주(谷州)의 산개(山芥)와 염채(鹽菜)를 얻고 사례하다.

유 개성(柳開城)이 밀직(密直)에 제배(除拜)된 것을 하례하다.

안 첨서(安簽書)는 새로 정당(政堂)에 제배되고 그의 장자(長子)는 밀직에 제배된 것을 하례하다.

우연히 제()하다.

박창령(朴昌齡)이 영해(寧海)로 근친(覲親)을 가려고 와서 작별을 고하다.

염상(廉相) 국파(菊坡)가 시를 지어서 주다.

남교(南郊)에 친히 행행하여 대렵(大獵)을 행할 것을 삼가 생각하면서 신() ()이 한 수를 읊어 이루다.

느낌이 있어 짓다.

즉사(卽事)

서신(書信)의 격식을 사용하여 청주 목사(淸州牧使) 에게 받들어 보내다.

느낌이 있어 짓다.

우 평장(禹平章)이 치사(致事)하고 집에 있은 지 오래였는데, 지난겨울에야 비로소 봉군(封君)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병을 앓은 뒤에 다시 정당(政堂)에 임명되고 나서 인하여 우 평장 댁에 들러 시 한 수를 읊기를, 북애의 그윽한 곳에 지내는 우 평장은, 새로 봉작받아서 임금 은총 입었거니, 내 하례 길 너무 늦었다고 성내지 마소, 나는 지금 예전대로 출근 길이 바쁘다네.[北崖深處禹平章 新得分茅荷寵光入賀莫嗔遲太甚 我今依舊趁朝忙]라고 했었는데, 그 후로 벌써 반년이 지났다. 그런데 지금 나 또한 치사하고 봉작(封爵)의 명을 아직 입지 못하여 공()과 입장이 서로 같으므로, 문득 지난번의 운을 사용하여 기록해 바치다.

배꽃에 비친 달을 두고 읊다.

배꽃 아래서 스스로 읊다.

꽃나무를 대하여 읊다.

() 놈이 오다.

배꽃 아래서 또 짓다.

병 때문에 수일 동안 나가지 못했다가, 상당(上黨) 한공(韓公)을 초청하여 서봉(西峯)에 올라 꽃을 완상하고, 집에 이르러서는 또 예안군(禮安君) 우공(禹公)을 초청하여 함께 앉았는데, 이윽고 우공이 우리들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서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한 연구(聯句)를 읊기를, 꽃이 피어 만발하려 하거니, 내 늙었다고 어찌 쓸쓸하랴.[花開將爛 我老豈蕭條] 해 놓고, 술잔 주고받으며 담소(談笑)하느라 미처 편()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술을 가지고 내 집에 찾아온 빈객(賓客)이 있어, 가동(家僮)이 달려와서 아뢰므로, 거기서 작별하고 나와 집으로 달려와서는 또 술을 마시고 몹시 취하여 그대로 쓰러져서 아침까지 자고 한 수를 채워 이루는 바이다. 내 집에 찾아온 빈객은 판도 판서(版圖判書) 정달가(鄭達可), 판합(判閤) 이사위(李士渭), () 좌윤(左尹) 김구용(金九容), 간의(諫議) 이숭인(李崇仁), 사성(司成) 최표(崔彪) 및 문생(門生)인 판사(判事) 최숭겸(崔崇謙), 대호군(大護軍) 염정수(廉廷秀)였다.

스스로 화답하다.

편지를 써서 띠[]를 구하는 것은 장차 비복(婢僕)들에게 비를 피하게 해 주기 위해서이다. 여유가 있다면 허청(虛廳)까지 더 이어서 해 가리기에만 그치지 않았으면 더욱 좋겠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기필할 수가 없다.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스스로 읊다.

군자

즉사(卽事)

오 동년 혁림(吳同年奕臨)에게 부치다.

책상 위에 있는 친구 간에 왕래한 간서(簡書)들을 펼쳐 보다가 정 동년 원재(鄭同年圓齋)가 부쳐 준 3 3일의 기몽시(紀夢詩)를 얻고는 그제야 비로소 내가 아직도 잊고 있는 것이 많음을 증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 부끄러운 나머지, 화답하는 시 한 수를 지어 원재의 좌하(座下)에 기록하여 바치노니, 늑장부린 죄를 용서하기 바라는 바이다.

스스로 읊다.

문생(門生) 윤 곡주(尹谷州) 가 승감초(僧甘草)를 보내면서 편지에 쓰기를, 맵고 단 맛의 풀이 매우 유리(有理)하다. 하였으므로, 인하여 한 수를 지어서 사례하다.

() 내원당(內願堂) 운 귀곡(雲龜谷)이 백련사(白蓮社)에 있으면서 보문사주(普門社主)와 함께 장차 황악산(黃岳山)의 직지사(直指寺)를 중수(重修)하려고 노인(老人)에게 서신을 보내와서 연화문(緣化文)을 요구하다.

한 상당(韓上黨)이 유포(柳浦)의 별장(別莊)에서 노닐다.

느낌이 있어 원재(圓齋)에게 바치다.

동정(東亭)에게 부치다.

낮에 앉아서 짓다.

즉사(卽事)

느낌이 있어 짓다.

원재(圓齋)의 운()을 사용하다.

원재(圓齋)가 또 최양(催釀), 재료(載醪) 등의 말을 썼으니, 이는 바로 나의 뜻을 계발시킨 것이었다.

봄에 느낌이 있어 짓다.

또 읊다.

다시 한 편을 짓노니, 이 또한 진정(眞情)이요 장난말이 아니다.

이둔촌(李遁村)이 검은콩[黑豆] 씨앗을 보내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다.

스스로 서술하여 원재(圓齋)에게 기록하여 바치다.

즉사(卽事)

스스로 희롱하다.

원재(圓齋)를 희롱하다.

원재(圓齋)가 처음 부른 풍() 자 운()의 칠언 고시(七言古詩)를 화답한 것이 무려 열세 수()에 이르렀고, 원재가 지은 것은 또 이보다 더 많은데, 원재의 시 말편(末篇), 내 군사가 지쳤으니 서로 화의하자.[我師老行成]라는 말이 있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이제는 그만두어야겠다. 이것은 겨루는 데에 가까운 일이다. 사양하는 것이 군자(君子)의 도리이다. 하고, 이에 절구(絶句)를 읊어 얻다.

즉사(卽事)

우연히 읊다.

원재찬(圓齋讚). 앞의 운을 사용하다.

나잔자(懶殘子)가 최졸옹(崔拙翁)이 뽑은 동인시(東人詩)를 가지고 와서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므로, 나는 그의 배우려는 뜻이 쇠하지 않았음을 기뻐하여 한 수를 읊어 이루다.

문 앞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날마다 말을 잡아매어 그 껍질이 손상된 데다 벌레가 또 그 속을 파먹어 들어간 지 오래이다. 그러나 봄이 오자 여느 버드나무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노란 싹과 푸른 잎의 하늘거림이 매우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하루는 그리 거세지도 않은 바람이 잠시 불어오자 문득 쓰러져버리므로, 내가 그제서야 비로소 몹시 손상되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그 속을 알지 못하여 조금도 보호해 주지 않았으므로 끝내 이렇게 된 것이다. 인하여 생각건대, 지난해에는 바람이 불어 그 뿌리까지 뽑혔는데도 줄기가 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서 있었던 것이니, 그것은 그 전체가 완전한 데다 또 조밀하게 북돋아 준 때문이었다. 오늘의 바람은 전일보다 거센 것이 아니었는데도 버드나무가 당한 재액은 더 심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하나의 하찮은 식물이지만 명수(命數)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 가지 예닐곱 개를 끊어 심어 놓았으니, 그것이 만일 살아난다면 버드나무 한 그루가 예닐곱 그루로 늘어날 것이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의 한 몸에서 많은 자손(子孫)이 나오므로 제 몸은 비록 죽어도 남은 후신(後身)은 갈수록 많아져서 다시 몇 대()를 지나고 나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왔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족보(族譜)를 빠뜨려서는 안 되는 까닭이므로, 대략 두어 구절을 써서 그 의의를 기록하는 바이다.

앞에서 유후(留侯)의 일을 사용하여 원재(圓齋)를 찬()하고, 이제 또 범려(范蠡)의 일을 사용하여 자찬(自讚)하는 바이다.

내가 이미 두 찬을 지었더니 공()이 자조(自嘲)하는 시를 지어 보여 주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또 그 운을 사용하여 지으면서 제목을 의자조(擬自嘲)라 하노라.

근래에 아름다운 시들을 받고 내가 창화(唱和)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모두 허망한 말이나 장난말들이라서 남에게 보일 수는 없거니와, 맨 뒤의 두 편은 공명(功名)에 뜻을 두어 스스로 몹시 마음 아파한 것이다. , 선비가 세상에 나서 어찌 공명뿐이겠는가. 곧장 생각한 바를 서술하여 원재(圓齋)를 위해 읊조리는 바이다.

청양(靑陽) 이삼중(李三中)이 나를 방문하고 떠난 뒤에 남양(南陽) 홍 아상(洪亞相)이 또 왔다. 병든 나는 찾아오는 사람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기쁜 판인데, 더구나 고관(高官)이 찾아옴에랴. 이 일을 기록해서 한가히 있는 때의 성사(盛事)로 삼는 바이다.

전편(前篇)은 뜻이 우리의 도()를 일으키는 데에 있었으나, 그것은 워낙 기필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시가(詩家)에 이르러서도 또한 정종(正宗)이 있는 것이므로, 소릉(少陵)으로 결말을 지었으니, 소홀히 여기지 말기를 바라는 바이다.

원재(圓齋)가 또 풍() 자 운()의 시를 지어 나에게 보내 주었는데, 그 서()에 말하기를, 시와 술은 서로 상대적인 것인데, 공이 시로써 나를 가르쳐 주었으니, 내가 감히 술로써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詩酒敵也 公以詩誨僕 僕敢不對之以酒] 하였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술은 내가 즐기는 바라, 아무리 내 붓을 놓아 버리려 한다 해도 마치 손으로 황하(黃河)를 가리는 것과 같아서 그 형세를 막을 수 없으니, 그 흐름을 순히 따라서 인도할 뿐이다. 하고, 이에 또 한 편을 짓는 바이다.

춘만()

유 밀직(柳密直)이 고당(高堂)께 헌수(獻壽)를 하는데, 나는 초청을 받았으나 병 때문에 가지 못하다.

소우(小雨)

원재(圓齋)가 주송(酒頌)을 지어서 보여 주므로, 나는 우리 무리의 출처(出處)를 대략 서술하면서 술 마시는 데로 돌리는 바이다.

하늘이 맑다.

느낌이 있어 짓다.

대이부(大姨夫) 민 판사(閔判事)에게 받들어 부치다.

원재(圓齋)에게 바치다.

정양 동년(鄭驤同年)의 서신을 받아 보니, 내가 거듭 정당(政堂)에 제배된 것을 축하한 것이었는데, 그의 관함(官銜)은 삼사 우윤(三司右尹)으로 되어 있었다. 그의 관함이 높아진 것을 기뻐함과 동시에 내가 이미 사직한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우스워서 절구(絶句)로써 서신을 갈음하는 바이다.

강릉(江陵) 노 사군(盧使君) 을 보내다.

함창 태수(咸昌太守)를 보내다.

스스로 읊다.

개령(開寧)의 송월당(送月堂) 이태로(李太老)가 모시나무로 만든 채찍을 보내 주었으므로, 시로써 사례하다.

비바람에 느낌이 있어 짓다.

유항(柳巷)의 누상(樓上)에서 짓다.

원재(圓齋)가 젊은 시절에 관동(關東) 지방을 순행(巡行)하면서 기관 절경(奇觀絶景)을 남김 없이 시문(詩文) 속에 거두어들였는데, 그 문장이 소탕(疎蕩)하여 신선(神仙)의 풍도와 부도(浮屠)의 기미가 있으니, 그것은 모두 관동 경치의 도움을 받은 때문이다. 지금 그가 보내온 시를 읽어보건대, 나를 따라서 유람(遊覽)할 뜻이 있으니, 대체로 그 고장을 깊이 사랑한 때문에 영가(詠歌) 속에 그것을 표출하게 된 것이다. 또 한 편을 지어서 그의 유람 행차를 재촉하는 바이다.

감진색(監進色)이 와서 청하기에 가니, 이 삼재(李三宰)와 권 상의(權商議)가 또 왔다. 함께 문자(文字)를 상의하면서 술을 서로 권하였는데, 나는 병 때문에 누차 사양했으나 또한 취해 돌아와서 짓다.

우연히 제하다.

즉사(卽事)

정부(正夫) 박 선생(朴先生)이 밀성(密城)에서 오자, 같은 마을의 상당군(上黨君) 한 선생(韓先生)이 주식(酒食)을 마련하여 그를 위로하는데, 나 또한 이 마을에 새로 우거(寓居)하는 사람이라서 약소한 예물(禮物)을 가지고 그 자리에 참석하여 취한 뒤에 읊어서 바치다.

송산(松山)에 올라 노송(老松)을 보고 느낌이 있어 짓다.

앉아서 졸다.

목은시고(牧隱詩藁) 22

()

무가내하가(無可奈何歌)

보덕굴(普德窟)을 생각하다.

우연히 읊다.

장차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고 영해(寧海)까지 가려고 했으나 실천은 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하여 짓다.

여름 갑자일에 비가 오다.

흥취를 풀다.

홀로 읊다.

삼농(三農)

지금 경신년, 동당 감시(東堂監試)의 주사(主司)는 모두가 나와 친후(親厚)한 사이이다. 지공거(知貢擧) 염동정(廉東亭)은 일찍이 나에게서 과거(科擧) 공부를 익혔었고 또 인친(姻親)이기도 하며, 동지공거(同知貢擧) 박 밀직(朴密直)은 선군(先君)의 문생(門生)이기에 그는 나를 일컬어 종백(宗伯)이라고 한다. 감시(監試)의 시원(試員)인 서 승지(徐承旨)는 동년(同年)의 아들인데, 그가 과거 공부를 익힐 적에도 그가 지은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시정(是正)해 주기를 요구했었다. 나는 이제 늙고 병든 지 오래인데, 이런 성사(盛事)를 보게 되어 스스로 매우 다행스럽게 여긴 나머지 한 수를 읊어 이루다.

근우편(勤雨篇)

느낌이 있어 짓다.

앉아서 졸던 중에 이 소윤(李少尹)이 와서, 그의 부친(父親)의 답서(答書)를 받다.

즉사(卽事)

새벽에 일어나다.

양조문학가(兩朝文學歌)

경상도(慶尙道) 하 안렴(河按廉)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일을 기록하다.

한 거자(擧子)가 일과(日課)로 지은 시부(詩賦)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고쳐 주기를 요구했는데, 나는 한창 허리가 아파서 나가 만날 수가 없는지라, 사람을 시켜 그것을 취해다가 다 읽고 나서 짓다.

()을 읊다.

합포만호부(合浦萬戶府)에 대하여 얘기하는 손이 있어, 그를 인하여 느낀 바가 있어 짓다.

어젯밤 내가 한유항(韓柳巷)과 길창군(吉昌君)을 모시고 서봉(西峯)에 올라가 관등놀이를 구경하고, 돌아와서는 피곤하여 그대로 누웠다가 새벽에야 본 바를 추후로 기록하다.

즉사(卽事)

희우편(喜雨篇)

() 북쪽에 있는 배나무를 읊다.

비를 읊다.

아내의 꿈을 기록하다.

스스로 위로하다.

환암(幻菴)을 생각하다.

일을 기록하다.

유거(幽居)

새벽 안개가 끼다.

잡영(雜詠)

일 상인(一上人)이 나를 위하여 시고(詩稿)를 정서(淨書)하고 있는데, 이윽고 그가 《대장경(大藏經)》을 쓸 서원(書員)으로 피선(被選)되었으니, 현릉(玄陵)께 추복(追福)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제조(提調) 제공(諸公)에게 청하여 일 상인을 얻어서 내 시고의 정서를 끝내려고 했다가, 이윽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현릉께 추복하는 일은 내가 밤낮으로 바라던 것인데, 도와주지는 못하면서 도리어 방애를 놓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서원을 각 종파(宗派)에서 차출하는데, 일 상인이 나가지 않으면 남산종(南山宗)에는 사람이 없는 셈이 되는 것이다. 나의 시고를 쓰면 아무리 노고(勞苦)를 해도 보답할 것이 없지만, 《대장경》을 쓰면 국가에서 반드시 그 공을 기록해 줄 것이니, 이것이 비록 상인은 마음 쓰지 않을 바이나, 나의 입장에서는 역시 내 뜻대로 곧장 행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이에 감히 제조소(提調所)에 한마디 말도 내지 못하고, 다만 상인에게 《대장경》을 더욱 잘 써서 국가가 현릉께 추복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면려만 하였다. 한 수를 읊어서 그 사실을 기록하는 바이다.

칠원(漆原) 윤 시중(尹侍中)이 보법사(報法寺)에서 불사(佛事)를 성대하게 거행하는데, 나는 가보려고 했으나 병 때문에 가지 못하다.

즉사(卽事)

유 남경(柳南京)이 방문하다.

경동(敬童)이 밥 달라고 조르다.

철원(鐵原) 김 동년(金同年)이 자기 아들을 성균시(成均試)에 응시(應試)하게 하려고 보내면서 서신을 보내어 나에게 자기 아들을 주사(主司)에게 천거해 주기를 요구하였으니, ()나라 때의 남긴 풍도가 있어 매우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시속의 변천한 상황을 알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한 수를 읊어 이루다.

민자복(閔子復)이 본국(本國) 명현(名賢)들의 시를 보여 주면서 장차 《동인지문(東人之文)》을 이으려고 하므로, 매우 기뻐하면서 인하여 한 수를 제()하다.

스스로 위로하다.

명산(名山)을 유람하면서 노년(老年)을 보내는 일은 옛날의 달사(達士)들도 어렵게 여겼는데, 더구나 우리 같은 소인(小人)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면만하게 우는 꾀꼬리여, 높은 구릉 울창한 숲에 그친다.[綿蠻黃鳥 止于丘隅] 한 데 대하여, 공자(孔子)가 해석하기를, 사람이 새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可以人而不如鳥乎] 하였는데, 나는 지금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여 동해(東海)를 굽어보려고 하면서도 그 일을 이루지 못하니, 새만도 못하기가 그지없다 하겠다. () 이루고 명성(名聲) 얻고도 몸은 물러가지 못하고 있으니, 과연 그칠 곳에 그침을 얻은 것이겠는가. 내가 산을 유람하려는 것은 다만 고적(古迹)이나 찾고 세속(世俗)의 흉금(胸襟)이나 떨쳐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또한 장차 내가 그칠 곳에 그치려는 것이다. 동파(東坡)의 시에는 원컨대 남혼여가를 마치거든, 서로 손 잡고 명산을 유람하리라.[願言畢婚嫁 携手游名山] 하였으니, 이 노인은 오히려 남혼여가 마치기를 기다렸고 보면, 결연코 떠나려는 것은 아니었었다. 그런데 나의 뜻은 결연하면서도 이렇게 머뭇거리고만 있는 처지라, 스스로 슬프기 그지없어 휘파람 불다가 노래도 부르면서 또한 장차 지금 그친 곳에 스스로 그치려고 하노니, 동지(同志)들은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즉사(卽事)

자복(子復)이 또 시집(詩集)을 가지고 왔기에 두어 수()를 읽다 보니, 눈이 시고 몸이 피곤하여 혹 병이라도 발작할까 염려되어 바로 그만두었다. 또 자복이 일차 선()을 해 놓으면 내가 재차 선을 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이렇게만 한다면 내가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한 것도 정밀하지 못할뿐더러 병이 혹 발작할 수도 있으니, 나의 양생(養生)하는 도리에 매우 어긋나는 것이다.

느낌이 있어 짓다.

즉사(卽事)

낭사(郞舍)가 출사(出仕)하여 재집(宰執)을 참배(參拜)하고 나서 인하여 누추한 내 집에 들르다.

흥취를 풀다.

거자(擧子)의 시부(詩賦)를 읽고 느낌이 있어 짓다.

즉사(卽事)

유거(幽居)

느낌이 있어 짓다.

회포를 서술하다.

승지의 집에서 산을 오르다.

원중(園中)에서 새들의 소리를 듣다.

어젯밤에 달이 밝자, 한 상당(韓上黨)이 나를 초청하여 함께 누각에 올라가서 간단하게 술을 마시다.

느낌이 있어 짓다.

즉사(卽事)

조계종(曹溪宗)에서 선불시(選佛試)를 열어 법계(法階)에 오른 이를 얻었다는 말을 듣고 판사(判事) 대선사(大禪師)에게 부치다.

고풍(古風)

느낌이 있어 짓다.

아양편(峩洋篇)

앉아서 졸다.

자복(子復)이 또 두어 편()을 읽는 동안에 나는 피곤하여 읍()하고 물러 나왔다가 이윽고 짓다.

자복(子復)이 법주(法酒)와 말린 석수어(石首魚)를 대접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즉사(卽事)

비를 대하여 짓다.

자복(子復)이 보내 준 고기와 술을 얻고 인하여 여강(驪江)의 흥취를 일으키어 단가(短歌)를 짓다.

허우헌(許迂軒)이 초계(草溪) 객사(客舍)의 굽은 소나무에 제()하기를, 공명의 굴레 못 벗어난 이 백발 늙은이가, 허리 안 굽힐 데 굽힌 건 시속 바람 때문인데, 세상일과 상관없는 저 푸른 수염 늙은이는, 뉘에게 잘보이려고 매양 몸을 굽힌단 말인가.[未脫名韁白髮翁 折腰非處爲時風不關世事蒼髥叟 悅眼何人每鞠躬]라고 하였으므로, 삼가 그 운()에 차하여 그 시의 뜻을 밝히는 바이다.

우중(雨中)에 정원재(鄭圓齋)가 시를 지어 주므로, 그 운에 차하여 붓을 달려 쓰다.

앞의 운()을 사용하다.

밤비가 내리다.

일찍이 사은숙배(謝恩肅拜)한 삼중대광(三重大匡)의 관함(官銜)을 우연히 열람하다가 장난삼아 제()하다.

시부과(詩賦科)가 설치된 데 대하여 느낌이 있어 짓다.

호가(浩歌)

즉사(卽事)

삼중대광가(三重大匡歌)

일을 기록하다.

새벽에 일어나다.

한양 부윤(漢陽府尹)으로 나가는 유 밀직(柳密直)을 보내다.

인하여 옛날 삼각산(三角山)에서 놀았던 흥취를 상기시키다.

문생(門生)이 반과(盤果)를 베풀다. 민자복(閔子復)의 동방(同榜) 제공(諸公)이 그들의 은문(恩門)인 동정(東亭)을 위하여 장차 연청(宴廳)에서 연회(宴會)를 베풀려고 하는데, 이는 후문생(後門生)을 연향(宴饗)하기 위한 것이다. 그 자상한 내용을 나에게 물었으나 나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참여하지 못하고 시()로써 그 사실만 기록하는 바이다.

느낌이 있어 짓다.

스스로 읊다.

자책(自責)하다.

절구(絶句)

즉사(卽事)

자복(子復)에게 주다.

여름날에 앉아서 이애곡(李艾谷)의 시집(詩集)을 읽다. 그의 손자인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 좌윤(左尹) 복시(復始)가 서신과 함께 보내 준 것이다. 흔연히 한 수를 제()하여 부치는 바이다.

비서(祕書) 김지(金祉)를 생각하다.

새벽에 일어나다.

독시행(讀詩行)

스스로 조소하다.

우제(偶題)

동년(同年) 이몽유(李夢游)가 내방하여 담화하던 중에 낙성군(洛城君) 김공 선치(金公先致)의 정원에 모란꽃은 이미 졌고 작약꽃은 한창이더라는 것을 언급하고, 또 날마다 김공을 모시고 바둑을 두었다고 스스로 말하므로, 나는 자신도 모르게 흥취가 발동하여 세 수를 읊어서 기록하여 바치는 바이다.

느낌이 있어 짓다.

낮에 앉았다.

꾀꼬리 소리를 듣다.

평주(平州)에서 돌아온 사람이 있어 주명(州名)을 듣고 기쁜 생각이 들다.

()에게 반명(盤銘)이 있었는데, 태공(太公)이 그것을 부연한 것이 많았으니, 지명(地名)에 비하면 더욱 절실한 것이다. 인하여 한 수를 짓다.

스스로 책망하다.

자부(自負)하다.

서해(西海) 김 안렴(金按廉)으로부터 순채[]와 생선을 얻은 데 대하여 대서(代書)로 사례하다.

부질없이 이루다.

창화(昌和) 안 정당(安政堂)이 종손(宗孫) 계림군(雞林君)과 함께 술을 가지고 방문하여 말하기를, 주금(酒禁) 25일로 한정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와서 위로하는 것이다.라고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정당공(政堂公)은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겸했으니, 이것이 비록 헌부(憲府)에서 아뢸 일은 아니지만, 그 금지(禁止)하는 것은 헌부에서 심력(心力)을 써야 할 일이거니와, 금지는 반드시 엄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된 것을 애처롭게 여겨서 온 것이고, 계림군은 또 나를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와서 나의 곤궁함을 위로해 주는 것이리라. 하고, 이에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실컷 마신 다음 취하여 한 수를 쓰다.

스스로 화답하다.

낙성군(洛城君)이 동년(同年) 이몽유(李夢游)를 달려 보내서 나를 초청하므로, 가서 꽃을 구경하고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용두사(龍頭寺)의 대사(大師)에게 부치다.

25일을 기한으로 주금(酒禁)이 시작되었으므로, 술을 전송하는 것이 마치 사람을 전송하는 데 있어 서로 헤어지는 즈음에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각각 등을 돌려 달려가는 것처럼 되었으니, 비록 서로 만날 기약은 조석 간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지만, 회포의 언짢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목은 늙은이는 몹시 가난하여 마치 사람이 사람을 전송할 때에 한갓 당부의 말만 주는 것처럼 되었으니, 국 선생(麴先生)은 이 늙은이를 용서할지어다.

일을 기록하다.

스스로 희롱하다.

국생(麴生)이 전일(前日)에 길을 떠날 제 온 도성(都城)이 나가 전송을 했는데, 이날 해가 저물어서 미처 전송하지 못하고 그다음 날에야 추후로 전송한 이도 많았다. 나는 국생에 대해서 비록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에게 전혀 뜻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입장인데, 병 때문에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끝내 그의 떠나는 행색(行色)을 바라보지 못한 채 한 수를 읊어 이루노니, 후일에 국생이 조정에 돌아오거든 의당 그를 위하여 외워주련다.

느낌이 있어 짓다.

잠부(蠶婦)

초동(樵童)

농부(農夫)

어자(漁者)

연명(淵明)

스스로 읊다.

소낙비가 오다.

절구(絶句)

낭랑하게 읊다.

백운(白雲)

민자복(閔子復)이 해채(海菜)를 보내오다.

목은시고(牧隱詩藁)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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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6일에 서린(西鄰)의 길창군(吉昌君)이 빈객(賓客)에게 연회(宴會)를 베풀었다. 영문하(領門下) 곡성공(曲城公)과 문하 시중(門下侍中) 칠원공(漆原公)은 한중앙에 앉아서 남쪽을 향하고, 정 계림(鄭雞林)과 연로한 한 정당(韓政堂)은 동편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였으며, 창녕군(昌寧君) 성공(成公)과 연소한 한 정당(韓政堂)은 서편에 앉아서 동쪽을 향하고, 주인(主人) 길창군은 남쪽에 앉아서 북쪽을 향하였는데, 나는 연소한 한 정당 아래에 앉았었으니, 이는 연치(年齒)의 차례로 앉은 것이었다. 전 개성 윤(開城尹) 권희문(權希文), 전 군부 판서(軍簿判書) 권희천(權希天), 전 판사(判事) 권희안(權希顔) 삼 형제는 주인공(主人公)의 조카들이고, 상당(上黨) 한공 맹운(韓公孟雲)과 판사(判事) 권현(權顯)은 주인공의 아들과 사위인데, 모두 자제(子弟)의 예를 갖추어 행동거지를 오직 삼가서 하였다. 이때 원로(元老)들은 모두 칠순 이상이었으나, 유독 창녕군이 63세이고 연소한 한 정당이 56세였는데, 나 또한 53세로 나이가 가장 아래였기 때문에 속으로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다음 날에 비가 오므로 기뻐서 이를 노래하는 바이다.

느낌이 있어 짓다.

흥취를 풀다.

번민하다.[悶悶]

이 상의(李商議) 가 병으로 휴가를 얻어 집에 갔는데, 번거로움을 끼칠까 염려되어 즉시 문병(問病)하지 못했다가, 오늘에야 가 보려고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말을 타고 다닌다고 하였다. 대단히 기쁜 나머지 스스로 나의 게으름을 조소하면서 한 수를 읊어서 기록하여 바치는 바이다.

동년(同年) 박 판서(朴判書)를 위하여 그가 거주하는 국간(菊澗)에 기록하다.

양화원(養花員) 임무(林茂)가 와서 원중(園中)의 화목(花木)들을 점검하다.

세사(世事)

취향(醉鄕)

삭신이 아프다.

광암사(光巖寺)를 생각하다.

새벽에 일어나다.

왕풍(王風)

느낌이 있어 짓다.

탄식하다.

어제 가동(家僮)을 보내 이 상의(李商議)의 문에 가서 공()이 접객(接客)하는지를 물어보게 하였으니, 그것은 장차 나아가 뵙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지기가 우리 가동의 몹시 비루한 모습을 보고는 속여 말하기를, 우리 공께서는 말을 타고 나가셨다.고 하였다. 가동이 달려와서 그 사실을 아뢰므로, 나도 역시 그 말을 사실로 믿고 즉시 팔구(八句)를 엮어서 문병(問病)이 늦어진 죄를 사과했더니, 가동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공께서 말을 타지 않았더라. 하므로,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던 중에 공이 또 나에게 고기를 보내 주었는지라, 앞의 운()을 사용하여 또 한 수를 짓다.

교주(交州) 박 염사(朴廉使) 회장(會長)이 말린 고기[乾腊]를 보내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고 인하여 애밀(崖蜜)과 야물(野物)도 보내 주기를 요구하다.

성긴 비가 오다.

허리가 아프다.

이른 아침에

귀의(歸依)하다.

성균관(成均館)에서 선비들을 시험 보이다.

조용히 앉아서 읊다.

일을 기록하다.

사리를 아는 놈이라.[解事漢]

성균시(成均試)를 보이던 날

비가 오다.

민 여강(閔驪江)이 도성(都城)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다.

단오일(端午日)에 성묘(省墓)할 전물(奠物)을 우리 집에서 차례에 따라 삼가 준비하였고, 민형(閔兄)이 마침 환경(還京)하여 권 판서(權判書)와 함께 가는데, 나는 흐린 날씨 탓에 삭신이 아파서 참여하지 못하고, 앉아서 한 편을 제()하여 자손(子孫)들을 경계하는 바이다.

옛날에 놀던 일을 생각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단오일에 격구(擊毬)를 파()했다는 말을 듣고 짓다.

절구(絶句)

단오일에 재추(宰樞)들이 격구를 구경하였다. 큰길가에 채붕(綵棚)을 걸고 격구를 하는데, 무릇 격구하는 이들은 모두 상()께서 낙점(落點)한 사람들이고 낙점받은 이가 아니면 감히 참여할 수 없으므로, 이 때문에 재상(宰相)도 나가서 격구를 하는 이가 있었다. 나는 상당군(上黨君)과 함께 저자 옆으로 가서 신평군(新平君)을 만나 시루(市樓)에 올라가서 구경을 하였다. 그다음 날에 비가 오므로 기뻐서 노래하다.

자복(子復)이 왔는데 몸이 곤하여 나가서 응접할 수가 없었다.

6일에 장난삼아 제()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회포를 서술하다.

서해 염사(西海廉使)가 산약(山藥), 애밀(崖蜜), 등유(燈油)를 보내 준 데에 사례하다.

고의(古意)

5 7일에 서 승제(徐承制)가 진사시권(進士試券)을 고열(考閱)하여 올리자, 상께서 편전(便殿)에 임어하여 봉함(封緘)을 뜯은 다음,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방()을 써서 이름을 부르게 하였다. ()은 피곤하여 그런 성대한 일을 가서 구경할 수 없어 한 수를 읊어 이루다.

날이 갬을 기뻐하다.

내가 옛날에

청풍(淸風)

김 사공(金司空) 에게 부쳐 올리다.

신급제(新及第) 진사(進士)들이 학관(學官)을 알현한 다음 문묘(文廟)의 알성례(謁聖禮)를 마치고 나면 서로 다투어 문을 나가므로, 심지어는 장원(壯元)이 막 대성전(大成殿)에 들어가 향()을 올릴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달려 나가버리는 일이 있기까지 하는데, 이는 뒤에 나가는 자는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고 또 일찍 죽는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계사년(1353, 공민왕2) 문과(文科)에서는 내가 외람되이 장원으로 뽑혔으므로, 제공(諸公)에게 의논하기를, 우리들은 글을 읽었으니, 처신하는 데에 스스로 예가 있는 것이다. 성인(聖人)의 영령(英靈)이 마치 머리 위에 계신 듯한데, 감히 비례(非禮)를 범해서야 되겠는가. 하니, 제공이 모두 그렇다. 오직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므로, 이에 전정(殿庭)으로 들어가서 일제히 한 번 쌍배(雙拜)를 올린 다음, 나 혼자 전상(殿上)에 올라가서 한 번 쌍배를 올리고 배위(配位)에 예까지 모두 마친 다음 천천히 전정으로 내려가니, 동서 편의 행례자(行禮者)들이 모두 오므로, 이에 또 한 번 쌍배를 올렸다. 그리하여 예를 다 마치고 물러 나올 때는 족적(足跡)이 질서 정연하게 서로 이어졌고 감히 한 걸음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였다. 문을 나와서는 말을 타고 천천히 연복사(演福寺)에 이르러 연치(年齒)의 차례대로 예를 행하였다. 이로부터는 진사 급제자들이 문묘를 참알(參謁)할 때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계사년의 일을 끌어대서 다시 서로 맹약을 질정하였고, 심한 경우는 약서(約書)를 만들어 거기에 서명(署名)을 해서 그 맹약을 더욱 확고히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되면서 점차 그 처음의 풍습으로 돌아가고 있으므로, 보는 이들이 한스럽게 여기는데, 지금 신진사(新進士)들은 문묘에 예를 거행할 적에 과연 어떻게 할는지 모르겠다. 충정을 억누를 수 없어 소리 높이 읊어서 한 편을 이루는 바이다.

종손(宗孫)이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였으므로, 하례를 올리고 시를 지어 남겨 두다.

즉사(卽事)

새 누에고치를 읊다.

느낌이 있어 짓다.

덧없는 인생

그만이로다.[已矣]

포어행(捕魚行)

도적이 이르다.

신진사(新進士) 3인이 와서 참알(參謁)하는데, 공장(公狀)만 있고 관디[冠帶]는 없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왔으니, 이는 예()가 겨우 조금 있는 것이요, 예의 큰 변()이기도 하다. 대체로 방방(放榜)한 다음 날에는 관디[冠帶]를 정제하고 참장(參狀)을 갖추어 숙배하고, 그다음은 승선(承宣)과 중방(重房)을 참알하고, 그다음은 성대(省臺)를 참알하고, 그다음은 성균관에 가서 알성(謁聖)을 하여 모두 3일 만에 마친다. 그러고 나서는 조삼()을 입고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 두 대열(隊列)을 만들어서 문반(文班)의 제군(諸君)과 재추(宰樞)들을 알현하는 것이 바로 일정한 규정이다. 그런데 지금은 대열을 3인으로 그쳤으니, 3인으로 나눌 경우 그 전체 숫자가 30여 대열에 이를 수 있을 터인즉, 문반의 제군과 재추들이 어찌 이렇게 많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동서(東西)의 두 대열로 나누어 온 사람이 겨우 3인뿐이라면 이는 또 선진(先進)을 어찌 이렇게까지 경멸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다 못해 한 수를 읊어서 후과 진사(後科進士)들에게 선진을 예로 알현하는 법이 되게 하는 바이다. , 내가 우리 무리들에게 기대하는 지극한 정을 그 누가 알아줄꼬.

5 12일 조반(朝飯) 때에 점군색(點軍色)의 공함(公緘)을 받고 보니, 이달 10일에 연복사(演福寺)에서 점군(點軍)을 한다는 것이었다. 벌써 2, 3일이 지난 뒤이니 장차 누구를 책망한단 말인가. 국가의 대사(大事)를 이렇게 해서야 되겠는가.

비가 오다.

화엄종(華嚴宗)의 혜침(惠砧) 대선(大選)이 종선(種善)에게 부탁하여 시를 요구하다.

즉사(卽事)

스스로 탄식하다.

참치가(參差歌)

회포를 너그러이 하다.

새벽에 일어나다.

맷돌을 읊다.

방아를 읊다.

솥을 읊다.

들꽃[野花]을 읊다.

김 동년(金同年)을 위하여 명지(名紙)를 구해 얻었는데, 정언 최함(崔咸)이 그 겉봉에 희() 자를 써서 보내다.

점군색첩(點軍色貼)에 의하여 좌창(左倉)에서 제군(諸君)과 재추(宰樞)들에게 봉록(俸祿)을 지급하였다. 이런 일은 전에 들어 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기록하는 바이다.

내가 병석에 누운 이래 후한 봉록을 받는 것은 벼슬이 높은 소치라고 스스로 생각하여 이에 치사(致事)를 했는데, 이윽고 또 봉군(封君)이 되어 지금까지 봉록을 받아왔다. 그래서 이것을 사양하고 받고 싶지 않았으나, 또 남들의 비난을 받을까 염려되어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억지로 남들이 하는 대로 따른 지 오래였다. 그런데 경신년(1380, 우왕6) 5 13일에는 봉록을 반사(頒賜)하는 창관(倉官)이 점군색첩에 의하여 봉록을 지급하므로, 나는 받지 못하였다. 이것이 실로 나의 본심에 합치하므로, 시를 지어 그 사실을 기록하는 바이다.

스스로 탄식하다.

가동(家僮)을 보내어 군기(軍器)를 갖추어서 군선(軍船)으로 가도록 하다.

즉사(卽事)

가동을 군선으로 내보내고 인하여 짧은 노래를 짓다.

우중(雨中)에 과거장(科擧場)을 상상하다.

인하여 느낀 바가 있어 짓다.

이 지부(李知部) 를 생각하며 짓다.

권 상의(權商議) 를 받들어 생각하다.

앉아서 탄식하다.

욕여하행(欲如何行)

해상(海上)

앉아서 자다.

등과록(登科錄) 후미에 쓰다.

느낌이 있어 짓다.

민 판서(閔判書)의 부인 안씨(安氏)에 대한 만사(挽詞)

김유양(金有暘)을 만류하다.

고풍(古風)

느낌이 있어 짓다.

아이종[童奴]에게 뜨락의 풀을 매도록 책임 지우다.

초장(初場)의 방방일(放榜日)에 짓다.

치화(梔花)

잡초를 맬 때에 푸른 이끼도 많이 깎여 나갔는데, 처음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가, 손님 응접차 대청에 나가서 그것을 보고는 마음이 아파서 조창태(弔蒼苔) 한 편을 짓는 바이다.

즉사(卽事)

주일(晝日)

일찍 일어나다.

스스로 조롱하다.

스스로 읊다.

중장일(中場日)에 짓다.

죽망 모자(竹網帽子)에 장난삼아 제()하다.

()

회암사(檜巖寺)로부터 온 이가 있어 그를 인하여 짓다.

중장(中場) 방방일(放榜日)의 새벽에 읊다.

주인성(朱印成) 동년(同年)을 생각하다.

강산(江山)

허당가(虛堂歌)

느낌이 있어 짓다.

제위(諸衛)의 오원(五員), 십장(十將)과 제군(諸君), 재추(宰樞)의 품종(品從)들이 도당(都堂)의 행하(行下)를 받아 모두 방환(放還)되었는데, 우리 집의 품종은 심 영공(沈令公)의 배에 있으면서 그의 돌봐줌을 입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나 판서(羅判書)가 상주(尙州)에서 《중순당집(中順堂集)》을 간행하기 위해 나에게 서문(序文)을 부탁하면서 빨리 지어 주기를 요구하였다. 심하다, 그의 시를 좋아하여 세상에 전하고자 함이여.

첫더위[初熱]를 읊다.

지지당가(知止堂歌)

즉사(卽事)

과거장(科擧場)의 제삼장(第三場)을 생각하다.

명일(明日)에 또 읊다.

김군필(金君弼) 동년은 어느 과()에 급제할까 하고 앉아서 생각하다.

빨래를 하다.[澣濯]

아장(我將)

군자(君子)

가만히 앉아서 읊다.

개구리가 울다.

노옹(老翁)

회포를 서술하다.

풍우행(風雨行)

느낌이 있어 짓다.

과거(科擧) 공부는 폐한 지 오래이면서 자기의 작문(作文)이 합격되기 어려움을 걱정하는 거자(擧子)가 있으므로, 시로써 그 사실을 기록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잡흥(雜興)

() 찬명(贊明)이 전주(全州)로 돌아가다.

느낌이 있어 짓다.

목은시고(牧隱詩藁) 24

()

단가행(短歌行)

부질없이 이루다.

동당시(東堂試)의 급제자를 방방(放榜)하는데, 나는 병 때문에 가서 구경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읊다.

권집경(權執經)의 등제(登第)를 하례하다.

갑신년에 진사(進士)가 된 구사평(丘思平)은 내가 젊었을 때 서로 종유(從遊)했던 사람인데, 그 후 서로 못 만난 지 이미 오래여서 생사조차 모르게 된 지가 오래이다. 그런데 상주(尙州)의 동년(同年) 김직지(金直之)의 말을 들어 보니, 구공(丘公)이 선주(善州) 지현(支縣)의 화곡(華谷)에다 집을 매우 번듯하게 짓고 서재(書齋)를 두어 생도(生徒) 30여 인을 가르치면서 빈객(賓客) 접대도 아주 풍성하게 하더라 하고, 김공은 또 그의 용모가 매우 장대한 데다 먹고 마시기도 잘하더라고 말하고, 또 나에게도 언급이 있었다고 말하므로, 한 수를 읊어 이루어서 김 동년에게 부쳐 올리는 바이니, 웃으며 보아주었으면 한다.

육익정(六益亭)에게 받들어 올리다.

지정(至正) 계사년(1353) 4월에 익재(益齋) 선생과 양파(陽坡) 선생이 공거(貢擧)를 주관했는데, 연향(燕享)은 없었고, 내가 동년(同年)들과 함께 행렬(行列)을 이루고 있다가 파하고 나서는 곧바로 집에 가서 쉬었으니, 매우 쓸쓸하였다. 을미년(1355)에는 남촌(南村) 이 정승(李政丞)과 성동(星洞) 안 정당(安政堂)이 공거를 주관했는데, 이때 이공(李公)의 고모는 바로 기 황후(奇皇后)의 어머니였으므로, 인하여 수상(壽觴)을 올린 때문에 두 학사(學士)는 모두 연향을 베풀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하면 열에 일고여덟은 줄인 셈이었다. 정유년(1357)의 과거에는 이초은(李樵隱)과 김사정(金思亭)이 공거를 주관했는데, 이초은은 연향을 간략하게 베풀었고, 김사정 또한 그와 같이 하였으되, 다만 일수(日數)가 많았을 뿐이다. 경자년(1360) 과거에는 김 사재(金四宰)와 한 상의(韓商議)가 공거를 주관했는데, 이들은 대략 예전의 규모가 있었다. 임인년(1362)에는 대가(大駕)가 청주(淸州)에 있었는데, 홍양파(洪陽坡)와 유 상의(柳商議)가 공거를 주관했는바, 계사년처럼 연향이 없었다. 을사년(1365)에는 이초은이 재차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내가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으며, 기유년(1369)에도 그와 같이 하였다. 신해년(1371)에는 내가 지공거가 되고, 전 정당(田政堂)이 동지공거가 되었다. 갑인년(1374)에는 이 평리(李評理)와 염 정당(廉政堂)이 공거를 주관했는데, 모두 연향을 베풀지 않았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말하는 이들이 양파에게 허물을 돌리고 다시 연향을 베푼 것이 지금 두어 차례 과거에서 시행되었는데, 적지 않은 비용을 소비했으므로, 말하는 이들이 또 이를 그르게 여겨 다시 기유년 과거 때처럼 할 것을 청하였다. 이윽고 또 지금 경신년(1380)의 주사(主司)들은 모두 어버이가 생존하여 의당 헌수(獻壽)를 행해야 하는데, 성균시원(成均試員) 서 승지(徐承旨)는 부모가 향리(鄕里)에 있는 관계로 계사년처럼 하기를 청하였고, 염공(廉公)과 박공(朴公)은 모두 어버이를 모시고 있는 터라서 옛 규정에 따라 연향을 베풀었다. 내가 염공에게는 인친(姻親)이 되고, 박공에게는 종백(宗伯)이 되는 처지이니, 법으로는 의당 그 자리에 참예해야 하거니와, 앉아서 생각건대 내가 이 연회에 참예한 것은 오직 을미년 안 정당의 한 자리뿐이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 며칠 밤을 삭신이 쑤시고 아파서 잠을 통 붙이지 못했는지라, 관디[冠帶]를 갖추고 존장(尊長) 앞에서 기거(起居)하기가 어렵겠으므로, 시 한 편을 읊어 이루어 동정(東亭) 좌하(座下)께 삼가 바치오니, 전람(電覽)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곡성 대인(曲城大人) 좌하(座下)께 받들어 올리다.

느낌이 있어 짓다.

헌수(獻壽)

즉사(卽事)

즉사(卽事)

삼가 고율(古律) 두 편()을 이루어 박 학사(朴學士) 좌하(座下)께 받들어 올리다. 전편에서는 박씨(朴氏)의 사성(賜姓)에 관한 사유를 추술(追述)하고, 후편에서는 우리 선군(先君)께서 정해년에 인재를 얻은 성대한 일을 대략 진술하였으며, 중간에는 모두 오늘의 영광에 대한 감사의 뜻을 말하였다. 나는 병 때문에 초청을 받고도 가지 못하니, 열람해 주기 바란다.

새벽에 읊다.

느낌이 있어 읊다.

스스로 읊다.

양전(梁甸) 편을 통하여 안변(安邊)의 장자온(張子溫) 영공(令公)에게 받들어 부치다.

일을 기록하다.

이 선생(李先生)이 가죽신의 재료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동정(東亭)이 성찬(盛饌)을 가지고 방문하였으므로, 시를 지어서 사례하다.

손의 물음에 대답하다.

제현(諸賢)의 시운에 차()하여 이 아원(李亞元)을 하례하고, 그다음은 그의 부친인 둔촌(遁村)에게 부치고, 그다음은 회포를 서술하였다. 모두 세 수이다.

홀로 앉아서 읊다.

밀성(密城) 박언진(朴彦珍)은 내 신사년의 동년(同年)인바, 그를 못 만난 지 지금 10여 년이 되었는데, 오늘 그가 찾아와서 그의 관함(官銜)을 보니 서운관 정(書雲觀正)이었고, 그의 얼굴을 보니 검기는 하나 매우 건장해 보였다. 또 그가 말하기를 양 동년 세신(梁同年世臣)은 늙어서 문밖을 나갈 수는 없으나 아직은 평안하다.라고 하므로, 매우 기뻐서 아울러 기록하다.

스스로 탄식하다.

종이를 가져오게 하여 성랑(省郞)에게 편지를 써서 출사(出謝)하기를 요구하다.

설사[泄痢]가 나서 이중산(理中散)을 요구하다.

어제 동정(東亭)의 초대를 받고 가서 밤중에야 가마에 실려 돌아왔다가, 새벽에 이르러 놀라 깨어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팥죽을 먹다.

교주 염사(交州廉使) 박 회장(朴會長)이 보내 준 애밀(崖蜜)과 오미자(五味子)를 받고 시()로써 사례하다. 붓을 달려 쓰다.

새벽에 읊다.

우곡(愚谷), 익재(益齋) 등 여러 선생께서 귀양(歸養)차 가는 진사(進士) 홍민구(洪敏求)에게 준 시에 발()하다.

새벽에 일어나다.

유매(兪邁)가 그의 좌주(座主)인 광양군(光陽君)에게 죄를 짓고 하소연할 곳이 없자 나에게 와서 그 사실을 말하였으니, 그의 뜻을 관찰하건대 나에게 그의 좌주와 화해시켜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생(門生)은 좌주에 대해서 마치 부자(父子) 사이와 같은 것이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죄를 짓고서 어찌 제삼자에게 부탁하여 화해를 구할 수 있겠는가. 다만 조석(朝夕)으로 간절히 애걸하여 어느 날 갑자기 자애스러운 마음이 발하기만을 기다릴 뿐인 것이다. 내가 일찍이 성균(成均)을 주관했을 때 마침 유매가 제생(諸生)으로 있었기 때문에 내가 차마 스스로 멀리할 수 없어 이와 같이 충고하는 바이다.

산중음(山中吟)

6 10일이 졸옹(拙翁)의 기일(忌日)인데, 그의 사위인 권 판서(權判書)가 승려들을 시켜 재()를 올렸으니, 이것은 향속(鄕俗)이다. 나는 약간의 조의(助儀)를 가지고 가서 제사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기록하다.

옛일을 생각하다.

즉사(卽事)

칠재(七宰) 박보로(朴普老)의 아들 대도(大都)가 자기 아버지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어달라고 요구하다.

절구(絶句)

임술년에 있을 관족사(灌足寺) 미륵 석상(彌勒石像)의 용화회(龍華會)를 주선해 온 한 스님이 나에게 연화문(緣化文)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여 이미 그 글을 지어 주고, 인하여 옛날에 내가 자당(慈堂)을 모시고 진포(鎭浦)에서 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이 절의 법회(法會)에 참여하게 되었던 일과 계묘년 겨울에 향()을 내려 법회를 열게 했던 일이 모두 꿈결처럼 기억이 나므로, 단가(短歌)를 지어서 그 사실을 기록하는 바이다.

박 학사(朴學士)가 특별히 누추한 내 집에 들러서 명일(明日)의 모임에 나와 달라고 초청하고 떠나다.

유두(流頭)가 벌써 가까워지다.

즉사(卽事)

채련곡(採蓮曲). 구씨(舅氏)에게 받들어 부치다.

대서(代書)하여 김 좌윤(金左尹) ()에게 부쳐 올리다.

지리산(智異山)에는 선인(仙人)이나 석자(釋子)가 많으므로, 짧은 율시(律詩)를 지어서 회포를 부치다.

회포를 서술하다.

우연히 제()하다.

박 학사의 석상(席上)에서 읊다.

어제 박 학사의 연석(宴席)에 참예했다가 한밤중에 취해서 돌아왔는데, 오늘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6 15일에는 향인(鄕人)들이 동류수(東流水)에 가서 머리 감는 모임을 하면서 이를 유두일(流頭日)이라 이름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 서로 초청하는 이가 하도 많아서 심지어는 거취(去就)를 결정하기 어려워 망설이던 날도 있었는데, 중년에는 벼슬이 높아져서 대관(大官) 친구가 초청한 게 아니면 나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병을 앓은 이후로는 건강이 조금 괜찮아진 때에도 전혀 초청해 주는 이가 없으므로, 홀로 앉아서 읊조리는 바이다.

배 안동(裵安東)의 도계장(到界狀)에 받들어 답하다. 장난삼아 한 것이다.

느낌이 있어 짓다.

유두회(流頭會)에 대하여 읊다.

서해 안렴사(西海按廉使) 김진양(金震陽)의 서신을 얻었는데, 노루포[乾鹿]를 보낸다고 하였다. 그러나 염주(鹽州)의 붕어[鮒魚] 또한 먹고 싶은 것이기에 인하여 한 수를 지어서 부치는 바이다.

한 좌윤(韓左尹) 동년(同年)의 서신을 얻고 시()로써 답하다.

보덕굴(普德窟)의 중이 좌선(坐禪)의 공량(供粮)에 대한 연화문(緣化文)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다.

새로 지은 누각 위에서 읊다.

흥취를 풀다.

정원(庭園)에 배나무가 있어 6월에 익어서 흔들면 떨어지는데, 그 알이 작기 때문에 상하지도 않고 매우 시고 달아서 맛이 있으므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배를 따서 사문(師門)에 보냈더니, 택부인(宅夫人)께서 별장에 나가시고 안 계셨으므로, 시로써 그 사실을 기록하다.

얼음을 대하여 소리 높여 읊다.

괴화(槐花)

새벽에 비가 오다.

김경지(金敬之)를 생각하여 짓다.

근훤가(芹暄歌)

낮에 앉아서 읊다.

산벌[山蜂]을 두고 읊다.

느낌이 있어 짓다.

적제촌(赤提村)의 농사짓는 하인이 오다.

어제 녹사(錄事)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내일 재추(宰樞)들이 남산(南山)의 암방사(巖房寺)에서 합좌(合坐)하기로 했다.고 하였는데, 새벽에 일어나니 몸이 피곤해서 수행(隨行)하기 어렵겠으므로, 서장(書狀)을 써서 나가지 못함을 사과하고, 인하여 한 수를 읊다.

비가 오다.

종선(種善)의 글 읽는 소리를 듣다.

우연히 제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통도사리기(通度舍利記)의 후미에 쓰다.

스스로 짓다.

매미 소리를 듣다.

낮에 읊다.

느낌이 있어 짓다.

근비(謹妃)가 이어(移御)하는 날 아직 날이 밝기 전에 짧은 율시(律詩)를 읊어 얻다.

어제 궁궐 앞까지 이르러 장차 제군(諸君)을 따라서 숙배하려던 차에, 임시로 정지하고 예()를 받지 않는다는 전지(傳旨)가 내렸으므로, 그대로 돌아와서 피곤하여 누워버렸다.

입추(立秋) 뒤에 비가 오다.

망운가(望雲歌)

해가 나오다.

수원(水原)으로 근친(覲親) 가는 이 진사(李進士)를 보내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읽다.

쪽꽃[藍花]을 읊다.

상주(尙州) 안 병마사(安兵馬使)가 자기쟁반[瓷盤] 다섯 개와 술잔[] 열 개를 보내 주다.

지난달에 입추(立秋)가 들었기 때문에 7 1일에 점차 서늘함이 더해지다.

사과[來禽]를 먹다.

일찍 일어나다.

이 장원(李狀元) 과 함께 가는 용두사(龍頭寺)의 스님을 보내다.

내가 연도(燕都)의 국자감(國子監)에 있을 때, 도성 거리의 남쪽에 셋집 한 칸을 얻어 살았는데, 집이 몹시 더워서 질항아리에 담긴 얼음물로 손과 얼굴을 씻으면서 시()를 지었는바, 그 시의 결구(結句)서글퍼라 강호에서 낚시질하던 손으로, 온종일 질항아리의 맑은 물결을 희롱하네.[惆悵江湖釣竿手 瓦盆終日弄淸波]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병을 앓은 나머지 추위와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데다, 금년 초가을은 더욱 더워서 작은 계집종을 시켜 샘물을 새로 길어오게 하여 그 물을 부채에 뿌려서 부채질을 해 보니, 그 바람이 갑절이나 시원하여 마치 빗방울이 떨어진 것 같아 기골(肌骨)이 상쾌해진다. 그러나 맑은 물결을 희롱함에 비하면 또 그보다는 훨씬 못하다. 맑고 깨끗한 천석(泉石)이 있는 진경(眞境)이 적지도 않으련만, 젊어서나 늙어서나 모두 거기에 흥취만 부쳤을 뿐이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후일에 조물주가 의당 어떻게 나를 위로할런고? 세 수를 읊어 이루다.

6일에 내가 한 청성(韓淸城), 염동정(廉東亭)과 함께 구재(九齋)에서 노닐면서 또 이□□(□□), 정 첨서(鄭簽書)를 초청하여 놀았는데, 나를 수행한 사람은 내 자식 종학(種學)과 문생(門生) 유경(劉敬)이었고, 한 탐화랑(韓探花郞)과 이 교감(李校勘)은 청성을 수행한 사람들이었다. 안심정사(安心精舍)에서 촛불에 금을 긋고 시를 짓게 되었으므로[刻燭賦詩], 그 시제(詩題)안심정사에서 노닐다.[游安心精舍]로 하고, 또 한 시제는 ()라 하였는데, 방방(放榜)을 하고 나서는 교관(敎官)이 주식(酒食)을 대접하므로, 실컷 마시고 먹고 돌아왔다.

7 7일은 주상(主上) 전하의 탄일(誕日)이다.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의 통솔하에 제군(諸君)이 수파(手帕)를 올리는데, 나도 그 뒤를 따라서 예배(禮拜)를 행하고 선사주(宣賜酒)를 마신 다음 종종걸음으로 물러 나왔다. 그러고는 이 판개성(李判開城), 염 봉성(廉蓬城), 한 청성(韓淸城)과 함께 광제사(廣濟寺) 못가의 임 중랑(任中郞) 집에 이르러 연꽃을 구경하였는바, 핀 것은 하나나 되고 아직 안 핀 것은 두셋이나 되는 정도에 그쳤는데, 중랑이 말하기를 아직은 덜 피었으니, 이달 보름 이후가 되면 다 필 것이다.라고 하므로, 이에 다시 후일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돌아오니, 오육화(吳六和) 판서(判書)가 음식을 차려 내오다.

이제정(李霽亭) 선생이 주상의 탄일을 하례하기 위하여 경성(京城)에 들어왔으므로, 그다음 날에 염동정(廉東亭), 한유항(韓柳巷)과 함께 각각 주과(酒果)를 휴대하여 이 개성(李開城) 댁으로 초청을 받고 가니, 이 개성이 성찬(盛饌)을 마련하고 가인(歌人)의 노래와 해금(奚琴) 연주로 권주(勸酒)를 하도록 했는데, 이때 마침 홍 이상(洪二相)이 또 주과를 가지고 와서 실컷 즐기고 파하였다. 다음 날에 그 사실을 기록하다.

서경(西京)의 장상(張相)이 포()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7 9일 새벽에 가랑비가 와서 약간 서늘하여 몸이 가뿐해지다.

양촌권(陽村卷)에 제()하다.

비가 오다.

군자(君子)

참외[甘瓜]를 보내 준 정 영공(鄭令公)에게 붓을 달려 써서 사례하다.

보광(普光)의 형()에게 부치다.

새벽에 읊다.

수박

팥죽

무제(無題)

신해년 회시(會試) 때의 문생 오의(吳毅)가 와서 말하기를 일찍이 규정(糾正)으로부터 판나주목(判羅州牧)으로 나갔다가 지금은 장 서경(張西京) 막하(幕下)의 요좌(僚佐)가 되었는데, 일 때문에 휴가를 청하여 여기에 왔다가 또 곧 서경으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하므로, 그를 전별하려고 술을 가져오게 하였으나 마침 집에 술이 없어 그냥 보내고 나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평원권(平源卷)에 제()하다.

아침에 읊다.

낮에 읊다.

석양에 산보하다.

아침에 비가 오다.

7 15

아침 일찍 일어나다.

느낌이 있어 짓다.

자은 종사(慈恩宗師) 법천 장로(法泉長老)가 나에게 만화방석(滿花方席)을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소우(小雨)

닭이 울다.

얼굴을 씻고 머리를 빗다.

조금 서늘해지다.

원주(原州)의 석() 경전(敬田)이 천태(天台)의 선()에 합격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시()를 요구하다.

어제 조사(詔使)가 도성(都城)에 들어왔다는데, 나는 한창 병석에 누워 있는 터라, 무슨 일로 왔는지 알 수가 없다. 인하여 한 수를 제()하다.

즉사(卽事)

즉사(卽事)

스스로 탄식하다.

임 동년(任同年)이 햅쌀을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남경 영공(南京令公)이 햅쌀을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왜인(倭人)이 목주(木州)를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다.

길창군(吉昌君)이 길을 내므로, 하인으로 하여금 가서 일을 돕게 하다.

나의 생애

나가서 우 평장(禹平章)을 방문하고 인하여 박 판서(朴判書)의 집에 들러서 약간 취하여 돌아오다.

권 판서(權判書)가 군전(軍前)에 있는데, 어느 날에나 돌아올는지 모르겠다.

산중의 포도가 익어서 나무꾼이 따서 가져오다.

내가 옛날에

즉사(卽事)

목은시고(牧隱詩藁) 25

()

바람 불고 비 오는 것을 탄식하다.

바람 귀신에게 고하다. 일장(一章).

햇밤을 먹다.

늙은 농부의 말을 기술하다.

배나무를 읊다.

북사(北使)

가을 더위

가을바람

느낌이 있어 짓다.

7 27일에 계내(契內)의 여러 형()들과 서로 광암사(光巖寺)의 당두(堂頭) 환암공(幻菴公)을 함께 방문하기로 약속했으나, 제공(諸公)은 모두 일이 있어 못 나오고 우윤(右尹) 이서원(李舒原)만이 나와 함께 갔고, 민자복(閔子復)과 종학(種學)은 우리를 뒤따라 이르렀는데, 이 우윤 또한 일로 인하여 석양에 도성(都城)으로 들어가므로, 늙은 나만 거기서 하룻밤을 묵게 되어 앉은 채로 새벽 종소리까지 듣고 잠시 쉬었다가 일어났다. 그런데 감역(監役) 밀산군(密山君) 박공(朴公)이 나에게 환암의 화상(畫像)에 찬()을 하라고 청했으므로, 돌아오는 길에 읊는 바이다.

집에 돌아와 피곤하여 눕다.

29일은 익재 시중(益齋侍中)의 기단(忌旦)이다. 동년(同年) 정 첨서공(鄭簽書公)과 함께 원명사(圓明寺)의 재석(齋席)에 나갔는데, 송 동년(宋同年)은 또 자서(子壻)의 열()에 있으므로, 비록 좌석은 함께했다 할지라도 동년으로 지목할 수가 없고 보면, 익재의 문생(門生)은 우리 두 사람뿐인 것이다. 그러나 정공은 지위가 추밀(樞密)이고, 나도 성재(省宰)로서 봉군(封君)에 올랐으니, 다른 이가 아무리 많은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다만 용부 상의(庸夫商議)가 유고하여 오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역대 과거(科擧)의 장원(壯元)이 연회(讌會)를 베푸는 것을 용두회(龍頭會)라 하는데, 모든 영접하고 전별하고 경하하고 위문하는 일에 있어 예()대로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요행히도 상헌(常軒) 선생이 수년 동안 무양(無恙)하셨으나 일찍이 한번도 연회를 마련한 적이 없었는데, 염동정(廉東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 연석을 마련했었다. 그러나 동정이 과시(科試)를 주관한 뒤에 그의 좌주(座主)인 송 선생 밀직(宋先生密直)의 부름을 받고 가서 동정이 수상(壽觴)을 올리고 이것을 용두회라 이름했으니, 실상은 영친(榮親)의 관례인 것이다. 지금 순중(純仲)은 회장(會長)인 동정의 전() 문생(門生)인데,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나와 동정 및 정 판서(鄭判書), 윤 부령(尹副令), 정 정언(鄭正言)이 각각 주과(酒果)를 가지고 모여서 그를 전별하였는바, 회장은 바로 가장 높은 이라서 각기 한 잔씩을 올리고 파하였으니, 그 한아(閑雅)한 풍류는 또한 한 시대의 성사(盛事)라 하겠다. 나는 병든 지 오랜 몸으로 이런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집에 돌아와서는 그대로 자고 명일에 한 수를 읊어 이루어서 회장 좌하(座下)에 기록하여 바치는 바이다.

왜구(倭寇)가 금주(錦州)에 있다는 소식을 듣다.

절구(絶句)

8 2일에 상()이 친히 행행하여 농사 작황을 관찰하는데, () ()은 행차를 아무리 바라보아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새벽에 일어나니 천기(天氣)가 조금 서늘하므로, 갑자기 관동(關東)의 흥취가 일어나다.

쌍청정(雙淸亭)에 받들어 제()하다.

어제 유항(柳巷) 맹운(孟雲) 선생과 함께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길창군(吉昌君)을 모시고 대내(大內)에 나아가니, 내관 김실(金實)이 내지(內旨)를 전하여 술을 내리었다. 이어서 시중(侍中) 윤 칠원(尹漆原)이 여러 재추(宰樞)들과 함께 또 곡성부원군, 길창군을 초청하여 합좌소(合坐所)로 가게 되어 나와 맹운이 그 뒤를 따랐는데, 합좌소에 가서는 또 간소한 주연(酒宴)을 가졌다. 이윽고 모두 함께 이어소(移御所)로 가서 수리관(修理官)을 위로하고, 또 민천관(旻天觀)에 이르니, 정전(正殿)의 개와(蓋瓦) 공사가 거의 끝나가므로, 그 감역관(監役官)을 위로하고는 각기 해산하였다. 그런데 정당(政堂) 안 선생(安先生)이 나와 맹운 선생을 초청하므로, 그의 집에 가서는 임정(林亭)에 앉아서 주식(酒食)을 차려 놓고 온종일 담소(談笑)를 즐기었다. 이때 주인(主人)이 자기 정자(亭子)의 이름을 청하므로,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두 공부(杜工部)의 심적 쌍청(心迹雙淸)이란 구절을 취하여 그의 요청에 답하고, 그다음 날에 〈쌍청정시(雙淸亭詩)〉를 지었는데, 이제 또 그 운()을 사용하여 전일의 일을 추후에 기록하는 바이다.

대서(代書)하여 햅쌀을 보내 준 이둔촌(李遁村)에게 사례하다.

한 상당(韓上黨)과 함께 윤 밀직(尹密直)을 방문하여 취해 돌아와서 읊다.

새벽에 일어나서 오늘 어가(御駕)가 환궁(還宮)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서 짓다.

삼가 상()이 신궁(新宮)에 입어(入御)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뻐서 짓다.

명일(明日), 상이 신궁에 입어했다가 곧바로 어가(御駕)를 명하여 시좌소(時坐所)로 환어(還御)했다는 소식을 듣다.

새벽에 일어나다.

즉사(卽事)

새벽에 읊다.

동년(同年) 곽 판서(郭判書)가 술을 가지고 방문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민형(閔兄)에게 부쳐 올리다.

새벽에 안개가 끼다.

추흥(秋興)

느낌이 있어 짓다.

새벽에 안개가 끼다.

느낌이 있어 한 수 지어서 백지 염사(伯至廉使)에게 보이다.

새벽에 일어나다.

장 서경(張西京)이 건어(乾魚)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붓을 달려 쓰다.

오찬(午飡)

관군(官軍)이 왜선(倭船)을 나포했다는 소식을 듣다.

재추(宰樞)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숙배(肅拜)하였으니, 세자의 탄생을 하례한 것이다. 그들이 물러 나온 다음에는 제군(諸君)이 숙배하는데, 마침 부원군(府院君)들이 모두 나오지 않았으므로, ()의 품계가 삼중(三重)인 까닭에 사양하지 못하고 반항(班行)의 맨 앞에 서게 되었다. ()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부끄럽기 그지없어 한 수를 읊어 이루다.

가랑비가 오다.

8 15일에 짓다.

중추일(中秋日)에 흐리고 비가 오는데, 날이 개기를 기도하자니 하늘이 스스로 갤까 염려되고, 하늘이 만일 비를 내리려고 한다면 기도해 봤자 또한 응험이 있기를 기필할 수 없으므로, 이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다만 하늘의 명을 따르기로 하였다.

스스로 느낌이 있어 짓다.

오후에 날이 과연 개므로 매우 기뻐서 장차 제정(霽亭)을 찾아뵙고 함께 달을 완상하려면서 앞의 운()을 사용하다.

경상 염사(慶尙廉使)가 은어(銀魚)를 보내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다.

어제 술을 준비하여 제정(霽亭) 선생을 찾아뵈려고 미리 사람을 보내서 동정을 살피게 하였는데, 선생이 성묘(省墓)를 가서 아직 안 돌아왔다고 하였다. 밤이 되어서는 날이 또 흐리고 흥취도 다하여 앉아서 졸다가 깨어 보니, 밝은 달이 창에 가득하였다. 그래서 나가보자 하니 야금(夜禁)을 범하게 되고, 또는 선생이 초청을 받아서 출타를 했거나, 혹은 자서(子壻)들이 후당(後堂)에서 연회(燕會)를 하느라 외부의 손님을 맞기가 어려울까도 싶어서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책력(冊曆)을 가져다 보니, 16일 밑의 주()에 보름[]이라고 쓰여 있어 또 매우 기뻐하였다. 어제의 불행은 곧 하늘이 시킨 것이었다. 달은 반드시 보름이 되어야 둥글어지는 것이요 둥글어지면 지극히 밝은 것이므로, 흔연히 그 사실을 기록하는 바이다.

이날에 이 판사(李判事)의 아들이 문밖에서 제정(霽亭)을 전송하고 인하여 누추한 내 집에 왔으므로, 이에 몹시도 서로 만나기 어려움을 스스로 탄식하면서 한 수를 읊어 얻다.

맹균(孟畇)에게 글을 읽히러 해안사(海安寺)로 보내면서, 앞서 장손 맹유()에게 글을 읽히러 진관사(眞觀寺)로 보낼 때에 지은 시운(詩韻)을 사용하다.

어제 우세군(祐世君)의 유가 도장(瑜伽道場)을 보고 돌아와서 기록하다.

부생(浮生)

백지 염사(伯至廉使)를 보내다.

[]이 없어 나가지 못하다.

민자복(閔子復)이 와서 말하기를 이미 묘학(廟學)의 비석을 얻었으니, 곧 관중(館中)에 비치할 것이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문()을 숭상하는 아름다움이 이와 같으니, 사문(斯文)이 흥기하겠구나. 하고, 한 수를 읊어 이루었으니, 8 19일이었다.

아이들의 장난을 보고 읊다.

돌아가기를 생각하다.

(), (), () 세 원수(元帥)의 수군(水軍)이 개선(凱旋)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병 때문에 교외(郊外)로 마중나가지 못하다.

추일(秋日)

역암(易菴) 성 장원(成壯元)을 곡()하다.

손 밀양군(孫密陽君)을 곡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군자(君子)

부운(浮雲)

유언(流言)

여러 장수들이 도성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도 병 때문에 즉시 나가서 치하(致賀)하지 못하다.

홀로 읊다.

세 원수(元帥)를 차례로 배알하여 공훈 세운 것을 치하하고 돌아와서 홀로 읊다.

느낌이 있어 짓다.

판삼사사(判三司事)가 여러 원수(元帥)들을 거느리고 왜적(倭賊)을 추격하기 위해 곧 길을 떠나려 하는데, 나는 병 때문에 말을 타기가 어려우므로, 망연자실하여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치재(致齋)

마음을 재계하다.

이광보(李光輔) 판사(判事)가 배[]를 요구하다.

회포를 풀다.

삼가 들으니, 분부를 내려 판삼사사를 도성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이 상의(李商議), 변 사재(邊四宰) 등 여러 원수(元帥)들만 길을 떠난다고 하는데, 나는 병이 발작하여 친히 배송(拜送)하지 못하고 한스러운 마음에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하여 짓다.

행삼군가(行三軍歌)

스스로 읊다.

삼가 마필(馬匹)의 반사(頒賜)를 받다.

지신사(知申事)가 상()의 분부를 전해 왔는데, () ()에게 명하여 반궁수조비(泮宮修造碑)를 찬진(撰進)하라는 것이었다.

명일(明日)에 자문(紫門)에 나아가 사은숙배하고 돌아와서 스스로 읊다.

들은 일을 기록하다.

예천군(醴泉君)의 부인 채씨(蔡氏)의 기단(忌旦)에 유 승제(柳承制)의 부인이 수정사(水精寺)에서 재()를 올리는데, 나도 가서 참여하였다. 재를 마치고 나서는 성균관에 들어가 알성(謁聖)을 했는데, 그곳에 한 흑립(黑笠) 쓴 사람이 있었으나 그의 성명은 묻지 않았다. 비석을 보니 귀부(龜趺)가 없었다. 김경지(金敬之)를 방문하여 밀탕(蜜湯)을 마셨는데, 그의 아들 명선(明善)이 탕 그릇을 받들고 왔다. 이어서 권용부(權庸夫) 상의(商議)를 알현했는데, 판서(判書) 박원상(朴元祥)이 뒤따라왔고, 염정수(廉廷秀)는 나를 수행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간단히 술 한 잔 마시고 물에 밥을 말아 먹고 취포(醉飽)하여 돌아왔다. 박공(朴公)은 신선술(神仙術)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연아(演雅)

느낌이 있어 짓다.

현릉(玄陵)께서 친필(親筆)로 그린 파평군(坡平君) 윤해()의 초상(肖像)에 받들어 제()하다.

현릉께서 친필로 그려서 밀직(密直) 윤호(尹虎)에게 하사한 추산도(秋山圖)에 받들어 제하다.

상당군(上黨君)이 누상(樓上)에 주식(酒食)을 베풀었는데, 김경지(金敬之)가 마침 오다.

즉사(卽事)

일찍 일어나서 들으니, 재추소(宰樞所)에서 회의(會議)할 제군(諸君)을 서린(西鄰)의 길창군(吉昌君)이 모두 초청하여 함께 간다고 하는데, 무슨 일을 의논할는지 모르겠다.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재추소에 이르니 제군들은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고, 판문하(判門下)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이하 제위(諸位)는 모두 와 있었다. 오늘 의논하려는 것은 진헌(進獻)에 관한 일이었는데, 곡성부원군 이하 제위가 각사(各司)의 장관(長官)들을 불러서 앞으로 다가오게 하여 그 뜻을 유시하고 그들로 하여금 좌이관(左貳官)들과 함께 그 일을 의논하여 그 결과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고는 이에 당식(堂食)을 간략히 베풀었는데, 나는 의논한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약간 취하여 돌아왔다.

오육화(吳六和) 판서가 나에게 자기 아들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하면서 연회를 크게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임 오재(林五宰)가 또 자기 아들 이름을 고쳐 주기를 청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영제(令第)로 가서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다음 날에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용부(庸夫)가 자기 집에 편액(扁額)을 붙이려면서 그 이름을 나에게 물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선생은 성() 동쪽에 사는데, 정원(庭院)이 깊고도 그윽하고 구학(丘壑) 또한 사랑스러우니, 청컨대 동고(東皐)라고 해 두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용부가 되었다고 말하므로, 이에 시()로써 그 의미를 기록하는 바이다.

보성(甫城) 이자수(李子修) 판사에게 부치다. 《대장경(大藏經)》으로 연화(緣化)하고자 하는 비구(比丘)의 청에 의한 것이다.

느낌이 있어 짓다.

새벽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지붕 위의 서리를 보다.

느낌이 있어 짓다.

익랑(翼廊)의 벽()에 흙을 바르다.

중구일(重九日)이 벌써 가까워지다.

한유항(韓柳巷)과 함께 전경선(全敬先) 판사(判事)를 방문한 자리에서 취하여 제()하다.

문생(門生) 평장(平章) 안집지 인기(安集池鱗起)로부터 노루포[乾獐]를 보낸다.는 내용의 서신을 받고, 인하여 애밀(崖蜜)을 요구하다.

새벽에 비가 와서 높은 산에 오르고픈 흥취를 저버릴까 염려하다.

날이 맑아짐을 기뻐하다.

중구일(重九日)에 아무도 초청하는 이가 없으므로, 서린(西隣)의 유항공(柳巷公)에게 가동(家僮)을 달려 보내서 물어보았더니, 그 역시 갈 데가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장난삼아 한 수를 지어서 기록하여 바치다.

삼가 중방(重房)의 제장(諸將)이 보내 준, 보은사(報恩寺) 조진전(祖眞殿)의 초주(醮酒) 두 병을 받아서 보니, 그 겉에 봉상대부 친어군 호군 신하는 삼가 봉하다.[奉常大夫親禦軍護軍申夏謹封]라고 쓰여 있으므로, () ()이 마치 전정(殿庭)에서 음복(飮福)하는 것 같아 매우 다행스럽게 여긴 나머지 한 수를 읊어 이루다.

한유항(韓柳巷)이 자기 아우 판서공(判書公)과 함께 술을 가지고 내 집에 들러 주었다. 그래서 함께 동산(東山)에 올라가 앉으려다가 그곳은 오히려 지대가 낮다 하여 원장(園墻)을 나가서 고() 만호(萬戶) 박공(朴公)의 동산[]에 이르니, 조그마한 언덕이 있었다. 이곳은 천마산(天磨山) 등 여러 산과 송악산(松嶽山), 용수산(龍岫山) 등이 사방으로 빙 둘러 있고 남쪽으로는 삼각산(三角山)에 이르는 곳으로서 참으로 승지(勝地)였다. 이곳에 앉으려다가 또 생각해 보니, 산 밑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게 될 것이라, 높은 곳에 있는 것이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으므로, 이에 바로 길창원(吉昌園)의 북쪽이며 유 재상(柳宰相)고택(故宅)의 동쪽이며 양파(陽坡)의 동북쪽이며 우리 동산의 서북쪽에 위치한, 언덕 남쪽에 의지하여 자리를 깔고 앉아서 놀았다. 유항의 아들 좌랑(佐郞) 및 내 자식 종덕(種德), 종학(種學), 종선(種善)이 모두 자리에 있어 서로 갈음하여 술을 따라 올리므로, 두 늙은이는 두 다리를 개고 앉아서 길이 읊조리며 놀다가 달밤에야 서로 송별하였다. 그다음 날에 두 수를 읊어 이루다.

10일의 국화를 두고 짓다.

광양군(光陽君) 이 선생(李先生)을 위하여 계당(溪堂)에 기록하다.

칠원부(漆原府)에 나아가서 앞서 고헌(高軒)이 내 집에 들러준 데 대하여 사례하고, 간단하게 술을 마시고 밤에 돌아오다.

새벽에 읊다.

회포를 서술하다.

노년(老年)

느낌이 있어 짓다.

아침 햇살이 남쪽 창을 비추다.

서쪽 이웃의 길창공(吉昌公)을 알현하고 간단하게 술을 마시고는 돌아와서 소리 높여 읊조리다.

시를 막 읊고 났는데, 길창공이 또 배[]를 보내 주었다.

권 소윤(權少尹)의 여묘시권(廬墓詩卷)에 제()하다.

효무(曉霧) 전편(前篇)

효무(曉霧) 후편(後篇)

청신한 새벽에 국화를 대하다.

가랑비가 오다.

목은시고(牧隱詩藁) 26

()

9 15일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보니, 가을은 똑같은 가을이건만, 7월에는 아직 덥더니, 9월에는 이미 추워져버렸다. 그중 8월은 가을의 한중간이기 때문에 그 기운이 서늘하니, 서늘함은 사람에게 가장 적당한 기온이므로, 이 때문에 중추(中秋)의 달이 유독 고금(古今) 사람들에게 칭상(稱賞)되었던 것이다. 오늘 밤에는 달이 비록 밝기는 하나, 누가 다시 서로 불러서 연회(宴會)를 갖겠는가. ()이란 것이 하늘에 있는 게 이와 같거니, 어찌 사람에게 있는 것을 관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 정당(安政堂), 한 첨서(韓簽書)와 함께 예원(蘂院)의 귀곡 대선사(龜谷大禪師)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은사(慈恩寺)의 우세군(祐世君)을 알현한 다음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러 서로 헤어져 돌아오다.

민자복(閔子復), 민유의(閔由義), 민 진사(閔進士) 삼 형제가 주식(酒食)을 가지고 와서 나를 대접하는데, 마침 염동정(廉東亭)이 오므로 매우 기뻐서 이에 한유항(韓柳巷)을 초청하여 자리를 함께하다.

문생(門生) 유경(劉敬)이 철원(鐵原)에서 돌아오다.

전원(田園)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다.

낙엽을 쓸다.

느낌이 있어 짓다.

절구(絶句)

용만(龍巒)

스스로 읊다.

송풍헌시(松風軒詩). 절간(絶磵)이 특별히 와서 짓기를 청하다.

유하불가편(有何不可篇)

매미 소리를 듣다.

차기장밥[粘黍飯]을 두고 짓다.

추운(秋雲)

추우(秋雨)

느낌이 있어 짓다.

절구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의 기단(忌旦)에 사위인 염 시중(廉侍中)이 수정사(水精寺)에서 재()를 올리는데, 나는 바로 장자(長子)인 화원군(花原君)의 사위인지라, 당상(堂上)에서 염 시중을 모시고 앉았더니, ()이 관음상(觀音像)을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나의 장모 채 부인(蔡夫人)께서 막내아들이 죽은 것을 인하여 재물을 희사해서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막내아들이란 바로 내 장인의 아우인데, 연도(燕都)에서 죽었고 자식도 없다.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알성(謁聖)을 하려 하는데, 염동정(廉東亭)이 따라오므로 함께 가서 예를 행하고 총총걸음으로 나오다.

저물녘에 곡성군(曲城君)의 부름을 받았는데, 명일(明日)에 서린(西鄰)의 길창군(吉昌君)을 모시고 오라.는 것이었으므로, 기뻐서 이를 기록하다.

일찍 일어나다.

길창군을 모시고 곡성부(曲城府)에 이르니, 한 정당(韓政堂), 윤 밀직(尹密直)도 와 있었는데, 모두 앉아서 젊은 시절 상도(上都), 대도(大都)에서 행락(行樂)했던 일들을 매우 자상하게 얘기하였다. 성찬(盛饌)을 차려왔으나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아 병든 몸에 매우 편했다. 돌아와서 한 수를 읊다.

9 22일에 우리 진사(進士) 장원(壯元) 성 역암(成易菴)을 성남(城南)에 장사 지냈는데, 나는 앓은 나머지 풍한(風寒)이 두려워서 장송(葬送)하는 행렬에 참여하지 못하고, 몹시 쇠한 내 모습을 스스로 마음 아프게 여기면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문생(門生) 정달몽(鄭達蒙)이 일 때문에 합좌소(合坐所)에 왔는데, 그가 첩서(捷書)를 가져온 사람을 만나 보고 와서 말하기를 여러 원수(元帥)들이 운봉(雲峯)의 단월역(旦月驛) 들판에서 왜적(倭賊)을 포위하여 모조리 섬멸하였으므로 기뻐서 와서 보고하는 것이다.라고 하므로, 나는 깜짝 기뻐하며 말하기를 종사(宗社)의 위령(威靈)과 우리 왕()의 덕과 우리 재상(宰相)들의 공이 이러하니, 남은 생애는 무사하기를 보장할 만하구나. , 천도(天道)가 어긋나지 않음을 환히 볼 수 있으니, ()을 힘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자문(紫門)에 나아가서 정 영공 휘(鄭令公暉)와 한 정당(韓政堂)의 부자(父子)를 만났는데, 모두 돌아가려고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입직(入直)한 관원(官員)을 만나 본 다음에 집으로 물러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이에 재차 들어가니, 이나(李那)가 전교(傳敎)를 내왔다. 이윽고 상()께서 숙배(肅拜)를 받고 치주(巵酒)를 하사하고 이르기를 해구(海寇)를 이와 같이 섬멸한 것은 경() 등 노인(老人)들의 덕이다.라고 하였다. 곧 총총걸음으로 나와서 영삼사(領三司) 곡성군(曲城君), 시중(侍中) 칠원군(漆原君), 수시중(守侍中) 광평군(廣平君), 판삼사(判三司) 철원군(鐵原君)을 차례로 알현하여 해적을 평정한 것을 하례하고, 석양에 이르러서야 돌아왔다.

23일은 현릉(玄陵)께서 승하하신 날인데, () ()에게는 분발(分發)이 없어서 배석(陪席)하여 제사를 도울 길이 없으므로, 망연자실하여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청주(淸州) 경 시중(慶侍中)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애도한 나머지, 긴 소리로 배곡(拜哭)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자손들에게 한 편을 지어 보이다.

단가행(短歌行)

국화의 말을 대신하다.

국화를 대하여 짓다.

계림(鷄林)에 부임(赴任)하는 윤 밀직(尹密直)을 받들어 보내다.

25일 성거산(聖居山)에 들어가서 그 명일에 재()를 올려 선비(先妣)께 천도(薦度)를 드리고 나서 돌아오다가 산대암(山臺巖)에 이르니, 한유항(韓柳巷)이 음식을 마련하여 나를 맞이했는데, 문생(門生) 최 통헌(崔通憲)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저물께야 집에 돌아왔다. 이날 비록 좋은 경치를 만나기는 했으나 감히 읊조리지 못하고 피곤하여 그대로 잠자리에 들어가 쓰러져서 아침까지 자버리고 나니, 이른바 좋은 경치라는 것을 열에 일고여덟은 잊어버렸다. 그래서 이 사실이 영영 빠져버릴까 염려되어 추후에 두어 수를 짓노니, 이날은 바로 27일이다.

도중(途中)에서

산대암(山臺巖)

야정(野情)

즉사(卽事)

새벽에 일어나다.

담담(淡淡)

대사도(大司徒) 희암공(菴公)이 일찍이 삼장법사(三藏法師)를 이어 흑탑(黑塔)의 고려승원(高麗僧院)에 거주하다가, ()나라 천자(天子)가 북쪽으로 몽진하고, 중원(中原)의 군대가 도성(都城)을 쳐들어가자, 탈주(脫走)하여 동국(東國)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현릉(玄陵)께서 그를 청하여 내정(內庭)에서 재()를 올리게 하였으나, 그는 자기 스승 순암공(順菴公)을 추념(追念)하여 조용히 지낸 지 오래되었다. 그 후 금상(今上)께서 그를 판천태종사(判天台宗事)에 임명했으나, 이윽고 남의 무함을 입어 산중(山中)으로 들어간 지 수년이 되었는데, 은혜를 입고 환경(還京)하여 이 병든 사람을 방문해 주므로, 서로 만난 것을 기쁘게 여겨 짤막한 율시(律詩)를 읊는 바이다.

내하(奈何)

장차 희암 대사도(菴大司徒)를 알현하기 위해 유동(柳洞)을 출발하여 수금항(水金巷) 어귀로 들어가 숭교사(崇敎寺)를 달려 지나서 서쪽 고개를 넘으니, () 판사(判事) 김사도(金師道)의 고택(故宅)이 빈 터만 남아 있었다. 여기서 또 서쪽 고개를 넘으니, 송림사(松林寺)가 있으므로, 들어가서 사리탑(舍利塔)에 예배하고 산을 내려가니, 그곳이 당사천동(唐寺泉洞)이었다. 여기서 또 서쪽 고개로 올라갔다가 장대천동(長大泉洞)으로 내려가 큰 거리로 나가서 성문(省門)을 되돌아보니, 안마(鞍馬)가 성대히 모여 있었다. 이것은 도당(都堂)에서 금릉(金陵)에 갈 계품사(計稟使)를 전별함과 동시에 포왜군선(捕倭軍船)의 제장(諸將)을 위하여 축하연(祝賀宴)을 베푼 자리였다. 불은사(佛恩寺)에 이르러 사도(司徒)를 참알하고 앉아서 담론(談論)하는 사이에 한유항(韓柳巷)이 또 오므로 함께 저녁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판사 이성중(李誠中), 판사 장보지(張輔之)를 방문하였으나 모두 만나지 못했다. 이때 한공(韓公)은 자기 어버이께 저녁 문안을 드리러 가고, 나만 홀로 동년(同年) 이구(李玖)를 방문한 다음 천현(穿峴)을 넘어서 돌아오다.

남창(南窓)

송 동년(宋同年)의 부인(夫人) 이씨(李氏)를 곡()하다.

예천군(醴泉君)의 자손들이 용부(庸夫) 사재(四宰)의 금릉(金陵) 행차를 위해 돈을 갹출하면서 유독 나는 가난하다 하여 돈을 내지 못하게 하고, 또 나는 용부의 동년으로 장원(壯元)이라 하여 특별히 그 자리에 배석하도록 하였다. 이 자리에는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이 광평 시중(廣平侍中)을 초대하여 함께 있었는데, 밤중에 이르러 두 시중은 나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더 머물러서 서로 바싹 다가앉아서 매우 즐겁게 놀았는데, 두 아들이 나의 많이 취한 모습을 보고는 나를 부축하여 나왔다. 다음 날 해가 높이 올라온 뒤에야 일어나서 기록하여 가장(歌章)을 만들어 사재령(四宰令) 저하(邸下)께 바치면서 한번 웃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해가 서쪽으로 지다.

병든 나머지에

스스로 읊다.

대사도(大司徒) 조공(趙公)이 화답하였으므로,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하여 짓다.

비를 대해서 짓다.

진 무문(進無門) 시자(侍者)가 말하기를 우리 스님 환암공(幻菴公)께서 지금 원주(原州) 서곡사(瑞谷寺) 골짜기의 백운암(白雲菴)에 계신다.고 하므로, 붓을 달려 써서 부쳐 올리다.

유항루(柳巷樓) 위에서 놀았던 일을 추후에 기록하다.

초겨울에

이 상의(李商議), 변 사재(邊四宰)가 여러 원수(元帥)들과 함께 개선(凱旋)한다는 말을 듣고도 나는 병 때문에 교외(郊外)에 나가 맞이할 수 없으므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남창(南窓)

윤 장원(尹壯元)이 와서 얼굴에 술기운을 띈 채 앉아서 조는데, 그 진솔한 모습은 사랑스러우나, 어른을 섬기는 예에 있어서는 약간 잘못된 것이므로, 단가(短歌) 한 수를 기록하노니, 이는 그를 친하게 여긴 때문이며, 탐탁지 않게 여기는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북풍(北風)

날이 개다.

송산(松山)

소나무 밑에서 음복(飮福)을 하다.

즉사(卽事)

비가 그치지 않으므로, 앉아서 여러 원수(元帥)들의 개선(凱旋) 길에 어려움이 있을 것을 염려하다.

겨울비가 오다.

밤에 바람 소리를 듣고 지어 놓았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기록하다.

설 시승(偰寺丞)에게 주다.

느낌이 있어 짓다.

회포를 서술하다.

우세군(祐世君)이 숯[]을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신 무급(信無及)이 병 때문에 봉선사(奉先寺)의 소재전(消災殿)에 우거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문병(問病)하러 가보니, 병은 이미 나은 뒤였다. 소재전 동쪽에 위치한 두 칸은 벽이 허술해서 삼면으로 바람을 받아 약간 썰렁하므로, 겨울에 거처하기는 마땅치 않으나, 그 벽을 더 두껍게 바르면 추위를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무급이 말하기를 장차 산중으로 들어가서 겨울을 나겠다.고 하므로, 돌아와서 그 일을 기록하는 바이다.

이 밀직(李密直)을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다.

경상 안렴(慶尙按廉) 전 총랑(全摠郞)이 생포(生鮑)와 홍시(紅柹)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한유항(韓柳巷)과 함께 이 개성(李開城)을 방문하고 송봉(松峯)의 남쪽에 들러 홍 이상(洪二相)을 방문했으나 모두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조정으로 소환(召還)된 김 영공(金令公)을 특별히 위로하면서 간단히 술을 마시고, 다시 정 남경(鄭南京)을 방문했으나 또 만나지 못했다. 그러고는 보제사(普濟寺)에 들어가서 나잔자(懶殘子)를 알현하고 차를 마신 다음, 한공(韓公)은 어버이께 저녁 문안차 가고, 나만 홀로 돌아와서 한 수를 짓다.

홍시자가(紅柹子歌)

아침에 읊다.

군자(君子)

지포(紙浦)의 최홍(崔洪) 부정(副正)이 사서(司書)의 임명을 환수할 것을 요구하다.

유거(幽居)

어제 계사년 문과(文科)의 동년(同年)인 정 첨서(鄭簽書), 박 판서(朴判書), 이 판사(李判事)와 함께 용부(庸夫) 사재(四宰)의 강남(江南) 행차를 전송했는데, 오직 송 판사(宋判事)만이 처상(妻喪) 때문에 오지 못했으니, 경성(京城)에 사는 동년은 여섯 사람뿐이다. 계사년부터 지금까지가 28년인데, 동년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방으로 떠났고 불행하게 이미 죽고 했으니,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용부는 국가가 위의(危疑)한 때를 당하여 사신(使臣)으로 피선(被選)되어 들어가 천자(天子)를 알현하게 되었으니, 그의 풍채(風彩)는 의당 한 시대를 경도하건만, 우리 네 사람은 모두가 한산한 자리에 있어 쓸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화락하게 서로 담소를 나누는 품은 비록 성찬의 화려한 자리에 풍악을 잡히고 질탕하게 마시는 풍류도 여기에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약간 취하여 나와서 달밤에 돌아오다.

황애(黃埃)

제장(諸將)이 도성(都城)에 들어오다.

참새가 지저귀다.

풍우성(風雨聲) 일편(一篇)을 짓노니, 이는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뜻에서이다.

새벽에 일어나다.

여러 원수(元帥)들이 도성에 들어왔는데, 나는 날이 흐린 때문에 병이 발작하여 나아가 알현할 수가 없다.

아자(兒子) 등이 서장관(書狀官)으로 금릉(金陵)에 가는 민중리(閔中理)를 전송했다는 말을 듣다.

산중요(山中謠)

해동(海東)

어제 이 상의(李商議)를 방문했더니, 술상을 내왔으나 병 때문에 극력 사양하고, 다음으로 변 사재(邊四宰) 댁을 갔더니, 마침 손이 있어 이미 석 잔 술을 넘어서 거나하였다. 또 이어서 이 오성(李鼇城), 염 서성(廉瑞城)이 왔는데, 석양에 이르러 손이 떠나고 나자, 주인이 우리들을 익랑(翌廊)으로 맞아들여서 등촉(燈燭)을 밝히고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나는 밤중이 거의 다 된 때에 도망쳐 나와 버렸다. 명일에 한 수를 읊어 이루다.

날이 흐리다.

날이 개다.

등경가(燈檠歌)

오늘 하늘이 또 흐리다.

소리 높여 읊다.

17일에 감진색(監進色)이 성()에 정문(呈文)할 일로 회좌(會坐)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사이에 아직도 도당(都堂)에 자문하여 결정한 것이 있어야만 말을 만들 수 있다는 내용으로 조목조목 갖추어 올렸다. 삼색(三色)이 점심(點心)을 마련해 와서 또 선온(宣醞)을 마시고 약간 취하여 돌아오다.

새벽에 비가 오다.

소동(小童)

즉사(卽事)

민 여강(閔驪江)이 자기 아들이 금릉(金陵)을 가게 된 일로 부인과 함께 경성(京城)에 왔으므로, 택주(宅主)가 가서 그분들을 만나 보고 변변찮은 음식을 약간 마련했는데, 나는 삭신이 아픈 관계로 가지 못하고 시 세 수를 읊어서 좌하(座下)에 부쳐 올리는 바이다.

우중(雨中)에 유항(柳巷)을 생각하다.

스스로 읊다.

8 17일에 지신사(知申事) 이존성(李存性)이 왕지(王旨)를 전해 왔는데, 반궁수조비문(泮宮修造碑文)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이 삼가 생각건대, 선왕(先王)의 성덕(盛德)으로 학교(學校)를 일으켰는데, 금상(今上)께서 선왕의 뜻을 잘 계승하시니, 매우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학교를 일으킨 까닭은 인재(人才)를 교양(敎養)하기 위해서인데, 지금은 생도(生徒)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학관(學官)도 드물게 옴으로써 자못 황폐한 잡초밭이 되었는지라, 신이 말을 만들어 보려고 해도 그 요령을 얻지 못하여 그럭저럭 오늘에 이르렀으므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어 한 수를 읊어 이루는 바이다.

걱정함이 없다.

사전(賜田)에 대하여 관가(官家)의 조세(租稅) 징수를 면제해달라는 장자(狀子)를 재추소(宰樞所)에 바치고, 하인이 떠난 뒤에 부끄러워서 땀이 흘러 멎지 않았다.

개천사(開天寺)의 담사(曇師)가 홍시를 보내오다.

돌아가고 싶어서

찻잔에 차를 집어 넣다.

시를 고치다.

연곡사(燕谷寺)의 주지(住持) 인우(印牛)가 서찰과 함께 보내온 차()를 얻었는데, 그는 또 옥룡사(玉龍寺)와 서룡사(瑞龍寺)의 전세(田稅)에 관한 일을 부탁하였다. 또 무설(無說)의 서찰도 받았는데, 그 내용 또한 이와 같았다.

소우(小雨)

오래 앉아서

우중(雨中)

문생장시도가(門生掌試圖歌)

목은시고(牧隱詩藁) 27

()

첨류음(簷溜吟)

곡주(谷州)의 중자(仲子) 김사충(金思忠)이 왔으므로, 그의 관직을 물어보니, 산원(散員)이라 하고, 또 그의 형제들을 물어보니, 형 염()은 역시 산원이고 동생 영()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고 하므로, 내가 그를 슬피 여겼다. 지금 화원군(花原君)의 외손(外孫) 중에 장성한 자는 모두 참관(參官) 이상에 이르렀고, 심지어 양부(兩府)에 들어갔거나 육부(六部)의 전서(典書)가 된 자도 있는데, 유독 김씨(金氏)의 자식들은 어리지도 않은데 이와 같이 한미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후일의 공명(功名)에 대해서는 감히 그 어떠하리라 기필할 수 없지만, 지금 보이는 형편으로 말하자면 어찌 걱정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내가 힘이 없어서 그를 전조(銓曹)에 천거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새소리를 듣다.

흥취를 풀다.

내가 성균관비(成均館碑)의 일로 동정(東亭)을 번거롭게 오라고 청했더니, 오후에 오겠다는 회답이 왔다. 그러나 비는 그치지 않고 몸은 더욱 피곤하여 응접(應接)하기 어려운 것이 두려운지라, 단율(短律) 한 수를 읊어 보내서 공()을 오지 말도록 하는 바이다.

즉사(卽事)

아득하여라.

홍 이상(洪二相)이 방문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앞의 운을 사용하다.

즉사(卽事)

대서(代書)하여 무설(無說) 장로(長老)에게 받들어 답하다.

인하여 승거(僧居)를 읊다.

기사(紀事)

권 개성(權開城)에게 축수를 드리다.

성대한 연회(宴會)를 추후에 기술하여 희안(希顔) 좌하(座下)에 바치다.

느낌이 있어 두 수를 짓다.

물이 있어

즉사(卽事)

베개맡에서 비 오는 소리를 듣다.

11 2일에 가랑눈이 공중에 펄펄 날리기만 하고 땅에는 떨어지지 않다가 이윽고 그치더니, 바람이 몹시 일어나므로, 방에 들어와 조용히 앉아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하사한 토전(土田)에 대하여 조세(租稅)를 거두는 사람이 길을 떠나려고 하므로, 앉아서 한 수를 읊다.

여강(驪江)

만생()

새벽에 한 수를 읊다.

안석에 기대앉아서

동풍(東風)

이웃 늙은이

느낌이 있어 짓다.

성균시원(成均試員) 서 승제(徐承制)가 낙명지(落名紙)를 보내오다.

듣자니, 용부(庸夫) 오재(五宰)가 동문(東門)을 나가는 도중에 복고(腹藁)와 행리(行李)가 가뿐하여 물외(物外)에 초연(超然)했다고 한다.

새벽에 읊다.

술을 가지고 방문해 준 우 평장(禹平章)에게 받들어 사례하다.

사문(斯文) 복성군(福城君) 권 선생(權先生)의 서신을 받다.

새벽에 일어나 느낌이 있어 짓다.

종이 열세 폭()을 사천대(司天臺)의 장방(長房)에 보내서 역일(曆日)을 베껴오다.

천관(天官)이 찰밥[粘飯]을 보내오다.

기침을 하다.

구정(毬庭)에서 풍악(風樂)을 구경하다.

가랑눈이 내리다.

느낌이 있어 짓다.

고풍(古風)

수일 동안 기침을 계속하던 중에 고통스러움이 조금 우선해지자, 두 수를 읊어 이루다.

소회일(小會日)

대회일(大會日)

최 계장 원유(崔契長元儒)가 전() 전주 목사(全州牧使)로 충주(忠州)에 퇴거(退居)했었는데, 오늘 내 집에 들러서 말하기를 나도 은혜를 입어 승진 제수되었으므로, 지금 판사(判事)에 제수된 것을 인하여 사은하고 오는 길이다. 하므로, 내가 매우 기뻐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동년(同年) 곽충수(郭忠守)를 방문하려고 하는데, 여러 날을 몸이 경쾌하지 못하므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서린(西鄰)의 대부인(大夫人)을 곡()하다.

추위를 무서워하다.

동지(冬至)에 팥죽을 먹다.

동지일(冬至日)에 지신사(知申事) 이존성(李存性), 대언(代言) 반복해(潘福海)가 교지(敎旨)를 전해 왔는바, 표문(表文)을 지으라 하시고, 인하여 주과(酒果)를 하사하였으므로, 다음 날 대내(大內)에 나아가 사은(謝恩)하고 물러 나와서 스스로 읊다.

들으니, 재비(宰批)를 내려서 최 판삼사사(崔判三司事)를 수시중(守侍中)에 제배(除拜)했다고 하므로, 병을 무릅쓰고 최 시중(崔侍中)을 알현하러 갔는데, 시중이 이미 출타하였는지라, 여러 재추(宰樞)들 중에는 뜰 가운데 앉아서 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이도 있으므로, 나 역시 그 자리의 끝에 앉아서 한 수를 읊어 이루다.

밀직(密直)에 제배된 정포은(鄭圃隱)에게 받들어 하례하다.

이 이상(李二相) 댁에서 취하여 제()하다.

나가 놀았던 일을 기록하다.

전주(全州)의 황보 병마사(皇甫兵馬使)가 노루포[鹿脯]를 보내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다.

세모(歲暮)

즉사(卽事)

외구(外舅) 화원군(花原君)의 내외손(內外孫)들이 모든 경조(慶弔)나 영전(迎餞)의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모이는 것을 사촌회(四寸會)라 이름하고, 해마다 두 사람이 그 일을 관장하게 하여 그들을 유사(有司)라 이름하며, 유사는 세말(歲末)에 모임을 소집하여 그 일을 내년의 다음 유사에게 넘겨주곤 하는데, 이는 가법(家法)인 것이다. 그리고 모임을 가질 때에는 반드시 부항(父行)이 되는 한두 사람을 맞이하여 그 좌석을 주관하게 한다. 경신년 동짓달 24일에 민중립(閔中立)과 내 자식 종학(種學)이 그 모임을 마련하였으므로, 내가 민 판사(閔判事), 권 판서(權判書)와 함께 그 자리에 참여하여 몹시 취해 돌아왔다가, 다음 날 한낮에야 비로소 일어나서 한 수를 읊는 바이다.

용부(庸夫)가 명일에 출발한다는 말을 듣고 저물녘에 그 문정(門庭)에 가서 장차 교외(郊外)에 나가 전송할 수 없는 사정을 사과하려 하는데, 마침 주육(酒肉)을 가지고 찾아온 이가 있어, 나도 그 곁에서 취하고 배부르게 먹었다. 이때 용부가 말하기를 상부(相府)에서 더 머무르게 하여, 다음 달에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돌아오면서 시를 짓겠다.고 하였다.

풍성(風聲)

행색(行色)

첨리산(尖利山)

신흥 즉사(晨興卽事)

오천(午天)

개모 별가(蓋牟別駕)

중동(仲冬)

느낌이 있어 짓다.

스스로 읊다.

눈을 읊다.

산재(山齋)

하사한 토전(土田)에 조세(租稅)를 거두어 돌아오다.

한홍(韓弘) 동년(同年)에게 받들어 부치다.

조용히 앉아서

손님이 오다.

판삼사(判三司) 홍 영공(洪令公)이 방문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경 시중(慶侍中)에 대한 만시(挽詩).

스스로 의심하다.

스스로 믿다.

느낌이 있어 짓다.

흥취를 풀다.

가산(家山)을 생각하다.

치통(齒痛)

어제 판사(判事) 최언문(崔彦文)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는데, 치통 때문에 시를 읊지 못했다가, 명일에 치통이 조금 우선하므로 세 수를 기록하여 이루다.

치통이 다시 발작하여 고통스러움을 참을 수가 없으므로, 의원(醫員)을 시켜 뽑아버렸더니, 비로소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을 끊는 용도는 또 많이 감소되었다. 기쁘기도 하고 한편 슬프기도 하여 한 수를 읊어 이루는 바이다.

아행(我行)

병 때문에 교외(郊外)에 나가서 용부(庸夫)를 전송할 수 없으므로, 두 자식을 보내서 내 뜻을 표하고, 앉아서 세 수를 읊다.

조용히 앉아서 한 수를 읊다.

무제(無題)

벽운공(碧雲公)에게 박주(薄酒)를 올리려고 했으나, 마침 몸이 경쾌하지 못하여 바람을 쐴 수가 없어 감히 나가지 못하고, 두 자식을 시켜 예()를 행하게 하고 두 수를 읊어 이루다.

꿈을 깨다.

남창(南窓)

작자(作者)

노경(老境)

임 동년(任同年)이 와서 말하기를 수원부(水原府)의 전묘(田畝)를 답험(踏驗)하고 인하여 상주(尙州)로 가겠다.고 하였다.

스스로 읊다.

봉황이 조양(朝陽)에서 울다.

내가 고인(古人)을 생각하다.

대신(大臣)

새벽에 눈이 내리다.

느낌이 있어 짓다.

즉사(卽事)

새벽에 일어나다.

해가 부상(扶桑)에 떠오르다.

구름이 태산(泰山)에서 나오다.

가동(家童)을 보내서 나잔자(懶殘子)에게 차()를 얻어 오게 하고, 가동이 떠난 뒤에 한 수를 읊어 이루다.

나잔자가 차를 보내왔으므로, 또 한 수를 읊어서 삼가 사례하다.

느낌이 있어 짓다.

면주(沔州)의 미선(米船)이 당도하다.

스스로 읊다.

근래에 지은 시 두어 수를 기록하여 용부(庸夫)의 행헌(行軒)에 부쳐 올려서 여로(旅路)의 회포를 위로하려고 했는데, 서장관(書狀官)이 독촉을 받고 급히 가느라, 미처 내게 와서 하직 인사를 못하고 달려갔으니, 나는 여기에서 더욱 몹시 소홀하고 게으름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한 수를 읊어 나의 허물을 기록하는 바이다.

공백공(孔伯共)이 내게 와서 말하기를 장차 사재(四宰)의 행막(行幕)에 가서 정문(呈文)을 쓰려 한다.고 하였다.

물 끓이는 소리를 듣다.

눈이 밤에 내린 것을 전혀 몰랐다가, 새벽에 일어나니 눈이 뜰에 가득하므로, 동복(僮僕)을 명하여 다니는 길만 쓸고 나머지는 다 그대로 두게 하고 보니, 매우 기뻐서 인하여 한 수를 읊다.

홀로 앉아서 짓다.

무제(無題)

아침에 읊다.

적적(寂寂)

권 판서(權判書)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다.

인일(人日)

길창군(吉昌君)의 부인(夫人) 홍씨(洪氏)에 대한 만사(挽詞)

만흥(漫興)

대서(代書)하여 장 서경(張西京)의 궤세(餽歲)에 받들어 사례하다.

흥취를 풀다.

세시행(歲時行)

새벽에 일어나서 느낌이 있어 짓다.

눈을 읊다.

즉사(卽事)

절구(絶句)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과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이 함께 누추한 내 집에 왕림해 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다.

침상음(枕上吟)

둔촌(遁村)에게 받들어 답하다.

대서(代書)하여 계림 영공(雞林令公)에게 답하다.

남창(南窓)

동정(東亭)이 사위를 들이는데, 나는 가난해서 혼례를 도울 수가 없어 황두(黃豆) 두 섬으로 뜻을 표하고, 인하여 한 수를 읊어서 바치는 바이다.

즉사(卽事)

정월 10일에 염동정(廉東亭)이 나와 한유항(韓柳巷)을 불러서 함께 현릉(玄陵)을 참배하였다. 그곳에 이르니 이 이상(李二相), 변 삼재(邊三宰), 임 상의(林商議), 왕 상의(王商議), 도 우사(都右使), 유 판추(柳判樞), 김 숭경(金崇敬)이 와 있었다. 행사(行事)를 마치고는 들어가서 당두(堂頭)를 뵈니, ()를 내왔다. 돌아오는 길에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니, 주찬(酒饌)을 매우 성대히 차려 내왔다. 도성(都城)에 들어와 임공(林公)의 댁에서 베푼 주연(酒宴)에 이르러서는 몹시 취하였다. 명일에 두 수를 읊어서 기록하는 바이다.

성 장원(成狀元)이 와서 말하기를 세전(歲前)에 합덕(合德)에 가서 외구(外舅)의 분묘(墳墓)에 성묘하고 돌아왔다.고 하므로, 인하여 사암(思菴)을 생각하여 붓을 달려 써서 일애(一哀)를 부치는 바이다.

즉사(卽事)

일을 기록하다.

목은시고(牧隱詩藁) 28

()

유감(有感)

여강(驪江)

눈 내리는 날

강 정당(姜政堂) 의 죽음을 애도하며

화원(花園)의 영사(令史)와 관련한 도목장(都目狀)의 서명(署名)을 청하기에

자영(自詠)

바람 소리를 듣고는 감회가 일기에

1 23일에 도목장(都目狀)을 받고 느껴지는 점이 있기에

어제 일본(日本)의 사자(使者)가 도성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서

베개를 베고 누워서

바람이 거세게 불다.

정원재(鄭圓齋)가 얻은 두 분 은문(恩門)의 시권(詩卷) 뒤에 차운하여 제하다.

보법(報法) 노승(老僧)이 자기 몸을 불살랐다는 말을 듣고서

배 고파 우는 아이를 보고서

나잔자(懶殘子)가 찾아 준 것을 감사하며

칠원(漆原) 시중(侍中)과 철원(鐵原) 시중과 공산(公山) 시중과 길창군(吉昌君)과 진천군(晉川君)을 따라 도당(都堂)에 가서 회의하였으니, 이는 입공(入貢)하는 길을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유감(有感)

이 이상(李二相)에게 붓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면서

붓과 대화를 나눈 글

손님이 찾아오다.

즉사(卽事)

동년(同年)인 한홍(韓弘)을 생각하며

즉사(卽事)

민 판사(閔判事)가 설행한 장인의 기재(忌齋)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몹시 피곤한 중에 지은 한 수

이인위미(里仁爲美)

인재를 선발할 적에 청탁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기에 느껴지는 점이 있어서 시 한 수를 짓다.

공생명(公生明)

이른 봄날

명마 한 필의 가치가 있는 금강산의 나무 지팡이를 얻고 나서

금방 목욕을 시키고 나서

즉사(卽事)

성주(省珠) 대선(大選)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편에 보성(甫城)의 이 판사(李判事)와 김 좌윤(金左尹) 형제에게 부치다.

이른 봄날의 즉흥시

권 사재(權四宰)의 심경을 대신해서 짓다.

어제 한 청성(韓淸城)이 음식을 풍성하게 마련해 와서 나를 불러내기에 함께 나잔자(懶殘子)를 찾아갔다. 거기에서 취토록 마신 뒤에 집에 돌아와서 아침까지 곯아떨어졌다가 시 한 수를 지어 읊다.

장인인 화원군(花原君)의 여러 손자들이 갓 결혼한 권 정랑(權正郞)의 신방(新房)을 차려 주는 의식을 행하자, 정랑이 장막을 치고 연회를 베풀면서 기악(妓樂)을 매우 성대히 하였다. 이때 부친의 항렬에 해당하는 여러 어른들에게 자리를 빛내 달라고 청하였으므로, 소장인(小丈人)인 밀직공(密直公)이 주인의 자리에 앉은 가운데, 권 판서(權判書)와 민 판사(閔判事)와 내가 같은 반열에 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상의(李商議)와 염동정(廉東亭)과 임 대간(任大諫)과 염 대경(廉大卿) 등도 모두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의 외손으로서 빈위(賓位)에 자리를 정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동정의 경우는 또 정랑의 좌주(座主)였기 때문에 특별히 초청을 받은 것이었다. 여기에 또 박 밀직(朴密直)까지 이 자리에 왔고 보면 두 분의 은문(恩門)을 모두 모신 셈이요, 이와 함께 숙부(叔父)와 고부(姑夫)와 내외 형제가 모두 참석하였으니, 정랑으로서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자리였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밤이 되도록 술을 마시다가 취해 돌아와서는, 이튿날 시 한 수를 지어 이 밀직(李密直)과 이 상의와 염동정과 박 밀직에게 증정하였다.

동년 김군필(金君弼)의 시를 받고 나서 이에 차운하여 답하며 붓을 달리다.

유감(有感)

어제 청성군(淸城君) 한맹운(韓孟雲)과 함께 술을 가지고 정포은(鄭圃隱)을 찾아갔다. 이는 그가 밀직(密直)에 제수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는데, 도중에 현임 정당(政堂)인 우공(禹公)을 만났으므로 함께 동행하였다. 그러고는 이웃에 사는 이호연(李浩然)을 불러내어 잔을 주고받고 하던 차에, 이번에는 또 첨서(簽書) 이공(李公)이 술과 과일을 싸들고 찾아왔다. 그리하여 다 함께 어울려 담소하고 시를 읊조리며 멋있게 보냈으니, 참으로 한 시대의 성대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이에 그다음 날에 시 한 수를 지어 읊어 보았다.

일찍 일어나서

용두사(龍頭寺)의 생공(生公)이 찾아오다.

잔생(殘生)

울적한 마음을 달래다.

화원(花園)의 임 도령(林都領)이 매화를 가지고 와서는 박 영공(朴令公)이 보낸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뛸 듯이 매우 기뻐하면서 한나절이나 마주 대하고 앉아 있다가 천천히 한 편의 시를 읊게 되었다.

까치집

염 대언(廉代言) 을 축하하며

맑게 갠 날

종학(種學)이 전의 부령(典儀副令)을 새로 제수받고 오늘 숙배(肅拜)하기에

천심(天心)

술회(述懷)

며칠 전에 곡성부(曲城府)를 찾아가 뵈었을 때, ()은 있었으나 매화는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얻은 분매(盆梅)가 활짝 피었는데 감히 오셔서 감상하시라고는 못하겠기에 종학(種學)에게 특별히 명해서 갖다 바치도록 하면서 절구 세 수를 지어 올렸다. 이날은 바로 춘분(春分) 날이었다.

여러 아들에게 보여 주다.

동경(東京)의 윤공(尹公)이 전운(前韻)에 화답하면서 문어(文魚)를 보내왔기에 붓을 달려 답하다.

하늘이 맑아서

군자(君子)

이 이상(李二相)이 물고기와 기러기를 보내 준 것에 감사하며

고풍(古風)

서린(西隣)의 청성군(淸城君)과 함께 곡성(曲城)과 칠원(漆原) 두 분 시중(侍中)을 따라 이어(移御)하시는 임금님을 호가(扈駕)한 뒤에 돌아와서 홀로 읊다.

소나무를 대하고서 감회에 젖어

이엉을 얻어다가 지붕을 덮을 목적으로 서한을 띄울 즈음에 시 한 수를 지어 읊다.

유감(有感)

염동정(廉東亭)의 술자리에 초대를 받고

저번에 사양할 수가 없어서 오천군(烏川君)의 묘지명을 지어 주었더니, 그의 아들인 전교 부령(典校副令) 정홍(鄭洪)과 사위인 내부 부령(內府副令) 안경공(安景恭)이 성찬(盛饌)을 장만해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대접하였다. 그러고는 사례하는 뜻으로 자포(紫袍)를 또 선물하였는데, 그 뜻이 근실하고 예의를 깍듯이 지키려고 하였으므로 일단 받아 두었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돌려주기로 하였다.

유감

우 상의(禹商議) 가 술을 가지고 찾아 준 것에 감사하며

병중(病中)이라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며 사냥 구경을 할 수 없기에, 짧은 시 한 편을 지은 다음에 일기(一騎)를 치달리게 하여 이 이상(李二相)이 탄 말 앞에 봉정(奉呈)하게 하였는데, 다행히 염 정당(廉政堂)과 고삐를 나란히 하여 한번 보고 나서는, 사냥터의 남은 고기라도 나누어 주는 은혜를 내려 준다면 나 또한 사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제 계당(溪堂) 선생이 성찬(盛饌)을 가지고 나를 찾아 주셨는데, 내가 병이 심해서 곧장 감사를 드리지 못하겠기에,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는 대신에 졸렬한 시 한 수를 지어 올리게 되었으니, 그저 한번 웃어 주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어제 자은종(慈恩宗)의 도승통(都僧統)인 우세군(祐世君)이 새로 밀직(密直)에 임명된 종덕(種德)을 축하하러 와서는 성찬(盛饌)을 또 베풀었다. 내가 비록 병으로 고생하는 중이었으나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술을 흠뻑 마시고 취하기까지 하였다. 이날 저녁 무렵에 비가 내렸다. 이튿날 일어나서 시 세 수를 지어 읊은 다음에 이를 기록해서 그에게 증정하였다.

날이 맑게 개었으니 교궁(郊宮)에서 얼마나 흐뭇해할까 삼가 상상이 되었다. 신이 비록 늙긴 하였으나 나름대로 정회(情懷)를 가눌 수가 없기에 짧은 노래를 지어 읊어 보았다.

자영(自詠)

무제(無題)

매세(每歲)

아수(我雖)

수여(誰歟)

답청가(踏靑歌)

이튿날에 또 한 수 읊다.

요동(遼東)에서 돌아온 용부(庸夫) 사재(四宰)를 늦게 찾아가 위로하며

예천군(醴泉君)의 내외손이 모여서 술을 마시며 이름을 사촌회(四寸會)라고 하였는데, 해마다 두 사람씩 번갈아 가며 술과 음식을 마련하곤 하였다. 그런데 내가 근심과 병으로 지낸 십여 년 동안 이 모임도 거의 열리지를 않았는데, 이 오성(李鼇城)이 무너진 기강을 다시 세울 목적으로 삼월 초하룻날에 빈객을 많이 초청하고 크게 풍악을 연주하면서 예전보다 열 배나 더 성대하게 잔치를 마련하였다. 이에 다음 날에 시 한 수를 추록(追錄)하여 오성 좌하(座下)에 증정하면서 한번 웃어 보도록 하였다.

서향화(瑞香花)

왜송(矮松)

자영(自詠)

즉사(卽事)

한 상서(韓尙書)에게 서간을 띄우며

아침에 일어나서

사전(賜田)의 경작을 권하면서 감회가 일기에

문생(門生)인 김 소경(金少卿)이 임주(林州)에서 왔기에

유유(悠悠)

자영(自詠)

우연히 읊다.

왜적이 영해(寧海)를 침범했으므로 강릉도 원수(江陵道元帥)를 급히 떠나게 했다는 말을 듣고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이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원암연집도(元巖讌集圖)를 그리게 하였으니, 이는 현릉(玄陵)을 추모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고는 승지인 막내아들 정수(庭秀)를 시켜서 이 그림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그 뒤에 글을 써넣게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산야(山野)의 나무 숲이 야외의 막사에 어리어 비치는 광경이 완연히 눈에 들어오는 가운데, 여러 원로들이 그 옆에서 연회를 베풀며 노니는 풍채가 그야말로 한 시대를 압도하면서 후세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으므로 그 일을 곧장 써서 돌려주고는, 나 역시 감회를 가눌 수가 없기에 긴 노래를 지어 부르게 되었다.

맑게 갠 날에

백발(白髮)

특별히 유항(柳巷)의 집에 들러서 자제인 상서(尙書)의 병세가 어떤지 물어보고는 너무 늦게 찾아왔다고 사과를 하였더니, 벌써 정상으로 회복되었다고 하면서 술자리를 베풀기에 얼근히 취해 돌아와서 시를 지었다.

내원당(內願堂)에서 광평(廣平) 시중(侍中)의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산수화 병풍의 시를 청하기에 이를 인하여 세 수의 시를 읊다.

광평 이 시중(李侍中)이 소장한 열두 폭 산수화 병풍을 보여 준 것에 감사드리며 지은 시

늦게 돌아오는 말 위에서

아생(我生)

정 사예(鄭司藝)가 도로 남경(南京)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서

유감(有感)

유거(幽居)

아역(我亦)

삼월 열나흗날 닭이 울 무렵에, 비를 맞고 있는 뜨락의 보리를 얼른 거두어 들이라고 계집종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동이 트고 보니 지붕 위에 온통 눈이 쌓였고 산도 모두 은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 눈을 보고는 지난 계사년 청명일(淸明日)에 한산(韓山)에서 눈을 읊었던 옛일이 떠올랐는데, 지금으로부터 어언 29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청명이 지난 지 십여 일이나 되어 살구꽃이 이미 피었는데도 이렇게 눈을 보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시 한 수를 지어 이 일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 경신년 동당시(東堂試)의 낙제 시권(試卷)이 있기에, 내가 학관(學官)을 직접 만나서 한 무더기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시 한 수를 읊어서 염동정(廉東亭)과 박 밀직(朴密直)에게 증정하였다.

늦게 돌아와서 권희(權僖) 판서를 찾아가다.

어제 동정(東亭)의 집을 찾아갔더니 문밖에 타고 온 말들이 많이 서 있었고 술과 음식을 나르는 하인들이 또 줄을 잇고 있었는데, 나는 병든 뒤끝이라 술 마시기가 겁이 나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런데 저녁나절에 말을 들으니 동정의 생일이라 하기에, 그다음 날에 시 한 수를 지어서 결례를 사과하였다.

합좌소(合坐所)에서 제군(諸君)을 불러 각사(各司)의 일을 의논하였는데, 나는 뒤따라 다니면서 나아가고 물러가기만 하였을 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것이 스스로 부끄럽게 느껴지기에 혼자 말없이 생각하다가 시 한 수를 지었다.

내가 한유항(韓柳巷)과 함께 곡성(曲城)의 초청을 받고 찾아갔더니, 칠원(漆原) 시중(侍中), 길창군(吉昌君), 강 평장(姜平章), 김 원사(金院使) 와 정 월성(鄭月城) 윤 해평(尹海平) 이 광양(李光陽) 한 정당(韓政堂) 이 정당(李政堂) 이 모두 자리에 있었다. 진수성찬이 차려지고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곡성이 수정환(水精環)과 다합(茶合) 사대(絲帶)를 나에게 주고 대모(玳瑁) 필초(筆鞘)를 한유항에게 주면서, 원암(元巖)에서 모인 하나의 자리가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경들의 힘이다. 그래서 내가 감히 이것을 가지고 나의 성의를 표하려고 한다. 하였다. 이에 나와 유항이 감히 사양하지 못한 채 절을 하고 받았는데, 그다음 날에 세 수의 시를 지어서 이 일을 기록하였다.

한유항과 함께 척산군(陟山君)을 방문하였다. 그때 마침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는데, 공이 술자리를 베풀고는 현릉(玄陵)이 연회를 하사하였을 때 이 꽃을 꽂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에 내가 그리워지는 마음이 북받쳐 오르기에 시 한 수를 지어서 감회를 적었다.

척산군이 데리고 간 화원(花園)에서 난을 읊다.

나잔자(懶殘子)를 찾아가서 그가 복리군(福利君)에 새로 봉해진 것을 축하하고는 실컷 먹고 취해서 돌아왔다.

비를 노래하다.

원재(圓齋)가 정당(政堂)에 제수된 것을 봉축하다.

생질 박은(朴訔)이 방학을 맞아 나를 찾아왔기에 기뻐서 짓다.

자영(自詠)

나잔자가 새로 복리군(福利君)에 봉해진 것을 봉축하다.

가빈(家貧)

욕출(欲出)

3 22일에 유후덕(柳厚德)이 막내아들 분()을 남경(南京)의 박씨 집에 데릴사위로 떠나보낼 적에 내가 천수사(天水寺)에서 전송을 하고 돌아와서는 매우 피곤하기에 시 한 수를 지어 읊다.

즉사(卽事)

아침에 일어나서

가랑비

삼가 장구(長句) 사운(四韻) 세 수를 지어서 철원(鐵原) 시중(侍中) 좌하에 봉정하다.

어제 정포은(鄭圃隱) 제학공(提學公)이 이 판각(李判閣) 과 이 판사(李判事) 와 김 대간(金大諫) 과 나의 문생 최() 와 함께 술을 들고 찾아와서는, 전례(前例)에 따라서 꽃구경을 하러 왔다고 말하였다. 이에 청사 북쪽에 배꽃이 반쯤 피어 있는 곳으로 가서 시 짓고 노래 부르며 매우 즐겁게 노닐었는데, 이튿날에 시 한 수를 지어서 이 일을 기록하였다.

대장경(大藏經)을 인출(印出)하러 해인사(海印寺)로 떠나는 나옹(懶翁)의 제자를 보내면서

천수사(天水寺)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아로(我老)

꽃을 보고 느낌이 있어서

목은시고(牧隱詩藁)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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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9일에 영문하(領門下)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영삼사(領三司)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과 수시중(守侍中)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도 왕림하였다. 길창군(吉昌君), 강 평장(姜平章), 이 이상(李二相), 윤 해평(尹海平), 한 정당(韓政堂), 이 육재(李六宰), 성 지문하(成知門下)가 차례대로 앉았으며 나도 그 말석에 끼었다. 그리고 윤 영공(尹令公)과 염동정(廉東亭)과 유 밀직(柳密直)이 또 자리를 꺾어서 북쪽을 향하였고, 주인공과 김 원사(金院使)는 동쪽을 향하였다. 이처럼 세 분 시중의 풍채가 세상을 환히 비추는 가운데 제공(諸公)이 옆에 모시고 있는 광경이 마치 그림 속에나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에 돌아와서 이 일을 기록하였다.

남창(南窓)

경신년 과거에 급제한 이 정언(李正言) 등이 자신들의 이름을 써넣은 족자(簇子)를 좌주(座主)인 염동정에게 증정하였다. 이에 동정이 전에 기유년과 갑인년 과거에 급제한 문생들까지 모두 불러 연회에 합석하게 하였는데, 나도 초청을 받고서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그리고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서로들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그중에 세 차례나 문생을 거느린 분은 머리가 아직도 까맣다네.[三領門生頭尙黑]라는 구절이 있었다. 나도 과거를 세 번 주관하긴 하였으나, 을사년 과거 때에는 전시(殿試)의 제도가 아직 시행되지 않았고, 신해년 과거 때에는 전시의 독권(讀卷)에 별도로 다른 사람을 썼으며, 오직 기유년의 전시 때에만 나도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대구(對句)를 지으면서 전시에 한 번만 참여한 몸 항상 얼굴이 달아올라.[一叨殿試面長紅]라고 하였다. 대체로 근래에 들어와서 세 번이나 시관(試官)의 자리에 끼이게 된 사람으로는 동정과 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동정은 바야흐로 강사(强仕)의 나이에 있는 만큼 앞길을 쉽게 예측할 수 없다 하겠지만, 나의 경우는 병으로 오래 시달린 끝에 이처럼 성대한 자리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꿈속과 같은 이 일을 어찌 기록해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만하면 과장(科場)의 고사가 되기에 충분하겠기에 시 한 수를 지어 기록하는 바이다.

굉유곡(宏幽谷)을 보내면서

기로(耆老) 재추(宰樞)의 글을 받아 보니 공함(公緘)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내용은 나에게 회의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내가 뛸 듯이 기쁜 나머지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자은종(慈恩宗)의 우세군(祐世君)이 해안사(海安寺)에서 경()을 강론하였다. 이에 종덕(種德) 부추(副樞)가 술과 음식을 조금 가지고 가서 대접하게 되었는데, 노부(老夫)는 몸이 피곤해서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시 한 수만 읊었다.

초여름 날의 즉흥시

최 시중(崔侍中)이 장차 해풍군()을 순시할 즈음에 기마(騎馬)를 보내 나를 부르면서 하루저녁 우리 함께 시를 지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기에, 내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붓을 잡고 곧장 시 한 수를 지었다.

흐린 하늘

갠 하늘

어제 한 청성(韓淸城)과 남산에 올라가 꽃구경을 하고 돌아와서 짓다.

수시중(守侍中)의 부름을 받고 짓다. 이때 공이 승천부(升天府)의 군영(軍營)에서 송주회(送酒會)를 베풀었다.

도중에 한 정당(韓政堂)을 만나 함께 길을 가다가 또 이 이상(李二相)을 만났는데, 군영(軍營)에 도착하니 염동정(廉東亭)과 우 정당(禹政堂)과 유 밀직(柳密直)이 또 잇따라 이르렀다. 한 정당이 자기 막사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나에게 제의하였는데, 우와 유도 모두 한공의 막사 안에서 식사하면서 별미가 있으면 서로들 권하곤 하였다. 이윽고 수시중(守侍中)이 군관(軍官)들과 모내기를 끝내고 와서 크게 풍악을 울리고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차리고는 술을 전송하는 의식을 시작했는데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내가 노숙(露宿)하는 것을 겁내자 염동정이 자기 부친의 농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아침밥을 먹고 군영에 돌아오니 술과 음식이 또 성대하게 앞에 차려져 있었으며, 홍 판삼사사(洪判三司事)가 또 궁중의 술을 받들고 와서 노고를 위로하였다. 그리고 이날 중방(重房)에서도 승천부(升天府) 못의 제방을 보수하였기 때문에 중방이 또 성대한 음식을 차려 내었다. 자리를 파하고 나서 동정과 함께 우 정당ㆍ임 오재(林五宰)ㆍ도 우사(都右使)ㆍ유 판추(柳判樞)ㆍ이 광양(李光陽)ㆍ김 밀직(金密直) 등과 동행하여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중도에 조그마한 봉우리 위에 올라가서 또 술을 마셨다. 이때 여러 기녀(妓女)들도 부름을 받고 모였으며, 연구(聯句)는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쉬는 법이 없이 지었다. 집에 돌아와서 조금 쉬고 있을 때 종덕(種德)이 또 술과 음식을 차려서 내왔으니, 이는 내가 밖에 나가서 노닐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죽성군(竹城君) 안공(安公)의 서한을 받아 보니, 문생이 성명을 적은 족자(簇子)를 바치면서 베푸는 연회에 참석해 주면 좋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기에, 내가 흐뭇한 기분이 들어서 이 일도 함께 기록하였다.

죽성군(竹城君)이 문생 급제자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름을 적은 족자를 좌주(座主)에게 바쳤기 때문이었다. 두 분 시중(侍中)은 동쪽을 향하였고, 판삼사(判三司) 성 정당(成政堂)과 한 정당(韓政堂) 및 나는 북쪽에 있었고, 정 남경(鄭南京)과 민 밀직(閔密直)과 안 밀직(安密直)은 서쪽을 향하였고, 문생들은 동쪽 대청에 있었다. 기악(妓樂)이 교대로 울리는 가운데 연구(聯句)를 지으며 매우 즐겁게 노닐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원재(圓齋) 정당(政堂)이 와서, 오늘 동년회(同年會)를 열 것이니 정오가 되면 오라고 하기에, 기뻐서 한 수 짓다.

원재의 석상에서 주인이 시를 읊기에 그 시에 차운하다.

간밤의 숙취가 깨지 않은 상태에서 소리 높이 한 수 읊조리다.

을사년에 급제한 문생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왔으니, 역시 주금(酒禁) 때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얼마 있다가 구름이 걷히기에 너무도 기쁜 나머지 또 한 수 읊다.

이 이상(李二相)이 그의 아우 밀직공(密直公)을 나에게 보내 관등놀이를 함께 구경하자고 초청하였다. 그 자리에 갔더니 빈객이 성황을 이룬 가운데 술과 음식이 갖추어져 있었다. 닭이 울 때쯤 해서 자리를 파한 뒤에 잠깐 쉬면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통주(通州)의 자복사(資福寺) 주지 남가천(南可泉)이 헤어진 지 일 년 만에 오늘 나를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동년(同年)인 김원수(金元粹)의 집이 어렵게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이에 내가 붓을 달려 그에게 주면서 김 동년에게도 이 시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육언(六言)

김 대간(金大諫)이 나를 찾아와서, 어제는 상관(上官)이 술을 금했기 때문에 황봉주(黃封酒)를 마시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가 떠나고 난 뒤에 육우(六友)에 대한 시 세 수를 지어 읊었다.

한맹운(韓孟雲)에게 봉정하다.

금석(金石)

기사(紀事)

자영(自詠)

광풍(狂風)

유감(有感)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비가 내리는 것이 기뻐서

외람되게 기로회(耆老會)에 참석했다가 돌아와서 이렇게 짓다.

절간(絶磵)이 우거하고 있는 천마산(天磨山) 지족암(知足菴)에 받들어 제하다.

어제 한유항(韓柳巷)과 함께 나들이를 나가서 취해 돌아오다.

권 사재(權四宰)가 어버이 때문에 사직을 하였으니, 이는 대개 사신의 일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어버이의 연세가 여든인데 만리 여행길을 떠나게 된다면 그의 회포가 어떠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요, 따라서 그가 오늘날 사직하게 된 것 또한 그의 진정에서 우러나온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허락을 하고 안 하고는 군상(君相)에게 달려 있으니, 이는 하늘에 속한 일이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떻게 사람이 기필할 수 있겠는가. 이에 내가 그의 심경을 대변하여 짧은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는 뜻을 토로하였다.

허리가 시어서 지어 부른 노래

아침에 일어나서 감회를 서술하다.

동정(東亭)이 다시 도당(都堂)에 들어갔기에 시를 지어 축하하다.

어제 한유항(韓柳巷)과 함께 새로 제수된 재추(宰樞)들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이 일을 모두 마치고는 기로(耆老)인 여러 영공(令公)들을 찾아뵈었는데 만나지 못하였고, 오직 윤 영평(尹鈴平)만이 외출하지 않고 있다가 술과 밥을 차려 주었다. 그 뒤에 또 계림(鷄林)의 이 정당(李政堂) 집을 찾아가서 수반(水飯)을 먹고는 돌아왔다.

가빈(家貧)

이 이상(李二相) 이 방문해 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즉사(卽事)

아신(我身)

시골 사람의 말을 기록해서 시를 짓다.

나우수(羅迂叟)를 위해 황 충주(黃忠州)에게 부치다.

아생(我生)

비가 오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부른 노래

가랑비를 주제로 지은 육언시(六言詩)

어제 한 청성(韓淸城)과 함께 여러 곳을 두루 방문하였다. 광평(廣平) 시중(侍中)은 만나 뵙지 못했고, 철성(鐵城) 시중 댁에서는 수반(水飯)을 먹었다. 궁동(宮洞)으로 들어가 박사신(朴思愼) 개성(開城)의 집에서 또 수반을 먹고, 윤 정당(尹政堂)의 집에서 차를 마신 뒤에 다시 임 사재(林四宰)의 집에 가서 성찬(盛饌)을 대접받았다. 상당군(上黨君)의 댁으로 가서 술을 조금 마셨는데, 주금(酒禁) 이전의 법주(法酒)였다. 이에 함께 사양하며 석 잔으로 그친 뒤에 차를 마시고 집에 돌아왔다.

가랑비

뜨락을 거닐며

소왜(小娃)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대한 학식을 자부하는 사람이 있기에 이 시를 지어 읊다.

자소(自笑)

이 상의(李商議)가 자기의 자()와 거실(居室)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면서 아울러 자기 아들 가운데 일랑(一郞)의 이름도 부탁하였다. 이에 내가 계수나무 꽃은 가을에 희고도 깨끗하다.[桂花秋皎潔]라는 시구를 취해서 그의 자를 중결(仲潔)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계()의 짝으로는 송()만 한 것이 없고, 또 공이 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절의(節義)라고 생각되기에, 그의 거실의 이름을 송헌(松軒)이라고 지었다. 또 삼랑(三郞)의 이름이 방의(芳毅)인 점을 감안해서 일랑의 이름을 모() 라고 지었으니, 이는 과()와 의()는 그 의미가 서로 배합하면서 의존하는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시 한 편을 읊는다.

어제 나가서 광평(廣平) 시중(侍中)을 찾아뵙고 곧장 이야기를 나누고는 곧바로 물러 나와 이 상의(李商議)의 집에 가서 시를 전해 주고 돌아와 피곤해서 자리에 누웠다. 그러고는 다음 날에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비가 내릴 듯하면서도 내리지 않기에 하재탄(何哉嘆)을 지었다.

유감(有感)

미우음(微雨吟)

동트기 전에 비가 내려서 지붕이 새고 이불이 젖었다. 이에 너무도 놀랍고 기쁜 나머지 행재가(幸哉歌)를 지어서 불렀다.

한유항(韓柳巷)이 빙옹(氷翁)을 위해 향연(饗宴)을 베풀 적에 나를 불러 배석(陪席)하게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뜨락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구름 한 점 없기에

즉사(卽事)

여름날에 사계화(四季花)를 노래하다.

경정(敬亭)의 시권(詩卷)을 읽고

우중(雨中)

어제 송헌(松軒) 이 이상(李二相)의 초청을 받고 가서 개선(凱旋)을 축하하는 시편을 열람하였는데, 그때 마침 오랜 가뭄 끝에 홀연히 비가 오기에, 술잔을 연거푸 들면서 기쁜 마음을 표시하였다.

대신(代身)

구름 낀 새벽에

붓을 달려 밀성(密城)과 전() 김해(金海)와 남경 중서(南京中書) 등 삼 형제 좌하에 부치면서 함께 보기를 희망하다.

김 안렴(金按廉)에게 부치다.

김 안렴이 보내 준 차가 마침 도착했기에

흰 구름

단옷날의 석전(石戰)

단옷날에 조정에서 격구(擊毬)를 하는 것은 예전부터 행해 온 관례였다. 그러나 주상 전하께서 병화로 인해 백성들이 많이 유망(流亡)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바야흐로 좌불안석하며 재해를 막을 방도를 깊이 생각하고 계시고, 재상들 역시 위로 성상의 마음을 몸 받아 주연(酒宴)을 금지하고 곡물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진휼(賑恤)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날 격구를 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하였으므로, 내가 너무도 감격스러운 나머지 시 한 수를 지어 기록하게 되었다. 그런데 가령 자제들이 말을 치달리며 격구하는 일을 익혀서 사적으로 모여 즐긴다고 한다면 이것이야 조정에서도 필시 금지하지 않을 텐데, 나를 불러서 함께 구경하자고 할 사람이 누가 있을지 모르겠다.

민 판서(閔判書), 권 판서(權判書)와 함께 외구고(外舅姑)의 분묘에 가서 성묘한 다음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석전(石戰)을 구경하려고 마시장의 냇가로 갔으나 텅 빈 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 남 원수(南元帥)가 강릉(江陵)으로 나가 왜적을 쳐부수고 개선(凱旋)하였으므로, 함께 그를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다. 성문(省門)에 이르렀을 때 마침 석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길이 막혀서 되돌아왔다. 선죽(善竹)의 큰길에서도 석전이 벌어질 예정이었으므로, 남산의 동쪽 기슭으로 올라가서 구경하려고 하였는데, 아직 그들이 집결하지 않았기에 임 판사(任判事)의 집에 가서 조금 쉬었다. 급기야 석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에 염동정(廉東亭)이 또 왔으므로, 마침내 함께 올라가서 구경하였는데, 비가 와서 옷을 축축히 적셔도 개의하지 않았다. 권 판서의 초청을 받고 그 집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다 마치자 그가 또 멀리 떨어져서 구경하기보다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기에, 선죽의 물가로 가서 소루(小樓)에 올라갔는데, 상의(商議) 이송헌(李松軒)과 문 반주(文班主)도 이곳을 찾아왔다. 이때 석전이 소루 바로 아래에서 한 차례 벌어졌으므로 이만하면 석전 구경을 충분히 했다는 생각도 들고, 날도 어두워지려고 하기에 각자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서린(西隣)의 길창군(吉昌君)이 곡성(曲城)과 칠원(漆原) 두 분 시중을 비롯해서 정 월성(鄭月城)과 두 명의 한 정당(韓政堂)을 초청하여 식사 대접을 하였는데, 나도 그 자리에 끼어 있다가 돌아와서 이 일을 기록하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또 읊다.

합좌소(合坐所)에서 한량 기로(閑良耆老)들을 초치하여 사대(事大)에 관한 현안(懸案)에 대해서 회의하게 하였다. 회의가 끝난 뒤에 상당군(上黨君)이 곡성(曲城)과 칠원(漆原)과 길창군(吉昌君)과 강 평장(康平章)을 초청하여 식사 대접을 하였는데, 나와 상당군의 조카인 정당공(政堂公)도 이 자리에 끼었다. 이날 늦게 돌아와서 흥에 겨워 노래를 지어 불렀다.

즉사(卽事)

유감(有感)

무제(無題)

붓을 잡고 상념에 잠겨 있다가 붓을 떨어뜨려 옷에 먹을 약간 묻히다.

합포(合浦)의 남 영공(南令公)에게 답하는 시를 대신 써 주다.

유감

어떤 승려 하나가 황량한 시골 나루에서 배를 대기시켜 두고 있다가 사람들을 건네 주고 있기에, 내가 기쁜 한편으로 슬픈 생각이 들기에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즉사(卽事)

무급(無及) 등 여러 대덕(大德)에게 부쳐 보내면서 아울러 염 육재(廉六宰)와 성 하성(成夏城) 두 집에도 소식을 전하다.

흰 구름

자탄(自嘆)

동년(同年)인 안면(安勉)의 아들 노생(魯生)이 어버이를 뵈러 고향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나에게 자기 부친의 말을 전하였다. 이에 내가 두루 소식을 물어봤더니, 향선생(鄕先生)인 신 판사(申判事) 형제와 권길부(權吉夫)와 김군제(金君濟) 및 그의 존공(尊公) 모두가 무고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문생 윤상발(尹商發)이 집에서 빚은 술 한 병을 보내왔기에

최 시중(崔侍中)이 성묘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내 몸이 고단해서 교외로 나가 영접할 수가 없기에 시 한 수를 지어 봉정하다.

독음(獨吟)

선유(仙遊)

절구(絶句)

군자(君子)

당후(堂後) 정혼(鄭渾)이 맹운(孟雲) 선생의 시를 얻어 가지고 나에게 와서 보여 주고는 이번에 청성(菁城)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인사를 하였다. 내가 그의 뜻을 살펴보건대 나의 시를 얻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그 시에 차운해서 더욱 힘쓰도록 하였다. 그는 죽정(竹亭) 정지상(鄭之祥)의 아들이다.

아생(我生)

상자(桑者)

두 분 시중(侍中)을 찾아뵙고 돌아와서 읊조리다.

무제(無題)

오월(五月)

문생(門生) 배상도(裵尙度)가 와서 해주(海州)의 풍경을 말해 주기에

남경 윤(南京尹)이 순채(蓴菜)를 보내 준 것에 감사하며

잠부사(蠶婦詞)

꽃을 대하고 느낌이 있기에

금일(今日)

운암 존자(雲巖尊者)가 차를 보내왔기에 붓을 달려 사례하다.

유감(有感)

백주(白晝)

권가원(權可遠)이 나를 찾아와서는, 승선방(承宣房)이 구전(口傳)으로 성균 교관(成均敎官)을 임명하면서 장차 학교를 진흥할 것이라고 했다고 하기에, 내가 너무도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시 한 수를 지어 그 뜻을 표하였다.

오도(吾道)

뜨락 속의 앵두를 맛보며

무제(無題)

오열(午熱)

총지종(摠持宗) 성주(省珠)의 부탁을 받고 자비령(慈悲嶺) 나한당(羅漢堂)의 수조기(修造記)를 써 주고 나서 짓다.

환암(幻菴)의 문인이 찾아와서 육()의 뜻을 묻기에 장난삼아 짓다.

유감(有感)

오수(午睡)

큰아들의 집에서 금방 데운 술을 맛보다.

가랑비를 탄식하며

다음 날에 또 사운(四韻)의 장구(長句) 한 수를 읊다.

동년(同年)인 오혁림(吳奕臨) 상서(尙書)의 아들이 나를 찾아왔기에 한 수 짓다.

비를 고대하며

햇볕을 가리려고 하였으나 제대로 되지 않기에 번민을 풀어 보려고 읊다.

학교(學校)

흐린 하늘을 보고는 기뻐서 짓다.

해가 뜨기에 또 짓다.

서린(西隣)이 염주를 선물했기에 찾아뵙고 사례하다.

시향(時享)

희우(喜雨)

지금 유포(柳浦)의 별장에서 노닐고 있을 맹운(孟雲) 선생을 생각하며

동정(東亭)이 자기 문생(門生)인 장원(壯元) 김 정언(金正言)을 급히 보내 나를 초청하였는데, 내가 몸이 고단해서 나갈 수 없었으므로 서글픈 생각이 들어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흐린 하늘

혼자 장난삼아 읊다가 다시 자책하는 시를 지어 스스로 해명하다.

아광(我狂)

목은시고(牧隱詩藁)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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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시(淸風詩)

이 응양(李鷹揚) 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호연(李浩然)과 함께 자하동(紫霞洞)으로 놀러 갔는데, 밀직(密直) 정포은(鄭圃隱)과 판서(判書) 이사위(李士渭)가 술을 가지고 찾아왔기에, 저녁 늦게까지 있다가 돌아왔다.

우연히 절구 한 수를 얻었기에 맹운 선생에게 기록해 바치다.

앞의 운을 써서 회포를 풀다.

한공(韓公)이 시 한 수로 화답을 하였는데, 그 말구(末句)생각나네 연전의 바로 이 시절, 곳곳에 우뚝 선 연꽃 감상하던 일이.[却憶年前此時節 蓮花處處賞亭亭]라고 하였다. 이 시를 읽다 보니 다시 감흥이 일기에 시 세 수를 또 지어서 기록해 바쳤다.

증각사(證覺寺) 서쪽 누각에서

비를 대하고 보니 연꽃을 감상하고 싶은 흥치가 홀연히 일어나기에

자조(自嘲)

법화사(法華寺) 남쪽 작은 못에 연꽃이 있었는데, 백련(白蓮)이 대여섯 송이, 홍련(紅蓮)이 한두 송이, 그리고 피었다가 진 꽃들이 벌써 칠팔 송이나 되었으며, 아직 피지 않은 것들이 또 몇 송이 남아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나의 뜻을 위로받기에는 충분했으나, 읊조려 노래하는 것만으로는 그 소회를 다 표현할 수 없기에, 그저 짧은 시를 하나 지어 다른 해에 다시 감상하는 장본(張本)으로 삼기로 하였다.

혜문(惠文) 형에게 삼가 부치다.

염동정(廉東亭)이 노루고기를 보내면서 늙으신 양친에게 나누어 드리다 보니 양이 매우 적게 되었다.고 하기에, 짤막한 시를 지어 감사의 뜻을 표하다.

한유항(韓柳巷)이 나와 동정(東亭)을 적전(籍田)의 시골 별장으로 초청하여 연꽃을 감상하자고 하였는데, 마침 내린 비로 시냇물이 넘쳐흘러서 가기가 어려운 데다가 병이 또 발작하여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으므로 율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유감(有感)

선영에 성묘하러 가는 심 상의(沈商議)를 봉송하며

새벽에 읊다.

용두(龍頭)를 봉송하며 그의 시에 차운하다. 이때 곽 동년(郭同年)과 최 계장(崔契長)도 그곳에 있었다.

무열(無說)의 글을 얻고 나서

은문(恩門)인 남양(南陽) 시중(侍中)의 분묘를 찾아가 성묘하다.

중추(中秋)에 내리는 비

유감(有感)

수원(水原)에 우거하는 김군필(金君弼)이 나를 찾아오다.

용두(龍頭) 돈공(敦公)이 길 떠날 즈음에 내 집에 들러서 작별을 고하다.

변 효자(邊孝子)의 시권(詩卷)에서 간() 자를 차운하다.

무제(無題)

한양 윤(漢陽尹)에게 부치다.

오늘 강에 도착하다.

내원(內院) 감주(監主) 귀곡 대선사(龜谷大禪師)의 죽음을 애도하며

강 총랑(姜摠郞)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유감(有感)

중도(中道)의 염사(廉使)로 부임하는 안 간의(安諫議)를 보내며

전라 염사 허 총랑(許摠郞)을 보내며

우제(偶題)

중구일(重九日) 하루 전에 유항(柳巷)에게 증정하다.

묘각사(妙覺寺) 고정(高井)의 방장실(方丈室)에 제하다.

삼가 주상 전하께서 남쪽 교외에 나아가 성렴(省斂)하시는 날을 만났는데도 배행(陪行)하며 모실 수가 없기에 시 한 수를 지어 읊다.

중구일(重九日)에 반주(班主)에게 부치다.

호연(浩然)과 자안(子安)과 자복(子復)이 나와 한맹운(韓孟雲) 선생을 초청하였으니, 이는 송산(松山) 좌측 산기슭에 올라가서 중구일을 기념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밀직(密直) 정포은(鄭圃隱)을 위시해서 자은종(慈恩宗)의 우세군(祐世君)과 금산 장로(金山長老)와 판서(判書) 이사위(李士渭)가 미리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그 산의 봉우리로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았으나 마음에 차지 않는 점이 있기에, 조금 서쪽으로 옮겨 감로사(甘露寺) 남쪽 봉우리로 올라갔더니 앞이 툭 터져서 전망이 훨씬 좋았다. 여기에서 술잔을 주고받고 시와 노래를 읊조리면서, 국화꽃이 필 때 다시 모이기로 재차 약속을 하고는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이날 뒤에 도착한 사람들이 또 있었는데, 그들은 청주(淸州) 이사영(李士穎)과 정 부령(鄭副令)이었다. 그다음 날 이때의 일을 다시 떠올려 보니 벌써 꿈속의 일처럼 여겨졌으므로, 이에 정회를 가눌 길이 없어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7 7일에 모임을 한 번 갖고, 9 9일에 다시 한 번 모임을 가졌는데, 이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기에, 시 한 수를 읊어서 이 심정을 기록하였다.

또 칠석(七夕)에 지은 시의 운을 써서 중구일(重九日)을 읊다.

유거(幽居)

유경휘(柳景輝)가 자기 부인과 함께 병이 들더니 동시에 죽어서 오늘 도성 남쪽에 똑같이 묻혔다.

즉사(卽事)

문생(門生)인 박주 병마사(博州兵馬使) 김지탁(金之鐸)에게 부치다.

정음(正音)

9 15일 밤에 유항(柳巷)이 술 마시자고 부르기에 달을 마주하며 국화꽃을 잔에 띄우다.

문생(門生)인 노숭(盧崇)이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된 것을 축하하며

어제 교외에 나가 영접하려 했으나 만나 뵙지 못하고 돌아와서 피곤해 누웠다가 아침에 일어나 느낌을 적다.

즉사(卽事)

환암(幻菴)에게 삼가 부치다.

동년(同年)인 판서(判書) 이석지(李釋之)가 용구(龍駒)의 별장으로 돌아갈 즈음에 나를 찾아와 작별을 고하면서 한마디 해 달라고 청하기에 붓을 달려 책임을 메우다.

감진색(監進色)이 자리에 나오기를 청하기에 나아갔더니, 도당(都堂)에서 또 와서 불러 주기에 가서 수반(水飯)을 먹고 돌아왔다.

현릉(玄陵)의 기신(忌辰)을 맞아 왕륜사(王輪寺)에서 재()를 설행하였다. 곡성(曲城)과 칠원(漆原)과 길창(吉昌)이 영전(影殿)에서 예를 행할 적에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재추소(宰樞所)에서 승방(僧房)으로 불러들여 음식을 대접하였다. 돌아와서 이 일을 기록하였다.

고생(孤生)

석방사(石房寺)에서 밤에 물소리를 듣고

우수(迂叟)가 찾아오다.

즉사(卽事)

홀로 앉아서

혜민국(惠民局)의 관원들에게 약을 구했으니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일식(日蝕) 현상을 보고 느껴지는 점이 있기에

시월 초이튿날에 국화를 노래하다.

내부(內府)의 제공(諸公)이 방문해 준 것을 감사하며

국화를 노래하다.

절구(絶句)

송산(松山)에 올라 일을 기록하다.

돌아와서 또 읊다.

화령 윤(和寧尹) 박 영공(朴令公)이 연어(年魚)를 보내 준 것을 감사하며

부추(副樞)가 송산(松山)에서 돌아오다.

대신 승려를 보내면서

김 오재(金五宰)가 장차 금릉(金陵)으로 떠나게 되었기에

기로회(耆老會)에서 강남(江南)으로 떠나는 김 오재를 전별(餞別)해 주자, 오재가 음식을 성대하게 마련하고 풍악을 성대하게 울렸으므로, 한껏 즐기다가 자리를 파하였다.

유감(有感)

절구(絶句)

벽암(璧菴)의 시권에 제하다.

성렴(省斂)의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을 기록하다.

일을 기록하다.

삼가 대가(大駕)가 서쪽 교외에 거둥하는 때를 만났는데도 병 때문에 수행할 수가 없기에 한 수를 지어 읊다.

유감(有感)

사계화(四季花)

구차하게 얻으려고 해서야

삼가 교외의 행궁(行宮)을 생각하며 짓다.

견흥(遣興)

□□

어제 상의(商議) 이송헌(李松軒)이 화엄경(華嚴經)의 발문(跋文)을 부탁하면서 술자리를 베풀다.

만음(漫吟)

조부의 묘소에 분황(焚黃)하러 가는 임 밀직(林密直)을 전송하며

아생(我生)

자영(自詠)

송헌(松軒)의 부름에 응하다.

다듬이 소리를 듣고

유감(有感)

이자안(李子安)을 방문하고 밤에 돌아와서 그다음 날 시 세 수를 지어 읊다.

증각사(證覺寺)에서 묵다.

영복정(迎福亭) 서쪽 봉우리에서 잠깐 쉬면서

서린(西隣)을 찾아뵈었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다.

독좌(獨坐)

도 영공(都令公)을 위해서 짓다.

시집가는 박씨의 딸을 보내면서

조비(祖妣)의 기일에 느껴지는 점이 있기에

청좌(淸坐)

꿰맨 이불을 보고 느껴지는 점이 있기에

천청(天晴)

유감(有感)

쌀 찧는 노래

안 대부(安大夫)와 이 개성(李開城)과 이 계림(李雞林)을 차례로 방문하였는데, 모두 술자리를 베풀어 주기에 취해서 돌아왔다.

자탄(自嘆)

전답의 소출이 너무 적어서

하처(何處)

백운(白雲)

어제 유 밀직(柳密直)을 방문했다가 취해서 돌아오다.

어제 신평군(新平君)을 방문하고 정 월성(鄭月城)을 찾아뵈었는데, 모두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으므로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왔다.

어제 판삼사사(判三司事) 홍공(洪公)의 집에 갔더니 척산군(陟山君) 박공(朴公)이 먼저 와서 자리에 있기에 함께 술을 마셨다. 그 집에서 나온 뒤에 밀양군(密陽君) 박공의 집에 들러서 그림을 구경하고는 차를 마시고 돌아왔다.

외형(外兄) 김 좌윤(金左尹)이 영해(寧海)에서 왔기에 서로 만나게 된 것이 기뻐서 짧은 시를 읊조리다.

삼가 교외의 행궁(行宮)을 상상하며 한 수를 지어 읊다.

사전(賜田)에 세금을 거두는 사람이 다녀간 뒤에 느낌이 있어서

일을 기록하다.

십일월 초하루에 읊다.

혼자서 웃다.

부인(婦人)의 말을 듣고 기록하다.

() 사공(司空) 유공(柳公)의 자서(子婿)가 나를 찾아와서 사공의 묘지명을 부탁하며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으므로, 그 이튿날에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목옹(牧翁)

중도(中道)의 염사(廉使) 안 대간(安大諫)에게 부치다.

혼자서 웃다.

여강(驪江)을 생각하며

눈 내리는 것을 기뻐하며

()의 모친 최씨(崔氏)의 죽음을 애도하며

11 6일에 백련사(白蓮社)의 여러 노인들이 술을 가지고 김광조(金光祚) 영공(令公)을 찾아갔더니, 공이 진수성찬을 차려 주고 성대하게 풍악을 울려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하였다. 이에 그다음 날에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견흥(遣興)

기로회(耆老會)에 갔다가 돌아와서 읊다.

무제(無題)

고음(高吟)

열악(閱樂)

양가 선사(兩街禪師)가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할 일에 대해 말하면서 그 어조가 강개(慷慨)하기에 내가 기뻐서 기록하게 되었다.

판관(判官) 이전(李展)이 안동(安東)에서 와서 왜적이 또 쳐들어왔다고 말하기에

견흥(遣興)

임 사재(林四宰)의 악부(岳父)에 대한 만사(挽詞)

독좌(獨坐)

길에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만나 이 이상(李二相)의 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셨다. 그때 양가 선사(兩街禪師)가 또 와서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는 글을 부탁하기에 그 자리에서 초안을 잡아 주고는 이에 대해 시 한 수를 지었다.

가야(伽倻)의 총공(聰公)이 홍시를 보내 준 것에 답하다.

유감(有感)

종덕(種德) 부추(副樞)가 팔관회(八關會)의 바뀐 예복과 다식(茶食)을 보내왔기에

대회일(大會日) 새벽에 내린 눈을 읊다.

정 판서(丁判書)가 와서 말하기를 안 대부(安大夫)가 동년(同年)을 초대하여 곽 판서(郭判書)를 찾아갔다.고 하였다. 지금 양회(兩會)도 이미 지나갔는데, 어느 날에나 멋진 모임을 갖게 될지 모르겠기에 시를 지어서 독촉하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즉사(卽事)

김 좌윤(金左尹) 형이 술을 가지고 찾아 준 것을 감사하며

전의(全義) 한 좌윤(韓左尹)의 글을 받아 보니, 오래도록 나의 편지를 받아 보지 못했다는 말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나 역시 그에게서 오래도록 서신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한번 웃고는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기사(紀事)

철원(鐵原) 김 동년(金同年)이 기러기를 보내 준 것을 감사하며

병든 승려가 나에게 소개하는 글을 얻어서 양벽운(楊碧雲)에게 약을 구하려 하기에

고저(古樗) 동갑(同甲)에게 붓을 달려 띄우다.

교주(交州)의 염사(廉使)에게 띄워 고기를 부탁하다.

며칠 동안 몸이 편치 못해서 시를 읊지 못하다가 동짓날에 남쪽 창가에 조용히 앉아서 세 수를 짓다.

도목장(都目狀)을 오늘 바쳐 올리다.

대서(代書)하여 혜문(惠文) 형에게 삼가 답하다.

문생(門生)인 판서(判書) 최숭겸(崔崇謙)이 술을 가지고 찾아오다.

목은시고(牧隱詩藁) 31

()

목사견가(目司見歌)

아광(我狂)

세모(歲暮)

절구(絶句)

느낀 점이 있어서 짓다.

유감(有感)

남경 윤(南京尹)이 물고기를 보내 준 것에 감사하며

서린(西隣)의 한 선생(韓先生)이 내 집에 들러 준 것을 감사하며

정포은(鄭圃隱) 추상(樞相)과 이도은(李陶隱)과 이둔촌(李遁村)이 방문해 준 것을 감사하며

동산에 걸어서 올라갔다가 송 동년(宋同年)의 채마밭을 통해 나와서는 부추(副樞)의 새집에 이르렀는데, 이웃에 사는 조 판사(趙判事)가 술을 가지고 왔기에 약간 취한 상태에서 말을 타고 노래하며 돌아왔다.

머리를 빗다.

합주(陜州)의 영각(鈴閣)에게 부치다.

영암사(靈巖寺) 당두(堂頭)에게 부치다.

겨울날에

성남(城南)

강릉(江陵) 염사(廉使)가 생전복을 보내 준 것을 감사하며

전의(全義)에 있는 한 동년(韓同年)에게 부치다.

박 정당(朴政堂)은 나를 종백(宗伯)이라고 부르는데, 문생의 명족회(名簇會)가 열리는 날에 내 집을 찾아와서 초청하기에 병든 몸을 이끌고 가서 참석했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러고는 그다음 날에 대서(代書)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아가(我歌)

시재(時哉)

즉사(卽事)

곡성부(曲城府)에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목 대선사(夫目大禪師)에게 화답해 올리다.

유항(柳巷) 선생이 찾아오다.

좌윤(左尹) 형이 화답한 앞의 시에 대상 풍우(對床風雨)라는 말이 있기에 다시 한 수를 짓다.

자영(自詠)

김군필(金君弼) 동년(同年)의 시를 보고 나서 차운하다.

바람 소리를 듣고 느낌이 있어 짓다.

화엄(華嚴)의 당두(堂頭)를 찾아가려 하다가 추위가 겁나 움츠리고 앉아서 시를 짓다.

화엄(華嚴) 도실(都室)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수 짓다.

바람 소리가 귀에 가득한 때 갖옷을 걸치고 혼자 앉아서 읊조리다.

유감(有感)

무제(無題)

유감

견흥(遣興)

송 동년(宋同年)의 죽음을 애도하며

혼자서 웃다.

유감(有感)

둔촌(遁村)이 나를 찾아와서, 장차 도은(陶隱)과 함께 영은사(靈隱寺)에서 연말을 보내려 한다고 하였는데, 그 절은 중암(中菴)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

서경(西京)의 박 영공(朴令公)이 연말에 선물을 보내 준 것을 감사하며

은계(隱溪)의 시권에 제하다.

강릉(江陵)의 염사(廉使)가 김을 보내 준 것을 감사하며

장난삼아 짓다.

즉사(卽事)

김광수(金光秀) 원사(院使)가 곡성(曲城)과 칠원(漆原) 두 분 시중(侍中)을 위시해서 정 월성(鄭月城), 권 길창(權吉昌), 한 정당(韓政堂), 영녕군(永寧君), 순흥군(順興君), () 한 정당(韓政堂) 및 나를 초청하여 성찬(盛饌)을 마련하고 풍악을 베풀었는데, 이때 강 평장(康平章)이 주인의 우측에 앉았다. 내관(內官) 김실(金實)은 주인의 양자(養子)인데, 다른 한 명의 내관과 함께 양전(兩殿)의 선온(宣醞)을 받들고 왔으므로 빈주(賓主)가 절하고 마시다가 날이 어두워져서야 자리를 파하였다. 그러고는 술이 깬 뒤에 앉아서 생각해 보니, 여러 원로들 모두가 원()나라 조정의 은명(恩命)을 받은 분들이었다. 원사(院使)는 지정(至正) 황제를 모시면서 자정원(資政院)의 장관을 역임하였고, 곡성(曲城)은 원나라 조정에서 누차 벼슬을 하고 정동성(征東省)의 낭중(郞中)에 임명되었으며, 칠원군(漆原君)도 낭중의 임명을 받았다. 월성(月城)은 원외랑(員外郞)을 지냈고, 길창(吉昌)은 왕부 단사관(王府斷事官)이 되었다. 영녕(永寧)은 연경(燕京)에 하정사(賀正使)로 가서 한림 승지(翰林承旨)에 제수되었고, 순흥(順興) 역시 입근(入覲)하여 우승지(右承旨)에 제수되었으며, 소 한 정당은 정동성의 유학 제거(儒學提擧)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요행히 대를 이어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공봉 한림(供奉翰林)이 되었고, 뒤에 정동성의 낭중이 되었는데,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나 중국에 명()나라의 황제가 새로 출현하게 되었다. , 곡성은 칠원과 같은 해에 태어나 지금 연세가 일흔둘인데, 강건(强健)하고 정민(精敏)한 모습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월성은 두 분 시중보다 한 살 연하이고, 길창은 세 살 연하이며, () 한 정당은 다섯 살 연하이고, 영녕은 예순아홉이며, 다른 분들도 모두 육순에 가깝다. 내가 그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로 말석에 끼었으나 그래도 나이가 쉰다섯인데, 이런 성대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그지없는 행운이 아니겠는가. 이에 시 한 수를 지어 읊으면서 이 영광을 스스로 자랑하는 바이다.

윤이월 초사흗날에 대가(大駕)가 서남쪽 교외에 거둥하여 사냥을 관람하고 돌아왔다.

김공립(金恭立)이 달력을 보내 주고 또 청어(靑魚)를 선물하다.

염동정(廉東亭)이 돌아와서 나를 찾아오다.

유항(柳巷)과 함께 동정(東亭)을 위로하다.

절간(絶磵)이 남쪽으로 환암(幻菴)의 법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집에 들러서 작별을 고하다.

밀직(密直) 유번(柳藩)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읊다.

어제 쌍청(雙淸) 안공(安公)이 명함을 주고 갔기에 한 수를 지어 부치다.

새벽에 읊다.

즉사(卽事)

가랑비

동갑(同甲)인 백운(白雲) 스님의 서한을 받았는데, 이것을 가지고 온 자의 말에 의하면 지금 나주(羅州) 흥룡사(興龍寺)에 있다고 하였다.

강릉(江陵)에서 김용수(金龍壽)가 나를 찾아와서는 두 분 최씨(崔氏) 모두 탈 없이 잘 계신다고 말하였다.

한식(寒食)

글을 받고 한 동년(韓同年)에게 답하다.

면양부(沔陽府)에서 미곡을 실은 배가 도착했기에 기뻐서 기록하였으니, 이에 앞서 유언비어가 퍼졌기 때문이었다.

유항(柳巷)과 함께 광암사(光巖寺)에 가서 능을 참배한 뒤에 들어가 장로(長老)를 찾아뵈었더니 밥상을 차려 주었다. 이날 두 분 박공(朴公)이 비문을 새기는 일로 먼저 와 있었으며, 문생(門生) 노상(盧相)의 자녀들이 술을 가지고 국청사(國淸寺)에서 영접하였다. 이에 집에 돌아와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몸이 피곤해서

정종지(鄭宗之)가 찾아왔기에 대작(代作)하다.

삼가 주상 전하께서 남쪽 교외에 납시어 수렵을 관람하시는 날을 맞았는데도, 병든 이 몸은 따라가 모실 길이 없기에 슬픈 마음이 들어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정원재(鄭圓齋)를 방문했다가 취해서 돌아오다.

이날 두 분의 한씨(韓氏)가 함께 자리에 있었다.

증각사(證覺寺) 도중에

돌아오는 길에

동정(東亭)의 술자리에 초대를 받고 참석하다.

동당시(東堂試)의 지공거(知貢擧)로 흥녕군(興寧君) 안공(安公)과 판개성(判開城) 윤공(尹公)과 성균 시원(成均試員) 이숭인(李崇仁)이 낙점을 받고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술 마신 후유증으로 몸이 피곤해서 곧장 방문하여 축하하지는 못하였으나, 정회를 그만둘 수 없기에 시 네 수를 지어 읊었다.

유감(有感)

서울에 돌아온 밀성(密城)의 두 분 박 선생(朴先生)을 방문하다.

윤월(閏月) 24일에 광평(廣平) 시중(侍中)이 여러 기로(耆老)들을 초청하여 흥국리(興國里) 저택에서 연회를 베풀 적에 나도 참석했다가 늦게 돌아와서 높이 읊조리다.

서린(西隣)의 초청을 받다.

정 첨서(鄭簽書)와 김 정언(金正言) 두 분 회장(會長)이 찾아왔다. 그들이 떠난 뒤에 박 정 자허(朴正子虛)와 사문(斯文) 이유()가 또 집에 왔다.

유감(有感)

귀법사(歸法寺)의 물가에서 짓다.

개성(開城) 윤성(尹成)을 찾아가려 하면서 느껴지는 점이 있기에 한 수 짓다.

동정(東亭)의 갑인년 문생들이 연회를 주선하였는데, 형제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나와 한맹운(韓孟雲)에게 말을 보내어 참석하라고 초청하였다. 그 자리에 갔더니 밀직(密直) 정포은(鄭圃隱)이 먼저 와 있었으며 그 뒤에 지문하(知門下) 박 학사(朴學士)가 또 왔다. 이에 폭음을 하고는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는데, 이날은 윤월(閏月) 그믐날이었다.

서봉(西峯)에서 돌아오는 길에

박 판서 밀양(朴判書密陽)이 찾아오다.

삼가 주상 전하께서 천동(泉洞)으로 이어(移御)할 길일(吉日)을 잡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병든 신하로서는 어떻게 도와 드릴 길이 없기에 그저 봉인(封人)이 축하한 일만을 본떠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3 3일에 보은(報恩)의 초주(醮酒)를 절하고 받다.

어제 쌍청(雙淸) 안공(安公)이 나와 한유항(韓柳巷)을 초청하여 함께 술 마시며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나의 아들 종학(種學)쌍청정상인여옥(雙淸亭上人如玉)이라고 읊는 등 몇 개의 대구(對句)를 응수하여 올려 바쳤다. 날이 저물 즈음에 다 함께 도 영공(陶令公)의 저택을 방문하였으니, 이는 가례(嘉禮)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앵도화(櫻桃花)를 노래하다.

민중립(閔中立)이 찾아오다.

연도(燕都)를 추억하며

감회(感懷)

유항(柳巷)이 나를 찾아와서 성북(城北)으로 놀러 가자고 하였는데, 몸이 노곤해서 사양을 하고는 홀로 슬픈 생각이 들기에 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이호연(李浩然)이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 하기에 나도 따라가고 싶어서 긴 노래가 터져 나왔다.

사관(史官)이 모두 다른 일이 있어서 내가 대신 관각 안에서 숙직을 하였는데, 오경(五更)에 일어나니 달빛이 휘영청 밝기에 제공(諸公)의 운()을 써서 시를 지었다. 이때는 바야흐로 주금(酒禁) 중이었다.

장방평(張方平) 상서(尙書)를 오랫동안 보지 못하던 차에 그가 오늘 내 집을 찾아왔기에 기뻐서 시를 짓다.

3 8일에 주상 전하가 천동(泉洞)으로 이어(移御)하여, () 재상 허강(許綱)의 저택을 궁궐로 삼았다. 새벽에 일어나 낯을 씻고 머리를 빗은 다음에, 제군(諸君)의 반열에 나아가려 하면서 한 수를 지었다.

비를 노래하다.

꽃구경하는 벗님네들

엊저녁에 하성(夏城)의 성 선생(成先生)이 기로회(耆老會)를 마련하고는 문에 와서 초청하였으므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시 한 수를 읊었다.

하성(夏城)의 자리에 나아갔더니 시중(侍中) 제로(諸老)가 모두 참석한 가운데 오직 곡성(曲城) 한 분만 병으로 빠졌으므로 다음 날에 졸구(拙句) 한 수를 지어서 기록해 증정하였다.

시골 사람이 말을 타고 구정(毬庭)을 지나가던 중에 어사(御史)를 만나 체포되었는데, 나에게 구제해 달라고 글을 요청하기에 급히 붓을 들어 용서를 청하였다.

감회를 서술하다.

강릉 부사(江陵府使) 유호(柳瑚)가 부임하면서 작별을 고하다.

3 12일에 육우(六友) 김경지(金敬之)와 도은(陶隱) 이자안(李子安)의 초청을 받고 한 청성(韓淸城)과 함께 정포은(鄭圃隱)의 산정(山亭)에서 꽃구경을 하기로 하였는데, 포은이 사명(使命)을 받고 출타 중이었으므로 봉선사(奉先寺)의 송강(松岡)으로 가게 되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포은이 돌아왔고, 판사(判事) 권주(權鑄)와 판사 민제(閔霽)와 판사 이호연(李浩然)과 판사 이사영(李士穎)이 또 왔는데, 이들은 모두 경지와 미리 약속을 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아들 종학(種學)을 급히 보내 동년(同年) 정원재(鄭圓齋)를 불러오게 하였으며, 동년인 판서 박진록(朴晉祿)과 판사 이석지(李釋之)와 계우(契友)인 판서 최원유(崔元儒)와 우윤(右尹) 이서원(李舒原)도 모두 경지의 초청을 받고 자리에 모였다. 소나무 아래에 바람이 많이 불었으므로 장막을 치고 피하면서 연구(聯句)를 짓고 술잔을 주고받노라니 해가 벌써 지려 하였다. 이 판사가 저녁밥을 차려 주어 배불리 먹고 취한 뒤에 달빛을 타고 돌아왔다.

송헌(松軒) 이 아상(李亞相)이 집에 찾아와서 술자리에 초청하다.

을사ㆍ기유ㆍ신해 삼과(三科)의 제생(諸生)이 나를 좌주(座主)라고 하면서 술과 음식을 갖춰 대접하였다. 이에 익재(益齋) 선생의 사자(嗣子)인 개성공(開城公)을 초청하고, 또 동년(同年)인 안 대부(安大夫)와 정 정당(鄭政堂) 및 선군(先君)의 문생인 박 정당(朴政堂)과 한 첨서(韓簽書)를 초청하여 자리를 빛내게 하였다. 그리고 이 반주(李班主)가 초은(樵隱)의 손자이기 때문에 초은의 제생도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으며, 대이부(大姨夫)인 민 개성(閔開城)과 처제(妻弟)인 권 대부(權大夫)도 합석하였다. 삼과의 제생은 나이 순서에 따라 한데 모여 앉았다. 내관(內官)이 왕명을 받들고 와서 궁중의 술을 하사하였으므로 절하고 마시면서 밤까지 자리가 이어졌다. 여관(旅館)에서 내가 이미 취했으므로 자세히 말해 주지는 못하고 대략 충효(忠孝) 두 글자를 들어서 힘쓰도록 당부하였다. 다음 날 대궐에 가서 사은(謝恩)하고는 마음속으로 느껴지는 점이 있기에 그 감정을 노래로 표현하였다.

백련회(白蓮會)에 갔다가 돌아와서 느낌이 있어 짓다.

현화사(玄化寺)의 생공(生公)이 모친을 뵈러 남원(南原)으로 가면서 나를 찾아와 작별을 고하기에

아침에 일어나서

흰 구름을 보고 짓다.

김공립(金恭立)이 복직(復職)을 해서 어버이를 영예롭게 해 드리려고 나에게 말 한마디를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내 말을 누가 들어 주기나 하겠는가. 이에 시 한 수를 지었다.

흰 머리카락

염 시중(廉侍中)의 죽음을 애도하며

곡성(曲城)의 상()으로 인하여 사흘 동안 시 짓는 일을 중단하다가 오늘에야 율시 한 수를 지어 읊다.

도중(途中)에 지은 시 세 수를 추가해서 기록하다.

절간(絶磵) 윤공(倫公)이 청룡사(靑龍寺)에서 노닐다가 돌아와서는 호로(瓠蘆)에 순채(蓴菜)를 담아 건네주면서 환암(幻菴)의 서신을 또 전해 주었다. 이에 너무도 기쁜 나머지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일찍 일어나서

요통(腰痛)

유의(有意)

꾀꼬리 소리를 듣고

325일에 비 오는 것을 기뻐하며

춘음(春陰)

유감(有感)

동년(同年) 박 밀직(朴密直) 을 경하하며

즉사(卽事)

앉아서 졸다.

성남(城南)

느껴지는 점이 있기에 유항(柳巷)에게 증정하다.

총지종(摠持宗) 도대 선사(都大禪師)에게 부치다.

하재탄(何哉嘆)

서린(西隣)의 길창군(吉昌君)이 칠원(漆原) 시중(侍中)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면서 시중의 아우인 밀직공(密直公)과 나를 불러 합석하게 하였다. 이에 돌아와서 홀로 읊었다.

저녁이 서늘해서

목은시고(牧隱詩藁) 32

()

날이 맑아서

성균관(成均館)의 시원(試員)인 이도은(李陶隱) 4 1일에 선비를 시험할 적에 하늘이 매우 맑아 응시생들이 습기를 피해서 시험장을 옮겨야 하는 걱정이 없었으므로 내가 이를 기뻐하여 한 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백승(李伯升)이 부친상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가려 하면서 나에게 그 일을 알리고 떠날 즈음에 내가 시를 지어서 곡하였다.

유감(有感)

어찌할거나

정종지(鄭宗之)가 성에 들어와서 나를 찾아 주었기에

유감(有感)

유감(有感)

맏손자 맹유()가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했다는 말을 듣고 기뻐서 짓다.

남경 윤(南京尹)이 순채(蓴菜)를 보내왔기에 이에 사례하며 급히 붓을 달리다.

칠원(漆原) 시중(侍中)과 제로(諸老)가 김 사재(金四宰)의 금릉(金陵) 사행(使行)을 전송하는 자리에 참석했다가 돌아와서 시 한 수를 짓다.

김 사재(金四宰)가 집에 찾아와서 작별을 고하기에

이도은(李陶隱)이 마련한 술자리에 초청받아 경사(京師)로 떠나는 정포은(鄭圃隱)을 전송하고 밤에 돌아와서 짓다.

유감(有感)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인 화령 부윤(和寧府尹) 장공(張公) 에게 부친 시

사월 초파일의 감회

날씨가 너무도 맑기만 해서

유항(柳巷)과 함께 서봉(西峯)에서 관등(觀燈)놀이를 구경할 적에 아들놈들도 함께 따라왔는데, 부추(副樞)가 새로 거처를 마련한 산 위에 다시 올라서서 보니 그 광경이 더욱 장관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가랑비가 내렸는데, 피곤해서 곧장 잠에 떨어졌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아직도 빗방울이 떨어지고는 있었으나, 땅을 적실 정도는 되지 못하였다. 이에 느껴지는 점이 있기에 시 한 수를 지었다.

술회

강남(江南)

흥을 내어 시름을 달래다.

칠원(漆原) 시중(侍中)의 초청을 받고 서쪽 이웃 사람과 함께 가서 참석하다.

제공(諸公)과 함께 정포은(鄭圃隱)을 전송하다.

오늘도 비는 오지 않고

진헌(進獻)하는 사신이 길을 떠날 때 나의 병이 발작하는 바람에 교외에 나가 전송하지 못하고 혼자서 읊은 한 수

희우(喜雨)

부엌일을 도맡던 하녀가 병으로 죽었기에 며칠 동안 시 읊는 일도 잊은 채 슬픔에 잠기다.

민중립(閔中立)이 사위를 맞아 베푼 잔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시 한 수를 짓다.

가난한 나의 집

가랑비 속에 광명사(廣明寺)의 재공(齋公)이 내방하다.

한유항(韓柳巷)이 강 언덕까지 뒤따라오고 권 대부(權大夫)가 또 이르렀는데 모두 자서(子壻)들과 동행하였다. 전별연을 일단 마치고 작은 봉우리에 올라가 강물을 굽어보며 실컷 구경하면서 몇 잔의 술을 마시고는 작별한 뒤에 배 안에 홀로 들어앉아서 한 수를 짓다.

바람도 멈춘 때에 돛을 내리고 정박하다.

암곶(巖串)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서, 그다음 날 다시 배를 타고 용산탄(龍山灘)과 이탄(梨灘)과 하돈탄(河豚灘)과 신탄(新灘)을 지나갔다. 물이 얕은 곳을 만나면 배에서 내려 끌고 가고 바닥이 닿는 곳에서는 아예 등에 지고 배를 옮기는 등 있는 힘을 다해서 가까스로 빠져나가다가, 깊은 물을 만나면 돛을 달고 매우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도 하였는데, 이처럼 하루에 수십 리를 가는 동안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희열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중방원(重房院)에 이를 즈음에, 한양 윤(漢陽尹)이 배 안에까지 찾아와서 영접하며 신정(新亭)으로 올라가자고 초청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는 술 몇 잔만 들고서 다시 길을 떠났다.

유거(幽居)

적탄(赤灘)에서 하룻밤 묵다.

허리를 지지다가 감회가 일기에

병탄(幷灘)에서 하룻밤 묵다.

유월 초하룻날 새벽에 남 정당(南政堂)의 별장을 지나 독포(禿浦)에 이르러서 닻줄을 수리하였다. 그러고는 저녁에 남경(南京)의 사평진(沙平津)에서 하룻밤 묵고 나서 그다음 날 관악(冠岳)의 승려와 작별하였다.

이날 밤 잠자리에 든 지 벌써 한참이나 되었는데, 깊은 밤중에 마침 빠져나가는 조수(潮水)의 흐름을 타고 순탄하게 내려오는 동안, 사공이 교대로 불러 대는 뱃노래 소리에 잠이 들었다 깼다 하였다. 그러다가 인녕(引寧) 나루에 와서 배를 세우고 한잠 푹 자고는 날이 밝아오자 동강(東江)으로 들어가서 상륙한 뒤에 두 아들을 이끌고 말을 달려 성안으로 들어갔다.

신부(新婦)가 와서 인사를 드리다.

동정(東亭)이 소장한 장언보(張彦輔)의 산수도(山水圖)에 제()하였는데, 이 그림은 곡성(曲城)이 평소에 수집해 둔 것이었다.

동정이 소장한 행촌(杏村)의 묵죽(墨竹)에 제하다.

유항(柳巷)과 함께 홍 오재(洪五宰)를 위로하다.

내가 두루 찾아보는 길에 강남(江南)에서 돌아온 김 사재(金四宰)는 길이 막혀서 만나지 못하였고, 정 첨서(鄭簽書)는 만나 보았고, 김 추상(金樞相)은 만나지 못하였고, 이 추상(李樞相)은 만나 보았다. 그러고는 마정(馬井)에 이르러서 이상(二相)과 삼재(三宰)를 만나 본 뒤에 돌아와 종덕(種德)의 새 정자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의 장인인 유공(柳公)이 또 왔기에 종일토록 담소하다가 돌아왔다.

19일 입추(立秋)

밤에 비가 내리더니 새벽까지 이어지다.

박 정당(朴政堂)이 술과 고기를 보내 준 것을 감사하며

유항(柳巷)과 함께 포은을 위로하러 갔는데 나의 집 아이도 동행하였다.

유항과 함께 광양군(光陽君)을 초치해서 하과(夏課)의 시험을 치르는 제생(諸生)을 보러 갔는데, 비가 내려서 야외에 있기가 불편하기에 구산사(龜山寺)로 장소를 옮겨 각촉부시(刻燭賦詩)를 행하였다. 교관(敎官)이 술자리를 마련했기에 약간 취해서 돌아왔는데, 이날 수행한 사람은 유항의 차자(次子)인 상경(尙敬)과 나의 아들인 종학(種學)ㆍ종선(種善)과 문생인 송문중(宋文中)이었으며, 거기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은 김제(), 강회중(姜淮仲), 신권(辛權), 박관(朴貫), 유겸(柳謙) 등이었다.

감진색(監進色) 제공(諸公)과 함께 광평(廣平) 시중(侍中)을 찾아뵙다

상상(上相)이 강가에서 전함(戰艦)을 시찰했다는 말을 듣고 짓다.

급우(急雨)

유항(柳巷)에게 증정하다.

감진색(監進色) 제공(諸公)이 와서 정료위(定遼衛)에 보낼 이문(移文)을 의논하였다.

급우(急雨)

즉사(卽事)

탐라(耽羅) 성담(性曇) 공의 편지를 받고 나서

자안(子安)이 와서 운남(雲南)의 평정(平定)을 하례(賀禮)하는 표문에 대해서 상의하였다.

공주 목사(公州牧使) 최유경(崔有慶)에게 답하면서 급히 붓을 달리다.

서린(西隣)의 길창군(吉昌君)을 모시고서 칠원(漆原) 시중(侍中)과 철원(鐵原) 시중을 배알하고 돌아오다.

길창군(吉昌君)과 한 창성(韓昌城)을 따라서 광평(廣平) 시중(侍中)을 찾아뵈었는데, 눈병을 이유로 손님을 맞으려 하지 않았다.

철원(鐵原) 시중(侍中)이 사직했다는 말을 듣고

양벽운(楊碧雲)이 와서 절구(絶句)를 지어 읊었는데, 그가 떠나고 나서 여기에 화운하여 세 수를 지어 보았다.

유감(有感)

서린(西隣)의 맹운(孟雲) 선생에게 기증하다.

29일 한밤중에 비지(批旨)를 내려, 판삼사사(判三司事) 홍공(洪公)과 이상(二相) 이공(李公)을 함께 시중(侍中)으로 임명하고, 광평(廣平)은 영문하(領門下), 철원(鐵原)은 영삼사(領三司)로 삼았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차서에 따라 승진시켰는데, 새로 문하성(門下省)에 들어온 사람은 노공(盧公)뿐이었고, 추밀원(樞密院)에 들어온 사람은 권 대부(權大夫)와 반 지신사(潘知申事)뿐이었다.

맹운(孟雲)과 함께 서린(西隣)을 모시고 마정(馬井)의 이 시중(李侍中)을 찾아뵌 뒤에 상당(上黨)의 저택에서 말을 쉬게 하면서 술을 조금 마시고 돌아오다.

정 월성(鄭月城)이 참외[甛苽]를 보내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서원군(西原君)의 홍 부인(洪夫人)에 대한 만사(挽詞)

매미 소리

즉사(卽事)

증리(蒸梨)

가을밤에

아역(我亦)

한 청성(韓淸城)이 순흥군(順興君)과 나에게 자기 외구(外舅)의 별장 연못에서 연꽃을 감상하자고 초청하였는데, 나는 마침 병이 또 발작하였고 순흥군도 몸이 좀 아팠다. 사람의 일이 이처럼 자꾸 어긋나기만 하기에, 붓을 잡고 곧장 써서 한 청성에게 부쳤다.

홀로 앉아서 또 읊다.

이날 비가 오기에 또 읊다.

가을 구름

염 시중(廉侍中)의 부인에 대한 만사

7 7일은 성상의 탄일이다.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과 영문하(領門下) 광평군(廣平君)과 영삼사(領三司) 철원군(鐵原君)을 위시해서 길창군(吉昌君) 권공(權公)과 재령군(載寧君) 강공(康公)과 영평군(鈴平君) 윤공(尹公)과 상당군(上黨君) 한공(韓公)과 상산군(商山君) 김공(金公)과 청성군(淸城君) 한공(韓公) 및 내가 궐문에 나아갔다. 내관(內官) 김실(金實)이 예물을 받아 들고 안에 들어갔는데, 하례(賀禮)를 받지 않겠다는 비지(批旨)가 내렸다. 이에 물러난 뒤에 새로 짓는 궁궐에 들어가 두루 구경하면서 공사를 감독하는 여러 관원들을 위로하고 돌아왔다.

유감(有感)

청성(淸城)과 함께 동가군(東嘉君) 이광보(李光輔)를 방문하다.

이호연(李浩然)이 방문하다.

후번(後番)의 녹봉으로 보리 한 섬을 받고서

소나기

역사책을 읽고 나서

구름을 노래하다.

짚신

새벽안개

맑은 바람

도당(都堂)에서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과 영문하(領門下) 광평(廣平)과 영삼사(領三司) 철원(鐵原)에게 회의에 참석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때 강 평장(康平章)과 한 상당(韓上黨)과 성 하성(成夏城)과 박 척산(朴陟山)과 한 청성(韓淸城)과 내가 그 뒤를 따라 모시고 들어갔다. 도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파했는데, 마침 비가 오기에 팔구(八句)의 시를 지었다.

즉사(卽事)

노래(老來)

궤좌(几坐)

출유(出游)

농지 관리인 박장(朴莊)이 햅쌀을 가지고 오다.

밤비

자영(自詠)

낮 꿈

대우행(大雨行)

동년(同年)인 주인성(朱印成)을 못 본 지 십 년 만에 그가 홀연히 찾아왔기에 너무도 기쁜 나머지 한 수 읊다.

어젯밤 뜨락에 달빛이 가득한 가운데 풀벌레가 울어 대기에 뭔가 느껴져서 한 구절을 얻고 나서는 새벽에 일어나 이를 보충해서 한 수를 완성하였다.

유항(柳巷)의 누대 위에서 술을 조금 마시고는

원재(圓齋)가 세상을 하직했다는 말을 듣고 곡하다.

가을날

공권(公權)의 장례식에 내가 병으로 결국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기에, 비참하게 느껴진 나머지 또 한 수를 지어 읊다.

우중(雨中)

유항(柳巷)에게 증정하다.

빗속에 홀로 앉아 술 한 잔 들고 싶어도 술이 없기에 자조(自嘲)하며 시를 짓다.

야장(夜長)

동경(同庚) 황 회산(黃檜山)을 곡하다.

서린(西隣)

우제(偶題)

운무(雲霧)

일을 기록하다.

채 옹주(蔡翁主)의 죽음을 애도하며

유항(柳巷)이 적전(籍田)의 별장에서 노닐면서 연꽃을 감상하자고 초청했는데 병이 들어서 사양하다.

답답함을 풀어 보려고

자영(自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농사를 권면하다.

중추절(仲秋節) 하루 전날에 유항(柳巷)에게 증정하다.

첫서리가 내리다.

향교(鄕校)

여강(驪江)의 가을

서린(西隣)이 적전(籍田)의 별장에 놀러 가자고 부르기에 너무나 기뻐서 곧장 한 수 짓다.

적전(籍田) 별장에 있는 길창(吉昌)의 누대 위에서 연꽃과 대화를 나누다.

뒤에 다시 읊은 팔구(八句)

비를 대하고 회포를 적다.

즉사(卽事)

빈자(貧者)

8 10일에 곡성(曲城)의 부인 권씨(權氏)의 장례식에 비를 무릅쓰고 참석하다 보니 매우 피곤하였다. 그다음 날 돌아오는 중에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먹고 성안으로 들어오니 해가 벌써 서산에 지고 있었다.

맑게 갠 날

즉사(卽事)

술회(述懷)

안 학사(安學士)가 성묘하러 가다.

목은시고(牧隱詩藁) 33

()

중추(中秋)에 초야(初夜)에는 흐리다가 중야(中夜)에는 달이 대낮처럼 밝았다. 달구경 하러 나가지 못한 것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별수 없이 내년이나 기다리기로 하였다.

유항(柳巷) 선생이 쌍청(雙淸) 안공(安公)에게 함께 가서 밤에 얘기나 나누자고 나를 불렀는데, 내가 눈병 때문에 사양하고는 시 한 수를 지었다.

곡주(谷州)의 새 누각에 대한 기문(記文)을 짓고 나서 한 수 읊다.

외출하려 하면서

유 대언(柳代言)의 부인 원씨(元氏)에 대한 만사(挽詞)

기쁨을 기록하다.

경상도(慶尙道)의 안렴사(按廉使)로 나가는 여 총랑(呂摠郞)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유항(柳巷)이 비문을 쓰려고 떠날 적에 나는 몸이 고단해서 따라가지 못하였다. 이에 슬픈 생각이 들어서 여덟 구의 시를 지어 읊었다.

반록(頒祿)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

길창군(吉昌君)을 모시고 따라가서 칠원(漆原) 시중(侍中)을 배알하다.

삼가 듣건대 다음 달에 대가(大駕)가 남경(南京)으로 거둥하신다고 하였는데, 나는 맡은 관직이 없어서 호종(扈從)하는 반열에 끼일 수가 없기에, 슬픈 생각이 들어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임 동년(任同年)이 농원(農園)의 각종 채소를 보내 주었기에 우스개로 절구(絶句)를 짓다.

[]

엄천(嚴川)에 머물고 있는 혜생(惠生) 승통(僧統)을 전송하며

환암(幻菴)에게 급히 써서 부치다.

유 밀직(柳密直)이 경사(京師)로 떠나는데, 나는 마침 몸이 고단해서 교외에 나아가 전송을 하지 못한 채 시 한 수만 지어 읊었다.

서린(西隣)의 자제인 판서(判書)가 술과 음식을 올렸는데, 공이 나를 참석하도록 불렀으므로 실컷 먹고 마신 뒤에 돌아왔다.

느낀 바가 있어서

아자(我自)

서린(西隣)에게 봉정(奉呈)하다.

느껴지는 점이 있기에

술회(述懷)

아이들이 서린(西隣)의 밤을 주워 왔기에 시 한 수를 지어 읊다.

삼가 주상 전하께서 동쪽 교외에 거둥하여 성렴(省斂)하시는 날을 만났는데도 나는 병으로 따라갈 수가 없기에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다병(多病)

삼가 상상해 보건대 교외에 설치한 행궁의 하늘이 맑게 개었으니 성상이 마음속으로 즐거워하는 가운데 무신(武臣)들이 환희 용약하며 하나의 기예를 바치려 생각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에 내가 병중(病中)에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구름이 하늘을 가득 뒤덮은 가운데 성긴 빗방울이 몇 점 떨어지기에 내가 매우 걱정하였는데, 몇 시간이 지나자 햇빛이 구름을 뚫고 새어 나왔으므로, 매우 기뻐서 또 한 수를 읊었다.

송산(松山) 가는 도중에

안 죽성(安竹城)을 만나다.

소나무 아래에서 음복(飮福)하다.

광평 영문하(廣平領門下)와 권 길창(權吉昌)과 정 월성(鄭月城)과 강 평장(康平章)과 이 광양(李光陽)과 김 동산(金洞山)과 밀직(密直) 조림(趙琳)을 배행(陪行)하여 동문 밖에서 대가(大駕)를 영접한 뒤에 돌아와 홀로 읊다.

쇠잔한 인생

주 동년(朱同年)에게 부치다.

판사(判事) 신운길(辛云吉)의 죽음을 애도하다.

동북면 순문사(東北面巡問使) 장자온(張子溫)이 연어(年魚)를 보내 준 것에 답하다.

김 좌윤(金左尹)이 함창(咸昌)에서 왔기에 기뻐서 기록하다.

동년(同年) 이몽유(李夢游)가 찾아오다.

이천(伊川)의 전답을 뺏으려고 대드는 자가 있기에

가소(可笑)

보법사(報法寺)로 가서 원재(圓齋)의 사십구일재(四十九日齋)에 참석하다.

종학(種學) 부령(副令)이 송경(松京)에서 술과 음식을 싣고 와서 먹여 주다.

자은(慈恩) 도실(都室)과 쌍청(雙淸) 안공(安公)과 유항(柳巷) 한공(韓公)이 남쪽 교외에서 나를 전별해 주었다.

동강 야음(東江夜吟)

날이 밝자 배에 올랐다. 인녕(引寧) 나루에 배를 대고는 조수(潮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바람이 불어 하루를 머물렀다.

9일 정오가 될 무렵에 순풍을 타고 배를 띄워 암곶(巖串)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해가 아직 기울어지지 않았다.

독포(禿浦) 암하(巖下)에서 묵다.

이튿날 반연(飯淵)에서 묵고, 또 다음 날에는 도미원(都迷院)에서 묵었으니, 물이 얕아서 배가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 정당(南政堂)의 별장에서 묵다.

독포(禿浦)에서 달빛을 타고 광진(廣津)까지 와서 묵다.

무포(務浦)에 와서 배에서 내린 뒤에 남경(南京) 동촌(東村) 왕심리(旺心里) 민가에서 묵었다. 그러고는 다음 날 행궁(行宮)에 가서 숙배(肅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읊었다. 이날은 10 12일이었다.

반 밀직(潘密直)이 선온(宣醞)을 가지고 와서 하사하였으므로, 다음 날 대내(大內)에 가서 사은하고 돌아와 짓다.

이날 우 영공(禹令公)과 박 영공(朴令公)이 술을 가지고 왔고, 이날 밤에는 남경 윤(南京尹)이 판관(判官)과 함께 와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부추(副樞)가 서울에 돌아오다.

궐정(闕庭)에 나아가서 안부를 여쭙고 돌아오다.

화산군(花山君)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다.

유감(有感)

서린(西隣)이 숙직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잡흥(雜興)

우제(偶題)

새벽에 일어나니 가랑비가 내리기에

밥을 먹고 앉아서 졸다가 깨어나서 짓다.

또 절구 한 수를 짓다.

자은(慈恩) 도당(都堂)에 대한 감상

대궐에 가서 안부를 여쭙고 돌아오다.

어제 박 판서(朴判書) 계장(契長)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새벽에 만사(挽詞)를 짓다.

즉사(卽事)

호노(豪奴) 내석(內石)에 대해서

유 염사(柳廉使)가 술과 종이와 돗자리를 보내 주다.

서린(西隣)의 조 판사(趙判事)가 아자길(阿刺吉)을 가지고 왔는데, 그 이름을 천길(天吉)이라 하였다.

기사(紀事)

기사(紀事)

자은(慈恩) 도당(都堂)을 장의사(藏宜寺)로 찾아가서 앞서의 운으로 시를 짓다.

이 시중(李侍中)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다.

정종지(鄭宗之)가 그의 아들 응두(應斗)와 함께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싸 가지고 와서 대접을 하고 또 상탑(床榻)을 선물로 주었다.

어젯밤에 상당공(上黨公)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새벽에 읊다.

대사(大舍)가 두부를 구해 와서 먹여 주기에

이호연(李浩然)이 한림(翰林)으로 있는 아들을 데리고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는 밤이 되어서야 돌아갔기에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어제 호연(浩然)과 함께 제정(霽亭)을 방문하기로 약속하였다.

계장(契長) 최원유(崔元濡)가 어사(御史)인 자제를 이끌고서 술과 고기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기에 한공(韓公)의 집으로 가서 배불리 먹고 취한 다음에 서로 헤어졌다.

한유항(韓柳巷)과 함께 대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제공(諸公)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어젯밤에 눈이 조금 내렸다.

기사(紀事)

병풍(屛風)에 제하다.

8일 동짓날에 한 청성(韓淸城)이 팥죽과 꿀을 보냈는데, 그 뒤를 이어 부추(副樞)가 들고 왔고 부윤(府尹)이 또 보내왔다.

이광(李匡) 나연(那衍)이 와서 당반(唐飯)과 주식(酒食)을 하사하였다.

고풍(古風)

또 짓다.

대내(大內)에 들어가서 사은하고 돌아와 짓다.

일찍 일어나서

열악(閱樂)

한 청성(韓淸城), 권 화산(權花山)과 함께 대내(大內)에 가서 문안을 올렸는데, 중관(中官)이 나와서 술을 하사하였으므로 절하고 마신 뒤에 돌아왔다.

청성(淸城)이 악모(岳母)의 주년(周年)을 맞아 송경(松京)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병들어 바람을 쏘일 수가 없었으므로 멀리 나가서 전송하지 못한 채 창연한 심정으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즉사(卽事)

동가군(東嘉君) 이광보(李光輔)와 상장군(上將軍) 이자안(李子安)이 찾아왔다. 정종지(鄭宗之)가 먼저 와 있다가 함께 차를 마시고 헤어진 뒤에 혼자 앉아서 읊다.

문생(門生)인 하 판사(河判事)가 진양(晉陽)으로 돌아가겠다면서 하직 인사를 하다.

자영(自詠)

촌가(村家)

궁전 뜨락에서 의식(儀式)을 예행 연습하다.

조금 비가 뿌리기에 감회를 서술하다.

목빙(木氷)

기사(紀事)

대회(大會)

화산군(花山君) 권공(權公), 전 밀직(密直) 이공(李公)과 함께 대내(大內)에 가서 문안을 올렸는데, 도당(都堂)에서 불러 공사(公事)를 의논하고는 당식(堂食)을 차려 주기에 술과 밥을 실컷 먹고 돌아왔다.

달빛을 타고 돌아오다.

차득(借得)

혼자 웃다.

감진(監進) 제공(諸公)이 나에게 와서 사대 문자(事大文字)를 의논하였다. 이때 판서 유운(柳雲)이 선온(宣醞)을 받들고 이곳에 왔기에 절하고 마신 뒤에 자리를 파하였는데, 판서도 감진 중의 한 명이었다.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 여공(呂公)이 포()를 보내왔기에 사례하다.

표문(表文)의 제두(提頭)와 권점(圈點)과 관련하여 서 정언(徐正言)이 나를 찾아와서 부탁하다.

주인 부부가 와서 음식을 대접하다.

술에 대하여

서경(西京)의 이 소윤(李少尹)이 평계(平桂)를 보내 준 것을 감사하며

화산군(花山君) 등 제공(諸公)과 함께 가서 판사 최원유(崔元濡)를 만나 수원 부사(水原府使) 이 계장 서원(李契長舒元)을 전별(餞別)하였는데 박 정당(朴政堂)도 와서 참석하였다.

어떤 일로 느껴지는 점이 있기에

부생(浮生)

이달 25일에 판삼사(判三司)의 명을 받았기에, 조 시중(曺侍中)과 함께 숙배(肅拜)하고 나서 돌아와 이 일을 기록하다.

이른 아침에

합좌소(合坐所)에서 매번 먼저 나가겠다고 청하는 것이 부끄럽기에 한 수 짓다.

청풍(淸風)으로 부임하는 안 사군(安使君)을 전송하며

정해년의 진사시(進士試) 동년(同年)들이 남경(南京)에 처음 모였을 때 장원(壯元) 박공(朴公)이 나를 불러 자리에 끼이게 했었다. 그런데 그다음 모임에서도 우 사재(禹四宰)가 또 나를 초청하였는데, 그 모임을 주선한 사람은 광주(廣州)의 이 판사(李判事)였다.

남경(南京)의 이른 봄날에

조정에서 개경(開京)으로 돌아갈 일을 의논하다.

호가(扈駕)하는 도중에

풍천(楓川)의 납발(納鉢)에서

장단(長湍)의 납발에서

초천(椒川)의 납발에서

유도 재상(留都宰相)이 백관을 이끌고 선흥사(禪興寺) 동쪽의 교외에 나와서 어가(御駕)를 영접하는 가운데 성균관(成均館)의 제생(諸生)이 환영하는 가요를 불렀다.

동대문(東大門)에서부터 대궐 문 앞에 이르기까지 산대잡극(山臺雜劇)의 무대가 펼쳐졌는데 예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목은시고(牧隱詩藁)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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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일에 칠원(漆原) 시중(侍中), 광평(廣平) 시중, 철원(鐵原) 시중, 남양(南陽) 시중, 공산(公山) 시중 및 권 길창(權吉昌)과 제공(諸公)을 모시고 상의 탄일(誕日)을 하례하였다. 내관(內官) 김실(金實)이 예물을 받아 안에 들이니, 상이 겸양하면서 하례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죽띠 하나씩을 사람들에게 하사하면서 철원 시중에게는 특별히 가죽 갑옷 한 벌을 내렸으므로, 절하고 받은 뒤에 물러 나왔다.

동정(東亭)이 햅쌀을 보내 준 것을 사례하며

8일에 안 흥녕(安興寧), 한 청성(韓淸城)과 함께 천수사(天水寺) 서쪽 연못가의 영창군(永昌君) 별장에서 연꽃을 감상하였다. 이때 따라온 사람은 흥녕의 자제인 제학공(提學公)과 대간(大諫), 그리고 나의 자식 셋과 왕 정랑(王正郞)이었다.

김 사공(金司空)에게 부쳐 보내다.

박중용(朴仲容) 승지(承旨)가 궁중의 술을 받들고 와서 하사하였다. 그다음 날 자문(紫門)에 가서 사은(謝恩)하니 내관 김실(金實)이 나와서 한 잔 술을 내렸다. 이에 절하고 마신 다음에 물러 나왔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장차 바닷길을 통해 금릉(金陵)에 조공(朝貢)을 올리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비가 그치고 날이 맑게 개자 다시 연꽃을 감상하고 싶은 흥취가 일어나기에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비가 다시 오기에

연꽃 구경을 하러 가자는 서린(西隣)의 초청을 재차 받았건마는, 비가 방해하는 바람에 유감스럽게도 못 가게 되었기에, 이 느낌을 한 수의 시로 지어 읊고는 기록해서 증정하였다.

날이 갠 것이 기뻐서

어제 희안(希顔)과 자안(子安)이 내방하였다.

한 청성(韓淸城)이 안 쌍청(安雙淸)과 나를 초청하여 법화사(法華寺) 연못에서 연꽃을 감상하였다. 소나무 사이에 장막을 설치하고 사람마다 연잎 한 자루씩 가져다 앞에 놓고는 일산(日傘)으로 삼았으며 또 벽통음(碧筒飮)을 하기도 하였다. 이날 우리를 따라온 사람은 쌍청의 자제인 제학공(提學公)과 대간(大諫), 청성의 셋째 아들인 왕부(王簿), 그리고 나의 자식 셋과 나의 문생 허 판사(許判事)였다.

설 제학(偰提學)과 이 판서(李判書)가 중국에 진공(進貢)할 표문(表文)을 상의하다.

정좌(靜坐)

남 정당(南政堂) 의 백일재(百日齋)에 가려고 하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그만두다.

날이 언뜻 개기에

참새들

노경(老境)

원정(園丁) 서송(西松)이 야채를 보내오다.

유감(有感)

중도(中道)의 염사(廉使)가 젓갈 두 단지를 보내 준 것을 감사하며

해주 목사(海州牧使)가 소라 젓갈을 보내 준 것을 감사하며

정 영공(鄭令公)에게 부쳐 보내다.

우중(雨中)

유항(柳巷)에게 보내다.

연꽃을 노래하다.

하늘이 밝아 오다.

즉사(卽事)

이호연(李浩然)이 와서 말하기를, 곽충수(郭忠守) 판서가 죽어서 벌써 영구(靈柩)가 장지(葬地)로 떠났다고 하기에, 깜짝 놀라 부르짖다가 짧은 시를 지어 애도하였다.

새로운 소식을 듣고서

비가 그친 뒤에 유항(柳巷) 생각이 나서

장자온(張子溫) 영공(令公)에게 부치다.

동북면(東北面)을 진압하러 나가는 이 판삼사사(李判三司事)를 전송하며

유항이 술을 보내 준 것에 감사하며

윤 영공(尹令公)에게 부쳐 보내다.

백일홍(百日紅)을 노래하다.

7 19일은 익재(益齋) 시중(侍中)의 기신(忌辰)이다. 자손들이 청교(靑郊) 동쪽 법당사(法幢寺)에서 재()를 지내며 명복을 빌었으므로 내가 병을 무릅쓰고 가서 예식을 도운 다음에 돌아와 이날의 느낌을 시 한 수로 읊었다.

동북면(東北面)에 경보(警報)가 울렸다는 소식을 듣고

정 첨서(鄭簽書)도 병이 들고 나도 병이 들어서 두 집안의 왕래가 끊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호연(李浩然)이 나를 찾아와서는, 내일 첨서가 동북면 원수부(東北面元帥府)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난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교외로 나가서 전송하려고 하였으나 말을 타기가 어렵기에 시 한 수만 앉아서 짓고는 그가 돌아오면 노래를 불러 위로하기로 하였다.

맹운(孟雲) 선생이 후덕부 판사(厚德府判事)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기쁜 마음에 하례하려고 달려가다가 도중에 이 시를 짓고는 장차 입으로 읊어 주려고 하였는데, 마침 외출 중이기에 그냥 집에 돌아와서는 이를 기록하여 좌하(座下)에 증정하였다.

이 이상(李二相)을 축하하며

문생 윤 대언(尹代言) 을 축하하며

한 평리(韓評理)에게 부쳐 보내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뜬구름

자소(自笑)

8 11일에 덕수(德水)의 농장에서 노닐어 보려고 남대문 동쪽 모퉁이에서 종학(種學)을 기다리다가 주위의 산들을 바라보며 한 수 짓다.

진봉산(進奉山)과 물 하나를 사이에 둔 언덕에 앉아서 종학을 또 기다리며

불각사(佛覺寺)를 바라보며

동년(同年)인 신익지(申翌之) 판서(判書)의 옛 전장(田莊)을 바라보며

전장(田莊)에서 혼자 웃다.

종학(種學)이 학질에 걸렸는데 이날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급히 돌아오다.

길 가는 도중에 지은 한 수

서해도(西海道)의 이미생(李美生) 염사(廉使)가 참새고기를 보내왔기에 감사하는 뜻을 표하다.

강릉도(江陵道)의 염사(廉使) 서구사(徐九思) 좌랑(佐郞)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그의 모친이 강릉부(江陵府)에 있었다.

내일 중추절에 달구경을 해야 할 텐데 누가 나를 불러 줄지 모르겠기에 몇 구절의 시를 읊조려 보다.

서린(西隣)의 길창군(吉昌君)을 모시고 쌍청정(雙淸亭)으로 가서 병문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수 짓다.

맹운(孟雲) 선생이 북쪽 홍경원(弘慶院)의 행향(行香)하는 법석(法席)에 가 있었으므로 내가 찾아가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북풍(北風)

장 학록(張學錄)이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갈 때 전송하다.

주 전부(周典簿)가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갈 때 전송하다.

연꽃의 말을 대신해서 동정(東亭)에게 부치다.

총재가 성묘하고 돌아오자 도당(都堂)이 연못가에서 영접하였는데, 제공(諸公)으로부터 공식 초청이 없기에 합좌(合坐)하기가 곤란해서 또 연꽃의 말로 대신하여 짓다.

내가 광흥(狂興)이 발동해서 찾아가고도 싶었지만 고질병이 방해를 하기에 별수 없이 앞 시의 운을 써서 연꽃의 말에 대답하였다.

근작(近作)을 기록하다.

손자 맹균(孟畇)과 경동(敬童)에게 보여 주다.

어제 김 판사(金判事) 의 저택에서 매화를 감상하고 나서, 오늘 세 수를 지어 부쳐 보냈는데, 모두 실제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한주팔(韓州八)의 촌사(村舍)에서 노닐다.

여흥(驪興) 청심루(淸心樓)에 걸린 시에 차운하다.

여강(驪江)에 모여 술 마시며

유감(有感)

군수(郡守) 이공(李公)이 찾아온 것을 감사하며

전라도의 최 안렴사(崔按廉使)를 보내며

완산(完山)의 유 부윤(柳府尹)에게 답하다.

고성(高城) 이 사군(李使君)과 작별하면서 남겨 주다.

통주(通州) 정 사군(鄭使君)과 작별하면서 남겨 주다.

통주 장 학장(張學長)과 작별하며 남겨 주다.

문주(文州)의 김 동년(金同年) 에게 부치다.

서주(西州)의 성루(城樓)에 제()하다.

문생 최중정(崔中正)의 죽당(竹堂)에 제하다.

목은시고(牧隱詩藁) 35

장단음(長湍吟)

기사년 12 6일에 순위부(巡衛府)의 제공(提控)인 박() 이 와서 내교(內敎)를 전하였는데, 그 내용은 나에게 장단(長湍)의 새로운 거소(居所)로 나가서 지내라고 명하는 것이었다. 이에 내가 대궐을 향하여 숙배(肅拜)를 하고는 두 분 시중(侍中)에게 글을 올린 다음에 제공과 작별을 하고 말에 올랐다. 대덕산(大德山) 아래에 이르렀을 때 날이 벌써 저물었으므로 감응사(感應寺)에 들어가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하였다. 문생(門生) 유경(劉敬)이 두주(斗酒)를 가지고 와서 위로해 주기에 연거푸 몇 잔을 마셨더니 약간 취기가 돌았다. 잠자리에 들어서 새벽까지 잠에 떨어졌다가 승려가 아침 예불을 하며 치는 쇳송 소리를 듣고서 시를 지었다.

7일 길 가는 도중에

현령(縣令) 문군(文君)이 내방하다.

맹유()가 개경으로 돌아가다.

송헌(松軒) 시중(侍中)에게 부쳐 보내 은혜에 사례하였다.

성랑(省郞) 제형(諸兄)에게 부치다.

절구를 권()에게 부쳐 몸소 따라오는 일을 늦추게 하다.

16일에 삼랑(三郞)이 주식(酒食)을 보내다.

적성(赤城)의 유찬(兪瓚) 판사(判事)가 동아와 우엉을 보내왔기에 우스개 시를 지어서 감사드리다.

유감(有感)

수봉(琇峯)이 찾아왔다가 돌아가다.

18일에

자영(自詠)

삼랑(三郞)이 부꾸미와 병술을 보내다.

자해(自解)

20일에 눈앞의 일을 소재로 하여 시를 짓다.

맹균(孟畇)이 왔다가 또 가다.

윤가관(尹可觀)의 부인 권씨가 쌀과 오이장아찌를 보내오다.

김 상장(金上將)이 오다.

청원을 허락받지 못하고서 혼자 읊다.

안심(安心)

28일에

욕어(欲語)

29일에

송헌(松軒)에게 부치다.

경오년 1 7일에 적성(赤城) 유 판사(兪判事)가 술 한 병에다 달떡과 부침개를 한 그릇에 넣고 여기에 또 생선 한 마리를 보내오다.

1 7

권총()이 와서 작별 인사를 하다.

이형(姨兄)인 덕원군(德原君) 김창(金敞)이 족손(族孫)인 총지(摠持)의 승록(僧錄)을 대동하고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나를 먹여 주다.

사람을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집사람이 오다.

입춘(立春) 전날에

입춘(立春) 첩자(帖字)

송헌에게 부치다.

유감(有感)

적성(赤城)의 유 판사(兪判事)가 약밥을 보내왔기에

정오가 될 무렵에 용철(龍鐵)이 약밥을 보내오다.

이웃집 늙은이인 이 상서(李尙書)와 박 중랑(朴中郞), 김석(金碩), 김언(金彦), 이우중(李祐仲), 손숙휴(孫叔畦)가 윷놀이를 하기에 옆에 앉아서 구경하다.

말 타고 사냥하러 가는 모습을 보고서

옴병에 걸려 마음이 편치 못하기에 며칠 동안 시를 읊지 못하다.

문생(門生)인 길 주서(吉注書)가 집에서 보임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가 늙고 어린 가족들을 데리고 선주(善州)로 돌아갈 적에 나를 찾아와 작별 인사를 하고는 하룻밤을 묵고 가다.

23일에 송헌(松軒)에게 부쳐 올리다.

정 이상(鄭二相)에게 부치다.

중화당(中和堂) 동네의 권 밀직(權密直)이 술 한 병과 쇠고기와 백미 스무 말을 보냈기에 붓을 달려 사례하다.

낭장(郞將) 이연(李延)의 집에서 향도(香徒)를 모아 놓고 술자리를 벌였는데, 노부(老夫)도 가서 그 사이에 끼어 있다가 약간 취기가 돌기에 먼저 나왔다.

마음에 관한 시 한 수를 지어서 송헌(松軒)에게 부쳐 올리다.

자영(自詠)

적성()의 유 선생(兪先生)을 방문했으나 그를 만나지는 못하고, 마중 나온 부인을 따라 손님의 자리에 들어섰더니, 술과 음식을 매우 풍성하게 차려 놓고 대접을 하였다. 그러고는 또 후원(後園)의 작은 동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한번 바라보라고 청하면서, 이것이 바로 남편의 뜻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노부(老夫)에게 그 형승(形勝)을 알게 하고자 함이었다. 이에 돌아와서 이날의 일을 기록하였다.

경복(敬僕)이 왔기에 이 시를 짓고는 중동(中童)에게도 보여 주다.

자영(自詠)

밭 가는 이들이 장차 들판에 가득하겠기에 나 자신을 비웃으면서 한 수 짓다.

이 판서(李判書) 가 두 단지의 술과 백미 열 말을 보냈기에, 이렇게 감사하는 시를 지어서 맹균(孟畇)에게 읊어 드리도록 하였다.

4 2일에 은계(隱溪)가 나를 찾아와 유숙하면서 입으로 읊기를 한평생 행동거지 인연 따라 되는 대로, 빈부와 부침 모두 하늘에 맡겨 버렸구려. 나는 알지 그대는 누항에 편할 수 없는 것을, 성군이 남면하여 존현을 의논케 하리니.[平生行止任隨緣 貧富升沈付與天知子不能安陋巷 聖君南面議尊賢]라고 하였다. 그 말뜻을 살펴보니 노부가 감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답하지 않을 수도 없기에 화운(和韻)하여 두 수를 이루었다.

이날 문생인 조 밀직(趙密直)이 술과 음식을 보냈기에 앞의 운을 써서 시를 지은 뒤에 인편에 부쳐 보냈다.

중동(中童)을 데리고 인장(隣長) 박영기(朴英起)와 함께 장단(長湍) 석벽(石壁)의 철쭉꽃을 구경하다.

장단 현령(長湍縣令) 문군(文君)과 석벽에서 다시 노닐었다. 문군의 마중을 받고 물이 한데 모이는 상류까지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고 음식을 먹으며 즐기다가 늦게야 돌아왔는데, 이 자리에 맹균(孟畇)과 유기(柳沂)가 참석하였다. 이날 문생인 맹사성(孟思誠)과 이치(李稚)가 와서 소식을 알려 주기를, 대성(臺省)이 전의 일을 또 논핵하여 함창(咸昌)으로 부처(付處)하였다고 하였다.

8일에 집사람이 왔다. 이는 남쪽으로 떠나는 나를 전송하기 위함이었다.

집사람을 데리고 석벽에서 노니는 중에 이웃집 박씨가 물을 건너다 말에서 떨어져 삿갓을 잃었다.

서촌(西村)의 김룡(金龍) 내관(內官)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찾아오다.

중동(中童)을 급히 보내 나의 뜻을 담은 이 시를 송헌(松軒)에게 올리게 하였나니,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회포를 가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환암(幻菴)이 보낸 서신을 받고는 짤막한 시로 답해 올리다.

함창음(咸昌吟)

경오년 8 13일에 함창에 도착했다. 압송관(押送官)인 근시(近侍) 낭장(郞將) 주인기(朱仁起)가 돌아가는 편에 두 분 시중(侍中)에게 부쳐 올렸다.

출척사(黜陟使) 영공(令公)에게 부쳐 올리다.

중구일(重九日) 뒷날에 청주(淸州)로 가는 사람이 있기에 절구 한 수를 읊어서 종학(種學) 첨서(簽書)에게 내가 평안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라고 전해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그 사람이 끝내는 그곳에 가지 못하였다.

백손(伯孫) 맹균(孟畇)이 나를 따라서 남쪽으로 왔는데, 그의 누이가 병들어 매우 위태로운 상태라고 집사람이 소식을 전해 왔다. 이에 내가 맹균에게 권하기를, 형제는 천륜(天倫)인데, 한번 세상을 떠나면 다시 만나 볼 길이 없으니, 너는 급히 가서 보도록 하라. 나는 여기에 있어도 네가 보다시피 친척들이 향리에 가득하여 날마다 상종하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나는 이제 늙어서 다른 소망은 없다만, 단지 너의 조모(祖母)가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다. 하였다. 이에 맹균이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났는데, 하룻밤을 혼자 묵다 보니 느낌이 없지 않기에 다음 날 술에 취한 김에 시 한 편을 지어서 기록하였다.

동년(同年)인 경산부(京山府)의 김 판서(金判書) 에게 부치다.

희제(戲題)

하광조(河光祖) 서령(署令)에게 지어 준 시

출척사 영공(令公)에게 부쳐 올리다.

출척사에게 부치다.

권신재(權愼齋)에게 부치다.

희제(戲題)

유감(有感)

기사(紀事)

오천(烏川)에게 부치다.

송헌(松軒)에게 부치다.

삼봉(三峯)에게 부치다.

도당(都堂)에 올리다.

유감(有感)

나의 우거(寓居)

유 진천군(柳晉川君)에게 부치다.

이첨(李詹) 승지(承旨)에게 부치다.

충주목(忠州牧)으로 있는 황 동갑(黃同甲)에게 부치다.

여흥(驪興)의 권 지군(權知郡)에게 두 수 부치다.

칠석일(七夕日)에 주인인 대선사(大禪師)가 음식상을 차려 주기에 노부(老夫)가 취해 누워서 절구를 읊조리고는 다음 날에 기록하여 올렸다.

이날 감군(監郡) 정공(鄭公)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기에 그다음 날에 시를 지어 감사드렸다.

감군공(監郡公)이 보리 두 섬과 참깨 다섯 말을 보내오다.

정산(定山)을 겸임하고 있는 이산(尼山)의 신 감무(申監務)에게 부치다.

구좌(久坐)

상주(尙州) 교수관(敎授官) 이여신(李汝信)이 찾아왔는데, 그는 나의 문생이다.

매미 소리를 듣고

일찍 일어나서 소나무를 바라보고는 느낌이 있기에

안동(安東) 권신재(權愼齋)가 글을 보내며 차운한 시를 함께 보여 주기에 다시 그 운을 써서 부쳐 올리다.

대우탄(大雨歎)

이백(李白)의 시를 읽고

이승길(李承吉) 중랑(中郞)이 새로 빚은 술을 가지고 와서 대접한 것이 두 차례나 되기에 단가(短歌)를 지어서 애오라지 이에 보답하려 하였다.

우제(偶題)

음소(吟嘯)

기쁜 일을 기록하다.

해주(海州)의 족장(族長)에게 받들어 부치다.

답답한 마음을 풀다. 김 상장(金上將)이 술을 들고 찾아와서는 밤이며 완두콩 등을 먹여 주었다.

8 3일에 상주(尙州)의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이 번육(膰肉)을 보내오다.

7일에 출척사(黜陟使) 영공(令公)이 덕통(德通)을 지나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병 때문에 직접 나가서 뵙지 못하고 대신 글로 써서 부쳐 올렸다.

잠 시자(岑侍者)가 개천사(開天寺)로 돌아가겠다고 하직 인사를 하기에 붓을 달려 환암 국사(幻菴國師)에게 부쳐 올렸다.

백련회(白蓮會) 자리가 파한 뒤에 박 영공(朴令公)을 머무르게 하여 중추절을 함께 보내다가 자정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동이 트기 전에 공이 떠났는데도 나는 한창 잠에 곯아 떨어져서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였다. 이에 새벽에 일어나서 읊다.

양산 대선사(陽山大禪師)가 송이버섯을 보냈기에 감사의 뜻을 표하다.

첨서(簽書)에게 부치다.

어떤 일에 느낀 점이 있어서

송헌(松軒)에게 부쳐 올리다.

포은(圃隱)에게 부쳐 올리다.

금주음(衿州吟)

홍무(洪武) 임신년(1392, 공양왕4) 여름 4 14일에 상이 사순랑(司楯郞)을 보내 하교하시기를, 두 아들은 사실과 다르게 일을 말한 죄에 저촉되었으므로 지금 모두 관례대로 폄직(貶職)한다. 경의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양강(兩江) 밖으로 나가서 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신() 색이 기쁜 마음에 땅을 구르고 춤을 추면서 사은하고는 곧장 출행하였는데, 보현원(普賢院)에 이르렀을 때 비가 오기에 조금 머물렀다.

임진(臨津)에 도착하여 김귀련(金龜聯) 판사(判事)의 농장에서 묵다.

15일에 행주(幸州) 유 영공(柳令公)의 농장에서 묵다.

16일에 공암(孔巖) 나루를 건너다.

이날 광주(廣州)의 마을에 도착하였으니, 이곳은 나의 하인과 하녀가 거주하는 곳이다. 여기에서 며칠 동안 머물면서 단가(短歌)를 지어 불렀다.

우제(偶題)

현 판서(玄判書)에게 부치다.

동년(同年)인 강 판사(姜判事)의 벽에 쓰다. 그가 나에게 진맥(診脈)을 해 달라고 부탁하기에 장난삼아 이렇게 지었다.

강 동년(姜同年) 정헌(靜軒) 선생에게 부쳐 올리다.

우거(寓居)하는 시골집에 제()하다.

제형(弟兄)

남경 윤(南京尹)에게 부치다.

박돈지(朴惇之)가 생선을 보내 준 것에 대해 사례하며 아울러 소회를 피력하다.

집 북쪽의 자그마한 동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다.

송헌(松軒)에게 부쳐 올리다.

현 판서(玄判書)가 메기를 보낸 것에 사례하면서 느껴지는 점이 있기에 시 세 수를 짓다.

관악산(冠嶽山) 선각암(禪覺菴)의 철 수좌(澈首座)가 장아찌와 석이버섯[石茸]을 보내오다.

즉사(卽事)

관악산 신방사(新房寺)의 주지(住持)는 무급(無及)의 도반(道伴)이다. 그가 삭방(朔方)에서 돌아와 이 절간에 머물면서 노숙(老宿) 아무 아무와 함께 먹을 것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먹여 주었다.

5 17일에 숙휴(叔畦) 진사(進士)에게 급히 글을 보내 서울에 들어와서 일을 주관하게 하다. 의지할 곳 없이 영락한 내 신세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스스로 비웃으며 한 수를 지어 읊다.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안산(安山)을 맡고 있는 정사운(鄭士雲)이 백미(白米) 열 말과 건어(乾魚) 열 마리와 술 두 병을 보내면서, 남 계정사(南計定使)의 부탁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 안산은 경기 지방에 이제 막 부임하였고 남군은 양광도(楊廣道)의 계정사로 나가 있으니 이들이 어떻게 서로 소식을 통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분명하기에, 장난삼아서 단율(短律)을 지어 보았다.

날이 맑게 갠 것을 기뻐하며 숙휴(叔畦)를 위로하다.

즉사(卽事)의 시 세 수를 지어 직설적으로 서술하였으니 이는 허언(虛言)이 아니다.

경치를 대하면서 느낌을 토로하다.

현 판서(玄判書)를 통해서 띠풀로 지붕을 덮은 새 집을 구하다.

남재(南在)가 순채(蓴菜)와 술과 주지(奏紙)를 보내오다.

광주 목사(廣州牧使) 최서(崔恕)에게 부치다.

어제 안양(安養)의 도생(道生) 승통(僧統)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찾아와서 나를 위로하였는데, 오늘 아침에는 또 종이를 보내왔기에, 내가 시를 지어서 사례하였다.

사방에 구름이 없는 것을 보고는 느낌이 들기에 짓다.

잠시 뒤에 흰 구름이 조각조각 하늘을 가득 덮기에 또 한 수를 지어 읊다.

양성(陽城)의 감무(監務)인 고() 아무가 백미 다섯 말과 술 두 병을 보내왔다. 그는 한식날에 한산(韓山)으로 성묘를 갔다가 돌아올 적에 사평원(沙平院)까지 나를 호송했던 자이다.

신정(新亭)

얼마 전에 동년(同年)인 정헌공(靜軒公)을 방문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나의 아들인 청곡(靑谷) 스님이 가까운 시일 안에 북쪽으로 올라오겠다고 편지를 보내 알려 왔으니, 공도 반드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는 그가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 어제 풍문으로 듣건대 청곡이 온 지 며칠이 지났다고 하였다. 그런 중에 요행히 그가 보낸 순채(蓴菜) 항아리 하나를 선물로 받게 되었는데, 이는 애오라지 봉양하는 하나의 음식 맛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판조계사(判曹溪事)인 죽암(竹菴) 진공(軫公)이 내원(內院)에서 물러 나와 주석(住錫)하고 있는 억정사(億政寺)로 돌아갈 적에 암곶(岩串)에 머물면서 반야탕(般若湯)과 소채오성(蔬菜五星)을 가지고 와서 나의 삼출(三黜)을 위로해 주었는데, 이때 마침 나의 새 집이 이루어졌으므로 해 그림자가 옮겨갈 때까지 함께 앉아 있다가 떠났다.

죽암(竹菴)을 초청해서 변변찮은 음식이나마 대접하고 있던 차에, 박 판서(朴判書)와 강 판사(姜判事)와 현 판서(玄判書)가 마침 왔기에, 함께 담소하며 한껏 즐기다가 자리를 파하였다. 이에 앞 시의 운을 써서 시를 짓다.

손님들이 떠난 뒤에 홀로 앉아 강변의 경치를 음미하면서 차마 떠나지를 못하고 있던 차에, 권 홍주(權洪州)가 마침 찾아왔기에 다시 술을 청해서 조금 마시다.

이튿날 죽암이 떠날 적에 시간에 맞춰서 전송하지 못하였다. 박 판서와 함께 권 홍주의 임시 거처에 가서 아침밥을 먹었다. 더위가 심하기에 강에 배를 띄웠는데 부인의 배가 또 와서 조금 술을 마시다가 저물녘에 헤어졌다. 이날 현 판서와 용산(龍山)의 신 판서(辛判書)도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왔으니, 이는 권 홍주를 전별하기 위함이었다.

다음 날에 몸이 고단해 누워서 작은 소리로 읊다.

기탄(岐灘)의 장교(長橋)에서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판서(判書) 박 장원(朴壯元)을 전송하다.

여흥음(驪興吟)

6 7일에 강 동년(姜同年)과 현 인장(玄隣長)에게 부치다.

14일에 군수(郡守)가 찾아온 것을 감사하다.

16일에 문생인 서 양근(徐楊根)이 서늘한 대자리 넉 장을 보내왔기에, 이 시를 지어서 전일에 한 명의 승통(僧統)을 데리고 찾아와 준 것까지 아울러 감사하였다.

여흥 군수(驪興郡守)가 배를 끌고 와서는 노부(老夫)에게 뱃놀이를 함께 하자고 초청하였는데, 강 복판에 이르러서 사방을 돌아보니 실로 즐길 만한 곳이었다. 흥에 겨워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노자암(鸕鶿岩)까지 가서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배를 돌려 흐름을 타고 내려오니 정말 통쾌하였다. 진국인 술 맛과 신선한 물고기 회 그리고 혼자서 불고 혼자서 퉁기는 연주 솜씨는 실로 뒤에까지 운치가 남았는데, 저녁 늦게 누대 위에 돌아오니 마치 신선 놀이를 하다가 집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다음 날에 붓을 잡고 이 일을 기록하였다.

보리 대선사(菩提大禪師)에게 부치다.

첨서(簽書)에게 보여 주다.

상원 선사(上院禪師)에게 부치면서 아울러 김석해(金石諧) 좌윤(左尹)에게도 소식을 전하다.

병률(甁栗)의 김 판사(金判事)에게 받들어 부치면서 아울러 권 판사(權判事)에게도 소식을 전하다.

향교(鄕校)의 김 소윤(金少尹)과 황 소윤(黃少尹)에게 부치다.

권대로(權大老)와 이극명(李克明) 상서(尙書)에게 부치다.

지군(知郡) 박공(朴公)의 모친은 바로 나의 좌주(座主)인 송당(松堂) 선생의 따님이시다. 지군이 모셔 와서 봉양하며 효도를 극진히 하는 가운데, 나도 다행히 맛은 없으나 음식 몇 가지를 얻어 대접해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주인이 나를 데리고 배에 올라 피서(避暑)를 하였는데, 저물 때까지 있다가 집에 돌아왔다.

문생(門生)인 권 첨서(權簽書)가 오고, 또 그의 사위인 박모(朴某)의 부친이 천녕(川寧)에서 술을 들고 찾아와 위로해 주었다. 내가 바야흐로 봉암(鳳巖)에 있으면서 옛 산하(山河)를 돌아보며 술 한 잔 들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에 박공(朴公)이 찾아왔으므로 흔연히 농담을 하며 수작(酬酌)을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군수(郡守)가 나를 초청했으므로 또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였다.

강릉(江陵) 정 영공(鄭令公)이 안부를 묻고 선물을 보내 준 것에 대해 삼가 사례하다.

칠석(七夕)

종선(種善)에게 부쳐서 보여 주다.

연림(蓮林) 밖으로 찾아 나서다.

흥법사(興法寺)의 당두(堂頭)가 장차 내원당(內院堂)으로 들어갈 즈음에 벽사(甓寺)를 찾아왔기에, 내가 고경(古鏡) 늙은이를 데리고 그와 함께 배를 띄우고서 군지(郡池)에서 연꽃을 감상하였다.

환암(幻菴)에게 부쳐 올리다.

7월 보름 백중날의 일을 기록하며 감회에 젖다.

대서(代書)하여 이 향상(李向上)에게 받들어 답하다.

 

 

201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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