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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오일쇼크’의 공포가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다. 40대 중반 이상의 한국인이라면 지난 1973년과 1979년 전 세계를 강타한 1·2차 오일쇼크의 악몽을 떠올리고 몸서리를 칠 것이다. 오일쇼크 당시 한국은 20%대의 살인적 인플레이션과 마이너스 성장 내지 전년도 대비 반토막난 저성장의 덫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오일쇼크의 재발 조짐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국제 유가 폭등 행진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5월 22일 미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선물가격이 배럴당 133달러까지 치솟고 중동산 두바이유 현물도 123달러에 이르렀다.
연일 치솟는 유가
공급 불균형에 투기세력 가세해 150달러 위협
골드만삭스 “6개월~2년 안에 200달러” 전망
지난 수년간 유가는 지속적으로 급등했고 해마다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으나 ‘3차 오일쇼크’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세계 경제가 양호한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고 석유 의존도가 예전 오일쇼크 때보다 절반 가량으로 낮아졌다는 게 주된 이유로 언급됐다.
그러나 올 들어서 유가가 세 자릿수로 진입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유가는 올해 초 뉴욕상업거래소(NYMEX) 선물거래소에서 처음으로 배럴당 100달러 선을 돌파한 뒤 무서운 속도로 급등, 마침내 130달러 고지까지 밟았다.
130달러는 1979~1980년의 2차 오일쇼크 때와 같은 충격을 안겨주는 가격대로 추정되는 150달러 선에 육박한 수치여서 세계인들이 받는 충격이 컸다. ‘3차 오일쇼크’란 말이 이때부터 설득력을 얻으면서 급속히 확산됐다.
과연 3차 오일쇼크는 올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물론 전망이 엇갈린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수년 내로 3차 오일쇼크가 발생할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치적 이유로 단시일 내에 유가가 폭등한 1·2차 오일쇼크와 달리 최근 수년간 지속된 고유가는 수요 공급의 불균형과 투기 세력이 가세해서 빚어진 복합적인 현상이어서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도 지난 5월 초 유가가 6개월에서 2년 내에 200달러로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월가(街) 투자은행 중 원유 거래 규모가 가장 큰 데다 2005년 3월에도 100달러를 넘는 고유가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해 주목 받고 있다. 당시 유가는 55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한가한 이야기로 비치는 것도 사실이다. 실생활에서는 이미 ‘오일쇼크’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 ▲ 지난 5월 26일 화물연대 경남지부 소속 운전기사들이 유류세 인하 등을 요구하며 운송거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조선일보 DB
오일쇼크가 오면
물가상승 → 소비위축 → 투자감소의 악순환
유가 10% 오르면 물가 0.2%P 바로 상승
오일쇼크의 대표적인 현상이 인플레이션이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오일쇼크는 곧 인플레이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일쇼크는 ‘물가 상승 → 구매력 저하 → 소비 위축 → 투자 및 생산 감소 → 무역량 감소’의 악순환을 발생시킨다.
유가 상승은 당장 교통비 부담을 늘린다. 국제석유값 급등은 국내 기름값 인상으로 이어져 자가용 및 경유 차량 운전자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기름값이 오르면 교통요금도 오르게 마련이다.
현대 문명은 석유문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쓰는 물건 중 석유와 관련 없는 물건을 찾는 게 빠를 정도로 석유는 대부분 제품의 원료가 된다. 석유값이 오르면 이들 물건의 재료비가 오르고 기업들은 제품 가격을 인상하게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통계로 입증된다. 국내 소비자물가는 지난 4월에 4.1%나 껑충 뛰어 3년8개월 만에 최고 기록을 세웠다. 원재료 물가는 전년 같은 달 대비 56%나 폭등, 10년 3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우리는 이미 ‘고물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지난 4월 ‘유가상승 충격의 요인분해와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발표, “유가가 10% 상승할 경우 소비자물가는 연간 0.2%P 오른다”고 추정했다.
유가가 오르고 국제 원자재가격이 동반 상승하면서 당장 전기요금도 인상이 불가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훈 지식경제부 차관은 지난 5월 21일 기자들과 만나 “하반기에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전기요금은 공공요금의 바로미터다. 전기요금에 이어 가스, 지하철 요금 등 각종 공공요금 인상이 올 하반기에 줄줄이 예정돼 있다.
그러나 일반 국민이 느끼는 체감 인플레는 이보다 훨씬 높다. 개별 생필품의 인상폭이 높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1인분 5000원에 묶여 있던 된장찌개, 김치찌개, 냉면이 올 들어 대체로 6000원 이상으로 20% 가량 올랐고 저렴한 가격으로 각광 받던 모 프랜차이즈의 김밥도 최근 한 줄에 1000원에서 1500원으로 50%나 올랐다.
소득증가율보다 물가인상률이 높아지면 가처분소득이 줄어들고 이는 소비 감소로 이어진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서울·경기 등 7대 도시 800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최근 소비행태 변화’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불황 극복을 위해 의류비(24.5%), 외식비(18.6%), 문화레저비(12.4%)부터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 부문의 지출이 줄어들면 올해 4%대의 경제성장률 달성도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일상생활의 변화
경차로 바꾸고 대중교통 이용… 자동차산업 직격탄
교외 식당 폐업 속출… 돈 대신 부동산·금 선호
일상생활의 변화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승용차를 세워두고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승용차를 굴리는 사람도 기름을 적게 먹는 경차로 눈을 돌리고 있다. 덕분에 기아차 모닝의 경우 새 차를 받으려면 주문 후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한다. 승용차 대신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자전거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한 쇼핑몰은 올 2월 이후 재작년보다 10배나 많은 자전거를 팔았다.
교외와 관련된 사업들은 죽을 쑤고 있다. 교외에 위치한 식당과 카페는 기름값에 부담을 느낀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면서 극심한 영업 부진에 시달리고 있으며 문을 닫는 업소도 속출하고 있다. 고유가가 지속되면 출퇴근 비용이 많이 드는 교외 아파트의 인기도 내려갈 것으로 전망된다. 고유가 시대에는 교외 할인점도 시들해질 전망이다. 물건 싸게 사려고 먼 곳에 있는 할인점 가려다 기름값이 더 들겠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멍가게나 동네 슈퍼마켓이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고기 소비 패턴도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곡물 등 원자재값이 유가와 연동되는 경향이 강해 최근 수년간 사료값도 폭등했다. 이에 따라 사료가 많이 드는 소와 돼지는 덜 키우고 사료가 적게 드는 닭 사육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농어민들은 면세용 기름값이 많이 올라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인플레이션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현물 선호 현상이다. 돈을 들고 있을수록 화폐 가치가 떨어지는 만큼 손해를 보기 때문에 부동산, 금 등을 선호하게 된다. 금값은 올 들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경우 자동차 운행을 자제한 결과 지난 3월에 월간 기준으로 4.3%(100억마일)가 줄었다.
이는 2차 오일쇼크가 왔던 1979년 3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며 연간 기준으로도 1942년 조사를 시작한 이후 가장 큰 폭의 감소다. 일본에서는 조업을 중단한 중소기업이 속출하고 있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최근 정부의 유가 인상에 맞서 대규모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일반인이 일상생활에서 고통을 겪는 것 이상으로 기업의 부담도 커지고 있다. 기름을 적게 먹는 IT(정보기술) 등 일부 업종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업은 큰 타격을 받고 있다. 특히 자동차산업은 고유가의 직격탄을 받고 있다. 자동차산업은 부품 수만 2만개가 넘는 등 중소기업과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하다.
통계로 보면 자동차는 지난해 수출 284만대, 수출액 497억달러를 달성해 지난해 한국의 전체 수출액 중 13.4%를 차지했다. 최근 회복세를 보이던 글로벌 증시와 국내 증시도 3차 오일쇼크 이야기가 나오면서 휘청거리고 있다. 특히 항공, 화학, 해상운송 등 유가 폭등의 직접 영향권에 놓인 업종들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국내 1위 항공사인 대한항공은 1분기에 3255억원의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 주식 전문가들은 “고유가 시대에는 이들 업종에 대한 투자를 주의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그날’ 언제 올까
연평균 유가 150달러가 마지노선… 현재 105달러
신재생에너지 등 대책 시급… 정부는 안이한 대처
한국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에서도 고유가에 취약한 산업구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어 3차 오일쇼크의 충격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의 하나로 분류된다. 한국의 주력 산업인 석유화학·철강·조선 등은 모두 에너지를 많이 쓰는 업종이다. 한국은 OECD국가 중 에너지소비증가율이 최상위권이다.
3차 오일쇼크가 올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전문가들이 3차 오일쇼크 진입가격으로 제시하는 150달러 전후 가격대는 유가가 일시적으로 200달러에 진입해야 도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150달러는 연평균 유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5월 26일 현재 연평균 유가는 105달러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설마 하고 치부되는 배럴당 200달러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근거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3차 오일쇼크가 임박했다고 가정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와는 거리가 멀다. 근본적인 대책으로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늘리는 것이 지적되지만 한국은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06년 기준 우리나라의 신재생 및 기타 에너지 비중은 2.4%로 전년도의 3.1%에 비해 줄어들었다.
정부도 적절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국민들 사이에서 위기의식이 없는 것도 문제다. 과거 같으면 차량 10부제를 해도 벌써 했을 시점이지만 민간 차원에서도 차량 운행을 줄이기 위해 10부제라도 하자는 주장은 나오지 않고 있다.
3차 오일쇼크가 특히 한국의 입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고도성장기였던 과거와 달리 현재의 한국은 활력을 잃고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됐다는 점이다. 또 과거의 오일쇼크는 단기간에 그쳤지만 현재의 고유가는 수년간 지속적으로 진행돼왔다는 점에서 한국이 쉽게 극복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재계 관계자들은 “민·관이 현재의 고유가 사태를 직시하고 위기의식을 가져야 활로가 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1·2차 오일쇼크
1차 1973년 3개월 만에 2.9달러에서 11.6달러로
2차 1979년 한국 물가 28% 폭등하며 마이너스 성장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발발 이후 서방세계의 이스라엘 지원에 격분한 산유국들이 유가 인상 및 감산에 돌입하면서 1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당시 이듬해인 1974년 1월까지 두바이유 가격이 배럴당 2.9달러에서 11.6달러로 폭등했다. 주요 선진국들은 두 자릿수 물가상승과 마이너스 성장이 겹치는 스테그플레이션에 허덕였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가상승률이 1973년 3.5%에서 1974년 24.8%로 치솟았고 경제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졌다.
2차 오일쇼크는 1978년 12월 회교혁명에 성공한 이란이 석유수출을 중단한 것을 계기로 1979년에 발생했다. 배럴당 13달러대였던 유가는 20달러를 넘어섰고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30달러를 넘어 이듬해엔 39달러로 올랐다.
2차 오일쇼크는 특히 한국에 큰 충격을 줬다. 1979년 10·26사태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겹쳐 1980년 실질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물가도 28.7%나 올랐고 실업률도 5%대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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