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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도 사랑이라고?

천하한량 2008. 2. 28. 05:44

불륜도 사랑이라고?

 

 
작년 초 SBS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한 남자가 전화 상담을 신청해 왔다. 30대 초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유부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녀도 저를 사랑하고 있고요. 하지만 가정을 깰 수는 없다는데,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난 기분이 상했다. 국경도 초월하는 것이 사랑이라지만, '간통'은 죄로 취급되는 대한민국에선 실정법 위반 아닌가? 남자에게 물었다. "정말 그 여자를 사랑하세요?" 남자는 단호히 대답했다. "네."

나는 이렇게 충고했다. "제가 알기로 간통법을 위반하면 대략 10개월 정도의 징역을 사셔야 할 겁니다. 그래도 그 여자분을 계속 만나길 원하십니까?" 남자는 할 말을 잃었고, 잠시 후 어색하게 마무리 인사를 하며 전화를 끊었다.

유부녀,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관심 없다. 단지 그들 대부분이 "우리 사랑은 진실하다"고 이야기 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을 뿐이다. 자신이 상대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 상대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은 결국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결혼 생활은 깰 수 없다"고 변명하지 않나.

세상에 그런 사랑 따윈 없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운운하지만, 그렇게 현실적인 조건들을 떠올릴 만큼 이성적이었다면, 애당초 '간통'이라는 치졸한 단어가 사랑 앞에 붙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진실로 두 사람의 감정이 불처럼 열렬하다면 '가정'을 핑계로 '불륜'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쓰는 모욕 대신 '이혼'을 감행할 것이다.

때론 '폼'은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적어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명동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A를 사랑한다"고 목청 터져라 당당히 외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실내 포장마차의 구석진 자리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을 여자를 떠올리는 것은 삼돌이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아무리 그 예술성을 높게 인정받고 '사의 찬미'의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이 수많은 연인들의 마음을 애절하게 울렸다고 해도 불륜은 불륜이다. 도무지 '폼'이 나지 않는 것이다.

두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문 사회면 한 구석에 '방배동에 사는 김모(32)씨, 천호동에 사는 이모(28)씨와 불륜 혐의로 불구속 입건돼'라는 식의 기사라도 나오면, 머리에 재킷 뒤집어쓰고 카메라 플래시 사이로 궁색한 달리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쯤 되면 누군가에게 사랑 운운하기도 낯 뜨거워진다.

원래 금기는 달콤한 법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나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의 상자'가 이미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나. 쾌락은 언제나 금기의 조건들과 함께 있을 때 더욱 강렬해지고, 이 덕분에 쾌락과 사랑을 혼동하며 허우적거리는 이들이 넘쳐난다지만, 불장난은 애송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성냥 통을 완전히 비워버릴 때까지 성냥을 그어대는 건 7살 때쯤 그만두었어야 했다.

나는 사랑에 관한 한 실용주의자다. 사랑은 언제나 대체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불가능한 사랑엔 단호히 고개를 돌리고 새로운 사람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도 단 하나의 사랑을 부르짖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묻겠다. "지금껏 몇 명의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왔나? 적어도 한 명 이상 된다면 당신 역시 사랑엔 또다른 대체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셈 아닌가?"

이렇게 얘기했는데도 "금지된 사랑에도 아직 당신은 미처 모르는 진실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앞서 전화 상담을 요청해왔던 남자에게 했던 충고를 다시 들려주고 싶다.

사랑이라고? 그렇다면 양손에 수갑을 찬 채 몇 개월씩을 감옥에서 보낼 각오가 되어 있는가. 장담하건대 아마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 바쁠 것이다. 후회막심이라는 단어와 함께.

자신의 사랑을 자랑할 수 없다면 그 사랑은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나를 사랑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아봐야, 앞에 앉은 말벗은 당신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욕망을 애써 참고 있다는 것을 이젠 알아차릴 때도 됐다.
 
입력 : 2008.02.27 18:06 / 수정 : 2008.02.27 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