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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돈 빌려 큰 돈 벌겠다'는 투자행태가 화를 자초

천하한량 2008. 2. 16. 16:25
서브프라임 사태는 수수께끼투성이다. 어떻게 미국의 금융 시스템의 한 구석에서 발생한 사건이 세계 금융시장을 위기로 몰아올 수 있었을까? 세계 최첨단 금융기법의 원조(元祖) 격인 월가의 엘리트 은행들이 왜 가장 큰 타격을 받았는가?

작년 봄, 미국 투자은행의 한 위험관리 담당자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는 "은행의 첨단 위험관리 시스템이 유용한 이유는 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용량을 오히려 더 많이 늘여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치 자동차의 브레이크의 성능이 좋아졌으니 전보다 과속으로 운전하겠다는 격이다.

이번 사태는 결국 이런 단기적인 경영 목적과 지나치게 과거 통계에만 의존한 위험관리 방식에서 비롯됐다. 물론 그 배경에는 풍부한 유동성으로 자산가격 상승을 부추겨 온 미국 연방준비이사회(FRB)의 느슨한 통화정책도 한몫했다.

최근 미국의 금융 시스템은 자본시장의 최신 기법인 증권화(證券化·securitization)를 바탕으로 운영된다. 증권화란 대출에 대한 이자 상환 권리를 자본시장에서 사고파는 것을 말한다. 여러 채무자의 대출을 묶고 여기서 발생하는 현금흐름(이자 수익)을 담보로 새로운 증권을 발행해 판매하게 된다.

결국 은행은 대출만 하면 끝이고, 사후에 발생하는 부실 책임은 증권을 소유하는 최종 투자자에게 넘기는 것이다. 부실에 대한 책임이 없는 은행은 당연히 대출 기준을 낮추게 되고, 결국은 채무 상환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까지도 대출해줬다.
▲ 주택 빚을 못갚아 집을 잃는 미국인이 늘어나고 있다. 주택을 차압 당한 소비자들이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로 진출해 금융회사들의 조치를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 중 한 남성이“우리의 집을 살려 달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
■레버리지의 마술

특히 레버리지(leverage·키워드)를 이용하는 금융회사들의 행태는 충격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레버리지란 영어 단어로 지렛대를 의미하는데, 금융 용어로는 남의 돈을 빌어 투자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나의 밑천 100원에 남의 돈 100원을 더 빌려 주식을 사게 되면, 200원어치의 이익을 볼 수 있다. 만약 주가가 1% 상승하면 1원의 두 배인 2원의 이익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주가가 1% 하락하면 이번엔 손해가 2원으로 증가한다. 레버리지 비율이란 총자산에 대한 부채 비율을 말하는데, 현재 미국 시중은행의 레버리지는 10 정도이고, 뉴욕 월가의 투자은행은 20~25에 달한다.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일반인과 금융회사의 레버리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일반 주택 투자자는 집값이 오르면 자산 가격에 비해 부채의 비중이 낮아지기 때문에 레버리지가 낮아진다. 즉 자산 가격과 레버리지는 역(逆)의 관계가 있다. 하지만 금융기관은 자산 가격이 상승하면 오히려 레버리지를 증가시키는 경영 방식을 추구한다. 자산 가격이 증가하면 오히려 더 많은 빚을 얻어, 오른 가격의 자산을 추가로 사들인다는 뜻이다.

이런 행위는 금융기관이 대차대조표를 관리하는 독특한 방식에서 비롯된다. 마치 제조업 기업이 공장을 생산 수단으로 쓰듯이, 은행은 대차대조표를 '생산 수단'으로 사용한다. 자산 가격이 상승할 때는 은행의 수익성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은행 스스로 측정한 위험 수준에 비해 자기자본이 남아도는 현상이 발생한다. 마치 제조업체가 공장 가동 능력을 다 사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금융회사도 과잉 대출 여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금융회사는 남는 대출 한도를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한다. 늘어나는 대출은 생산적인 목적보다는 부동산 담보만 보는 단기적인 부동산 담보 대출로 흘러가게 된다.

따라서 부동산 호황은 증폭되고, 담보 가격도 상승해 은행이 다시 한 번 대출 증가에 박차를 가하는 순환 현상이 발생한다. 이렇게 총자산과 레버리지가 함께 움직이는 것을 '경기 순응적 레버리지'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금융위기가 닥치면, 이 같은 선순환은 역순환 작용으로 돌변한다. 작년 여름에 시작된 서브프라임 금융위기가 바로 이런 경기 순환의 돌변에 의한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수그러지자 비우량 담보대출의 부실이 초래됐고, 부실은 금융기관의 손실로 이어졌다. 달콤한 레버리지 맛이 갑자기 쓴맛으로 변하는 것이다.

레버리지는 이번 금융 위기의 파괴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지난 주말 G7 정상 회담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손실액이 4000억 달러에 달한다는 추정이 나왔다. 엄청난 액수이긴 하지만 미국 자본시장의 전체 규모에 비하면 크지 않다. 미국의 주식시장의 총규모(약 16조 달러)를 고려하면, 4000억 달러는 주가를 약 2.5% 떨어뜨릴 정도의 파급력밖에 안 된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게 벌벌 떠는 이유는 레버리지 때문이다. 예를 들어, 10배의 레버리지를 안고 있는 금융회사들이 3000억 달러의 손실을 입게 되면 그의 10배인 3조 달러의 대출을 축소하게 된다. 은행 대출 축소는 결국 가계나 기업의 자금 운영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어 실물경제에도 당연히 여파가 미치게 된다.

물론 아직 미국은 '선진 금융'을 과시하는 듯 저력을 보이고는 있다. 미국 은행들은 현재까지 약 1200억 달러의 손실을 공식적으로 시인했고, 이중 절반이 넘는 700억 달러 정도의 자기자본 확충 계획을 발표했다. 자금의 출처는 중동과 아시아 나라들의 국부(國富)펀드(sovereign wealth fund)들이다. 미국 국내 자원도 풍부하다. 금융자산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눈여겨보는 투자자들의 깊은 돈주머니가 기다리고 있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 금융자산이 헐값에 외국 투자자들에게 팔릴 때와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미국도 안심할 수는 없다. 미국 실물경제가 침체기로 접어들게 되면 비우량이 아닌 우량 주택담보대출의 부실화까지 심화된다. 기업 부문의 부채와 가계의 카드 부채의 부실율도 급상승하고 있다. 이 위기가 계속된다면 국부펀드들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낼지 모른다.
입력 : 2008.02.15 2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