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년 전, 세계 경제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구름이었다. HSBC의 실적 악화라는 번개가 한 차례 내리쳤지만 사람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소나기려니 했다. 하지만 이 구름은 6개월간 세력을 불려 미국과 유럽에 장대비를 퍼부었다. 부동산시장이 휩쓸려나가고, 내로라하는 거대 금융사들은 구명보트에 기어올랐다. 전지전능한 듯 보였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역부족이었다. 저금리라는 둑을 쌓아 홍수를 막아보려 했지만 미국 경제는 이미 흙탕물로 뒤덮였다. 사람들은 이제 비가 그치기만 바라고 있다. 온 세계가 휩쓸리지 않도록, 중국이라는 댐이 버텨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무너진 첨단금융
2007년 2월 8일 세계 3대 은행인 HSBC가 공시 하나를 내놓았다. “미국 집값 하락으로 서브프라임 대출의 20%인 105억6000만 달러가 부실화돼 충당금을 더 쌓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서브프라임 사태의 서막은 이렇게 올랐다. 미국 3위 모기지 회사인 뉴센트리파이낸셜 주가가 36% 곤두박질했고 씨티그룹과 뱅크오브아메리카·JP모건 등 금융주들이 미끄러져 내렸다. 하지만 뉴욕증시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다우지수는 이날 29.34포인트(0.23%) 내렸을 뿐이었다.
파장을 제대로 내다본 전문가는 드물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당시 “서브프라임은 전체 모기지의 10%에 불과하고 미국 금융시장은 부실 파장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하다. 미국 경제 전반에 위기를 가져올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절대 다수의 전문가들이 이렇게 본 배경엔 첨단금융과 중앙은행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기묘한 파생상품과 현란한 자산유동화, 중앙은행의 절묘한 위기관리 능력 등은 앞서 정보기술(IT) 버블을 이겨낸 세계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얼마 뒤 그 믿음은 환상으로 드러났다. 2006년 중반 이후 본격화된 미 집값 하락은 먼저 모기지(주택금융) 금융회사들을 제물로 삼았다. 이어 첨단금융의 중심축인 메릴린치와 JP모건 등 투자은행을 거쳐 씨티그룹 등 글로벌 금융회사로 충격이 퍼져나갔다. 재보험사와 채권보증사 등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 노던록은행과 프랑스 BNP파리바은행이 한동안 고객에게 돈을 내주지 못했다.
파장은 미국·유럽에만 그치지 않았다. 일본과 중국의 금융회사들도 서브프라임 관련 상품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본 것으로 드러났다. 비우량과 우량 모기지 채권을 섞어 절묘하게 분류해 리스크를 분산한다는 월스트리트 첨단금융 메커니즘이 소나기를 허리케인으로 증폭시키는 괴물 역할을 한 것이다.
돈의 증발
서브프라임은 돈 풍년을 단숨에 돈 가뭄으로 바꿔놓았다. 미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의 저금리 정책으로 2002년 이후 넘쳐나던 유동성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금융전문지 유로머니에 따르면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약 2조 달러(약 1900조원)에 달하는 돈이 증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은행이 공급한 돈을 몇 배로 부풀리는 도구였던 자산유동화증권(ABS)과 구조화채권·파생상품 등이 휴지조각으로 전락한 게 그 정도라는 얘기다.
여파는 바로 신용경색으로 나타났다. 메릴린치와 씨티그룹 등 손꼽히는 금융사들이 현금을 찾아 아시아를 헤매고 있다. 급한 대로 중국과 중동·한국 등의 국부펀드 등에서 출자를 받아 해결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사태가 본격화한 지난해 8월 이후 은행들이 3개월 또는 6개월짜리 단기 채권을 발행해 조달한 급전만 3150억 달러다. 곧 새로운 돈을 끌어들여 이 돈을 갚아야 한다. 신용경색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흔들리는 실물경제
서브프라임 사태는 금융권을 넘어 실물경제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여전히 세계 경제의 엔진인 미국의 소비자들은 집값이 급락하고 주가가 추락하자 지갑을 닫고 있다. 미국의 주택가격(케이스-실러 지수 기준)은 지난 1년 새 7.7% 하락했다. 시가총액으로 따지면 1조 달러가 날아갔다. 그 여파로 지난해 9월 이후 미국 소비자들의 씀씀이가 눈에 띄게 둔해지고 있다.
대서양 건너 유럽도 마찬가지다.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몇 년 동안 상당한 활력을 자랑한 독일과 프랑스 경제가 뒤뚱거리기 시작했다. 유럽지역 집값도 하락세로 돌아섰다. 유럽판 서브프라임 사태가 불거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미국과 유럽의 실물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한때 부상했던 글로벌 경제 디커플링(탈동조화) 전망도 힘을 잃고 있다. 중국과 인도의 경제 체력과 질이 미국과 유럽을 대신할 정도는 아직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올 들어 중국과 인도 증시가 급격한 조정을 받기 시작했다.
2막
경색된 돈의 흐름, 높은 기름값, 기업의 설비투자 축소, 일자리 감소 등이 돈 풍년 때 빚잔치를 벌여온 미국인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집값이 오르면 곧바로 이를 담보로 금융회사에서 추가 대출을 받아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사왔다. 이제 집은 현금인출기가 아니라 애물단지가 됐다. 신용경색 이후 상당수 미국인들은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서브프라임은 물론 우량 모기지 대출자들의 연체율도 오르고 있다.
신용카드와 자동차 등 각종 할부금융도 늘어가는 연체에 걱정이 태산이다. 신용카드 연체율은 지난해 말 이미 5%대에 진입해 위험선을 넘어섰다. 특단의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개인과 기업의 파산 도미노가 발생할 가능성이 큰 국면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미국 지방 정부가 파산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최근 불거진 모노라인(채권보증업체) 신용등급 하락 여파로 미국 지방 정부들이 기존 부채를 갚는 데 쓸 새 채권 발행에 애를 먹고 있다. 보증을 서주겠다는 회사들이 나서지 않고 있는 탓이다. 1980년대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에서처럼, 공무원들마저 월급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스테이트스트리트의 수석 연구원인 앤드루 캐펀은 “유동성(돈) 풍년 시기에 비정상적으로 달아오른 경제의 각 부문이 급격히 냉각되면서 곳곳에서 파열음과 진통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재탄생
서브프라임 사태는 그동안 쌓인 유동성과 자산 거품을 무너뜨리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의 저금리 정책으로 2002년 이후 급등한 집값과 넘쳐흐른 돈이 제 가치로 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인체가 바이러스와 싸우는 과정에서 고열에 시달리는 것처럼 경제도 침체의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금융투기의 역사'를 쓴 에드워드 챈슬러는 “일탈과 방만이 넘실대는 거품이 꺼지면 경제에 긴장감이 한층 강화된다”고 말했다.
이런 진통은 서브프라임 사태 진앙지인 미국뿐 아니라 중국 등 그동안 거품 양상을 보인 나라들도 피해나갈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각 나라의 정부나 중앙은행이 긴급 처방을 내놓고 있지만 글로벌 경제가 건강을 되찾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 기간은 6개월에서 최장 2년 정도까지로 제시된다.
유동성 거품 때문에 지나치게 올랐던 석유 등 원자재 가격도 거품 붕괴 과정에서 상당 부분 조정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실력 이상의 지위를 구가하고 있는 미 경제와 달러화가 재평가를 받으면서 세계 경제의 재편이 빨라질 수도 있다.
나현철 기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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