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득 중년 남성이 허영심에 들뜬 소녀들을 금전적으로 돕는 대가로 섹스를 제공받는 이른바 ‘원조교제’는 죽음의 사신, 에이즈가 만연되면서 생긴 플레이보이들의 새로운 섹스 공급 루트다.
외제 소형 승용차에 매월 300만~400만원만 용돈으로 주면 대개의 젊은 여자들이 남자가 원할 때 섹스 파트너가 되는 매춘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고 한다. 나이가 어릴수록 여자는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원조교제는 연애가 아니며, 서로 섹스를 사고파는 매춘행위다. 매춘은 문명의 발달에도 줄지 않고 성행하는 것일까. 성병의 만연과 사회적 부패의 온상이 되는 매춘의 추방은 누구나 찬성하는 변할 수 없는 바람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염원과 엉뚱한 방향으로 뛰고 있다. 세계 문화의 중심지라는 프랑스 파리에 자그마치 15만 명의 창녀가 우글거린다는 시청 발행 안내 책자를 보았는데, 정녕 매춘은 소멸될 수 없는 인간의 치부인가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매춘에 관한 기록은 기원전 3000년께 제작된 석판에 새겨진 시구(詩句) ‘길가메쉬의 서사시’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그래서 매춘은 인류 최초의 직업이라는 말까지 등장한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유녀는 환대매춘부(歡待賣春婦)를 지칭하는 말로 화대를 받지 않고 섹스를 제공하는 일종의 자원봉사자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 종교단체에는 젊은 여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매춘을 강요하는 이른바 사원매춘(寺院賣春) 제도가 있어서 그때 섹스 봉사를 제공받은 남자가 약간의 사례금을 내면 그것은 사원의 소득으로 접수되는 시대였다. 당시 이 생소한 제도는 집을 나온 여행자들의 충만된 욕구를 해소시켜 주는 성(性)의 구제(救濟)라는 목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이런 이해하기 힘든 행동의 배후에는 성이 가진 주술적 신비한 힘, 즉 생식력으로서의 기능을 종교에 결부시킨 원시적 신앙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사회에 팽배해 있던 ‘독신자의 부녀자 공유제 개념’이 그것을 조장한 것도 알고 보면 종족의 번식을 돕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취지가 그러했으므로 배우자가 없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성을 공유할 수 있는 권한이 보장되어 있었으므로 사원을 찾아가 성을 요구하는 등, 일종의 성의 사회보장제도 형태와 비슷했다.
이 제도에서 생기는 골치 아픈 문제는 봉사자들의 뜻하지 않은 임신과 사생아 문제였는데 신전에서 봉사한 처녀가 임신하면 그 소생은 국가의 소유가 되고 장래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군사력으로 활용되었다.
처음에는 사원 수입금으로 기부되던 매춘의 대가가 일부 여성이 일정 비율로 사원에 제출하고 나머지는 집으로 가져가 결혼지참금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차츰 매춘이 하나의 비즈니스로 방향을 전환하게 됐다.
신앙이 매춘의 배경이었으므로 여기에 나서는 여성은 신분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제왕의 딸들도 서슴지 않고 신전 매춘에 동참했는데, 그 실례로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술에 의하면 역대 이집트 왕들은 스스로 딸들을 신전의 유녀로 제공함으로써 고대 사회의 섹스 공유 개념에 시범을 보여주었던 것은 물론, 피라미드 건설에 필요한 방대한 자금도 함께 조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에도 고등 유녀가 있었는데, 그녀들을 그리스에서는 ‘헤타이라’라는 차별적 명칭으로 불렀다. 그 여자들은 기생학교에서 미감술(迷感術)을 익히고 가무음곡의 기예를 연마함과 동시에 교양을 몸에 익혔다. 앞서가는 메이크업 기술은 물론, 그 당시 붉은 색 립스틱을 만들어 요염하게 입술을 단장했다.
사타구니에는 몰약(沒藥)의 향유를 발랐다. 그리고 음모는 깨끗이 깎고 얇고 투명한 마직으로 된 긴 옷을 입어 그것을 통해 성기의 오밀조밀한 구조가 드러나 보이게 하는 것으로 손님을 유혹했다.
그러니까 이미 기원전 3000년께 매춘의 기본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날로 연약해져 가는 여성으로서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것이 호구지책임에 변함이 없다. 곽대희 비뇨기과 원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