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閨怨)
비단띠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 그린 일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어 내어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꽃만 들못 위에 맥없이 지고 있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명종 18∼선조22)
그녀는 세 가지의 한을 입버릇처럼 말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그녀는 짧은 생에 커다란 아픔 앓이만을 하다가
젊디 젊은 나이에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강릉의 명문가에서 두번째 부인의 둘째 딸로 태어나,
아버지는 경상 감사를 지냈던 동인의 영수이고(화담 서경덕의 제자),
큰 오빠 허성은 이조, 병조 판서를,
둘째 오빠 허봉 역시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균 역시 형조, 예조 판서를 지낸 인물입니다.
임금은 동생 허균을 너무나 아끼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노라고 말하라며
울며 애원까지 하게 되지만, 결국 허균은 봉건 사회 타파와,
이상 세계 실현에 실패한 것을 슬퍼하며 죽음을 택합니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 별호는 경번(景樊), 난설헌은 호라고 합니다.
(許蘭雪軒, 1563∼1589: 명종 18∼선조 22).
그녀는 어릴 적부터 놀라운 글로 찬사를 받아왔으며,
당시의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을 거부할 수 조차 없었던 사회 속에서의 한을
시에 담아 한탄하며 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미쳐 피지도 않은 나이 15세에 '김성립'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남편 김성립의 방탕한 생활과 기방 출입은
그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반면
김성립은 늘 재주가 빼어난 자신의 부인 난설헌에게
열등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늘상 허균의 눈에도 그리 보여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하는데
과문(科文)은 우수한 자"라고 매형을 평하기도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불행할 수 밖에 없었고,
시댁에서는 밖으로만 도는 아들과
아들보다 뛰어난 며느리를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난설헌에겐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한 해 차이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녀는 일찌기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던 듯..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는데,
그녀는 27세되던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고서
"금년이 바로 3·9의 수(3×9=27, 27세를 뜻함)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눈을 감았다 전해집니다.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작품을 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난설헌의 글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여
동생은 모두 태워 버리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녀가 만일 평범한 가정 속에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사랑받고 한 집의 며느리로서 대우 받으며
자식들을 그리 떠나보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슴 저미는, 설움 담긴 글들을
우리는 단 한 편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지요.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아내가 죽은 후 재혼하였으나,
아이를 얻지 못하였고 죽은 후에도 본처가 아닌,
후처와 합장하였다고 합니다..
숨막히는 당시 유교 사회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희생당한,
빼어난 미모와 재능의 소유자인 허난설헌의 아픔이
4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얼마 전해 지지 않는
몇 편의 시와 그림 속에서 배어 나오는 듯 합니다.
당대의 학자였던 오빠 허봉에게서
'두보의 소리를 네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라는 극찬을 받았던,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천재 허난설헌의 삶은
곧 남존 여비,여필 종부 등의 유교적 사상과 가치관에 희생된,
한 여인의 슬픔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슬픔입니다.
哭子(곡자)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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