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이 강한 아티스트들이 명나라말기에 떼로 나타나는데 서위라는 사람이 이 그룹의 리더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위는 소흥의 유복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지만 모친이 안방마님의 몸종이었고 생부마저 생후 100일이 못되어서 여의었으니 그의 어린 시절이 어떠하였는지는 충분히 짐작을 할수있죠.
설상가상으로 집안마저 급속히 몰락하여 서위의 생모마저도 다른집으로 팔려가게되고...
어렸을때부터 팔고문[八股文=과거용의 장식적인 문체] 명수였던 그가 나이가 들어서 과거에 번번히 낙방하는 것도 어렸을때부터 갖게 된 세상의 대한 원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서위의 평판을 듣고서도 딸을 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이로 인해 서위 평생을 통틀어서 진정으로 사랑한 한 여인을 만나게됩니다. 그러나...행복했던 순간은 잠시... 이 여인 나이 19에 결핵으로 명을 달리합니다
부인의 묘지명에 서위는 이렇게 새겨넣습니다.
"삶은 짧지만 죽음은 긴 법...
그대여, 이 소나무 밑에서 나를 기다려주오"
죽은 아내를 그라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그랬는지 서위는 그후 평생 동안 여자문제에서는 계속 실패를 거듭하게 됩니다.
서위를 진정 알아주고 또 그의 후견인이 되어주었던 병부시랑이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하자 결국 서위는 광기에 사로잡히게 되고 자주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으며 집안 벽에 박힌 대못을 뽑아 자신의 귀를 찔러 짤라내는 등
엽기적인 자해를 하게됩니다.
그러던 중,
서위는 그의 나이 46살에 5년전에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은 부인을 쇠고랑으로 살해합니다
형(刑)대로 하자면 당연히 사형이지만 나라안에 모든 문인들이 구명운동을 벌여 광기의 발작으로 인정받아 사형은 면했고 이 수형생활에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본격적인 창착활동을 하게됩니다 그림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게되는데 물감을 안쓰고 먹으로만 그린 것들이
이때부터 생겨난 그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는 단 한번도 남한테서 그림을 배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위가 '표현주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후배 화가들한테 영향을 주는 실력을 갖추는 계기가 바로 이런 악조건 때문이었다는 것이 참 아이로니합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노년의 서위는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붓을 들어야 했지만 쓸쓸하고 암울하게 보낸 이 만년의 시간들이 서위에게서는 가장 평온한 시절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대 중국화단의 거장 제백석은 그의 인장에 다음과 같이 새겨
서위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고 합니다. '청등문하의 주구(靑藤門下走狗)'
[청등은 서위의 부친이 남긴 서재의 이름이었고 나중에 서위는 여기서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 청등도사라고 합니다 ]
감옥에서 그린 그의 대표작 '검은 포도' 북경 고궁박물관 소장
위 '검은 포도'의 제화문(題畵文)은 다음과 같습니다.
불우했던 반 평생끝에 이미 영감이 되어 서재에 홀로 서서 저녁풍경을 읊조린다내 그려놓은 밝은구슬 어디 팔 곳이 없어 심심하여 등나무덩쿨 사이로 던져 버렸다내...
감옥안에서 그렸다는 이 그림을 서위는 명주(밝은 구슬)로 생각했나봅니다. 야등(野藤)은 서위의 집(靑藤)을 연상하게하구요.
'석류도' 대만고궁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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