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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Taliban) 그들은 누구인가.

천하한량 2007. 7. 25. 02:43

 탈레반(Taliban) 그들은 누구인가.

 

 

 

Mohammed Omar, spiritual leader of the Taliban. He lost an eye while fighting against the Russians.

Mohammed Omar
탈레반의 창설자이자 최고 지도자인 모하메드 오마르
  

Taliban's public execution of a Shi'ite ethnic Hazara, May 1999

Taliban's public execution of a Shi'ite ethnic Hazara  May 1999
 
The Taliban's destruction of the Buddhas of Bamyan in March 21, 2001
The Taliban's destruction of the Buddhas of Bamyan in March 21 2001
 
 
 
Mullah Dadullah Akhund, the military commander of the Taliban until May 2007.
Mullah Dadullah Akhund  the military commander of the Taliban until May 2007.
 
Afghan Ambassador to Pakistan Abdul Salam Zaeef seated in front of Taliban militia members. Source/AP Photos
Taliban ambassador to Pakistan Abdul Salam Zaeef seated in front of Taliban militia members. Source

 

 

 

 

Northern Alliance Troops Enter Kābul
Northern Alliance troops march victoriously into Kābul on November 13, 2001, after the Taliban fled the Afghan capital amid United States-led bombings of the area. The decade-long civil war between the Northern Alliance and the Taliban gained worldwide attention during the U.S.-led war on terrorism, which helped oust the Taliban regime in late 2001.

 

Taliban Troops on the Kābul Front
Taliban forces patrol the front north of Kābul, Afghanistan, during the civil war that ravaged the country in the 1990s. The civil war was fought between the Taliban, an Islamic fundamentalist movement composed of ethnic Pashtuns, and the Northern Alliance, a coalition of several minority ethnic groups. The Taliban seized control of Kābul in 1996 and controlled most of the country until 2001.

 

 

 탈레반 무장세력에 피납된 한국인 사진

Un hombre sostiene un periódico surcoreano con la foto de algunos de los secuestrados. (Foto: AFP)

Los talibanes han decidido, ante la presencia de una delegación surcoreana en Afganistán, extender 24 horas el plazo que habían fijado para ejecutar a los 23 misioneros asiáticos secuestrados el pasado jueves.

 

 

탈레반(Taliban)은 현재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있는 회교 원리주의에 입각한 학생운동 세력으로 이들은 이슬람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탈레반은 이슬람 신정(神政)국가 건설을 목표로 1980년대부터 무장 저항운동을 벌여 왔으며 1996년 마침내 탈레반은 주도권 다툼으로 대규모 무력충돌까지 빚은 무자헤딘 세력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이 집권하였다.

1999년 8월 현재 탈레반은 카불을 포함하여 아프가니스탄의 90%를 점령하고 있으며 북쪽지방에 주둔한 소수파 중심의 반군연합 세력과 교전하면서 아프간에서는 내전상태가 계속 되고 있다.

탈레반은 소비에트 연방에 맞서 싸웠던 무자헤딘 세력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영토 3분의 2을 장악하면서 아프간의 새로운 통치세력으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아프간 난민촌에 설립된 이슬람 신학교 출신들이 주축인 단체로 모두 독실한 무슬림들로 구성되어 있다. 1994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탈레반은 맹렬한 기세로 세력을 확장해 96년 9월 수도 카불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영토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탈레반의 이같은 급격한 군사적 성공으로 봐서 파키스탄의 군사 정보국에 의해 이들이 창설된 것으로 보고 있다.

35세 된 탈레반의 창설자이자 최고 지도자인 모하메드 오마르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무자헤딘의 전사로도 싸웠던 경력이 있는 성직자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의 정치적 목표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신정 국가를 창설하는것이다. 모하메드 오마르는 최근 서기 5세기경의 고대 불상을 포함한 모든 불상들을 이슬람에 대한 모독으로 규정하는 포고문을 발표,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도록 파괴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탈리반의 기관매체인 바흐타르 통신에 발표된 이 포고문에서, "신은 유일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나 인물의) 형상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다. 이들 불상은 지금부터 신앙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거돼야 한다"고 말했다.


오마르가 파괴를 지시한 세계 최대 마애석불이 있는 바미얀 지역에서는 아직도 주민 대부분이 불교 신자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탈레반 정부를 인정하고 나라는 전 세계에서 파키스탄을 포함에 3개국에 불과하며 이들은 이같은 세계의 고립화 움직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세계적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극한 행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무이누딘 하이더 파키스탄 내무장관은 불상 파괴작업에 대해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느끼는 고립에 대한 저항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으며, 파키스탄 회교연맹당 당수도 "불상파괴 조치는 서방국가의 대(對)아프카니스탄 조치에 대한 대응"이라고 덧붙여 이를 반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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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2만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결성한 수니파()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가리킨다. 결성 당시부터 군정세력으로 출발해 1994년에 이미 아프가니스탄 국토의 80% 정도를 장악한 뒤 이듬해 수도 카불(Kabul)을 점령, 14년간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내전과 4년 동안의 모자헤딘(Mojahedin:무장 게릴라 조직) 권력투쟁을 종식시켰다.

이어 과도정부인 이슬람공화국을 선포하면서 결속력 있는 세력으로 등장, 아프가니스탄 내 반군 조직을 무장해제시킨 뒤 약탈과 강도, 부정 부패를 없애는 데 힘을 쏟는 한편, 일상 상업 활동을 재개함으로써 전통적인 아프가니스탄 가문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내전이 계속되면서 국가 접수()가 어려워지자 지역 지휘관들과 전략적 협정을 체결, 지역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위법 사항과 이에 따른 각종 인권침해를 도외시함으로써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더욱이 이슬람교에 대한 엄격한 해석으로 인해 갈수록 사회 차별이 심해지고, 여학교 폐쇄, 텔레비전 금지, 가혹한 이슬람식 처벌제도 부활, 아동 학대 등 많은 부작용을 낳음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또 2001년 3월에는 군대를 동원해 로켓과 탱크 등으로 아프가니스탄 내 불교 유적과 불상들을 부수는 등 유례 없는 유적 파괴 행위를 공개적으로 일삼기도 하였다.

더욱이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대폭발테러사건의 배후자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그의 추종 조직인 알 카에다(Al-Queda)를 숨겨둔 채 미국에 인도하지 않음으로써 미국과 동맹국들의 반발을 산 끝에 결국 아프가니스탄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같은 해 10월 7일부터 시작된 미군과 영국군의 합동 공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공군기지와 지휘본부, 방공망과 방송시설이 파괴되었음에도 여전히 빈 라덴을 인도하지 않고, 계속 항쟁 의지를 밝히면서 성전(: 지하드)을 촉구하였다. 2001년 10월 말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는 1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고,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미국과 동맹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북부동맹의 반격도 치열해 탈레반이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가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탈레반 홈페이지    http://www.alemara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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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가니스탄

 

 

 

서남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19세기부터 영국과 러시아의 항쟁 대상이 되다가 1905년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1919년 라왈핀디 화평조약으로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으나, 1979년에는 소련군, 2002년에는 미국과영국 등의 공격을 받았다.

위치 서남아시아
면적 64만 7500㎢
인구 2871만 7000명(2003)
인구밀도 44.5명/㎢(2003)
수도 카불
정체 공화제
공용어 파쉬툰어, 다리어
통화 아프가니(Afghanis, Af)
환율

4,300Af = 1$(2003.9)

1인당 국민총생산

 

 

 

800$(2003)

 

 

 

아프가니스탄의 자연

 

아프가니스탄은 전체적으로 해발고도 1,000m를 넘는 고원이며 파미르 고원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는 힌두쿠시산맥이 중앙부를 차지하여 국토를 남북으로 크게 나누고, 많은 산맥과 계곡이 4개의 주요 하천 그룹과 함께 국토를 4개 지역으로 갈라 놓고 있다. 이들 지역 중 북쪽은 아무다리야강() 유역의 바다흐샨·아프간 투르키스탄 지방(고대의 박트리아), 서쪽은 하리강() 유역의 헤라트 지방(고대의 아리아), 남쪽은 헬만드강() 유역의 칸다하르 지방(고대의 아라코시아), 동쪽은 인더스강으로 흘러드는 카불강() 유역 지방이다.

기후는 대륙성으로 기온의 차가 커서 카불에서는 최고 38℃에서 최저 -18℃에 이른다. 북쪽의 산악지대에서는 심한 눈보라도 드물지 않으나 봄·가을의 고원계곡의 기후는 쾌적하다. 북쪽 산기슭에서는 농경, 평원에서는 유목이 특색이며, 서부와 남부에는 사막이 많다. 카불강 유역의 중앙에서 동부에 있는 지역이 주요 농경지로 되어 있다. 아무다리야강 유역에는 범·표범 등의 맹수가 살며 힌두쿠시산맥에는 곰 ·이리 ·영양이 서식한다. 삼림은 힌두쿠시의 동부에 많으며 소나무 ·삼목 ·떡갈나무가 무성하다.

 

아프가니스탄의 주민

 

아프카니스탄의 주민은 고대부터 많은 이민족들이 침입하였기 때문에 민족 구성은 매우 복잡하다. 주요 민족은 아프간(파탄)족·타지크족·우즈베크족·하자라족이다. 아프간족의 대부분은 동부 또는 남동부에 거주하며 유목생활을 하는데, 파슈툰이라고 자칭하며 파슈토어()를 사용한다.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타지크족은 헤라트와 카불에 거주하며, 농민, 도시 또는 오아시스의 상인이 많다.

터키계()의 우즈베크족은 초원의 유목민으로서 북부와 중앙부에 많이 거주한다. 몽골계로 몽골군 장병의 자손이라는 하자라족은 중앙 산악지대에 거주하면서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며, 병사나 노동자가 되어 도시에서 지내는 사람도 있다. 그 밖에 소수의 누리스타니족(카필족)과 와하니족 등이 있다.

언어는 각 민족이 저마다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 다양하지만 인구의 75%는 파슈토어와 페르시아어를 쓰며, 학교교육에서도 이들 2가지 언어가 사용된다. 파슈토어는 칙령에 의하여 1936년에 국어로 지정되었다. 아프간족은 파슈토어를 사용하고 타지크족과 하자라족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데, 그 서법()은 아라비아어()에서 따온 것이다. 종교는 이슬람교로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하나 타지크족과 하자라족은 시아파()에 속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아프가니스탄은 지역적으로 이란고원의 북동부를 형성하며 북부는 아무다리야에서 중앙아시아와 접해 있고 동부는 카이바르고개인더스강() 유역과, 서부는 헤라트에서 이란과 연락되어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동서문화 교류의 요지였다. 사람이 산 최초의 흔적은 북부에 있는 발흐 부근의 무스티에식() 석기()로 확인된다. 최고()의 정착유적은 남부의 칸다하르 부근에 있는 문디가크에 있는데, 이 시기 중기()에는 하라파 문화와의 교류가 있었으며 상류층에서는 철()도 사용되었다.

발흐의 철기시대 유적은 아나우 유적 제4층의 문화와 비슷하며, BC 1000년기()에 이 지방 일대에 살고 있던 이란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가 발흐를 중심으로 하여 널리 이란에 퍼져나갔던 것은 기원전 6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 지방은 그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나,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란에서부터 헤라트·칸다하르·발흐를 정복하여 인도에 편입되었다. 대왕의 사후()에는 그의 부하 장군인 셀레우코스가 이 지방을 통치하였으나 BC 322년에 북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찬드라굽타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자 아프가니스탄의 동부를 인도에 양보하였다.

BC 250년경에 박트리아의 디오도투스는 그리스계의 독립왕국을 만들고, 같은 무렵에 출현한 파르티아 왕국과 남서부의 세이스탄아리아 지방을 두고 다투었으나 패배하였다. 박트리아 왕국은 BC 175년에 인도 펀자브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그 결과 불교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으나, 북쪽의 대월지[], 서쪽의 파르티아와 사카족()에 둘러싸여 차츰 압박을 받게 되었다. 한편 BC 1세기에는 쿠샨 왕조쿠줄라 카드피세스가 카불의 그리스계
왕조를 타도하고 카니슈카 왕 때 간다라를 중심으로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걸친 대왕국을 건설하였으며 이 지방의 그리스문화가 불교문화와 결합하여 유명한 간다라 미술을 낳았다.

3∼4세기에 쿠샨 왕조는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와 인도의 굽타 왕조 앞에서 힘을 잃었으며 5세기에는 에프탈의 침입을 받았다. 그 결과 6세기의 이 지방은 쿠샨·에프탈 등의 왕조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642년 아랍의 확대에 따라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였고 67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호라산 지방도 아랍의 지배하에 들어가 이 지방의 주민은 결국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820년에 호라산 태수()로 임명된 아바스 왕조의 장군 타히르가 타히르 왕조를 세웠는데, 그 후 867년의 이란계 사파르 왕조, 874년의 사만 왕조, 962년의 가즈나 왕조, 1187년의 구르 왕조, 1215년의 흐와리즘샤 왕조로 이어져 나가다가 21년에 몽골의 침입을 당하였다. 몽골의 지배는 1397년 티무르의 침입으로 끝나고, 티무르의 자손은 헤라트를 수도로 삼고 이란 문화를 보호하였다. 1526년에 티무르의 자손 바부르는 델리의 왕위에 올라 무갈 왕조를 이룩하였으나, 그후 약 200년간 아프가니스탄은 이란의 사파비 왕조무굴 왕조로 분할 영유되었다. 아프간족의 마흐무트는 1722년 이란에 침입하여 사파비 왕조를 타도하였으나, 37년에 투르크계의 나디르샤가 이란에서 아프간족을 몰아내었으며 이어 칸다하르와 카불을 점령하고 델리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나디르샤는 47년에 암살되었으며 그의 부하인 두라니족(아프간족 주요 족의 하나)의 지도자 아흐마드 한 아브달리가 그 해에 칸다하르에서 왕위에 오르고 아흐마드샤 두라니라 칭하였다. 이것이 아프간 민족국가 건국의 시초이다. 아흐마드 샤 다음에는 그의 아들 티무르 샤가 즉위하고 카불을 수도로 정하였다. 그가 죽은 뒤 왕위 다툼이 일어났으며 결국 바라크자이족의 도스트 무하마드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1838년에 정식으로 카불의 아미르(왕)라고 칭했으며, 이에 구왕국()시대의 바라크자이 왕조가 성립되었다.

19세기부터 아프가니스탄은 영국러시아의 항쟁의 대상이 되었다. 인도 방위의 입장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자국의 세력하에 두려고 하였으며, 도스트 무하마드와 그의 아들 시르알리 때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제1차(1838∼1842), 제2차(1878∼1880) 아프간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일부가 인도에 할양되었으며, 1893년 아브도르 라흐만 칸 때 인도와의 국경선이 확정되고 1901년에는 연금을 받기로 하고 외교권을 인도에 일임하게 되었다. 1905년 하비브알라가 이 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또한 1907년에는 러시아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국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하비브알라는 내정면에서는 하비비아 학교의 기초를 다지고 페르시아어 주간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적 자각의 향상을 촉진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중립을 엄수하였다. 1919년 하비브알라가 반()영국주의자의 손에 암살된 후 같은해 후계자가 된 아만알라는 반영국적 의견에 동감하여 인도 정부에 대해 적대행위를 취했으나(제3차 아프간전쟁)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8월에 라왈핀디 화평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도 정부로부터의 연금이 폐지되고 외교지도권 폐지가 약정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왕은 국내 통일과 서양문화 도입에 힘썼으나 보수세력의 반대로 퇴위한 뒤 망명하였다. 뒤를 이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연 나디르한까지 1933년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자히르 샤가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후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하였으나,1973년 7월 국왕의 외유중에 쿠데타가 일어나 모하마드 다우드 칸 전() 총리가 실권을 쥐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1978년 4월에는 공산세력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타라키(Taraki) 정권이 수립되었고, 1979년 9월에는 궁정쿠데타로 아민(Amin) 정권이 수립되었다. 같은해 12월 기존정권 수호라는 명분 아래 소련군이 침공하였고 소련의 군사 개입 아래 카르말 정권이 성립되었다. 뒤이어 소련군을 몰아내려는 여러 반군 단체들이 게릴라전을 개시하였으며, 1989년 2월, 10년간의 침공 끝에 제네바합의에 근거하여 소련군이 철수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1989년 2월 10년 만에 10만여 명의 소련군()이 철수를 완료함으로써 친소정권인 모하마드 나지불라 정권이 약화된 가운데, 각 지역의 무자헤딘 반군세력은 대대적 군사공격을 개시하여 1992년 4월 25일 마침내 수도 카불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1978년부터 14년간 동안 계속된 장기간의 내전은 무자헤딘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슬람 집권평의회 의장 S.모자데디는 5월 내각을 발족시키고, 6월 B.랍바니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12월 랍바니는 임기 2년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파벌로 구성된 무자헤딘 세력은 신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주도권 다툼을 벌이며 대규모 무력충돌을 벌였다. 구()정부군 중 해산하지 않은 일부와 마수드파()는 랍바니 정부를 지지하였으나 헤크마티아르파·도스탐파 등은 정부를 비판하며 별도의 무장세력을 유지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하였다. 1996년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탈레반(최고지도자 모하메드 오마르:Mohammed Omar)이 수도 카불을 점령하였고 정부를 해산한 후 회교국가를 수립하였다. 전 국토의 90%까지 점령한 탈레반은 이후에도 북쪽지방에 주둔한 소수파 중심의 반()탈레반 연합세력과 내전을 지속하였다.

그러던 중 2001년 9월 11일 미국대폭발테러사건이 일어났고, 미국은 그 주범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은신중인 오사마 빈 라덴(Usama Bin Laden)을 지목하였다. 미국은 탈레반에게 오사마 빈 라덴을 양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0월 7일부터 영국과 함께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와 함께 아프가니스탄 반군()인 북부동맹도 공격을 강화하여 2001년 11월 수도인 카불을 점령하였다.

1990년 5월에 개정된 헌법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의 최고주권기관은 족장회의에서 유래된 로야지르가(Loya Jirgah)이다. 로야지르가는 대통령, 부통령, 상원 및 하원의원, 검사, 장관, 법률가, 헌법평의회 의장, 지역평의회 의장, 각 지역의 대표자 및 대통령이 임명하는 50인으로 구성된다. 로야지르가는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을 선출하며 전쟁의 선포 등 국가의 운명에 관계된 중요한 결정을 한다. 의장은 대통령이고, 2/3 이상의 출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결정한다. 국가원수는 대통령으로 로야지르가에서 선출되며, 임기는 7년이고 중임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 의회 결정비준권, 수상 임명권, 장관·판사·장교 임명동의권, 비상사태 선포권 등을 가진다.

입법권은 멜리슈라(Meli Shura)라고 불리는 양원제 의회에 속한다. 하원의원은 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234석 중 184석을 제외한 나머지 50석은 반군 세력들을 위해 궐석으로 비워두었다. 상원의원은 총 192명으로, 1/3은 5년 임기로, 1/3은 3년 임기로 선출하며 나머지 1/3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의회는 2/3 이상 출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법안을 제출·수정·폐지할 수 있다. 양원의 의견이 어긋나는 경우 합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정한다.

내각은 수상이 임명하는 장관들로 구성되며 대내외 정책을 집행하고 경제발전계획을 추진한다. 헌법평의회는 법률이나 국제조약이 헌법에 부합하는지를 평가하는 기관으로서 의장·부의장 및 대통령이 임명하는 8인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지방행정은 주()·군·시·읍으로 나누어지고, 각 행정기관의 장은 지역평의회에서 선출되며 임기는 3년이다.

외교면을 보면,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서는 반()탈레반파가 아프가니스탄을 대표하며 의석을 유지하고 있다. 탈레반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있는 국가는 파키스탄·사우디아라비아·케냐 등이며, 여타 국제사회탄자니아 미국대사관 폭발사건 이후 그 주모자로 추정되는 오사마 빈 라덴을 탈레반이 비호한다는 이유로 1999년 10월 경제제재를 부과하는 안보리 결의를 채택하였다. 또, 이슬람국가들도 탈레반이 체첸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제

 

아프가니스탄은 농업 및 목축이 주종이지만 1956년경부터 정부는 동서 양진영의 원조로 종합적인 국토개발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으며, 저개발성의 탈피에 주력하였다. 인구증가율은 1999년 현재 3.95%이지만 노동인구는 27.1%정도로, 그 중 농업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인구가 67.8%나 되며 국민총생산에 대한 기여율도 농업부문이 53%를 차지한다.

국토의 태반이 중앙아시아 내륙 산악지대에 걸쳐 있기 때문에 경작가능지는 총면적의 약 12%(840만ha)에 지나지 않는다. 농업개발계획 중에서도 러시아 원조에 의한 잘랄라바드 관개운하(750km)와 미국 원조에 의한 헬만드 계곡 개발사업 등이 중시되어 관개 농지의 비율이 높다.

주요 농산물은 밀이며 그 재배지는 전체 농경지의 2/3를 차지한다. 그 밖에도 옥수수·보리·쌀 등의 곡물과 목화·사탕무·사탕수수·과일·채소 등을 재배한다. 목화·과일 등은 매우 중요한 수출품이다. 양 이외에도 소·염소·나귀·낙타·말이 사육되며 근년에는 개량종 누에를 수입하여 양잠도 이루어진다.

천연자원으로는 예로부터 북부의 바다흐샨 지방에서 나는 라피스라줄리()가 유명하지만 제1차 5개년계획(1956∼60)에서의 조사 결과 철·석유 등이 포함된 자원의 존재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위치상의 문제 등으로 개발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으며 석탄·소금·크롬·대리석 등이 약간 개발되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공업 부문은 대부분 가내공업이며 면직물·모직물·식품·설탕 공업 등이 이루어진다.

제1차 5개년계획 이후로 바다흐샨 지방의 풀리쿰리 및 카불 부근의 굴바하르에 근대적 방적공장이 건설되었고 풀리쿰리 및 카불 부근 자발우스세라지에 시멘트 공장이, 바다흐샨 지방 바글란에 정당공장()이 각각 건설되었으며, 그 밖에도 비료공장·통조림공장 및 자동차수리 공장 등이 건설되었다. 또한 러시아의 원조로 1만kW 출력의 수력발전소가 잘랄라바드에 건설되었다.

본격적인 개발계획의 실시는 1956∼60년의 제1차 5개년계획부터였는데 도로·발전 등 산업기반의 정비에 중점을 두었고, 총투자액 123억 아프가니 중 약 30%가 외국원조 및 차관으로 충당되었다. 제2차 계획은 1962년부터 총투자액 335억 아프가니, 국민소득 성장률 8∼9%를 목표로 실시되었으며 공업·운수통신·기술자 양성이 중시되었다. 1966년 5월 정부는 경제기구의 개혁과 함께 교육·농업에 중점을 둔 제3차 계획 초안을 발표하였으며, 1976년부터는 장기경제계획으로서 7개년계획이 실시되었다.

무역은 만성적 입초()가 계속되고 있으며 적자가 누적되고 있다. 수출은 2차산품이 많아 면·카라쿨·양모·건과()·융단 등이 주종을 이루며, 수입은 개발계획의 추진상 필요한 자본재가 많다. 무역 상대국은 수출입 모두 러시아가 수위를 차지한다. 1996년 현재 수출 규모는 8,000만 달러이고, 수입 규모는 1억 5,000만 달러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사회

 

아프가니스탄 사회상의 중요한 특징은 지배민족인 아프간족(파탄족 혹은 파슈툰족)이 지니는 ‘파슈툰와레이(파슈툰 정신)’라고 하는 독특한 도덕·관습법이다. 이는 용기·자유·독립을 숭상하며 이슬람교 이상으로 그들을 규제하고 있다. 3차에 걸친 아프간전쟁에서 영국군을 괴롭히고,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소련군을 애먹인 것도 이 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신의 순수성을 크게 나누면 폐쇄촌락, 개방적 촌락, 도시의 3단계가 된다. 외국인이 들어갈 수 없는 폐쇄촌락에서는 이 정신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데, 다툼이 끊이지 않는 반면 자존심과 독립심을 지니고 질박하면서도 강건한 생활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남녀의 권리도 비교적 평등하다고 한다.

개방적 촌락에서 도시로 개화해감에 따라 순도가 낮아지는데, 도시에서는 이 정신을 지키는 한편으로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남자는 일반적으로 터번을 두르며 상류계급의 여자는 외출할 때 반드시 차도르라는 길고 검은 베일을 착용하게 되어 있었는데, 1959년부터는 착용이 자유화되었으며 지금은 양장 차림의 여성도 있다. 그러나 농민과 유목민 여자는 천으로 얼굴을 가리며 집에 칩거하는 경향이 많다. 주거는 다른 중동 국가들처럼 돌이나 흙벽돌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유목민은 천막에서 생활한다.

모든 교육이 무료로 이루어지는데, 초등학교는 전국적으로 급속한 증가를 보이는 반면 중등 이상의 교육시설은 도시에 집중해 있다. 대학은 카불대학(1932년 창설)과 잘랄라바드의 낭그라하르대학이 있으며, 사범·공업·상업·농업·미술 등의 전문학교도 있다. 그러나 문맹률은 아직도 81.8%나 된다.

신문·통신·출판물은 정부의 통제하에 있으며, 국영방송 1개국, 일간신문 13개가 있다. 스포츠는 근대경기 중에서는 하키가 성행한다. 지리적으로 동서교통의 요지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 문화의 유적이 많으며, 조각·상아제품·유리단지·청동 입상·화폐·세밀화 등의 발굴이 빈번하다. 특히 바미안의 거대한 석불(높이 53m)은 3~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대한관계

 

한국과는 1973년 7월 수교했으나 1978년 9월 좌경정권의 수립에 따라 단교()했었다. 하지만, 2002년 1월 외교장관간 공동서명에 의한 양국관계가 재개되었다. 2004년 현재 대한수입 165,315천 달러, 대한수출 191천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담배·섬유류·의류·가전제품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