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정에서 사명(使命)을 받아 지방에 나가면 각 고을에서는 기생을 천침(薦枕 침실을 같이하도록 천거하는 것)하는 예(例)가 있다. 감사(監司)는 풍헌관(風憲官)이라, 비록 본읍에서 천침하더라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역시 예로부터 있는 전례였다. 진천(晉川) 강혼(姜渾)이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을 때 성주(星州)의 은대선(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정을 쏟더니, 하루는 성주에서 떠나 열읍(列邑)을 순행할 때 점심 때가 되어 부상역(扶桑驛)에서 쉬게 되었는데, 부상역은 성주에서 가는 곳까지의 절반 길이나, 기생 또한 따라와서 저물어도 차마 서로 작별하지 못하여 부상역에서 묵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시를 써서 기생에게 주었으니,
부상역 여관에서 한바탕 기쁘게 보내려니 / 扶桑館裏一場歡
나그네 이불도 없고 촛불은 재만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열두 무산 새벽 꿈에 어른거려 / 十二巫山迷曉夢
여관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노라 / 驛樓春夜不知寒
하였다. 이는 침구를 이미 개령(開寧 지금 김천의 면(面))에 보내어 미처 가져오지 못하였기로 이불이 없이 잔 것이다. 또 어떤 감사가 있었는데, 기생과 상방(上房)에서 자고 새벽이 되어 변소 간 틈에 따르던 사람이 와서 밀고(密告)하기를, “공이 나간 후에 연소자(年少者)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기생을 범하고 나갔으니, 참 해괴한 일입니다.” 하니, 감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다시는 말하지 말라. 그 자의 아내를 내가 빌려 간통한 것이니, 본남편의 그러한 일이 무엇이 괴이할까 보냐.” 하였다. 진천 강혼의 법을 준수함과 감사의 넓은 도량은 가히 어려운 일이다.
○ 가정(嘉靖) 신해년 가을 내가 이부랑(吏部郞)으로서 관서(關西) 지방에 사명(使命)을 띠고 갔을 때에 기성(箕城 평양)의 기생 동정춘(洞庭春)과 정을 나누었다가 조정에 돌아왔는데, 그 후 동정춘이 편지를 보내기를, “님을 사모하나 보지 못하니, 생이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겠소. 차라리 죽어서 함께 묻히기라도 바라니, 멀지 않아 선연동(嬋娟洞)으로 가겠나이다.” 하였다. 선연동은 기성 칠성문(七星門) 밖에 있는 곳으로, 평양 기생이 죽으면 모두 여기에 장사지낸다. 내가 장난삼아 한 구를 지어 보냈으니,
종이 가득 쓴 글 모두 맹세한 말 / 滿紙縱橫摠誓言
나도 훗날 저승에서 만나기로 기약하네 / 自期他日共泉原
장부도 한번 죽음을 명하기 어려우니 / 丈夫一死終難免
마땅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어 보리 / 當作嬋娟洞裏魂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동정춘이 병으로 죽었는지라, 내가 장난삼아 다시 율시 한 수를 짓기를,
생이별에 길이 슬픔에 젖었으니 / 生別長含惻惻情
어찌 사별까지 생각했으리. 문득 목이 맺히네 / 那知死別忽呑聲
부음을 듣자마자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 乍聞凶訃腸如裂
가만히 목소리와 용모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네 / 細憶音容淚自傾
편지 몇 번이고 패수에서 왔건마는 / 書札幾曾來浿水
꿈에도 기성에는 가지 못했네 / 夢魂無復到箕城
선연동에 묻힌다는 장난말이 예언이 되었으니 / 嬋娟戱語還成讖
저승에서 같이 지내자는 맹세 저버려 부끄럽소 / 愧我泉原負舊盟
하였더니, 벗들이 보고서 웃었다. 기미년 봄에 내가 호서(湖西) 지방 관찰사로 있을 때 참판 권응창(權應昌) 공이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어서 그의 서제(庶弟)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이 따라가 있었다. 내가 홍주에 가던 날 송계가 고을 사람에게 가르치던 가요율시(歌謠律詩) 두 수를 주었는데, 그 끝구에,
인생은 뜻대로 남북이 없는 것이니 / 人生適意無南北
선연동의 혼만 되려 하지 마소 / 莫作嬋娟洞裏魂
하였는데, 간절하고도 온당하여 의미가 있었으니, 그때 내가 홍주 기생 옥루선(玉樓仙)을 사랑하였으므로 송계의 시는 징험이 된다. 홍주를 순행할 때 옥루선에게 율시 한 수를 주었는데,
동풍 향해 앉았어도 남몰래 마음 쓰라려 / 坐向東風暗斷魂
창 앞에서 우는 새소리마저 차마 듣지 못하겠네 / 窓前啼鳥不堪聞
이별은 많고 만나기는 드물고 봄은 어느새 저물어 가는데 / 離多會少春將晩
길 멀어 편지마저 드문 채 날도 저물려 하네 / 路遠書稀日欲?
못 믿겠네. 오작교에 까막까치 있단 말 / 未信星橋曾有鵲
무산에 구름마저 없다스랴 / 却疑巫峽更無雲
이 마음 표현하자니 도리어 슬퍼서 / 此情欲寫還?恨
공연히 금로에 저녁 향불만 피우노라 / 空對金爐換夕薰
하였다. 이어 다른 이로부터 많은 시를 받아 시축(詩軸)을 이루었다. 만력(萬曆) 계사년 봄에 공사로 말미암아 홍주에 가서 옥루선(玉樓仙)이 살아있는지 물으니, 시골 마을에 살아있으며 시축도 간직하고 있다 하기에 가져다 보니, 수적(手跡)이 완연한지라, 약간의 발문(跋文 책 끝에 그 책의 내용과 관계 사항을 쓴 것)을 써서 돌려 주었다. 손꼽아 헤아려보니 기미년부터 금년 계사년까지는 35년이며, 나의 나이는 78살인데, 다시 옛날에 왔던 지방을 오게 되었으니, 가히 다행이라 하겠다.
○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따라와 송별하기에 내가 시를 지어 주기를,
봄 내내 병중에서 보내다가 / 一春都向病中過
이별하기 어려운 것 넌들 어찌 하리 / 難思無端奈爾何
침상에서 몇 번이나 눈썹을 찡그렸고 / 枕上幾回眉蹙黛
술자리에서는 그저 애교의 눈웃음이었네 / 酒邊空復眼橫波
객사에 늘어진 버들 애타게 보며 / 愁看客舍千絲柳
참고 양관의 한 곡조 들어 주소 / 忍聽陽關一曲歌
문밖에 해가 져도 떠나지 못하겠으니 / 門外日斜猶未發
좌중에 누가 고민이 많음을 알아주랴 / 座間誰是暗然多
하였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내가 첩(妾)을 잃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전주 기생 금개가 일찍이 사람을 따라 상경했다가 그 사람이 죽어 과부로 지내는데, 마침 공의 첩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옛정을 사귀고자 한다.” 하기에, 내가 허락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사고가 있어서 이루지 못하였으니, 헤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도 운수가 있는가 보다.
○ 가정 경술년 봄에 어떤 사건으로 벼슬을 잃고 백부의 임소(任所)인 대구(大邱)로 갔다가, 이어 성주(星州) 가야산(伽倻山)에 놀러가니, 성주 목사 조희(曹禧) 공은 나의 친척되시는 어른인지라, 수일을 머물게 하고 어린 기생으로 하여금 따라다니도록 하였다. 기생의 나이는 겨우 16살이었다. 대구로 돌아가게 되자 목사 조희가 그를 따라보내서 몇 개월이나 같이 지냈는데, 장난으로 절구를 지어 주기를,
어여뿐 기생들 중에서도 제일로 아리따운 그대 / 綽約梨園第一容
나그네로 오늘 우연히 만났네 / 客中今日偶相逢
다른 이의 금석 같은 굳은 맹세 믿지 말고 / 靡他信誓堅金石
천 마디 만 마디 말하건대, 부디 따라가지 말게 / 萬語千言愼莫從
하였다. 다른 이의 시도 많이 받았다. 동료들 중에 사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간 이들이 이것을 보고 많이 화답하였다. 계해년 봄에 내가 본도(경기도) 감사로 있으면서 성주에 가서 기생의 안부를 물으니, 그는 경적(京籍)에 뽑혀 갔다고 하였다. 내가 갈리어 돌아오니, 그 기생은 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다. 기러기와 제비처럼 가는 길이 어긋나니, 가히 한탄할 뿐이다. 얼마 후에 그 기생이 병으로 죽으니, 권송계(權松溪)는 성주 사람이라, 그 부음(訃音)을 전하고 시로써 조상하거늘, 내가 그 시에 차운하기를,
늙어서 낙신부를 지을 마음 없으니 / 老去無心賦洛神
물결 위에 걷는 버선 먼지 나는 것 못 보노라 / 凌波不見襪生塵
아직도 처음 만나던 모습만 생각나는데 / 當年?憶初呈態
오늘 죽었다는 소식 듣고 놀랐네 / 此日驚聞忽化身
운우지락 있던 그때 꿈 희미하니 / 暮雨朝雲迷舊夢
춤추고 노래하던 옷과 부채 누구에게 전했을꼬 / 舞衫歌扇付何人
성주는 이로부터 화려한 맛 감해져서 / 星山自此繁華減
적막한 임풍루(성산에 있는 누각) 누각 이름 에 손님만 앉았으리 / 寂寞臨風 樓名 座上賓
하였다.
○ 징군(徵君) 성운(成運)은 보은(報恩) 종곡(鍾谷) 사람이다. 행동거지가 매우 고상하고 문장이 또한 절묘(絶妙)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종산 속에 들어와서 / 一入鍾山裏
솔과 대를 벗삼아 초막에 누웠네 / 松筠臥草廬
하늘은 높아도 머리는 숙여야 하고 / 天高頭肯俯
땅은 좁다 해도 무릎은 펼 만하다 / 地窄膝猶舒
명성 있는 사람 누가 있을꼬 / 名下何人在
숲 속에 늙은이 남아있네 / 林間此老餘
사립문에는 손님도 절로 끊어졌는데 / 柴門客自絶
금서는 놓는 날이 없네 / 無日罷棄書
하였다. 또 을사 위사훈(乙巳衛社勳)을 혁파하였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짓기를,
일은 지났거니 슬퍼한들 무엇 하리오만 / 事往嗟何及
어진 이를 회상하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懷賢淚滿衣
물결이 뒤집히면 용도 말라죽고 / 波軋龍爛死
소나무가 넘어지면 학도 놀라 날아가네 / 松倒鶴驚飛
지하(地下)에는 은원이 없으련만 / 地下無恩怨
인간세상에는 시비만이 남아있네 / 人間有是非
우러러 저 햇빛을 보라 / 仰瞻黃道日
누가 그 빛을 가리리 / 誰復俺光輝
하였으니, 두 시가 모두 대단히 아름답다. 성징군은 세상에 뜻이 없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처사(處士)였다.
○ 당(唐) 나라 회창(會昌 당 무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洛陽)에 살던 전 회주 사마(懷州司馬) 호고(胡?)는 89세, 위위경(衛尉卿)으로 치사(致仕 나이가 늙어서 벼슬을 사직함)한 길민(吉旼)은 88세, 전 자주 자사(磁州刺史) 유진(劉眞)은 87세, 전 용무군장사(龍武軍長史)인 정거(鄭據)는 85세, 전 시어사 내공봉관(侍御史內供奉官) 노진(盧眞)은 83세, 전 영주 자사(永州刺史) 장혼(張渾)은 77세,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한 백거이(白居易)는 74세였는데, 7명이 칠로회(七老會)를 만들고, 각각 칠언 육운 배율시(七言六韻排律詩) 한 수씩을 지었으며, 백거이는 그 서문을 썼다. 낙양에 오래 살던 노인 이원상(李元爽)은 136세, 승(僧) 여만(如滿)은 95세인지라, 2명을 추가하여 가입시켰으므로 이것이 구로회가 되니, 그때 사람들이 사모하여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서감(秘書監) 적겸모(狄兼?)와 하남윤(河南尹) 노정(盧貞)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모임에는 비록 참여하였으나 대열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송(宋) 나라 지화(至和 인종의 연호) 연간에 저양(雎陽)에서 살던 태자의 태사(太師)로 치사한 두연(杜衍)은 80세,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치사한 왕환(王煥)은 90세, 사농경(司農卿)으로 치사한 필세장(畢世張)은 94세,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치사한 주관(朱貫)은 88세, 가부 낭중(加部郞中)으로 치사한 풍평(馮平)은 87세였는데, 5명이 오로회(五老會)를 만드니, 그때 사람들이 그 모임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그 성사(盛事)를 기록하였으며, 두연이 칠언 율시(七言律詩) 한 수를 지으니, 다른 4명도 모두 차운을 하였다. 동향 사람 전명일(錢明逸)은 두연의 명을 받고 서문을 지었다. 송(宋) 나라 원풍(元? 신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에 살던 사도(司徒)로 치사한 부필(富弼)은 79세, 태위 판하남부(太尉判河南府) 문언박(文彦博)은 77세, 상서 사봉낭중(尙書司封郞中)으로 치사한 석여언(席汝言)은 77세였다. 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치사한 왕상공(王尙恭)은 76세, 태상 소경(太常少卿)으로 치사한 조병(趙丙)은 76세, 비서감(秘書監)으로 치사한 유궤(劉?)는 75세, 위주 방어사(衛州防禦使)로 치사한 풍행(馮行)은 75세, 천장각 대제 제거 숭복궁(天章閣待制提擧崇福宮) 초건중(楚建中)은 72세, 사농 소경(司農少卿)으로 치사한 왕신언(王愼言)은 72세, 선휘 남원 사판 대명부(宣徽南院使判大名府) 왕공진(王拱辰)은 71세, 태중 대부 제거 숭복궁(太中大夫提擧崇福宮) 장문(張問)은 70세, 용도각 직학사 제거 숭복궁(龍圖閣直學士提擧崇福宮) 장도(張燾)는 70세, 단명 전학사 겸 한림 학사(端明殿學士兼翰林學士) 사마광(司馬光)은 64세였는데, 13명이 기영회(耆英會)를 만들고, 민(? 지금 복건성의 지명) 사람인 정환(鄭奐)에게 명하여 회원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이때 왕공진이 대명부(大名府)에 있으면서 문로공(文潞公 문언박)에게 글을 보내 사마광(司馬光)을 기영회에 가입시키도록 청하니, 이때 사마광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기영회에 가입할 수 없으나, 문로공이 전부터 그의 인격을 존중하던 터라 적겸모(狄兼?)의 고사를 인용하여 기영회에 가입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사마광은 후배라고 사양하니, 문로공이 정환에게 몰래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전하게 하였다. 문로공이 첫번째로 모임을 열었으며 그 나머지 회원들도 차례로 모임을 가졌다. 부공(富公 부필)이 먼저 오언 장편시(五言長篇詩)를 짓고, 다음에 문로공이 칠언 육운 배율시를 지으니, 나머지 회원들도 배율시로 5언이나 7언시를 지었으며, 또는 7언 장편시를 지은 자도 있었는데, 사마광이 그 시편에 서문을 썼다. 위에서 말한 칠로회나 오로회, 그리고 기영회에서는 모두 모임을 할 때의 나이가 쓰여져 있으나 그들의 향년(享年 평생 산 나이)이 얼마인지 상고할 수 있는 자로는 오직 백거이는 86세, 두연은 81세, 문언박은 92세, 사마광은 68세였다. 나머지 회원의 나이는 모두 기록한 것이 없다. 우리 고을의 노인들이 당송(唐宋) 제현(諸賢)의 일을 사모한 나머지 10여 명이 모임을 만들어 여러 해를 지내다가 난리를 만나 해산하였는데, 난리 후에 생존한 이는 다만 서교(西郊) 송공(宋公 송찬)과 죽계(竹溪) 안공(安公 안한), 그리고 나(심수경) 세 명이었는데, 죽계도 이제 또 작고하였다. 두 명만으로는 모임을 다시 하지 못하겠으니, 가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 독서당(讀書堂)이 두모포(豆毛浦)의 북변(北邊) 산기슭에 있으니 서울과는 7, 8리가 된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인재를 기르려는 뜻이 대단하여 모든 은총(恩寵)이 이 서당(書堂)에 특별하니 사람들은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오름에 비유하였다. 성종 때는 수정배(水精盃)를, 중종 때에는 선도배(仙桃盃)를 하사하였으며, 명종 기유년 여름에는 서당에 선온(宣?)을 베풀고 또 혜호배(??盃)를 하사하였다. 혜호는 벌레 이름으로 술을 마시기만 하면 죽는다. 이 벌레 모양으로 술잔을 만든 것은 술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관물(觀物) 민기(閔箕) 공ㆍ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공ㆍ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공ㆍ국간(菊磵) 윤현(尹鉉) 공, 그리고 내가 선온(宣?)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튿날 독서당 동료들이 나에게 사은(謝恩)의 글을 지으라고 하여 한 구절을 지었으니,
수정배ㆍ선도배와 더불어 함께 전해지리 / 與水精仙桃而竝傳
하였는데, 이 말은 이 술잔을 하사한 성종과 중종 때에 서당에 대한 은총이 더욱 현저하였으므로 이렇게 쓴 것이다. 임당이 이 구절을 독서당의 《고사록(故事錄)》에 쓰고, 이것을 ‘실록이라.’ 하였다. 이 일은 이미 49년이 지난지라, 동료들은 모두 작고하고 나만 살아 있으니, 아, 슬프다. 임진난 후에는 서당마저 폐지된 지 오래되니 실로 한탄스럽구나.
○ 나의 당질 심일승(沈日昇)이 사옹원(司饔院) 참봉으로서 사기소(沙器所) 감조관(監造官)이 되어 나에게 말하기를, “술에 대한 시를 지어 보내 주시면 잔대에 그 시를 써서 구워 만들겠다.” 하기에 내가 5언 절구를 지었으니,
주덕송은 참으로 읊을 만하며 / 酒德眞堪頌
얼큰히 취하면 화평스럽다 / ??養太和
술잔에 내 훈계를 부치노니 / ?觴我寓戒
오직 원하건대 술은 많이 들지 마소 / 唯顧酌無多
하였더니, 심일승이 그 시를 새겨 새 술잔을 구워 보내왔다. 대개 이 시는 나의 자식이나 조카를 훈계하고자 한 것이지, 타인에게야 어찌 준수하기를 바라리오마는, 술의 재앙은 비참하니,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유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 명종 임술년 겨울에 왕명으로 김주(金澍)ㆍ박충원(朴忠元)ㆍ오상(吳祥)과 나를 정원(政院)에 불러 비단에 그린 긴 병풍 네 벌을 내리시니, 병풍마다 8폭으로 되어 있고 그 끝 폭은 비어 두었다. 그림은 네 벌이 각기 다르니, 곧 성천도(成川圖)ㆍ영흥도(永興圖)ㆍ의주도(義州圖)ㆍ영변도(寧邊圖)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김주는 성천도를, 박충원은 영흥도를, 오상은 의주도를, 심수경은 영변도를 각기 맡아 기문(記文)과 장편시(長篇詩)를 지어서 비어 있는 비단폭에 직접 써서 들이라.” 하였다. 네 명이 배복(拜伏)하고 황공히 물러와서 저마다 수일 내에 기사(記事)와 시(詩)를 써서 바쳤는데, 나와 같은 거친 문장과 졸렬한 글씨로 성상의 상을 입기까지 하였으니, 영광스럽고도 다행함을 어찌하리오. 이보다 앞서 한양궁궐도(漢陽宮闕圖)가 있었는데, 홍섬(洪暹)에게 기문을 짓고 정사룡(鄭士龍)에게 장편시를 짓게 하였다. 또 평양도(平壤圖)는 정유길(鄭惟吉)이 장편시를 짓고 전주도(全州圖)는 이량(李樑)이 장편시를 지었는데, 모두 병풍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듣자니, 이 병풍 그림을 좌우에 두고 영원히 전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임진년의 병화로 모두 불에 타고 말았으니, 아, 애통하다.
○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이르기를, “전조(前朝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 사암(思菴) 유숙(柳淑)이 벼슬을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벗을 전송하는 시를 지었는데,
인간들이 기름을 짜듯이 서로들 괴롭히는데 / 人間膏火自相煎
명철한 공은 길이 역사에 전하리 / 明哲如公史可傳
이미 위급한 때에 사직을 편안히 하고 / 已向危時安社稷
다시 시골로 가니 신선이 되겠구려 / 更從平地作神仙
오호에 놀던 꿈은 끊어지고 연파(자연풍경을 말함)만 푸르고 / 五湖夢斷煙波綠
삼경에 가을이 깊으니 들국화 곱구나 / 三逕秋深野菊鮮
그러나 나는 벼슬을 버리고 가지를 못하니 / 顧我未能投?去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雪飄然
하였다. 신돈(辛旽)이 이 시를 보고 명철(明哲)이나 오호(五湖) 등의 말을 들어 왕에게 참소하여 죽였다.”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에도 이 시가 쓰여져 있는데, 여기에는 이인복(李仁復)이 유숙(柳淑)을 전송하며 지은 시라 하고, 그 시 끝에 주(註)를 내기를, “끝 구절을
서풍(여기에서는 불교를 지칭한 것으로, 곧 신돈을 말함.)이 부는 속세에 대한 뜻은 막연하네 / 西風塵土意茫然
라고 하였다가, 신돈이 볼까 염려하여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雪飄然
라고 고쳤다.” 하였다. 서거정과 김종직은 모두 문장을 박람(博覽)한 사람이며 또 시대의 선후도 서로 멀지 않는데, 기록된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괴이하다. 신돈이 이 시를 가지고 왕에게 참소하였다면 유숙이 지은 것이 명백하다.
○ 부모에 대한 삼년상(三年喪)은 성인(聖人)이 정한 제도이다. 그러므로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 혹 곡읍(哭泣)과 음식의 절차에는 예(禮)에 지나치는 일도 있으나, 기상(期祥 복 입는 기간)과 복제(服制 복 입는 제도)는 감히 고치지 못한다. 또 국상(國喪)의 제도는 조종조(祖宗朝)에서 상세히 정해서 법 조항의 첫 번째에 명시하였으므로 대대로 이 법령을 준수하였으니, 한 사람의 사견(私見)으로 변경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지난번 왕후(王后) 상(喪)에 한 음관(蔭官)이 제의하기를, “졸곡(卒哭) 후 백관(百官)이 오사모(烏沙帽)와 흑각대(黑角帶)를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여, 조정에서 회의를 열어서 백모(白帽)와 백대(白帶)를 고치니, 그렇게 큰 예(禮)를 경솔히 고칠 수 있을까. 진실로 한심한 일이다. 대신(大臣)과 예관(禮官)들은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 국상 복제(國喪服制)에 변방(邊方)은 상사(喪事)를 행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는 적(敵)에게 국상(國喪)이 있음을 알리지 않고자 해서이다. 변장(邊將)이라 해서 국상을 지키는 제도에 어찌 내지(內地)와 다름이 있으리오마는, 듣자니 무사들은 국상이 있어도 술과 기생으로 노는 것이 평시와 같다 하니, 진실로 한심하다. 명종의 상이 있을 때 내가 안변 부사(安邊府使)에서 남도 병사(南道兵使)로 전근되었는데, 수개 월 동안 갑산 행영(甲山行營)에서 유방(留防 머물러 있으면서 적을 방비함)하게 되었다. 영중(營中)에 정원루(定遠樓)라는 누각이 있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스스로 우습구나, 인생은 부질없이 고생만 하는데 / 自笑浮生?苦辛
해마다 전근하느라 머리털만 희어 가네 / 年年飄轉?絲新
누가 옥장(장군의 영막)의 이 외로운 손을 알아 줄까 / 誰知玉帳孤眠客
일찍이 나도 청릉 속에 누웠던 사람이라네 / 曾是靑綾慣臥人
천리나 떨어진 달밤에 지내기 어려운데 / 千里月明難度夜
뜰에 꽃이 지니 봄도 지났네 / 一庭花落已經春
호두연함은 원래 나의 일이 아니니 / 虎頭燕?非吾事
그저 허명으로 이 몸을 그르칠까 한하네 / 却恨虛名誤此身
하였다. 이해가 만력(萬曆) 기사년 봄이다. 수십년 후에 들으니 그 시판(詩板)이 아직도 있다고 하더라.
○ 명종 때에 내가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다시 부수찬(副修撰)으로 있다가, 부교리(副校理)와 부응교(副應校)를 지냈는데, 모두 오래지 않아서 교체되었고, 계축년 초봄에 응교(應校)가 되었다가 그 해 초가을에 교체되었다. 그 동안 성상이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오니 하루에 세 번이나 접한 날도 많으며 어떤 때는 밤까지 접하기도 하였다. 판서 박계현(朴啓賢)이 한림(翰林)이 되어서 나에게 말하기를, “공의 진강(進講)하는 소리는 가히 들을 만하다.”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그 해 겨울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부평 부사(富平府使)가 되기를 원하니, 박계현이 나에게 이별시를 지어 주기를,
강독은 당세에 제일이라 추존하니 / 講讀當今推第一
모름지기 다시 범순부가 온 것 같다 / 會須重喚范淳夫
하였는데, 범순부는 송(宋) 나라의 시강(侍講) 범조우(范祖禹)의 자(字)이다. 정이천(程伊川 정이)은 그는 온화한 기색으로 “시비를 개진해서 임금의 뜻을 인도한다.”고 칭찬하였고, 소동파(蘇東坡 소식)는 “그는 강사(講師)의 삼매(三昧)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용렬하고 노둔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비유가 되겠는가. 그저 시인의 허탄한 말일 뿐이다. 갑인년 가을에 내가 병으로 부평 부사를 그만두고 집에 한가로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특지(特旨)로 전한(典翰)에 임명하였으니, 관원(館員)에게 특지라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을묘년 5월에 직제학에 오르고, 그해 8월에 승지가 되니 그 은총이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조금의 보답(報答)도 없었으니, 진실로 죄가 있다. 그 후에는 왕이 경연에 나오는 일이 드물 뿐만 아니라 관원들도 병을 핑계하고 2, 3개월 동안 직(職)에 머무른 자가 없었으니, 식자(識者)로서는 한심한 일이다.
○ 송(宋) 나라 참정(參政) 채제(蔡齊)는 술을 좋아한 사람으로 장원으로 급제하여 날마다 진한 술을 마시고 가끔 술에 취하니, 그 대부인(大夫人)은 연세 높은 노부인으로 매우 근심하였다. 가속(賈?) 공속이 채제의 어짊을 사랑하여 그가 술로써 학문을 폐하고 병이 생길까 염려하여 시를 주어 풍자하였으니,
성군의 사랑이 두터워 장원으로 뽑히고 / 聖君寵厚龍頭選
자모의 은혜 깊어서 백발이 늘어졌네 / 慈母恩深鶴髮垂
임금의 사랑과 어머니 은혜를 모두 갚지 못한 채 / 君寵母恩俱未報
술로 병이 들면 후회한들 무엇하리 / 酒如成病悔何追
하니, 채제가 놀라 일어나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친객(親客)이 아니면 술을 대하는 일이 없으며, 종신(終身)토록 한 번도 취하지 않았다. 세상에 술을 즐기는 자는 비록 부모의 훈계도 듣지 않는데, 채공은 과객의 풍자로 인하여 즉시 그 허물을 고쳤으니, 참으로 현인이라 하겠다.
○ 명종(明宗) 즉위(卽位) 3년인 무신년 봄에 독서당(讀書堂)에 같이 선발된 자는 교리 윤춘년(尹春年), 좌랑 한지원(韓智源), 전적 박민헌(朴民獻), 수찬 윤결(尹潔), 그리고 좌랑 나였다. 윤춘년은 갑술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서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고 나이가 60이 넘어 작고하였다. 한지원은 계유생으로 갑진년 가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는데, 나이 50도 못 되어 작고하였으며, 박민헌은 병자생으로 병오년 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나이 70이 넘어 작고하였다. 윤결을 정축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찬이 되었다가 32세로 비명에 죽었다. 나는 병자생으로 병오년 가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고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 병이 없다. 나는 5명 중에서 재덕(才德)이 가장 낮은데 벼슬과 수(壽)는 가장 높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벼슬은 혹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재앙을 없앨 수 있으며 수명은 혹 조심하고 섭생으로써 요절(夭折)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본분은 천명에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될 바가 아니다.
○ 송(宋) 나라 승상(承相)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은 자기 고향인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78세였는데, 조산대부(朝散大夫) 정향(程珦), 조의대부(朝議大夫) 사마단(司馬旦)과 사봉 낭중(司封郞中) 석여언(席汝言)과 더불어 동갑회(同甲會)를 만들고 각기 시를 지었다. 노공의 시에,
4명의 나이 3백 12살인데 / 四人三百十二歲
또한 동갑 병오생이네 / ?是同生丙午年
양원(양 나라 효왕의 화원)에서 시를 읊는 격이요 / 占得梁園爲賦客
상령에서 지초를 캐는 신선이로세 / 合成商嶺採芝仙
청담은 물 흐르듯 바람은 저절로 나고 / 淸談??風生席
흰머리 날리니 눈이 어깨에 가득 찬 듯하네 / 素髮蕭蕭雪滿肩
이 같은 모임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니 / 此會從來誠未有
낙양에서 응당 그림으로 길이 전하리 / 洛中應作畵圖傳
하였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고 그 시에 차운하기를,
노공과 동갑으로 네 어진 분이 있었는데 / 潞公同甲四名賢
80에서 아직 두 살이 모자라네 / 八十將臨未二年
낙양에는 노인이 많다지만 / 共道洛中多壽考
누가 이 지상에 신선 있는 줄 알리 / 誰知地上有神仙
백 살이던 자야(예전에 오래 산 장자야)의 걸음을 따를 것이요 / 百齡子野堪追武
구로회를 만든 향산(당 나라 백낙천)과 어깨를 겨루리 / 九老香山可竝肩
어찌 그림으로 길이 남기련가 / 何用畵圖垂不朽
좋은 시구 지금도 전해지네 / 好看詩句至今傳
하였다. 노공의 향년(享年)은 92세였고, 정향(程珦)과 사마단과 석여언의 향년은 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때에 낙양에서는 나이 70이 되면 동갑회를 만들었다고 하니, 또한 기특한 일이다. 나와 동갑은 병자생으로 35명이 있어 동갑 계(契)를 하였는데, 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나 혼자 생존하였다. 노공의 시에 차운한 여흥(餘興)으로 감탄한 나머지 다시 한 수를 지었으니,
동갑 병자생 35명은 / 同丙生人三十五
젊어서 계를 하여 이제 노쇠하였네 / 少年爲契到衰年
세월은 흘러 많은 사람 세상 떠나 / 光陰遞去多辭世
80년 동안 모두 신선이 되었네 / 八十踰來盡作仙
번화하던 자리 적막하여 홀로 탄식하고 / 盛席寥寥空自嘆
외롭고 쓸쓸한 몸 누구와 같이하리 / 孤形孑孑比誰肩
길게 살고 오래 보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 / 長生久視眞難事
다만 팽조와 노자만 만고에 전해지네 / 只有彭?萬古傳
하였다.
○ 우리 나라에서 장원 급제하여 대제학이 된 자는 권제(權?)ㆍ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김안로(金安老)ㆍ정사룡(鄭士龍)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이이(李珥)이다. 조종조에서는 예문관 대제학이 문형을 맡고 홍문관 대제학은 다른 사람이 겸임하였는데, 중종 이후에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두 대제학을 한 사람이 겸직하게 되었다. 특히 어세겸(魚世謙)과 이행(李荇), 그리고 김안로는 의정(議政)이 된 뒤에도 대제학을 겸하고 있어서 여론이 좋지 않기도 하였다.
○ 선가(禪家 불교의 한 종파)에서는 사제(師弟)간에 도(道)를 전하는 것을 의발(衣鉢)을 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의발로 도를 비유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 문생(門生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좌주(座主 과거의 수석 고시관)가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문자을 의발에 비유한 것이다. 대제학도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조종조에서는 대제학에게 큰 벼루가 있어서 서로 전하였다고 하나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 벼슬이 1품으로 나이 70세 이상이 되어도 국가에 중요한 일에 관계하여 치사(致仕)하지 못하는 자에게 궤장(?杖 70세가 넘은 노재상에게 주는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는 것이 국가의 법례이다. 만력(萬曆) 계유년 4월에 영중추부사 홍섬(洪暹)이 이미 영의정을 지내고 나이 70에 궤장의 하사를 받고 궤장연(?杖宴)을 베풀 때 여러 재상들이 많이 모였다. 내시 중사(中使)와 도승지 이희검(李希儉)은 선온(宣? 하사하는 술)을 가져오고, 주서(注書) 이준(李準)은 교서(敎書)와 궤장을,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참찬 원혼(元混),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판윤(判尹) 강섬(姜暹), 형조 참판 박대립(朴大立), 우윤(右尹) 김계(金啓)가 자리에 참여하고, 나 또한 호조 참판으로 말석에 참여하였다. 이때 상공(相公 홍섬)의 대부인(大夫人)의 나이 87세였는데, 그는 영의정 송질(宋?)의 딸이었다. 상공의 선군(先君) 홍언필(洪彦弼)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궤장을 하사 받았으니, 대부인은 영의정의 딸이고 영의정의 아내이며 영의정의 어머니다. 두 번이나 이런 영화를 보니, 이는 근고에 없던 성사(盛事)였다. 노의정(盧議政 노수신)이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기를,
삼종 동안 모두 정승 집 문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 三從不出相門?
이 같은 영화는 오늘이 처음이로세 / 此事如今始有之
조정에서는 영수장 짚고 다니다가 / 更?省中靈壽杖
집안에서는 노래자(중국 초 나라의 현인이며 효자로 70세에 아이옷을 입고 어린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위안하였다)의 옷을 입었네 / 却被堂上老萊衣
우로와 같은 은혜 천년에 참으로 드문 일이요 / 恩霑雨露眞千載
기쁘게 맞아들인 대관들은 한때에 극진한 분이었네 / 歡接冠紳盡一時
어디서 와서 나도 자리에 참여하니 / 何處得來?席次
좋은 시로 정승 집 빛내지 못함이 부끄럽네 / 愧無佳句賁黃扉
하였다. 나도 시를 지었으니,
궤장의 큰 은혜는 이 나라에 드물거니 / ?杖鴻恩罕此邦
정승님 집안 경사 다시 짝이 없네 / 相公家慶更無雙
세 정승을 이어받으니 삼괴 구극 벼슬 다 지냈고 / 傳三議政官槐棘
대부인 모셨으니 복은 바다와 강물 같네 / 奉大夫人福海江
자리에 가득 찬 영광 꽃이 자리에 비쳐 있고 / 滿座榮光花映席
하늘에 오를 듯 기쁜 일 술마저 동이에 가득하네 자리 위에 만든 꽃이 두 바구니가 있고, 선온한 술이 열 항아리가 있었다. / 騰空喜氣酒盈缸 席上有造花二盆宜?十缸
이때 이 성사를 기록하여 전하려 하나 / 一時盛事應須記
어디서 크게 펴 놓을 서까래 같은 붓을 얻으리오 / 安得鋪張筆似?
하였다. 여성군 송인은 상공의 표제(表弟 외종제)로, 기문(記文)과 배율시(排律詩)를 짓고 또 다른 이의 장편시며 율시(律詩)도 수집하여 시첩(詩帖)을 만들었다. 상공이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여성군은 그 그림 뒤에 여러 시를 써서 일가(一家)의 보물로 간직하게 되었다. 대부인의 향년이 94세, 상공의 향년이 82세이니, 인간 세상의 복된 경사가 진실로 짝이 없도다.
○ 계유년 인재(忍齋) 홍상공(洪相公 홍섬)의 궤장연(?杖宴) 때에 지은 소재(蘇齋) 노상공(盧相公 노수신)의 시와 나의 시는 이미 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계유년에서 벌써 25년이 지나고 보니 그 잔치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나와 이준(李準)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이공(이준)은 벼슬이 2품이고 나는 벼슬이 의정을 거치고 나이 80을 넘긴 터라 그때 잔치를 추억하노라니 어렴풋이 일어나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고 그때 시를 생각하니, 그 즉석에서 경솔히 지었기로 자못 정(情)을 다하지 못한지라 이제 점 찍으며 고쳐 짓는데, 추한 여자가 화장한 격으로 다만 더욱 추하게 만들까 염려하면서도 다음의 시를 읊기를,
궤장은 원래 나이와 작위가 높은 이를 위함이니 / ?杖元因齒爵堪
고문에서 성은 내리심을 독차지하였네 / 高門偏荷聖恩覃
두 임금 대에 계속하여 70살이 두 분이요 / 二朝繼顯稀年二
삼대를 이어받은 정승이 셋이로다 / 三代相傳議政三
대부인 모시고 편안히 복받고 / 奉大夫人綏福履
재상을 맞이하니 동남에서 모두 왔네 / 邀諸宰相盡東南
인간 세상 영화가 누군들 이 같을까 / 世間榮耀誰如此
왁자하게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네 / 喧播應爲萬口談
하였다. 인재의 아들 홍기영(洪耆英)은 나의 사위이다. 그 잔치 때에 만든 화첩(畵帖)을 병화로 잃었다 하기로 이 글을 주어서 보관하도록 하니, 이는 그때 화첩의 만분에 일이라도 충당할까 해서이다.
○ 독서당(讀書堂)은 옛날에 대청(大廳)과 남루(南樓)가 있고, 남루 북편에는 침방(寢房)이 있었다. 임자년 연간에 당료(堂僚) 임당(林塘)ㆍ정유길(鄭惟吉)과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국간(菊磵) 윤현(尹鉉),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 그리고 내가 서로 상의하여 남루 동편에 당 하나를 지으니 매우 산뜻하였다. 누각을 문회루(文會樓)라고 하였는데, 30여 년이 지난 후에 당원(堂員)들이 또 새 집을 남루(南樓) 서북쪽 못가에 지으니 더욱 산뜻하였다. 독서당의 선생(先生 전직장)들을 모시고 낙성연(落成宴)을 베푸니 나와 지사(知事) 임열(任說)이 참여하였다. 당시 당원으로는 교리 유근(柳根)ㆍ이항복(李恒福), 그리고 봉교(奉敎) 이호민(李好閔)이 자리에 있었다. 사미(四美 양신(良辰)ㆍ상심(常心)ㆍ미경(美景)ㆍ낙사(樂事))와 이난(二難 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빈객)을 갖추었으니 그 또한 훌륭한 모임이었다. 술이 반취되어 내가 먼저 칠언 율시와 오언 율시를 지으니, 제공(諸公)이 서로 수창(酬唱)하여 수십여 편이 되었다. 다만 내가 먼저 지은 시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 7언시에,
생각해보니 내가 독서당에 들어갔던 것은 30년 전으로 / 憶昨登瀛?載前
남루와 동각에 올라 신선과 짝하였네 / 南樓東閣伴神仙
몸이 대궐로 돌아가 관에 오래 얽매이니 / 身歸闕下官長繫
길이 호변에 막혀 꿈만 자주 꾸네 / 路隔湖邊夢屢牽
좋은 날 외람되게 늙은이 초청되어 / 勝日猥蒙招舊物
화려한 집에 욕되게도 첫 자리에 앉았었네 / 華堂?得赴初筵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예나 다름없는데 / 眼中風景渾如昔
부끄럽다 시 쓰자니 서까래 같은 붓이 없네 / 愧乏題詩筆似椽
하였고, 또 5언시에는,
몇 해나 구관을 그리워하였더니 / 幾年思舊館
오늘에야 신당을 감상하네 / 今日賞新堂
나무 그림자는 3층 문지방에 어른거리고 / 樹影三層?
하늘 빛은 반 마지기 연못에 비추네 / 天光半畝塘
학은 어리석어 처음으로 춤 배우고 / 鶴癡初學舞
연꽃은 늙어도 향기를 머금었네 / 荷老尙含香
날이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잊었으니 / 盡日忘歸去
어찌 시 짓고 술 마시기 사양하리 / 寧辭詠且觴
하였다. 이때는 만력 정해년 8월 25일이었다. 이때 임지사(임열)는 78세이며 나는 72살이었다. 유교리(유근)는 39세이며 이교리(이항복)는 32세이고 이봉교(이호민)는 38세였다. 이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제명(題名)하여 각기 보관하였다. 정해년부터 지금까지가 11년이 되었는데, 유공(柳公)과 두 이공(李公)의 벼슬은 모두 2품이 되고, 나 역시 벼슬이 1품으로 아직도 죽지 않았는데, 서당은 병화에 타고 터만 있어서 다시는 사문(斯文)의 모임을 갖지 못하겠으니, 실로 한탄할 바로다.
○ 의정(議政) 유송당(兪松塘 유홍)은 벼슬이 2품이 되었을 때에 치사(致仕)하고, 광주(廣州) 용진(龍津) 무수동(無愁洞)에 농막을 짓고 그 이름을 퇴우정(退憂亭)이라 하고, 여러 재상들에게 시를 구하니, 의정 박사암(朴思菴)이 첫머리에 칠언 율시를 쓰고, 의정 노소재(盧蘇齋)ㆍ정임당(鄭林塘)ㆍ김동원(金東園)ㆍ이아계(李鵝溪)가 차례로 쓰고, 다른 재상들도 많이 화답하였으며, 나도 화시를 지었으니,
비로소 티끌 세상 나오니 문득 신선이로세 / ?出塵?便是仙
무수동 속에 별천지 감추어져 있네 / 無愁洞裏別藏天
젊어서 큰 공을 세워 은혜 갚았으니 / 黑頭勳業酬恩日
청산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게 되었네 / 靑?栖遲乞退年
누가 세상에 일 많음을 알까 / 誰識世間忙歲月
몇 번이고 외방의 좋은 산천 생각했네 / 幾思方外好山川
나도 소매를 떨치고 그대 따라가리라 / 從君拂袖吾將決
돌아가는데 어찌 성 아래 옥토가 필요하랴 / 歸去寧須負郭田
하였다. 임당(林塘)은 끝까지 물러나지 못하고 72세로 작고하였다. 나도 벼슬이 2품으로 70살이 된 후로는 여러 번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다가 80이 넘어서야 겨우 물러나게 되었다. 내가 만일 수년 전에 죽었더라면 물러나려는 뜻을 끝내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돌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다행이 아니리오. 이에 이전 시에 차운하기를,
슬프다, 송당이 이미 신선이 되었구나 / ??松塘已作仙
출세하고 은둔하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모두가 하늘의 소관일세 / 行藏修短摠關天
거친 전원으로 돌아가려 청한 것이 오늘까지 많았는데 / 荒園乞退多今日
별장에서 시를 구하던 옛날이 생각나는구나 / 別墅求詩憶昔年
얻고 잃었다 한 것 몇 번인가 희미해 꿈만 같고 / 得喪幾回迷似夢
세월을 어찌하리 냇물처럼 흘렀네 / 光陰無耐逝如川
율리 사는 비선리에 밤나무가 많으므로. 에 늦게 왔다고 말하지 말라 / 莫言栗里飛仙多栗 歸來晩
생계는 그래도 두어 마지기 밭이 있다네 / 生計猶存數畝田
하였다.
○ 서자[庶孼]로서 문장에 능한 자는 조종조 때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曺伸)이 이름이 났고 근세에는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이름이 났는데 그 문장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한 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진실로 아깝다. 평소 나와 수창(酬唱)한 시가 상당히 많은데 10년 전에 나에게 두 편의 율시를 보냈기로 그 시에 차운할 일이 있는데, 권응인의 시는 기억치 못하고 다만 나의 졸작만 기록해 본다.
처세하기 참으로 취한 듯 위의도 잃어버렸네 / 處世眞同醉失儀
평생의 이내 심사를 누가 알아 줄까 / 百年心事竟誰知
죽고 살고 오래 살고 요절하는 것 모두 운수 소관이요 / 死生修短皆關數
잘 되고 못 되고 근심과 기쁨 각기 때가 있다네 / 榮辱憂歡各有時
병골은 지리멸렬하여 오래 살기 어려운데 / 病骨支離侵壽域
빛난 직함 판서 다음 자리 부끄럽구나 / 華銜慙愧亞台司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엇 하나 능하리 / 致君謀國何能得
자기 힘 헤아리고 한직에 옮겨가면 분수 마땅할 걸 / 自料投閑分是宜
하였고, 둘째 시에는,
저 달 오래 보노라면 두 고장 비춰 주어 / 明月長看照兩鄕
서로 생각하는 천리 길에 머리털 희어졌네 / 相思千里?成霜
바람 비 궂은 날에 향탁(임금 앞)에 나가는 것 못 견디어 / 不堪風雨趨香十
그림과 글씨로 초당 위에 누웠던 것 공연히 부러워라 / 空羨圖書臥草堂
평상을 내려 보아도 유자를 만날 길 없고 / 下榻末由逢孺子
고기 보려 하나 호량(아름다운 호수와 언덕)에 같이 갈 자 누구런가 / 觀魚安得共濠梁
운수는 하늘이 주신 것 그대로 따르려나 / 窮通且可安天賦
다만 양공이 예장을 버린 것이 한스럽네 / 只恨良工棄豫章
하였다.
○ 사람이 관직을 받는 것은 이조(吏曹)에서 그 재주를 보고서 헤아려 직책을 주나, 실은 하늘의 명(命)에 있고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하는 바 아니다. 세상에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그리고 홍문관(弘文館)의 관원과 정부의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두 조랑(曹郞 좌랑과 정랑을 말함)을 청요(淸要)의 직이라 하며, 또 이상(二相 의정부의 좌ㆍ우찬성)과 삼사재(三四宰 의정부의 좌ㆍ우참찬)와 육조 판서(六曹判書)와 팔도감사(八道監司)와 양계 병사(兩界兵使), 그리고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승지(承旨)는 모두 화현(華顯)의 직이라고 한다. 나는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관직과 정부의 이조ㆍ병조의 낭관을 두루 지내고, 또 이상(二相)과 삼사재(三四宰)를 지내고, 또 호ㆍ예ㆍ병ㆍ형ㆍ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외방으로는 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ㆍ함경ㆍ경기 감사와 함경남도 평안도의 병사(兵使)와 개성 유수와 승지를 지냈다. 본래 재덕과 인망이 없어서 그런 직책에 맞지 않건만, 이력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하늘이 준 명에 말미암는 바 아니리오. 세상에서는 혹 지력(智力)으로 얻으려 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명을 모르는 자라 하겠다.
○ 나는 13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였으므로 자모(慈母)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성장해서 벼슬과 명망이 현달(顯達)하자, 자모의 봉양과 은혜 갚을 뜻을 항상 품고 있었다. 가정(嘉靖) 을축년 여름에 개성 유수로 임명되었고, 정묘년 여름에 만기가 되어 조정에 돌아왔고, 그 해 가을에 또 원해서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고, 무진년 여름에 함경남도 병사로 전임되었다가, 기사년 여름에는 본도(경상도) 감사에 부임되었다. 신미년 여름에는 만기가 될 때 병을 빙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7년 간 네 곳을 전임하면서 맛난 음식의 공양을 조금이라도 대접하여 숙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리오. 모친의 연세 86세에 갑자기 작고하니, 하늘처럼 크나큰 은혜 망극할 뿐이었다. 모친은 평생에 교훈이 엄격하였다. 모든 관청이나 고을의 송사에 한 번이라도 뇌물을 받고 간청을 들어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듣는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낳아 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해서이다. 벼슬이 1품에까지 오르고 나이 80이 넘은 것은 부모의 여경(餘慶)이라고 생각한다.
○ 참의 임억령(林億齡)은 호가 석천(石川)이며 해남(海南) 출신으로, 시(詩)가 빼어나고 참신하여 일찍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에 그 아우 임백령과 뜻이 같지 않아 위사훈(衛社勳)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가 늦게야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부임하였는데, 시를 읊기를,
아침에 북궐에 나아갔다가 저녁에 남주에 오니 / 朝趨北闕暮南州
성군 시대의 가짜 허유(요 임금 때의 고사로, 요 임금이 천하를 주려하자, 기산에 숨었다.)에 비유하네 / 竊比明時偉許由
종적은 구름 같아 퍼졌다가 없어지고 / ?跡似雲舒或卷
행장은 물과 같아 그쳤다가 다시 흐르네 / 行藏如水止還流
혼탁한 세상에 도잠(동진 때 시인으로, 자는 연명임)의 허리 굽히는 것 무엇이 해로우리 / 何妨混世陶腰折
명예 다투어 후예(옛날 활 잘 쏜 사람)와 활쏘며 노닐던 것 뒤에 후회하네 / 追悔爭名??遊
해변에 돌아와 늙을 것을 내 이미 결정하였노라 / 歸老海邊吾已決
누런 꽃 붉은 귤 고향의 가을일세 / 黃花朱橘故園秋
하였고, 또 읊기를,
아전들 돌아간 빈 뜰에는 새 날아 들고 / 吏散庭空鳥印?
살구꽃 그림자 듬성듬성 달 밝은 밤이로세 / 杏花?影月明中
백두와 오사모 쓰기 싫어 / 白頭剛厭鳥紗帽
객이 가면 매달고 객이 오면 머리에 쓰네 / 客去而懸客至籠
하였다.
○ 세상에 유생(儒生)으로 점을 좋아하는 자가 많은데, 나는 평생에 한번도 점을 쳐 본 일이 없다. 이는 이순풍(李淳風)과 소강절(邵康節) 같은 이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장이들은 길흉을 말하나 반드시 믿지는 못한다. 그들이 모년(某年)에 길하다고 하면 혹 요행을 바라기도 하지만, 끝내 그 징험이 없고, 또 모년에는 흉하다고 하면 헛되이 근심과 회의로 세월을 허비하나, 끝내 그 징험이 없으니 어찌 무익하고 해롭지 아니하랴. 유생으로 혹은 자기가 점을 잘 친다고 하면서 곧잘 사람의 길흉을 말하나 선비로서는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 지리풍수설(地理風水說)은 아득하고 거짓말이므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더러는 그 말에 얽매여 그 어버이의 장사할 시기가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고, 혹은 먼 선조의 묘를 파서 이장하는 자도 있으니, 극히 당치 않는 일이다. 세종 때의 재상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극력히 풍수설의 잘못된 점을 진술하였는데 명백하고 성대하였다. 그는 그 부모를 가원(家園) 옆에 장사지냈으며, 그 아들인 정승 어세겸(魚世謙)도 그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 땅을 가리지 않았다. 그 집안의 법도가 이러하였으니, 진실로 탄복할 일이다. 고려 때의 모든 왕릉도 모두 같은 산에 썼으며, 중국에서도 역대의 여러 능을 같은 산에 썼으니, 반드시 정견(定見)이 있으리라.
○ 동호(東湖)의 저자도(楮子島)는 절승(絶勝)이다. 전조(前朝 고려) 때 정승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며 시를 읊기를,
10리나 되는 판판한 호수에 가랑비 지날 제 / 十里平湖細雨過
긴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서 들리네 / 一聲長?隔蘆花
금정(나라)에서 국(정치)을 조리하던 손을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
다시 낚싯대 잡고 늦게 모랫가로 내려가네 / 還把漁竿下晩沙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을 돌아드니 / 單衫短帽繞池塘
건너편 언덕 늘어진 버들 서늘한 바람 보내는구나 / 隔岸垂楊送晩?
산보하다 돌아오니 달은 산 위에 떠올랐고 / 散步歸來山月上
지팡이 끝에 연꽃 향기 어려 있네 / 杖頭猶襲露荷香
하였으니, 시 또한 흥취가 좋다. 봉은사(奉恩寺)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 몇 해 전에 내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할 때에 타고 간 배를 저자도 머리에 정박하고 봉은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강가 어촌에 살구꽃이 만발하여 봄 경치가 더욱 아름답기에, 배 안에서 시를 짓기를,
동호의 빼어난 경치는 모두들 알고 있지만 / 東湖勝槪衆人知
자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네 / 楮島前頭更絶奇
절에 가는 길 솔잎 우거진 길이요 / 蕭寺踏穿松葉徑
어촌을 두루 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울타리로세 / 漁村看盡杏花籬
따스한 모래밭 연한 풀에 원앙 한쌍 잠들었고 / 沙暄草軟雙鳶睡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돛대 한척 흘러가네 / 浪細風微一棹移
봄 흥취와 봄 수심을 채 읊기도 전에 / 春興春愁吟未了
압구정 언덕엔 벌써 석양이로세 / 狎鷗亭畔夕陽時
하였다. 지금 40여 년이 지났는데 다시 가서 구경을 못하니, 가물거리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겠도다. 압구정은 저자도의 서쪽 수리(數里)에 있는데, 재상 한명회(韓明澮)가 별장을 지어 또한 이로써 유명하다.
○ 서울에서 이름이 있는 정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이형성(李亨成)의 세심정(洗心亭)은 가장 경치가 좋다. 정원 안에는 누대(樓臺)가 있고 그 누대 아래에는 맑은 샘이 콸콸 흐르며, 그 곁에는 산이 있어 살구 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하여 눈처럼 찬란하고 기타 다른 꽃들도 많았다. 이형성은 매우 시를 좋아하여 매양 시객(詩客)을 맞아들여 시를 지으므로, 나도 여러 번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상사(上舍) 이굉(李宏)이 세심정을 구경하고자 그 집에 갔는데, 주인 이형성이 마침 병으로 나오지 아니하니, 이굉이 시 한 수를 지어 그 문병(門屛)에 크게 쓰기를,
섬돌 앞의 푸른 대는 속된 것 고치기 어렵고 / 階前綠竹難醫俗
대 아래의 맑은 물은 마음 씻지 못하노라 / 臺下淸川未洗心
하여, 한때 세상에 전해져 웃음거리가 되었다. 임진년 초봄에 내가 어느 친우의 집에 가니 그 자리에 이형성의 여종이 거문고를 타고 있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그 여종에게 주며 그 주인인 이형성에서 전하라고 하였다. 그 시에,
거문고 소리 들을 만한데 타는 여자 누구뇨 / 彈琴可聽誰家女
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하네 / 自說洗心臺下人
만 그루 살구꽃 피기를 기다려 / 要待萬株山杏發
술병 가지고 봄놀이 감세 / 爲携壺酒去尋春
하였다. 그 후 병난(兵亂)으로 세심대의 경치도 다시는 감상하지 못하였다.
○ 고려 때에 졸옹(拙翁) 최해(崔瀣), 가정(稼亭) 이곡(李?), 목은(牧隱) 이색(李穡),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그리고 흥령군(興寧君) 안축(安軸)은 모두 중국의 원 나라에서 급제하였다. 최해는 재주가 뛰어났고 지조가 높았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마침내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며 스스로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을 저술하고 작고하였다. 이곡은 원 나라에서 한림 국사원 검열(翰林國史院檢閱)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이색은 원 나라에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이인복은 고려의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었고, 안축도 고려의 찬성사가 되었다. 이곡은 한산(韓山)의 향리(鄕吏)이며, 이색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인복은 성산 향리(星山鄕吏)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세상에서 현인이라 칭하였는데, 원 나라 동년(同年 같이 급제한 사람) 승지 마언휘(馬彦?)와 학사(學士) 부자통(傅子通)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매양 경림(한림원)을 향하여 술 취해 돌아오던 일 생각하니 / 每向瓊林憶醉歸
하사하신 꽃 봄볕 따스하고 그림자 하늘하늘거렸네 / 賜花春煖影離離
작별한 뒤에야 옛정 두터움을 깨달았건만 / 別來更覺交情厚
늙었으니 어찌 세상사 그른 것 알소냐 / 老去安知世事非
노둔한 자로 잔두(사소한 이익을 단념하지 못함)를 그리워한 것 부끄럽고 / 駑鈍尙慙懷棧豆
붕새 날 적에 누가 울타리 돌아보랴 / 鵬飛誰復顧藩籬
그대 동이(우리 나라) 비루하다 웃지 마소 / 請君莫笑東夷陋
해상에 세 봉우리(삼신산) 푸른 공중에 솟아있네 / 海上三峯聳翠微
하였다.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이 시를 《청구풍아(靑丘風雅)》에 기록하고, 주(註)를 달기를, “이때 원 나라는 난말(亂末)의 시기라, 이 글로써 두 사람(마언휘와 부자통)을 초청하여 동방에서 피난하도록 권한 것이다.” 하였는데, 승지(마언휘)와 학사(부자통)는 황제의 근시(近侍)로 계급이 높은 벼슬인데, 이인복이 비록 동기생으로 친했다 하더라도 외국인을 감히 이렇게 초청할 수 있을까. 하물며 끝구를 보아도 초청의 뜻이 없는데, 점필재는 무슨 근거로 이런 주를 달았는지 모르겠다.
○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기로당(耆老堂)에 참석한 자는 영부사(領府事) 김귀영(金貴榮)과 지사(知事) 강섬(姜暹), 그리고 나였다. 그 후에 동지(同知) 송찬(宋贊)과 좌윤(左尹) 목첨(睦詹)과 참판 신담(申湛)과 대사성(大司成) 이기(李?)가 모두 종2품으로 참석하였는데, 뒤에 참석한 제공이 윤번으로 모임을 갖기로 하여 송찬이 먼저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 김영부사와 목좌윤, 그리고 내가 참석하고, 신참판과 이대사성은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였다. 내가 자리에서 시를 짓기를,
서교(송찬의 호) 영감 베푼 자리 술상도 성대하이 / 郊翁設席盛杯盤
기영들이 모였으니 참으로 장관이네 / 會得耆英有足觀
발그레한 뺨 흰 머리에 꽃이 모자 위에 꽂혀 있고 / 紅頰白鬚花壓帽
수놓은 병풍이며 비단 장막과 기생이 난간처럼 둘러있네 / 繡屛羅幕妓圍欄
풍류는 멀리 삼한 때부터 내려왔으니 / 風流逈自三韓舊
고운 단장 참으로 구로의 기쁨 같네 / 爭像眞同九老歡
가장 하례할 일 주인이 80세 넘은 일 / 最賀主人踰八?
세상에 이런 일은 보기도 드물구나 / 世間玆事見之難
하였다. 모두가 각기 화시를 지났으나 모두 기억이 안난다. 임진난이 지나고 정유년에 이르러서는 오직 송공(宋公 송찬)과 이공(李公 이기), 그리고 나만 생존하였으므로, 기로회를 다시 갖지 못하였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정덕(正德 명 나라 무왕 때 연호) 정축년에 나의 선친과 계부(季父) 묵재(?齋) 공이 같은 방(榜)에 급제를 하였으며, 계미년 연간에는 김명윤(金明胤)과 그 아우 김홍윤(金弘胤)이 연방(連榜)에서 급제를 하였는데, 김홍윤은 장원이었다. 남곤(南袞)이 축하시를 김명윤의 부친인 찬성 김극핍(金克?)에게 보내고, 겸하여 나의 조부 소요공(逍遙公)에게도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두 아드님이 나란히 급제하는 것 세상에 자랑거리인데 / 二子登科世供誇
집안에서 장원이 나온 것에 더욱 영광이겠소 / 壯元門戶更光華
광산 김씨와 풍산 심씨 아울러 / 光山金與?山竝
예전부터 경사 많은 줄 알았소이 / 知是從前積慶多
하였다. 광산은 바로 김명윤의 본관이고, 풍산은 바로 우리 심가의 본관이다. 나는 불초한데도 요행으로 급제를 하였으나, 이후 자손들은 급제하지 못하였고 김명윤의 집안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어찌 경사가 많다는 말이 선대에만 징험이 있고 후대에는 없는가. 두 집안이 모두 쇠한 것은 자손들이 학업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인가 보다.
○ 상국(相國)노소재(盧蘇齋 노수신)가 석가산(石假山)에 십청정(十靑亭)을 짓고, 재상들에게 시(詩)를 청하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담 아래 높다랗게 만든 / 墻下嵯峨作假山
석가산 앞에 한 줌 샘물 만족할 만하여라 / 山前一?水堪?
아침엔 아지랭이 저녁엔 안개 언제나 끼어 있고 / 朝嵐暮靄尋常裏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지척간에 벌려 있네 / 衆壑群峯咫尺間
굽이친 물가에서 때때로 새발 전자 그려 있고 / 曲渚時時留鳥篆
깊숙한 시냇물은 곳곳에 이끼 무늬 끼어 있네 / 幽溪處處着苔斑
좋은 경치 두루 놀 것 필요 없네 / 不須崇華觀遊遍
길이 산만 대하고 홀로 문 닫고 있네 / 長對孱顔獨閉關
열 그루 사철나무 정자를 에워싸니 / 十樹冬靑擁一亭
변함없이 푸른 빛은 갈수록 푸릇푸릇 / 靑靑不改更靑靑
찬기운 쌀쌀해지자 바람이 문을 지나고 / 寒聲遞動風過戶
그림자 어른거리는데 달은 뜰에 가득하네 / 密影交加月滿庭
매화와 버들 서로 피어날 제 푸른 빛 한층 아름답고 / 梅柳爭時增秀色
눈보라 서릿발 몰아칠 때 경치 더욱 기이하네 / 雪霜嚴裏轉奇形
세상에 영고가 있음을 한하지 말라 / 世間何限榮枯事
높은 집에 모범됨을 보아 알라 / 看取高標有典刑
하였더니, 노상국이 보고 웃으며 버리지 않았다. 대[竹]또한 푸르나 십청(十靑)의 대열에 들지 못한 것은 대는 마를 때가 있어서 십청에 비교가 못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노상공에 말하기를, “취사(取捨)가 매우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한다.
○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가 70세 되던 갑신년 원일(元日)에 시를 짓기를,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에 돌아오니 / 寄也歸而免
슬그머니 찾는 사람 드물구나 / 居然到者稀
누가 성인이 원하던 바대로 따르리오 / 誰從聖人欲
오래도록 대부(큰 벼슬)의 그른 것에 어두웠네 / 久昧大夫非
한 번 맺은 군신의 계분 / 一理君臣契
깊은 충심 노병으로 어긋났네 / 深衷老病違
다만 매화와 버들빛만이 / 只應梅柳色
예전처럼 들어와서 옷깃 적시누나 / 依舊入霑衣
하였다. 내가 70살 되던 을유년 원일에 노상국의 시에 차운하기를,
문득 새해 옴을 깨달으니 / 斗覺新年至
누가 70살이 드물다고 하였는고 / 誰言七十稀
영화와 쇠락함 실컷 겪었고 / 飽經榮與落
옳고 그른 일 많이도 견디었네 / 多耐是兼非
오래 살고 단명하는 것은 하늘이 응당 정한 것이고 / 修短天應定
행하고 쉬는 것 이치이니 어찌 어길쏘냐 / 行休理敢違
물러날 것 생각하였다가 / 思量乞身事
기필코 관복을 벗으리라 / 準擬解朝衣
하였으니, 이 시는 장차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면서 회포를 표현한 것이다. 80살이 되던 을미년 원일에 또 앞의 시에 차운하기를,
인생 70이 드물다면 / 人生稀七十
80이란 더욱 희귀하리 / 八十更應稀
위무공의 경계를 배우려 하였지만 / 欲學武公戒
전부터 거원의 지난날 잘못했다는 것도 알았노라 / 曾知?瑗非
은혜를 탐하다 몸이 묶여 있고 / 食恩身局束
물러나기 바랬지만 일이 어긋났네 / 乞退事乖違
원하는 일 언제나 될꼬 / 志願何時遂
슬프구나 먹고 입는 것 때문일세 / 嗟哉食與衣
하였다. 여러 번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이 시로써 송서교(西郊 송찬)에게 보이니, 송서교가 화답하였다. 그 한 연구에,
성안에 그대로 있는 것 옳은 일이요 / 城內仍留是
전원에 가려는 것 그른 일일세 / 林間欲去非
하였으니, 이는 병란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물러나 향촌(鄕村)에 살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시에 쓴 것이다. 내가 다시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작록은 사람마다 누릴 수 있지만 / 爵祿人皆享
늙도록 사는 것은 세상에 드무네 / 期願世固稀
머무르라고 하는 것도 과연 옳지만 / 仍留果爲是
가려는 것도 그름은 아닐세 / 欲去未應非
늙었으니 마땅히 물러가야지 / 晩節尤宜退
처음 마음 어찌 변할쏘냐 / 初心?肯違
요분(전쟁)은 언제나 평정되리 / 妖?何日定
다만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기를 바랄 뿐이네 / 唯望一戎衣
하였다. 병신년 늦겨울에서야 퇴휴(退休)의 은전을 받았다. 생각하면 여생은 많지 않고 휴일인들 얼마나 되리오마는, 소원을 얻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
○ 가정(嘉靖) 경술년 봄에 나의 백부(伯父)가 대구 부사(大邱府使)로 있었는데, 나는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대구로 가서 백부에게 문안한 일이 있었다. 영천(永川)과 하양(河陽)은 모두 인접한 고을이었는데, 그때 영천 군수는 사문(斯文) 김취문(金就文)이고, 하양 현령(河陽縣令)은 사문 민호(閔?)였다. 민공과는 일찍이 교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사명으로 대구부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영천(永川) 명월루(明月樓)는 사람들이 승경이라고 하니, 어찌 한번 구경가지 않습니까.” 하거늘, 나는 그 고을 군수와 안면도 없으려니와 더욱 벼슬이 없는 사람으로 구경 놀이는 온당치 못하다고 하며 사양하니, 민공이 억지로 끌고가 보니, 과연 명월루는 승경이었다. 올라가서 구경한 뒤에 작은 술상을 차려놓고 담화하는데, 군수 김취문과 민공이 나에게 시(詩)를 짓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짓지 않았다. 술이 얼큰해져서 김공이 칠언 율시 한 수를 써서 내놓으며 말하기를, “평생 시를 지은 적이 없으나 오늘은 훌륭한 시를 보고자 감히 이처럼 약자가 선수를 쳤나이다.” 하거늘, 내가 즉석에서 화시를 지어 주었다. 이튿날 돌아올 때에 듣자니 어제 김취문의 시는 명월루의 현판에 있는 옛 시를 자기 시인 양 써서 나를 속였다는 것이다. 모두들 껄걸 웃고 작별하였다. 그 뒤에 참판 조사수(趙士秀) 공의 집에 가서 뵈오니, 조공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영남 관찰사로 영천(永川)에 가서 명월루에 있는 그대의 시를 보았는데, 그 한 연구(聯句 연구는 율시의 둘째 셋째 구절)에,
꾀꼬리 한 소리에 봄빛은 다 가고 / 黃鳥一聲春色盡
새파란 십리 들에 석양이 더디다 / 靑蕪十里夕陽遲
하였는데, 매우 아름다운 시라고 칭송하였다. 이는 당시 영천 군수였던 김취문이 나의 졸시(拙詩)를 현판(縣板)으로 만든 것이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계해년 봄에 내가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영천에 가니 시판(詩板)이 그때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김취문과 민호는 모두 작고하였으니, 옛일의 감회를 마지 못하겠다.
○ 고려 때에 이규보(李奎報)와 진화(陳?)는 문장이 당시에 떨쳤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른바, “이정언(李正言)ㆍ진한림(陳翰林)의 쌍운에 주필(走筆 빠르게 쓰는 것)이라 함은 곧 이규보와 진화를 말함이니, 두 사람은 빨리 짓는 것으로 같이 명성을 날렸다. 이규보는 벼슬이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에 이르고, 진화는 우사간(右司諫)에 이르렀는데, 그들 연세의 많고 적음은 알 수 없다.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 “동국의 명필을 말하자면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다음은 요학사(姚學士) 극일(克一)과 중 탄연(坦然)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규보의 평론에는, “최충헌(崔忠獻)이 제일이고 탄연이 두 번째, 유신(柳紳)이 세 번째이다.” 하였으니, 이는 권력자에게 아부한 것으로 공론(公論)이 아니다. 만일 권력에 아부하여 명예를 얻는다면 문장인들 어찌 보잘 것 있으리오. 그가 지은 두문시(杜門詩)에 이르기를,
인간 세상 요란하게 비방하는 소리 피하기 위해 / 爲避人間謗議騰
문닫고 높이 누워 자니 머리마저 헝클어졌네 / 杜門高臥髮??
처음은 방탕한 사내 여자 생각하는 것 같더니 / 初如蕩蕩懷春女
점차 고요하게 도 닦는 중을 닮아가네 / 漸作寥寥結夏僧
아이가 옷을 당기며 재롱떠는 것 족히 즐겁고 / 兒?牽衣聊足樂
찾아든 손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 / 客來敲戶不須경
빈궁(貧窮)과 영달(榮達), 명예와 수치는 모두 하늘의 명이거늘 / 窮通榮辱皆天賦
어쩌다 굴뚝새가 대붕(大鵬)을 부러워하리 / 斥?何曾羨大鵬
하였으니, 당시에도 대단한 비방이 있었던 것이다.
○ 세조(世祖)는 선위(禪位)를 노산(魯山 단종)에게서 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上王)이라고 하니,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門)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김질(金?)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이며, 상왕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復位)를 꾀하였는데,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성사가 못 될 줄을 알고 달려가 그의 장인 상국(相國)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대신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숙위(宿衛 당직)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훈에 참여하였다. 성삼문이나 김질 등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 승지(禮房承旨)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失聲痛哭)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든지 선위(禪位)할 때 실성통곡한 정상을 의심하고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오활(迂闊)하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上疏)에 신(臣) 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살펴서 깨닫고 신 자를 쓰지 않은 내심을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으리오. 박팽년의 처사도 오활한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오활하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육신전(六臣傳)》은 세상에 드물므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박팽년은 문장이 충담(沖澹)하고 필법이 고묘(高妙)하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조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영총(榮寵)이 지극하고 명망(名望) 또한 중하였으며, 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도 모두 세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며, 유응부는 무관 재상이었다. 세조가 영의정을 지낼 때 나라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서 처량한 거문고 소리 들리는데 / 廟堂深處動哀絲
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 先王舊業抽金櫃
성주(聖主)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 聖主新恩倒玉?
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 不樂何爲長不樂
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歌醉賦太平時
하였다.
○ 과장(科場)에서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은 금법(禁法)이 매우 엄격하나, 명리(名利)를 좋아하고 파렴치한 무리들은 도도하게 범하여 사풍(士風)을 불미스럽게 하였다. 알성(謁聖 공자 사당에 참배)이 있은 후에 제술(製述 시나 부 같은 것을 지음)로 인재를 취하는 것이 조종조(祖宗朝) 이후에 점차로 잦아져 급작스레 요란하게 되자, 뽑는 것이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표절하여 합격하는 자가 또한 많았다. 명종 때에 외척 권신(外戚權臣)의 아들인 이정빈(李廷賓)은 과거 공부도 하지 않고서 표절로 장원을 하고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으므로 공론(公論)이 일어나 마침내 삭직(削職)을 당하였고, 같은 때에 또 여계선(呂繼先)이란 자는 문사 차천로(車天輅)의 글을 표절하여 장원을 하였는데, 일이 탄로되어 국문을 당하고 또한 과거에서도 삭제되었으니, 국가의 수치가 어떠하리오. 알성한 뒤에 간혹 친히 임(臨)하여 시관(試官)에게 경서를 강(講)하게 하여 옛날에 경서를 펴 들고 어려운 곳을 질문하던 것처럼 해서 혹은 급제를 혹은 상(賞)을 주었더라면 또한 족히 많은 선비들을 위안하게 할 것이니, 제술(製述)로써 인재를 취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체모에 합당할까 한다. 나의 조부(소요공 심정)는 양천현(陽川縣) 동북쪽에 있는 공암(孔巖) 서쪽 강 연안에 집을 짓고 이름을 소요당(逍遙堂)이라 하였다. 이곳 지세는 한강(漢江) 이남의 강 연안에 있는 정자 중에서 가장 승경인지라, 당시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정자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 남곤(南袞)의 율시 두 수 있는데, 그 한 수에,
물은 여주로부터 산은 화산(삼각산을 말함)에서 내려와 / 水從驪漢山從華
모두가 정자 앞으로 모여들어 기이한 자태 나타내네 / 盡向亭前更效奇
외로운 섬 교묘하게도 강 넓은 곳에 당해 있고 / 孤島巧當江?處
긴 연기 달 뜰 때 일어나네 / 長煙遍起月生時
바라보니 중경 어귀와 볼수록 같고 / 望中京口看猶似
꿈속에 구지(중국 서북방의 산위에 있는 곳)에 와 있는 듯 의심되네 / 夢裏仇池到自疑
그대가 소요하려고 하더니 어찌 그리도 급히 되었나 / 君欲逍遙寧遽得
이 다음 늙어서 흰 수염 날리며 길이 쉬러 가겠네 / 他年長往?垂絲
하였다. 또 사문(斯文) 장옥(張玉)은 서문을 4. 6변려체(倂儷體)로 5, 60구나 지었는데, 사람들은 가작(佳作)이라 칭찬하며 등왕각(?王閣) 서문에 비유하였다. 그 첫머리에 이르기를,
파릉현 북쪽과 / 巴陵縣北
한양성 서쪽에 / 漢陽城西
삼도(공암과 다른 두 조그마한 섬)가 떠 온 것을 / 三島浮來
육오(바다의 삼신산을 자라가 떠받들고 있다 함)가 이고서 있다네 / 六鰲載立
십리나 되는 긴 강은 / 十里長江
해구로 굽이쳐 흐르고 / 流下海口
천척이나 되는 절벽은 / 千尺斷岸
깊은 물에 달려든 듯 / 走入波心
하였고 또,
천향이 소매에 가득하니 / 天香滿袖
멀리서 서호의 바람이 회오리치고 / 遠飄四湖之風
강우가 낯을 스치니 / 江雨入顔
북궐에서 하사한 술 조금 있네 / 微醒北闕之酒
하였다. 이밖에도 경구(警句)가 매우 많으나 내가 젊어서 보았으므로 그 전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그저 한스럽다.
○ 예나 지금이나 문인으로서 저술한 잡기(雜記)가 많은데, 내가 본 것을 들어보면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ㆍ《강호기문(江湖記聞)》ㆍ《유양잡조(酉陽雜俎)》ㆍ《시인옥설(詩人玉屑)》ㆍ《학림옥로(鶴林玉露)》등의 서적과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翁稗說)》과 우리 나라에서는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太平閑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동인시화(東人詩話)》, 이육(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 성현(成俔)의 《용재총화(?齋叢話)》, 조신(曹伸)의 《소문쇄록(?聞鎖錄)》, 김정국(金正國)의 《사재척언(思齋?言)》, 송세림(宋世琳)의 《어면순(禦眠楯)》,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 등은 모두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한가할 때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내가 신미년 가을부터 몸소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연대에 따라서 기록한 것이 모두 몇 가지가 되는데, 그 이름을 《견한잡록》이라 하였다. 비록 여가를 보내는데 주를 두어서 쓸모없고 난잡하기는 하지만, 꼭 모두가 쓸데없고 무익한 말만은 아닐 것이니, 보는 이는 부디 비웃지 말았으면 한다. 만력 기해년 봄에 청천당(聽天堂)은 발문(跋文)을 쓴다.
[주D-001]규와 벽 : 28수(宿) 중의 두 가지로, 규는 문장을 맡은 별이고, 벽은 정치를 맡은 별이다.
[주D-002]방고 : 구방고(九方皐)로, 옛날 말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주D-003]온교 : 동진(東晉) 사람으로, 양자강에서 무소의 뿔을 불에 태워서 비춰 보니, 그 강 속이 환하게 들여다 보였다고 한다.
[주D-004]칠정산(七政算) :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되어 있는데,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ㆍ김담(金淡)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역서. 내편은 중국 원 나라의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명 나라의 《통궤력법(通軌曆法)》을 참고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나라의 도수에 맞도록 만든 것이고, 외편은 《회회력경통(回回曆經通)》과 《가령력서(假令曆書)》를 개정 증보한 것이다.
[주D-005]강수 …… 김생 : 강수(康首)는 신라 때의 문장가이고, 김생(金生)은 신라 때의 명필이다.
[주D-006]신륵사 : 일명 벽절이라 하는데, 그것은 그 절의 탑이 벽돌로 되어서이다.
[주D-007]난정 : 중국 절강성 회계현 산음(山陰) 지방에 있던 정자로, 동진(東晉) 때에 많은 명사들이 그곳에서 모임을 갖고 놀았는데, 지금까지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서(蘭亭序)가 유명하다.
[주D-008]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남북조 시대 제(齊) 나라의 주옹(周?)이라는 사람이 북산에 은거하며 덕행이 있었는데, 황제가 불러 나가서 벼슬하다가 여의치 못하자, 다시 북산으로 돌아가려 하니, 그와 동지인 공치규(孔稚圭)라는 사람이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서 산은 그런 사람이 오는 것을 거절한다는 뜻을 밝혔다.
[주D-009]피화(被禍) : 명종 때에 동료인 안명세(安名世)의 필화(筆禍) 사건을 변호하여 주다가 함께 사형을 당하였다.
[주D-010]문생과 좌주 : 과거에 합격된 사람이 그 과거의 시험관에게 문생[제자]이라고 하고, 그 과거의 시험관을 좌주라고 부른다.
[주D-011]의발 : 불교 선종(禪宗)에서 스승이 죽을 때에 자기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에게 자기가 쓰던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전해주고 죽는데, 이것은 그를 자기의 후계자로 인증한다는 뜻이다.
[주D-012]무산 : 중국 호북 지방에서 양자강 물을 거슬러 사천 지방으로 가려면 무산이 있는데, 예전에 초(楚) 나라 양왕이 그 무산 아래에 놀러갔다가 가끔 미인을 만나서 흥겹게 놀았는데, 그 미인은 무산의 신녀(神女)라고 자칭하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하였다.
[주D-013]낙신부를 …… 못 보노라 : 옛날 중국 삼국 시대의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이 함께 견씨(甄氏) 집 처녀를 사모하다가, 결국은 형인 조비에게 빼앗겼다. 그 후에 조비는 아버지 조조의 후계자로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견씨를 사랑하던 마음이 식어져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자 견씨가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하여 사약을 내려 죽였다. 그 후에 조식이 꿈에 그 견씨를 만나서 예전에 사모하였다는 것을 호소하였으나, 그것은 역시 꿈이어서 바로 깨고 말았다. 조식은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여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는데, 견씨를 낙수(洛水)의 신녀라고 비유하고 그 신녀가 낙수 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오는데, 버선에 물이 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지가 난다고 형용하였다.
[주D-014]호두연함 : 중국 한(漢) 나라 반초(班超)의 상이 범의 머리에 제비 턱이므로, 후(侯)로 봉해질 상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대로 후일 후(侯)에 봉해지게 되었다.
[주D-015]삼괴 구극 : 삼괴는 3재상의 위(位)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3재상이 세 계수나무 아래에 좌정했다. 그러므로 3공과 같음. 구극은 9경(九卿)을 말한다.
[주D-016]예장 : 예(豫)와 장(樟)은 모두 좋은 재목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주D-017]한림별곡(翰林別曲)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생긴 시가의 하나로, 학자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향락적이고 풍류적인 생활 감정을 표현한 노래이다. 시부ㆍ명필ㆍ명주(名酒)ㆍ화훼ㆍ음악ㆍ누각ㆍ추천 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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