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에서 벗을 만나 가슴을 풀어 뵈니 / 異域開襟有友生
찬 성에 머물며 해를 보내도 좋을시고 / 不妨經歲滯寒城
이별의 정자에는 석양볕에 풀빛이 푸르고 / 離亭草綠斜陽外
만리 길 채찍 날려 홀로 가는 이 심정 / 萬里垂鞭獨去情
나는 그 맨 아래의 한 첩에 다음과 같이 썼다.
“새로 아는 즐거움은 즐거움 중 제일이요 / 樂莫樂兮新相知
생이별의 서러움은 서러움 중 심하여라 / 悲莫悲兮生別離
이별 언덕에 버들 있고 산에는 꽃이 있네 / 離岸有柳兮山有花
천년이고 만년이고 길이길이 생각하리 / 千秋萬歲兮長相思
돌아와 소요하니 / 歸來兮逍遙
서강 물결 어느 때나 평해지려나 / 西江波浪何時平
연잎 옷에 난초 띠 띠고 / 荷衣兮蕙帶
바라노니 손잡고 같이 가세 / 願携手兮同行
15일 편지를 다음과 같이 보냈다.
“제가 일전 서산(西山)의 걸음 때문에 아문을 만나보고 수일 동안 외출할 수 없어 우울했습니다. 어제 보내주신 책은 삼가 받았습니다. 두 형의 후의를 갚을 것이 없어 부끄럽습니다. 저들의 행기(行期)가 21일이나 24일에 있을 듯한데 그 약정(略定)을 들으니 일변 기쁘고, 일변 슬픕니다. 장차 어떻게 날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혹 공연히 기다릴까 염려되어 삼가 이에 알려 드립니다. 이만 그칩니다.
동국(東國)의 대략을 이에 기록하여 올리오니, 여행 중이라 참고할 서적이 없어 말이 많이 초초하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그 동국기략(東國記略)은 이러하다.
“조선은 남북이 4천여 리이고 동서는 천여 리이다. 팔도로 나누었는데 중앙에 있는 것을 경기도라 하니 국도(國都)가 여기에 있다. 경기의 동을 강원도라 하니 동해에 임하고, 강원의 북을 함경도라 하니 동은 바다에 접하고 북은 백두산에 이른다. 함경의 서를 평안도라 하니 서는 바다에 접하고 북은 압록강이 경계이고, 평안의 남을 황해도라 하니 또 서해에 접하고 남은 경기와 경계이고, 경기의 남을 충청도라 하니 동은 강원에 연하고 서는 바다에 접하고, 충청의 서남은 전라도라 하니 서남은 바다에 접하여 등ㆍ래(登萊)와 소ㆍ항(蘇杭)과 복건(福建)의 상박(商舶)이 표류하여 이르는 자가 많고, 전라의 동을 경상도라 하니 동남은 바다에 근접하고 그 북은 충청도이고 그 동북은 강원도이다. 이는 한 나라의 구획의 대개이다. 군현(郡縣)은 3백 60이고 도에는 관찰사가 있고 주에는 목사가 있고 부에는 부사가 있고 현에는 현감과 현령이 있고 그 큰 부에는 혹 부윤을 둔다. 목사 이하는 모두 관찰사에 통솔된다. 동방에 처음 군장(君長)이 없더니 신인(神人)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에 내리니 추대하여 임금을 삼고 호하여 단군이라 하니 그 원년은 곧 당요(唐堯) 무진년이다. 그 후에 중쇠(中衰)하고 기자가 동으로 봉해와 8조(條)의 교를 설하니, 살인한 자는 그 명을 상(償)하고 절도한 자는 몰입(沒入)하여 노비를 삼는다. 기자의 뒤에 나뉘어 삼국이 되니 진한(辰韓)과 변한(卞韓)과 마한(馬韓)이다. 삼한의 뒤에 한 무제(漢武帝)가 모두 멸하고 4군(郡)을 두니 현도(玄?)와 낙랑(樂浪) 등의 이름이 있다. 선제(宣帝)의 오봉(五鳳) 연간에 박씨(朴氏)가 나라를 세워 신라라 했고, 또 백제와 고구려가 있어 삼국이 병립했다. 수 양제(隋煬帝)와 당 태종(唐太宗)이 정벌했으나 공이 없었으니 고구려 때문이다. 당 명종(唐明宗) 때에 이르러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가서 치니 신라가 그 장수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협력 공격하여 드디어 여ㆍ제(麗濟)를 멸하니 땅이 모두 신라에 귀속되다. 신라가 나라를 유지하기 천년에 왕씨(王氏)가 건국하니 고려이다. 고려는 5백 년 누렸다. 홍무(洪武) 28년에 본국 태조 황제를 위하여 조선이라 이름을 지었다. 이것이 국조의 연혁의 대개이다.
기자는 평양에 도읍하니 지금 평안도이고, 신라는 경주에 도읍하니 지금 경상도이고, 백제는 부여에 도읍하니 지금 충청도이고, 고구려도 또 평양에 도읍하고, 고려는 송경(松京)에 도읍하고, 본국은 한양(漢陽)에 도읍하였다. 백두산은 영고탑(寧古塔)의 남에 있으니, 이는 일국 산세의 조종이다. 남으로 1천 5백여 리를 달려 철령(鐵嶺)이 되고, 또 1백 리에 금강산이 되고, 또 남으로 오대산(五臺山)ㆍ설악산(雪嶽山)ㆍ태백산(太白山)ㆍ소백산(小白山)ㆍ조령(鳥嶺)ㆍ속리산(俗離山)ㆍ추풍령(秋風嶺)이 되고, 또 남으로 수백 리에 지리산이 되어 남해에 거(距)하고 바다로 들어가 천여 리에 제주의 한라산(漢拏山)이 되니 이는 산맥의 대간(大幹)이다.
백두산 위에 큰 못이 있으니 서로 흘러 압록강이 되어 천여 리를 가서 서해에 들어가고 동으로 흘러 두만강이 되어 수백 리에 동해에 들어가니, 이 두 강물이 중국과 경계되고 철령의 물이 서로 흘러 임진강이 되고 태백의 물이 서로 흘러 한강이 되어 국도를 지나 남으로 바다에 들어가고 조령의 물이 남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어 경상도를 중간에서 가르며 남해에 들어가니 이는 수원(水源)의 큰 갈림이다.
강원ㆍ함경은 산이 많고 들이 적으며 그 나머지는 산과 들이 서로 사이하고 산촌의 백성은 가난하나 풍속이 후하고 평야의 백성은 부하나 풍속이 박하니 그세가 그렇게 한 것이다. 대저 백리 되는 들이 없고, 만금의 부(富)가 적다. 다만 삼면이 바다에 연하여 어렴(魚鹽)이 매우 풍족하고 토지가 비옥한 데가 많아 농상(農桑)의 업이 생겼으니 또한 바다 왼쪽의 한 낙토라 할 수 있다. 기자가 쇠하게 되자 전장(典章)이 흩어져 없어지고 풍속 습관이 완강하고 모질어 무력으로 서로 다투고 문교(文敎)는 땅에 떨어졌다. 여말(麗末)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있어 비로소 이학(理學)을 주창했고, 본국에 들어온 이래로 문학이 점점 일어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 정여창(鄭汝昌)이 모두 정ㆍ주(程朱)의 학을 표장하고,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가 있어 천자(天資)가 극히 높아 나이 30에 풍헌(風憲)을 관장하여 수년에 나라가 화(化)하여 남녀가 길을 다르게 하고 서민이 상장에 모두 가례(家禮)를 따르더니 불행히 조사(早死)하여 그 학을 연구하지 못하였다. 회재(晦齋) 이언적(李?迪)이 비로소 저서하여 의리(義理)를 천명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있어 실천함이 독실하고 도를 주창하기 더욱 성하였고,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자품이 청통(淸通)하고 견해가 초매(超邁)하여 그 성리(性理)를 논한 여러 설이 고명하고 정확하여 대원(大原)을 통견했으니, ‘발(發)하는 것은 기(氣)이고 발(發)하게 하는 것 이(理)이다. 기(氣)가 아니면 능히 발하지 못하고 이가 아니면 발할 수가 없다.’ 한 것 같은 몇 마디 말들은 그 요지이다. 역시 불행하게 49에 졸하였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율곡과 동시에 이름이 났고, 그 후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있어 더욱 예학(禮學)을 밝혀 분석이 치밀하고 조리가 찬연하였고, 그 뒤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있어 동시에 창도하니, 우암이 향년이 가장 오래고 춘추대의를 존상하였다. 포은 이하 제현은 모두 본국 성묘(聖廟)에 종사한다. 문장에는 신라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있어 당 나라 때에 중국에 들어가 등과(登科)하고 뒤에 고병(高騈)의 막하에 있으며 ‘황소(黃巢)를 토벌할 때 격문을 만드니 황소가 보고 놀라 탑하(榻下)에서 떨어졌다.’고 중국선부(中國選賦) 가운데 적혀 있고, 고려 때 상국(相國) 이규보(李奎報)가 시로서 이름났고 고려 말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시문이 모두 드러나, 그 악양루(岳陽樓)를 제(題)한 시가 있다.
“일점의 군산에 낙조가 붉고 / 一點君山落照紅
(한 귀는 망각하고 기억하지 못함)
긴 바람 불어 황혼 달을 보내니 / 長風吹送黃昏月
사롱 속 은촉불이 암담한 중이네 / 銀燭紗籠?淡中
본국 이후에는 읍취헌(揖翠軒) 박은(朴誾)과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간이(簡易) 최입(崔?)과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석주(石洲) 권필(權?)이 모두 시로 이름나고, 이 외에 시문을 간행한 자가 백여 가 되는데 다 기억할 수 없다. 풍속은 본국 이후에 예법을 엄하게 지키고 학교를 독실히 숭상하며 3년의 상은 왕가로부터 서민에 달하여 맹서(氓庶)와 천품(賤品)일지라도 조금 자호(自好)코자 하는 자는 개가하는 법이 없으며 내외의 분별이 심히 엄하고 가사(家舍)는 반드시 궁을 깊이하고 문을 굳게 닫고 부녀가 외출하면 모두 교(轎)를 타고 장막을 드리우며 하인의 처라도 모두 그 낯을 가리고 다닌다. 사례(四禮)는 많이 《가례》를 따르고 불교를 일삼지 아니하며 명분이 극히 엄격하다. 사환(仕宦)의 집을 양반이라 칭하고 그 자손은 비록 빈한하여도 농상을 업하지 않으며 농상의 자식은 비록 재지(才智)가 있어도 벼슬하는 사람이 적고 악역(惡逆)의 외에는 형이 대부에 오르지 않는다. 이러므로 벼슬하는 자도 또 국헌(國憲)을 두려워하여 삼가고 명분과 절조를 숭상하고 힘쓰며 탐오로 죄를 받는 자가 극히 적고 대각(臺閣)을 중히 여겨 비록 큰 정령(政令)이 있어도 한 사람이 반대하면 일이 잘 행해지지 못하고 과거는 3년 1차로 대비과(大比科)라 하여 팔도가 향시를 나눠서 하니 중국의 법과 같다. 초시 3장(場)에 제1장은 논(論)과 의(疑)이고, 제2장은 부(賦)와 표(表)이고, 제3장은 책(策)이니, 그 입선자를 취하여 서울에서 회시(會試)하는데 사서삼경의 매양 한 장(章)을 뽑아 주(註)를 아울러 배송(背誦)하되 통하지 않으면 입선하지 못한다. 초시에서 도합 5백여 인을 취하고 회시(會試)에서 33인을 취하니, 이것이 대과(大科)로서 비로소 사로(仕路)에 통한다. 장원과 탐화(探花)는 중국의 제도와 같고 진사시(進士試)가 있으니 초시(初試)ㆍ회시(會試)가 모두 두 장(場)이다. 초장은 시부(詩賦)이고 종장(終場)은 의의(疑義)이다. 이것도 향시(鄕試)를 나눠서 하고 서울에서 회시(會試)하는데 초시에는 1천여 인을 취하고 회시에는 2백 인을 취하니, 이것을 소과(小科)라 한다. 중국 진사와는 같지 않다. 진사에 오른 자를 대학생(大學生)이라 하여 음사(蔭仕)를 통하니 음사한 자는 내로 낭서(郞署)를 감찰하고 외로 주군(州郡)을 맡는다. 이 밖에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과(科)를 설하여 사(士)를 취하니 증광(增廣)ㆍ별시(別試)ㆍ정시(庭試)ㆍ알성(謁聖) 등 이름이 있는데 초시는 혹 있고 혹 없으며 모두 부ㆍ표(賦表), 논ㆍ책(論策)으로 임시해서 내어 시취(試取)한다. 초시에 뽑힌 자가 회시에 오르지 못하면 그 초시까지를 삭제하니 이것도 중국과 다르다. 이 밖에 학교에서 월과(月課)하는 조그만 과명(科名)은 다 기록할 수 없다. 무과는 문과와 같이 병설하고 그 제도도 거의 같다. 다만 시취가 곱이나 많고 소과 진사(小科進士)의 명칭이 없다. 보사(步射)ㆍ기사(騎射)ㆍ사창(使?)ㆍ방포(放砲)가 대략 중국제도와 같다. 매년 군ㆍ읍(郡邑)이 행의(行誼)가 특이한 자를 추천하여 조정에 알리면 그 우수한 자를 택하여 벼슬을 맡기니 이를 향천(鄕薦)이라 한다. 산중에서 독서하는 선비가 명덕(名德)이 드러나면 불러 맞아들여 예로 대하여 풍헌(風憲)과 경연(經筵)의 관을 맡기니, 이것을 유현(儒賢)이라 한다. 매양 1인이 오게 되면 백료(百僚)가 진숙(震肅)하고 일국이 그 풍채를 상망(想望)한다. 대학에서 선비[士]를 양성함이 항상 수백 인인데 대하기를 극히 풍성하고 후하게 한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학생(學生)이 모두 글을 올려 논하므로 경상(卿相) 이하가 모두 두려워 하고 꺼려한다. 서원이 전국에 퍼져 있어 그 수가 천도 넘는다. 모두 명현을 제향(祭享)하고 따라서 강학하는 곳으로 삼는 것이다. 선비 된 자가 조금이라도 행검(行檢)을 잃으면 척벌(斥罰)이 분분하다.
고적으로는 평양에 기자릉이 있고, 정전(井田)이란 유제가 있으니 수백 수천 묘(畝)나 된다. 천맥(阡陌)이 비록 황폐하나 구로(溝路)가 반듯하여 아직도 여제(餘制)를 상고할 만한 것이 있다. 산천은 한양의 삼각산(三角山)과 송경(松京)의 천마산(天磨山)과 황해의 구월산(九月山)과 함경의 칠보산(七寶山)과 평안의 묘향산(妙香山)과 강원의 금강산(金剛山)ㆍ오대산(五臺山)ㆍ설악산(雪嶽山)과 경상의 태백산(太白山)과 충청의 속리산(俗離山)과 전라의 지리산(智異山)과 제주의 한라산(漢拏山)이 있는데 봉만(峰巒) 수석(水石)이 승경(勝景)이고, 북경 이동에는 이에 비할 만한 것이 없다. 그 중 금강과 지리와 한라는 호하여 삼신산(三神山)이라 하여 영이한 고적이 많으며 금강은 그 가장 기수(奇秀)한 산이다. 중국인이 일찍 시를 지어,
“원컨대 고려국에 나서 / 願生高麗國
한 번 금강산을 봤으면 하네 / 一見金剛山
라고 하였고, 본국인의 시에도,
“은궐은 새벽에 금열쇠로 열리고 / 銀闕曉開金?
벽공은 가을에 흰 부용을 묵었네 / 瑤空秋束白芙蓉
라고 하였다. 대개 산이 1만 2천 봉이 있으니 모두 흰돌이 삐죽삐죽하고 9층(層)의 못과 천 척(尺)의 폭포에 동문(洞門)이 깊고 암벽(巖壁)이 푸르며, 임궁(琳官)과 불료(佛寮)가 위아래로 연달았다. 가을이면 산에 가득한 단풍이 붉은 비단을 편 듯하니 이 때문에 풍악(楓嶽)이라고도 한다. 강원과 함경이 동은 모두 바다에 연하고 조석(潮汐)이 없으니 이것은 중국인의 알지 못하는 바이다. 강원이 바다에 연하여 관동팔경이 있고 연해(沿海) 7백 리에 산세가 명미(明媚)하고 해당(海棠)이 흰 모래 위에 깔리고 정대(亭臺)가 서로 바라보이며, 요조(窈窕)하고 상활(爽豁)함이 국내의 제일 승경(勝景)이다. 집의 제도는 경성 밖은 대개 초가(草家)가 열에 팔구이고, 침실은 모두 온돌이고 사방이 벽이니 모두 창호(?戶)를 달아 중국의 ‘캉’ 제도와 같지 않고, 실외에는 목판으로 청사를 만든다. 무릇 집은 모두 구비가 꺾이어 구불구불하므로 비록 백여 칸이라도 거의 서로 연결된다.
삼상(三相)이 있으니 영의정과 좌ㆍ우의정이고 6조(曹)에 판서(判書)ㆍ참판(?判)ㆍ참의(?議)가 있으니 중국의 6부(部)와 같다. 매조에 낭관(郞官) 8원(員)이 있고, 또 대장(大將) 5원이 있어 위졸(衛卒)을 갈라 통솔한다. 이것이 관제의 대략이다.
공복(公服)은 남록(藍綠)의 두 가지 색이 있고 3품 이상은 홍포(紅袍)이다. 무릇 관직을 가진 자는 공복에 모두 사모를 쓰고, 따로 조복이 있으니 홍색과 흑연(黑緣)이고 상의 하상(上衣下裳)이 무릅을 가리고 뒤에 수(綬)를 드리우며 금관(金冠)ㆍ옥패(玉佩)와 상홀(象笏)을 모두 갖춘다. 2품은 초헌(?軒)과 독윤(獨輪)을 타니 높이가 한길쯤 되고 1품은 평교자(平轎子)를 탄다. 무릇 관인은 추종(騶從)이 매우 많고 행차에 길을 비킨다. 중국처럼 간솔(簡率)하지 않다. 관(官)이 있든 없든 공사가 아니면 모두 대죽모(大竹帽)를 쓰고 도포(道袍)를 입고 남사(藍絲)를 띠며, 정3품 이상은 홍사(紅絲)를 띤다. 집에 있어서는 방건(方巾) 혹은 복건[幅巾]을 쓰고 그 외의 사람은 윤건(綸巾)과 정ㆍ주(程朱)의 유제가 모두 있다. 군중(軍中)과 복례(僕隷)는 모두 전입(氈笠)을 쓰고, 부인은 협수(狹袖)를 입으니 길이가 허리에 미치며 아래는 상(裳)으로써 받치니 땅에 미치고, 다리[月子]와 꼭지는 매우 크다.”
덕유가 답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편지는 이러하다.
“연일 생각하기 매우 괴롭다가 수교(手敎)를 읽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놀랍게 하였다오. 어찌 이리도 인색할 수 있소? 궁금하오. 어느 날 한 번 들려주겠소? 평중 형이 올 수 있으면 좋겠소. 마침내 확정짓겠소. 내일 이른 아침에 틀림없이 와 주시면 마땅히 길을 쓸고 기다리겠으니 천만 어기지 말기 바라오. 작일의 공책 한 권은 두 형에게 글을 구한 것이니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휘쇄(揮灑)하고 점묵(點墨)해도 모두 지극한 보배로 간직하겠으니 공졸(工拙)을 계교하지 말고 가르쳐 주실 말이 있으면 가득 써주기 바라오. 어제 제가 올린 편지는 받으셨는지요. 모두 두 형의 수적(手蹟)을 구하여 자손에게 전시하고자 합니다. 두 시는 적어 넣기를 천만 바라오. 이로써 문후를 드리고 줄입니다.”
16일 평중과 같이 가려다가 아문에 저지되어 나가지 못하고 평중 홀로 이에 편지를 보내어,
“제가 아문에 저지를 당하여 김형과 함께 가지 못하니 극히 우울합니다. 내일 가려고 하나 귀하께서 용무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씁니다.”
하였더니, 엄ㆍ번의 회서에,
“아문에 저지되었다니 크게 괴이하오. 지난번에 김형과 극담(劇談)한 뒤 안색을 바라보지 못하니 답답하여 못 견디겠소. 내일 과연 올 수가 있으면 저에게는 별다른 일이 없으니 기다리겠소. 일찍 와서 우울한 심회를 폈으면 실로 저의 원을 위로하겠소. 이로써 회답하고 다 갖추지 않소.”
하였다. 평중이 저물녘에 돌아왔는데 담초(談草) 수 폭(幅)을 가지고 왔다. 문답한 말을 대략 다음과 같다.
역암이 “일전에 한스럽기 그지없다. 흉중이 편치 못한 지 수일이나 되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이 서첩을 보니 묵묘(墨妙)가 갖추어 있는데, 난공이 홀로이 기보(奇寶)를 얻게 되었습니다. 전일에 제가 또 한 책을 드렸기로 감히 다시 세 대인의 작서(作書)를 번거로이 청하지 못하고, 다만 형과 홍형(洪兄)에게 구하여 두 시(詩)를 써넣고, 그 나머지는 뜻에 따라 휘쇄(揮灑)하여 이 책을 채워 달라고 했는데, 이 뜻을 홍형이 알아주겠는지 궁금하다.”
평중이 “또 암형(誾兄)의 깊은 사랑을 입었는데 감히 말씀대로 아니할 수 있겠는가? 저는 실로 여러분께 보일 만한 글이 못 되니 부끄럽고 부끄럽다. 세분 대인은 이미 썼는데 저와 홍형이 아직 미처 쓰지 못했다.”
역암이 “‘이정(離亭)은 석양볕에 풀빛이 푸르고, 만리에 채찍을 날리니 홀로 가는 이 심정’이란 것은 천고에 썩지 않을 시구로서 풍조(風調)가 아름답다. 요즘의 작자로서는 이에 짝할 사람이 드물다. 이 시를 어찌 난공에게만 줄 것인가? 제가 글을 구한 뜻이 원래 공졸(工拙)을 계교한 것이 아니었는데, 하물며 형의 글이 이미 뛰어나게 잘된 것임에랴?”
평중이 “‘기굴(奇屈)하고 항상(抗爽)하여 윤균(輪?)이 배에 가득하다.’ 함은, 형의 노실(老實)로서 반드시 과예(過譽)라 하지 않겠는가? 이 평은 너무 지나치다.”
역암이 노실(老實)이라는 두 글자에 권점을 치면서, “지극히 노실하다.”
난공이 “전일 저들이 여러 대인에게 올린 시를 여러 대인께서 쓸 만하다 하시던가?”
평중이 “여러 대인이 모두 칭상(稱賞)이 자자하고 또 찬송하여 마지않았다.”
난공이 “졸작이라 형편없는데 노형이 가르쳐 주지 않으니 소외함인가?”
평중이 “난(蘭)의 시는 수아(秀雅)하고 명려(明麗)하며, 암(闇)의 시는 침울하고 강개하여, 제가 이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것이다.”
역암이 “형 같은 이는 이 두 평을 다 겸하니, 평성 감개의 한 연은 침울의 유이고, 효천(曉天) 발 밖[簾外] 및 이정(離亭) 두 구는 수아의 유이니, 거수(巨手)가 어디에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난공이 “서산(西山)유람에 좋은 시작이 있었는가?”
평중이 “일행 백여 인의 떠드는 속에서 무슨 시가 있겠는가? 서산은 전당(錢塘)을 본뜻 것인데도 이렇게 가려(佳麗)하니 전당의 승경을 더욱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만 누관(樓觀)의 장려(壯麗)일 뿐이요, 실로 천기(天機)의 유동(流動)하는 곳은 없었다.”
역암이 “대사(臺?)의 장려는 혹 나을지 모르나 천석(泉石)의 유수(幽秀)야 서호(西湖)를 어찌 미치겠는가?”
평중이 “저의 작은 첩자(帖子)는 두 형의 각체의 필법을 받아 길이 보배로 전하고자 한다. 지금 난형의 그림만 있고 암형의 것은 없으니 유감이다. 그러나 글씨와 그림은 기예에 속하는 것이니 어찌 억지로 조를 수 있겠는가?”
역암이 “난공은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므로 많이 하기 쉬우나 나는 그림 그리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반드시 발분하여야 비로소 한 번 시작한다. 그래서 아직 동필(動筆)하지 못했다. 그러나 형을 위하여는 반드시 그 추졸(醜拙)을 다하여 한두 장 그려 보겠다.”
난공이 “그림이 겨우 끝났다. 시는 쉬울 것이다.”
역암이 “그렇다. 요즘 수일간은 외출하여 응수하는 것이 아니면 집에 손님이 있어서 심사가 몹시 분잡하였다. 이런 일은 모름지기 사람을 물리치고 생각을 고요히 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의 서화(書畵)는 대개 모두 등(燈) 아래에서 지은 것이 많다. 그러나 공고하지 못하다.”
평중이 “시문과 서화는 동국에도 간혹 능한 자가 있으나 겸비한 자는 극히 적다. 지금 두 형은 천하의 통재(通才)이다. 또 재주 있는 자는 스스로 믿고 사람에게 오만함이 속된 무리의 상정인데 두 형은 지기가 고매하고 성품이 충후하니 이것도 노제의 드물게 보고 들은 바이다.”
역암이 “무릇 일은 전정(專精)함으로써 비로소 불후(不朽)할 수 있는 것이다. 저 같은 자는 속(俗)에서 이른바 ‘이것저것 다 알되 한 가지도 정하지 못하다.’는 자이니 어찌 족히 이르겠는가?”
난공이 “저는 연소하고 학문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친구 사랑하기를 성명(性命)같이 한다. 지금 형의 흉금이 고광(高曠)함을 보니 참으로 호걸의 선비라 충심으로 감복한다.”
역암이 “노형이 고인의 시에 좋아하는 것은 어떤 종류인가?”
평중이 “고시는 한ㆍ위(漢魏)이고, 고율은 당(唐)이고, 그 다음은 명(明)의 시를 좋아한다.”
역암이 “송ㆍ원(宋元)의 시는 취함이 없는가?”
평중이 “어찌 취함이 없으리오. 다만 정음(正音)의 체격(體格)이 아니다.”
역암(力闇)이 “형은 매양 낙척(落拓)함으로써 궁함을 슬퍼하고 저들은 산만함을 면하지 못하니 진경(進境)이 없다. 홍우(洪友)의 엄한 기절과 바른 성정으로 우리의 약석(藥石)을 삼지 않을 수 없다.”
평중이 “일월(日月)이 임염(荏苒)하는 사이에 어물어물 하다가 쇠년(衰年)에 이르러 재상에게 칭찬을 받아 심복을 의탁하는 자는 모두 도적의 무리이다. 또, 그 사람의 재품과 격조가 심히 비열한데 그러나 혹 달하고 혹 궁한 것은 다만 염치가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염치없는 자는 마르고 젖음을 피하지 않으니 귀인이 사랑하고, 염치 있는 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으므로 귀인이 비록 사랑하나 소외되기 쉽다. 그러므로 마르고 젖음을 피하지 않는 자는 사람에게 명예를 얻고, 하지 않는 바가 있는 자는 뭇 사람에게 소원함을 당한다. 대저 행세하는 도는 선(仙)을 배움과 같다. 행세를 하려고 하면 염치을 끊어버려야 하고 선을 배우려고 하면 은애를 끊어버려야 한다. 선을 배우면서 일호(一毫)라도 은애의 정이 있을 것 같으면 비록 구전(九轉)하여 단(丹)을 이루어도 앞의 공이 다 버려지고 행세하면서 일호라도 염치의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역시 전공이 버려진다. 대체 논하면 모두 무염치(無廉恥) 석 자만 같은 것이 없다.”
역암이 녹임(綠林)을 가리켜 이르되, “오히려 녹림객(綠林客)이 뇌뢰(磊磊) 낙락(落落)하고 광명정대하다.” 하고, 유소불위(有所不爲)을 가리켜 “이 넉 자는 잘 생각해 내었다. 우리들이 정히 이 병에 걸려 있다.” 또, “이 일단은 문장 기개가 또한 절묘하다.” 또, 모두 총평하여 “통쾌하고 시원하다. 이 논은 감개의 극이다. 형은 문벌이 낮지 않은데 어째 도로 얻어 한 자리 좋은 벼슬을 하지 않는가?”
평중(平仲)이 “우번(虞?)이 손권(孫權)에게 소외를 당하고 스스로 탄식하기를, ‘체골(體骨)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제가 소탈하고 게으른 성격으로 어찌 세상 사람을 받들겠는가? 문벌이 비록 좋아도 세상 사람에게 잘 뵈지 못하면 역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역암이 “그러면 궁수(窮愁)하면서 저서나 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또 그렇지도 못하면 신후명(身後名)을 가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잔 술을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평중이 “죽은 뒤에는 귀천이 없다. 비록 벼슬을 얻지 못해도 실지만 있으면 불후(不朽)하는데 다만 실지가 없을 뿐이다.”
난공이 “저술에 노력하면 스스로 불후할 수 있다.”
평중이 “불후가 무슨 더함이 있는가? 사후에는 모든 것이 하나의 허(虛)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므로 제가 양허(養虛)로서 스스로 호하고 우선 생전의 한 잔 술을 즐기니 이것이 양허의 지극한 뜻이다. 전혀 굴강(屈强) 때문에 능히 일을 따라 유유 낙락하지 못하니 자탄하고 자소한다.”
역암이 “바로 한 세상을 솟아 넘을 수 있는데 어찌 동방에서만 웅장하게 되겠는가?”
평중이 “품은 것 없이 스스로 믿는 것은 고인의 경계한 바다. 뉘우칠 뿐이다.”
역암이 “이런 식견(識見)이 곧 품은 것이니 무슨 뉘우침이 있겠는가? 다만 고달부(高達夫)는 50에 비로소 시를 했다. 형의 나이 이미 거의 미쳤으나 시재(詩才)의 묘는 이미 달부보다 20년이나 빨랐으니, 역량으로 채우면 이 역시 일생의 심력(心力)을 얻은 바이다. 반드시 무엇으로써 전세(傳世)할 물을 삼으려고 하는가?”
평중이 “달부가 50에 시를 하였으나 그 직을 논하면 이미 절도사에 이르렀고 지기(志氣)가 호광(豪曠)하여 구애된 바 없으니 이 또한 시를 하는데 일조가 된 것이다. 나는 50이 되도록 알려지지 않았고 이미 극히 누하여 고목이나 죽은 재와 다름이 없다. 또 비록 시율을 잘한다 해도 또 민국(民國)에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남아의 큰 뜻이 조충소기(彫蟲小技)에 있는 것이 아닌데 조충소기도 또 뜻대로 되지 못하니, 소ㆍ말에 옷입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역암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나 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것이 무엇인가?”
평중이 “지금 형에 대하여 처음 입을 열었다.”
역암이 “형의 심사는 모두 저의 아는 바라 지리(支離)하게 말할 것이 무엇인가? 대저 우리들의 지원(志願)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많이 이러한 감회를 가진다. 그러나 군국(君國)에 유익코자 하여도 입세(入世)할 미골(媚骨)이 없고 자오(自娛)코자 하여도 또 군국에 무익할 것이 염려되니 그러면 장차 어찌하여야 할 것인가? 종합하여 말하면 시짓고 술이나 마시는 것이 가하겠다.”
평중이 “50의 궁유(窮儒)가 사람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면 구태여 큰 소리로 바로 긴 바람을 불어 파랑을 일으킬 뜻을 가지는 것은 모두 발악일 뿐이다.”
또 “전자에 난형의 시를 보니 내상(內相)의 고슬(鼓瑟)을 알 수 있는데 마침내 머뭇거리고 말하지 않으니 그 시가 난공의 고하(高下)와 어떻게 관계있는가? 난형이 전에 허두만 떼고 종내 나에게 들이지 않으니 내가 어찌 감히 강청하겠는가?”
난공이 “《구월누시권(舊月樓詩卷)》이 있는데 가지고 오지 않아서 드리지 못하니 가탄(可嘆)스럽다.”
서로 크게 웃고 이별하였다.
17일 조반을 먹고 갔다. 문지기가 먼저 알렸다. 난공이 걸어 나와 마중해 들인다. 역암이 거처하는 방을 지나며 발[簾]에 다가서서 “엄형!” 하고 부르니,
역암이 “네!” 하고 대답한다.
난공이 “홍 석사(洪碩士)가 왔다.” 하니,
역암이 빨리 “그래?” 하고 응하면서 발을 번쩍 들고 나와 읍하며 맞이한다.
양생(兩生)이 우거하는데 같은 집이고 벽을 사이하였으며 문은 모두 북을 향했다.
우리들이 처음부터 모아 이야기한 것은 난공의 방이다. 좌정(坐定)하고 내가 “어제는 김형에게는 겨울날이요 저에게는 여름날이라” 하니 모두 알아듣지 못하는데 내가 또 “김형은 해가 짧은 것이 고통이요, 저는 해가 긴 것이 고통이다.” 하니 양생이 비로소 깨달고 모두 웃었다.
내가 또 “오늘 일은 조반 먹고 문을 나오니 또 아문(衙門)의 저지를 당하여 재삼 말을 주고받다가 늦어졌다.”
난공이 “저까짓 통관(通官)이 무엇이라고 감히 이같이 방자한가?”
내가 “서산(西山) 갈 때 말하지 않고 갔더니 노하여 이렇게 된 것이다.”
난공이 “출입(出入)에 반드시 고한다면 여기에 오는 것도 그가 아는가?”
내가 “다만 문밖에 나가서 놀다 오겠다고만 하였으니 여기 오는 것이야 제가 어찌 알겠는가?”
난공이 “세 분 대인도 또한 저를 어찌 하지 못하는가?”
내가 “저를 어찌할 수 없다.”
복인이 밥그릇을 가져왔다.
역암이 “같이 먹을까?”
내가 “이미 조반을 먹었으니 배가 부르나 다만 식탁을 같이하여 배를 불림도 스스로 취미 있는 일이니 사양하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밥을 같이 하였다.
난공의 복(僕)이 나이 자못 늙었다.
내가 “당신이 서울에 몇 번 왔는가?”
노복(老僕)이 “처음 왔다.”
내가 “노야(老爺)가 처음 왔는데 너도 처음 왔는가?”
“그렇다.”
내가 “너는 처음 왔어도 네가 하는 말은 내가 조금 알아듣겠는데 너의 노야의 말은 한 마디도 모르겠다.” 하니,
노복이 크게 웃었다.
내가 또 양생을 향하여 “북경 사람인가? 저가 하는 말은 내가 알고 내가 하는 말을 저도 아는데 두 분의 하는 말은 참으로 전혀 모르겠다.” 하니 양생은 알아듣지 못하였다. 노복은 알아듣고 다시 내 말을 설명해 주니 양생이 비로소 알았다.
역암이 웃으며 “남만격설(南蠻?舌)의 사람이라.” 하였다. 나도 알아듣고 웃었다. 양생이 밥에 육(肉)이 없음으로 접대가 소홀하다고 한하였다.
내가 “제가 평생에 육(肉)을 좋아하지 않는다. 많이 먹으면 반드시 복통을 면하지 못한다. 나올 때 여행 중에 쓰던 초장(炒醬) 한 통을 덕유(德裕)에 맡겼더니 이에 이르러 개봉하고 내놓으며 동국의 된장[豆醬]으로 밥반찬으로서 사용하는데 속(俗)에서 상미(上味)라 일컫는다. 식성이 같지 않으니 당신들에게는 맞지 않을지 모른다.”
난공이 “남방의 메주 맛도 이와 같다. 다만 존자(尊慈)가 안 계셔서 흠이다.” 하고 난공이 죽순 한 쪽을 주는데 우리 나라의 표육과 같았다. 씹어보니, 용안(龍眼 약초 명)의 맛이 있다.
또 작은 것은 우리 나라의 마른 죽순과 흡사했다.
난공이 “작은 죽순은 항주 천목산(天目山)에서 나고, 큰 죽순은 괄창산(括蒼山)에서 나는데, 맛은 아마 좋지 않을 것이다.”
역암이 팔영시(八詠詩)를 내어 보이는데 그 시에 이러하다.
산루에서 거문고 치다[山樓鼓琴]
“유인이 긴 밤을 아껴 / 幽人惜遙夜
일어나 앉아 주현을 타네 / 起坐理朱絃
높은 다락에 만뢰는 고요하고 / 樓高萬?靜
소리는 먼 산과 더불어 연했네 / 饗與空山連
유유한 옛날을 생각하노니 / 悠悠念皇古
이 뜻을 뉘 능히 전할건가 / ?意誰能傳
도각의 종소리[島閣鳴鍾]
“똑! 똑! 이 무슨 소린고 / ??此何聲
혹 연화에 물 떨어지는 소리리 / 或擬蓮花漏
열두 시를 반식 갈라 / 平分二六時
밤과 낮을 일러 주네 / 以警宵與晝
주인은 늘 깨어 있으니 / 主人常惺惺
새벽 종소리 기다릴 것 없네 / 不必待晨?
감소에서 고기 구경[鑑沼觀魚]
“맑은 샘에 물결이 잔잔한데 / 淸泉何淪?
흰 돌은 또 얼마나 깔렸는고 / 白石亦磊?
조어는 허공에서 노는 듯 / ?魚若遊空
등화를 거꾸로도 잘 삼키네 / 倒吸藤花妥
고기의 참 낙을 뉘라서 알건가 / 眞樂誰得知
자비아를 외우며 한 번 웃는다 / 一笑子非我
허공 다리에서 달 구경[虛橋弄月]
“외나무다리에 야기가 통하니 / 略?通野氣
늦은 걸음에 의태가 초연하다 / 晩步意超忽
숲 그림자 찬 물결에 흔들리는데 / 林影?寒波
엎드려 태고 때 달을 구경하네 / 俯見太古月
밤이슬이 옷을 적셔도 / 不惜露沾衣
홀로 읊으며 밤을 새우네 / 孤吟到明發
연못 배에서 신선노름[蓮舫學仙]
“묏부리 연꽃이 열 길이나 되었으니 / 岳蓮開十丈
꽃잎 떨어진지 어느 해부터인가 / 落瓣自何年
나무를 깎아 모양을 만들고 / 剡木爲形似
물결을 타며 수선을 배우네 / 凌波學水仙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 한 곡 부르니 / 叩舷歌一曲
목란선이 부러울 것 없구나 / 不羨木蘭船
옥형으로 천체를 엿봄[玉衡窺天]
“희화와 혼천의는 / 羲和與常儀
만고에 법을 세우네 / 萬古法猶秉
가고 옴에 영허를 시험하고 / 往來驗盈虛
더디고 빠름에 길흉을 가리네 / 遲速辨祥?
누하다 저 구허자는 / 陋彼拘墟子
종신토록 우물 속에 앉았구나 / 終身乃坐井
영감에게 시초 점을 침[靈龕占蓍]
“영감이 무슨 영이 있는가 / 靈龕有何靈
영을 비는 자에게 물어보노라 / 以問乞靈者
길흉으로 시비를 논하니 / 吉凶論是非
따르고 피함을 구차히 하랴 / ?避敢苟且
평탄히 살면서 명을 기다리면 / 居易以俟命
고초행은 버려도 좋다 / 枯草行可捨
활터에서 관혁을 쏨[?壇射鵠]
“배우는 자 활쏘기에 뜻 두면 / 學者志於?
든든함을 살펴야 솜씨 신기해진다 / 審固技乃神
맞춤이 어찌 네 힘에 말미암으랴 / 中豈由爾力
못 맞히면 그 몸에 돌이켜보라 / 失當反其身
안을 곧게 하고 밖을 바르게 함은 / 直內而方外
경과 의로써 번가라 함이로다 / 敬義交相因
내가 보고 나서 “초당(草堂)이 이 때문에 빛이 나게 되었다!”
역암이 웃으며 “초당이 이 때문에 빛을 잃었다!”
내가 영감시(靈龕詩)를 가리키며 “산가지 세는 시초 점이 족히 법할 것이 못되는가?”
역암이 “그렇지 않다. 다만 길흉은 나의 시비에 있는 것이요, 반드시 설시(?蓍)를 기다려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님을 이른 것이다.”
내가 “그렇다. 주자도 역(易)은 다만 혜적(惠迪)하면 길하고 종역(從逆)하면 흉(凶)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난공이 “설시는 성인의 도인데, 저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참으로 망인이다.”
역암이 난공의 말을 가리키며 “답 하는 이 말이 별지에 있었더라면, 남이 보면 참으로 나를 망인이라 할 것이다.”
난공이 “동방에서 세록(世祿)으로써 사람을 취하는 것은 선정(善政)이 아니다. 세록은 비록 삼대의 법이라 하나 인재는 나는 곳에만 나는 것이 아니요, ‘어진 사람 쓰는 것은 일정한 법이 없다.’ 했으니, 만약 이에 구애한다면, 화주중(華?中)에 반드시 다 현자가 아니니, 현자는 도리어 자격에 제한될 것이다.”
또 “동방에서도 석교(釋敎)를 숭봉하는가?”
내가 “나ㆍ려(羅麗) 때에는 매우 숭신했다. 지금 사관(寺觀)이 국중에 편재한데 거의 다 그때 창건된 것이다. 본국 이후에는 유도(儒道)가 크게 성하여 사인(士人)의 집에서는 모두 일컫기를 부끄러워하고 다만 무식하고 비천한 무리가 보응(報應)의 설에 혹하여 혹 공불(供佛)하고 반승(飯僧)하는 일이 있으나 역시 그다지 성하지 않다.”
난공이 “도교의 학은 매우 조(粗)하여 석씨에 미치지 못함이 심히 먼데, 도교를 좋아하고 불교를 가벼이 하니 동방의 선비는 역시 미혹됨이 심하도다.”
아마 그는 나의 유도란 말을 착각했던 모양이다.
내가 곧 도(道)를 교(敎)로 고치고, “도교는 절대로 전하는 자가 없다.” 하였다. 이때에 내가 역암과 팔영시를 말하고 있었으므로 난공이 또 희롱하되 “저의 시는 송유(宋儒)의 뱉아 남긴 것인데 자세히 볼 것이 무엇인가?”
내가 “바로 그 송유의 뱉아 남긴 것을 좋아한다.” 하니, 두 사람이 모두 웃었다. 내가 “남쪽에서도 서양학을 하는 자가 있는가!”
난공이 “서교도 중국에 행한다. 그러나 이는 금수의 교이니 사대부가 모두 그르다 한다.”
내가 “천비(天妃)가 누구인가?”
난공이 “천비는 황하(黃河)의 신(神)이다. 전해 들으니, 복건인(福建人)인 임씨(林氏)가 지금 칙봉(勅封)되여 천후(天後)가 되었다 하는데, 회회(回回)가 많이 이 교에 가입한다. 명 만력 때 서양의 이마두(利瑪竇)가 중국에 들어오니 그 교가 비로소 행하였다. 이른바 십자가란 것이 있으니 교중의 사람이 반드시 예배하며 이르기를, ‘서주(西主)가 이 형을 받고 죽었다.’ 하니 가소롭다. 서교 중의 주요한 뜻은 대개 괴상한 말이 많고 사람을 속이고 혹하게 한다. 또 서주가 참사한 것은 교를 세우기 위해서 죄에 걸린 것이니, 입교하는 자가 마땅히 체읍하고 비통하여 한결같이 생각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하니, 그 사람을 혹함이 심하다.”
역암이 “이것은 공공연히 금지 되어 있다.”
내가 “명금(明禁 공연한 금지)이란 것은 조금(朝禁 조정에서 내린 금지)을 이름인가?”
“그렇다.”
내가 “이미 조금이 있으면 경성 안에 어찌 교당 세우는 일이 있는가?”
두 사람이 모두 놀라며 “어느 곳에 있는가?”
내가 “동ㆍ서ㆍ남ㆍ북 네 당이 있는데 그 동ㆍ서 두 당은 나도 보았다. 서양인이 와 지키고 전교하더라.”
양생이 “제들이 서울에 와서 주의해 들었어도 아직 듣지 못했는데.”
내가 “하늘과 역법을 논함에는 서법이 매우 높아서 전인 미개의 것을 개척했다 하겠다. 다만 그 학은 오유(吾儒)의 상제(上帝)의 호를 절취하여 불가의 윤회(輪廻)의 설로 장식한 것이니, 천루하여 가소로운데, 와서 보니 중국인은 숭봉하는 자가 많은 것 같으니, 궁금한 것은 사대부는 남북을 무론하고 모두 신종하는 자가 없는가?”
“모두 없다.”
내가 “전목재(錢牧齋)는 어떤 사람인가?”
난공이 “이 분의 별명은 낭자(浪子)라 하는데 이는 참으로 지기(知己)이다.”
내가 “낭자는 기(幾)를 알고 몸을 깨끗이 하여 작록을 사하고 멀리 떠나갔는데 목재는 아마 이렇게까지는 못했을 것이다.”
난공이 “소년에 당의 괴수가 되고 말년에 항신(降臣)이 되었다. 문장이 세상에 이름나니, 요컨대 국가의 가석한 사람이다.”
역암이 “그가 일찍 죽었더라면 지금에 있어 헐뜯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난공이 “명덕(名德)은 드러나지 못하고 백 살의 장수를 하였다.”
역암이 “목재의 인품은 말할 것이 없다.”
내가 “아마 위는 반대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인가보다.”
역암(力闇)이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목재문집》이 주본(註本)이 있는가?”
난공이 “시가 주본이 있으니 전증(錢曾)이 주한 것이다.”
내가 “문은 주가 없는가?”
난공이 “그렇다.”
내가 난공에게 “전증은 누구인가?”
난공이 “증의 자는 준왕(遵王)이니 목재의 족손이고 나이 목재와 비슷하다. 국초의 시인으로 오매촌(吳梅村) 공지록(?芝麓)과 더불어 삼대가가 된다. 다 명의 달관(達官)으로서 국조에 벼슬한 자이다. 오(吳)는 말년에 후회하는 말이 많았다. 이 사람이 조금 났다.”
역암이 “목재도 영불(?佛)하고 스스로 《능엄의소(楞嚴義疏)》 백 권을 지었는데 대관(大觀)이라 하겠다. 그러나 도리어 더욱 지리해서 한갓 사람의 눈을 현혹할 뿐이다. 또 그가 이미 능엄을 알았으면 어째서 자기의 그 한 번 죽음을 아끼었는가? 이 또한 불교의 죄인이다. 하물며 이 재정(才情)과 학문으로서 시간과 정력을 이런 글에 소모하였으니 참으로 가석하다.”
난공이 “저의 집에 목재의 《능엄고본(楞嚴稿本)》이 있는데 친필로 쓴 것이다.”
역암이 “인품의 바름과 바르지 못함은 일찍이 정해진 것이고, 목재의 패행(敗行)은 그 낭자(浪子)가 됨으로부터니 이미 미리 결심한 것이다. 저 매복(枚卜)을 다툰 것만 하더라도 어찌 정인(正人)의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내가 “매복(枚卜) 다툼의 일을 일찍 듣지 못했는데, 불의에 그 더러움이 여기까지 이를 줄은 몰랐다.”
난공이 “매복의 다툼이 각송(閣訟)에까지 이른 것은 그 무리들이 한 짓이요, 목재와는 관계가 없다. 목재의 성망은 한때에 그 이상이 없었고 문인이 조정에 가득하여 모두 숭봉하여 드디어 이에 이르렀다.”
또 “오정(烏程)이 벼슬하니 천하의 일은 다시 물을 것이 없다.”
또 “늙은이의 늘 하는 말이니, 한갓 필설만 허비할 뿐이다.” 하고 모두 지워버렸다.
역암이 “모두 ‘가석(可惜)’이란 두 자로서 다 되는 것이니 여러 말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말씀이 옳다.”
난공이 “제가 어찌 목재로써 그렇다 하는 것인가?”
역암이 “우리들이 붓으로 혀를 대신하니 하루 종일 이야기해야 반일 밖에 안되니, 말은 간결하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난형은 지리한 것을 좋아하여 글자를 씹고 깨무니 참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난공이 웃으며 “이런 말들은 자못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칭탁한 기문(記文)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는가? 보여 주기 바란다.”
난공이 “연일 분주하여 아직 써내지 못했다.”
난공이 또 “경사(京師)에서 동국까지 가는데 압록강만 건너면 나머지는 모두 육지 길인가?”
내가 “압록강을 건너면 또 살수(薩水)와 패강(浿江)의 두 큰 물이 있다.”
내가 “근일에 과거 준비를 하지 않는가?”
역암이 “연일 응대에 바빠서 실로 틈이 없다.”
내가 그 말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역암이 내가 오래 앉아 불안해하는 것으로 여기며 또 “이 말은 싫증나는 응대를 두고 한 말이다. 형이 세심한 사람이라 우리들의 과거 준비에 방해됨이 있을까 걱정을 할지도 모르나 절대로 그런 염려는 말라, 형을 자주 만나 이야기 할 수 있으면 더욱 유쾌하다.”
내가 사례하고 “동인은 대체로 마음 씀이 세밀하지 못하고 일하는 것이 거친 데가 많다. 제도 실로 이것을 면치 못한다.”
역암이 “사람이 어찌 세심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고인이 ‘천하의 일이 어느 것이나 바쁜 속에서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다만 형은 일하는 것이 실로 일찍 거친 것은 없는데!”
난공이 “양허(養虛) 형이 활달하여 자못 동인과 같지 않으니 심히 묘하다.”
내가 “그 흉차(胸次)가 쇄연하니 저의 외우(畏友)이다.”
난공(蘭公)이 “동방에 천거의 길이 있어 한 사람이 나오면 조사(朝士)가 모두 두려워하는 데까지 이른다 하니, 그러면 천거된 사람이 다 현자인가?”
내가 “어찌 다 그럴 수 있는가?”
역암이 “이름만 있고 실속이 없다 함은 곳곳이 모두 그렇다.”
난공(蘭公)이 “들으니 부녀 중에 시 잘하는 자가 많다 하니 한두 사람 들 수 있겠는가?”
내가 “하나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 설혹 있다 해도 장난삼아 한 말에 불과한데 어찌 족히 군자의 눈을 더럽히겠는가? 난형은 집에 스스로 관저(關雎)와 갈담(葛覃)이 있으니 반드시 밖으로 정ㆍ위(鄭衛)의 음(音)을 구할 것이 없지 않아!”
난공이 크게 웃고 또 “명류(名流)의 승사(勝事)를 좀 들어볼 수 없을까”
내가 우리 나라의 선배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은 기록할 만하고 전할 만한 것이 많으나 창졸간에 적어낼 수 없으니 돌아간 뒤에 만일 통신할 편이 있으면 대강 적어 보내겠다. 풍류와 희만(戱慢)의 말에 이르러서는 비록 더러 한두 가지 웃음거리는 장만하는 것이 되겠으나 결코 가히 난형을 위하여 걸(桀)을 도와 나쁜 짓 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난공이 웃었다.
역암이 “설령 적어 낸다 해도 그는 또 단면(端冕)하고 드러누울 것이다. 나를 주는 것이 어떠한가?”
피차가 모두 웃었다.
내가 “절성(浙省)에 동년이 무릇 몇 사람인가?”
역암이 “동방(同榜)이 94인인데 모두 동년이라 하고, 외성(外省)의 동과(同科)한 자를 요동(遙同)이라 한다.
또 “순천(順天) 향시(鄕試)를 북방(北榜)이라 하는데, 그 중에 남쪽 선비가 많다. 이는 동향 동년과 일반이다.”
내가 “우리들의 왕래를 아는 자가 반드시 많을 텐데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가?”
또 “이 또한 세심해서 묻는 것이다.”
역암이 “조금도 세심할 필요가 없다. 제들이 내왕함을 친구 한두 사람이 아는 외에는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우리들의 내왕을 아는 자가 있어도, 대개 서로 잘 아는 사람이 많으니, 그들은 알아도 결코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또 우리들의 행동은 분분한 무리들과 크게 다르다. 과거 공부 같은 것도 이미 입 다물고 말하지 아니하니 동배인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거나, 얻고 못 얻음은 명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공자의 가법이다. 분분한 자는 스스로 형극(荊棘)을 낼 뿐이다. 이른바 군자의 소위를 중인이 진실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어제 김형과 말했지만 요행 두 형이 찾아준 것은 저희 두 사람을 위한 것이 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절성(浙省)의 거인(擧人)이 또 백여 인이 있지만 형이 한 번 보면 곧 침뱉어 버릴 자가 많을 것이다.”
난공이 “나머지 사람은 녹록한 인간들인데 말할 것이 무엇인가?”
내가 “과장에서 차작하고 대신 써 주는 폐단이 있는가?”
난공이 “설령 차작하고 대술(代述)하지 않는 데도 족히 이를 것이 없다. 한 마디로 말하면 과거보는 사람 중에는 범상한 사람[庸人]이 많고 기특한 사람[奇人]은 천에 하나도 없다. 고어에 ‘효렴(孝廉) 출신은 하나를 듣고 몇을 안다.’고 했는데, 오늘날 과장 출신은 열을 듣고 하나도 모르는 자이다.
역암이 “과장의 폐는 많다. 회협(懷挾)이 있고 대신 삯받고 하는 것이 있고 바꿔치기 하는 이가 있다. 그러므로 입장할 때 반드시 수험(搜驗)을 행하고 호사(號舍)에 돌아간 후에 반드시 그 잠그기를 엄하게 하고 답안을 받친 뒤에는 반드시 등록(謄錄)을 미봉하는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모두 작간(作奸)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은 입법(立法)이 심히 엄하여 불초한 자라도 모두 신가(身家)의 염려가 있으므로 범법자가 적다.”
난공이 “지금은 적다. 이것을 관절(關節)이라 이르니, 정이 가볍고 법이 중하다. 발각되면 참수형이다. 시관과 사자(士子)를 머리를 나란히 하여 베인다.”
내가 “이는 실로 천하가 같다. 그러나 그 수험(搜驗)하는 때에 있어서 결코 호걸의 선비로서 달게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난공이 “마의(麻衣)와 초리(草履)를 서로 도적질하니, 이가 서림(西林) 선생이 종신토록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은 소이이다.”
역암이 “황도암(黃陶菴)의 시ㆍ문 안에 두 구(句)가 있으니, ‘상이 원훈과 속백(束帛)을 가해 주면, 상이 사(士)를 중히 하는 것이 되어, 사가 인하여 자중(自重)해지고, 상이 사장과 기송으로 취하면 상이 사(士)를 경히 하는 것이 되어 사가 또한 스스로 경해진다.’ 하였다. 이 일은 한 마디로 말하면 상하가 서로 비평하는 것이요, 한갓 상만을 허물할 수도 없는 것이다.”
또 “고인이 응시(應試)하려다가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옷을 떨치고 가버린 자가 있었다. 이 무슨 사람인가? 이때 몸수색이 자못 도적을 막는 것 같았으니, 이 공이 그때에 처하였다면 심정이 어떠했을까?”
난공이 “동방에서 사를 시험함에 부(賦)로써 한다는데 율부(律賦)로 하는가? 고부(古賦)로 하는가?”
내가 “고도 아니고 율도 아니고 스스로 일체가 된 것이다.”
내가 또 “전번에 주권(?卷)을 보니 《역(易)》을 습(習)하고 《춘추》를 습한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무엇을 이름인가?”
역암이 “중국에서 사(士)를 시험함에 있어서 오경(五經)으로 갈라서 그 한 경을 전습(專習)한 자를 취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본경(本經)이라 이르고, 설령 오경을 통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 경에 전귀(專歸)하니, 이것이 즉 명경(明經)의 유제이다.
내가 “시험을 어떻게 하는가?”
역암이 “경의(經義) 네 편을 시험보는데 경마다 네 문제씩 내고 각 사람은 한 경만을 택한다. 그러나 근래에 경학이 황무하여 한 경을 전습한다는 자도 망연하여 경의를 알지 못하는 자가 많다. 습(習)자의 뜻에 자못 어긋난 것이다.”
난공이 “제가 정히 이것에 해당한다.”
역암이 “난공은 원래 《시경》을 익혔는데 역으로 고치고, 제는 원래 《시경》을 익혔는데 《춘추》로 고쳤다.”
내가 “이것은 통치 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양생이 모두 웃었다.
난공(蘭公)이 “동방의 회시(會試)에 글 외우는[背書] 법이 있는데 외운 뒤에 따로 문으로써 시험하지 않는가?”
내가 “따로 전시(殿試)가 있어서 문으로써 시험한다. 다만 배서(背書)의 법은 극히 어렵다. 따로 《언해》가 있어서 반드시 다 외우고 한 자의 틀림도 없어야 입선하여 응시할 수 있다. 그러나 기송(記誦)에만 전력한 자는 대개 한갓 그 글만 외우고 전혀 그 뜻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응하는 자가 적다. 제들도 또 이런 시험에 응하지 못한다. 그 공력이 어렵기 때문이다.”
역암이 “묵사(?寫)하고 배송(背誦)하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니 소자(小子)의 학이라 하여 소홀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으로써 선비를 취하면서부터 경서에 황폐한 자가 많다. 중국에서 무릇 향시에는 제1장(場)에 사서의 글 세 편과 성리론(性理論) 1편으로 시험하되 일주야에 끝낸다. 이런 장(場)에 나아가는 것이 가장 고생스러우니 먼저 정신이 위주다. 그렇지 않으면 지탱해내지 못한다.”
내가 “경을 시험하는 자는 왕왕 피를 �K는다는데 그런가?”
역암이 “연일연야 잠을 자지 못하니 고생스럽다. 제2장에는 경문 네 편과 배율 한 수로서 시험하여 하루 만에 끝내고 제3장에는 책(策) 다섯 회로서 시험하되 혹은 하루에 혹은 하루 밤 낮에 끝내는데 이 1장이 극히 고생스럽다. 매양 반드시 7백 8백 언(言) 혹 천언으로 써 내야 한다. 회시에도 같고 전시(殿試)에는 시책(試策) 1회로 하는데 역시 일주야로 마친다. 그러나 반드시 만여 언에 이르러야 하니 이것이 가장 어렵다. 또 반드시 격식이 하나도 차오가 없어야 한림(翰林)에 들어갈 수 있다. 이 후에 또 조고(朝考)가 있어 조고(詔誥)와 논시(論詩)로써 시험하는데 역시 하루로 끝나게 된다. 향시는 백 명에서 하나를 취하고 회시는 30명에서 하나를 취하고 전시는 취하지 않음이 없으나 다만 일(一) 이(二) 삼(三) 갑(甲)으로 나눈다.”
내가 “책(策) 중에서 또한 시무(時務)를 논하는가?”
역암이 “향회시(鄕會試)는 5도(道) 안에서 3조(條)는 고책(古策)이고 2조는 시무이고, 전시에 있어서는 시무이다.”
난공이 “그러나 요행으로 당선된 자가 많다. 그 숙학(宿學)인 자로서 혹 선발에 참여치 못하는 자도 적지 않다.”
역암이 “우리 고을에 또 기유(耆儒)와 노학(老學)이 많으나 종신토록 일개 청금(靑衿 학생)이니 가련하다. 향시를 7~8장(場)을 치룬 자도 있다. 3년에 한 번씩 거행하니 나이 17~18세 때에 입학하여 60~70세 때에 이르면 이렇게 된다.”
내가 “‘영웅을 벌어 얻느라 머리털이 모두 희었다.’ 한 것이 정히 이런 사람을 가리킨 말이다.”
난공이 “그 무리 중의 학도는 이미 과갑(科甲)에 올랐는데, 그 스승이라는 스승은 아직도 향시에 응하는 수가 있으니 가소롭다.”
역암이 “그 실은 얻기가 또 매우 쉽기도 하다.”
내가 “운이 좋은 자는 실로 용이하다. 만일 종신토록 거인(擧人)이 되면 실로 이 인생이 가련하다. 기(幾)을 아는 자는 일찍이 딴 방도를 취하는 것이 낫다.”
역암이 “종신토록 수재(秀才)가 되는 것이 참말로 가련하다. 만일 이미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이 되면 10여 년을 기다려 지현(知縣)이라도 한 자리 얻게 되니, 그래도 궁유(窮儒)의 원을 좀 위로할 수 있다.”
내가 “한 번 지현을 지내면 치사(致仕)를 해야 하는가?”
역암이 “일모(日暮) 도궁(途窮)한 때에 지현이 되었으니 오직 치사가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탁이(卓異)하게 승천(陞遷)하여 부(府)와 도(道)와 사(司)와 순무총독(巡撫摠督)에 이르는 자가 있다.”
내가 “회시가 3월 초8일인가?”
“그렇다.”
내가 “출방(出榜) 후에 원근에 전시하는가?”
역암이 “4월 초 5~6일에 출방하는데 역시 향시와 같이 한다. 본인에게는 보자(報子)가 나팔을 불면서 홍단(紅單)에 성명 쓴 것을 가지고 와서 비보(飛報)해 준다.”
내가 “보자가 올 때 반드시 이웃 동리를 종동(聳動)할 것이다.”
모두 “그렇다.”
내가 웃으며 “천하가 같은 이치다.”
역암이 “만일 원근에 한 번 출방한 뒤에는 제명록(題名錄)을 파는 자가 있는데, 글자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반드시 사람마다 한 장씩 산다. 혹 그가 아는 사람이 그 안에 있을까 싶어서이다. 그래서 속담에 ‘한 번 급제하여 이름을 이루면 천하에 알려진다.’고 한다.”
난공이 “한 달이 지나면 모두 알지 못한다. 오직 회원(會元)의 성명만은 백 년이 되어도 사람의 입에 오를 것이다.”
내가 “장원된 후에 비록 벼슬이 높아도 반드시 장원이라 칭하는가?”
난공이 “그렇지도 않다. 다만 향리에서 반드시 이를 칭한다. 이 소리를 듣는 자도 이 이름으로 일컫는 것을 원하고 고관으로 칭함을 원치 않는다. 전당(錢塘)에 양시정(梁詩正)이란 이가 있어 위가 재상에 이르렀는데 우리 향인은 모두 양 탐화(梁探花)라 부르니 저도 스스로 영광으로 여긴다. 시에 자주(自註)하기를, ‘향인이 지금도 나를 칭하여 양 탐화라 한다.’고 하였으니, 탐화도 그런데 하물며 장원(壯元)이겠는가?” 또 장원을 방부른 뒤에 황상(皇上)이 남문인 태청문(太淸門)을 열면 장원한 사람이 말을 타고 중문(中門)으로부터 나온다. 순천부윤(順天府尹)이 채찍을 잡고 “장원을 보내어 집에 돌려보내고 금포(錦袍)를 하사하는데 모두 궁인이 손수 만든 것이다. 부인은 본성(本省)의 성 위에서 수레를 타고 오곡(五?)을 뿌려서 황겸(荒?)을 누르고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 준다. 두 가지의 일은 아무리 재상이라도 참여하지 못한다.”
내가 편쇄오곡(遍灑五?)……을 가리키며 “이것이 무슨 법이 있는가?”
역암이 “부현(府縣)이 공장(供帳)을 갖추고 도인(都人)이 모여 구경하는 사람이 천만 인에 가깝다.”
또 “외성총독(外省摠督)과 순무의종장(巡撫儀從長)과 이여사도(里餘司道) 이하 체쇄(遞殺) 모두 전호(傳呼)하고 길에서 사람을 비끼게 하며 아문이 창을 줄지어 세우고 북을 울리며 포성을 터뜨린다. 장원이 처음 보도(報到)될 때는 부ㆍ현(府縣) 관원이 그를 위하여 기간(旗竿)을 세우고 기를 찢고 하는 수도 있다. 그 부인의 유성(遊城)할 때의 의종(儀從)은 거의 독무(督撫)에 못지 아니하니 이것이 그 영광이 되는 소이이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은 다 옛날의 제도요 저에 있는 것은 모두 나의 하지 않는 바이다.”
난공이 “무릇 여자는 반드시 그 남편에게 장원되기를 바란다. 장원의 부인은 모든 명부(命婦)들과 더불어 같지 않으니 또한 묘하지 않은가?”
내가 “제의 얕은 의견 같아서는 당에 내리지 않는 것이 가장 부인의 묘한 처신이다.”
난공이 “당에 내리지 않고 성(城)에 오른다!”
내가 “성상(城上)은 더욱 부인의 오를 데가 아니다.”
난공이 “금성(禁城)의 위에는 관민(官民)이나 부녀를 막론하고 모두 오르지 못하게 하는데, 장원 부인의 수레가 거리를 가지 않고 성 위에로 가는 것은 높여서 천상인(天上人)이 되게 함이요, 이 일은 조가(朝家)의 제도이고, 부현이 문에 이르러 돈독히 청하여 나가는 것인데, 그 의종(儀從)이 심히 성하게 하니, 하당(下堂)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비록 그러하나 이는 아마 선왕의 명법(明法)이 아닐 것이다.”
내가 또 희롱하여 “봉축(奉祝)하노니 난형은 반드시 장두(狀頭)를 차지하여 부인의 영광을 잃지 말라.”
난공이 또 웃었다.
역암이 또 “주연유(周延儒)가 장원이 아닌가?”
내가 “이는 누구인가?”
역암이 “명말의 대간신이다.”
난공이 “주연유와 위덕조(魏德藻)는 모두 장원인데, 주연유는 대간신으로서 명의 국사를 무너뜨리고 위덕조는 이자성(李自成)에게 항복하여 형을 당하였으니, 모두 장원 중의 악당이다.”
또 “나홍선(羅洪先)이 또 장원인데 20년 동안 도를 배워 겨우 흉중에서 장원 두 자를 잊어버렸다.”
내가 “근사(近思)하고 내성(內省)하는 말이다. 이 한 마디로서 그 사람의 어짐을 알 수 있다.”
난공이 “이는 명의 대유로서 공묘(孔廟)에 숭사(崇祀)한다.”
또 “모인(某人)도 항주 사람인데 내가 더불어 서로 아는 자이다. 지난번 과거에도 장원을 하려고 극력 모구(謀求)하여 거의 얻을 뻔했다가 마침내 타인의 소유가 되고 말았으니 그 어려움을 알 수 있다.”
역암이 “마침내 장원을 한 사람도 뜻밖에 얻는 수가 있었으니 반드시 억지로 구할 필요 없음을 알겠다.”
난공이 “재상부터 이하가 이 사람으로 장원을 시키려고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천명(天命)이 있는지라, 마침내 타인의 얻은 바가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동방의 장원도 영광스럽기 이와 같은가?”
내가 “ 나라가 적으므로 영광도 적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장원은 근심만 될 뿐이요. 그 영광되는 줄은 모른다.”
양생이 모두 놀라며 “이는 무슨 까닭인가?”
내가 “천금의 몸을 일조에 던져 임금에게 받쳐, 사생과 영욕을 스스로 보전할 수는 없으니 어찌 근심되지 않겠는가? 꽃을 이고 산을 펴고 북을 울리며 오유(?遊)하면 겨우 시동(市童)의 구경이나 되고 유식한 이는 웃으니 이것이 무슨 영광이 되겠는가?”
내가 또 “헤아리건대 두 형의 재학(才學)은 합격되지 않을[不中] 리가 없을 것 같다.”
역암이 “불중(不中)은 뜻 가운데 일이고, 중(中)은 뜻밖일 뿐이다.”
내가 “만일 득중(得中)하면 귀향하는 것이 어느 때쯤 되겠는가?”
역암이 한림(翰林)에 점입(點入)하면 반드시 모름지기 3년을 기다려서 산관(散館)하고 직을 맡기니, 이 3년 안에 말미를 얻어 성친(省親)할 수 있다. 그러나 기간이 많아야 다만 1년이다. 외관(外官)으로는 지현(知縣)이 되는 것이니, 이는 모름지기 이부(吏部)에서 추첨하여 각성으로 나누어 보내는 것이라 자주(自主)할 수 없다. 지현(知縣)은 본성관이 되지 못하고 이웃 성(省)이라 하더라도 5백 리 안에 있지 않다.”
내가 “한림은 장원만이 하는가?”
역암이 “일갑(一甲)에 세 사람인데 즉 장원(壯元)ㆍ방안(榜眼)ㆍ탐화(探花)이다. 장원은 곧 직을 맡겨 한림(翰林) 수찬(修撰)이 되고 방안ㆍ탐화는 편수(編修)가 되고, 이갑(二甲)에는 백여 인 혹 80~90인이 되는데 그 이갑의 제일인을 전려(傳?)라 하여 역시 곧 한림(翰林)을 맡기고, 삼갑(三甲)도 백여 인이다. 무릇 이갑과 삼갑 안에서 조고(朝考)한 뒤에 혹 한림을 점하고 혹 육부주사(六部主事)를 맡기고 혹 지현을 맡긴다. 그 한림ㆍ주사ㆍ지현이 되지 못한 사람을 귀반진사(歸班進士)라 하여 10년 만에 지현을 얻는다. 회시 후에 진사에 합격하는 사람이 약 2백여 인인데 40인은 한림이 되고 20인은 주사가 되고 지현은 정액이 없다. 요새에도 4~6인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귀반한다.”
내가 “10년 후에 지현을 얻으면 이것은 귀반이 거인(擧人)과 다름이 없다.”
역암이 “거인과 같다.”
또 “종전에는 지현으로 발령하는 자가 극히 많았으나, 지금은 도리어 외관(外官)으로써 중(重)하다 한다. 벼슬이 낮으면 도리어 가난을 구제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세운승강(世運升降)의 일단이다.”
내가 웃으며 “이것도 천하가 같은 이치이다.”
두 사람이 “귀처(貴處)에도 이러한가?”
내가 “그렇다.”
두 사람이 모두 웃었다.
역암이 “한림(翰林)이란 벼슬이 가장 깨끗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매우 가난하여 근년에는 한림으로서 출외(出外)를 구하는 자가 많으니 한림을 점하고 3년 안에 직(職)을 받지 못한 자는 서길사(庶吉士)가 된다. 그러나 한림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장황개(張黃蓋)를 얻고 수주(數珠)를 띠고 종신토록 만생(晩生)이라 칭하지 않으며 독무(督撫)와 평행하며 가향(家鄕)에 있어서는 이름을 쓰고 자(字)를 간(柬)함이 한 치 되게 크다. 한 번 지현이 되면 곧 변하여 소자가 된다.”
또 “수주를 띠는 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선왕의 법복(法服)이 아니면 모름지기 묻지 말라.”
역암이 “그렇다. 반드시 모름지기 5품 이상이라야 되는데 한림은 7품관으로서도 띠기를 허한다.”
내가 “이는 반드시 자신이 숭불(崇佛)하는 자가 띠는가?”
역암이 웃으며 “아니다 비록 정ㆍ주(程朱)라도 지금 세상에 처하면 감히 띠지 않겠는가? 지금은 보통 수주를 띨 수 없게 되었는데, 그 거량(居鄕)에 왕왕히 참람하게 띠어 영광으로 삼는 자가 있다.”
내가 “중국 의관이 변한 지 이미 백여 년이다. 지금 천하에서 오직 우리 동방이 대략 구제를 보존하고 있다. 중국에 들어오면 무식한 무리들이 웃지 않음이 없으니 슬프다. 그 근본을 잊음이여! 모대(帽帶)를 보면 장희(場戱)와 같다 이르고 두발을 보면 부인과 같다 이르고 큰 소매 옷을 보면 화상(和尙)과 같다 이르니 어찌 통석하지 않겠는가?”
역암이 웃으며 “중과 같다는 것은 진실로 그렇다. 모대도 또한 중과 같은가? 중국(中國)의 중은 여름에 많이 입자(笠子)를 쓴다.” 하고, 인하여 입(笠)을 그리니 모양이 우리들 쓰는 전립과 같았다. 혹 등(藤)이나 혹 풀이나 혹 종이로 만든다.”
또 나에게 “모정(帽頂)은 무슨 물건으로 만드는가?”
내가 “모두 은으로써 한다.”
역암이 “무관도 이같이 하는가?”
“그렇다.”
역암이 “품급(品級)에 대소의 구별이 없이 모두 동일한가?”
내가 “그렇다. 국제(國制)에 오직 망건과 관자(貫子)로 품급을 나눈다.”
역암이 “공작령(孔雀翎)이 분별이 있는가?”
내가 “역시 동일하다.”
역암이 내 옷을 가리키며 “이는 사사로이 거처하는 편복(便服)인가?”
내가 “아니다. 이는 융복(戎服)이니 전진에서 입는 것이다. 편복은 모두 대수의 관방건(大袖衣冠方巾)이고 각양의 고제이다.”
역암이 “김형은 평시에 방건을 쓰는가?”
내가 “나와 마찬가지이다.” 대개 양생이 관에 왔을 때 오직 내가 방건을 쓰기 때문에 이렇게 묻는 것이다.
내가 따로 소지(小紙)에 쓰기를 “최근에 들으니 궁중에 대사가 있어 온 조정이 파탕한다 하니 형들도 들었는가?”
난공이 실색하며 “어찌 아는가?”
내가 “어찌 들을 수 없겠는가?”
난공이 “아조의 가법에는 폐립(廢立)하는 일이 없고 또 황태후가 성덕이 있으므로 그 덕분에 일이 없었거니와, 만인(滿人) 아영아(阿永阿)가 극간하다가 거의 죽을 뻔했고, 한인은 한 사람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때 난공이 쓰는 즉시 찢으며 거조가 황망하였다.
내가 “망령되이 권애(眷愛)를 믿고 가벼이 이 말을 발했다. 형의 경동이 이같으니 다시 감히 말하지 않겠다.”
난공이 “국조의 법령이 심히 엄하여 이 말이 한 번 나면 반드시 죽는다. 제가 죽음이 무서우니 부지중 절로 이같이 되었다.”
내가 “그렇지 않다. 같은 중국 사람이니 이런 수작도 무방하지 않은가? 다만 제가 형들과 비록 교분이 친밀하나 그 중외의 구별은 스스로 있는 것이며, 형의 경동함이 또 이상할 것이 없다.”
이때 역암이 난공과 뭐라 하는데 서로 다투는 것 같았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난공이 “그렇지 않다. 중외의 구별을 함이 아니다. 제가 평생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벼슬하기를 원치 않고 전간(田間)에 돌아가 늙겠다.”
역암이 분연히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네가 알고 내가 아는데 노형이 무엇을 두려워 이런 꾸며대는 소리를 하는가? 담헌(湛軒)은 독실한 군자인데 너는 그를 어떻게 보는 것인가?” 하고, 또 난공을 향해 큰 소리를 치니,
난공이 변색하고 황급해 하며 “암형이 자못 성을 내는군.”
내가 “암형이 지나치다. 행실을 삼가고 말을 조심함이 어찌 성훈(聖訓)이 아닌가? 그러나 난공이 중외가 아니라 ……한 것은 나를 친하게 하고자 한 것이 도리어 나를 성기게 하였다. 또 형이 만일 죽기를 두려워한다면, 금일에 있어서 거인이 되서는 오히려 가하나 타일에 있어서 간관(諫官)이 되면 그 어디에 멈출지 나는 모르겠다. 진실로 이 같으면 일찍이 전리(田里)로 돌아가 허물없이 지내니만 같지 못하다. 나는 일찍 생각하기를, 출신(出身)하여 임금 섬기는 자가 능히 한 번 죽음을 바로 하지 못하면 그 형세가 반드시 이르지 못할 데 없이 되리라고 하였다.”
역암이 붓을 휘둘러 크게 쓰되 “‘머리를 자르려면 잘러라.’ 이것은 엄장군의 말이다.”
또 “무릇 일이 모두 하나의 적합한 곳이 있는데, 이 친구는 다만 적합하지 못할 뿐이다.”
난공이 “중용은 능히 하지 못한다 하였다.”
또 “아마 노형의 중용은 호공(胡公)일 것이다.”
역암이 또 분연히 이르되, “‘이미 밝고 또 밝아 그 몸을 보전한다[旣明且哲, 以保其身].’는 두 구는 천하의 좋은 사람을 다 그르쳤다.”
또 “이는 비록 송의 대유라도, 나는 역시 다 그렇다고 하지 못하겠다. 정자(程子)의 신법(新法)을 논(論)하지 않은 것 같은 것이다.”
내가 “이는 비록 뜻한 바 있어 한 말이지만 지나친 의론이라 하겠다.”
난공이 “이런 것은 모두 그릇된 의논이다.”
내가 웃으며 “서로 성을 내지 말라. 나의 망발로 말미암아 이 말썽을 일으켰다.” 하니, 피차가 모두 웃고 다른 말을 하였다.
내가 일본 미롱지 두 묶음을 보이며 이르되, “이것은 왜지(倭紙)이다. 본 일이 있는가?”
난공이 “본 일이 없다.”
내가 “이것은 서화(書畵)에 좋지 않을까?”
난공이 “종이 품질이 매우 좋다.”
내가 “이것은 질기기는 조선산에 미치지 못하고 그 품질은 중국 화지에 미치지 못하나 요는 두 가지의 덕을 겸유했다. 마침 행리 속에 들어 있기에 봉증(奉贈)한다.” 또 소가죽 다림과 앞서 선사한 환제(丸劑)를 더했다.
내가 인하여 “친구에게 주기 위해서는 구하고 어버이에게 드리기 위해서는 구하지 않으니 그 의가 어디 있는가?”
난공이 “특별한 맛은 조금 맛보면 족하고 많으면 귀하지 않다.”
내가 또 웃으며 “많으면 귀하지 않다는 말은 진실로 일리가 있다. 형이 교묘하게 허물을 가리고, 따라 변명을 하니, 그윽이 위하여 아깝게 여긴다.”
난공이 웃으며 “제가 허물을 알았다.”
내가 “중국의 크기와 형의 세심으로도 오히려 이러하거든, 우리들이야 말할 것 무엇인가?” 두 사람이 모두 웃었다.
내가 “소가죽 다림은 그다지 귀하지 않아 관부에는 곳곳에 있다. 청심환(淸心丸)은 자못 기효가 있고 품질도 여러 등급이어서 가짜가 반이 넘는다. 그 진짜는 궁제(宮劑)에서만 나오는데 가장 쓸 만하다. 북경 사람들이 이 물건을 보배로 여겨 그 가짜임을 잘 알면서도 구하기를 마지않으니 아마 역시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난공이 “들으니 환약 속에 고빙(古氷)이 있다 하니 참말로 그런가?”
내가 “고빙은 무슨 물건인가?”
난공이 “해중(海中)에서 여러 해 되어도 녹지 않는 얼음이라 한다.”
내가 “이것은 오전(誤傳)이다.” 하고 곧 주머니를 끄르고 꺼내주었다.
내가 “해가 장차 저무니 아문의 꾸지람이 염려되므로 이제 물러가겠다. 행기(行期)가 만일 21일에 있으면 다시 오지 못할 것 같고 만일 24일에까지 이르게 되면 마땅히 귀처를 찾아와, 용무가 없으면 인사를 드리겠다. 떠나기 전에 자주 통후 하기를 바랄 뿐이다. 하물며 비록 회면(會面)하더라도 통정(通情)하기를 입으로 하지 않고 붓으로 함이랴?”
난공이 처연히 “생사의 영별(永別)이다. 21일지라도 와서 만나 주기 바란다.”
내가 “감히 흘후(歇後)함이 아니라 아문의 저지 때문이다. 그렇지만 극력 오도록 노력해 보겠다.”
난공이 ‘극력도지(極力圖之)’라는 네 글자에 권(圈)을 친다.
내가 “이 뒤로 하루의 기간 밖에 없는데 너덧 시간 안에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상심만 더할 뿐이다.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저번에 보낸 고원정(高遠亭)의 부체(賦體) 1편은 무졸(蕪拙)하여 가소롭다. 다만 평일에 저술한 바가 없고 마침 기억이 나므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드린 것이다. 이른바 고원정 주인은 김종후(金鍾厚)인데 자는 백고(伯高)이고 호는 직재(直齋)이다. 우리 나라의 유자인데 귀주(貴?)로서 퇴거하여 독서하였다. 그 공과가 정독하고 견식이 통민하고 문사가 또 고묘하고 시망(時望)이 매우 중하였다. 편말의 몇 마디는 더욱 그 원대를 기(期)하고 소성(小成)에 편안히 여기지 말 것을 바란 것이다. 본 뒤에 평가해 주기 바란다.”
역암이 “매우 좋다.”
역암이 “형의 글 같은 것은 인격 때문에 중시되는 것이니 극히 졸한 것이라 해도 역시 좋다. 장래에 물건을 보고 사람을 생각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물건을 보고 사람 생각한다는 말은 실로 느낌이 절실하다. 다만 그 사람과 붓이 다 졸렬하니 어찌 하는가? 형들의 권애가 여기까지 이르니 진실로 감히 형들을 면수배소(面輸背笑)한다고 하지 못하겠다. 실로 무엇을 인연(因緣)하여 이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다. 혹 그 일단의 우직한 성을 예쁘게 여기고 어진 이를 좋아함이 중심에서부터 나온 까닭인가?”
역암이 변색하며 “저들이 정성을 미루어 서로 주는데 형이 오히려 이런 세정의 이야기를 하니, 그러면 형은 자못 제와 더불어 서로 좋아하지 않는 것인가? 제들이 어찌 오직 면수배소를 하지 않는 사람이 될 뿐이겠는가? 실로 중심으로 성복하는 것이다.”
내가 “형들이 매양 제에게 당치않은 말로 비의(比擬)하니 이것이 제가 심복할 수 없는 소이이다.”
역암이 “제도 또한 다른 말이 없다. 오직 헤어진 후에 때때로 마음을 가다듬어 진경(進境)을 힘써 구하여 마치 때때로 우리 담헌이 곁에서 독책(督責)하는 것 같이 하려 한다. 그리하여 조금 성취가 있으면 그것이 우리 좋은 벗을 천만리 밖에서 등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 할 뿐이다.”
내가 “비록 감히 당할 수 없으나 감복하여 마지않는다. 오직 두 형이 집에 있어 효우의 행을 다하여 속인이 되지 말고 학을 함에는 진실의 공을 힘쓰고 속유(俗儒)가 되지 말기를 바란다. 그러면 비록 해외에 멀리 엎드려 길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해도 그 영광이 다할 데 없겠고 또 감히 유한을 삼지 않을 것이다.”
역암이 “감격하고 존경하는 말을 쓰고 또 써도 다 쓰지 못하겠다.”
난공이 “오늘의 이야기는 제 두 사람이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해서 자못 우습기도 하고 자못 애석하기도 하다.”
내가 “오늘 문답한 종이도 모두 가지고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역암이 “다만 언어가 말 같지 않고 글자 획이 비뚤어져서 가소롭다.”
내가 “돌아간 뒤 이것으로써 문답한 말을 기록해 내어서 생전 두고 보면서 생각하는 자료로 삼고 또 친구들에게 보이고 후손에게 전하려고 한다.”
난공이 “족히 옛 사람과 같은 정의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좀 그럼직 한 말을 골라서 기록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후인에게 조롱을 당한다.”
내가 “알았다.” 두 사람이 두루 문답을 상고하여 보며 조금 기휘에 관계된 것은 혹 찢어 간수하고 혹 전부가 지기도 하여, 형세가 말릴 수 없었다. 전후의 것을 다 이와 같이 하고, 드디어 서로 작별하고 돌아왔다.
19일 심부름꾼을 시켜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이러하다.
“전일에 늦게 갔다가 일찍 왔으므로 더욱 서운함을 느끼었소. 어제는 또 비가 와서 찾아오지 못하였으니 우울하기 그지없소. 밤사이 모진 바람에, 여러분 잘 있는지요? 저들은 행기(行期)가 결정되지 않아 다시 나아가 뵐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나 유한한 시간에 무한한 정회를 펴고자 하니 어렵소. 팔영시는 저작(咀爵)하여 보면 저작할수록 그 맛이 진진하여 참말로 유덕자의 말이라 느꼈소. 그 중 영감(靈龕)의 시가 더욱 그 탁연하고 준발하여 세유의 속된 냄새가 없음을 볼 수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만경창파를 타고 우주를 뛰어넘는 뜻을 가지게 하니, 그 시를 읽고 가히 그 사람을 알 수 있소. 그러나 재주가 높은 자가 탈쇄(脫灑)에 지나치면, 혹 대군(大軍)의 유기(遊騎)가 멀리 가 돌아갈 바를 모르는 것과 같이 되는 수가 있소. 그 형을 위하여 염려되오. 그 책이 본래 엷어서 손상되기 쉽고 작첩(作帖)하기는 좋아도 벽에 붙이기에는 적합하지 못하오. 여기 보내는 조선 종이는 품질이 비록 좋지 못하나 조금 오래 가니 수고스럽지만 다시 휘호하여 주시기 바라오. 여덟 수의 시는 모두 각 행(行)으로서 글자 모양을 전보다 좀 크게 하고 만일 다시 예서로 써주었으면 더욱 좋겠소. 시끄러운 청이 이같이 많으니 애모한다는 것이 심부름 시키는 것이 되었소.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난공의 담헌기(湛軒記)는 이러하다.
“연(燕)의 바깥 지역을 조선이라 한다. 그 풍속이 예절을 알고 음악과 시를 이해하니 타국과 다르다. 당(唐)으로부터 지금까지 풍속을 채집하는 자가 취함이 있었다. 병술년 봄에 내가 경사에 오니 마침 홍군 담헌(洪君湛軒)이 사신을 따라 입공(入貢)하니, 대개 중국 성인의 화(化)를 사모하여 한 번 중국의 기사(奇士)와 벗하고자 하여 수천 리의 길을 꺼리지 않고 달려 왔다. 나의 이름을 듣고 곧 나를 찾아와 주객(主客)이 붓으로 혀를 대신하고 아울러 도의로써 군자의 사귐을 이루니 아아! 이 또한 기연이로다. 홍군은 박문강기(博聞强記)하여 글에 보지 못한 것이 없고 율력(律曆)ㆍ전진(戰陣)의 법과 염락관민(濂洛關?)의 종지를 구심(究心)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시문에서부터 산수에까지 능치 못한 것이 없고, 같이 있는데 옛 것을 지키고 덕이 순후하여 유자의 풍이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도 보기 어려운데 뜻밖에 진한(辰韓)의 황원(荒遠)한 땅에서 얻어 보게 되었도다. 하루는 나에게 말하되, ‘모(某)는 조선 서울의 사람인데 마음에 조그마한 뜻을 품고 충청도 수촌(壽村)에 퇴거하여 농민과 더불어 노닌다. 집 두어 채가 있는데 정자와 다락과 연못과 다리가 있고 연못 안에 배가 있어 가히 탈 수 있고 다락 밖에 나무가 있어 그늘이 진다. 이 집에 들어 거처하면 옥형(玉衡)의 의(儀)와 후시(候時)의 종(鍾)과 주현(朱絃)의 동(桐)이 있다. 장차 일이 있으면 시(蓍)로 점칠 수 있고 경독(耕讀)의 나머지는 활을 당길 수 있으니 지극한 낙이 그 가운데 있으므로 이밖에 바랄 것이 없다. 미호(渼湖) 선생이란 분이 있으니 나의 스승이다. 그 액(額)을 담헌(湛軒)이라 해주시니 내가 곧 이로써 자(字)를 삼았다. 그대는 나를 위하여 기(記)를 써달라’ 했다. 내 이미 그 사람을 높이 보고 또 그 지ㆍ관(池館)의 경치를 듣고 한 번 가서 그 아취를 구경코자 하나 멀리 만리 밖에 있어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옛적에 외국의 공사(貢使)가 있어 예고사(倪高士)가 청비각(淸?閣)을 짓는다는 말을 듣고 구경하려다 못하고 재배 탄식(再拜歎息)하고 갔다 하더니 나의 오늘의 일이 자못 이와 같으면서 또 상반된다. 그러나 그 헌(軒)을 이름지은 뜻은 가히 알 수 있다. 군자의 도(道)는 마음이 흐리지 않고 외물이 물들게 못하며, 그 몸은 청명하고 그 집은 허백(虛白)하니 거의 담(湛) 자의 설에 합함이 있다. 홍군이 매양 나와 성명(性命)의 학을 강하면 그 말이 아주 순(醇)하니 대개 깊이 담(湛) 자의 뜻에 얻음이 있는 자이다. 내 비록 글을 못하나, 스스로 군자의 도에 힘써, 좋은 벗을 저버리지 않게 하며, 아울러 홍군의 문행(文行)으로써 중국의 사(士)에게 두루 보이고자 하나, 또 어찌 감히 독필(禿筆)로써 만의 하나인들 형용하여 논(論)하랴‘ 알지 못하거니와 미호 선생이 내 말을 듣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항군(杭郡) 반정균(潘庭筠)은 머리 숙여 배찬(拜?)한다.”
나는 난공에게 네 시구(詩句)를 써주고 또 고원정(高遠亭)의 부(賦)를 다음과 같이 써주었다.
“수야의 동산과 / 秀野之園
산금의 돌에 / 散襟之石
날개 같은 정자 있으니 / 有翼其亭
군자가 쉬는 곳이로다 / 君子攸息
고원이라 이름하니 / 扁以高遠
밝고 넓은 뜻이러라 / 蓋取昭曠
눈은 내와 들을 다하고 / 目極川原
구름 연기는 만 가지 모양이네 / 雲烟萬狀
대용이 송을 지으니 / 大容作頌
부이고 또 비이다 / 賦而且比
그 주인이 누구인가 / 其主伊誰
큰댁 고씨뿐이러라 / 惟伯高氏
산언덕에 바위 있어 안장같이 생겼으며 / 有石盤陀兮山之阿
위에는 송백이 우거지고 아래는 찬 샘이 나온다 / 上蔭松栢兮下出寒泉
우거진 풀 헤치고 푸른 이끼 쓸어내며 / ?蒙茸兮掃靑苔
띠를 이어 얽고 서까래 얹어 놓았네 / 緝翠茅兮架素椽
낮에는 꽃이 피어 눈이 부시고 / 繁陽?兮晝炫
밤에는 돌샘에서 물이 흐르네 / 疏石澗兮夜聲
밝은 달빛 속에 누가 앉았는고 / 若有人兮坐素月
오죽 갓 끈에 풀 삿갓 썼구나 / 戴蒻笠兮烏竹纓
상송을 노래하니 이 기개 호탕하고 / 歌商頌兮浩蕩
요금을 울리니 그 소리 차디차다 / 響瑤琴兮冷冷
산은 멀리 떨어지고 길은 걷기 험난하여 / 山之外兮路險難
계수 가지 휘어잡고 간신히 소요하네 / 攀桂枝兮聊逍遙
바람이 쌀쌀한데 구름도 흩어지니 / 風颯颯兮雲漠漠
봉황은 날아가고 올빼미 낮에 운다 / 靈鳳飛盡兮?梟晝號
슬프다 세상일 뜻대로 아니 되니 / ?塵事兮多違
그대의 처소에서 망설일 뿐이라네 / 惟子所兮盤桓
난간에 의지하여 멀리멀리 바라보니 / 憑檻兮遠望
용문이 보이는데 높디높은 산이로다 / 見龍門兮高山
한 줌 돌이 쌓여서 만장 높이 이루고 / 積一拳兮成萬?
우뚝 솟은 나환은 하늘 높이 꽂혔네 / 矗螺?兮高揷天
이 집이 생각하면 아름답기 사실이나 / 顧玆居兮雖信美
그래도 멀리 떠나 사방으로 떠다니네 / 且遠遊兮四荒
긴 바람 타고 패연히 떠나 / 駕長風兮沛然
큰 길을 따라 빙빙 날아도네 / 履周道兮??翔
명거를 장만하고 천리마 채찍질 하여 / 脂名車兮策良驥
그대를 따라 여정에 오르려네 / 願從子兮斯征
또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본래 졸필이라 글자를 이루지 못하오. 그러므로 무릇 남에게 주는 문자는 반드시 능자(能者)에게 손을 빈다오. 지금 철교(鐵橋)의 청에 분연히 붓을 들어 조금도 사양하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철교의 뜻이 글씨에 있지 않기 때문이오. 아아! 이 뜻은 참으로 두터운 것이니 내가 감히 말하지 못하겠소.”
심부름 간 사람이 돌아왔다. 역암의 편지는 이러하다.
“성(誠)은 재배합니다. 별후에 기거(起居) 어떠한지 생각이 간절하오. 행기(行期)가 결정되지 않았다니, 매우 좋소. 만일 틈을 타서 한 번 와 주었으면 깊이 내 원에 흡족하겠소. 일체 이별에 대한 가련한 말은 모두 췌언(贅言)할 필요 없고, 종일 한숨만 쉬고 멍하니 앉아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과 같은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오. 다 이런 정경은 아마 두 형도 같으리라. 어찌하나! 어찌하나? 만함재(晩含齋)의 액(額)은 이미 다 썼는데 가져온 종이가 두 폭이어서 붙이면 흔적이 있을까 두려워서 내 마음대로 긴 폭(幅)과 바꿔썼습니다. 다만 필적이 졸렬하여 대인의 뜻에 합당치 않을까 두렵소. 기문과 시는 각각 한 본씩 써 돌려 드립니다. 8시(詩)를 만일 각체로 쓰면 대방(大方)이 아닐까 두려워 마침내 전부 예체(?體)로 하였는데 어떨런지? 영감(靈龕)의 시는 말해 준 것이 극히 옳소. 감히 깊이 명심하지 않겠소? 아침저녁으로 바빠서 미처 고치지 못하고 그 설을 그대로 두게 되니 한스럽소. 귀처에 어진 사우(士友)가 있어 보면 한 번 웃음거리도 못되겠으니 다행히 남을 보이지 말고 그저 수적으로 간직해 두고 상호의 정을 기념하면 감사하겠소. 저희들의 필묵은 본래 족히 이를 것이 아니지만 오형(吾兄)이 만일 부탁받는 데가 있으면 곧 명을 받들어 써 올리겠소. 비록 다른 일이 있더라도 걱정할 것 없소. 그런데 어제 편지에 감히 청하지 못하겠다는 뜻이 있으니, 친한 사이의 말이 아니오. 혹 오형이 짐짓 이런 위곡한 세정(世情)을 한한 것이라면 너무 세심한 것이오. 양허(養虛) 형의 한 책을 부쳐 보내며 정사 대인(正使大人)에게 화답하는 시 2장도 함께 상정하오. 제가 전에 김형을 위하여 지은 바 양허당기(養虛堂記) 1편은 그 가운데 이합(離合)하고 천삽(穿揷)한 것이 조금 득의한 곳이 있소. 말이 비록 평천(平淺)하나 그러나 한 쪽을 써서 두 쪽을 다 나타내고 차제(借題)하여 두 형의 합전(合傳)을 짓는데 자못 고심하여 갖추었소. 모르거니와 오형은 어떻게 생각하오? 알아주는 사이가 아니면 또 감히 이렇게 제 자랑하며 스스로 기뻐하지 못하리다. 김형에 이르러는 그 필법을 한ㆍ위(漢魏)를 숭상한다 하는데 제는 그렇게 보지 않소. 대저 이런 문자는 비록 극히 잘 되지 못하였더라도 제가 마땅히 영원히 보존하고 감히 세상에 알리지 않겠으며, 또 마땅히 가승(家乘)에 전하여 자손에게 보이겠소. 만일 와 주실 수 있으면 다만 진각(辰刻)을 기하여 우거(寓居)에 와 주오. 그러면 제가 아직 출타하지 않아서 반드시 만날 수 있겠소. 요행히 만나면 이날에는 설사 별다른 일이 있어도 임시로 사절할 수 있소. 또 우리들이 내왕하는 자취를 친구 중에 태반은 알고 있는데, 매우 평담하여 조금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이 없으니 오형은 조금도 스스로 혐의를 품고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가 없소. 하물며 두 형의 인품과 학술을 저들이 누차 칭송하여, 비록 무식한 자라도 오래 경앙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 누가 망령되이 중외의 구별을 두겠소? 오래지 않아 만나겠기에 말을 다하지 않소. 오직 조찰(照察)하기 바라오. 이만 줄임.”
또 편지하였는데, 이러하다.
“다만 담소를 접봉(接奉)하지 못하여 답답할 뿐 아니라 양일 이래도 하인도통 오지 않으므로 제는 추루(秋)와 더불어 두 눈이 뚫어지게 기다리자니 괴롭고 괴로웠소. 그러던 중에 지금 두어 줄을 얻으니 기보(奇寶)를 얻음 같소. 자세히 사의(詞意)를 맛보니 촌심(寸心)이 쪼개지는 듯하오. 우리들의 인연이 이렇게 아쉬운가요? 형세로 보아 또 가서 관 앞에서 기웃거릴 수도 없으므로 집은 가깝고 사람은 머니, 애달픈 생각 더욱 심하오. 모르거니와 떠나기 전에 한가한 틈을 타서 한 번 와서 영결을 지을 수 있겠소? 편지가 이에 이르니 제가 아무리 무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손이 떨리고 마음이 쓰리어 눈물이 흐름을 금치 못하오. 부탁한 모든 글씨는 18일 모두 이미 써 놨는데 보내 드릴 길이 없다오. 아울러 한 소찰(小札)도 또 모두 전달하지 못하였소. 지금 사람을 시켜 보내 올리니 이 마음을 살펴주기 바라오. 전에 주신 서책 안에 덕행과 문예와 덕성과 문학에 관한 것은 나의 병통에 절실히 들어맞으니 삼가 좌우에 놓아 두고 종신토록 잊지 않겠소. 감사해 마지 않소. 전번 편지는 회답을 잊었기에, 지금 아울러 말하오. 비의(鄙意)를 대강 펴 문안을 드리며, 이만 주리오.”
난공의 편지는 이러하다.
“비바람이 심한데 기거가 만안(萬安)한지 생각이 간절하오. 수일 사이 편지를 받지 못하고 사자도 오지 않으니 속으로 매우 걱정되오. 밤낮으로 그리고 그리는 상사의 괴로움은 지필로 다 말할 바가 아니오. 전번에 방찰(芳札)을 받고 보배를 얻은 듯하였소. 자세히 사지(辭旨)를 맛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고 쓰리게 하였오. 우리의 인연이 어찌 이토록 지독하게 아쉬운가요? 도리어 서로 사귀지 않았던 것만 못한 느낌을 가지게 되오. 졸문은 이미 쓴 지 수일인데 부쳐 올릴 길이 없었소. 지금 부쳐 보내는데 몇 마디 말을 바꾸니 전고(前稿)와 조금 다르나 마침내 그 추졸(醜拙)을 가리지 못하오. 그저께 방찰(芳札) 가운데 한 책은, 제들이 아무렇게나 써 달라고 한 것인데, 왜 책을 보내지 않았소? 저는 글씨가 추열하여 본래 청람(淸覽)에 받칠 만한 것이 못되오. 그러나 제들이 바빠서, 이 일로써, 다시 청탁하지 못한다 하면, 크게 그러지 않소. 천애(天涯)의 지기(知己)인데 명하면 곧 자진해서 써 드릴 것이지 어찌 일이 많은 것을 논하겠소? 하물며 아직도 남은 겨를이 있어 할 수 있음에랴? 행여 달리 생각 마시기 바라오. 총총하여 미처 자세히 베풀지 못하오. 오직 서로 생각하기 다함이 없을 뿐이오.”
역암의 양허당기(養虛堂記)는 이러하다.
“병술년 봄에 내가 경사에 노닐며 두 이인(異人)을 사귀니 김군 양허(金君養虛)와 홍군 담헌(洪君湛軒)이다. 두 군은 조선 사람이다. 한 번 중국의 사(士)와 벗삼겠다 생각하고 공사(貢使)를 따라 연하(輦下)에 와 머물기 석 달이 되었다. 마침내 낙락하여 만난 바가 없고 또 출입을 반드시 문지기에게 묻게 되니 군색스럽고 걱정스러워 뜻을 얻어 이루지 못했다. 나와 더불어 서로 만나고 환연(歡然)히 옛 친구 만남과 같았다. 슬프다! 내가 어찌하여 이를 얻었는가? 홍군이 중국 글에 있어서 읽지 않은 것이 없고 율역(律曆)과 산복(算卜)과 전진(戰陣)의 법에 다 정하다. 돌아보건대 성(性)이 독근(篤謹)하고 이학(理學)을 논하기 좋아하여 유자의 기상을 갖추고, 김군은 금기(?崎)하고 뇌락(磊落)하여 얽매이지 않으니 뜻은 같지 않은 듯하나 사이는 서로 가깝다. 내가 이미 홍군의 사람됨을 존경하고 김군에 대해서도 사랑이 지극하다. 김군이 시짓기를 기뻐하여 한ㆍ위(漢魏)와 성당제가(盛唐諸家)를 마음으로 어루만지고 솜씨로 따라 풍격(風格)이 꿋꿋하고 글씨가 빼어나니 반가운 사람이다. 매양 나의 하숙집에 찾아와 말은 통하지 못하지만 대석(對席)해서 필담하는데 붓을 종이에 날리기 나는 듯하여 날로 수십 장을 다하기 상사였다. 성품이 자못 술을 즐기나 방금(邦禁)에 저촉되어 마시는 일이 없으며 또 담헌이 혹 규계(規戒)하므로 때때로 머리를 긁으며 스스로 금치 못하기도 한다. 하루는 내가 더불어 같이 술을 마시며 매우 즐겼는데 오히려 때때로 홍군이 혹 와 볼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말이 홍군에 미치면 반드시 호걸의 선비라 이른다. 대저 천하에 호하여 붕우(朋友)라 하는 사람이 많으나 그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자취로만 합하고 마음은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좋아하지 아니하면 자취도 날로 멀어진다. 그러므로 바른 사람과 바른 말이 매양 때에 용납되지 못하고, 타락 방종하는 자가 바른 사람 바른 말과 친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흘러 비비(比匪)의 소인이 되면서도 스스로 그 그름을 알지 못하므로 붕우의 도가 드디어 다시 말 못할 지경이 된다. 김군의 홍군에 대한 것 같은 벗이 또 많겠는가? 술이 이미 취함에 내가 묻되, ‘자네가 어찌 벼슬하지 않는가?’ 하니, 김군이 개연히 길게 탄식하며, ‘자네가 나의 양허(養虛)로 호한 것을 아는가? 우리 국속이 문벌을 중히 여기니, 용렬한 자는 혹 쉽게 높은 지위를 얻으나 떨어진 가문의 한준(寒畯)한 선비는 비록 재주가 좋아도 나타나지 못한다. 나는 본래 귀족 자제이므로 좋은 벼슬 얻기 쉽고, 또 나이 거의 50이므로 늙었는데, 달게 스스로 복익(伏匿)하여 그 몸을 궁하게 함은 대개 하지 않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대저 나의 마음은 태허(太虛)와 같아 부운(浮雲)으로서 부귀(富貴)를 보고 또 성(性)이 게으르고 오만하여 세상에 쓸데가 없으니, 때로 1편을 읊으며 자득하여 즐기고, 때로 일호(一壺)를 기우리어 도도하게 얻은 바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허를 양할 뿐이다. 게으르고 오만한 성을 억지로 굽혀 세상에 효(效)를 구하려 하면 남에게 도움이 없고 한갓 나에게 손만되니, 그 나의 허를 방해함이 이에서 더 큰 것이 없다. 이것이 내가 호한 소이이고 따라서 이로써 내 거실(居室)의 액자로 삼은 소이다.’고 한다. 내 이르되, 이것은 기술할 만하다. 대저 홍군은 시를 짓지 않고 또 술을 마시기 싫어하니 김군과 다르다 의심되나, 귀주(貴?)로서 전간(田間)에 퇴은(退隱)하여 바야흐로 성현의 도를 강명(講明)하여 그 몸이 마치도록 사진(仕進)함을 즐겨하지 않으니 그 뜻이 또한 김군의 뜻이다. 이제야 그 자취가 서로 합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마음으로 서로 좋아하여 성명의 사귐을 이룬 까닭을 알겠고, 또 그 멀리 이국에 있으므로 내가 한번 양허(養虛)하는 당(堂)에 올라 김군과 더불어 그 사이에서 효효연(??然) 도도연(陶陶然)하게 지내 볼 수 없게 됨을 애석하게 여긴다. 그 돌아감에 즈음하여 이를 적어 선물로 주니 해외의 선비가 홍군과 뜻을 같이하는 자가 있으면 같이 보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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