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정동필담(乾淨?筆談)
을유년 겨울에 내가 계부(季父)를 따라 연(燕)에 갔다. 강을 건너면서부터 보이는 것이 모두 처음 보는 것이나, 그 크게 원하는 바는 한 아름다운 수재로 마음맞는 사람을 얻어 함께 실컷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연로(沿路)에서 방문하기를 부지런히 했으나 길가에 사는 자는 모두 조그만 장사꾼들이었다. 또 북경(北京) 이동은 문풍(文風)이 떨치지 않아 혹 만나는 자가 있어도 모두 녹록(碌碌)하여 족히 일컬을 것이 못 되었다. 동화문(東華門) 길에서 한림(翰林) 두 사람을 만나 같이 말하고 그 뒤에 그 집에 찾아가서 자못 수작(酬酢)이 있었으나 문학이 심히 졸하고 중외(中外)를 구별하여 망령되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또 그 언론(言論)이 비속하여 족히 더불어 왕래할 것이 못되었다. 드디어 한두 번 만나고 그쳤다.
2월 1일 비장(裨將) 이기성(李基成)이 원시경(遠視鏡)을 사기 위해 유리창(琉璃廠)에 갔다가 두 사람을 만나니 용모가 단려(端麗)하여 문인의 기품이 있고 모두 안경을 끼었더라는데 아마 근시(近視)에 걸린 모양이었다.
하여 말하기를,
“내가 친히 아는 사람이 있어 안경을 구하는데 거리에서 진품을 구하기 어렵고 족하의 낀 것이 심히 병든 눈에 맞을 것 같으니 행여 나에게 팔고 족하는 혹 부건(副件)이 있을 수도 있고, 비록 새로 구하더라도 구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그 한 사람이 벗어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에게 구하는 자는 생각건대 나와 같은 병걸린 자이리라. 내 어찌 안경 하나를 아끼겠는가? 팔라고 할 것이 무엇인가?”
하고, 이에 옷을 떨치고 갔다. 기성(基成)이 자기가 경솔했음을 뉘우치고 공연히 남의 물건을 가질 수 없다 하여, 이에 안경을 가지고 뒤쫓아가서 돌려주며,
“아까 한 말은 희롱일 뿐이고 본래 구하려는 자가 없으니 쓸데없는 물건을 받을 수 없다.”
하였더니, 두 사람이 모두 기뻐하지 않으며,
“이는 하찮은 것이고, 또 동병상린(同病相憐)의 뜻이 있는데 어찌 그대가 좀스럽기를[鎖鎖] 이같이 하는가?”
하니, 기성이 부끄러워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고, 대략 그 내력을 물은즉 절강(浙江)의 거인(擧人)으로 부시(赴試)하기 위하여 와서 방금 정양문(正陽門) 밖인 건정동(乾淨?)에 하숙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 저녁에 기성이 안경을 가지고 와서 그 까닭을 말하고, 화전(花箋)을 나에게 달라 하여 장차 보답하기로 하고, 또 말하기를,
“그 두 사람이 모두 유아하고 사랑스러우니 모름지기 한 번 가서 찾아보라.”
하였다. 내가 한 묶음의 전지[箋]을 주며, 또
“우선 자세히 알아보라.”
일렀다. 다음날 기성이 과연 그 집에 찾아가서 선ㆍ묵(扇墨)과 환제(丸劑)를 주니 모두 사사(辭謝)한 뒤에 받는데 예법이 심히 공손하고 다시 우선(羽扇)과 필묵과 다연등물(茶烟等物)로써 갚더라는 것이다. 기성이 돌아와 그 언모가 고결(高潔)함을 극구 칭송하면서,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재학(才學)이 있을 터이니 놓치지 말라.”
고 하였다. 이에 다음날 같이 가기를 약속하였는데, 김재행(金在行 평중(平仲)) 이 듣고 또 즐기며 함께 가기로 하였다. 기성이 올 때 두 사람의 성시주권(省試?卷) 각 몇 본을 얻어왔는데 비록 그 문채가 미상하나 요는 그 정연(精鍊)한 것이 마음에 좋았다.
3일 식사 후 세 사람이 같이 타고 정양문(正陽門)을 나와 2리쯤 가니 건정동(乾淨?)에 이르렀다. 객점(客店)이 있는데 천승점(天陞店)이라고 간판이 붙었다. 두 사람의 사는 곳이다. 하차하여 문밖에 서서 마부(馬夫)를 시켜 먼저 들어가 통하게 하였다. 두 사람이 듣고 중문밖에 나와 맞이하였다. 몸을 구부려 읍하는 것이 극히 공손하였다. 우리들을 인도하여 먼저 가게 하니 대개 중국의 풍속이다. 사례하고 뒤에서 갔다. 장차 문에 들려고 할 때 두 사람이 먼저 문에 이르러 발(簾)을 거두고 기다렸다. 문에 들어가 우리들을 붙들어 온돌 위에 앉히고 각각 의자로서 온돌 아래서 대좌(對坐)하니 이 또한 그 풍속이었다. 동벽에 발이 높은 큰 탁자를 놓고 탁자 위에 책 수십 권이 있고 온돌 한가운데 발이 짧은 작은 탁자를 놓고 위에 남색 모포(毛布)를 덮었다. 서북벽 아래에 가죽 상자와 목궤(木櫃)는 모두 여행전 대였다. 작은 탁자에는 붓 벼루와 청동물병을 놓고, 위에 작은 국자[小勺]를 비껴놓았으니 물을 벼루에 붓는 것이다. 큰 탁자와 온돌 위에 화본(畵本)과 시전(詩箋)을 흩어 놓았다. 소년이 입가에 아직도 먹을 물고 있는 것을 보니, 대개 초화(草畵)가 끝나기 전에 나와서 우리들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좌정(坐定)하고 성명과 나이를 물었다.
엄성(嚴誠)은, 자는 역암(力闇)이요 호는 철교(鐵橋)이니 나이 서른 다섯이고, 반정균(潘庭均)은, 자는 난공(蘭公)이요 호는 추루(秋)이니 나이 스물 다섯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는 이공(李公)을 통하여 성화(聲華)를 들었고, 또 시험 답안을 보고 문장을 흠앙하여 삼가 이공과 동지 김생(金生)과 함께 와서 찾아뵈는 것이오니 바라건대, 당돌함을 용서하여 주시오.”
라고 하니, 두 사람은 모두 불감이라고 사양하였다.
내가 “두 분의 고향은 절강성(浙江省) 어느 고을인가요?”
엄생(嚴生)이 “항주(杭州) 전당(錢塘)에 삽니다.”
내가 “다락에서 창해에 뜬 해를 구경하고[樓觀滄海日]”라고 외니, 이어서
엄생이 “문에서 절강의 조수를 대한다[門對浙江潮]”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이것이 즉 귀하의 고향입니까?” 하니, 엄생이 그렇다고 하였다.
반생(潘生)이 평중(平仲)의 성을 듣고 묻되 “당신은 귀국의 김상헌(金尙憲)을 압니까?” 하였다.
내가 “김은 우리 나라 재상이고, 시에 능하고 문에 능하며, 또 도학(道學)과 절의(節義)가 있는데, 그대들이 팔천 리 밖에 살면서 어떻게 아는가?”
엄생(嚴生)이 “그의 시구가 뽑혀 중국 시집에 들어 있으므로 압니다.” 하고 곧 곁방에 가서 한 책자를 가져와 뵈는데, 책 이름은 《감구집(感舊集)》이었다. 대개 청 나라 초기에 왕어양(王漁洋)이 명ㆍ청의 모든 시를 모은 것인데, 청음(淸陰)이 조천(朝天)할 때 길이 등ㆍ래(登萊)로 나와 그 사람과 같이 창수(唱酬)함이 있었으므로 율절(律絶) 수십 수(首)를 뽑아 넣었다.
내가 “우리 둘이 여기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다만, 처음 중국에 들어와서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니, 청컨대 필담(筆談)으로 합시다.” 하니, 두 사람이 허락하고 곧 지ㆍ연(紙硯)을 작은 탁자 위에 펴 놓았다. 이기성(李基成)이 먼저 돌아갔다. 이에 손과 주인이 나누어 탁자를 둘러앉았다.
평중(平仲)이 “두 분의 주권(?卷)이 회시(會試)에서 지은 것인가?”
난공(蘭公)이 “성시(省試)의 작입니다. 지금 서울에 이르러 회시(會試)를 봅니다. 또 두 분이 이에 오셨으니, 유고(遊稿)가 반드시 많을 터인데 좀 보여 줄 수 없는가?” 하였다.
그때에 우리는 모두 군복을 입었으므로, 나는 말하기를, “나는 무직(武職)이라 궁마(弓馬)의 일은 들었으나 시문(詩文)은 배우지 못했노라.” 하니, 난공(蘭公)이 웃으며 “두 분은 문사(文事)가 있고, 무비(武備)를 겸(兼)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평중이 “원컨대 두 분의 옥고(玉稿)를 보여 주시오.”
난공이 “풍진(風塵)이 녹록하여 이룬 바가 없습니다. 올 때 동방해원(同榜解元) 육비(陸飛)가 그림을 그렸는데, 우연히 적은 시로 제(題)하였으니 보여드리지요.” 하고 이에 한 폭 그림을 내보였다. 수묵(水墨)으로 그린 한 떨기 연꽃이었다. 필화(筆畵)가 기경(奇勁)하고 위에 육(陸)의 칠절시(七絶詩) 한 수가 있고, 아래에 역암의 사(詞)와 난공(蘭公)의 시가 있는데, 모두 아름답고 육의 시가 더욱 높았다.
내가 “이는 세 절품[三絶]입니다.”
역암이 “지나친 칭찬이요. 당할 수 없습니다.”
평중이 “무부(武夫)도 졸시(拙詩)가 있다.” 하고, 앵무율(鸚鵡律) 세 수를 써 보이니,
역암이 “기탁(寄托)한 것이 고묘(高妙)하다 탄복한다.” 하였다. 평중이 즉석에서 청음운(淸陰韻)을 차운하여 일절(一絶)을 부(賦)하였다. 두 사람이 본 다음 곧 차운하되 모두 붓을 들어 빨리 쓰니 자못 재주를 비교하는 뜻이 있었다. 두 사람이 또 나에게 시를 청하매 “내가 본래 시에 능치 못하니 보여드릴 것이 없어 심히 부끄럽습니다.” 하니, 모두 이르기를 지나친 겸손이라 하였다.
평중이 또 두 사람의 시를 보기를 청하니, 난공이 “엄형이 시집이 있으니 마땅히 보여드리라.” 하였다.
역암이 머리를 흔들며 사양하나, 난공이 듣지 않고 동쪽 방으로부터 한 책을 가지고 와서 그 가운데 오십 운(韻)인 칠언고풍(七言古風) 한 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한 달관(達官)이 있어 조(朝)에 천(薦)코자 하매 역암이 의연히 가지 않고 이 시를 지어 거절하였답니다.”
내가 보고 “이미 그 시를 사랑하고 또 고표(高標)를 공경하니 우리들이 다 같이 영광스럽다.” 하였다.
역암이 “본래 시를 알지 못하는데, 우연히 학보(學步)하여 스스로 자기 뜻을 따를 뿐입니다. 대방가에 웃음거리가 되어 감히 당치 못하겠습니다.”
내가 “여만촌(呂晩村)은 어느 곳 사람이며, 그 인품이 어떠한가?”
난공이 “절강(浙江) 항주(杭州) 석문현(石門縣) 사람으로 학문이 깊은데 아깝게도 난(難)에 걸렸습니다.”
내가 “절강(浙江) 산수가 어떠한데 능히 인재가 배출하기 이같습니까?”
난공이 “남변(南邊)인데 산이 훤하고 물이 빼났습니다.”
평중이 “우리 부 대인(副大人)이 난공의 주권(?卷) 중에 ‘망망한 우주에 주(周)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라는 말이 있음을 보고 염임(??)함을 깨닫지 못하셨답니다.”
난공이 오랫동안 얼굴빛을 변하였다. 나는 평중에게 교분이 옅은데 말이 너무 깊었다고 나무랬다.
난공이 이에 “이는 초솔(草率)한 말이고 대지(大指)는 이런 것에 불과합니다. 즉 중화(中華)는 이에 만국(萬國)의 으뜸하는 바이고, 지금 천자(天子)는 성신(聖神)하여 문과 무를 겸하였으니, 신이 된 자가 마땅히 애대(愛戴)하고 의귀(依歸)해야 한다는 뜻일 뿐입니다. 존주(尊周)는 국조(國朝)를 높이는 말입니다.”
대개, 한인(漢人)이 당금에 도리어 기려(?旅)의 신과 같으니 근신하고 혐외(嫌畏)함은 그 사세가 그렇게 된 것이다. 그 말의 이같음이 족히 괴이할 것 없다. 나는 평중에게 권하여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평중이, “보여 준 것이 극히 좋습니다.”
내가 “왕양명(王陽明)도 절인(淅人)인가?”
난공이 “양명은 소흥인(紹興人)이니 나와 같은 동향이다.”
내가 “전당(錢塘)이 소흥(紹興)에서 몇 리인가?”
난공이 “2백여 리이다.”
내가 “귀처(貴處)의 학자(學者)는 어느 분을 따르는가?”
난공(蘭公) “모두 주자(朱子)를 높인다.”
내가 “양명(陽明)을 따르는 자도 있는가?”
난공이 “양명은 대유(大儒)로서 공묘(孔廟)에 배향되었다. 특히 그 양지(良知)를 강함이 주자와 다르므로 학자가 종(宗)하지 않고 간간이 한두 사람이 따르고 있으나 또한 그다지 현저하지 않다.”
내가 “양명은 간세(間世)의 호걸의 선비이고, 문장 사업이 실로 전조(前朝)의 거벽(巨擘)이다. 다만 그 문로(門路)는 진실로 난공의 말과 같다.”
역암이 “귀처(貴處)에서도 육(陸)을 배척하는가?”
내가 “그렇다.”
역암(力闇)이 “육자정(陸子靜)은 천자(天資)가 심히 높고 양명은 공이 천하를 덮으니, 곧 강학(講學)하지 않아도 또 그 큰 인물이 됨에 장애되지 않는다. 주ㆍ육(朱陸)이 본래 이동이 없는데 학자가 스스로 분별을 만들었다.
또 길은 달라도 돌아가는 곳은 같다.”
내가 “동귀(同歸)란 말은 감히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평중이 “공이 비록 천하를 덮으나 양지(良知)의 창론(?論)이 주(朱)와 다르다.”
난공이 “사업(事業)은 모름지기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에서부터 해야 하는 것이니, 양명의 격물(格物) 치지(致知)가 오히려 여감(餘憾)이 있을 뿐이다.”
내가 “양명의 학(學)이 진실로 여감(餘憾)이 있으나, 다만 후세의 기송(記誦)의 학에 비하면 어찌 하늘과 땅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난공(蘭公)이 어찌 하늘과 땅의 차이가 아니겠는가[豈非?壤]란 네 글자에 권점(圈點)을 치면서 “극(極)히 좋다.” 하였다. 또 “지금의 독서(讀書)는 기송(記誦)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천하에 성현의 학문에 잠심(?心)하는 자가 없지 않으니, 속유(俗儒)로써 일률적으로 말할 것이 아니다.”
평중이 “종지(宗旨)가 방향이 다르면 도리어 기송만 같지 못하다.”
역암은 미소할 뿐이다. 대개 그는 평일에 배운 바가 왕ㆍ육(王陸)에 자못 깊었던 까닭이다.
난공이 “귀국에 대유(大儒)가 있는가?”
평중이 “있다.”
내가 “김상헌(金尙憲 호는 청음(淸陰)) 같은 이가 또한 우리 나라 대유(大儒)이다.”
난공이 “현재에는 누구인가?”
내가 “감히 그 누구라고 지목하지 못하겠으나 사후(死後)에 바야흐로 공론(公論)이 있을겝니다.”
평중이 “그윽이 족하(足下)의 고의(高儀)를 살펴보니 그 학문의 심오가 보통 공명을 취하려는 자가 아니니 우러러 존경한다.”
난공이 “우리들은 아직 어린애들이고, 속인(俗人)일 뿐이다. 극히 과찬을 받아 몸둘 곳을 모르겠다.”
내가 “사업(事業)은 성정(誠正)으로부터라는 말을 들어, 난공(蘭公)에게, 다만 이 한 마디 말이면 몸닦고 임금 섬김에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리오.”
평중(平仲)이 “문학(問學)하는 밖에 즐겨하는 글이 무엇이오?”
난공(蘭公)이 “내가 나이 스물일 때 이미 십삼경(十三經)과 저사(諸史)를 읽었으나 질이 노둔하고 건망증이 있어 마침내 성취함이 없으니 부끄럽다. 다만 학문은 성현으로서 주를 삼고 비록 제자와 백가라도 보지 않은 바가 없으나 결국은 육경(六經)에 돌아가고 말 것이다.”
역암(力闇)이 “창려(昌黎)를 몹시 즐긴다. 《사기(史記)》는 극히 묘하다. 한서(漢書)를 읽으려면 사기(史記)를 보지 않아서는 안된다.”
난공(蘭公)이 “나이 젊고 실학(失學)하여 일찍 정학(正學)에 잠심(?心)하지 못했다. 그러나 작문에는 반드시 사천(史遷)을 배우나 능히 옛사람에 따르지 못함이 부끄럽다.”
내가 “두 분의 선세(先世)에 무슨 현관(顯官)이 있는가?”
난공(蘭公)이 “본래 농가(農家)의 아들로 한산한 문이니 오직 독서역전(讀書力田)하였고, 일찍 통현(通顯)한 자가 있지 않다. 만일 그 원조(遠祖)로 말하면 진 나라 반악(潘岳)의 후손이다.”
내가 웃으며 “군의 용모가 심히 아름다움이 유래가 있는 일이로다!”
난공(蘭公)이 또한 웃으며 조금 부끄러운 빛을 띄었다.
역암(力闇)이 “선세에 홍무(洪武) 연간에 여요(餘姚)로부터 항(杭)에 옮긴지 지금 13세(世)인데, 일찍 두 거인(擧人)이 있을 뿐이고, 원조(遠祖)는 있으나 감히 반원(攀援)하지 못한다.”
내가 “이는 무슨 까닭인가?”
난공(蘭公)이 “역암은 자릉(子陵)의 후이니 감히 반원(攀援)하지 못한다 함은, 곽숭도(郭崇韜)가 될까 두려워함이다. 또 동국(東國)은 본래 기자(箕子)의 나라이다. 성인의 사는 곳에 가까우니 마땅히 두 분의 식견이 고원하여 일체 문인(文人)의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내가 “두 분이 모두 형제가 있는가?” 하니, 있다고 하였다.
내가 “형제는 몇 사람인가?”
역암이 “한 형이 있다.”
난공(蘭公)이 “구봉 선생(九峰先生)이니, 이름은 과(果)이다. 큰 명사이니, 바로 역암 형의 영형(令兄)이다. 두 사람을 시인(時人)이 기ㆍ운(機雲)이나 식ㆍ철(軾轍)에 비하고, 시문(詩文)의 큰 문집이 상자에 가득 차 있다. 우리 마을 오서림(吳西林) 선생과 더불어 극히 좋아하고 나이 40여에 고아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심상한 제생(諸生)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동기간(同氣間)에 이러한 사우(師友)의 익(益)이 있으니 그 즐거움을 알 수 있다. 청컨대 서림 선생의 덕행의 대략(大略)을 말해 주오.”
난공(蘭公)이 “은거(隱居) 수도(修道)하여 일없이 성부(城府)에 들지 않고 달관(達官)이 와 뵙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준거(峻拒)하고, 어떤 사람이 시랑(侍郞) 뇌현(雷鉉)과 통정관(通政官) 전유성(錢維城)과 함께 모두 먼저 방문하고 저서(著書)를 구경하려고 해도 마침내 얻지 못하였다. 우리 마을의 전배 가운데 고상한 선비로서 서개(徐介)ㆍ왕풍(汪諷)ㆍ왕증상(王曾祥) 같은 몇 사람이 있는데 역시 모두 유속(流俗)을 따르지 않고, 능히 스스로 탁연하여 불후(不朽)하는 자이다. 서ㆍ왕(徐汪) 두 사람은 벼슬한 일이 없는 선비로서 정국이 바뀐 뒤에 세상을 피하고 벼슬하지 않고, 왕 수재(王秀才)는 30여에 곧 과거보는 일을 버리고 시(試)에 응하지 않았다. 그 문장과 인품이 탁연하여 전할 만하다.”
오후에 두 사람이 각각 떡과 과일 두어 그릇으로써 탁자 위에 놓고 권하며, “이것은 항주(杭州)에서 가지고 온 것인데, 과실은 귤병(橘餠)과 용안(龍眼)과 건포도(乾葡萄)의 속(屬)이요 떡도 또한 향기롭기가 북경에서 만든 것보다 낫다. 먼저 스스로 대략 맛보고 곁에서 권하였다. 차(茶)는 처음부터 쉬지 않고 따르는 데 성의가 애연(?然)하였다.
내가 “동정호(洞庭湖)에서 귀향(貴鄕)까지 거리가 멀지 않은가?”
역암이 “동정(洞庭)은 호광(湖廣)에 있으니 폐지(?地)와의 거리가 천 리나 된다.”
내가 “그러면 경사(京師)에서 상거가 얼마인가?”
역암이 “천 리이다. 또 폐지(?地)가 남해에 빈(瀕)하니, 귀국의 해로(海路)와 얼마나 될 것인가?”
내가 “두 땅이 다만 한 바다를 끼고 있어, 복건(福建) 상선이 또한 우리 나라에 표류하여 오는 것이 많으니 항주(杭州)가 또한 심히 멀지 않은 듯하다.”
평중(平仲)이 “귀처는 ‘삼추(三秋)에 계수나무요 십리(十里)에 연꽃이다.’ 하는데, 그 풍물(風物)이 지금도 예와 같은가?”
난공이 “다만 이뿐이 아니라 서호(西湖)의 풍물은 천하의 제일이다. 수심이 1~2장(丈)으로 맑기는 밑바닥을 볼 수 있고 비록 평ㆍ조ㆍ사ㆍ석(萍藻沙石)이라도 역력히 보인다. 사산(四山)이 모두 평평하여 그다지 높지 않고, 사현당(四賢堂)이 있는데 당 나라 이필(李泌)과 백거이(白居易), 송 나라 소식(蘇軾)과 임포(林逋)를 제사[祀]한다. 우리 황상(皇上)이 4차나 임행(臨幸)하여 백폐(百廢)가 다 닦아져, 옛날에 비하여 더욱 장려하고, 그 땅에 소제(蘇堤)등 십경(十景)이 있고 또 수십 경(景)이 있으니, 비록 호수 둘레[湖?]는 40리에 불과하나 기봉(奇峰)과 영수(靈岫)를 말할 수 없고 호중(湖中)의 제방이 20리나 되는데 양 언덕에 모두 복숭아와 버들을 재배한다.”
평중(平仲)이 “두 분과 더불어 나귀를 몰고 그 사이에 유영(遊詠)하고 싶지만 그럴 수 있어야지?”
두 사람은 모두 웃었다.
내가 “호수가 장마지는 때에도 민가에 해(害)를 끼치지 않는가?”
역암(力闇)이 “항주부터 하로는 수리 사업이 되어 있어서 물을 저장하고 방출하는 것을 때에 맞춰 하기 때문에 해를 끼치는 곳이 없다.”
내가 “장요미(長腰米)는 귀처(貴處)에서 나는가?”
난공(蘭公)이 “그렇다. 우리 고향은 풍속이 유순하여 식물(食物)도 경사(京師)와 크게 같지 않다.”
내가 “풍속(風俗)의 후박(厚薄)이 어떠한가?”
난공(蘭公)이 “지방에 수민(秀民)이 많아 현송(絃誦)의 소리가 서로 들린다. 다만 속상(俗尙)이 부화(浮華)하여 순박(淳朴)함이 적을 뿐이다.”
역암(力闇)이 “귀처(貴處)는 풍속이 극히 순고(淳古)하지요?”
내가 “산천이 험애(險隘)하고 인민이 거개 빈곤하다. 다만 좀 예속(禮俗)을 따르기 때문에 옛부터 중국도 소중화라고 불러 주었다.”
난공(蘭公)이 “귀국의 국사(國史)를 지니고 온 것이 있는가?”
내가 “있지 않다.”
난공이 “얻어볼 수 없으니, 가석하다.”
내가 “꼭 그 대략을 알고 자하면 마땅히 그 대개를 총기(總記)하여 써드리겠다. 제공의 과거 기일이 멀지 않아서 응시 준비에 바쁘실 텐데 오래 앉아 번요(煩擾)하게 폐를 끼쳐 미안하다.”
모두 손을 저으며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기에 와서 본래부터 이를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그러면 시험에 합격하려고 하지 않는가?”
역암(力闇)이 “하려고야 하지만 천명(天命)에 맡긴다.” 또, “저희들은 명리에 전심(專心)하는 자가 아니다.”
난공(蘭公)이 나에게 “무슨 벼슬에 있는가?”
내가 “맨몸으로 직이 없고, 한번 중국을 보고자 하여 삼촌의 공사(貢使)의 길[行]에 따라왔다.”
난공(蘭公)이 “선생이 양반으로서 벼슬을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입신행기(立身行己)하는 군자일 것이다.”
내가 웃으며 “재주 없고 학식 없으니 벼슬이 저절로 오지 않는다.”
평중(平仲)이 “지금 두 분의 덕의(德儀)를 접하니 더욱 중화인물의 따를 수 없음을 느낀다.”
난공(蘭公)이 “중화가 문물의 나라라 하나 명예와 공리를 추구하는 자가 태반이다.”
내가 “우연히 만나 즐겁게 이야기하니 깊이 나의 소원에 흡족하다. 이 뒤로 어떻게 더 만나볼 수 있겠는가?”
난공이 “신민(臣民)으로서 외교(外交)할 수 없으니 아마 다시 양회(良會)를 도모(圖謀)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이것은 전국(戰國) 때의 말이다. 지금 천하(天下)가 통일되어 하나이니 어찌 피차의 혐(嫌)이 있겠는가?”
난공(蘭公)이 “기뻐하며 천자(天子)는 천하로써 일가(一家)를 삼거던, 하물며 귀국이 예교(禮敎)의 나라로서 제국(諸國)의 어른이 되는데 마땅히 이러해야 하지요, 속인(俗人)의 의논을 어찌 족히 이르겠는가? 천애(天涯)의 지기(知己)로 애모(愛慕)하기 끝이 없는데 어찌 중외(中外)로써 피차를 나누겠는가? 혹 다른 때에 미관(微官)을 얻어가지고 동방(東方)에 봉사(奉使)하면 마땅히 댁에 찾아가 뵈겠다. 가슴속에 간직한 생각을 어느 날인들 잊을 손가!”
내가 “저희들이 돌아갈 기한이 아직 남은 날이 있는데 어찌 차마 영영 작별할 수 있겠는가?”
난공이 “교정(交情)의 고의(古誼)는 감명(感銘)하여 잊지 못하겠다. 혹 와주실 수 있으면 다시 찾아 주시어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내가 “저희들이 오기는 용이하겠으나, 다만 여러분의 계신 곳에 불편함이 있을까 걱정된다.”
난공이 “마땅히 길을 쓸고서 기다리겠습니다. 귀관(貴館)에 일찍이 중화인사(中華人士)가 찾아온 일이 있는가? 귀관(貴館)에 가기도 그다지 힘들지 않을 테지요.”
내가 “전부터 피차에 심방하는 것을 남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마땅히 방금(邦禁)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난공이 “귀관(貴館)이 어디 있는가? 명일에 꼭 가서 찾아뵙겠다. 황성(皇城) 안에 있을 것 같으면 가기 불편(不便)할 것이다.”
내가 “정양문(正陽門)안 동쪽 성 밑 반 리쯤에 있고, 관 안에 아문(衙門)이 있으니, 먼저 알려 달라. 조금도 염려할 것 없다.”
역암이 “평생에 일찍 왕공대인(王公大人)을 찾아가 본 일이 없고, 또 귀관 대인께서 알면 불편하게 여길까 염려된다.”
내가 “우리들의 대인이 한 번 보기를 원한다. 다만 형적이 우리들과 달라서 감히 일부러 청알(請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와 주신다면 이것은 그가 크게 바라는 바인데 어찌 불편할 리가 있겠는가?”
내가 “아문이 만일 막는 일이 있으면 우리들이 마땅히 앞당겨 먼저 나와 문 밖에서 기다리겠다. 깨끗한 장소를 택하여 다시 하루의 모임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
난공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다 하니 명일에 꼭 찾아뵙겠다. 또 아문은 무슨 벼슬인가?”
내가 “제독(提督)ㆍ대사(大使)ㆍ통관(通官) 등 벼슬이 있는데, 전부터 관인(官人)ㆍ수재(秀才)에게 모두 출입을 허하니, 이는 조가(朝家)에서 우리를 내복(內服)과 같이 여기고 외이(外夷)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중이 “관(館)에 머물기 한 봄을 지나도 날마다 접하는 것이 모두 장사치더니 이제 와서 말씀을 듣고 나니 쾌히 깨우침이 된다.”
역암이 “이미 서로 친구가 되었으니 겉인사는 그만둡시다. 또 이후로는 다만 진정의 말만 합시다.”
평중이 “날이 이미 늦었고 복부(僕夫)가 돌아갈 것을 재촉하니 부득이 물러가야 하겠다.”
난공이 “귀복(貴僕)이 인정을 모르니 꾸짖어 물리쳐 주시요.” 하여 피차가 모두 크게 웃고 서로 손을 잡고 차마 서로 놓지 못하고 드디어 서로 이별하고 나왔다. 문에 나오매 두 사람이 빠른 소리로 조금 있으라더니, 엄생이 《감구집(感舊集)》 전질을 가지고 와서 선사하였다. 내가 감사의 말로서 “책을 가지고 가면 남들이 무어라 할까 두렵다.” 하니, 둘 다 말이 “사온다고 하면 무엇이 방해될 것이 있는가?” 하였다. 나는 청음시(淸陰詩)가 그 중에 있으니 불가불 한 번 사행(使行)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드디어 평중과 더불어 상의하여 마부로 하여금 품속에 간직하고 관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의 내방의 약속을 말했다. 나는 생각하기를 만일 먼저 아문(衙門)을 통하지 않으면 혹 그 임시 저지를 당할지도 모르니 형세상 마땅히 미리 주선해 두어야 하겠다 하였다. 부사(副使)도 그렇게 생각하고 비장(裨將) 안세홍(安世洪)으로 하여금 당역(堂譯)에 의논하여 저지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세홍은 어렵지 않다고 힘써 말하며 자기가 할 테니 염려할 것 없을 것이라 하였다.
4일 이기성(李基成)이 와서 “엄(嚴)ㆍ반(潘) 두 분이 온지 이미 오랜데 어찌하여 청하여 들게 하지 않으시오?” 하였다. 나는 그가 일찍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막연히 대답하기를, “어제. 식후에 입성(入城)한다 했으니 아직 이르다.”고 하였다. 기성이, “나의 마부가 관외(館外)에 나가 양생(兩生)이 옥하교(玉河橋) 곁에 앉았음을 보고 급히 와서 보고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듣고 비로소 크게 놀라 평중(平仲)으로 하여금 먼저 나가보고 만류하라 하고, 혹 저지를 당해서 곧 돌아갈까 두려워서 부사방(副使房)에 가서 말하여, 안세홍(安世洪)으로 하여금 주선하여 들어오게 해달라고 청한 즉, 아문이 그때 별안간 뜻밖의 사단(事端)이 있어 모든 통관(通官)이 바야흐로 매우 성이 나서 앉아 있어, 당역배(堂譯輩)는 모두 입을 열지 못한다 하므로, 사람을 시켜 평중에게 전하여 근처의 상점방에 맞이하여 앉히고 기다리라 하였다. 조금 있다가 안 비장이 “자기가 그들을 알므로 통관(通官)에게 말하여 안내해 들어오게 하였다.” 한다. 나는 바야흐로 방안을 소제하고 기다리는 중인데, 마부(馬夫) 덕유(德裕)가 와서 “두 사람이 이미 들어왔다.” 하기에 나는 급히 가 맞이한 즉, 이미 상사(上使)방에 인입(引入)하였다.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통역시켰으나 남방의 어세(語勢)가 북경(北京)과 크게 달라 대부분 알아듣지 못하였다. 대략 멀리 온 손님을 위로하는 뜻을 말하고, 과거 기간과 과거 제도에 대해 물었다. 내가 상사(上使)에게 청하여 나의 방으로 인도해 왔다. 캉[坑 온돌방] 아래에 이르러 양생(兩生)이 신을 벗고 올라앉았다. 좌정한 뒤에, 내가 “문밖에 나가 마중하지 못하였고, 또 아문(衙門)에 일이 있어서 같이 온 종자를 오래 길곁에 머무르게 하여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하니,
모두 “괜찮습니다.”고 하였다.
내가 “기왕 수고스럽게 와 주셨으니 오늘은 하루 종일 즐겁게 놀다 가시지요.” 하였다.
난공이 “다만 모두 일이 바쁘실 텐데요.”
내가 “비소(鄙所)에는 다른 용무(冗務)가 없으니 종일토륵 마음놓고 이야기하기를 청합니다.” 하자,
모두 “매우 좋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때에 방관(方冠)에다 광수(廣袖)의 상의(常衣)를 입었다.
난공이 “이는 곧 수재(秀才)의 상복(常服)입니까?”
내가 “그렇습니다.”
난공이 “제도(制度)가 고아하다.”
내가 “우리들의 의복은 모두 명조(明朝)의 유제(遺制)다.” 하니 양생(兩生)이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역암이 통역관 김한경(金漢慶)을 보고 “김공(金公)은 문아(文雅)한 선비신데, 전일 비판점(碑版店)에서 만났을 때 원조(遠祖)가 자릉(子陵)이냐고 물은 사람이 바로 족하(足下)인가?”
김역(金譯)이 “그렇다.”
내가 “자릉(子陵)은 과연 당신의 원조(遠祖)인가?”
역암이 “그렇다.”
내가 “세보(世譜)가 있는가?” “있다.”
하였다. 나는 비로소 어제 감히 ‘반원(攀援)하지 못한다.’ 한 말은 이를 가리킨 것임을 알았다.
내가 “중국의 배례(拜禮)는 재배(再拜)인가? 사배(四拜)인가?”
난공(蘭公)이 “천자(天子)나 성인(聖人)을 인견(引見)할 때 아홉 번 절하고, 보통 하는 예에는 사배(四拜)이고 부모(父母)에게는 팔배(八拜)이다.”
역관 장택겸(張宅謙)이 “지금도 성리(性理)의 학자로서 진백사(陳白沙)와 왕양명(王陽明) 같은 학자가 있는가?”
난공이 “국조의 대유(大儒)로서 육 청헌공(陸淸獻公) 휘(諱)는 농기(?其)니 묘(孔廟)에 배향(配享)하고, 그 나머지는 탕 문정공(湯文正公) 빈(斌)과 이승상(李承相) 광지(光地)와 위상추(魏象樞)는 모두 대유(大儒)이고 드물게 보는 현자(賢者)이다.”
또 묻기를 “명(明)대에는 주ㆍ육(朱陸)의 학(學)이 상반(相半)하더니 지금도 그런가?”
난공이 “지금은 천하가 모두 주자(朱子)를 따른다.” 하였다.
내가 혼례 때의 절하는 법을 물었다.
난공(蘭公)이 “한인(漢人)은 사배(四拜)한다.” 또 “이 절은 부부(夫婦)가 서로 절함이 아니라 같이 천지(天地)와 조선(祖先)에게 절하는 것이다.”
내가 “천지에 절함은 아마 주자(朱子)의 예(禮)가 아닐 것이다.”
역암이 “가례는 준행하는 자가 적다. 이는 모두 속례(俗禮)이다.”
난공이 “사당에 참배한 뒤에 구고(舅姑)를 보고 팔배례(八拜禮)를 행한 연후에 부부가 같이 절하는 데 각각 재배(再拜)를 한다. 이것은 항주 풍속이며, 다른 곳은 다 그렇지 않다.”
내가 “전안례(奠?禮)가 있는가?”
역암이 “항주에서 유독 이 예를 폐하니 가소롭다.” 또 농담으로 말하기를,
“친영(親迎)을 하지 않아도 처(妻)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혼인 때에 남자가 여자에 먼저 가는가?”
난공이 “남가(男家)에서 먼저 채여(彩轝)와 명첩(名帖)을 갖추어 왕영(往迎)하나 다만 신랑은 친영(親迎)하지 않는다.”
내가 “중국은 상가(喪家)에서 음악을 하여 시(尸)를 즐겁게 한다 하는데, 극히 해괴하다.”
난공이 “이는 모두 습속이 고쳐져 그런 것이니 고례(古禮)가 폐(廢)해진지 이미 오래다.”
내가 “서림(西林) 선생 집에서도 이런 예를 쓰는가?”
난공이 “홀로 선생만은 그렇지 않다. 이 밖에 고례를 강(講)하는 자도 있다.”
내가 “존댁에서도 서림(西林)의 예(禮)를 좇는가?”
난공이 “역시 세속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 중 예(禮)에 가까운 것을 택하여 행한다.” 또, “서림 선생이 상중에 있을 때 마늘을 먹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고, 손을 보지 않고 시문을 짓지 않고 금술(琴瑟)을 타지 않으며, 장제(葬祭)의 예와 의관에 이르기까지 세속과 전혀 달랐다. 그 의관은 국조(國朝)의 제도(制度)를 따르고 상복(喪服)은 모두 명제(明制)를 따랐는데, 국조에서 상예(喪禮)에 대해서는 민간에 반포(頒布)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이 독자적으로 행한 것이다.”
부사(副使)가 주방으로 하여금 조반을 시켜왔다. 두 분이 “밥 먹을 것 없다. 이미 조반을 먹었으니 아직도 배가 부르다.” 하였다.
내가 “기왕 종일토록 놀기로 하였으니 대략 몇 숟가락 들고 겸하여 저희들의 호의로 받아 달라.” 하며 드디어 밥상을 드리고, 두 분의 종자(從者)에게도 아울러 각각 음식을 주었다.
평중이 “비박(菲薄)한 찬이 모두 입에 맞지 않을 터이니 도리어 깊이 부끄럽소.”
난공이 “과한 비용으로 성찬(盛饌)을 차려주어 매우 불안하다. 감사하다.” 하였다. 우리 나라 밥이 절미(浙米)와 한가지여서 자못 배불리 먹고 치웠다.
역암이 이르되 “금방 조반을 먹고 왔는데, 다시 밥을 주시니 감히 배불리 먹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술에 취하고 또 덕에 배부르니 이른바 인의(仁義)에 포식함이다.”
난공이 “귀처(貴處)의 조복(朝服)은 모두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인가?”
내가 “그렇다. 그리고 상의(上衣)와 하상(下裳) 금관(金冠)과 옥패(玉?)의 제(制)가 있다.”
난공이 “국왕(國王)은 무슨 관(冠)을 쓰는가?”
내가 “면류(冕旒)이다. 편복(便服)의 관(冠)도 있다.”
역암이, 면류(冕旒)와 각 관제(冠制)를 그려내며 묻되 “이와 같은 제도인가?”
내가 “그렇다. 중국의 극장무대에서 오로지 고시(古時)의 의모(衣帽)를 쓰니, 생각건대 이미 익히 보았을 것이다.”
난공이 “여기 와서 무대극을 보았는가?”
내가 “보았다.”
난공이 “무대극이 무슨 좋은 데가 있는가?”
내가 “비록 떳떳하지 않은 노름이지만 나는 그윽이 취(取)함이 있다.”
난공이 “무엇을 취(取)하는가?” 물었는데, 나는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난공이 “어찌 다시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본 것이 아닌가?” 하고 곧 지워버렸다. 내가 웃으면서 끄덕거렸다.
또 내가 “중국(中國)에 들어와 보니 지방의 크기와 풍물(風物)의 성(盛)함은 일마다 기쁘고 건(件)마다 정묘하나 유독 머리깎는 법은 보기에 사람으로 하여금 어색하게 하였다. 우리들은 해외의 작은 나라에 살아서 우물에 앉아 하늘 보는 격이라, 그 생활이 즐거움이 없고 그 일이 슬프기는 하나, 다만 두발(頭髮)을 보존하고 있으니 크게 즐거운 일이 된다.” 하니, 양생이 서로 돌아보며 말이 없었다.
내가 “내가 두 분에게 진실로 정분(情分)이 없으면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하겠는가?” 하니, 모두 끄덕였다.
역암이 “이른 새벽에 반드시 머리를 빗는가?”
내가 “나는 과연 날마다 머리를 빗으나 다른 사람은 반드시 다 그렇지 못하다.”
평중이 “부대인(副大人)께서 나에게 두 분을 뵙겠다고 청하십니다.”
난공이 “예(禮)가 마땅히 봉배(奉拜)하여야 하니 우리들이 가 뵙겠다.” 하고 드디어 같이 부방(副房)으로 갔다. 계부(季父)와 상사(上使)가 모여앉아 그들과 필담(筆談)을 하였다.
반생(潘生)이 수미(首尾)로 집필하는데 조정(朝廷)ㆍ관방(官方)ㆍ서호고적(西湖故蹟)과 기타 수천 리 밖의 일을 받아 적는데 다 문장이 이뤄지고 막힘이 없었다. 말이, 의관과 전조사(前朝事)에 미치매, 부사(副使)가 짐짓 박절하게 물어서 많이 시휘(時諱)에 저촉되어 응수(應酬)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말마다 본조(本朝)를 찬양하고, 사이사이 농담을 섞어가며 반점(半點)의 빈틈도 없으면서도, 말 밖의 뜻은 절로 가리지 못하였다. 그 사리의 당연함을 따라 경각의 입담(立談)하는 사이에도 주선하고 덮어씌우는 모양이 또한 기재(奇才)였다.
묻기를 “항주(杭州)에도 만주(滿洲)가 있는가?” 하니,
난공이 “만주가 천하에 퍼져 생치(生齒)가 날로 번성하고 각각 기관(旗官)이 있어 통령(統領)한다.” 하였다. 남방의 악기(樂器)를 물으니,
난공(蘭公)이 “고기(古器)는 모두 있으나 곡조가 북방과 동떨어지게 전연 다르다.” 하였다.
역암이 “북음은 호악(胡樂)과 석여서 모두 금석(金石)의 살벌(殺伐) 한 소리다.” 하였다가 곧 지워버렸다. 오후에 또 과일과 떡 등으로 대접하니 대략 맛보고 치웠다. 법금(法禁)이 심히 엄하므로 우육을 먹지 못하였다. 난공이 부사(副使)의 전형(典型)이 이태백(李太白)의 화상(畵像)과 흡사하다 하여 흠경(欽敬)하기를 이기지 못하였다.
부사가 “이공(二公)이 묘년(妙年)으로 모두 안경(眼鏡)을 낌은 무슨 까닭인가?”
난공이 “모두 눈이 나빠서 이를 끼지 않으면 무중(霧中)의 꽃 보는 것 같다.” 하였다. 장차 파할 때 부사가 쓰기를, “뜻밖에 만나 좋은 이야기 들었는데 후에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 바라건대, 봄 과거에 합격하고 기거(起居)를 보중하여 원인(遠人)의 생각을 위로해 주기 바란다.”
난공이 “고의(高誼)에 감복한다.”
하고, 읍(揖)하고, 역암과 창황히 문을 나오니 곁에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암연히 이상하게 여겼다.
나는 곧 따라나가 옷자락을 붙잡고 다시 청하여 나의 방에 이르러 좌정(坐定)하였다.
내가 “해가 아직 어둡지 않았으니 청컨대 조금 앉아 서화(?話)하자.” 하니,
난공이 “모처럼 생각해 주시니 마땅히 따라 하루를 모시겠습니다.”
내가 “우리들은 원래 나라의 사명을 띈 것이 아니고, 여기에 온 것은 다름아니라 다만 천하의 기사(奇士)를 만나 한 번 금포(襟抱)를 토론하고자 한 것인데, 돌아갈 때가 이미 박도하여 장차 헛걸음 하게 될 뻔했는데 문득 두 분을 만나, 일면 오랜 사이처럼 친하게 되어 요행히 큰 소원을 이루었으니, 참으로 뜻있는 자는 일이 마침내 이룬다는 말이 맞습니다. 다만 강역(彊域)이 한계가 있고, 다음에 만날 기약이 없으니 한스럽다. 돌아보건대, 이 애모하는 정성을 어느 날인들 잊어버리겠는가?”
난공이 다 보고 처상(凄傷)함을 금치 못했다. 역암도 감상(感傷)하기를 마지아니하며 “우리는 솔직한 성질의 사람인데 참된 지기(知己)를 아직까지 만나지 못하였다. 오늘 이 모임에서 서로 갈라지게 되니 절로 코허리가 시고 마음이 상한다. 이로써 더욱 중국은 박(薄)하고 귀국의 후(厚)함은 사람을 감격시킬 만함을 알 수 있다.” 하였다.
평중이 “옛적에도 객지에서 서로 만나 문득 지기(知己)가 된 자가 있기는 했으나 어찌 우리 네 사람처럼 간담을 서로 비치는 사람이 있었으랴. 그런데 한 번 이별한 뒤에는 길이 참상(參商)의 별이 되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터이니, 흩어짐에 다달아 눈물이 흐름을 어찌 면할 수 있으리오.”
역암이 “만일 서로 만날 기약이 있다면 이같이 감상함에 이르지 않으리라.”
평중이 “붓으로 다 쓸 수도 없었으니, 다만 말이 없을 뿐이로다.”
역암이 “이후 서로 만날 날이 어느 때이겠는가?”
내가 “아무래도 이별해야 할 것이라면 애당초 서로 만나지 않았던 것만 같지 못하다!”
난공이 붓으로 ‘불여초불상봉(不如初不相逢)’이란 여섯 자에 동그라미를 치고, 서운해서 흐느꼈다. 역암도 몹시 비통한 기색이었다.
이때 상하(上下)의 방관(傍觀)하는 사람들이 놀래어 얼굴빛이 달라지며, 혹은 마음이 약해서 그렇다 하고 혹은 다정하다 하고 혹은 강개(慷慨)하고 뜻있는 선비들이라고 하여, 여러 말이 한결같지 않았다. 요컨대 이를 모두 겸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내가 이르되 “옛말에 이르기를, ‘울자 하니 부인에 가까워서 못 운다.’ 하였는데, 비록 그 정이 절로 그렇지 아니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난공의 이 모양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난공이 “대방가에게 웃음거리가 돼도 양해해 주실 줄 아나, 외인(外人)이 들으면 진실로 일소(一笑)할 가치도 없게 여기리라.”
역암 “나에 있어서도 실로 코허리가 시어짐을 금할 수 없다. 오직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뿐이다. 실로 평생에 일찍 이같은 경우를 만난 일이 없다.” 하였다.
두 사람이 현금(玄琴)을 보고 모두 한 번 듣기를 청하였다. 이때 평중이 바야흐로 시령(詩令)을 발(發)했다. 내가 “저는 시를 못하니 거문고로 대신하겠다.”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웃었다. 드디어 줄을 고르고 평조(平調)를 탔다. 난공이 듣고 또 울음을 머금고 오열(嗚咽)하였다. 나는 그가 감상(感傷)을 더할까 염려하였고 나도 또한 속이 좋지 않아서 한 곡으로 그치고 “동이(東夷)의 토악(土樂)이라 군자로서 들을 만한 것이 못된다.” 하니, 난공이 눈물을 닦고 대답하기를, “한 번 속이(俗耳)를 씻었도다. 탄법(彈法)은 비록 다르나 음절은 같은 것이다.”
평중이 “남방의 소리도 오히려 추하고 속되다 하는데 하물며 동번(東藩) 예맥(穢貊)의 소리리요,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한다. 홍우(洪友)의 탄금(彈琴)은 특히 그 정(情)을 통(通)한 것이나 그 뜻도 또한 호방하였다.”
역암이 “지법(指法)이 비록 같지 않으나 소리는 매한가지다. 제등(弟等)이 비록 음(音)을 알지 못하나 한 번 쟁파(箏琶)의 속된 귀를 씻었도다.”
평중이 “지금 반우(潘友)의 개제(豈弟)와 엄형(嚴兄)의 호준(豪俊)을 보았고, 제도 또한 뜻이 있는 사람인데, 다만 필담(筆談)으로만 정을 통하고 직접 담화를 주고받지 못하니 한탄스럽다.”
역암이 “진실로 그렇다. 만일 직접 충곡을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유쾌할지 모르겠다.”
이때에 난공이 아직도 눈물 흘리기를 마지않았다. 내가 손을 잡고 위로하니, 난공이 또한 내 손을 잡고 “제 두 사람이 연경에 온 지 10여 일인데 아무런 한 기인(奇人)과 악수(握手)하고 지기(知己)를 칭함을 보지 못했고, 곧 남방(南方)에 있어서도 또한 일찍 간(肝)을 헤치고 담(膽)을 쏟는 자가 있지 않았는데, 불의에 두 형을 만나 천만다행으로 여기었던 터인데 늘, 이제 한번 헤어지면 또 서로 만날 기약이 없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감읍(感泣)케 한다.”
내가 “강부로서 울음섞인 소리는 할 것 없는 것이요, 나의 스승은 청음(淸陰)의 손자인데 일찍 나의 집에 와서 이름을 담헌(湛軒)이라고 지어 주었소. 나의 집은 심히 소박하고 야하나 망령되이 팔경(八景)을 모아 놓았으니, 만일 한 형의 기(記)와 한 형의 시(詩)를 얻으면 다행이겠소.”
난공이 “엄형이 문(文)을 짓고 제는 마땅히 시(詩)를 하겠소.”
평중이 “제도 또한 바야흐로 한 초옥을 짓고 양허당(養虛堂)으로써 제(題)하였으니, 두 벗이 또한 능히 한 문(文)과 한 시(詩)를 주겠는가.” 하니, 모두 허락했다.
내가 “허생승(許生昇)의 화폭을 내보이며 한 벗이 떠날 때 이 그림을 주었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자못 묘수라 일컬으니, 원컨대 제품(題品)을 얻고 싶소.”
난공이 “화격(畵格)이 매우 좋은데, 그린 꽃이 모두 동국에 있는 것인가?”
내가 “그렇다.”
평중이 “두 형의 거주를 다시 자세히 알려 주기 바란다.”
역암이 “천거(賤居)는 항주성(杭州城) 안 동성(東城) 태평문(太平門)속 내시교(萊市橋)이고, 반거(潘居)는 항성(杭城) 대가(大街) 삼원방(三元坊) 북수(北首)이니, 땅 이름은 수항구(水港口)이다.”
평중이 “옛말에 ‘남아가 어디선들 서로 만나지 못할까’라고 했으니, 이후에 혹 다시 만날 때가 있겠지.”
역암이 “중국의 장사하는 자로서 귀국에 가는 사람이 있으니 그런 사람을 통하면 서신을 통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편지를 부친다면 어디로 부칠까?”
내가 “해마다 진공(進貢)이 있으니 혹 이편에 붙일 수 있겠고 그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두 형이 만일 서울에 있다면 해마다 통신(通信)하기 심히 쉬우나, 다만 항주(杭州)에는 하기 어려우니 피차에 다시 생각합시다. 여기는 아문(衙門)이어서 두 형은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좋으니, 제들이 틈을 타 다시 가서 뵙겠소. 다만 가기 전에 날마다 통신(通信)하면 된다.” 하였다. 복인(僕人)이 와서 돌아가기를 독촉하였다.
내가 웃으며 “이것은 어제 우리들 경우와 같도다.”
두 사람이 모두 웃으며 꾸짖어 물러나게 하였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다. 아문(衙門)이 이상하게 여길까 염려하여 내가 먼저 그 일찍 돌아갈 것을 청하고 문안에까지 갔다.
내가 “아문(衙門)을 번거로이 할까 두려워 감히 원송(遠送)을 못한다.” 하고 읍을 하고 이별하니, 모두 서운해서 차마 떨어지지 못하였다.
5일 세 방(房)에서 모두 양생(兩生)에게 편지가 있고, 모두 선사하는 물품이 있었다. 덕유(德裕)로 하여금 가서 전하게 하고 평중이 또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전했다. 간 사람이 돌아오니 철교(鐵橋)가 그 편에 윤인비(尹寅碑)를 부송해 왔다. 작일에 청했기 때문이다. 나는 팔경이 아직 구초(構草)되지 못하였으므로 조금 늦게 편지를 써서 다시 덕유(德裕)에게 보내고 동시에 화전(花箋)두 묶음과 붓 넉 자루와 먹 여섯 자루와 부채 여섯 자루를 보내면서 편지에,
“밤사이 안녕하십니까? 용(容)은 동이(東夷)의 속된 사람입니다. 재주 없고 학문도 없어 세상에 버림받는 물건으로 되어 해우(海隅)에 벽처(僻處)하므로 견문(見聞)이 몽루(蒙陋)하나 다만 읽은 것이 중국의 글이요 우러러 종신(終身)토록 받들려는 것이 중국의 성인입니다. 그래서 한번 중국에 와서 중국의 사람과 벗하고 중국의 일을 논하려 했으나 강역(彊域)에 국한되어 스스로 통할 길이 없다가 요행으로 숙부의 봉사(奉使)의 행차로 인하여 멀리 집을 떠나 수천 리의 역(役)을 사양치 않은 것은 실로 이런 숙원이 있은 까닭입니다. 산천성곽(山川城郭)의 구경으로 이목(耳目)의 쾌를 느끼는 것은 진실로 그 여사(餘事)입니다. 다만 입경(入京)이후에 행지(行止)가 자유를 얻지 못하고 또 인진(引進)해 주는 이 없어 찾아보려도 찾아볼 곳이 없어서 매양 시가와 도사(屠肆) 사이에서 방황하고 비가(悲?)와 강개(慷慨)의 자취를 상망(想望)하면서 그윽이 스스로 그 불행하게도 뒤늦게 난 것을 슬퍼하였더니, 뜻밖에 일이 맞아들어 그 사람[其人]이 이에 있고 우연히 서로 만났으니 나의 원(願)이 여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로부터 비록 하루아침에 죽어도 이 생(生)을 허도(虛度)하였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이 비천하고 공소(空疎)한 것이 아마 군자의 마음에 잘 맞지 않을지 모르며, 고산(高山)의 장(章)을 외우고 체두(?杜)의 음(蔭)을 바라도 그것이 한갓 주제넘은 짓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에 성도(盛度)의 포용(包容)을 입어 경개(傾蓋)하기를 옛친구와 같이 하고 헤어짐에 정다움이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굴빛을 동(動)하게 하였습니다. 아아! 말세라, 쇠박(衰薄)하여 벗 사귀는 도(道)가 망한지 오래어서, 대해서는 아첨하고 돌아서서는 조소하여 도도(滔滔)히 다 그러한데, 진실로 천도(天道)가 덕을 좋아하여 선유(善類)가 끊이지 아니하니, 구야(九野)의 음위(陰威)가 중천(重泉)의 일맥(一?)을 상(傷)하지 못하는 것이로다.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음에 비록 천리의 밖이고 백세(百世)의 뒤일지도 또한 족히 서로 느끼는 것이거든, 하물며 내 몸으로 친히 봄에 있어서랴. 기문(記文)과 팔경시(八景詩)는 어제 지어 주실 것을 허락받았으므로 대략 그 경개(梗?)를 기록하여 취택하게 하고, 기(記)는 담헌의 기(記)로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허명(虛明)하고 소광(昭曠)하여 외물(外物)의 누가 없음이 이 담(湛)의 대의(大意)입니다. 청컨대 격언(格言)을 주시어 정침(頂針)을 삼게 하여 주시고 빈 과장이나 지나친 찬양 같은 문인의 상투는 일절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저의 사문(師門)은 청음 선생(淸陰先生)의 현손(玄孫)이고 나이는 65이고 유일(遺逸)로 현재 국자 좨주(國子祭酒)에 임(任)하고 임금이 자주 불러도 나가 벼슬하지 않고 한거(閒居)하며 교수(敎授)하니, 배우는 자가 높여 미호 선생(渼湖先生)이라 합니다. 어제 바빠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언급합니다. 과거시험이 멀지 않은데 이런 것으로 귀찮게 하여 공부에 방해될까 두렵습니다.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일간(日間)에 연(連)하여 바쁜 일이 있으나 틈을 보아서 한 번 나아가 뵙겠습니다. 이 뒤에도 이어 자주 문안드리겠습니다. 다만 서독거래(書牘去來)는 형에게 마침내 누될 염려가 있으니 모름지기 문자(門者)를 경계하여 특별히 신중하고 비밀을 취하십시오. 손님이 있거던 밖에서 받아두고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함이 좋을 것입니다. 변변치 못한 토산품은 애오라지 조그만 성의 표시이고 겸하여 윤필(潤筆)의 자료로서 드리는 것이오니, 혹시 거절하시면 이는 저를 천하게 보는 것입니다. 모시 비단으로 서로 주고받음은 옛사람이 한 일이니 모름지기 양해하여 주시오. 다만 형의 시와 문(文)만 얻으면 이는 궁려(窮盧)의 중보가 되는 것이니, 만일 객지의 주머니 속에 억지로 회례(回禮)할 생각을 한다면 이는 지기자의 일이 아닙니다. 또한 양찰하소서. 그 팔경소지(八景小識)는 이러합니다.
“산속 정자에서 거문고를 탄다 / 山樓鼓琴
섬속 누각에서 종을 울린다 / 島閣鳴鐘
거울 같은 못에서 고기 구경한다 / 鑑沼觀魚
구름다리에서 달을 구경한다 / 虛橋弄月
연못에서 배타며 신선놀이 한다 / 蓮舫學仙
선기옥형으로 천체를 관측한다 / 玉衡窺天
감실에서 시초로 점친다 / 靈龕占蓍
활터에서 기러기를 쏜다 / ?壇射鵠
집 제도는 사방 두 체[二架]인데 중앙에 당하여 실(室)을 만든 것이 한 채이고, 북은 반 채로서 협실(夾室)을 만들고 동(東)은 반 채로서 누(樓)를 만들고 그 길이를 다하며 서남(西南)은 모두 반 채로서 헌(軒)을 만들고 담헌(湛軒)이라 명칭하였습니다. 서는 그 길이를 다하고 남은 누하(樓下)에 이르는데 위에는 풀로써 덮고 아래는 돌로 쌓았습니다. 사면에 뜰이 있어 말이 돌아다닐 만하고 남에는 모난 연못이 있으니 직경이 수십 보가 됩니다. 물을 끌어들였는데 깊이가 배를 띄울 만하고 환도(?島)를 쌓으니 주위가 십보 가량이 되고 위에 소각(小閣)을 세워서 혼의(渾儀)를 간직하고 연못을 둘러 돌을 쌓아 둑을 만들었는데 뚝 위에가 넓어서 뜰로 쓰고 뜰 주위는 나지막한 담으로 두르고 담 아래에 흙을 모아 계단을 만들고 이것저것 잡화(雜花)를 심었는데, 이것이 집 대강입니다.
동루(東樓)에 산수화 장자를 두어 폭을 걸고 상 위에 두어 장의 현금(玄琴)이 있으니, 그 누를 이름하여 향산(響山)이라 했습니다. 대개 종소문(宗少文)의 말에서 취한 것입니다. 그래서 산루고금(山樓鼓琴)이라고 한 것입니다. 도각(島閣)을 농수(籠水)라 하였는데 대개 두공부(杜工部)의 시를 끊어서 그 뜻을 취한 것입니다. 혼의(渾儀)는 보각(報刻)의 종(鐘)이 있고 또 서양(西洋)의 후종(候鍾)이 있으니 때를 따라 스스로 울므로 도각(島閣)의 명종(鳴鐘)이라 한 것입니다.
그 방소(方沼)는 활수(活水)를 끌어 대니 그다지 혼탁하지 않고, 임원(林園)의 대나무가 물 속에 거꾸로 비쳐 출렁거리며 기묘한 변화를 일으키니, 이름하여 일감(一鑑)이라 하였습니다. 대개 회옹시(晦翁詩)에서 취한 것입니다. 어종(魚種)이 극히 번식하여 큰 것은 영척(盈尺)짜리가 있어 물결을 내뿜고 거품을 뿜으며 수초(水草) 사이에 뛰노니, 시인의 이른바 ‘비(泌)의 양양(洋洋)함이여 가히 기(飢)를 요(療)하리로다.’ 함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감소(鑑沼)의 관어(觀魚)라 한 것입니다.
연못 북쪽 언덕에 나무를 가로놓아 다리를 만들어 도각(島閣)에 통하니 이를 보허교(步虛橋)라 했습니다. 매양 바람이 잦고 물결이 고요할 때면 구름기와 나는 새가 공중에 떠돌며 밤에는 달빛이 물에 비쳐 금파(金波)가 요란하여 사람이 그 위에 걸어가면 황홀하게 무지개를 타고 하늘거리[天衢]에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허교농월(虛橋弄月)이라 한 것입니다. 나무를 깎아 방주(方舟)를 만드니 두 사람이 탈 수 있습니다. 한쪽 머리는 둥글고 크며 한쪽 머리는 뾰죽하고 높은데, 대략 단채(丹彩)를 칠하여 연꽃모양을 만들고 이름하되 태을연(太乙蓮)이라 하니, 대개 상(像)을 해선도(海仙圖) 가운데의 태을연주(太乙蓮舟)를 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방학선(蓮舫學仙)이라 한 것입니다.
혼의(渾儀)의 제작은 대개 선기옥형의 유제(遺制)에서 나온 것이니 일월(日月)의 운행과 성신(星辰)의 전도(纏度)를 이에 나아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옥형(玉衡) 규천(窺天)이라 한 것입니다.
동루(東樓)의 북쪽에 한 감실을 세워 시실(蓍室)을 만들고 이름하여 영조감(靈照龕)이라 하니 대개 고시(古詩)의 ‘영명(靈明)이 위에서 비친다.’에서 취한 것이니 장차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분향하고, 세심(洗心)하여 서의(筮儀)에 의하여 시초(蓍草)를 세워 구할 것이므로 이르되 영감점시(靈龕占蓍)라 한 것입니다.
연못의 동쪽에 돌을 쌓아 단(壇)을 만드니 두서너 사람이 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활쏘기 하는 곳으로 하고 이름하여 지구(志?)라 하니, 대개 맹씨(孟氏)의 말에서 취한 것입니다. 독서하고 남는 시간과 농사짓고 남는 겨를에 마을의 활쏘는 사람을 모아놓고 과녁을 북원(北園)에 세우고 짝으로 나아가 승리를 다투어 서로 즐기니, 그래서 이르되 구단사곡(?壇射鵠)이라 한 것입니다.
저물녘에 덕유(德裕)가 답을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역암 편지에 이르되,
“꿇고 수교(手敎)를 읽으니, 너무 추장(推?)을 받자와 부끄러움을 감히 당치 못하겠습니다. 스스로 자기 뜻을 자술한 곳과, 저를 사랑해 주시는 말에 이르러서는 정이 얼키고 설키어 두세 번 되풀이해 읽으며, 남몰래 눈물이 나옵니다. 아아! 천애(天涯)의 이런 지기(知己)는 천고에 없는 일입니다. 제들은 하리(下俚)한 비인(鄙人)으로 비록 요행히 중국에 나서 교유가 자못 넓으나 아직까지 속마음을 털어 서로 보이고 참되고 정성됨이 오형(吾兄)같은 자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감격의 극한 나머지 손이 다 떨리며 흉중의 울발(鬱勃)한 정은 천만 마디의 말로나 붓으로 다 적어낼 수 없으니, 오직 피차에 묵묵히 이 외로운 심정을 살펴봄이 있을 뿐이외다. 두터히 준 것은 본래 감히 받지 못하겠으나 어른의 일러주시는 말씀을 받들어 삼가 배령(拜領) 하겠습니다. 별도의 시문은 조만간 응수가 조금 덜해지면 곧 우몽(愚蒙)을 다하여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이로써 회답을 하오니, 부디 편안하소서. 편지를 보내며 세 번이나 탄식을 마지못하오니, 행여 스스로 진중하십시오. 갖추지 않습니다.”
난공의 편지에 이르되 “정균(庭筠)은 두 번 절하나이다. 담헌 학장(湛軒學長) 선생 족하에게, 균(筠)은 어제 돌아와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에는 은은(隱隱)히 세 분 대인(大人)과 족하와 김양허 형(金養虛兄)의 모양이 훤하여, 깊이 탄식하기를, ‘해동(海東)은 진실로 군자의 나라요, 몇 분은 더욱 절세의 기인이라’고 했습니다. 아까 수교(手敎)를 읽고 더욱 족하의 고아하여 속됨에서 벗어나 입신하기를 구차스레 않고 뜻함이 심히 커서 중국의 도정절(陶靖節)과 임화정(林和靖)과 같아 천고에 수인에 불과함을 보고, 고풍(高風) 일치(逸致)에 존경함을 더욱 마지못합니다. 또 영사(令師)대인 선생의 경개(梗?)를 보오니, 족히 연원(淵源)으로부터 온데 있음을 알겠으며, 공ㆍ안(孔?)의 낙(樂)을 방불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 더욱 사람으로 멀리 우러러 사모함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깊이 유감되는 바는 각각 천애의 일방에 있어서 능히 자주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고 영사 선생에게 한 번 뵐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비록 중토에 첨거(?居)하나 평생의 지교(知交)가 한두 사람에 불과하여, 엄역암 형(嚴力闇兄)의 밖에 겨우 그 형 구봉 선생(九峰先生)과 오서림 선생(吳西林先生) 같은 분인데 모두, 사사(師事)하고, 그 나머지는 비록 서로 교제하는 자가 백여 인이지만, 모두 지기(知己)로써 가히 스승하거나 법받을 자가 못되는데 지금 족하를 얻으니 실로 만행이외다. 곧 하루 아침에 죽어도 눈을 황천에 감을 수 있겠습니까. 서로 생각함이 더욱 깊으니, 어찌 그 다함이 있겠습니까? 이는 필묵으로 능히 다 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하늘 끝을 바라보며 바람을 향하여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두터이 줌을 절하며 받고, 베풀지 않나이다.” 하였다.
덕유(德裕)가 돌아와, 난공(蘭公)이 글을 반도 못 읽고 또 눈물이 글썽하였고 역암(力闇)도 또한 감상(感傷)하기를 마지않았다 하였다. 내 편지 중에 일찍 한 마디도 서글픈 한별(恨別)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이같이 함은 진실로 기이하다 하겠다. 비록 그 사람이 정이 승(勝)하고 마음이 약하다 하더라도 이틀 사이에 이같이 정들고 기(氣)가 합하여 떨어지지 못하게 됨을 일찍 듣지 못했다. 덕유가 갈 때, 내가 별선(別扇) 두 자루와 청심원(淸心元) 네 개를 두 사람의 종에 전해 주게 하였더니 두 사람이 또 부채 두 자루와 마른 죽순(竹筍) 두 쪽으로써 덕유(德裕)에게 주었다.
6일 방물(方物)을 따라 궐(闕)에 들어갔다. 태화제전(太和諸殿)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편지를 써서 보냈다. 편지에 이르되,
어찌 이럴 수 있을까? 붕우(朋友)는 인륜에 참(參)하는 것이니 어찌 중하지 않겠으며 천지(天地)가 한 큰 부모가 되니 동포가 어찌 화이(華夷)의 구별이 있으랴! 두 형이 이미 지기(知己)로써 허하시니 제가 또 마땅히 염치를 무릅쓰고 지기로서 자처하겠습니다. 다만 교수(交修)하고 보익(補益)할 의(義)를 알지 못하고, 일시의 정애(情愛)의 감정에서 나왔으면 이는 부인의 인(仁)이고 돼지의 사귐이니 이것은 제로서 두려워하는 바이요, 또한 한번 두 형에게 들어 보고자 하는 바입니다. 어제 보니 반형(潘兄)이 심가(心氣)가 너무 약하므로 그 마음을 상할 것 같아서 편지 중에 감히 한 자의 석별하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인편이 돌아와서 또 들으니, 상회(傷懷)하기 어제와 같다 하오니, 이같으면 우리들의 해후(邂逅)가 좋은 인연이 아니라 전생의 원업(寃業)입니다. 또 편지 중에 밤에 능히 자지 못했다고 하시니 이는 실로 피차의 통환(通患)입니다. 비록 그러나 우리들의 하는 일이 같지는 않지만 그 친(親)을 떠나 원유(遠遊)함은 한가지이니, 그 침식을 삼가여 감히 걱정하시는 부모의 생각을 잊지 못함은 어찌 다를 바 있겠습니까? 간절히 바라건대, 맹성(猛省)하고 잘 조섭하십시오. 또 과장(科場)의 득실이 비록 정명(定命)이 있으나 전심(專心)으로 치지(致志)하지 않으면 잘 되지 못합니다. 지금 회위(會圍)가 멀지 않으니 마땅히 정신을 모으고 잠양(?養)하여 때를 기다려 동(動)해야 하는데, 문득 이 뜻밖에 요양(撓攘)으로 응수(應酬)가 밖에서 번거롭고 의서(意緖)가 안에서 어지러워지니 또한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과환(科宦)의 영(榮)이 형들의 능사가 될 수 없고, 제의 형들에게 바람이 또한 이에 있지 않습니다. 비록 그러나 양친의 바람과 문호(門戶)의 계(計)를 위해 수천 리를 발섭(跋涉)한 목적이 이에 있으니 또한 가히 적은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행여 재량하여 택하시기 바랍니다. 반형(潘兄)은 나이 더욱 젊고 기품이 청취(淸脆)한 듯하니 더욱 염려됩니다. ‘선생(先生)’ 두 자는 동속(東俗)에는 이로써 친구에게 가하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버리기 바랍니다. 재명(再明)에 찾아뵈려 하나 마침내 누를 끼칠 염려가 있고 또 혹 손님이나 오면 낭패를 면하지 못할 터이니 행여 자세히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불선(不宣)합니다.” 하였다.
방물(方物)이 미처 입고(入庫)되지 않아서, 자명종(自鳴鐘)을 구경하기 위하여 곧 유리창(琉璃廠) 장경가(張經家)에 갔다. 노상에서 덕유(德裕)가 답을 받아가지고 돌아옴을 만났다. 날이 저물어 관(館)에 돌아가 비로소 떼어보았다. 유(裕)가 전하기를, 난공(蘭公)이 외출하고 돌아오지 않았고 다만 역암의 편지만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편지에,
다만, 우붕(友朋)이나 지기(知己)일 뿐만 아니라 비록 골육의 친척이라도 이에서 지날 수 없으니, 삼가 마땅히 큰 띠에 써서 항상 차고 다니겠습니다. 제의 사람됨이 감히 스스로 과장하지 못하나, 그러나 성정(性情)이 고원(高遠)하고 교유가 비록 대강(大江)의 남북에 두루 차지만 가한 사람이 적고 좋지 않은 사람이 많아, 마음으로 서로 안다고 할 만한 자가 몇 사람 없고, 그 나머지는 어제 형이 말한 바와 같이 보는 데서는 정성을 다하고 안 보는 데서는 조소하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뜻밖에 우리 형같이 숨어도 어버이를 어기지 않고 곧아도 세속과 절연을 아니하는 그런 분을 얻게 되니, 한 번 만나자 이미 사람으로 하여금 심취케 하여, 실로 기연(奇緣)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장부가 천리 밖에서 정신으로 사귀는데 어찌 반드시 아녀자처럼 자주 가까이만 지내겠는가? 난형(蘭兄)이 마음이 부드럽고 기(氣)가 약함은 진실로 형의 말씀과 같으나 역시 그 중심이 격발(激發)하여 능히 스스로 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 같은 자는 한번 지기를 보면 마음이 죽고 기가 다하여 울려고 해도 울지 못하고 오직 하늘을 우러러 길게 한숨쉬고 망연(茫然)히 백 가지 생각만 착잡하게 떠오를 뿐입니다. 아아, 천하의 정이 있는 사람은 진실로 이 뜻을 묵묵히 알아 줄 것입니다. 난형은 조금 전에 출타하였으니 돌아오면 형의 뜻을 정중히 일러주겠습니다. 이별의 생각이 마음에 걸려 천만 가지 말로도 다하지 못하고 온 인편에 회서를 부치오니, 오직 몸조리 잘 하시고 자애(自愛)하시기 바랍니다. 불선(不宣)합니다.” 하였다.
7일 상사(上使)가 하인을 천승점(天陞店)에 보냈다. 돌아올 때 두 하인이 따라왔다. 여러 대인(大人)과 우리 두 사람에게 각각 편지가 있고 각각 선물이 있었다. 역암이 부채 두 자루와 붓 두 자루, 복건 수산 인석(福建壽山印石) 세 개를 보냈다. 편지에 이르되,
만두고 오직 형의 행의(行誼)가 독지(篤摯)함에 감격하고 형의 훈사(訓辭)가 심후(深厚)함을 감복하여 종신토록 따르고자 할 뿐입니다. 소시(小詩) 한 수로 견권(??)한 정을 적어 드리며 변변치 못한 물건 한두 종을 보내드리오니, 저호(紵縞)의 의로 알고 받아 주시지요. 만일 보시(報施)의 도(道)에 점점(沾沾)한다고 하시면 옅은 장부밖에 안됩니다. 각 대인(大人)앞에 또한 이 뜻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객거(客居)에 아무것도 없으니 반드시 너무 쓸쓸하다고 죄주지 않으실 테지요. 총총히 미침(微?)을 표시하고 문안드립니다.” 하였고, 또 시에,
“놀란 가슴 열흘 만에 행정을 돌이키니 / 驚心十日返行旌
열사의 유허를 여기 잠깐 지나간다 / 烈士遺墟此?經
관도에는 차츰차츰 새 버들이 푸르고 / 官道漸看新柳綠
여회는 한가지로 고향 산천을 생각한다 / 旅懷同憶故山靑
지금부터 연경 소식은 천리 길을 이루니 / 從今燕?成千里
만고에 서로 못 보는 참 상 두 별이 원한이네 / 終古參商恨兩星
비록 신주 대륙에 간격이 없다 하나 / 縱說神州無間隔
이별의 근심은 취한 듯이 날로 무겁고 어둡기만 하네 / 離憂如醉日沈冥
난공이 《한예자원(漢?字源)》 한 부를 보내고 편지에 이르기를,
“객저(客邸)에 도무지 좋은 물건이 없습니다. 상자 가운데 《한예자원》 한 부가 있는데 모두 여섯 책입니다. 중국에서도 쉬이 구입하지 못하는 것이니 감히 담헌의 재중(齋中)에 드려 청상(淸賞)에 공합니다. 족하가 옛것을 좋아하기에 문득 손닿는 대로 기증해 드리오니, 행여 웃으며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어제 주신 말을 읽고 깊이 명심하여 잊지 않겠습니다. 다하지 않습니다.” 시에,
“해는 높고 바람은 거센데 두 사절을 보내오니 / 日高風勁送雙旌
작은 이별이 천년이라 일찍 겪어 못본 일 / 小別千年未慣經
서시 넋이 사라지고 물결의 그림자도 넓은데 / 徐市魂消波影?
연대에 사람은 가고 버들잎만 푸르네 / 燕臺人去柳烟靑
봄비 속에 나그네 눈물을 금하기 어렵고 / 難禁客淚春深雨
새벽하늘 별처럼 흩어지기 쉬운 한때의 즐거움 / 易散?悰曙後星
섭섭한 노래 산을 울려도 임 계신 곳 멀기만 하고 / ??響山池閣遠
수레 올라 말달리니 가벼운 먼지만 아득할 뿐 / 登車可奈軟塵冥
두종이 문밖에 있고 들어오지 못하므로 덕유(德裕)로 하여금 나가 주식(酒食)을 사먹이고 돈 두 냥과 백지 네 묶음을 나누어 주고, 감사의 편지 부치기를,
“두 형의 편지와 겸하여 시를 받아 읽어 보고 보배같이 느낀 감정 붓 하나로 표현하기 어렵고 또 각종의 선사품으로 권애(眷愛)해 주시고 또 고의(古義)로써 권면해 주시니 감히 절하며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돌아갈 때가 이미 박두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심신(心神)이 날러 달아나게 합니다. 비록 날마다 가서 뵙고자 하나, 형들의 이웃에 구경하는 손들이 내왕하여 아무래도 폐를 끼칠 염려가 있으므로 매양 주저하고 물러섬을 면치 못합니다. 내일에는 불가피 무릅쓰고 나아가 이 회포를 좀 풀어 보려고 합니다.”
8일 평중과 같이 일찍이 동구(洞口)에 이르러 수레를 버리고 들어갔다. 두 사람이 악수(握手)하고 인사하였다.
평중이 이르기를, “오늘은 와서 하루 종일 환담하려 한다.” 하였는데, 이미 역암이 문자(門者)에 경계하여 손님 출입을 못하게 했었다. 후에 덕유의 말을 들으니, 오는 손님이 잇달아 있었으나 모두 밖에서 돌아가게 했다고 하였다.
역암이 “객지라 아무것도 없어 대접을 제대로 못하니 귀관(貴館)의 융숭한 접대에 비할 수 없습니다.”
평중이 “모든 일은 진정으로만 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그런 탈속 못한 소리를 하는가?”
내가 “저번에 예절이 너무 간단하여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각각 그 속(俗)을 따르는 것입니다.”
난공이 “선생의 편지를 받아 보니 감히 다시 이별의 애처로운 빛을 짓지 못하겠다. 어제 졸작을 드렸는데 운이 맞지 못하였으니 가르쳐 주시기 바란다.” 하였다.
평중이 “엄형의 시는 침울하고 강개(慷慨)하며 반형의 시는 수매(秀邁)하고 청려(淸麗)하다.”
역암이 “평생 감개(感慨)했으나 지금 머리가 희고[平生感慨頭今白] 이역(異域)에서 봉영(逢迎)하니 눈이 문득 푸르다[異域逢迎眼忽靑]는 참말로 묘하기 그지없고, 또, 문(門)에 나와 손잡으니 이미 찬별이더라[出門?手已寒星], 한 귀는 더욱 절창(絶唱)이라, 왕어양(王漁洋)이 만약 자리에 있었더라도 어떻게 무릎을 칠지 모를 것이다.”
평중이 “두 형의 시를 능히 극의하여 찬양하지 못하여 눈앞의 거짓말이란 혐의를 받을까 두려웠는데 지금 나를 과장해 주시니 감히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지기의 상면(相勉)하는 도리가 아닌가 한다.”
역암이 “제는 본래 솔직한 사람인데 어찌 즐겨 세태(世態)를 지을 것인가?”
난공이 “김형의 호방(豪放)함은 무리를 뛰어나서 감개한 빛이 눈썹 사이에 드러나 사람으로 하여금 종신(終身)토록 상망(想望)케 한다.”
평중이 “잘못 어목(魚目)으로 인정한 것 아닌가?”
난공이 “《한예자원(漢?字源)》이 귀처(貴處)에 있는가?”
내가 “더러 있다.”
역암이 “만일 있으면 요동시(遼東豕)가 된다.”
내가 “정으로써 주고 정으로써 받는데, 그 있고 없고 긴하고 헐함을 논할 것이 무엇인가? 또 제는 서법(書法)이 본래 졸하여 중의 머리빗과 같으나 가엄(家嚴)이 늘 예서(?書)를 좋아하시니 돌아가 봉헌(奉獻)하겠다.” 하니,
두 사람이 중의 빗[僧梳]이란 두 자를 물었다.
내가 한어(漢語)로써 대답(對答)하기를. “화상(和尙)은 두발(頭髮)이 없으니 비자(?子)를 어디에 쓰겠소.”
하니, 모두 크게 웃으면서 그 머리를 가리키며, “우리들도 모두 광광적(光光的 번쩍번쩍한다)이다.”
역암이 “이곳에 예서를 강술한 책이 여러 종이 있지만 이 책은 판(板)이 없어서 얻기 어렵소. 저번에 주신 《감구집(感舊集)》은 양주(楊州)에 있으나 많이 박지 못했으니 귀처(貴處)에 가지고 가서 번각(?刻)하여 널리 전하면 시인의 행이겠지요. 그 중의 시화(詩話)는 볼 만한 것이 있으니 중국 시인의 원유(源流)도 알 수 있습니다.”
난공이 “동방의 부인도 능히 시하는 이가 있는가?”
내가 “우리 나라 부인은 오직 언문으로 편지나 하고 일찍 독서를 시키지 않았으며 더욱 시는 부인에게 마땅한 것이 아니니 혹 하는 사람이 있어도 안으로 하고 밖에 내놓지 않는다.”
난공이 “중국에도 역시 적다. 혹 있다면 우러러 보기를 경성(慶星)이나 경운(景雲)같이 한다.”
역암이 “저분의 부인이 시에 능하다.”
난공이 역암을 보고 자못 꾸지람하는 기색이었으나 역암이 응치 않고 나에게 향하여 ‘비(非)가 없고 의(儀)가 없이 오직 주식(酒食)만 의(議)한다.’(《시경》 소아(小雅) 홍사장(鴻斯章) 한 구절)를 �遊�.
난공이 “그러면 관저(關雎)와 갈담(葛覃)은 성녀(聖女)의 시가 아닌가?”
내가 “성녀의 덕이 있으면 가하나, 성녀의 덕이 없으면 혹 방탕에 돌아가게 되니 이는 역암의 논이 매우 바르다. 군자의 좋은 짝이고 금슬(琴瑟)이 화명(和鳴)하면 낙이지만 경성(慶星)과 경운(景雲)에 비하는 것은 지나치다.”
난공이 “귀국의 경번당(景樊堂) 허봉(許?)의 누이가 시를 잘하여 《중국시선(中國詩選)》에 들어 있다.”
내가 “침자일을 하고 나머지에 곁으로 서사(書史)를 통하고 여계(女誡)를 복습하며 행실이 규범을 지키는 것이 부녀의 일이고 문조(文藻)를 수식하고 시로써 이름을 얻는 것은 아무래도 정도(正道)는 아니다.”
평중이 시 한 수를 보여달라 하니 내놓지 않고 다만 차상부인운(次湘夫人韻)만 보였다.
평중이 “상 부인(湘夫人)은 누구인가?”
난공이 “나의 내자이다.” 하고, 또 “미호 선생(渼湖先生)이 떠날 때 준 시문이 있는가?”
내가 “선생이 그의 조부 농암(農巖) 선생의 시를 주셨는데, 그 시에,
“진 시황 만리성을 구경 못하니 / 未見秦皇萬里城
남아의 의기로서 쟁영을 못 이루네 / 男男意氣負?嶸
미호 한구석의 조그만 고깃배에 / 渼湖一曲漁舟小
홀로 도롱이 두르고 이 평생을 등지네 / 獨束?衣負此生
두 사람이 재삼 읊조리더니 좋다 하였다.
내가 “행리 속에 마침 선생의 논성서(論性書)가 있으니 보여 드리겠다.” 하니, 모두 매우 좋다 하였다. 평중이 종이에다 서화(書畵)를 청하니,
역암이 “짐승 자취와 새 발자국이 동국을 짓밟는다[獸蹄鳥跡交東國].”
내가 “전에 이목은 선생(李牧隱先生)이 중국에 들어와 누구와 창수(唱酬)할 때 어떤 사람이 희롱하여 ‘짐승 자취와 새 발자국이 중국을 짓밟는다[獸蹄鳥跡之道交於中國]하니, 이(李)가 곧 대꾸하여 이르되, ‘닭울음과 개짖는 소리 사경(四境)에 달(達)한다[鷄鳴犬吠之聲達于四境].’ 하므로 그 사람이 탄복했던 일이 있다. 오늘 이 말은 이와 반대로 되었다.”
하니, 두 사람이 모두 웃었다.
내가 “옛말에는 포의(布衣)의 선비라고 일컬었는데 지금 형 등이 모두 비단옷을 입었으니 예부터 풍속이 이같은가? 혹 지금의 상치(尙侈)로 하여 그런 것인가?”
역암이 상치(尙侈) 두 자에 타권(打圈)하면서, “이는 고속(古俗)이 아니다. 우리들은 금속(今俗)을 따랐다.”
내가 “서림 선생(西林先生)이 또 무엇을 입는가?”
“선생은 포의를 입고 모(帽)는 극히 옛것이다. 우연히 한 번 도(都)에 들어갔는데 사람이 모두 웃었다.”
내가 입은 것을 가리키며 “겨울에 원행(遠行)할 때 비록 비단을 입으나 집에서는 토산(土?) 면포(綿布)에 불과하고, 주단(紬緞)은 부인의 상복(上服)과 관자(官者)의 명복(命服)일 뿐이다.”
내가 “엄형(嚴兄)이 늙지 않았는데 이가 빠졌으니 왜 그런가?”
“어릴 때에 단것을 즐겨 먹어서 그랬다. 김형도 일찍 낙치가 되었는데 ……”
평중이 “발(髮)은 비록 희나 이는 흔들리지 않았는데 금번에 하당(下堂)을 조심하지 못하여, 사곤(謝鯤)의 담을 넘음과 범숙(范叔)의 매맞음은 아닌데 상해를 당했다.”
난공이 “그래도 군의 휘파람과 노래는 여전하지 않는가?”
평중이 “후에 진상(秦相)이 될 수 있을까?”
난공(蘭公)이 “이렇게 가난하고서야.”
평중이 “도보(徒步)하는 집이 우연히 비슷하다.”
역암이 “나는 요행히 수가(須賈)가 아니다.”
난공이 “형이 조반을 일찍 하였으니 한 공기 밥을 들 수 있을는지?”
내가 “배는 아직 부르나 형과 같이 드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니, 두 사람이 머리를 끄덕이며 기뻐하면서 드디어 네 공기의 밥과 몇 가지 찬을 놓았다. 평중이 두서너 잔 술을 하고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한 식탁에서 식사하였다. 막 식사하려는데, 전일 관(館)에 왔던 사람이 우리들이 밥을 숟가락으로 먹는 것을 보고, 우리 두 사람 앞에 각각 국자 하나씩을 놓아 숟가락을 대신하였다.
내가 웃으며 “마을에 들어오면 마을 풍속을 따르는 것인데.”
하니, 복(僕)이 알아듣고 곧 젓가락으로 국자를 바꿔다. 양생(兩生)도 알고 웃었다.
내가 “이 중국 풍속은 부자(父子)와 노유(老幼)가 식탁을 같이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가?”
난공이 “꺼리지 않는다. 다만 남녀가 같이하지 않을 뿐이다.”
식사를 마치고 난공이 친히 스스로 담배를 담아 권하였다. 처음부터 차(茶)를 권하고 담배를 권하는 것을 모두 친히 하는데, 자주 사양해도 듣지 않았다.
평중이 “서울에 유람하기 거의 한 달이 지났는데 문인이나 재사를 만난 사람이 있었는가?”
역암이 “없었다.”
평중이 “서울은 사람이 모이는 곳인데 어찌 없다 하겠는가? 혹 미처 서로 알지 못했던지? 혹 두 분이 즐겨 접응(接應)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역암이 “이곳에 사귀어 노는 사람도 적지는 않으나 대개가 벼슬한 선비라 문인의 모양으로 상종할 뿐이다. 가히 더불어 마음속을 논할 선비야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평중이 “침상(枕上)에서 우연히 전편(前篇)의 시를 차운했으니 한 번 보아 주시오.” 하고 시를 보였다.
“금문에 조를 기다리는 두 사신이 머물고 / 金門待詔駐雙旌
강남의 높은 재주 구경을 통하네 / 江表高才通九經
가슴속 털어놓고 봄날 하루 즐겼고 / 一破襟期春晝永
이별을 아끼는 속에 저녁노을이 푸르렀네 / 不堪離思暮岑靑
영명이 이미 드러나 문채를 받들었고 / 榮名已闡承文彩
서기 바야흐로 뵈어 객성에 비취이네 / 瑞氣方看映客星
내일 그대를 방문하려고 밤중에 자주 깨어 보니 / 明欲訪君頻視夜
발 밖의 새벽하늘 아직도 컴컴하네 / 曉天簾外尙冥冥
역암이 본 다음 권을 함연(?聯)과 낙구(落句)에 치면서 “정이 깊은 말이라 여러 번 읽을 수 없다.”
또, “곧 이 시를 가지고 휘호를 하여 상자 속의 진비(珍秘)로 만들어 주기 바란다.”
난공이 “묘구(妙句)를 나도 한 장 써주시오. 영원히 기념하게.”
하고 각각 종이를 주니, 평중이 다 써주며 “사양치 않고 써서 애오라지 우직(愚直)한 성(性)을 뵈어 주는 것이요.”
난공이 “홍형은 술업(術業)이 통치 못하는 것이 없고, 박문강기(博聞强記)하는 편인데 시를 짓지 아니함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본래 음영(吟詠)에 졸하고 또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며 생각을 하면 늘 간삽(艱澁)을 걱정하게 되고 우연히 구(句)를 이루어도 모두 진부하고 누(陋)하므로 스스로 않기로 했다.”
난공이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서림 선생(西林先生)의 덕행의 자세한 것을 물으니,
역암이 “서림 선생이 항성간산문(杭城艮山門) 밖의 4리(里)쯤에 사는데, 저서로 《취유록(吹幽錄)》 80권이 있다. 수초(手?)를 일곱 번을 한 다음에 정본(定本)한 것이니, 모두 악률(樂律)을 강(講)한 책이다. 또 《설문이동(說文理?)》 40권을 지었는데 아직까지 정고(定藁)가 되지 않았다. 제(弟)도 일찍 교대(校對)를 위해서 이따금 말석에 참가한다. 선생은 지극히 허심탄회하여 옳고 그르고를 물론하고 모두 책 가운데 조목조목 적어 독자의 선택 결정에 맡기므로, 제도 가끔 박잡(駁雜)한 말을 해도 선생은 싫어하지 아니한다. 시는, 한ㆍ위(漢魏)와 성당(盛唐)을 좋아하나, 다만 율법이 너무 근엄하다. 그러므로 요 근래 사람의 시 같은 것은, 선생이 읽어 보면 법에 들어맞아 평할 것이 없는 것은 극히 적다. 그는 어머니 섬김에 지극히 효도하여, 선생이 나이 60일 때 어머니는 나이 90이었지만 늦게 돌아오면 반드시 어머니 처소에 나아간다. 어머니는 이미 눈이 어두워서 손으로 그 이마를 어루만져 준다. 선생이 일찍이 상배를 하여 독거(獨居)하기 30년에 밤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자는데 가려운 데를 긁거나 등을 두드리는 유는 모두 몸소 하고 비첩(婢妾)에게 맡기지 않았다. 3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갔는데 선생이 애훼(哀毁)하여 뼈만 남게 되고 유모(孺慕)하기 어린아기 같이 하였다. 다만 한 가지 병이 있으니 영불(?佛)하기 좋아하여 불서에 대해서는 정관하지 않는 것이 없다.
내가 “그 성덕과 지행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발(感發)하게 한다. 다만 그 영불(?佛)함이 극히 가석하다. 어찌 윤화정(尹和靖 윤순(尹焞)) 이 《금강경(金剛經)》을 읽은 옛일과 같은 것이 또 있단 말인가?”
역암이 “자못 심하다. 《능엄경(楞嚴經)》 같은 것을 극히 좋아하고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말하기 좋아한다.”
내가 “《능엄경(楞嚴經)》에 심(心)을 논한 것은 진실로 좋은 점이 꽤 많으나, 인과응보 같은 것에 이르러는 서림을 위하여 아깝게 여긴다.”
역암이 “이 경은 곧 저도 읽기를 좋아한다. 그것으로써 마음을 다스리면 가장 좋다. 그 심을 논한 곳이 원래 우리 유가의 도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데, 필경 크게 구별되고 마는 것은 공(空)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오유(吾儒)의 마음을 논한 것이 본디 스스로 즐길 경지가 있는 것인데, 외도(外道)에 구할 것이 무엇인가?”
역암이 “석씨(釋氏)에 있어서는 《능엄경(楞嚴經)》이 있고, 도가(道家)에 있어서는 《황정경(黃庭經)》이 있고 오유(吾儒)에는, ‘분을 징계하고 욕을 막고 경망을 고치고 타태를 경계함[懲忿窒慾矯輕警惰] 여덟 자가 있다. 제가 유가에서 약간 터득한 것은 이같을 뿐이고, 정심(正心)과 성의(誠意)에 이르러는 아직 크게 어렵게 여긴다.”
난공이 밖으로부터 들어와, 《능엄경》을 보기 좋아한다는 역암의 말을 듣고, “이 경은 제가 손씻고 외우는 것이요 아울러 불경(佛經)을 수사(手寫)하기 좋아 한다.” 하였다.
내가 희롱하여 “두 형이 내세(來世)에 반드시 천당(天堂)에 가리라.” 하니 모두 크게 웃었다.
난공(蘭公)이 곁에다가 아학(雅謔)이라고 쓰니, 역암이 또 “저의 《능엄》을 읽은 것은 병이 위독하여 다 죽게 된 때에 자못 신심(身心)에 크게 유익하였으니 역시 한 첩의 청양제(淸凉劑)가 될 수 있었다. 그때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가 가합(假合)임을 깨달아 무슨 일인들 던지지 못할 것이 있으랴 했더니 마침내 이로써 병이 나았다. 이후에는 다시 그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들 같이 외물(外物)에 흔들리기 쉬운 사람은, 정히 경중(經中)에 아란(阿難)의 다문(多聞)함과 같은 것이 있으니, 한 번 읽어보면 역시 병폐에 적중함을 깨닫게 되므로 이따금 볼 뿐이다. 지금은 제가 유서(儒書)만 훨씬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이런 종류의 도리는 유서에 말한 것이 지극히 절실하고 평이한데, 반드시 멀리 이단(異端)에 취(取)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늦게 불노(佛老)에로 도망했다 해서 마침내 순여(醇如)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행여 가버리고 돌아오지 않지 말라.”
역암이 “염계(濂溪) 선생 같은 이도 또한 불씨를 따라 착수한 후에 정도로 돌아왔다.”
내가 “이른바 ‘지금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은 그 고명(高明)한 때문이다.”
역암이 “송유(宋儒)가 불교를 배척하면서도 그 저서에는 왕왕 불경의 말을 섞어 넣었으니 ‘진적역구(眞積力久)’라든가 ‘활발발지(活潑潑地)’라든가 ‘어록(語錄)’ 등의 말이 모두 오유(吾儒)의 소유(所有)가 아니 잖은가!”
내가 “그 문자를 취해 쓰는 데 무슨 관계있는가? 또 서암승(瑞巖僧)ㆍ주인옹(主人翁)ㆍ성성(惺惺) 같은 그 뜻까지 아울러 취한 것도 있는데 이것은 유자(儒者)의 활법(活法)이다.”
내가 또 “송유(宋儒)가 비록 벽불(闢佛)하였다……하나 기조(譏嘲)하는 뜻이 있는 듯하다.”
역암이 머리를 흔들며 “오유(吾儒)도 때로는 불씨에 취함이 있다 함에 불과하다.”
또 “‘잡으면 있고 놓아두면 없어져 출입이 무상하여 그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함은 곧 ‘성성(惺惺) 적적(寂寂)’ 의 설이니 어찌 밖에 구할 필요가 있는가?”
또 “창려(昌黎)는 다만 복전(福田)ㆍ이익을 찾는 중을 배척했을 뿐이요, 기실 깊이 불씨의 취지를 알지 못한 것이다.” 또 제는 감히 거짓말을 못하는데, 기실은 제도 불경(佛經)에서 취함이 없지 않지만 다만, 영불(?佛)하거나 인과를 말하는 것은 속승들이 하는 일인데, 서림 선생도 이에서 벗어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내가 “그 장점을 취하여 나의 마음 다스리는 공부에 도움이 되게 하면 무슨 나쁠 것이 있겠는가? 다만 음성(淫聲)과 미색(美色)처럼 차츰차츰 그 속에 빠져들어갈까 두려울 뿐이다.”
역암이 “빠지고 돌아오지 않는 폐단은 우리가 자문해보아도 여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바로 전일에 말한 평일(平日)에 《근사록(近思錄)》 보기를 좋아한다고 한 것 같은 것으로 말하더라도, 만일 외도(外道)에 빠졌다면 어찌 반드시 근사록을 좋아하겠는가? 세간(世間)에는 총명한 사람으로서 근사록을 잠 달래[引睡]는 책으로 삼는 자가 얼마든지 있으니 슬픈 일이다.”
내가 “제가 감히 아첨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형의 재학(才學)이 매우 높으니 깊이 오도(吾道)를 위하여 기대한다. 《근사록》 보기를 좋아하니 이미 편안히 여기는 바가 저기 있지 아니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조금이라도 차질이 있으면, 반드시 유문(儒門)으로 하여금 한 강적(疆敵)을 얻게 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행여 도를 위하여 스스로 힘쓰기 바란다.”
역암이 “제가 극히 이학(理學) 말하기를 좋아하나 동지가 없어 한되더니 오늘이야 말로 벗[朋]이 있어 멀리부터 왔다고 하겠다. 그윽이 우리의 도가 외롭지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다만 한되는 것은 언어가 통치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몇 달을 두고 이야기해도 쉬지 않으리라.”
내가 “유문(儒門)에서는 가장 신독(愼獨)을 많이 말하니 독(獨)자의 뜻을 듣기 원한다.”
역암이 “미묘(微妙)하다.” 하고, 드디어 웃고 말하지 않았다. 대개 역암은 내가 시험해 보는 말인가 생각하고 미소짓다가 한참 만에 “주자(朱子)는 말하되 ‘남은 알지 못하고 나만 홀로 아는 데다.’라고 하나, 내 보기에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곳이 또 있다.”
내가 “자기도 모르는 곳이란 어떤 경계인가?”
역암이 “신독(愼獨)하기 전에, 일단 공부가 없으면, 자기마음의 처음 발(發)할 때 시비사정(是非邪正)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미발시(未發時)에 가장 잠양(?養)하기 어려우니, 이곳에서 한 번 틀리면 곧 불씨의 완공(頑空)에 떨어져 들어간다.”
내가 “이 논의 견해가 매우 높다. 이는 손을 쓰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손쓰지 않을 수도 없다.”
역암이 끄덕였다. 또 “우리들은 다만 외면상 약간 그럴 듯한 것뿐이다. 정미한 곳이야 어찌 흠결(欠缺)하다 뿐이겠는가? 일찍 강구(講究)해 보지도 않았다. 이 일은 해와 더불어 같이 나아가는 것이니, 예컨대 제들이 시 짓기 좋아하고 그림을 그리기 좋아하는 것이 어찌 성현의 허하는 바이겠는가? 정자(程子)가 글씨쓰기 좋아함을 일러, ‘노름감 장난하다가 큰 뜻을 잃어버린다[玩物喪志].’고 하였다.”
내가 “정자는 또 이르기를, ‘글자를 잘 쓰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곧 학문이다.’ 하였은즉, 나머지 일로 기예(技藝)를 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겠는가? 다만 전적으로 그것을 좋아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역암이 “공부가 거의 심조(深造)한 뒤에라야 여사(餘事)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먼저 여사를 강(講)할 리가 있겠는가? 나 같은 사람은 여사를 좋아하는 마음이 학(學)을 좋아하는 마음을 대적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크게 근심스럽다.”
내가 “반궁(反躬) 자성(自省)이 이같이 절실하니, 학에 얻은 바 없이 어찌 이같을 수 있겠는가? 제가 비록 제주가 없으나 말을 듣고 자못 깨달은 바 있으니, 많이 가르쳐 주시기 바란다.”
역암이 “방심(放心)을 구하는 것은 원래 시시각각으로 이끌어 주고 일깨워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우리들이 발전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전혀 태홀한 때문이다.”
역암이 “서절효(徐節孝)가 처음 이연평(李延平)을 찾아보니, 이(李)가 두용(頭容)이 곧지 못함을 책했고, 또 사람들이 가만히 유원성(劉元城)이 사람과 대어(對語)함을 엿보니, 수족(手足)을 놓은 곳이 일찍 옮겨지지 않았다 하고, 또 주자가 좌법(坐法)을 말함에 있어서 생요(生腰)의 앉음과 숙요(熟腰)의 앉음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런 강학(講學)은 실로 따르기는 어렵고 다만 대단(大段)이 좋은 것이다.”
내가 “그 밖을 제(制)하여 그 안을 편안히 한다 하니, 형의 말은 주자가 섭하손(葉賀孫)에게 먼저 구용(九容)을 보라고 권한 뜻이니, 감히 명패(銘佩)하지 않겠는가? 다만 말하기는 어렵지 않고 실천하기 어려우니, 말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도리어 말할 줄 모르는 자의 우직함만 같지 못하다. 이것이 가장 두렵다.”
역암이 “정자는 이르기를 ‘경(敬)이 백사(百邪)를 이긴다.’ 했으니, 이 네 자는 가장 맛있는 말이다.” 또 “육방옹(陸放翁) 시(詩)에,
“취해도 오히려 온극하여야 바야흐로 덕을 이루고 / 醉猶溫克方成德
꿈에도 제장하여야 비로소 공을 본다 / 夢亦齊莊始見功
하였는데, 제는 일찍 이 말을 탄복하여 명심하고 있다.”
내가 “정자도 말하기를, ‘꿈속에서 배운 바의 깊고 얕음을 증험한다.’ 하니, 이는 모두 진절(眞切)히 체험한 말이다.” 또 “경(敬)은 이미 유자(儒者)의 진담(眞談)을 이루었으니, 이른바 ‘사람이 음식하지 않음이 없으나 능히 맛을 앎이 적다.’는 것이다.”
역암이 “우리들이 만일 입을 열고 사람을 향하여 주경(主敬) 두 자를 말하면 사람이 다 듣기 싫어하지만 기실은 이 경 자는 종신토록 수용(受用)해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니, 도(道)를 듣지 못한 자가 스스로 홀략(忽略)하여 체회(體會)하지 못할 뿐이다.”
내가 “속된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 호학(好學)한다는 자도 다만 경(經)을 말하고 성(性)을 말하여, 전인의 발(發)하지 못한 바를 말하기에 힘쓰고, 그 심계(心界)가 날로 윤리(倫理)에 거칠어져 얼마나 분(分)을 다하지 못한 곳이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니, 극히 통민할 일이다.”
역암이 “제가(齊家)와 같은 두 자만해도 또 크게 어렵다. 양명 같은 대유(大儒)로서도 능히 그 사나운 아내를 교화하지 못하였다.”
내가 “역(易)을 읽는데 무슨 주를 주로 하는가?”
역암이 “과장(科場)에서는 정자의 주를 따른다.” 또 “경서(經書)는 주자를 좇지 않는 것이 없지만 다만, 《시경(詩經)》 한 책에 있어는 고관(考官)의 명제(命題)와 발책(發策)에 많이 미묘한 말이 있다.” 또 “주자가 소서(小序)를 반대하는데 지금 소서를 보면 매우 좇을 만하다. 그러므로 학자가 능히 주자를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다. 본조에 주죽타(朱竹?) 같은 이는 《경의고(經義考)》 2백 권을 지었는데 또한 주자의 옳지 못함을 공격하였고, 자래(自來)의 의논이 또 이르되, 주자가 소서 고치기를 좋아하였는데 대개 문인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예컨대, 모과(木瓜) 장은 제환(齊桓)을 찬미하고, 자금(子衿)장은 학교가 폐지된 것을 풍자하고, 기타 야유만초(野有蔓草) 장 및 정홀(鄭忽)을 풍자한 것과 유왕(幽王)을 풍자한 여러 시(詩)는, 모두 경전(經傳)을 조사해 보아도 확실히 증거될 만한데, 주자는 반드시 모두 반대했다.”
내가 “주자의 《소서변설(小序辨說)》을 생각건대 이미 보았을 것이다.” 이때에, 복인(僕人)이 병과(餠果) 두어 그릇을 식탁 위에 가져다 놓았다. 난공이 바야흐로 캉(?) 밑에 있는 의자 위에서 큰 탁자에 의거하여 평중의 종이에 그림을 그리다가 붓을 던지고 와서 문답한 말을 보더니, 시화여사(詩畵餘事)라는 데에 이르러 ‘조금도 여사(餘事)라고 할 수 없다.” 하고, 소서운운(小序云云)을 보고, “이런 일을 난 모른다. 병과(餠果)나 먹자.” 하고, 인하여 깔깔 웃었다. 먹은 다음에 내가 “명(明)의 도희영(屠羲英)이 지은 바 《동자례(童子禮)》가 있는데 그 중에 배음(拜揖)하는 절(節)이 있다.” 하니,
난공이 “보지 못했다. 송의 양 복(楊復) 《예절도(禮節圖)》가 있는데, 주(周) 나라의 예(禮)로서 지금은 행하는 자가 없다.” 하였다.
내가 역암에게 “귀하의 인장(印章)은 모두 친수(親手)로 새긴 것인가?”
역암이 “다른 사람이 새긴 것도 있다. 본래는 인을 새겨 보내드리려고 했으나 칼을 가지고 있지 않고, 처음 조각을 배우니 모양을 이루지 못한다.”
내가 “공줄(工拙)을 말할 것이 있는가? 새겨 주신다면 다행이나, 다만 감히 많이 청하지 못하겠다.”
역암이 “도장 새기는 칼을 쓰지 않고 다른 칼을 쓸 수도 있으나 다만 아름답게 할 수 없을 뿐이다. 한두 개의 돌을 구해 곧 새겨 올리겠는데 어떠하오.”
내가 “만일 할 수 있다면 하시되 반드시 세 개를 새길 것은 없다. 하나도 좋다. 저번에 한 개 주신 것을 봉정(奉呈)하겠다.”
역암이 “모름지기 두 개의 돌이라야 한다. 하나는 이름이요 하나는 자를 새겨야 하니.”
이때 난공은 탁자를 마주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역암이 큰 탁자에서 난공을 대신하여 그림을 그렸다.
난공이 “동국(東國)에 군현(郡縣)이 얼마이며 산천이 어떠하며 수촌(壽村)에 아름다운 산수가 있는가?”
내가 “군현과 산천은 마땅히 대략 기록하여서 올리겠고, 수촌은 다만 전원(田園)의 낙(樂)이 있을 뿐이고, 가산수(佳山水)로서 유정(幽情)을 창서(暢?)할 만한 곳은 없다.”
난공이 “해상(海上)의 모든 나라에서 항상 왕래하는 사람이 있는가?”
내가 “다만 일본이 있어 내왕하면서 매매하고, 그 나머지는 없다.”
난공이 “김 대인(金大人)이 준 왜(倭) 능화지(菱花紙)는 일본서 나는가? 혹 본국에서 나는가?”
내가 “일본에서 난다.”
내가 “항주(杭州)에 일본 상선이 통행하는데 일찍 일본 종이를 본 일이 있는가?”
난공이 “간혹 있다. 이 나라 종이는 서화를 할 수 없으므로 항주에는 적다. 동국의 종이 같으면 우리 고향의 지물포 중에 파는데 있으나 값이 그다지 헐하지 않다. 또 동국의 종이는 무엇으로 만드는가?”
내가 “모두 저피(楮皮)인데 품질이 매우 추(?)하나 다만 든든한 것은 중국 종이보다 훨씬 낫다.”
난공이 “저번에 우피전(牛皮煎)을 혜사하셨으나 우육(牛肉)을 먹지 않기 때문에 먹지 않았다.”
내가 “우육을 먹지 않는 것은 그 뜻이 어디 있는가?”
난공이 “법금(法禁)이 심히 엄하여 민간에서 감히 도살하지 못함으로 얻어먹지 못할 뿐이고 딴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난해에 복건(福建) 사람이 동국에 표류해 온 것을 보니, 또한 우육을 먹지 않아서 내가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되 ‘우리 땅에 제천대성(齊天大聖)이란 신이 있는데 그 신이 우육을 먹지 않으므로 우리들도 감히 먹지 못한다.’ 하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난공이 “과연 이런 말이 있다. 이 말을 지어 우민(愚民)을 금하는 것이요. 실은 이런 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우리 나라 대유(大儒)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평생에 우육을 먹지 않고 이르되 ‘이미 그 힘을 부려먹고 또 그 육을 먹는다는 것이 가한가?” 하였는데, 이 뜻이 어떤가?”
난공이 “그 뜻이 아주 좋다.”
난공이 “동국의 궁실(宮室)과 정사(亭?)의 제도가 어떤가?”
내가 “창졸간에 다 말할 수 없다. 이것도 추기(追記)하여 올리겠다.”
난공이 “반드시 스스로 쓰지 말고 심부름꾼이 붓잡을 줄 아는 자가 있으면 시켜서 쓰게 하라.”
난공이 “또 동방의 의복이 백색을 숭상함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우리 나라는 동방이므로 본래 푸른 것을 숭상했는데 백여 년 전에 국상이 연이어 생겨서, 10여 년 동안 횐 옷을 입었는데 습관으로 인하여 상례가 되어 버렸다. 최근에는 자못 금하나 종내 변하지 않는다.”
난공이 “조선은 기자(箕子)의 후손이라, 은인(殷人)이 백색을 숭상하였으니, 이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내가 웃으며 “이것도 일설은 될 수 있다.” 하니, 난공이 웃었다.
내가 “전번에 보낸 화전(花箋)이 쓰일 데가 있는가?”
난공이 “종이가 매우 묘하여 글씨나 그림에나 다 좋다.”
내가 “형의 신형(神形)이 전에 비하여 매우 감손한 듯하니, 그새 혹 감기에 걸렸는가?”"
난공이 “아니다. 두 형을 만나본 뒤에 훌훌 이별할 생각을 하니 잠을 잘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평중이 “이를 보니 마음이 상함을 금할 수 없다.”
내가 “과연 그렇다면 우리들은 영당(令堂)의 죄인이다.”
난공이 급히 우리 두 사람의 말을 막으며 “그렇지 않다. 제가 형을 봄으로부터 ‘부인 시교(婦仁豕交)’란 말이 홀연히 생각이 난다. 다시 아녀태(兒女態)를 짓지 않으리니 형은 염려하지 말라.”
조금 있다가, 난공이 “김형의 존항(尊行)이 몇 번째인가?”
내가 “동국에서는 이 법을 쓰지 않는다.”
난공이 “백(伯)인가? 중ㆍ숙(仲叔)인가?”
내가 “김형은 형제가 없다.”
내가 난공에게 묻기를, “영랑(令郞)이 연기가 얼마인가?”
난공이 “돈아(豚兒)가 7세이고 다음 애는 네 살이다.”
내가 “모두 이름 지었는가?”
난공이 “큰 애는 시민(時敏)이고 다음은 학민(學敏)이다.”
내가 “강남에도 또한 천연두가 있는가?”
난공이 “있다. 동해엔 두증(痘症)이 완쾌된 사람이 많은가?”
내가 “완쾌된 사람은 열에 서넛이다.”
난공이 “김공이 쓸쓸해 하는 빛이 있으니, 제가 심히 불안하다.”
평중이 “마음이 슬프지 않고, 얼굴이 슬프니, 50세의 궁유(窮儒)가 이룬바가 없는 까닭이겠지?”
난공이 “좋은 해학이다.” 또 평중에게, “족하가 귀족 출신으로 벼슬 얻기가 쉬울 터인데 벼슬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평중이 “우리 나라는 과거로써 사람을 취하니 맨 몸으로 벼슬을 취하기는 쉽지 않고, 혹 얻어도 다만 몇 말의 녹과 지방 현감 같은 것을 얻을 뿐이다. 벼슬한들 무슨 쓸데 있는가?”
평중의 종이 네 본(本)에, 그림이 끝나고 각각 제시(題詩)하였다.
평중 “동국에 가지고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상자에 간직하여 영원히 전하겠다. 두 형은 다만 중국의 명사가 될 뿐 아니라 길이 우리 나라에 소문 높은 인물이 될 것이다.”
역암이 “저희들은 경중을 논할 것이 못됩니다만 두 형을 애모함이 지극하여 좋은 모임을 갖게 되었으니 두 형도 폐향(弊鄕)에 있어서 영원히 이름이 전해질 것이다. 장차 홍형의 척독(尺牘)과 김형의 시전(詩箋)을 책으로 장정하고 진장(珍藏)하여 자손에게 전해 주겠다. 혹 타일에 저술이 있어도 이 한 토막의 가화(佳話)를 반드시 흥미 있게 말하여 뒷사람으로 하여금 두 형을 상망(想望)하게 함을, 오늘 우리가 청음 선생(淸陰先生)을 앙모(仰慕)하듯이 할 것이다.”
난공이 “세 분 대인의 수적(手蹟)도 반드시 영원히 전(傳)하여 질 것이다.”
역암이 “진실로 그러하다.”
내가 “별후의 통신(通信)할 것을 혹 생각해 보았는가?”
난공이 “매시가(煤市街)의 서낭정(徐朗亭)이 바로 저의 표형(表兄)이니, 여기에 부치면 된다.”
내가 “낭정(朗亭)은 북경 사는 사람인가?”
난공이 “그도 항주 거인(杭州擧人)으로 유경(留京)하면서 점포를 열고 있다. 7년 후면 그도 벼슬을 할 것이다.”
내가 “낭정을 우리가 떠나기 전에 한 번 면회함이 어떠한가?” 하니,
난공이 곧 하인을 불러 청하여 오라고 하였다.
내가 “해가 이미 늦었으니 후일 만나자.” 하여 그만두었다.
역암이 “두 형이 떠날 때에 여기 와서 일숙(一宿)할 수 있겠는가?”
평중이 “뜻이 없는 것이 아니나, 이목이 번다하니 편하게 하려고 해도 계책이 없으니 어찌하는가?”
역암이 “영숙(令叔)과 영형(令兄)은 괜찮겠지만 아마 관중(?中)에서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까?”
난공이 “이곳에 오는 것을 문지기가 아는가?”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저가 어떻게 알겠는가? 전문(前門) 밖에 나가 놀다 왔다고 하면 그만이다.”
난공이 “대인(大人)께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내가 “여기 옴을 대인도 또한 권했다.”
난공이 기뻐하며 “대인은 참으로 풍아중(風雅中)의 사람이다.”
평중이 “옛적에 벗을 위하여 인(印)을 풀고 간행(間行)한 자가 있는데, 두형이 한 번 더 와 주시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면 거의 다시 모일 길이 있겠으나, 감히 청하지 못하겠다.”
내가 “이후에 반드시 다시 올 것은 없다. 저들이 한 꾀를 생각하였다. 떠나는 날에 두 형을 동쪽 수십 리 밖 점사(店舍)에서 맞이하여, 하룻밤 모여서 환담하고 이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양생(兩生)이 서로 돌아보며 말을 주고받다가 조금 뒤에 난공이 “일이 심히 어렵다.” 하였다.
내가 “왜 그런가?” 하니,
역암이 “현지에 가서 거정(居停)한 곳을 찾으면 남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난공(蘭公)이 “제들이 처음 와서 서울 길을 아직 잘 알지 못한다. 수십 리 밖에 나가 아마 서로 모일 만한 곳이 없을 것 같으니, 매우 원하지 않음은 아니나, 상책이 없으니 염려된다.”
내가 “머물 데를 찾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다. 다만 성 밖 십여 리의 길가에 있는 점사(店舍)에서 두 형이 하룻밤 견디어낼 수 있겠는가?”
역암이 “귀처(貴處)의 동행인이 많은데 그 중에 우리 두 사람이 섞이면 어찌 번거롭지 않겠는가?”
내가 “일행은 모두 통주(通州)에서 자므로, 우리들이 뒤에 떨어져 기다리려고 하는 것이다.”
역암이 “이것은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다만 장소를 얻는 일과 통신을 어떻게 하여 알려야 안전할지 모르겠다.”
내가 “이것은 내가 잘 생각해 보겠다. 만일 종내 안전치 못하면 그만둘 것이다. 다만 두 형이 몸을 뺄 수 없는 무슨 어려운 점이 있지나 않은지? 만일 일호라도 어려움이 있으면 어찌 억지로 청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마땅히 다시 와서 작별인사를 해야지요.”
역암이 “자세히 생각해 보겠으니 기다려 달라, 우리들이 염려하는 것도 두 형의 말한 바와 같이 사람눈이 번다한 것이 두렵다. 우리들이 성을 나간다는 것도 형적(形跡)이 또한 용이치 않으니 반드시 수레를 타거나 혹은 말을 타야 할 것이요 이부자리를 휴대하고 출행(出行)하는 모양을 해야 하고 또 반드시 하인이 따라가야 한다. 만일 총총히 객점(客店)을 찾으면 또한 점주(店主)가 있으니, 이런 일을 소리나 자취 없이 하기 어렵다.”
내가 “그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밤을 새면서 나의 충정을 조용히 토론하기 위해서 부득이 이런 계책을 생각한 것이다. 피차 다시 생각하여 보자. 만일 십분 좋은 방책이 없으면 그만두어도 좋다.”
난공이 “자세히 생각해 보겠다.”
내가 “우리들은 염려할 것이 없고 다만 누(累)가 형들에 미칠까 염려다. 모름지기 체면이나 인정에 구애되어 차마 거절(拒絶)할 수 없어서 부녀자 모양 끌리지 말고, 만일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이 있다면, 끝내 한 번은 헤어지는 것이니, 쾌히 끊어서 섭섭히 여기지 아니함이 용자(勇者)의 일이다.”
역암이 추연(?然)히 “‘장부는 비록 눈물이 있어도 이별할 때 뿌리지 않는다[丈夫雖有淚 不灑別離時].’ 하였지만, 이 시(詩)를 지은 자는 생각건대 이별의 괴로움을 겪지 못했나 보다.”
난공이 “만리에서 잠간 만나 놀다가 조그만 작별이 천 년이겠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하고, 양생(兩生)이 모두 처연(凄然)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내가 위로하며 “다시 만나 이야기하기로 하고 아직 작별의 말은 하지 말자.” 하고, 또 “우리들이 귀우(貴寓)에 내왕함이, 실로 방해되는 바가 없는가?”
난공(蘭公)이 “주인이 대단히 좋은 사람이어서 실로 아무 방해도 없다.”
내가 “만일 불편이 있는데도 실지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는 나를 소외하는 것이다.”
난공(蘭公)이 “저의 집에서 하룻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이런 뜻이 없지 않다. 다만 관(?)에 머물 때는 결코 감히 밤에 나가지 못하지만 출성(出城)한 뒤에는 오직 마음대로 할 뿐이다. 다만 일행이 모두 통주(通州)에서 자는데 제들이 여기에 오면 그 형적이 극히 비편(非便)하다. 우리들은 말할 것이 없지만 형들에게 대하여 남들이 장차 뭐라 하겠는가? 그래서 길가에서 모이고저 하는 것이다. 형들은 다만 심상히 외출한 것으로 하고 제들은 우연히 낙후하여 처음부터 만나기를 약속한 것 같지 않게 하면 혹 사람에게 괴상함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난공이 ‘초불기회[初不期會]’라는 넉 자에 권점을 치고 “아직 며칠이 있으니 생각하여 알려드리겠다.”
난공이 또 “오늘 돌아가지 않으면 사람이 알지 못한다.”
내가 탄식하면서 “밤을 새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그 아문(衙門)에서 기다리는 것을 어찌하는가!”
난공이 “그들이 조사를 요하는가?”
내가 “그것이 아니다.”
난공이 “순라자(巡邏者)가 두려운가?”
내가 “모두 아니다. 제들은 행적이 보통 하배(下輩)와 달라서 나가며 들어옴을 아문(衙門)이 모두 눈여겨본다. 한 번 발각되면 누(累)가 일행에 미치고 또 형들에게도 어떻게 되겠는가?”
난공이 또 “여기서 두 형이 자지 못함은 세 분 대인이 허가하지 않기 때문인가? 혹은 출입을 사람이 반드시 조사하기 때문인가?”
내가 “모두 아니다. 사람이 보면 반드시 말이 있겠기에 형들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다.”
역암이 “이것은 염려할 것 없다. 오늘 두 형이 여기 온 것으로 말하더라도, 늦게까지 돌아가지 않고 내일까지 이르러도 시간에 구애할 것 없이 초연히 가면, 사람이 누가 두 형이 여기서 잤는지 안 잤는지 알겠는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어서 혹 친구가 집에서 자면 침대를 같이해도 무방하다. 비록 그러나 오늘에 만일 안되겠으면 떠나는 날에 여기 와서 일숙함이 어떠한가?”
내가 “외국 사람인지라 가는 데마다 눈에 띄니, 떠나기 전엔 결코 감히 출입하지 못한다. 일행이 몸을 움직이게 되면 아문(衙門)이 모두 보게 되는데, 홀로 스스로 돌아서 여기로 오면 누가 의심하지 않겠는가? 피차의 하는 소리가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다.”
난공이 “밤으로 하는 것은 안되고 낮으로 하면 어떠한가?”
내가 “12ㆍ3일에 다시 형들에게 오기를 도모하겠다. 만일 이웃의 의아(疑訝)가 없다면 제들은 종일토록 한가히 관중(?中)에서 보낼 터이니, 어찌 한 번 만나기를 기약하기가 어렵겠는가?”
난공이 “이 땅이 조금 궁벽하여 이웃에서 아는 사람이 없으니, 형들은 반드시 나를 찾아 달라. 그러면 하루가 또한 백년보다 나으리라.”
역암이 “간혹 한두 사람이 알아도 다만 우리 두 사람의 기연과 요행을 부러워할 뿐이지, 무슨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이는 지나친 염려다.”
난공이 또 “청컨대 다시 와서 종일 환담하십시다.”
내가 “틀림없이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 때에 덕유(德裕)가 자주 와서 가기를 재촉하니, 주객(主客)이 모두 서서 다투어 붓을 잡고 황황히 빨리 썼다. 피차에 차마 떠나지 못하는 연연한 정경이었다.
난공이 “제가 한 책이 있어서 두 형과 세 분 대인에게 아무렇게나 적어 주시기를 청하려 하는데 되겠습니까?”
나는 “어렵지 않다.”고 답한 뒤 중문에 이르러 서로 읍하고 이별하였다. 동네 어구에 나와 큰 길에 이르러 차를 불러 타고 관에 이르니 해가 이미 떨어졌다.
9일 편지를 써서 덕유에게 보냈다. 편지에,
“밤사이 두 분 다 안녕하시오. 어제 만남이 흡족하여서 수일간의 회상의 노고를 위로해 줍니다. 다만 돌아온 뒤에 고관(孤?)의 암암(??)한 속에 취침하니, 문득 두 형이 자리에 있어 담소하는 듯하여, 거연(遽然)히 놀래 아침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억지로 스스로 마음을 달래어 생각하기를 ‘우리와 저는 각각 7천 리 밖에 있어 서로 미치지 못하는 터인데 [風馬牛不相及] 아무리 생각한들 나에게 무엇이 상관이 있겠는가’ 하여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웃으며 득계(得計)라 했는데, 갑자기 어느 틈에 정마(情魔)가 전과 같이 다시 내습하여, 심부(心府)를 반거(盤據)하여 이른바 득계라는 것이 이미 흩어져 자취도 없어졌습니다. 생각건대 이 경지(境地)가 미친 것이 아니면 어리석은 것이겠지요? 두 형이 듣고 반드시 일면 불쌍히 여기고 일면 우습다 할 것입니다. 슬프도다!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마음에 있는 일을 이야기함이 진실로 인생의 즐거움인데, 지금 우리들이 만리에서 우연히 만나 심복을 풀어놓고 며칠을 같이 노니게 되니, 이미 기특한 일입니다. 정사(情私)가 속에 맺혀 이별하는 사이에 섭섭함을 마지못하니, 사람이란 만족을 몰라서 괴로운 것입니다. 인석(印石) 세 개를 아울러 드리오니 골라서 새겨주시오. 난공께서 만들 수 있으면 노고를 나눔이 좋겠습니다. 그 공졸(工拙)은 말할 것이 아니고, 돌아간 뒤에 수택(手澤)을 어루만지기를 고인을 보듯 하자는 것뿐입니다. 계속하여 다시 편지하기로 하고 더 베풀지 않습니다. 우리 풍속이 서화에 연호와 월일을 쓰지 않으니, 앞으로 보내주실 서화는 모두 비속(鄙俗)을 따름이 어떠합니까?”
덕유(德裕)가 돌아와 말하기를, “점(店)에 이르니 거마(車馬)가 문에 막혀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조금 길 북쪽에서 쉬면서 복인을 불러 서봉(書封)을 주니, 복인(僕人)이 품에 간직하고 갔다가 한참 뒤에 나와 답서를 주고, 전하(傳言)하기를, ‘손님이 많아서 불러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다만 역암의 답서가 있는데, 서에 이르기를,
“온 편지를 읽으니 글자마다 눈물이라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맺히게 합니다. 마침 손님 접대가 바빠서 자세히 비포(鄙抱)를 펴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려 하는 것을 오형(吾兄)이 모두 대언(代言)하였습니다. 대강 뜻을 펴고 바람에 다달아 암연(?然)할 뿐입니다.” 하였다.
10일 덕유(德裕)를 보내어 편지를 전했다. 편지에,
“철교(鐵橋)형의 말한 바 ‘소서운운(小序云云)’은 어제 너무 바빠서 그 말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추생(?生)의 옅은 소견으로 어찌 감히 망령되이 의론하리오? 다만 오형이 이미 벗으로 하였으니, 의심을 가지고 말하지 않으면 편녕하여 구차히 용납되려 함이니, 어찌 벗이라 하겠습니까. 하물며 서림 선생(西林先生)의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덕(德)을, 오형이 이미 받은 바가 있으니, 제가 어찌 감히 꺼려하여 스스로 소외하겠습니까? 그윽이 생각건대 주자집주(朱子集註)가 유독 용ㆍ학(庸學)과 논어 세 책에 공을 가장 들였고, 맹자주가 다음이요, 시경은 아마 다시 검토함을 겪지 않은 것 같으니 육의(六義)의 밝지 못함과 훈고(訓?)의 겹친 해석과 대지(大旨)의 견장(牽强)이 비견(鄙見)에도 이미 다소의 의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서(小序)의 구계(拘係)된 소견(所見)을 타파하고 글에 따라 이(理)에 순하여 활발하게 해석하였으니 맛없는 맛과 소리없는 소리가 진실로 음송(吟誦)하는 사이에 넘쳐흐르고 있으므로, 깊이 시인의 뜻을 얻고 전일의 미발(未發)한 바를 발(發)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 관저(關雎) 한 장으로서 말하면 혹 문왕(文王)의 시라 하고 혹 주공(周公)의 시라고 하는데, 다 일방적인 고집에 얽매인 것임은 물론입니다. 다만 연대가 이미 멀고 다른 좌험(左驗)이 없으면 마땅히 전의(傳疑)의 법을 씀이 옳겠는데 주자(朱子)가 일필로 구단(句斷)하여 반드시 궁인(宮人)의 작이라 하니 저도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다만 뜻에 있어 매우 순하고 문(文)에 있어서 걸림이 없으며 부유(婦孺)의 구기(口氣)가 모두 천기(天機)대로고 성덕의 두루 미침이 이에서 더욱 나타납니다. 허심하여 외우고 그 풍채를 음미해보면 진실로 그 범범(??)한 소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작자가 누구임은 그만두어도 좋습니다. 소서(小序)의 설에 있어서는 나도 대략 보았습니다. 이장에 있어 공자의 말을 취하여 여기저기 주워 부쳐 말한 것이 전연 문리를 이루지 못하니, 이는 주자의 변설(辨說)에 자세히 말했습니다. 대개 그것은 답습(蹈襲)하고 표절(剽竊)하여 억지로 입언(立言)한 것이니, 시험하여 그 말에 의하여 읽어보면 마치 나무 조각을 씹는 듯하여 전혀 여운(餘韻)이 없을 터이니, 스스로 속이고 남을 속임이 또한 너무 심합니다. 정풍(鄭風)이 홀(忽)을 풍자한 것이라는 설 같은 것은, 주자의 이른바, ‘가장 홀이 가련하다.’ 한 것이 실로 천고의 미담이 됩니다. 하물며, 홀의 혼인 사양함이 그 뜻이 심히 바른데, 만일 이로써 죄준다면 그 세도와 심술의 해가 됨이 어떠하겠습니까? 만일 집주(集註)로써 주자의 수필(手筆)이 아니고 문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주자의 때를 상거하기 이같이 멀지 않고 선배의 세(世)에 강명(講明)하기를 촛불 보듯 하였으니, 비록 이 말을 하는 자라도 어찌 그 주자의 친적(親蹟)이 됨을 알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온 세상이 높여 강약(疆弱)이 맞설 수 없으므로, 이에 빈말로 거짓 높이고, 무른 땅에 나무 심어, 겉으로 추어주고 속으로 억제하는 술(術)을 하니, 그 의리의 득실은 두고라도 바로 그 심술이 이미, 함께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일찍 중국 글을 보니, 양명이 주자 반대하기 좋아함을, 규염객(??客)이 당 태종(唐太宗)에게 하던 일에 비유하였기에, 나는 그 기발함을 탄복하여, 이는 편언(片言)으로 절옥(折獄)한 천고(千古)의 단안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세유(世儒)들과 같이 종전대로 어물어물 행회(倖會)를 인연하여 용(龍)을 붙잡고 봉(鳳)에 붙는 기회를 즈음하여 처(妻)를 봉(封)하고 아들을 음직시킬 생각을 한다면 아! 그 또한 비루하고 또 천한 것입니다. 규염객이 쾌등(?等)으로 더불어 벗하려 하지 아니한 것이 당연합니다. 비록 그러나 어찌 이윤(伊尹)과 같이 그 임금을 요순의 임금으로 만들고 그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들어 피차가 다 이루고, 백성이 복을 받게 함에 비할 수 있겠는가? 또 어찌 반드시 기고(旗鼓)를 바꾸고 따로 문호(門戶)를 세워 재앙이 생민에 미치게 하고 화가 후세에 흐르게 할 것이 무엇인가? 이같은 자는 도리어 종전대로 인연(因緣)하는 자만도 못합니다. 그들의 비루함은 다만 그 몸을 위한 것뿐입니다. 나는 해외(海外)의 묘소(渺小)한 인간으로서 처음 중국에 들어와 문득 미친 말을 발하여 시비를 망령되게 하니, 선배들이 많이 참람하다 하겠지만 다만 의리는 천하의 공공한 것이니, 사람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義)입니다. 행여 밝게 가르쳐 주시어 우몽(愚蒙)을 열게 해 주소서. 감히 스스로 자기의 소견을 옳다하거나 선입(先入)된 말을 교수(膠守)하지 않겠습니다. 마침 행상(行箱)을 뒤지니 유군 환덕(柳君煥德)이 떠날 때 준 그림부채 두 자루가 있는데, 하나는, 강 언덕에 두어 그루 버드나무가 있고 나무 아래에 한 사람이 건봉(?蓬)하고 거문고를 뜯는데, 제시(題詩)하기를,
“예악이 무너진 지 천년에 아직도 거문고를 논하니 / 樂崩千載尙論琴
봉황새 꼬리에 부질없이 태고적 마음을 감췄네 / 鳳尾空藏太古心
시험해 연잎 옷을 거두고 구비진 물 건너노니 / 試拂荷衣灣水渡
중원 땅엔 그래도 알아줄 이 있으리 / 中原應復有知音
또 하나는, 가을 국화 한 떨기를 그리고 시를 제하였는데,
“세상에 만약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 海內若有知心人
이른봄에 한 묶음 가지고 왔을 것을 / 早春携歸一把來
하고, 아래에 태일산인(太一山人)이라고 썼습니다. 드디어 이 부채와 함께 소서(小序)와 양명(陽明)을 논한 것을 편지로 써서 보냅니다. 올 때 한 친구가 이 그림 부채 두 자루를 선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연히 지음(知音)과 지심(知心)의 구가 있음을 보니 척척(戚戚)한 생각이 절로 납니다. 마치 그 사람이 선지(先知)의 술(術)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진실로 시는 예언[讖]한 모양이니 한맹(韓孟)과 단전(丹篆)의 꿈이 빈말이 아닌가 합니다. 비록 그 격운(格韻)은 족히 말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다행히 수어(數語)로써 그 일은 그 위에 기록하여 상자 속에 남겨두소서.
11일 서산에 갔다. 편지를 써서 덕유(德裕)에게 주었다.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밤사이 여러분 어떠하신지요? 어저께 복음(覆音)을 받고 고마웠습니다. 다만 비복(鄙僕)에게 훈계하기를 반드시 존의(尊儀)를 면대하고 안색을 자세히 살피고 오라 했는데, 양일에 모두 존객(尊客)이 방에 있어서 밖에서 되돌아왔으니, 더욱 사모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작일에 겨를을 얻어 한번 모이자는 가르침을 받잡고, 저는 어느 날이든지 좋으나 다만 형이 계신 곳에 방해 있을까가 두렵습니다. 오늘 바야흐로 서산 구경을 갑니다. 장차 오탑(五塔)의 여러 경치를 역방(歷訪)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편지를 비복에게 맡겨, 가서 안부를 탐문(探問)하게 하고 또 내일 일찍 나아가 뵐 뜻을 전하게 했습니다. 다만 듣자니 귀우(貴寓)에 손이 연이어 찾아온다 하니 걱정이 됩니다. 어저께 부사(副使)어른께 보낸 시 가운데 고향 소식을 받았다는 말을 보았는데, 이는 먼 손의 제일 기쁜 일입니다. 일면 축하하고 일면 부러워합니다. 집안이 다 편안하십니까? 제(弟)들은 압록강까지 가야 가서(家書)를 보게 되니 우울한 생각 짐작하실 것입니다. 어제 부채를 보내드린 것은 서로 증여(贈與)하는 뜻에서 한 것인데, 편지에 돌려보내 주신다 하니, 아마 제 말이 뜻을 바로 전하지 못한 듯합니다. 이만 그칩니다.”
저녁에 돌아오니 덕유(德裕)가 이미 답을 받아왔다. 겸하여 인석(印石)도 붙여왔다. 편지에,
“일찍 수교(手敎)를 받고 오늘 서산유람이 있음을 알고 부러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속진(俗塵)에 시달리고 행적에 구애되어 따라가 구경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내일 와 주신다 하니 고의에 감격됩니다. 다만 모름지기 열시에 곧 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마 제(弟)들은 오후 네 시 이후에는 남의 초대를 받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모여 이야기 할 시간이 많지 못하여 한이 됩니다. 이것으로 아뢰고 문안드립니다. 인장(印章)은 객지인지라 칼이 없어 둔(鈍)하게 고고보니 자못 졸렬하여 부끄럽습니다. 아마 쓸 만한 것이 못될 것 같습니다. 소중하면 고인의 수적(手蹟)이라는 것뿐일 것입니다. 이 며칠 용무가 바빠서 필묵(筆墨)의 빚은 열손으로도 갑기 어렵습니다. ‘요식도장[腰式印]’은 마침내 미처 만들지 못하였으니 양찰하여 주시오.”
12일 사행(使行)이 모두 서산(西山)에 가고 평중(平仲)도 따라갔다. 내가 조반먹고 곧 정양문(正陽門) 밖에 이르러 바로 건정동(乾淨洞)으로 갔다. 두 아이가 이미 문에서 기다렸다. 들어가 자리에 앉으니, 역암이
“어제 서산(西山) 구경이 즐거웠는가?”
내가 “좋기는 좋으나 모두 인교(人巧)이고 천기(天機)는 조금도 없었다. 또 형은 한 문제(漢文帝)가 노대(露臺)를 만들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역암이 무연(憮然)히 “이것은 노대에 비하여 그 몇 천만 배인지 모른다. 황상(皇上)이 절검(節儉)하지 않음이 아니나, 아래 있는 자가 잘 봉행하지 못하여 이에 이르렀다.”
내가 “중국의 묘당(廟堂)이 매우 성하여 무한한 재력을 허비하여, 라마승(喇?僧)으로 앉아 후한 녹을 먹는 자가 그 몇 천인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연해서 기한에 견디지 못하는 빈민이 저렇듯 많은데, 연로(沿路) 행궁(行宮)의 전각은 사치를 극했으며 또 희대(戱臺)는 무엇에 쓰는 것이기에 그렇게 호화롭게 해 놓았는지 상탄을 이기지 못했다. 더러는 좋은 곳이 없지 않았으니, 전조(前朝)의 제도가 아직도 있었다.”
역암이 곧 종이에다가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의 모양 하나를 그리고 또 홍모(紅帽)와 제수(蹄袖)의 모양 하나를 그려놓았다. 난공이 홍모를 가리키며 “이것이 가벼워 편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나는 인하여 사모상(紗帽像)에 철교 선생(鐵橋先生)의 진상(眞像)이라 제(題)하고, 또 홍모상(紅帽像)에다 반 학사(潘學土)의 진상이라고 제하니, 모두 크게 웃었다.
내가 “우리는 오래지 않아서 곧 떠나게 되는데 아무 말이나 숨김없이 해도 좋은가?” 하니, 모두 “좋다.” 하였다.
내가 “중국은 사방의 표준이 아닌가? 두 형은 우리들의 지기(知己)가 아닌가? 형의 위의(威儀)를 대하고 매양 탄식을 일으키는 일이 있다. 원(元)에 있어서 유종(儒宗)으로서 오직 허노재(許魯齋) 한 사람이 능히 세속에 따라 현회(顯晦)하지 아니하였는데, 애산(厓山)의 배도 따르지 않고 또 절동(浙東)의 행(行)도 하지 않고, 원 좨주 허형(元祭酒許衡)이 치사(致仕)했다고 크게 썼으니, 공자의 구이(九夷)에 살고자 한 말이, 참으로 뜻이 있어 한 말이라고 인정하지 않는가?” 하니, 양인이 서로 돌아보고 말이, 없었다. 나는 모두 지워 버리고 다시 한만(汗漫)한 잡담을 섞었다.
난공이 웃으며 “머리 깎으면 좋은 점이 많다. 상투짜는 번거로움과 머리 빗는 수고가 없으니, 상투 머리 하는 사람은 아마도 이 맛을 알지 못하기에 이런 말을 한다.”
내가 “‘감히 훼상(毁傷)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 보면 증자(曾子)가 세상일을 모르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양생(兩生)이 모두 웃었다.
난공이 “참말로 일을 모른다.” 하고 또 웃기를 마지않았다.
역암이 “절강(浙江)에 가소로운 말이 있다. 제두점(剃頭店)에 붙였는데, 쓰기를 성세(盛世)의 낙사(樂事)라 했다.”
내가 “강남 사람이니 이런 말투가 있지, 북방(北方)은 감히 이렇지 못하리라.”
내가 “망건(網巾)은 비록 전조의 제도이나 실은 좋지 않다.”
역암이 “무엇 때문인가?”
내가 “말의 꼬리를 머리 위에 이니 어찌 관과 신발이 거꾸로 된 것이 아닌가?”
역암이 “그러면 왜 버리지 않는가?”
내가 “옛부터 하던 것이기에 편히 여기고, 또 차마 명제(明制)를 잊지 못해서이다.”
내가 “또 부인의 조그만 신은 어느 대에 비롯했는가?”
난공이 “확실한 증거가 없다. 다만 전하여 이르기를, 남당(南唐)의 이소랑(李宵娘)부터 비롯했다고 한다.”
내가 “이것도 대단히 좋지 않다. 내가 일찍 이르기를, 망건(網巾)과 전족(纏足)은 중국 액운(厄運)의 증조라고 하였다.”
역암이 끄덕였다.
난공이 “내가 일찍이 배우의 망건(網巾)을 취하여 써보았는데, 매우 불편하였다.”
내가 희롱하며 “월인(越人)은 장보(章甫 은(殷)대의 예관 이름)가 쓸데없다.” 하니, 양생이 모두 크게 웃으면서 또한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난공이 강남에 한 친구가 일찍 장난삼아 배우의 모대(帽帶)를 하고 궤배하는 모양을 하니, 온 좌중이 모두 너털웃음이 터졌다.
내가 또 희롱하며 “흑선풍(黑旋風)이 정사 본다.” 했더니, 양생이 모두 절도(絶倒)하였다.
또 “10년 전에 관동(關東)의 한 지현(知縣)이 동국의 사신을 만나 내당(內堂)에 인도한 뒤, 모대(帽帶)를 빌어 입고 그 처(妻)와 마주보며 울었다고, 동국(東國)에서 지금까지 전하면서 슬퍼한다.”
역암이 머리를 드리우고 묵묵하였다.
난공이 탄식하며 “좋은 지현(知縣)이다.” 또 “진실로 그 마음을 가졌다면 어찌 관(官)을 버리고 가지 않았는가?”
내가 또 “이 또한 그다지 쉽지 않다. 우리들의 하지 못하는 일인데 어찌 감히 남을 책하리오.” 하니, 모두 추연하여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역암이 “귀국은 정숙과 음란이 어떠한가?”
내가 “사족(士族)은 개가하는 법이 없고 내외(內外)의 구분이 엄하여 정숙과 음란은 논할 것이 없다. 오직 관기(官妓)가 가장 많아 관아에서 전혀 이로써 손을 대접한다. 그러나 선비가 된 자가 범하면 의논 잘하는 선비들이 모두 비난한다.”
역암이 “전조에 이런 풍이 가장 성했는데, 강희조(康熙朝)에는 모두 버렸다. 홍광(弘光)이 남도(南渡)한 뒤에도 원(院)을 세웠으나 지금은 그 자취가 없어지고 거친 풀만 무성하다.”
내가 이르되 “반벽(半壁)에서 일시의 안일로 목숨 붙이기도 바쁜데 이 어찌 원을 세울 때인가? 강희 황제(康熙皇帝)는 우리 나라에서도 영걸한 임금이라 일컫는다. 이 한 일만도 역조(歷朝)의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난공이 “본조의 정령(政令)이 다 좋으나 오직 관기 없앤 것만은 너무 살풍경이라 하겠다.”
역암이 “난공은 호색하는 무리이므로 그 말이 이러하다.”
난공이 크게 웃었다.
내가 “농담은 생각에서 나온다 한다. 난형이 얼굴이 매우 아름답다. 자고로 얼굴이 아름다운 자는 호색하는 사람이 많다. 상생(傷生)하는 일이 한 가지가 아니지만 호색하는 차는 반드시 죽으니, 또한 두렵지 않겠는가?”
난공이 또 농담으로 “천명(天命)이 있는 자는 제멋대로 하는 것이다. 또 호색하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난공이 웃으며 “국풍(國風)의 호색은 성인도 취했거늘 무엇이 해되겠는가?”
내가 “장차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성인이 어찌 이로써 사람에게 권하겠는가?”
난공이 “군자의 좋은 짝도 즐거울 것이 없다는 말인가?”
내가 “역시 즐겁되 음하지 않아야 된다.”
난공이 “이는 모두 농담이니 행여 진담으로 알지 말라.”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또한 농과 참이 섞일까 두렵다.”
역암이 “본조의 입국(立國)은 매우 정당하다. 대적(大賊)을 멸하고 대의(大義)를 펴니, 중원에 주인이 없는 때를 탄 것이요, 천하를 탐하여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웃으며 “천하를 탐함이 아니라 한 것은 나는 감히 알지 못하겠으나, 입관(入關)한 이후엔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역암이 “강외(江外)에 ‘주는 떡을 왜 안 받겠는가?’ 하는 기담(奇談)이 있다.”
내가 “오삼계(吳三桂)가 준 것이지.” 하니, 모두 크게 웃었다.
난공이 “국초에 궁중에서 한 폭의 글씨를 얻었는데, ‘삼가 만리 산천을 받치나이다[謹具萬里山河]’라 쓰고, 아래에 ‘문팔고는 배정한다[文八股拜呈]’라고 적어 놓았는데, 나는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하니,
역암이 “전조에서 문(文)을 중히 하고 무(武)를 경하게 여겼기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는 뜻이다.” 하였다.
내가 “원래 중국인도 머리를 깎았는가?”
역암이 “그렇지 않다.”
내가 “전조 말년에 태감(太監)이 용사(用事)하고 유적(流賊)이 틈타 일어나고 매산(煤山)에서 사직에 순사(殉死)하였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 시킨 것이니 무어라 하겠는가? 이른바 대적을 멸하고 대의(大義)를 편 것은 본조의 대절박(大節拍)이라 하겠으나, 중국의 머리 깎고 옷을 변한 것은 그 망한 참상이 금ㆍ원 때보다 심하니, 중국을 위하여 슬픈 눈물을 이기지 못하겠다.” 하니, 두 사람이 모두 서로 돌아보며 말이 없었다.
내가 “우리 나라는 전조 명(明)에 대하여 재조(再造)의 은혜를 입었다. 형들은 일찍 들었는가?” 하니,
모두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내가 “만력(萬曆) 연간에 왜적이 크게 동국에 들어와 팔도가 미란(靡爛)했는데, 신종(神宗) 황제가 천하의 병을 움직이고 천하의 재를 허비하여 7년 뒤에 평정하였으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2백 년의 생민(生民)의 낙리(樂利)가 모두 신종 황제가 주신 것이다. 그리고 말년의 유적의 변은 이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할 수도 없으니, 우리 나라는 우리 때문에 명(明)이 망했다 하여 평생 슬피 사모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마지않는다.” 하니 두 사람이 모두 답이 없었다.
내가 “일전에 망론(妄論)한 것을 모름지기 조용히 써서 가르쳐달라.”
역암이 “저는 미련하고 공부도 바로 못하여 감히 망령되이 논하지 못하겠다. 형이 논한 양명과 주자의 설은 매우 좋았다.”
내가 “반드시 즉각 논하여 보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두 형의 글을 얻어 가지고 돌아간 뒤에 그것에 의하여 동방사우(東方師友)에게 들려주려고 함이다.”
역암이 “흉중(胸中)이 천루(淺陋)하여 설령 논의한다 해도 한갓 대방(大方)에게 웃음거리가 될 터이니 어찌하는가?”
내가 “제가 실로 아첨하는 말이 아니라 두 형의 재학(才學) 같은 이를, 동방에서 구하면 전에는 혹 있었으나 현재는 비할 만한 사람이 적다.”
역암(力闇)이 “바로 귀형의 스승 미호(渼湖) 같은 분으로 말하더라도 내가 극진히 심복(心服)하는 분인데 두렵지 않겠는가?”
내가 “논성서(論性書)가 어떠한가?”
역암이 “지론(持論)이 극히 좋으니 가지고 돌아가 간각(刊刻)하겠다.”
내가 “이것은 동유(東儒)의 큰 논란(論難)의 문제이다. 다만 초학에게는 실지로 그다지 긴요할 것이 없다.”
역암이 “어찌하여 긴요하지 않으랴? 다만 성명(性命)을 논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비록 초학이 아닌 난공 같은 사람이라도 또한 즐겨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우리 나라의 선배들이 명언(名言)이 있으니, 이르되 ‘지금 사람은 손은 쇄소(灑掃)의 절차를 알지도 못하고 입은 성명(性命)의 원리를 말한다.’고 한다. 난형의 뜻이 이에 나왔다면, 그 즐겨 듣지 않음이 참으로 존경할 만하겠다.”
난공이 보고 웃었다.
역암이 “조롱을 풀어주는 말이다.”
내가 말하되 “전번에 새겨 주신 도장은 매우 교묘하다. 돌아간 뒤에 두고두고 보며 생각하는 자료로 삼겠다. 그 담헌 두 자는 마멸(磨滅)할 수 없다. 마침 동행에 대략 조각법을 아는 자가 있어 바야흐로 그대로 새기고자 한다.”
역암이 “행기(行期)가 아직 머니 다시 가져와도 좋다.” 또 병과(餠果)가 나왔다.
내가 귤병 먹기를 좋아하니 난공이 주머니 속에서 계속 끄집어 내 놓는다. 매당(梅糖)이 있기에,
내가 “이것은 겨울에 꽃이 피는 매실(梅實)인가?”
역암이 “이것은 양매(楊梅)다. 그 빛이 붉고 특히 커서 직경이 한 치나 되고 5월 사이에 나온다.” 다 먹은 다음 국차(菊茶)가 나오는데 각각 한 잔씩이다. 꽃잎이 감국(甘菊)과 흡사하여 마시니 자못 국화 냄새가 난다.
역암이 “이 국화는 처음 항주성상(杭州城上)에서 나고 다른 곳에는 없는 것인데, 캐어 차를 만드니 자못 맛이 좋았다. 관에서 사채(私採)를 금하면서부터 민간에서는 얻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근년에는 다른 데에 이종 번식하여 곳곳에 있다.”
난공이 “《청음선생집(淸陰先生集)》이 몇 권인가?”
내가 “스무 권인데, 그 가운데 기휘되는 말이 많아서 감히 내놓지 못한다. 청음(淸陰)의 문장과 학술은 동방의 대유이다. 조정이 바뀐[革鼎] 뒤에는 피세(避世)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심양(瀋陽)에 구금되었으나 마침내 굴하지 않고 돌아왔다.”
난공이 “이는 전횡(田橫)이로군.”
내가 “그렇지 않다. 이는 명조(明朝)를 위하여 수절(守節)한 사람이다.”
난공이 ‘조정 바뀐다.’는 말을 가리켜, “명(明)인가 혹은 동(東)인가?”
내가 이르되 “본조의 혁정(革鼎)이다.”
난공이 비로소 깨닫고 곧 붓으로 전횡 두 자를 지워버렸다.
내가 또 “청음(淸陰)이 돌아와 영남의 학가산(鶴駕山)속에 숨었는데 청음과 같이 숨은 사람도 많았다. 또 세족사가(世族四家)가 태백산(太白山)에 숨으니 당시 사람들이 사호(四皓)라 하였다. 그 하나가 나의 종인(宗人)이다. 시가 있는데,
“대명 천하에 집 없는 손이요 / 大明天下無家客
태백산 속에 털이 있는 중이라 / 太白山中有髮僧
했다.” 역암이 보고나서 몸을 돌려 앉아 제삼 풍송(諷誦)하고 자못 슬퍼하는 빛이 있었다.
난공이 “《기아(箕雅)》란 책에 근세 사람의 시가 많은가?”
내가 이르되 “고금 사람이 모두 들었다. 보겠다면 뒤에 부쳐 드리겠다.”
난공이 “일이 많을 텐데.”
내가 “어렵지 않다.”
난공이 “각 사람 이름 밑에 그 성씨와 관작도 기록되었는가?”
내가 “대략 있다. 내가 이중 몇 편을 합하여 증손(增損)하고 자세히 씨족을 기록하여 부송하겠다.”
난공이 “매우 좋다.” 또 “중국의 책이 동방에 모두 있는가? 얻고자 하는 바가 무슨 책인가? 내가 구입하여 보내드리겠다.”
내가 “《여만촌문집(呂晩村文集)》과 홍광(弘光)의 남도(南渡)한 뒤의 사적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먼데 보낼 수 있는 물건이 못된다.”
난공이 급히 내 말을 지워버리고 그 위에 “이런 것들은 있지 않다.”
내가 “《독예통고속편(讀禮通攷續篇)》을 또한 얻고저한다.”
난공이 “이는 서건학(徐乾學)이 찬한 것인데, 모두 상례속편(喪禮續篇)을 기록했고, 여만촌(呂晩村)의 소선(所選)한 글은 보지 못했다. 있기는 하나 기집(己集)부터 또한 보지 못했다.”
내가 “시집(詩集)과 경의(經義)가 있다.”
난공이 “향산루(響山樓)에 장서(藏書)가 몇 천 권인가?”
내가 “칠팔백 권이 있다.”
난공이 “들으니 오형(吾兄)이 천문학에 통하다던데 그런가?”
내가 “누가 그런 망설(妄說)을 하던가?”
난공이 “집에 혼의(渾儀)가 있다 하니, 어찌 천문(天文)을 알지 못한다 하겠는가?”
내가 “삼신(三辰)의 전도(纏度)는 대략 그 대개를 알므로 과연 만든바 혼의(渾儀)가 있기는 하나, 이 어찌 족히 천문이라 하겠는가?”
난공이 “혼의는 스스로 만들었는가?”
내가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장수(匠手)를 가르쳐 만든 것이다.”
난공이 “말타기와 활쏘기도 정통한가?”
내가 웃으며 “활은 미늘[札]을 뚫지 못하고 몸은 안장[鞍]에 앉지 못하니 한낱 우유(迂儒)일 뿐이다.”
난공이 “들으니 형이 예술이 많다는데 대략 들려줄 수 있겠는가?”
내가 “율력(律曆)과 병기(兵機) 등 서(書)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실은 하나도 얻은 것이 없다. 대저 우리 동방 사람은 박람은 많으나 요(要)가 적어 가장 민망스럽다.”
난공(蘭公)이 “제는 종노릇하기도 적당치 못하다.”
역암이 “거유(鉅儒)이지 다만 순유(醇儒)만이 아니다. 따라가 학생이 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또 “이는 융중(隆中)의 기상이다.” 또 “이는 또한 유자의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이니 주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또 “이런 포부를 가지고 농부로 평생을 지내도 달갑겠는가?” 또 “다만 이런 책을 좋아만 하는 것은 족히 논할 것이 못되는데, 오형(吾兄) 같은 분은 참으로 그 체(體)가 있고 용(用)이 있는 학문을 하는 분으로 안다.”
내가 “무지하게 망발을 하여 이런 뜻밖의 말을 듣게 되니 부끄럽다. 여러 형이 참으로 나를 이런 사람으로 안다면 이는 사람을 너무 가볍게 허여하는 것이요, 이에 빙자해서 조롱하는 것이라면 사람 대함이 성실치 못한 것이다.”
난공이 “은거구지(隱居求志)하는 자는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형들이 나를 이처럼 잘못 볼 줄은 뜻하지 못했다. 제는 본래 외식(外飾)을 기뻐하지 않으므로 생각나는 대로 적어 놓은 것인데, 만일 형들이 참으로 제를 얻은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신다면, 제의 큰소리하여 사람을 속인 죄는 용납할 수 없다.”
난공이 “형이 숨기고 제에게 알려주지 아니하니 이야말로 사람을 속인 것이다.”
나는 부득이 농담으로 “형들이 녹록(碌碌)해서 족히 이것을 말할 것이 못되기 때문에 숨기게 된 것이다.” 하니, 모두 크게 웃고 말았다.
난공이 “내가 젊어서 방자하게 범남(汎覽)하여 병서도 대략 보았다. 《태백음경(太白陰經)》과 《망강남사(望江南詞)》와 《화룡비서(火龍秘書)》와 《육임병전(六壬兵詮)》 따위가 그것이다.”
내가 “육임은 모두 거짓말이다.”
난공이 “이 책은 황석공(黃石公)을 위탁(僞托)하여 지은 것이다.” 또 “육임의 글을 믿을 것이 못된다고 보는가?”
내가 “형은 믿는가?”
난공이 “집에 이런 유의 책이 두어 종류 있는데, 우연히 보니 잘 알 수 없다.” 하고, 한 책을 내보이는데 제(題)하기를 《묵연재 장서(墨緣齋藏書)》라 하였다. 그 속에 《육임제서(六壬諸書)》 십수 종이 있었다.
역암이 “기문둔갑(奇門遁甲)의 진부와 태을(太乙)이 어떠한 것인가?”
내가 “제는 이런 책들을 혹 본 것도 있고 혹 보지 못한 것도 있지만 모두 잠꼬대 같은 것으로 안다. 병서는 오직 손오(孫吳)가 가장 보암직하다.”
난공이 “손오는 모두 보았는데 다른 책처럼 기발함이 무궁하지 못하다.”
역암이 “《손자(孫子)》ㆍ《오자(吳子)》ㆍ《울요자(尉?子)》 등은 설령 병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 의리만도 아름다운 것인데, 이를 버리고 반드시 둔갑과 육임 등의 서를 좋아하니 호기의 지나치다.”
내가 “송조(宋朝)의 곽경(郭京)이 전감(前鑑)이 된다.”
역암이 “또한 왕법(王法)에도 금하는 바이다.”
내가 “재주가 높은 사람들은 범람(汎覽)함이 많은데 난형이 그렇다.”
난공이 “이 일은 실로 그 대략도 알지 못하고 우연히 열람한 것에 불과하다. 또 이 일은 반드시 스승이 있어야 정미를 얻을 수 있다. 지금 사람 가운데서 하루아침에 어찌 얻어 만나겠는가?”
내가 웃으며 “장각 선생(張角先生)에게 물으라.” 난공(蘭公)이 크게 웃었다.
내가 “우리 나라에 이를 숭상하는 자가 또한 많은데, 자못 기험(奇驗)이 있다 하나, 그 실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난공이 “중국에도 많으나 사람을 위하여 길흉을 점치는데 불과하고 다른 기이함이 없다.”
내가 “이에 정밀한 자는 그 스스로 기대함이 이에만 그치지 않는다.” 또 “무후(武侯) 팔진도(八陣圖)도 기둔(奇遁)에 돌아가고 마니, 또한 가소롭지 않은가?”
난공이 “그렇다. 실은 본래 기둔이다.”
내가 “그 설명 듣기를 청한다.”
난공이 “휴ㆍ생ㆍ상ㆍ두(休生傷杜)등 팔문(八門)은 곧 이 법이다. 신을 이루어 장수를 붓잡는 것이 미묘하여 무궁하다. 제가 잘 알지 못하여 말할 수 없을 뿐이다.”
역암이 “이미 알지 못한다 하고 어찌 또 미묘하다 말하는가?”
내가 “채서산(蔡西山)이 논정한 것을 보았는가?”
난공이 “서산(西山)의 책은 일찍 보았으나 이미 잊은 지 오래다.”
내가 “《율려신서(律呂新書)》의 주자 서문(朱子序文) 가운데, 팔진도(八陣圖)……가 있다 했다는데, 일찍 얻어 보지 못했다.”
난공이 “진수(陳壽)가 무후(武侯)는 병법을 모른다고 기롱하였으니, 팔진도가 일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지금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좋아함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진수가 어찌 족히 무후를 알겠는가? 팔진도는 제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지만.”
난공이 “풍운(風雲)과 조화(鳥火)의 그림은 대강 보았다. 후에 악악왕일(岳鄂王一)의 발(跋)이 있는데 극히 그 신묘(神妙)함을 말하나, 제가 보기에는 망연(茫然)하다. 자세히 생각건대, 무후는 실로 위무(魏武)의 일봉(一鋒)을 필적하지 못했으니, 바람을 빌었다는 설은 후인의 호사자(好事者)가 지어낸 것이오 실은 이런 일이 없었다. 마속(馬謖)의 패(敗)는 무후(武侯)에 말미암은 것이니, 삼대(三代) 이후 제일 인물이 될 수 없을 것 같은데, 사람들이 그렇다하니 따라서 그렇게 말들을 하는 것이다.”
역암이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는다. 유한은 오(吳)를 삼킬 기회를 놓쳤다[江流石不轉遺恨失呑吳] 하였으니, 그러면 두보(杜甫)의 지혜가 드디어 노형 아래 있다는 말인가.”
난공이 “두시(杜詩)를 어떻게 풀이하는가? 촉(蜀)의 실패가 오(吳)를 병탄하고자 함에 말미암았는데 국적(國賊)을 버리고 소분(小忿)을 생각하여 마침내 일을 그르쳤으니 어찌 유한이 아니겠는가?”
역암이 “증거할 바로서는, 앞의 글귀인 ‘공은 삼분국을 덮었고, 이름은 팔진도에서 이뤘다[功蓋三分國名成八陣圖].’라는 두 구에 있다. 말을 돌려 변명한 것은 가소롭다.”
난공이 “이 일은 버리고 다른 이야기하는 것이 어떠할가?”
역암이 “이것은 노형이 강변(强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난공이 “태일산인(太一山人)은 누구인가?”
내가 “성은 유(柳)이고 이름은 환덕(煥德)이니 어린 나이에 출신(出身)하여 자못 재화(才華)가 있었으나 문별(門閥)에 거리껴 하관(下官)에서 오래 머물었다.”
내가 “중국의 사대부(士大夫)는 국제(國制)의 금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다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는 사람이 있는가?”
난공이 “《가례》를 따르는 자가 적지 않다. 휘주(徽州) 같은 데서는 사람마다 모두 따른다.”
내가 “상가(喪家)에서 음악을 쓰는 것이 가장 나쁘다.”
난공이 “본래는 죽은 사람을 즐겁게 하려는 것인데 도리어 손님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 되고 말았다. 자식된 사람으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어버이를 박하게 한다고 생각하니, 한탄할 만하다.”
내가 “무후한 자가 양자(養子)두는 법이 있는가?”
“있다.”
“형제의 아들을 취하는가?”
“그렇다.”
“동성만을 취하는가?”
“그렇다.”
내가 “내외종간의 혼인이 아직까지 있는가?”
역암이 “이는 율에서 금하는 바로서 그 죄가 태(笞)에 해당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로서 그르다 하지 않는다. 《대청률(大淸律)》의 조목에 명백히 실려 있다.”
내가 “두 형의 집에도 있는가?”
“없다.”
내가 “중국소설(中國小說)을 보니 많이 이로써 난을 이루었다. 결국 이런 법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난공이 “설사 이런 법이 없다면 어찌 능히 금하여 그 음탕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개가함을 그르다 하지 않는가?”
난공이 “사대부 집에서는 개가하지 않으나 가난하고 자식 없으면 개가해도 마땅하다. 송유(宋儒)에 정자 같은 이도 집에 재실(再室)의 여가 있었다.”
내가 “예에 동거하는 계부(繼父)의 복을 입는 일이 있는가?”
난공이 “없다.”
내가 “가례도(家禮圖) 중에 있다.”
난공이 “지금 사람은 이 복을 입지 않는다.”
내가 “개가한 어머니의 복도 입는가?”
난공이 “심상(心喪) 3년을 한다.”
내가 “이는 중인(衆人)으로서 사람에게 바라는 뜻이다. 그 실은 일부종사가 어찌 부인의 의리가 아니겠는가?”
난공이 “가난하여 돌아갈 데가 없고, 그 사람이 능히 견인(堅忍)한 사람이 아니라면 개가하여도 무방하다. 왕왕 대가문에서 소년 과부된 자가 개가를 할 수 없어서, 그 일이 이보다 심한 적이 많았다.”
내가 “반드시 금하지도 말고 또 반드시 권하지도 말고 맡길 수밖에 없다.”
역암이 머리를 끄덕였다.
난공이 “대가(大家)에서 일찍 금하지 않는데도 저는 즐겨 개적(改適)하지 않으니 그 정이 너무도 답답하다. 실은 소원이 아닌데 억지로 머물러 있으라고 한 자가 심히 많다.” 또 “동방에도 미혼하고 수절하는 자가 있는가?”
내가 “납폐(納幣)하였으면 이미 성혼한 것이므로 감히 개가하지 못한다.”
난공이 “이것은 도리어 정의(情義)의 바른 것이 아니다. 이미 시집갔어도 가묘에 참배하지 못하고 죽으면, 모가(母家)에 귀장(歸葬)하나니, 아직 부도(婦道)를 이루지 못했다 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런데 시집도 안가고 남편이 죽었다고 수절한 자는, 옛사람이 사분(私奔)과 같이 보았다. 비록 그 사람이 실로 심상한 부녀의 비할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역시 현자(賢者)의 지나친 일이라 하겠다.”
역암이 “이는 예에 없는 예이다. 그러므로 정녀(貞女)는 정(旌)을 청하지 않는 것이 상례(常例)이니, 권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어서 관리가 그로써 위에 알리면 그대로 포상하니, 다리 살을 베는 효자와 같은 것이 된다.……”
난공이 “귀처(貴處)에 개가하지 않은 자를 정표(旌表)하는 법전도 있는가?”
내가 “우리 나라는 개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므로 정표하는 일이 없다.”
역암이 “결혼 아니하고 수절하는 자의 표상은, 율에 그 글이 실려 있지 않으니, 이는 그것이 권에 가까운 때문이다.”
난공이 “일찍이 과부 되어 수절하는 자가 실행(失行)의 폐가 없는가?”
내가 “비록 혹 있어도 천백 명 가운데 하나나 있을 것이다. 한 번 발각만 되면 반드시 죽고 그 부형과 근족(近族)이 모두 벼슬을 못하게 된다.”
난공이 “부형까지 해를 당함은 무슨 까닭인가?”
역암이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렇다.”
난공이 “너무 지나치다. 부형이 무슨 죄인가?”
내가 “역시 한쪽 가에 처해 있는 나라이고, 이런 일에도 한쪽에 치우침이 심하다. 그러나 역시 그대로 무방하다.”
역암이 “그런가 역시 귀국의 예교(禮敎)가 엄함을 알겠다.”
역암이 “귀처(貴處)의 어린애는 처음 무슨 글을 읽는가?”
내가 “처음 《천자문(千字文)》을 읽고 다음 《사략(史略)》을 읽고 다음 《소학(小學)》을 읽고 경서(經書)에 미친다.”
역암이 “《사략》은 무슨 책인가?”
내가 “증선지(曾先之)가 지은 《십구사략(十九史略)》이다.”
역암이 “여기서는 《감략(鑑略)》이라 하는데 역시 아동에게 주어 읽힌다.” 또 “《소학》이 가장 좋다.” 또 “《소학》의 전편이 비록 《대학(大學)》의 일을 말했지만, 전언(前言)ㆍ왕행(往行)을 많이 기록하였으므로 어릴 때에 가르치기에 알맞고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다. 또 선비는 지식을 첫째로 치는 것이니, 혹 영오(穎悟)한 아동이 있어 마침내 능히 중심으로 사모하여 본받으면 반드시 종신의 익(益)이 될 수도 있으니, 이것이 옛 선비가 유동(幼童)을 가르칠 때 일기(日記) 고사(故事)를 강한 소이이다.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은 어린이가 어떻게 해득하겠는가?”
내가 “우리 나라의 선배가 종신토록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일컬은 자가 있으니 그 뜻이 좋지 않음이 아니나, 아무래도 경서만 같지 못하다.”
역암이 “그렇다. 이미 《예기》를 드물게 읽으니 ‘닭이 처음 울거던 모두 양치하고 세수하고 머리 빗고 비녀 꽂고 머리 땋고 하는 따위 어린이 모범(幼儀)을 어디에서 보겠는가?”
내가 “어린이가 읽으면 좋지 않은 것이 아니다.”
역암이 머리를 끄덕이며 “우리들은 원래 강구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그렇다. 경서는 이보다 좀더 나아간 것이 있으니, 반드시 종신토록 이에 힘쓸 필요가 없다.”
난공이 “동방의 풍류(風流)와 가화(佳話)를 듣기 원한다.”
내가 “우리 나라 사람이 대체로 둔체(鈍滯)하여 풍류의 일은 전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좀 잘하고자 하는 이는 풍류란 두 자를 보면 물들까봐 겁을 낸다. 이러므로 전하는 것이 없다.”
난공이 “풍류재자(風流才子)도 바람직한 것이 못되는가?” 하고 크게 웃는다.
내가 “일찍 들으니 군자의 사귐은 의(義)가 정(情)을 이기고, 소인의 사귐은 정이 의를 이긴다 하는데, 제가 근일 이래로 이별의 정이 관심이 되어 자못 침식이 편치 않으니, 의가 정을 이기는 자는 아마도 이렇지가 않을 터인데, 아니면 이 역시 인정상 부득이한 것인가?”
역암이 “이 역시 정의 그 바른 것을 얻은 것이니, 크게 성현의 의리에 어긋남에 이르지 않는다. 제는 이제 마음으로 감복한 뒤에 마침내 오형을 신명(神明)같이 받들게 되니, 이것은 혹 너무 지나침을 면치 못하는 것일까?”
내가 “한 번 작별한 뒤에는 만사가 모두 족히 말할 것이 못되니, 다만 각각 서로 노력하여 피차의 지인(知人)의 명(明)을 상함이 없도록 함이 제일 큰 일이 된다.”
역암이 “한 되는 것은, 제가 한 번 오형의 서론(緖論)을 들은 뒤로부터 스스로 깨닫기를, 평생에 이런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장래 만나는 자가 비록 음붕(淫朋)과 일우(?友)에 이르지는 않겠지만, 이렇듯 고의(古義)로 돈면(敦勉)해 주는 사람을 구하여 자주 서로 편책(鞭策)하고자 하려면, 다시 얻지 못할 터이니, 이 때문에 상심하는 것이요, 이별의 괴롬 때문에 상심함은 아니다.”
내가 “제가 두 형에 대하여 그 재주를 사랑함이 아니라, 그 학을 취하고 그 학을 취함이 아니라 그 마음을 사모한다. 다만 언어가 통치 않고 만나고 이별함이 너무 바빠 능히 심오를 다 묻지 못하고, 제도 평일에 조그만 자득이 약간 있으나 다 말씀드릴 수 없으니, 이것이 지극한 한이 된다.”
역암이 “오형 같은 이를 얻어 조석으로 서로 같이 있게 된다면 장래에 절로 진경(進境)이 있게 될 것이다. 제는 천자(天資)는 원래 좋으나 다만 골망(汨亡)하는 때가 많아 정인(正人)의 강론하는 공이 없을까 두렵다. 난공도 마땅히 함께 힘써야 할 것이다.”
내가 “두 형은 날로 나아가고 달로 나아가니 어찌 다른 사람을 기다릴 것이 있으랴? 다만 유유(悠悠) 범범(泛泛)하게 내일만 기다리는 뜻이 가장 해독이 심하니, 제가 40이 되도록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소이가 바로 이것이다. 이로부터 돌아가서 마땅히 통절하게 스스로 책하여 오형의 기대를 등지지 않도록 해야 하겠다. 다만 오두(烏頭)의 힘이 오래지 않아 담담(淡淡)해질까 두렵다. 난형에게 전자에 재색(在色)의 계(戒)를 말한 것은 장난말이 아니니, 행여 범범히 듣지 말기 바란다. 비록 연소한 소치이나 다시 위중(威重) 두 자에 유의(留意)해야 할 것이다.”
역암이 “옛사람이 이르되, ‘호(號)하여 문인(文人)이라 하면 나머지는 족히 볼 것이 없다.’ 하였으니, 어찌 풍류(風流) 두 자를 지독하게 좋아해서 되겠는가? 이것은 난공의 큰 병이다.”
내가 “풍유 두 자는 두목(杜牧)의 무리 같은 사람이 이에 당하고, 족히 말할 것이 못된다. 비록 미원장(米元章)과 조송설(趙松雪) 같은 문묵(文墨)을 선비들은 우러러 보기를 산두(山斗)와 같이 하지만 식자로부터 보면 비루하고 또 비루할 뿐이다.”
역암이 “난공은 다만 미ㆍ조이공(米趙二公) 같은 유(類)를 바라 종신토록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지금 형의 논을 듣고 보니 참으로 몇 천 겁이나 어긋납니다.” 또 “요긴한 말은 번거로움에 있지 않으니 다만 한 걸음 한 걸음 실지를 밟는 것이 필요하다.” 또 “이런 등류의 학문은 척추뼈를 일으켜 세워야 바야흐로 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종일토록 유유홀홀(悠悠忽忽)하고 무기력하게 지내서는 ‘취생몽사(醉生夢死)’를 면치 못한다. 비근한 것으로 논하건대, 미ㆍ조(米趙)의 예(藝)에 정통하는 일은 하루아침이나 하루 저녁에 능히 성취할 바가 아니지만, 옮겨서 신심(身心)과 성명(性命)의 학에 이르른다면 또한 무슨 경지엔들 이르지 못할 것인가?”
내가 “그것도 또한 천교(天巧)를 앗은 뒤에야 능히 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도 역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역암형이 이번 시험에 합격 못하면 다시 올 생각이 없는가?”
역암이 “거짓말 아니한다. 만일 합격 못하면 단연코 오지 않겠다. 평생에 성(誠)자로써 이름지었고 또 별호도 불이(不二)라 했다.”
내가 “난형은 다시 오게 될 것인데, 몇 번으로 표준삼는가?”
난공이 “세 번이다.”
역암이 “부모의 명과 친우의 권을 거절하기도 절로 용이치 않다.”
내가 “제도 이 때문에 아직도 과거시험을 단념하지 못한다.”
내가 또 “여기 와서 들으니 재(財)로써 벼슬을 얻는 자는 많다는데 그런 자와 어깨를 견주기는 어렵다. 또 대부가 형(刑)에 미친 자가 있다 하니 선비가 된 자로서 헤아려야 할 일이다.”
난공이 “헤아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내가 “헤아린 뒤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난공이 자못 실의한 모양으로 멍하고 있었다.
내가 “우리 나라에는 악한 역적이 아니고는 형벌이 대부에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난공이 “이것은 비록 상신(相臣)이라도 면하지 못한다.”
내가 “선비는 가히 죽일지언정 욕되게 못한다.”
역암이 “본조에서 전조(前朝)의 정장(廷杖)의 제도를 버린 것은 가장 너그러운 법이 되는 것이다. 만일 전조 같으면, 과장의 관리가 도리어 정장(廷杖)을 당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으니, 이것은 나쁜 정치이다.”
내가 “들으니 중국에 재이(災異)가 많고 민심이 많이 동한다 하는데 실상은 어떠한가?”
역암이 “이런 말은 실지로 없다.”
난공이 “아울러 이런 일도 없다. 수년 전에 회교(回敎)도들이 항역(抗逆)하다가 3년 만에 토멸되었다.”
역암이 “지금은 태평이 극성할 때이라 설령 소추(小醜)가 있어 무료하게 가만히 발동한다 해도 모두 즉시로 소멸된다. 이른바 마조주(馬朝柱)라는 자가 있어 반역의 행적이 비록 드러났지만, 그러나 천하에 대색(大索)하기 10년에 얻지 못하더니, 지금 들으니 그 사람이 이미 죽었다 하니 천주(天誅)를 당한 것이다. 민심에 있어서는 보천(普天)의 아래가 감사하여 받들고 아울러 떠받지 아니함이 없다. 소동(騷動)의 설(說)은 강절(江浙)이 더욱 심하니, 자주 조세를 감해 주고 하사해 주는 국은을 입은 까닭이다.”
내가 “우리 나라도 고휼(顧恤)함을 입어 공헌(貢獻)하고 주정(奏請)하는 일이 일마다 편의하다.”
역암이 “본조에서 동방에 고휼한 것이 무슨 일인가?”
내가 “강희(康熙)로부터 대하기를 다른 번방과는 크게 달리하여 청함이 있으면 될수록 들어준다. 명조 때에는 태감(太監)이 용사(用事)하고 흠차(欽差)가 한 번 나오면 국내가 진동하였다. 비록 그러나 어찌 감히 이로써 부모의 나라를 원망하겠는가?”
난공이 “후하게 보내고 박하게 가져옴[厚往薄來]은 지금도 그러한가?”
내가 “공미(貢米)만 가지고 말하면 전에는 1만 포였는데 해마다 견감(?減)하여 지금은 수십여 포이다.”
역암이 “국초에는 동방이 입공(入貢)할 때 의관이 명제(明制)를 좇았어도 가부를 하지 않았으니 또한 총후(忠厚)함을 보겠다.”
난공이 “사신이 돌아갈 때 상사(賞賜)가 있는가?”
내가 “심히 후하니 단백(緞帛) 수백 필과 은자(銀子) 수천 냥이고 우마의 양식이나 초료(草料)같은 경비는 계산도 하지 않는다.”
난공이 “마공(馬貢)이 있는가?”
내가 “우리 나라 말이 몸뚱이가 적고 또 번식이 잘 되지 않아서 공납이 없었다. 공사가 매양 12월 27~28일에 입경하고 2월 초순 후에 회정(回程)하니 형들이 편지를 부치겠으면 모름지기 이 시기를 타서 사람에게 주의시켜 낭정(朗亭)에게 교부하도록 하라. 옛날 미호(渼湖) 종조 가재공(稼齋公)이 형을 따라 입경하여 관내인(關內人) 정홍(程洪)과 하룻밤에 정교(定交)하고 몇 해나 서신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예도 있으니 마땅히 피차의 방금(邦禁)이 있는 것 아니다.”
14일 난공이 부탁한 서첩(書帖)을 부송했다. 평중이 절구 한 수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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